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이 글을 연재하면서
채광석의 혼령이 나에게
숨가삐 지나치지 말고 좀 쉬어 가라며
자꾸만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지...
한동안 도무지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그래... 이 눔아~~~!!!
오랜만에 너랑나랑 되지 못한 말이라도
주섬주섬 훌훌 털면서 회포나 풀어 보자꾸나...

그는 태안군 안면도 양지말에서
안면 면장을 지내시던 아버님과 어머님 슬하
4 남 2 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안면도 창기초등과 안면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1 년 10 월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쿠데타 전초전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완전무장한 공수단 병력을 진주시켰고
학생들을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하면서 연행하여
제적시키거나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위수령이 발동되던 다음날
채광석은 안면도 고향집에서 체포되고
그 길로 강제 입영되어 강원도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에서 만기 제대하고 복학한 광석은
1975 년 4 월 10 일, 서울대 농과대학생 김상진이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 "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할복자살한 사건을 접하자마자 충격을 금치 못하고

5 월 22 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치루는 시위를 감행하는 등
소위 "오둘둘 사건"을 주동하여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무려 2 년 하고도 1 개월이 넘는 세월 옥고를 치루는 동안
그는 감옥에서 시(詩)작 활동에 열중하여 많은 옥중시를 남기고
훗날 결혼하게 되는 강정숙에게 쉴새없이 옥중 연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그 후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0 년 5 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계엄 쿠데타가 발동되자
채광석은 또 다시 체포되어 40 여 일 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2 년부터는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하고

계간 '창작과 비평'과 시 전문지 '시인'등에
문학평론과 시 등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1984 년에는 나의 권면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현 민족예술인총연합 전신)를 창립하고
나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초대 총무간사를 맡아
이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1985 년에는 나와 함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창립에 앞장서면서
나는 청년단체 대표위원을
광석은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87 년 7 월 12 일...
연보를 보니까 그 놈 생일이던 바로 다음 날에...
여성단체연합에서 주최하는 민요한마당 행사에 참여한 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향년 39 세...
7 월 14 일, 재야 민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민족시인 故 채광석 민주문화인葬"이 엄수되고
그의 유해는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 주기에 두 권, 2 주기에 세 권
길지 않은 이승의 세월에서 남긴 그의 전집이 완간되었고

그가 남긴 시 가운데
"기다림"과 "부활"은 비장한 곡으로 다듬어져
널리 불려지는 노랫말이 되었다.

10 주기 때 추모 문학의 밤 행사를...
13 주기를 맞이해서 마침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던
광산 구중서 교수의 글씨와
조각가 김운성의 제작으로

안면도 휴양림에서 각계 각층 300 여 분이 참석한 가운데
채광석의 시비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 후 대 여섯 차례 그의 시비를 들를 때마다
가족에게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거운 짐 잔뜩 지워 놓고 요절한 놈 주제에

뭔 복을 타고 났길래
아름다운 풍광하며 우거진 송림
뭇사람들이 모이고 지나는 길목에
저리 보기드믈도록 빼어난 거처를 장만했나...

난... 난...
도대체가 어림도 없을 성 싶어
부러움을 한아름 안고 돌아서곤 했다.

2000 년 7 월 12 일
"안면도의 푸른솔로 살아 오라!"는 제하로
'채광석 시비 제막식 및 문학의 밤'
자료집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을 옮겨 적는다.


기 다 림 ㅡ 채광석 시비 수록시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이름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리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 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전문 옮김)



채광석...
그는 진작부터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가?

그의 시 "기다림"에서처럼
그는 경제 성장이 어떻고
마이 카 시대가 저떻고
다가오는 팔팔 올림픽이 어떻고
또 저떻고 하던 적에

자유와 민주와 평등
그리고 통일의 새 날을 위해
고독한 밭에 나가 불씨를 묻었다.

흥청이고 망청이는 도시에서
외진 산골에서

피맺힌 역사 한맺힌 이들의 사연들을
가슴 속 깊이 되새기고
뜨거운 불씨를 지피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진리를 외치고
욕설을 퍼대며 불씨를 피우다가

자유의 여신이 활활 타오르는 그날
몸뚱이를 바치리라고 했다.

