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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희망의 불씨

 

 

혜숙은 첫돌이 마악 지난
막내 아들 중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점점 더 야위어 가자
막내가 세 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기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 져서
누어 있기조차 힘들어 했을 때...

혜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올 12 월까지는 살아야 될텐데..." 했다.

그러면 앞으로 6 개월이 남아 있다.
나는 "하필이면 왜 12 월까지야?"
하고 물었다.

"막내가 너무 어려서 엄마를 전혀 모를 것 같애...
중현이가 커서 엄마를 기억하게 되려면 두 돌은 돼야겠지?
나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돼!"

막내가 두 돌이 되려면
앞으로 9 개월이 더 있어야 한다.

혜숙은 9 개월이라는 세월을
더 살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9 개월이 아니라
6 개월 만이라도 더 살아서
막내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남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다.

혜숙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가늠하고 예측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이거다~~~!!!

혜숙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희망은
막내에게 있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절대적 의지가
바로 막내에게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
유일한 희망은
바로 첫돌지난 막내에게 있었고
그것은 막내에 대한 모성 본능이었다.

과학적으로... 임상적으로 증명된 절망 앞에서
한갖 공허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추상적 희망이었지만

혜숙은 본능적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죽음을 이겨 내야 하는 의지...
생명에 대한 집착이
모성 본능에 의해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로
그 명맥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 이 다 .

 

 

 

 

76. 누런 신문지처럼

 

 

요즘에는 2 주에 한 번씩으로
주사하는 방법이 달라졌는가본데

혜숙은 3 주 째 한 번
그리고는 1 주 후에 한 번
다시 3 주 째와 1 주 후...

이런 방식으로 6 개월 동안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하던지
혜숙은 주사를 맞고 나면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듯
토하고 또 토하고

토할 것이 없어 헛구역질하느라
혼절할 지경에 이르르곤 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 나가서
백구머리한 여승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몰골이 남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고
혐오감을 줄 정도로 변해 갔다.

가발을 장만해서
병원 가는 날이나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혜숙은 가발 쓰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동네 길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으면
혜숙은 타자마자 가발을 벗어 제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거울로 뒷자석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의아해 했다.

택시를 탈 때는 분명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일 꺼라고 여겼던 모양인데
백미러로 보니까 평상복 차림을 한
여승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파계한 여승이 가족과 함께 탔거나
불륜스런 관계 쯤으로 여겼을 법했다.

혜숙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말문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
내 머리가 좀 이상해서 그러시죠?
요즘 새로 나온 패션으로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가봐... 당신은 어때 여보...
당신도 이상해? 당신은 괜찮지?"

나는 혜숙의 속마음을 안다.
혜숙은 운전 기사에게
자기의 백구머리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농담을 던졌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신랑이고 우리는 부부'사이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혜숙은 가발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나중에는 머리 패션을 모자와 머플러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동안(童顔)형이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
더욱 어려 보였다.

반면에 나는 제 나이보다도
좀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보니
때때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신발 상점에 들러 운동화를 고르는데
점원 아가씨가 내게는 아저씨라 부르면서
혜숙에게는 얘~~~쟤~~~ 해 가며
이거 신어 보라는 둥 저게 좋겠다는 둥
반말을 해 대는데
아마 고등학생 쯤 되는
아빠 따라온 딸인 줄 안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혜숙은
그 후부터서든가...
시장에 가든가 택시를 타든가
음식점이나 커피�에 가든가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눈치만 보이면
여보... 당신... 소리를 자주 되뇌이곤 했다.

혜숙은 물만 간신히 조금 삼킬 뿐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 했다.

잣을 좀 먹는가 싶으면 잣을 사오고
새우를 먹는가 싶으면
시장에서 제일 고소하고 먹기 좋은 새우를 사오고 했지만
입에 대고 맛을 보는 정도지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소문로 옛 배재학당 입구에 보양죽집이 있다.
근 30 년 야채죽과 전복죽, 버섯 인삼 새우 등등
각종 죽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한 때 그 집에 들러
하루에 한 종류 씩 각종 죽을 포장해서 사 왔다.

그 중에서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혜숙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변해 갔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내려가면
좀 힘들어 질꺼라 했다.

그리 되면 거의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혜숙은 체중이 닷새에 1.5 kg 씩 줄어 들었다.

퇴원할 당시 48 kg 이던 체중이
두 달만에 34 kg 으로 줄어 들었다.

항암제를 두 달 째 맞는 날
주치의가 우리를 불렀다.

