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희망으로 / 차 례

 

제 1 부


01. 만기병

02. 박 씨의 시련

03.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는 날
04. 옥바라지

05. 건강하십시요

06. 석방 환영식

07. 위암이요!!!
08. 어머니 - 나의 어머니

09. 전설적인 테너 이인범과 어머니

10. 가정을 지키시는 어머니

11. 혜숙을 품에 안고
12. 아내를 지킨 사람들

13. 수술을 거부당하고
14. 내가 지켜야

15. 식은 땀만 흐르고

16. 주치의와 대면
17. 사형만은 면하게

18.수술할 수 있어서 다행
19. 십중팔구는 죽는 병

20. 암환자의 4 단계 심리 변화
21. 15 퍼센트에 매달리고

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23. 들통난 감옥살이

24. 오랜만에 느끼는 숨결과 체온
25. 생일 선물

26. 잠 못 이룬 첫날 밤

27. 회진
28. 저 환자 암이야

29. 예쁜 내 삼겹살

30. 남들은 다 하는 도리
31. 손가락질 당하는 일

32. 눈물의 칠순 잔치

 


제 2 부


33. 당사자만 모르고

34. 당신 암이래

35.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36. 변해 가는 표정

37. 자주색 투피스

38. 퇴원 수속
39. 나 그냥 집에 갈래!

40. 확인 사살

41. 의사의 보람과 행복
42. 운명의 갈림길에서 담담한 모습

43.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
44. 풀무원식품 원혜영

45. 영인한의원
46. '접시꽃 당신'과 도종환

4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48. 박형규 목사

49. 위로가 지나쳐 강요가 되고
50. 협박당하고 끌려가고

51. 고향만큼 친근한 광주
52. 숙변과 마그밀

53. 잠자리

54. 운동요법
55. 운동 기구와 어머니

56. 요가에 대하여
57. 변화와 균형과 안정

58. 단전과 호흡

59. 명상과 정신 통일
60. 선정과 무심

61. 무심을 넘어 기쁨으로
62. 자연 환경을 이용한 치료와 풍욕

63. 수면 건강 실습
64. 냉온욕

65. 우리 민족의 식생활

66. 죽염과 생수
67. 우리 옷 문화와 민족 의학

68. 광주의 시인 문병란과 이 강
69. 발물 요법

70. 된장찜질과 마고약


제 3 부


71. 누어서 자는 게 소원

72. 미움과 증오와 저주
73. 사람 사람들 ㅡ 올곧은 사나이 설 훈

74. 욕쟁이 시인 채광석
75.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76. 내 복에 무슨 재혼?
77. 희망의 불씨

78. 누런 신문지처럼

79. 또 하나의 시련
80.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81.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82.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83.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84. 네 번째 명함

85. 첫 번째 주문

86. 월간 <말> 합본호
87.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88.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89. 마지막 예배

90. 죽으면 죽으리라
91. 가족 여행

92. 비선대 추억

93. YS 후보 진영에서
94.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95. 분에 겨운 호사
96. 문익환 목사님의 방문

97. 시련은 떠나지 않고
98. 다시 죽음의 문턱에서

99. 얼굴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100. 흉선 제거 수술

101. 모르는 게 약

102. 새 집으로
103. 다시 찾은 세민약국

104. "사랑이 뭐길래"
105. 암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106. 간증 ㅡ 하나님의 은총으로 / 박혜숙
107. 에 필 로 그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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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만 기 병


일반적으로 군에 입대해서 복무를 하다가
제대할 때에 이르르게 되면
근무가 제대로 안 되고 식욕이 떨어지면서
잠을 못 이루게 된다.

환자처럼 몸이 비쩍비쩍 말라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열외' 로 특별 대접을 받기도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소위 '만기병'이라고 한다.

국가의 명령이나 강제, 또는 절차에 따라
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곳으로
'감옥'이 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만기병'을 더 호되게 앓는다.

