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나는 남은 돈 43 만 원을 들고
을지로 5 가 을지전화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 전화를 신청하려면
20 만 원 권 전화 채권값을 포함해서
43 만 원이 필요했다.

가지고 간 돈을 몽땅 지불하고
지정 받은 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와 채권 한 장
달랑 받아 쥐고 나오다가

지금은 사라진 지난 날의 풍경...
전화국 앞에서 서성대는 아주머니에게
20 만 원 권 채권을 건네 주고
3 만 원을 할인해 17 만 원을 받았다.

17 만 원...
이 돈을 창업 자금으로...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6 개월 안에
5 천 만 원 가량 되는 부채를
갚아야 한다.

갚아야지...
꼭 갚고 말꺼야...

혜숙이 살아 있어야 할
올 연말까지는
꼭 갚아야 해...

1987 년 6 월 20 일...
나는 필사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첫 번 째 업무를 마치고

중앙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을지로 2 가 속칭 인쇄 골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갔다.

을지로 3 가 쯤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전화기 한 대를 구입했다.

일제 때 지은 적산 가옥이
마치 혜숙의 빛 바래고 푸석푸석한 몰골처럼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서로 기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에 들어 섰다.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울린다.

잉크 냄새가
코 끝을 진하게 스친다.

적산 가옥 비좁은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오른다.

색칠도 하지 않은 베니어판을
얼기설기 칸막이로 막아 구분해 놓은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은기 사장이 씨익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형님! 나 집사람 병 고치고 빚도 좀 갚아야 하는데...
여기 책상 하나 빌려 주세요...
아무래도 형님께 우선 신세 좀 져야 되겠어요.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나와 혜숙이 살아온 모습
활동해 온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나는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군더더기도 뺀 채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강 사장은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 놓여 있는
책상과 공타 기계를 요리조리 옮기더니
책상 하나 들여 놓을 자리를 비워 준다.
공간에 맞도록 조그만 책상을 들여 놓고
전화기를 달았다.

아! 이제 나는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는 밑천을 가지고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공간에서
홀홀단신으로 황당무계한 구름을 잡듯
청운의 뜻을 펼치듯
고난의 대 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의자에 앉아 본다.
전화기를 만져 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짐하고 다짐하며 필사적인 각오로
우선 뛰쳐 나오기는 했지만
막막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차례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진해 나가야 하나...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무심코 전화기 다이얼을 누른다.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 온다.

어! 이게 아닌데...
얼떨결에 "...에미 좀 바꿔 주세요" 한다.

"여보! 난데...
지금부터 사업 시작하는 거야...
사무실도 얻고 책상이랑 전화기도 마련했어...
당신한테 첫 번째로 전화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할려구...
1 년만 기다려... 1 년 안에 다 해결할 테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소리를 해 댄다.
그렇지! 맞아! 그래야 돼!
이제 시작해야 돼!

본격적으로... 필사적으로...
해 내고 말아야 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 다이얼을 누른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전화를 다 주시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되는 건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감옥에서 건강은 괜찮았고?
언제 나왔지?... 혜숙 씨는 요즘 어때? 병원에서는 뭐래?
이거 참 큰일이로구먼... 우리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는데...
그럴 때는 이러저러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더라구...
그 분도 견디다 못 해 막판에는 이러저러했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저러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꺼라 그러더라구...
애들은 몇 이지?... 아이구 애들 생각해서라도
혜숙 씨가 빨리 건강해져야 할 텐데...
그나저나 우리 함 만나자구... 나한테도 시간 좀 내 줘...
점심도 좋지만 저녁에 만나서 회포도 풀어야지...
혜숙 씨 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첫 번째 통화에서
나는 막상 할 사업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한 채
서로 안부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두 번째도 그랬고 세 번째도 그랬다.
통화 내용도 비슷했다.

여기저기 전화 해 보았지만
계속 그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해 졌다.
안부 전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만큼
한가롭고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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