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그때 거기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전화가 온다. 정치영화, 혹은 정치적 영화들이 민감한 시기에 연이어 개봉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인기를 끌 무렵에도 그랬고. 최근엔 <남영동 1985>에 대해서 묻는다. 영화 개봉은 관객과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시기를 고르는 것이 최적이다. <남영동 1985>는 저예산 영화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보다도 영화의 실존적 주인공 김근태님이 지난해 인생 산책을 마감하셨기에 이제야 가능했을 것이란 상상도 간다.

  드라마 구성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고문현장에 카메라가 들어가 일지처럼 22일 동안 날짜를 매기며 숨막히는 상황 자체를 재현해낸다. 공간적 배경도 일관되게 단순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밀실, 취조용 작은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낡은 욕실 같은 공간이 전부이다. 등장인물도 단출하다. 밀실을 관리하는 소수 상주인물과 간혹 등장하는 상관 두 명, 그리고 ‘장의사’로 불리는 출장 나온 고문 기술자가 전부이다. 이곳에 잡혀 온 김종태(박원상)는 반국가사범임을 고백하는 가짜 진술서를 써내야만 풀려난다. 가짜 진술서를 요구하는 권력이 비밀리에 집행되는 공간과 시간이 스크린을 숨막히게 물들인다.

  고문과 공포 속에서 권력이 원하는 거짓말을 써냈기에 제대로 기억해낼 수조차 없는 어이없는 상황. 극도로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 또한 반복되는 고문이다. 물, 전기, 고춧가루, 칠성판…그리고 죽음과 고문 흔적의 발각 예방을 위한 안티푸라민과 청진기도 동원된다. 글을 쓰느라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도구들, 이 도구들을 사용하는 이 분야 기술의 달인 인간 이근안(이경영)은 휘파람도 분다. 조금만 들어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노랫말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존 포드의 목가적인 서부극 <황야의 결투>에서 흘러나오던 애수 어린 그 노래 <클레멘타인>. 그런데 끔찍한 짓을 하는 인물의 휘파람으로 이 노래가 들려오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권력이 호출하는 애국이란 명분으로, 직무수행을 충실히 하며 누리고자 하는 평안함을 누리려 부는 휘파람일까? 간혹 끼어드는 아일랜드 민요에서 온 노래 <Johny I hardly knew ye, 조니 난 당신을 거의 알지 못해요>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틈새를 만들며 귀를 간질인다.

충격, 분노…그리고 감동!

  참혹함의 극치에서 나오는 노래, 기막힌 상처와 고통을 통과하는 치유로서 예술의 힘일까? 이 대목에서 우아한 화면 속에 예측불허의 전복으로 종교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그을린 사랑>이 떠오른다. 감옥에서 성고문을 받는 여자, 그녀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노래하는 여자’로 불린다.

  밀실에 근무하는 이들에게도 일상은 힘겹다. 때론 라디오 프로야구 중계를 들으며 어느 팀이 이길 것인지 대화한다. 과도한 근무에 치여 연애할 여유조차 없는 청년은 여자 친구 문제로 괴로워한다. 심지어 김종태에게 상담을 받을 정도로 우스운 상황도 벌어진다. 직장이기에 참혹한 짓에 말려들었지만, 그런 직장으로부터 탈주하지 못하는 시대의 우울을 앓는 이들이 늘 존재할 것만 같아 웃어넘기기 힘들다. 최근 들통 난 민간인 사찰에서 고문은 없었겠지만, 남영동의 그림자가 느껴지기에 그런 것일까? 그때 그 시절을 여전히 앓고 있는 이들의 숨결이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노라면 몸과 맘 모두 저려온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다. 인류가 산업화로 파괴한 지구환경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의 제목처럼 영화란 아프고 불편한 진실을 응시하게 만드는 매체이다. 그것은 진실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 삶과 예술의 관계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영화의 존재 이유를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밀실에서 보여준다.

※ 팁: 일생일대 악역을 맡은 이경영의 연기력이 불편한 볼거리를 넘어 만개한다. 온몸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박원상의 연기투혼도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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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 <2005 동국대 명강의상> 수상
· 저서 :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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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병민에게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그 해는 하늘에 있지만, 병준이 마음 속에도 있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병준아, 뛰어놀다 보면 가끔 넘어지고, 넘어져 무르팍이 깨지기도 하지.
또 피가 나 울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신나고 재미있는 생활 속에 가끔 걸림돌이 나타나고 어떤 때는 방해꾼조차 쫓아와 괴롭히기도 하는 것을

병준이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학교생활,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 만나는 것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기쁨으로 너에게 다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긴장들도 왔을 것이다.
쉽고 재미있는 공부와 숙제도 있지만, 따분하고 몹시 귀찮은 것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란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 무르팍 깨져 피가 나듯이 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적도 있을 것이다.