특히 오랜 세월을 복역하게 되는 장기수들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

아마도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되면 될수록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정도에 비례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형법 제 72조에 보면

"징역 또는 금고의 집행 중에 있는 자가
그 행장이 양호하여 개전의 정이 현저한 때에는
무기에 있어서는 10년, 유기에 있어서는
형기의 3분의 1을 경과한 후
행정처분으로 가석방을 할 수 있다"

고 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기 징역형에서 가장 긴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반성의 빛이 뚜렷한 가운데
성실하게 살면서 7 년 정도를 경과하게 되면
가석방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행형법 제51조에는

"가석방 구신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수형자의 연령, 죄명, 범죄의 동기, 형명, 형기,
수형 중의 행장, 석방 후의 생활과 보호 관계,
재범의 우려 유무, 기타 사항을 참작하여야 한다"

고 되어 있다.
이를테면 수형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박 씨가 있었다.

형편과 사정을 정확하게 검증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시골에서 논 농사 20 여 마지기
밭 농사 2,000 여 평을 짓는
중농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의 대를 이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23 세 때 결혼해서
딸, 아들 남매를 낳고
그야말로 세상을 무난하고 별탈없이
나름대로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단다.

읍내에 장이 서는 어느날
그는 소가 이끄는 마차에
쌀가마니를 싣고 나섰다.

쌀을 매매하고
할아버지 제사에 쓸 제물을 마련하고
아이들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흥정한 다음

학교 동창과 국밥집에 들러 요기를 채우면서
막걸리 1 되를 사발에 나누어 걸치기도 했다.

땅거미가 내려 앉을 즈음
그는 마차를 끌면서 시오리 되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신작로를 따라서 터덜터덜거리는 마차 위에 앉아
삼거리에 접어 들 즈음이었다.

느닷없이 장정 두 사람이 나타나서 마차를 세웠다.
그 중 한 사람은 곡괭이 자루를 들고 있었다.
나이를 보아하니 두어 살 쯤 아래인 듯 했다.

"어! 형씨... 잠깐 얘기 좀 합시다."

"뭔데 그러슈?"

"어! 잠깐 얘기 좀 하자니까!"

영문을 몰라 하는 어미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을 크게 치흔들고
둥그런 원을 그리면서 한바퀴 돌려 댔다.

그러자 그들은 흠칫 놀랐던 게 자존심을 상한 듯
곡괭이 자루로 어미소의 앞다리를
따~악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왜 이러는 거유?"

그는 마차에서 벌떡 내려서면서
곡괭이 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 들었다.

그는 곡괭이 자루에 얻어 맞아 가며
두 사람을 상대로 뒤엉켰다.

신작로에 엎어지는 순간 등짝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 비틀대고 일어 섰다.

두 사람은 마차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이것저것 뒤지더니
아이들 옷가지와 제물을 흩어트려 놓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이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툴툴 털고
천천히 다리를 끌면서 다가 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곡괭이 자루를 뺏어 들고
힘껏 내리쳤다.

곡괭이 자루를 빼앗기고 한 대 얻어 맞은 사람은
'퍽' 하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마차바퀴에 부딪쳤다.

나머지 한 사람과 서로 으르렁대며 대치하던 그는
상대방의 기가 한풀 꺾인 듯한 기세를 느끼자

"이러지 말구... 저 사람 데리구 그냥 가쉬우"

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경계를 풀고 어미소에 다가가
앞다리를 어루만져 주고는
천천히 마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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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박 씨의 시련


이튿날 새벽
형사들이 찾아 와 박 씨를 연행해 갔다.

그리고 그는 폭행치사죄로 구속되고
재판을 통해서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 때 일어난 일이니까
그가 만기 석방되려면 35 세가 된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가정 또한 얼마나 큰 시련을 당했을까.

변호사 측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요구할 때마다
돈을 끌어대야 했고

결국에는 논과 밭을 떼어 팔아
재산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초범이고 범죄의 동기와 죄명
연령과 석방 후의 생활 보호 관계 등 여건이 좋으니까
형기의 3 분의 1 정도 복역한 다음

가석방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변호사 측의 말을 한가닥 기대로 삼고
그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꿈에도 상상 못했던 별천지 지옥같은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동안
그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는 가정을 한없이 그리워했고
산과 밭, 논과 들이 있는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없다.

수형 생활에 따르는 규율을 어기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게 되면
2 년 반 후에는
그리운 처자식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하루하루를
마음 속 깊이 다짐하고 노력하면서 생활했다.

세월이 흐르고 2 년 반이 지난 무렵부터
그는 감형이나 가석방 이야기가 나돌 때마다
'만기병'을 앓아야 했다.

