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애와 아름다운 이야기
1980년 5월  이후  문승현 선배는 이 노래를 작곡했고 , 
그 해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노래 동아리 "메아리" 공연에서 최초로 불려졌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많은 대학 내 노래 동아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후 대학 노래동아리 출신의  사회인들을  모아 문승현 선배가  주도해 만들었던 
노래 모임 "새벽" 에서는  제가 이 노래를 주로 불렀었구요.
1989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간혹 어떤 이는 제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이 곡을 불렀다고 알고 계신 분도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제 노래는 2009년 '아름다운 이야기' 음반에  김의철 님의 기타연주와 함께  수록되기도 했지요.
채 못다한  마음의 응어리를 마치 영혼의 넋두리 하듯, 
살아남은 자 살풀이 하듯 노래로 풀어 내면서 추모의 마음 이어갑니다.

 

 



누가 알까 그대 소리없는 웃음의 뜻을

누가 알까 그대 흐트리는 만가지 꿈을

어찌 그 입으로 차마차마 말할 수 있나

가시나무숲에 불어가는 바람소리만

그대 이 시절에 피어나는 꽃이기 전에

숨 죽여 밤보다 짙은 어둠 적시던 눈물


큰 바람에 그대 소리치며 쓰러져 울고

다시 눈 떠 그대 부활하는 노랑민들레

살아 겨울 속에 눈물눈물 흘릴 일 많았고

죽어 잠 못드는 그대그대 불 타는 눈동자

그대 동터오는 산마루길 바삐 달려서

넋만 살아 다시 오시는가 노랑민들레

넋만 살아 다시 오시는가 노랑민들레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의 노랫말이다. 

구슬픈 곡조의 이 러시아 민요에는 한때 러시아 온 땅을 톺고 지나간 반란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애잔하고 굳센 선율은 라진의 무쇠 같은 의지를 잘 표현하여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시행되는 낙후한 봉건국가였다. 

농노들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며, 남는 시간에 소작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중삼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몰래 도망쳐서 카자크에 합류하였다. 

그런 와중에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간섭이 심해졌다. 

그러자 카자크들은 발끈하였고, 마침내 1667년에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카자크 무리는 스텐카 라진의 지도 아래 대상인과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많은 식량과 옷, 보석 등을 빼앗아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다.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린다.

 

1670년,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한 라진의 군대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그 소식에 힘을 얻은 러시아 농민들은 곳곳에서 스스로 봉기를 일으켰다. 

더불어 라진의 군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볼가 강 유역의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에 이어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반란군의 발목을 붙들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공주의 미모에 취한 스텐카 라진은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탐닉하게 된다. 

당연히 봉기의 칼끝은 무뎌졌다. 마침내 반란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라진은,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공주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차르 황제와 ‘맞장’을 뜨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하지만 1670년 10월, 이들은 심비르스크 근처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여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더불어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카자크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옛 동료들의 배신으로 1671년 4월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리고 1671년 6월 16일.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는 황제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손과 발과 목이 차례로 잘려 나갔다. 

한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던진 것을 두고, 오늘날의 ‘로맨스 중독자’들은 말들이 많다.


러시아 가수가 부른 곡






출가하여 범능스님이 되기 전 민중가수 혹은 민중가요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던 시절. 

1980년대 대표적 운동권 가요 중의 하나였던 <광주출전가>의 작곡자

본명 문성인, 예명 강성재 정세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이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은 밭엔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 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 속을 가 듯

정처 없이 걸어가네 걸어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울린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 걸어 봄 신명이

가슴에도 지폈네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도 보고 싶네 보고만 싶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천 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 올로 엉켜 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 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 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노래 






KBS2TV 1989 가요대상 - 1989년 12월(19891230)
한돌 - '터'

저 산맥은 말도 없이 5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왓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5천년을 흘렸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 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한라산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에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있느냐
살아있으면 한번쯤은 어흥하고 소리쳐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 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 않겠나
태극기에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 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불러라 불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날이 오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박혜정 작사, 송숙환 노래