넘어져 한바탕 울고나서는 또 동무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병준이는 놀지. 그렇단다.
놀다가 넘어져 다치는 것이 무서워 놀지 않는 것은 너희들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바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니.
그건 지는 것이란다.

병준아, 너는, 가슴에 태양을 안고 있는 너는 넘어지는 것을 상처입는 것을 훌륭하게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아버지는 믿는다.
있잖니, 너희들을 떠난 뒤 어떤 사람이 딴지를 걸어 아버지도 넘어졌단다.


심하게 다치기도 했었다.
외롭고 무서워 울기도 했다.
꾹꾹 눌러 속으로 울었단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났다.
엄마, 큰엄마, 큰아버지가 도와주고 엄마, 아버지 친구들이 어깨를 빌려줘 저 컴컴한 어두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병준이 그림 속의 태양을 보면서, 아버지도 그런 밝음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병민아, 네 생일을 축하한다.
뒤늦게야 축하하고, 너한테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언니들, 오빠들 하고 네 생일을 축하하면서 즐거워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병민이처럼 튼튼하고 마음이 고운 아이가 딸인 것이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럽다.
욕심장이로서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의견이 따로 있는 네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옷도 혼자 입고 그 선택도 네 스스로 하고, 또 엄마와 함께 집안 청소도 한다지.


병민아, 네 손을 잡고 놀이터에도 가소 약수터에도 가게 될 날을 아버지는 기다린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을 반겨주었고, 앞쪽 산 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꾹, 뻐꾹, 뻐어꾹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참 병민아, 너는 엄마보고 "재근아, 재근아" 그런다며.
엄마가 네 친구여서 이름을 부른다지.
엄마는 조금 난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 모양이더라.


병민아, 너는 배짱이 센 놈이로구나.
그래, 엄마, 아버지는 병민, 병준이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단다.
그런데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너 스스로 생활에 책임을 질 때 가능한 것이란다.

 

그건 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병민이가 더욱 애쓰고 엄마, 아버지가 돕도록 하자,
이 얘기는 어려워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하자꾸나.


잘 있어라


(1986년 6월 19일, 영등포구치소에서 아들 병준, 딸 병민에게 보낸 편지)

 

겸제(謙齊)를 생각하며
 

비오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비 가운데로 싸라기 우박이 가끔씩 뿌려지고, 이 3월 하순에 말이오.
겨울 떠나보내고 봄 기다리는 마음에 심술이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소.
착각은 그냥 자유일 뿐이지.
번갈아가며, 다투며 내리는 눈비가 익살스러워 차라리 마음이 들뜨는구려.


창틀 기대어 눈 쏟아지는 하늘 올려다보고, 희끗희끗 가려지는 앞산 건너다 보았지.
저 높은데서 거뭇거뭇하고 벌떼처럼 몰려 짓쳐 내려오는데, 점점 가까워지면 몸놀림 가뿐히 공간 넉넉하게 비워두고 하얗게 내렸다오.
한눈파는 사이 스르르 땅속으로 스며 하나 남기지 않고, 이 겨울 마지막 눈 전혀 쌓이지 않았어. 건너편 산골짜기에도.


지난 겨울 앞산 자주 눈 덮여 있었어.
가물가물한 두 겹 비닐 통해 쳐다봤지.
가끔 창 열고 바라봐도 '흑~' 찬바람 한입에 얼른 닫아 버렸었지.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삼삼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구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제(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어 가능했겠지만, 그것은 고뇌 끝의 결단이었어.
그렇더라도 상상 속 중국 산과 강 그리는 기법, 그 흉내 버리고, 펄펄 살아 뛰는 우리네 강산 선택한 건 모험이었어.
서러운 삶의 감정 스며있는 이 산하를.
차라리 반역이었을까, 사대 그늘아래 왕권질서에 대한.
위험하지 않았을까.
겸제는 얼마나 조롱당했을까, 경멸 또한.
눈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어두움들 어디에서 오는가.
허위의식 물든 관념에서, 감수성으로부터 올까, 누구였을까, 저주받은 바리새인들은.