이번에는 꼭 나가서
아버님 회갑연을 차려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말로 꼭 나가서
귀여운 딸아이 손목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만 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께서 아들 걱정에
한숨과 눈물로 지새우시다가
몸져 앓아 누우셨다는데...

이번에도 못 나가면
생전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불행이 닥칠 것 같고
불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살고 살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그는 마침내 특별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4 년 여 동안 '만기병'을 호되게 앓던 끝에
7 년 형의 만기를 사흘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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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는 날



'감옥살이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되겠는지.....'

60 년대 말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87 년 4 월까지 18 년 여 동안
나는 연행과 징집 제적과 구속, 석방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군 복무와 네 번에 걸친 감옥살이로 6 년 6 개월을 사회와 격리된 채 지내 왔다.

그러고보니 한창 젊고 혈기 왕성한 시절을 3 분의 1 은 세상과 담을 쌓은채
'저 세상'에서 지낸 셈이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에 담아 두어야지.....'

온통 백색과 회색뿐인 교도소 담벽과 건물들 색깔하며 육중한 철판덩어리로 만들어서 열고 닫을 때마다
'탕!' '탕!' 귀가 멍멍하도록 요란한 굉음을 내갈기는 감방문

팔뚝이 드나들지 못 하도록 촘촘하게 박아 세운 철창...
사시사철 냉기가 어리는 마루바닥...
고요하다 못해 하수구 물 흐르는 소리마저 귀에 와 닿는 적막함...

오로지 그런 환경에서만 27세 숫총각에 들어 와서 환갑에 이르도록 36 년 째를 살고 있는...
그것도 모자라서 지구상에 인간이 생겨 난 이래로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의 생성과 번성과 소멸의 역사를 합하더라도
하나의 생명체를 그토록 강제해서 가두어 둔 적 없었을 무려 45 년이라는 세월 만에 석방된 김선명 선생을 비롯해서 

세계 최장기수 분들.....


▲ 무려 45년(1951~1996) 동안 수감되었다가 1996년 석방된 김선명 선생


그렇게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서 시신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된 분들.....
1 평 정도 되는 대전 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서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또 다른 세속적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뭔지 확실치는 않지만 불안했다.
특히 아내가 마지막 접견을 오지 않았던 것이 머리를 맴돌며 이상한 조짐으로 다가 왔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혹시 아내 혜숙의 건강이 안 좋은 건가???.....

내 아내 혜숙은 내가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할 때마다
옥바라지에 관한 한 뒤따를 자가 없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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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옥바라지


첫 번째로 감옥살이를 할 때다.
나는 74 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녀와 함께 구속되었다.

전국적으로 1 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속되었는데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그녀가 유일하게 구속된 것이다.

그 때는 세상이 하~~ 험악해서

구속된 학생들에게 접견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소위 긴급조치 9 호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 그녀는 복학해서 3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는 그때만해도 뜻을 같이하고 실천을 함께하는 선후배로, 학생운동의 동지로 만나던 사이였다.

내가 두 번째로 구속되자 그녀는 나서서 나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공 과목과 수업 시간이 가장 많고 힘들다던 약학을 전공하면서
그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접견했다.

그뿐인가? 나의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 집을 수시로 왔다갔다하고
변호사를 만나고 인권 단체 사무실을 찾아 다니며 나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는 일 등등으로
그녀는 그야말로 시간과 생활을 바쳤었다.

그렇게도 열성적이던 나에 대한 그녀의 옥바라지는
당시 서울 장안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년 여 만에 내가 감옥에서 석방되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는 결혼했다.
이듬해 79 년 딸아이를 낳고 9 개월 여 만에 나는 또다시 박 대통령 시해 사태 직후에 일어난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시위 사건으로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 해서 세 번째로 구속되었다.

그때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계엄사령부 비상군법회의로 교도소로 면회를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던 그녀가 어느날 접견을 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별의별 생각으로 뒤엉켰다.

'접견하러 오다가 쓰러진 건 아닌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됐을텐데...
아이를 출산한 건가???...
몸조리를 잘 해야 될텐데...
아마 한동안 면회 오기가 힘들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접견 소식이 왔다.

'...혜숙이 온 건가???..... 어머니시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나는 접견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혜숙의 밝은 표정이 눈에 화~~~악 들어 온다.