자기 목숨만으로 부족하면
대대손손 이어가며
불씨를 묻으리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광석의 몸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밧줄을 타며 ㅡ 채광석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에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 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땡볕 아우성치는 여름이나
혹한 내리꽂히는 겨울이나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산 사나이들 밧줄을 탄다

비바람이 밀치고
설한풍이 손끝 발끝을 흔들고
뇌성벽력이 몰아친다 해도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목숨이기에
단속반원들 우르르 달겨들어 패대기치더라도
리어카는 우리들 목숨의 줄이므로

비루먹이고 병들게 하고
꼬드김 손찌검
발길질 똥바가지질 몽둥이질 이간질 쳐대도
노동 삼권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민주화는 통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전문 옮김)


칠월의 거리에서 ㅡ 채광석 형에게
도종환(시인,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형이 새벽의 거리에서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십 년

나는 형이 묻힌 산엘 찾아가지 않았다
많은 날을 바람부는 거리에 서 있었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장 골목 목로주점 찾아가
후배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걱정하던 젖은 목소리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 떠올리며
급하게 소주잔을 뒤집었다

형이 떠나던 그해 여름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퍼붓는 빗발 피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짧은 생애 내내
이 시대의 머리 위로 퍼붓는 빗줄기 피하지 않고
형이 갔던 것처럼

나도 그 이후 십 년
피하지 않고 내 길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산 속이 아니라 이 거리 어딘가에
형이 함께 있으리라 믿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내동댕이 쳐진
노동자의 벗겨진 신발 옆에
형이 함께 있을 것 같았고

철거반원의 햄머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사람들 곁에
함께 악을 쓰다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감옥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철문을 발로 차며 거세게 항의하다 끌려가
먹방으로 돌아와 긴 긴 사랑의 편지를 쓰며
밤을 새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내기 괜찮냐 이렇게 물으며
철창 너머 서 있을 것 같았다

망촛대 꺾어 흔들며
산비탈에 혼자 누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터를 잃고 쫓겨난 지 오래인 나를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보곤 큰 소리로 이름 부르며
길 건너 달려올 것 같았다

자유와 밥과 사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을 타며
갈라진 땅의 모질고 큰 절망과
그 절망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것 같았다

칠월 어느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다 못한 이야기 너무 많아 무어라 무어라 소리지르며
길 저쪽으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등만 보이며 젖어젖어 빗속으로
몸짓만 보이며 하염없이 빗속으로

(전문 옮김)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김진경 (시인)


어린 시절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는
산자락을 두른 저녁 연기를 뚫고
들릴 듯 말 듯 들판의 끝까지 쫓아와서는

개울창에 숨어 노는 우리들의 멱살을 붙잡아
여지없이 저녁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이 육실헐 눔 어디 가서 지랄허고 자빠진겨"

부르는 소리 뒤에 군시렁거리는
그 기름진 어머니 욕의 힘일 것이다.

채광석,
그는 욕을 할 줄 안 마지막 사람이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술 취한 한밤 전화기에 대고 퍼붓는
그의 기름진 욕을 거름 삼아

그의 소리는 푸르게 뻗어
암담한 저녁에도 여지없이 멱살을 잡아
우리를 목숨의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군시렁군시렁 욕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감시의 눈길을 피해 가야 하는
그 멀고 추운 길을
우리는 낄낄거리며 두려움 없이 걷곤 했다.

걸어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그리운 집에 닿곤 했다.

아.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하나로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사람은 많아도
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기름진 사랑을 퍼부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목숨의 밥상에 차려졌던
민주며 평등이며 정의며 사랑이며 하는 것들도
살아 남기 위해 위로만 뻗는 낙엽송 숲의 나무들처럼
멀쑥멀쑥 키만 커졌다. 마네킹 냄새가 난다.
아, 이 숲엔 부르는 소리가 없다.

아, 이 숲엔 우리가 함께 앉을 밥상이 없다.
아, 이 숲엔 그 모든 것을 키우는 기름진 사랑이 없다.

술 마시고 돌아오는 밤
깜빡이 등이 깨어지고 안테나가 부러진 차 앞에서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버릇대로
너만 혼자 잘 먹고 살면 되냐!

군시렁군시렁 욕을 퍼부으며 그가 찾아와
안테나를 부러트리고 등을 깨트린 것 같다.

돌아보면 담 모퉁이를 돌아가는
쓸쓸한 한 사내의 등이 보인다.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삶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랑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늘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전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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