중국적 봉건질서의 정치 문화적 표현인 주자학이 조선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크겠지.
헌데 일자 일획이 온통 진리였던 그것을 왜 한글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사람들 공맹의 길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글 쓰임대 한층 풍부해졌을 게고.
이젠 복종의 다른 표현된 충효 빈 껍데기만 남겨놓고서 가버린 허망함 아니었을지도.


너무나 심오하여 감히 번역할 능력 아무도 없고, 언문으론 진서 그걸 제대로 표현할 길 도무지 없고,
누군가 개거품 물고 주장한 사람 있었을 게야.
많았을지도 모르고.
당시 시대적 제약 있어 모두 학문할 수는 없는 거고, 어차피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딴데 있는 거지.
혈통에 의한 봉건적 신분질서 유지 너무 적나라하여 문화적 구획으로 덮어 씌워놀 필요 정말 있었겠지.
깊은 진리 터득한 사람 있었을 게고, 많지 않지만.
일부만 알거나 형식적으로 아는 체하여 양반 지배계층에서 탈락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별 상관없었을 것이지.
아는거야, 이런 것은.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 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 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것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가지려고, 한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냄새 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있는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했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후략>


(1986년 3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내가 살고 있는 감방에 창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깥마당으로 열려져 있지.
북동쪽을 향한 창문이어서 지난 추운 겨울 내내 햇빛과는 서로 엇비켜 서 있는 꼴이었소.
해는 떠서 아침을 먹을 녘까지만 창틀 옆 변소 담벼락을 비추다가 이내 그늘 속으로 내 방 창문을 묻어버리곤 했소.
해서 더욱 얼어 있었고 그 위를 회색빛 우울과 바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오.
용기를 내서 창문을 열었다가도 이내 닫아 버리곤 했다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창문은 나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소.
저 고대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향한 발돋움대이기도 하고,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울적함을 노래에 실어 날려보내기도 하고, 저 아랫배로부터 토해져 나오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쏟아내는 나의 창문이 되었다오.
지금 나에게는 꽤 중요한 것이 되었소.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작년 11월말 이후였다오.
그 전 두어 달 동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간섭해 오는 존재였다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조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 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츳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정도 비켜설 수 있게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요.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로 핥는 것이었다오.
그래도 나는 안심이 되지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이때 나는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했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했던 것이오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소.
상처를 확인해 나가는 완화된 형태의 적의만이 순간순간 번득이는 것이었소.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나에게 있었다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구원은 나타난 것이었소.
그것은 마루 밑바닥으로부터였소.
그곳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오.
애정이 넘쳐흐르는 코 먹은 소리였다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쥐들의 사랑이었소.

 

오. 쥐가, 쥐의 그 목소리가 나의 구원이었소.
그러면서도 한편 나의 이성은 주저주저 하였소.

쥐는 나에게 이런 것이었소.
쥐약 먹고 골목길에 나자빠져 시뻘개진 창자가 툭 튀어나온 채 길바닥에 내던져 있는 것이거나,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페스트처럼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였다오.
미키 마우스같은 영리함은 우리들의 감수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아마 누구나 이 점은 나와 비슷할 것이오.
그래도 이성은 살아서 이것은 뭐 이상하고 섬찍한 일인 것 같다고 나를 끊임없이 제동걸려고 했지만 제껴 버렸소.
내가 상식세계 그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그때 이성의 힘은 약합디다.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려 내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일 뿐이오.
사람의 사랑이 봉쇄되어 버렸던 나에게는 그나마 이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었소.
이렇게 막상 쓰다 보니까 뭔지 좀 어색해지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 때는 정말 사실이었소.
그리고 나의 희생에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오.
저희들끼리 나눈 쥐들의 그 사랑이 말이오.


그리고 참 인재근씨가 계속해서 넣어준 과일과 우유, 음료수, 이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소.
그 때 나는 별로 무엇을 먹고 싶거나 설사 어느 것을 먹었어도 소화해 낼 능력이 없었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이 물건들을 통해서 확인해 주는 그 손길이 눈물겨웠소.
거기에서 내가 아는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대기고 했고, 혹시 체온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어 자꾸 만져보기도 했다오.
모두 빼앗겨 버렸던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도 싶었던 것이오.
이것을 채워주었던 것이지.

인재근씨, 당신이 말이오.


어쩌다가 하루 걸러서 이틀이 되고, 사흘이 그냥 지나면 나는 불안해졌던 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오.


또 다음에.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인재근씨에게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쓴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나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오.
어제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20년이 되었구료.