"어저께 마~니 기다렸지???......
어제도 올려구 그랬는데... 어머니가 하두 못 오게 말리셔서...
걱정 마~~니 했찌???... 그저께 자기 면회하고 약국에 있는데...
진통이 시작되는 거 같아서 약국 문 닫구 집으루 올라 갔어...
아들 났써... 저녁 8 시 경에... 살결이 허~어옇구 자~알 생겼써......"

'아!!! 그랬구나... 애를 낳는 날까지 접견을 왔었구나......'

"그런데 어떠케... 왜 왔어!!! 집에서 몸조리하구 있지!!!......"

"당신이 나 보구시포서 기다리구 있자나...
안 오면 걱정두 많을 꺼구... 첫 애 때보다 쉬웠어. 몸두 편하구......"

"그래두 찬바람 쐬믄 안 좋다는데...
이제 한동안 접견 오지 말구 집에서 몸조리나 잘 해....."

참으로 옥바라지하기를 이렇듯
온 몸과 영혼으로 하는 이가 있었을까???... 또 있을까???......

아내 혜숙은 그 흔한 산부인과 병원에도 가지 않고
세 아이를 모두 집에서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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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건강하십시요



 인신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는 미결 수용자의 신분으로 접견이 매일 허용된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징역형이 확정되면 기결수가 되어서 지방 교도소로 이감되고
 접견도 한 달에 한 두 번으로 제한된다.

 

 내 아내 혜숙은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구속될 때마다 미결수일 때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나를 접견했다.

 기결수일 때는 접견이 허용되는 만큼 단 한번도 빠진 적없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꼬박꼬박 찾아 다녔다.

 

 그런데 이상했다.
 

 청년 단체(민청련)를 조직 결성하고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 년 6 월의 형을 선고받은 나는 87 년 4 월 14 일로 만기를 채우고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나에게 한 달에 두 번 접견을 허용했다.

 혜숙은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견하는 날을 미리 계획해서
 새벽 5 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첫 고속버스 편으로 출발해서
 언제나 아침 9 시 경 첫 번으로 나를 접견 왔었다.

 

 그런데 3 월 말과 4 월 초 두 번의 접견 기회를 혜숙은 지나쳤다.

 이런 적이 없었다.


 '집안에 무슨 피치 못할 일이 생긴건 아닌가???...
 혹시 혜숙이 병으로 쓰러진 건 아닌가???......'

 

 불안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단전 호흡을 하고 명상에 잠기도록 애써 가면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해도 자꾸만 내 머리 속에서 맴돈다.

 

 동이 틀려면 아직 한 두 시간 쯤 더 남아 있을 새벽 4 시

 하루 중에 가장 어둠이 짙다는 시간에 깊은 적막을 깨고 철창문이 열렸다.

 

 마지 못해 하는 교도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나는 그야말로 '만기'도 없고 '만기병'도 앓아 본 적 없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여생을 칠흑같은 독방에서 지내야 하는지 기약할 수 없는
 세계 최장의 장기수 분들께 한분한분 작별 인사를 올렸다.


▲ 대전교도소


 "선생님!!!... 몸 건강하십시요...... 건강하세요 선생님......
 살아서 다시 뵙겠습니다...... 살아서 꼭 다시 만나요 선생님......"

 

 감옥 안에서도 겹겹으로 격리해서 감옥 속의 감옥으로 감시하고 관리하는 특별사동 문을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짙은 어둠과 적막을 부숴 버리듯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쳐댔다.

 

 "선생님들!!!... 몸조리 잘 하시고 건강하십시요!!!......"

 "건강하신 몸으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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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 석방 환영식


 출감하는 일에 익숙해 진 나는 죄수복을 벗고 오랜 만에 입어 볼 사회복을 준비해서
 미리 교도소 담장 안쪽 교무 행정실로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혜숙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교도소 담장 안쪽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에 혜숙이 담장 안으로 들어 오기는
 내가 출감하는 날 직계 가족 보호자의 신분으로 일종의 특별한 경우다.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애타게 기다렸던 표정으로 반갑게 웃고 있을 혜숙을 찾았다.

 그런 내 아내 혜숙의 모습이 으레 제일 먼저 눈에 뜨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혜숙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깐 자리를 비웠나?......