"박혜숙 환자는 이제 항암제를 그만 맞는 것이 좋겠어요...
항암제를 맞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치료에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의학적 노력에 매달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막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우선 고단백질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저항력을 키워서 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현대의학에서도 이제 손을 놓아버리는구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지 않은가?

이제 한 주간이면 마치게 되는 방사선 치료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받아 주지조차 않는 신세로
방치되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혜숙은 더 이상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집에서 멍하니 숨만 쉬며 누어 있곤 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로구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어
내장을 감싸고 있는 뼈마디가 모두 드러나다시피 했다.

얼굴이며 피부는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회색 먼지에 싸인 채
처박혀 있는
빛바랜 신문지 색이다.

톡 건드리면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누렇고 바싹 마른 케케묵은 신문지처럼
그렇게
핏기가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하며
베개에 기대 앉아
겨우
숨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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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또 하나의 시련

 

 

한편으로 그 당시 우리 가정은
경제적 사정까지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 마악 출소하고 혜숙은 약국을 후배에게 맡겨 놓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데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까지 처분해야 할 처지였다.

혜숙은 나에게 재정적 부담을 안기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지
주저주저 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려고 했지만 나 또한 사정을 알기가 두려웠다.

나는 네 번을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내 또래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 형편이 그리 못한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지만 일찌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다 결혼하고서부터는 집을 장만하고 약국까지 운영했으니
다른 동료들보다 형편이 좀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적금을 들고 저축을 했더라면 또는 여유 자금을 만들어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는 데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70 년대 말부터 돈을 좀 모아 둘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받은 만만치 않던 수입 모두를
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써 왔다.

말하자면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의
재정 책임을 맡아 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축한 재산이나
저축한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갚아야 할 비용과 감당해야 할 빚들이 조금씩 늘어 났던 것이다.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감옥에 들어 가게 되면
지명 수배된 동료들이 혜숙을 찾아 온다.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신었던 양말이나 입었던 옷가지
속옷까지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도피 중인 동료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 뿐인가?
약국에는 언제나 다만 얼마라도 현금이 있을테니까
돈이 떨어지면 동료들이 혜숙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혜숙은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주곤 했다.
어느 날 혜숙이 심각한 사정을 내게 털어 놓는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집안 일을 잘 건사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해...
당신한테 지급된 월급과 상여금은
꼬박꼬박 수령해서 수배 중인 동료들한테 전달해 왔어...
쫓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국에 있던 돈도 좀 보탰고...
그러다보니까 빚도 좀 지게 됐어...

여보! 나 지금 돈 때문에 피가 말라 죽겠어...
이거 어떻게 좀 해결해 줘...
내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데 나 죽은 뒤에
나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볼 사람들한테서 받을
원망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당신은 어차피 아이들하고
건강한 몸으로 살아는 갈 테니까...
죽어 가는 내 소원 좀 들어 줘 여보!!!
지금 당장 약국을 정리하고 집을 처분해야 될 꺼야 여보!!!
흐흐흐흑......"

혜숙은 내게 울먹이며 매달리다시피 했다.
집을 처분해야 할 정도라니...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숙이 기록해 둔 메모지를 보았다.
갚아야 할 돈이 모두 합해서
그 때 돈으로 4 천 8 백 만 원 가량이다.

막상 약국을 처분하려다 보니까
그동안 약품을 제약회사에서 외상으로 들여와
현금을 받고 팔다 보니 받을 돈은 거의 없고
갚아야 할 외상매입금만 남아 있었다.

41 평 가량 되는 집과
약국 임대보증금 등등을 합해서 처분하면
대략 5 천 여 만 원 정도가 된다.

혜숙이 소원대로 당장에 빚을 몽땅 갚고 나면
한 2 백 여 만 원이 남게 된다.

우리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고
살만한 전세를 얻으려면
그 때 돈으로 1 천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8 백 만 원 가량의 빚은
계속 더 남아 있어야 한다.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나는 당장에 대답을 못 하고 주저주저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내게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닐테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혜숙은 보름마다 한 번씩
두 번을 더 울먹이며 내게 매달렸다.

이 때 혜숙의 상태는
점점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6 월 중순 경...
혜숙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이 가부간에 대답하고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했다.
나는 혜숙에게 말했다.