 

그동안 아버지는 제사상 위의 사진에서, 사진틀속의 사진에서 나를 만났고, 평상시 생활에서는 그 무게가 점점 작아져 갔었지.
어렴풋한 추억 속으로 아버지는 떠밀려 간 것이겠지요.
그러나 언제쯤부터인지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팠던 상처들, 삶의 그늘에 대해서 눈을 떠가게 되었소.

 

어제는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날이었지.
그런데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때때로 흙먼지 날리고, 차가움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어.
이상스럽게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고 내 가슴 속에 황황히 바람이 일어나더군.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어.
움푹 패여 그늘진 어깨, 말라서 길어진 목 뒤 모습, 그리고 허벅지께부터 바람에 날려 휘감기던 바지 가랑이,

바지 가랑이의 허전함이 목을 메이게 했다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그런 분은 아니었어.
이렇다할 깊은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차라리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가슴을 가진 분이셨지.
이 때문에 나는 사실 아버지를 별로 존경한 적이 없었고, 어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를 멀리서 소문으로 얘기들으면서

실망하고 짜증부리기도 하였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따뜻한 품을 가지고 계셨어.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아버지의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아늑하고 유쾌해졌지. 이럴때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고.


조금씩 크면서 나는 아버지 품을 넘치기 시작했고, 생물, 과학 등을 배우면서

아버지 체온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은 체질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오.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 품을 나는 영영 떠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 떠나가신 것이지.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 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된 것일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3.1운동 때 아버지는 19살이셨다오.
읍내시장에는 못나가시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도의 숨은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투덜거리던 내 국민학생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구료.

 

유관순 누나같은 아버지가 아닌 것이 창피한 적도 있었지.
심약한 아버지를 가볍게도 생각하고. 


그러나 나 이제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오.
작은.... 그런 아버지. 그 삶을 이 철창 안에 들어 앉아서 말이요.

 

저들의 뻔뻔한 짓에 두 발로 버티면서, 부르르 떨면서 나는 우리 아버지를 되돌아 오시도록 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내가 다시 우리 아버지의 그 고뇌에 참여하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소.
혹시 내 삶을, 절망을, 아버지가 먼저 사셨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그리하여 남겨지고 이어지는 그 삶을, 그런 치욕과 중압을 오늘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불길하게 바람이 불고 뻘겋던 어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면서 목이 메어졌다오.
아버지처럼 두근거리는 작은 가슴을 가져 자꾸 겁을 먹으면서 말이요.
그러나 나 이제 작지만 끈질긴 가슴이 되는 것 같다오.
겁먹고 겁먹고서 다시 버티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요.

 

병준이는 아버지인 나를 보면서 멀지않아 이 두근거리는 내 가슴을 알게 되겠지.
두려워 밀리는 것에 실망도 하겠지.
하여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이 세상 깊은 곳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게 될 병준이, 병민이가 될 것이지.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1986년 1월.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유난히 올 겨울의 추위가 더욱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고, 무섭게 만드는구료.

속 의를 입을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매서운 추위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잘 모를 것이요.

어깨를 내리찍어 웅크리게 만드는 이 추위를 나도 60년대 중반 이후 한 20여 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뜻밖에 여기서 다시 부딪치게 되었소.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여기는 오는 곳이 아니라 가는 곳이 틀림없소.

잿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오.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 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오.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이제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밤 달그림자 진 건물 모퉁이에서 왔다갔다 서성대는 이곳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

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료.

그 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 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그러나 요사이 나는 행복한 것 같구료.

목요일의 따스함을 안고 주말을 보내고 일주일을 보낸다오.

반가운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들의 수군거림이 나를 여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오.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가 가히 짐작이 되어,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요. <후략>

 


-1986년 1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 씨에게 보낸 편지-

 

[자료 2] 1심 최후진술

 

 

민주화를 위한 결단

 

 

먼저 본인과 본인의 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치군부에게 당한 고문과 범죄행위에 대해 규탄, 항의한 국내의 민주인사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민주인사, 종교계인사, 양심수 가족들, 언론인들, 그리고 외국인과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격려로

본인은 남영동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인간으로 회생하여 복귀하게 됐습니다.

이분들의 격려와 항의로 정치군부의 음모의 그물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뜨거운 관심과 격려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민주화 실현을 위한 역군으로 다시 회생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본인에 대한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 하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헌법과 법률위반 및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담당하고 있는 책무를 사법부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며,

계속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다면 이는 고문자를 옹호하고 고문을 장려할 뿐 아니라

정치군부에 반대하고 민주화 실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대의를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시대를 10 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법원과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했습니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백 여 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입니다.