 

 "권사님! 고생 많으셨지요?...... 몸은 괜찮으시고?......"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밖에 한 40 여 분이 마중 와 계셔요......
 여기 옷을 챙겨 왔는데 갈아 입으시지요......"

 

 안부를 나누고 출소 절차를 밟고 하는데 정작 혜숙은 보이지 않는다.

 왜 안 보이는지 설명도 없다.

 

 내 아내 혜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마도 난리가 나고 천지가 개벽이 되더라도
 꼭 와 있을 자리에 혜숙이 없다......

 

 도대체 이럴 수가 없다.
 대신에 다니던 교회 조승혁 목사님과 장로님이 와 계시다.


▲ 대전교도소


 절차를 마치고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와 - !!!' 하는 함성과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 등 노래가 힘차게 터져 나온다.

 

 그리운 얼굴들이 짙은 어둠 사이로 하나 둘 눈에 띈다.


 그 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던 이 철
 그 후에 국회의원과 장관에 오른 김영환

 국무총리에 오른 이해찬
 김학민 강성구 강은기 등등


 아내 혜숙이 안 보이는 대신인가?

 그날따라 그 멀고 외진 곳까지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이 꽤 많이 마중을 나왔다.

 

 새벽 4 시부터 기다려야 하니까 인근 여관장에서 단체로 숙박하고
 서둘러서 나온 모습들이다.


 너무도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안부를 나누고 하다가
 자리를 정돈하고 식순을 갖춘 출감 환영식이 이어졌다.

 

 이 철과 이해찬 등 몇몇 동료들이 민주화에 대한 나의 신념과 헌신 고난에 찬 역경을 치하하는 환영사를 하고

 어둠과 적막, 억압을 갈라버리듯 다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합창을 했다.

 

 그리고는 교도소 담 안을 향해 '양심수를 석방하라~~~!!!... 민주 인사 석방하라~~~!!!'
 고 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그러자 때맞추듯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반갑고 감격스러운 해후였지만 꼭 와 있어야 할 사람이 빠져 버린 이상한 출감 환영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누구든 붙잡고 우리 혜숙이 어쩐 일이냐고
 무슨 곡절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악수하고 껴안고 그간의 안부를 나누는 데 예의가 아닌 듯  싶기도 해서
 답답한 마음 그냥 가슴에 안고 대전 시내로 들어 서서
 다함께 새벽 해장을 하며 회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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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위암이요 ! ! !


대전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승혁 목사님과 자리를 같이 했다.
오랜 만에 만나서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웬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은채 자꾸 끊어지고 막혔다.

무언가 주저주저 하시는 것 같고 얼버무리시는 것 같다.
점점 더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던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야 했다.

"저...... 목사님... 저희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우리집 사람한테 혹시......"

"으~~~흠...... 말미를 꺼내기가 좀 어려워서......
사실은 집사님이 며칠 전에 병원에 입원했어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을 요???...... 무슨......???"

"...... 위암 수술......"

"예엣???....."

순간 나는 목사님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숨이 콰~악 막혀 왔다.

핏줄기가 온통 머리를 향해서 짜르르 몰려드는 듯했다.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머리로 등줄기로 식은 땀이 솟아 흘렀다.

"일단... 수술은 잘 끝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문제예요......"

'???......암이라고???...... 무슨 암???...... 위암???......
그냥 힘들어서 몸이 좀 허약해 진 게 아니고 암???......
피곤이 겹쳐서 영양 주사 맞을 정도가 아니고 암???
감기 몸살도 아니고 암???
게다가 내가 없이... 나도 모르게 혜숙이 수술을 받았다고???
이걸 날더러 믿으라구???......
이걸 어떻게 믿어!!!......
아니야!!! 우리 혜숙이......말도 안 돼!!!'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얻어 맞은 듯 온통 뒤죽박죽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그리고 내가 꼭 알아야 할 일을......
내가 허락하고 동의해야 될 일을......
내가 없는데서... 내가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 한 결과를......
내가 왜 전해서 들어야 하는 건데???......'

나는 믿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건 무효였다.

'맞다!!!...... 맞아!!!...... 무효다 무효!!!......'

"원래 몸이 좀 약해 보이긴 해도...
우리 혜숙이 그럴 리 없을 텐데요???"