"우선 약국부터 정리하고 급한 불부터 꺼 나가자 여보...
집은 우리가 장만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으니 그냥 두고...
내가 집을 안 팔고도 당신 보는 앞에서
1 년 안에 빚을 다 갚을께...
그대신 당신... 앞으로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빚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남은 애절한 소원과 기대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각오하고 다짐했던 계획을
나는 당장에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에게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굴리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해 낼 자신이 있었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그리 시달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공부나 진학 문제에
그리 걱정하고 불안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택에 대한 문제를 걱정해 본 적도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 역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준비해 놓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크면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되는 거지...
하는 자신감이 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1 년 안에 해 낼 꺼야... 해 낼 수 있어...
그런데 우리 혜숙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하지?
그러면 혜숙이 한을 남기게 될 텐데...
혜숙은 올 12 월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했는데...
기간 좀 줄여 보자... 올 연말로... 6 개월로 줄여 보자...
그래 6 개월 안에 감당해 보자'

나는 우선 약국부터 정리했다.
약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분에게
관리 약사와 함께 전적으로 맡아 경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돈으로 우선 시급한 부채부터 갚아 나갔다.
내 사업 자금으로 43 만 원을 남겼다.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중으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강 사장은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쇄물을 도맡아 온 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문과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을
70 년대 초반부터 신변의 위험과 사업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인쇄해 준 유일한 분이다.

전북 남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님 슬하에
모태 신앙을 이어 받아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학교를 못 보내는 대신으로
글이라도 계속 접할 수 있는 인쇄소에 취직하도록 권면했다.

고향 남원에서 1 년 여 인쇄소에 다니던 그는 4 . 19 혁명이 일어 나자
어린 마음에 별천지 세상으로 바뀌겠다 싶었던지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서울을 향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낙엽이 짙게 물든 가을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 여행삼아 갔다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해서 눌러 앉았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또한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그는
입산한 지 1 년 여 만에 다시 세상으로 하산했다.

집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1963 년 다시 상경하여 인쇄소에 취직했다.

10 년 가까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72 년 박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가운데
계엄 치하에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애가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이 후로 그는 엄혹한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 단체를 찾아 다니며
그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온 기능과 직업을 통해서
필생의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줄곧 민주화 운동에 기여해 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70 ~ 80 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구류를 살고 했다.

1980 년 4 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다가
이듬해 5 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석방되기도 했다.

나는 첫 직장이던 1977 년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일 적부터
필요한 인쇄물을 강은기 사장에게 맡겨 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등
내가 주도하고 관계했던 모든 단체의 유인물 역시 강은기 사장이 도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등 기독교 단체의 인쇄물도 거의 강은기 사장이 맡았다.

그는 실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 단체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담당해 온 산 증인이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운동에 헌신해 온 민주 인사다.

그는 오랜동안 나와 같은 교회에 소속된 나의 선임 장로이기도 해서
나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본다.

그는 2002년 여름...
갑자기 췌장암으로 진단 받고 줄곧 병원에 입원해 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병실을 찾았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리고 2002년 11 월 9 일
그는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를 알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이들은
누구랄 것없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민주인사 故 강은기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그를 안장했다.

식순 가운데 그에게 바쳐 진 조시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 사람 웃으며 간다 ㅡ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유시춘 (소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우리들에게
사계가 늘 겨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손톱밑 반달같이
여리고 뽀오얀 새눈 돋는 봄날과
시퍼런 삼나무 녹음
그 그림자까지 시퍼렇던 뜨거운 날과

먼길 흘러
저 혼자 깊어져
마침내 바다같은 한강하구 박차고
내 마음의 철새들 떠나는 날에도

성명서와
플랑카드와 스티커와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민주가족' '민주통일'
'민' 字 항렬 인쇄물에 뒹굴던
우리 청춘은 늘 춥고 시렸다.

겨울 새벽 동쪽 하늘에 맨살로 걸린
그믐달이 친구였다.

날 선 분노 때문에
70 년대 80 년대 그때에는
을지로 뒷골목
세진인쇄 강은기 그 아저씨
늘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쇄물 몇 리어카 찍어 간
장영달 이해찬 수배되고 감옥 가면
그래서 쌓인 빚 늘어 가면
태백 정선 광부같이
한번
씨익 웃고 말았다.