며칠 전 면회 장소에서 나이어린 학생을 만났기에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대학 1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상황에 우리는 매우 슬프고, 이것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법원과 법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정치군부와 법관의 정치적, 물적 독립성를 파괴하는 그 귀결점에 결국 나이어린 학생들이 감옥에 갇히면서도

정치군부에 반대해야 되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오늘 또다시 낳았던 것입니다.

 

나는 본 사건을 시대의 불행 중 하나라고 봅니다.

입장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 동안 이 공판에 참여하고 고충과 어려움을 겪어온 재판부, 변호인들, 검찰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서 우리가 같은 공감대를 갖고 통곡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이 공판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민주화실현을 위해 국민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데 기여하고 자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합니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갔었습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고 쓰리스타, 포스타 나아가서 원수로 칭송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습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근태 개인은 앞으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민주화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80년 5.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사회에 새로운 민주화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만 봐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은 인류의 위대한 각성의 시대입니다.

20세기의 수치라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에서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다양성과 합의와 토의를 통해 민주적 사회로 진행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70년대에 신흥공업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뻐기고 많은 경제발전 국가들에 의해서 칭송을 받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에서도

적과 동지, 폭력적 대응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던 군사정권으로서는, 이른바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발건과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졌고,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군사정권은 퇴진하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이른바 통치는 물러나고 정치의 사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 필리핀에서 지금 위대한 민주화의 승리의 나팔이 울리고 있습니다.

민주화 승리와 민중승리의 깃발이 올려졌습니다.

아키노 상원의원의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 뜨거운 피로써 차디찬 시신 위에서 그리고 필리핀 민중의 결단과 투쟁에 의해서

오늘 필리핀 민중의 승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참모총장 공관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과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장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료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기록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일 시 : 185. 12. 19(목) 오전 10시

장 소 :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재판장 : 서성 부장판사

변호인 : 홍성우, 김상철, 이돈명, 황인철, 장기욱, 조준희(이상 참석자), 신기하, 목요상

담당검사 : 김원치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등 사건 첫 공판이 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 심리로 열렸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 제한을 항의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인정심문이 끝난 후 변호인단의 장기욱 변호사는 "재판공개원칙은 절대로 필요하며 확신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고,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공개는 가족만 방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청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방청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20 여 명에 이르는 교도관들을 내보내고 차라리 일반인들의 방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김근태씨의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김원치 검사가 5분 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 친지, 민주단체인사,

민청련 회원 등 30 여 명은 법정 입구에서 출입문을 손으로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부기 공판에 앞서 방청객 수를 예정해 방청을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방청할 수 있도록

큰 법정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해서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5분간 휴정).

 

 

변호사 : 기소된 후 20 여 차례에 걸친 피고인 접견신청을 했으나 출정 등의 이유로 접견이 거부되어

첫 공판 10일 전인 12월 9일에야 첫 접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의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재판부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고인에 대해 출정이라는 이유로 접견이 금지된 것이 실제 검찰청으로 출정을 해서 그런지와

기소된 이후에도 출정한 것이 타당한지 먼저 충분한 사실의 조회가 있기를 요구합니다.

 

 

검 사 : 경찰조서의 20개 항의 조사사실 중 피고인의 진술거부로 인하여 9개항 만을 기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1개항을 조사하기 위해 기소 후에도 피고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피고인을 접견하기를 원했다며 출정과 겹치지 않도록 검사에게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 접견 허락을 검사에게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지금까지 그러한 전례가 과연 있었습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기소된 후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상례가 아닙니다.

 

 

기소 후 계속 피고인을 조사한 것은 기소된 사실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소 이후에 검찰조사를 목적으로 출정을 계속시킨 것은 공소권의 남용입니다.

공소의 제기가 수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차문제를 먼저 처리함으로써 이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재판장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피고인이 직접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피고인이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시오.

 

 

김근태 : 지금 검찰과 변호사 간에 있었던 공방에 대하여 본인이 자세하게 증명을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증명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당 재판부에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경위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그 다음, 9월 한달 동안 가해졌던 고문의 후유증이 현재 본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행이 불편하고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등이 아픕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달 동안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본인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주체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습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짓밟혀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이것이 당 재판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본인이 변호인을 만난 것이 재판 시작일에서 불과 열흘 전 밖에 안됩니다.

