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기록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일 시 : 185. 12. 19(목) 오전 10시
장 소 :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재판장 : 서성 부장판사
변호인 : 홍성우, 김상철, 이돈명, 황인철, 장기욱, 조준희(이상 참석자), 신기하, 목요상
담당검사 : 김원치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등 사건 첫 공판이 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 심리로 열렸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 제한을 항의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인정심문이 끝난 후 변호인단의 장기욱 변호사는 "재판공개원칙은 절대로 필요하며 확신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고,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공개는 가족만 방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청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방청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20 여 명에 이르는 교도관들을 내보내고 차라리 일반인들의 방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김근태씨의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김원치 검사가 5분 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 친지, 민주단체인사,
민청련 회원 등 30 여 명은 법정 입구에서 출입문을 손으로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부기 공판에 앞서 방청객 수를 예정해 방청을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방청할 수 있도록
큰 법정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해서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5분간 휴정).
변호사 : 기소된 후 20 여 차례에 걸친 피고인 접견신청을 했으나 출정 등의 이유로 접견이 거부되어
첫 공판 10일 전인 12월 9일에야 첫 접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의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재판부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고인에 대해 출정이라는 이유로 접견이 금지된 것이 실제 검찰청으로 출정을 해서 그런지와
기소된 이후에도 출정한 것이 타당한지 먼저 충분한 사실의 조회가 있기를 요구합니다.
검 사 : 경찰조서의 20개 항의 조사사실 중 피고인의 진술거부로 인하여 9개항 만을 기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1개항을 조사하기 위해 기소 후에도 피고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피고인을 접견하기를 원했다며 출정과 겹치지 않도록 검사에게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 접견 허락을 검사에게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지금까지 그러한 전례가 과연 있었습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기소된 후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상례가 아닙니다.
기소 후 계속 피고인을 조사한 것은 기소된 사실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소 이후에 검찰조사를 목적으로 출정을 계속시킨 것은 공소권의 남용입니다.
공소의 제기가 수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차문제를 먼저 처리함으로써 이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재판장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피고인이 직접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피고인이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시오.
김근태 : 지금 검찰과 변호사 간에 있었던 공방에 대하여 본인이 자세하게 증명을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증명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당 재판부에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경위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그 다음, 9월 한달 동안 가해졌던 고문의 후유증이 현재 본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행이 불편하고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등이 아픕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달 동안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본인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주체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습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짓밟혀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이것이 당 재판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본인이 변호인을 만난 것이 재판 시작일에서 불과 열흘 전 밖에 안됩니다.
이것은 방어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가해졌던 용서할 수 없는 고문행위를 은폐하려는 기도였습니다.
9월 26일 기소가 된 후 10월 초순 내지는 중순 쯤 변호인이 접견을 요청할 시기에 검찰측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후3시30분 내지 5시에 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출정을 나갔을 때 검찰관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온 경우가 네 차례나 있었고,
또한 검찰청에 도착했을 때 검찰관이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과 당시의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보아 이것은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흔적,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검찰과 정치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했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은폐기도와 더불어 본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쉼)
담요 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짓뭉개졌습니다.
그 발뒤꿈치 상처가 딱지로 아물면서 지난 10월 말 내지 11월 중에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지를 본인은 당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왔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오전 4시경 이돈명 변호사, 목요상 변호사, 조승형 변호사 세 분이 접견을 오셨길래 하도 반가와서,
그리고 형사소송법에 공판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수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세 분에게 보여드리고
그것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교도관 세 명의 제지에 의해서 이것이 전달되지 못했고 예측했던대로 본인이 병사에 돌아가자마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의 지휘 아래 10 여 명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본인의 몸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탈취해갔습니다.
본인도 "이러면 증거인멸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지시키고 또한 "이러지 말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증거인멸뿐만 아니라 본인의 안전이 아직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고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이제 간략하게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검사가 제지하고자 이의신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청석에서 '놔 둬, 도둑놈들' 이라고 아우성이 터짐).
지난 9월 한달 동안 참혹한 고문행위에 대해서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기억을 되살리며 치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낍니다.
우선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항복'입니다.
항복을 받기 위해서 깨부수겠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국가보안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좀더 일찍 체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에게 자신을 포기할 계기를 주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번째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될 때면 언제나 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번째는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시키고 학습시키고 복습을 시켰습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은 준비되고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지친 듯 잠깐 중단함) 이러한 과정에서 고문자들이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로 폭력혁명주의자인 것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본인의 사상이 사회주의자다.
세 번째로 민청련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첫 깃발을 80년대 이후에 올렸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작용하는 선과 인물을 대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반군사독재운동에 있어서의 지휘자, 슈퍼맨이 될 것을 자백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예컨대 학생, 노동자, 현실정치인, 재야, 개신교, 가톨릭, 심지어 미국의 사업가 또는 현 정치권력 내부에서
누구와 민주화운동을 의논해서 해나가는지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슈퍼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더니 무조건 요구하는 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이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적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곳에서 그 사람들은 본인에게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날 각 5 시간 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 금요일 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네 장례 날이다"라는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검사가 이의제기하자 방청객에서 "조용히 해", "계속해"라고 외침)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증언을 하면, 이 고문자들은 고문을 가하면서, 예컨데 8일날에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란 자가
10시에 5층 15호실, 본인이 고문을 받았던 그곳 실내로 들어와서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리겠다,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
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델시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넣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는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해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X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로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리고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보니 '새로운 광주사태가 발생하거나 준비되고 있구나'하고 생각을 하며
본인은 여기에서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고문 담당자에게 말하자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굴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에 대한 고문은 진술거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냉담하게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
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본인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후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26일날, 포니 자동차를 타고 서부역을 지날 때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 처를 만났습니다.
대기실에서 짓뭉개진 본인의 발뒤꿈치를 제 처와 이을호 씨 부인 최정순 씨가 보았습니다.
그때 대기실 건너편 옥상에서는 인부 1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의 땀과 창조가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저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구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치소로 이송된 이후 현재까지도 협박적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실제적 진실 - 사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의 요구가
보장되고, 현재 양심수나 재소자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위의 사실이 충분히 조사되기를 바랍니다.
변호사 : 본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이 공소사실은 무효입니다.
따라서 공소의 적법여부, 고문 및 용공조작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딱지'를 강제 압수한 서대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 과장에게 증인심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 피고인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확인을 신청합니다.
검 사 : 사실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부 : 공소내용의 1항이라도 오늘 진행합시다.
김근태 : 심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방어권에 대한 기본적인 봉쇄와 방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한 재판은 다음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김상철) : 그동안 변호사 접견이 20여 차례나 거부되는 등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당한 상태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공소사실에 대해 한 마디의 이야기도 안 해본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공소내용에 대한 심문은 다음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재판부 : '고문흔적에 대한 확인'과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신청'을 구두로 접수합니다.
다음 재판일자는 86년1월9일 오전10시 118호 법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