밤새 찍어 준
인쇄물과 함께 그 아이들 사라지면
대신 경찰서에 끌려가
아마도 그리 말없이
씨익 웃다가

매타작에 죽을 고생하다가도
다시 만나면
그저 한번 씨익 웃었다

강은기
그 아저씨 가슴에는
비수같은 적개심이 없었다

생활이 운동이었다
운동이 곧 생활이었다
숭늉처럼 따뜻하고 융숭 깊었다

세진인쇄
빚진 사람들아
슬퍼마라 울지마라

그 아저씨 이제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가느니

강은기
그 아저씨
외상값 못 갚은 친구들아
'국민의 정부'에 상기 가슴시린 벗들아
애통해 마라

그 사람 스스로
바다에 버린 양식

이제 곧
밀밭되어 보리밭되어
온 누리에 푸르게 물결칠 것을

그 사람
저기 말 없이
씨익 웃으며 가느니

( 전문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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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민 화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1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2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3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4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 ...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1-6.jpg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1 부 / 2. 운전교육대에서


그 후 1970년 11월
나는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 여러 연대 가운데서도
가장 춥고 배고프고 고달프다던 30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는 가평 1군단 운전교육대에서 운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이가
한 내무반에서 4~5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교육생 구대에서 학생장을 맡게 되었다.

학생장은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을
자치적으로 지도하고 통솔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같은 동료들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다가 고참병인 구대장에게 바쳐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처음에 한 두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나는 양심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바치고 나니까
나에게는 매일 무서운 매질이 퍼부어졌다.

그때 어금니가 부서진 것을 나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평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휴식 시간 중 교육생 가운데 한 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부대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긴급 소집되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인근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탈영한 교육병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육지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실제로 구경하고
훈련소에서 전방 운전교육대로 이송될 때 비로소
직접 타 보았다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과 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드넓은 바다와 높게 치솟은 한라산 자락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섬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마음껏 숨쉬고 자랐을 그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제식 훈련을 하고
사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적응하기도 몹시 힘들었을 것이었다.

더우기 낯설고 물설은 전방에 갇혀서
협박당하고 기합받아가며 극심한 훈련을 견디어 내기란
그야말로 평온한 천국에서 생활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같은 심사였을 것이었다.

그의 탈영 사실을
나는 불과 15 분 여 만에 확인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CP라고 불리는 부대 본부로 가서
일어난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나는 그 당시 계급이 상병인 구대장에게
온갖 협박과 강요와 구타를 당하면서
그야말로 견디기 힘들만큼 주눅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고
이제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부대장에게 불려가게까지 되었으니
나는 이제 초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나보다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야전 잠바 양쪽 어깨와 군모에
대위 계급장을 단 하늘같은 부대장은
지휘봉을 든 채 열중 쉬엇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부대장은 내게 탈영 전후의 정황을 보고받고
몇몇 사실을 확인한 다음
탈영 사건 후 내가 어떻게 조치했는가를 물어 왔다.

그리고는 출신 학교 등 나의 신상에 대한 일까지
이것저것 심문하듯 물어 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부대장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하늘같은 부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든 신경세포가 바짝 긴장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신속하게 확인하고 보고해서 다행이네...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테니까 곧 잡을 수 있을꺼네..."

하면서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어안이벙벙했다.
중대장은 입술을 내 귀 가까이에 대고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도 3년 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네...
정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었지...
애로 사항이 있나? 있으면 뭐든 얘기해 보게"

그 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애로 사항은
학생장의 직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저......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구대장님을 통해서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알았네..."


탈영병은 부대장의 말대로 3 시간 여 만에 붙잡혔다.
붙잡힌 탈영병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마치 혼절해버린 사람 같았다.

부대장은 탈영병에게 어떠한 기합이나 구타도
일체 가하지 못하도록 모든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했다.

특별히 나에게도 탈영병이 소위 '고문관'으로
따돌림당하지 않도록
한 내무반에서 각별하게 보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결국 우리와 함께 운전교육 전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부대로 무사히 배속되었다.

나는 학생장의 직분을 다른 교육생에게 물려 줄 수 있었고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온 범칙과 비리도 어느정도 시정되었다.

교육 훈련을 마치고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수송부로 배치되어 복무 중이던

1971 년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에서 난생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나는
감시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야당 후보에 기표했다.


▲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연병장에서


▲ 50병기대대 수송부에서

도대체가 헌법을 자기 권력 야욕의 도구로 일삼는 박정희 후보를
자유로운 형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찍는 사람들의 심사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1 부 / 5. 봉원산거


처음의 만남이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인연이었던가?...

 

나는 유신 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를 하고
정국은 절망과 공포로 주눅들면서 쥐죽은 듯 고요하던 때에
함석헌 선생님이라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치떨리는 심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계실 것만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퍽 자상하게 맞아 주셨다.
뜻밖에도 신촌 봉원동 산거에 조용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주셨다.