이것은 방어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가해졌던 용서할 수 없는 고문행위를 은폐하려는 기도였습니다.

 

 

9월 26일 기소가 된 후 10월 초순 내지는 중순 쯤 변호인이 접견을 요청할 시기에 검찰측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후3시30분 내지 5시에 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출정을 나갔을 때 검찰관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온 경우가 네 차례나 있었고,

또한 검찰청에 도착했을 때 검찰관이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과 당시의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보아 이것은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흔적,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검찰과 정치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했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은폐기도와 더불어 본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쉼)

담요 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짓뭉개졌습니다.

그 발뒤꿈치 상처가 딱지로 아물면서 지난 10월 말 내지 11월 중에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지를 본인은 당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왔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오전 4시경 이돈명 변호사, 목요상 변호사, 조승형 변호사 세 분이 접견을 오셨길래 하도 반가와서,

그리고 형사소송법에 공판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수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세 분에게 보여드리고

그것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교도관 세 명의 제지에 의해서 이것이 전달되지 못했고 예측했던대로 본인이 병사에 돌아가자마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의 지휘 아래 10 여 명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본인의 몸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탈취해갔습니다.

본인도 "이러면 증거인멸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지시키고 또한 "이러지 말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증거인멸뿐만 아니라 본인의 안전이 아직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고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이제 간략하게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검사가 제지하고자 이의신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청석에서 '놔 둬, 도둑놈들' 이라고 아우성이 터짐).

지난 9월 한달 동안 참혹한 고문행위에 대해서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기억을 되살리며 치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낍니다.

 

 

우선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항복'입니다.

항복을 받기 위해서 깨부수겠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국가보안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좀더 일찍 체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에게 자신을 포기할 계기를 주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번째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될 때면 언제나 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번째는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시키고 학습시키고 복습을 시켰습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은 준비되고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지친 듯 잠깐 중단함) 이러한 과정에서 고문자들이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로 폭력혁명주의자인 것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본인의 사상이 사회주의자다.

세 번째로 민청련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첫 깃발을 80년대 이후에 올렸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작용하는 선과 인물을 대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반군사독재운동에 있어서의 지휘자, 슈퍼맨이 될 것을 자백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예컨대 학생, 노동자, 현실정치인, 재야, 개신교, 가톨릭, 심지어 미국의 사업가 또는 현 정치권력 내부에서

누구와 민주화운동을 의논해서 해나가는지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슈퍼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더니 무조건 요구하는 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이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적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곳에서 그 사람들은 본인에게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날 각 5 시간 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 금요일 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네 장례 날이다"라는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검사가 이의제기하자 방청객에서 "조용히 해", "계속해"라고 외침)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증언을 하면, 이 고문자들은 고문을 가하면서, 예컨데 8일날에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란 자가

10시에 5층 15호실, 본인이 고문을 받았던 그곳 실내로 들어와서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리겠다,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델시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넣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는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해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X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로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리고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보니 '새로운 광주사태가 발생하거나 준비되고 있구나'하고 생각을 하며

본인은 여기에서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고문 담당자에게 말하자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굴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에 대한 고문은 진술거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냉담하게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

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본인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후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26일날, 포니 자동차를 타고 서부역을 지날 때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 처를 만났습니다.

 

 

대기실에서 짓뭉개진 본인의 발뒤꿈치를 제 처와 이을호 씨 부인 최정순 씨가 보았습니다.

그때 대기실 건너편 옥상에서는 인부 1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의 땀과 창조가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저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구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치소로 이송된 이후 현재까지도 협박적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실제적 진실 - 사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의 요구가

보장되고, 현재 양심수나 재소자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위의 사실이 충분히 조사되기를 바랍니다.

 

 

변호사 : 본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이 공소사실은 무효입니다.

따라서 공소의 적법여부, 고문 및 용공조작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딱지'를 강제 압수한 서대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 과장에게 증인심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 피고인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확인을 신청합니다.

 

 

검 사 : 사실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부 : 공소내용의 1항이라도 오늘 진행합시다.

 

 

김근태 : 심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방어권에 대한 기본적인 봉쇄와 방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한 재판은 다음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김상철) : 그동안 변호사 접견이 20여 차례나 거부되는 등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당한 상태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공소사실에 대해 한 마디의 이야기도 안 해본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공소내용에 대한 심문은 다음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재판부 : '고문흔적에 대한 확인'과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신청'을 구두로 접수합니다.

다음 재판일자는 86년1월9일 오전10시 118호 법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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