- 1987년 10월 1회 정기공연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공연 / 김형민

1987년 10월 13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앞은 때아닌 장사진이 쳐졌다. 대개 젊은 대학생들이었던 장사진의 면면에는 9할의 설렘과 1할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는 몇 달 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불리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노래들이 선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대학가 술집에서나 동아리방에서야 목 터지게 부른 노래들이긴 했지만 그 노래들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같은 시내 한 복판에서 ‘공연’의 형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소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관중들은 팜플렛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일렁인다.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그루터기’ , 4.19로 죽어간 넋들을 위한 노래 ‘진달러, 밥 딜런의 클래식 ‘바람만이 아는 대답’ 김민기의 ‘친구’, 일본 제국주의자는 물론 그후 여러 집권자들을 성나게 했던 시에 노래를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리고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곡을 붙인 ‘녹두꽃’ 등등 제목만 보아도 “이 노래를 대놓고 부른단 말이지?” 라는 질문이 새어나올만한 노래들이 줄을 있고 있었는데다 피날레는 합창으로 장식되게 짜여져 있었다 한돌의 ‘터’, 그리고 요즘은 한나라당 연찬회에서도 부른다는 소문이 있는 ‘광야에서’ 그리고 87년 당시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어 꺽꺽거리는 사람이 많았던 노래 ‘그날이 오면’까지.

원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즉 노찾사는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만든 노래모임 새벽을 모태로 했다. 지하 아닌 지하에서 유통되는 노래를 생산하고, 현실과 떨어진 사랑 타령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노래와 진실의 소리의 작은 새암이었던 그들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드디어 지상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콘서트 한 번 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6월 항쟁 뒤끝이라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노래모임 새벽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기에도 찜찜했다. 그래서 당국이 봐도 무난하고 까탈 잡히지 않을만한 사람들로 공연 팀을 구성했다. 잠깐 ‘새벽’ 활동을 했었던 가수 김광석을 비롯하여 역시 새벽 출신이거나 노래운동을 했던 학교 선생님, 은행 직원 등이 합류했다. 단적인 예로 ‘노찾사’ 초대 대표로서 무대 인사를 했던 사람은 한국은행 대리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곡부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선 바쁜 의지로 호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한때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바로 거리에서 연행되어 머리 깎여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학교 안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강당 밖에서 대공계 형사가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기도 했었다.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는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노래의 작사자의 사연은 보다 특별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83학번 박혜정이 그였다.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음음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아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시인 김수영을 좋아하던 국문학도, 엄한 아버지 탓에 MT 한 번 가지 못했던 모범적인 여대생. 휴학을 해서라도 끔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도 86년은 어김없이 송곳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집회 도중 서울대 원예과 1학년 이동수가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아크로폴리스로 떨어져 내린다. 그 자리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평생 그 일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했거니와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 광경은 머리 속에서 절대로 떼어내지 못할 충격이었다. 한 학생은 도서관에 뛰어들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사람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나와서 싸우자 싸우지 않겠거든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그날 박혜정도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었고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의 발발이었다.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절망과 무기력,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그녀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녀의 시는 노래로 살아나 객석을 메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사연을 싣고 공연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원래 전태일 추모곡으로 만들어졌던 ‘그날이 오면’으로 공연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당연히 앵콜을 부르며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 등장한 것이 공연 중 ‘녹두꽃’으로 사람들을 홀렸던 김광석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 산하에’ 1절은 갑오농민 전쟁, 2절은 3.1운동 3절은 북만주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이 장중한 노래는 김광석의 미성에 실려 새처럼 가볍게 사람들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노래는 승리를 노래하지 않았다.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피에 물든 깃발’의 처참함이었고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힐 수 있는’ 막막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관중들도 노래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과거가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박혜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1987년 10월 13일 오늘 그들이 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펼쳐지는 노래 자락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쟁취한 자유였고, 또 바로 그들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언뜻 오늘을 둘러 보면 그날 노찾사가 부른 노래들은 흘러간 옛 노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삶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지고, 고단하고 성마른 삶을 비빌 언덕이 필요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입을 열 때, 그 노래들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우리 귓전을 때릴 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봄’이 1980년대에도 슬프게 열린 것처럼.

https://www.facebook.com/88sanha/posts/309896741681508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