 

우선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찾았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신학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봉원산거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턱을 15 도 쯤 위로 치킨다.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긴다.

한 소리를 만나 귀속에 담고
명동(鳴動) 깊숙히 파묻히기도 하고
한 생각을 만나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지기도 한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적당한 헛기침 소리에 맞춰 자리를 가다듬는다.

 

간디 자서전 (Gandhi's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ht Truth)
을 펴서 차례지어 돌아 읽고 뜻을 푼다.

 

옛적부터 오랜 세월 이 땅의 서원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15 도 쯤 아래로 떨구고 있을 것이었고

 

스승은 표정을 삭이고 비스듬히 앉아 장죽대를 빨면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함 선생님의 말씀이
한 주일 동안에 생긴 일들과 어우러지고
간디의 삶과 이어져서 가이없이 펼쳐진다.

 

수줍은 미소와 겸양어린 표정으로
들릴듯 말듯 더듬으며 시작해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더듬던 '말씀'이 서둘러 지고 또렷해 진다.
안색이 변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손이 오르내리고 몸이 움직인다.

 

혈색이 벌겋게 물들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는 온 몸을 치흔들어 분노하며 외친다.
내키는 대로, 내키는 그대로를 '말씀'으로 쏟아 놓는다.

 

다시 수줍고 겸양어린 모습으로 되돌아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억 겹 올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섬세한 솜씨로 뽑아 내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어느새...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올마디를 좇아 겨를없이 헤맨다.
휘저이면서 이리저리 떠 돈다.

 

한참을 지나서야 동(東)으로
또 한참을 지나서야 (西)로 옛날로...
제 자리로...
염주처럼 꿰어진다.

 

이런 모양으로 한 해 남짓을 어울려 공부하다가
이듬해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 후 1975년에 다시 모임을 갖고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Bhagavadgita)를 공부하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모임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려 공부한 이들로는
남학생으로 강경헌(태학관 관장) 강용현(판사) 
김형기(경주 중앙교회 목사)
박경수(한국공항관리공단) 박재순(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부길만(동원대 교수) 신대균(사회운동)
이도성(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이원희(목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임유식(사업)
조성완(재미 목사) 허우성(경희대 교수) 등등과

 

여학생으로 강인선(성공회대 교수)

김은희(전 조선일보 문화부)  유영림(목사)
전경림(성악가)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참고 사진 : 1964년 봉원산거 퀘이커 모임집 광경




 

제 1 부 / 6. 1973년 가을



한편 나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학생회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각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있었지만
일반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 기관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짐에따라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고도의 자기 희생을 결단하지 않으면 진실을 외치기가 매우 힘든 시대였다.

 

학생 운동은 주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몇몇 대학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모임이
학생 운동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연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각 대학마다 전통과 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 학생 서클의 지도부들끼리
간헐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해 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서클에 비해 상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에 연합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조직된
YMCA와 YWCA, 그리고 KSCM이라는 기독교 학생 단체를 모두 통합하여

1968년 연맹체로 구성한 대표적 기독 학생 단체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학생회(SCA, SCM 등)의 연합 조직인 것이다.
 
KSCF는 서울 지구, 영남 지구, 호남 지구 등
전국을 3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인천, 충청도와 강원도를 포함하는
서울지구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3 개월여 만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임원 5명이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 4 명은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풍문으로만 나돌던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2시간 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경찰이 서울 문리대 교정에 난입하여
시위 학생 180 여 명을 강제 연행해서 그 중 20명을 구속하고
57 명을 즉심에 회부하여 구류 25 일에 처했다.

         ▲ 10. 2 서울문리대 학생 선언문

 

서울대 10.2 데모를 주동한 강영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등은
KSCF의 학사단 운동 출신 임원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대부분의 서울대 소속 KSCF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또는 지명 수배를 당했다.

 

유신 초기 공포와 절망으로 주눅든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2시위로 서울문리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 연행되는 학생들

 

서울대 10.2 데모 사건은
유신 계엄령 이후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대학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시발로해서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10월 16일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친동생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던 중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정 건물 앞에서

담당수사관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중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는 공무원과 교수 등

54명의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도 이 간첩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고조되고 있는 학생운동의 분위기를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가려는

박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연세대 기독학생회 이재웅(72학번, 정외과) 등과 함께 시위와 철야 농성을 이끌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11월 27일 연세대 학생시위의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학생회관 1층 로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밤샘 농성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당시에 이미 신촌의 명배우로 유명했던 명계남을 만나서

철야 농성에 사회를 맡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회관 로비에는 400 여 명의 학생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6시 경 초저녁에 시작된 농성의 열기 또한 식을 줄 몰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유려한 명계남의 사회는

지루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되었다.

새벽 5시까지 400 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나는 명계남에게 약간의 도피 자금을 쥐어 주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지 말고 잘 피해 있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명계남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 가두로 진출한 학생 시위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번지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유신정권은 모든 대학에 휴업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대학은 휴업과 함께 조기 방학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신체체 이후 처음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의 대학이 데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신문과 방송에서 전혀 사실대로 보도를 못 하자
언론사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고
기자협회에서는 사실 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12월 7일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10월 2일부터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고 학사처벌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지명수배 조치도 해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10월 12일과 1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정보 기관에 요시찰자로 분류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1973년 당시 서대문경찰서


 

1 부 / 7.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1974년 1월

 

1973년 12월 13일 김관석(NCC 총무), 김수환(추기경), 김홍일(전 신민당 당수),
백낙준(연세대 명예총장),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윤보선(전 대통령),
이병린(전 대한변협 회장), 이인(전 법 무장관),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이희승(전 서울대 문리대 학장), 한경직 (목사), 함석헌(민수협), 김재준(민수협), 천관우(민수협)
등이 모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하의 적절한 조처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분립체제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발송했다.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은 이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이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30인의 서명자 : 장준하(통일당 최고위원), 함석헌(종교인), 법정(불교인), 김동길(연 세대 교수), 김재준(전 한신대 학장),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석, 안병무(한신대 교수), 천관우(전『동아일보』주필), 김지하, 지학순, 박두진(시인),

문동환(한신대 교수), 김정준(한신대 학장), 김찬국(연세대 신학대학장), 문상희(연세대 교수),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

이병린, 계훈제(『씨을의 소리』편집인), 김홍일, 이인, 이상은(고려대 교수), 이호철(소설가), 이정규, 김윤수(이화여대 교수),
김숭경(의사), 홍남순


장준하 선생은 선언문 발표와 더불어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었음을 공포했다.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을 발표하는 장준하


12월 26일 밤, 국무총리 김종필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

장장 1시간 40분에 걸쳐 ‘특별연설’을 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선을 벗어난 행위라고 전제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나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 ...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KSCF에서는 광주에서 동계 전국 모임을 개최하고
박 정권의 독재와 독점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기독학생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처럼 대학이 방학으로 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상치않은 정국 분위기는 전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8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어섰고,

오랜 관습으로 자리잡아 온 신년 하례 인사 등을 통해서  

불과 10일 만인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 수가 3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5일에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구영은 유신체제를 ‘삼권귀일(三權歸一)체제’로 평가하며

재야 인사들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문인 및 지식인 61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다수 동포들이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문학인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 무장경찰에 둘러쌓여 "개헌만이 살 길이다" 고 외치는 신민당 의원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 년 1월 8일 박 정권은 유신 헌법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인 헌법 개정을 발의 제안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회의를 통해서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또는 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백기완 선생을 전격 구속하고
속전속결로 진행된 군법회의 재판을 통해서 징역 15 년과 12 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법회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그 사흘 후에는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함께 구국기도회를 가진 개신교 전도사 이해학 김진홍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전격 구속하고 역시 같은 절차로 징역 15 년과 12 년씩을 선고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대학이 휴업과 조기 방학으로 이어지면서
수업 과정이 부족함에 따라 임시 개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개강 첫 날 유신 반대 시위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김영선 이근후 김구상 등을 전격 구속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7 년에서 5 년을 선고했다.

 

그 닷새 후에는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같은 사정으로 개강하는 첫 날 유신 반대 집회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등
7 명을 전격 구속하고 각각 징역 7 년에서 3 년까지 선고했다.

 

이렇듯 유신 정권은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대통령 긴급조치를
민주인사와 종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동해서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백기완 선생과

연세대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 시위 사건은 내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구속되고 감옥 가는 일이 바로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 오고 있구나 하고 확신했다.

 

마음 한 켠에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벗어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잠을 못 이루고 날밤을 새운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어쩌다 새벽녘에 잠이 들더라도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소스라쳐 깨어 나기도 했다.

 

춥고 긴긴 밤을 지새우며 드넓은 오산 운암뜰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운 생각을 떨치느라 그야말로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결단을 내리느라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간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다시금 되새겨 본다.

 
 ◁ 1974 년 1 월 ▷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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