나는 별 일도 아닐 일을 가지고 목사님께서 고연히 남 속을 뒤집어 놓고 난리인가......
하듯 언짢은 말투로 내 뱉었다.

"받아 들이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요......
3 기에서 4 기 사이라던데 여하튼 마음을 굳게 가져야 돼요......
본인하고 식구들은 아직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자~알 대처하시구요....."

목사님은 내 아내 혜숙이 앞으로 3 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될 꺼라는 말씀을 완곡하게 흘리셨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계속 '무효!!!'라고
부정하면서 안간힘으로 떼를 쓰고 있었다.




 

08. 어머니 - 나의 어머니


감옥에 영치되어 있던 책과 소지품을 담은
군대용 더블백만한 보따리를 들고 집에 들어 섰다.

집안이 조용하다.
기척을 느끼셨는지 어머니께서 달려 나오신다.
오랜 만에 뵙는 모습이다.


▲ 김정열(金貞烈)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내가 네 번씩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 면회를 거의 오지 않던 분이시다.
재판받는 법정에도 나오시지 않았다.

내가 74 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다.
다른 동료 학생 어머니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자식에 대해
무슨 소식과 정보라도 귀동냥할 수 있을까... 해서 면회도 안 되는 서울구치소 앞에
매일매일 모여 웬종일 서성이다 돌아가곤 하셨다.

함께 구속자 가족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시기도 하고 종교 단체와 인권 단체를 찾아 다니면서
관심과 지원을 이루어 내기도 하셨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그런저런 모임에 한 번도 나타난 적 없고
연락도 소식도 전혀 없으셨다.

어쩌다 피치 못할 모임에는
어머니 대신으로 아버님이 참석하셨다.

그래서였던가?
그 당시 나에게는 어머니가 안 계시거나 친어머니가 아닐 꺼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부모님들 뿐만 아니라 내 동료 선후배들까지
나를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는 오산 시내 한복판에서 조산원을 운영하셨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보건소에서 오랜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어머니(김정열 金貞烈)는 1918년 5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김현찬(金鉉贊) 목사와 박철미(朴撤䓺) 사모 슬하에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같은 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함남노회 김현찬(金鉉贊) 목사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해삼위)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초대교회 해외선교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내셨다.



▲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海蔘威)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은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시면서도

만주 용정과 명동 훈춘 함흥 등지로 부흥 목회를 다니셨다.




▲ 1920. 09. 09 동아일보 기사.


1920년 동아일보 09.09일자 신문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된 해삼교회(海參敎會) 김현철 목사가
함흥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내도하여 복음강연회를 열고
수백 명의 청중에게 오묘한 진리를 강연하여 대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산회하였다더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휨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어
1922년에는 해삼교회(海參敎會)를 중심으로 교회당 34개,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개, 야학교 35개, 주일학교 15개, 등록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갖추게 되어
시베리아 노회를 설립할 정도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박용규 저, 한국기독교회사 2권 중에서)


1931년 부친 김현찬 목사가 함흥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어머니는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셨다.


함흥중앙교회는 북장로회 선교사인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가 
1896년 8월 1일에 2층 양옥 예배당을 지었다.


3․1 운동 때는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에 이어

캐나다 장로교의 맥레(D.M. McRae:馬具禮)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기구인 쇠갈퀴를 마구 휘둘러 대는 광경을 본 맥레 선교사는 경찰서장에게
“학생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느냐? 왜 쇠갈퀴를 휘두르냐?”
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외할아버지가 담임하셨던 함흥 중앙교회


▲ 1932년 (昭和 7년)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어머니 상장.


함흥은 기독교가 비교적 일찍 들어갔고, 대단히 왕성했던 곳이다.
한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YMCA운동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함흥이다.


함흥에는 기독교기관이 여럿 있었다.
영생학교(永生學校)와 영생여학교, YMCA와 남녀성경학원이 있었고, 제혜병원이 있었다.

이런 기관들이 모두 함흥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설립되거나 운영되었다.


함흥중앙교회 사택은 방이 18 개와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청소하는 일이 가장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더우기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는 원산도립병원 기숙사 생활을 하셔서

평생을 큰 집이라면 질색을 하셨다.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소풍


▲ 가사 교육 중인 어머니 (뒷줄 가운데)


나는 평생을 살아 오는 동안 어머니께 '이 녀석' 하는 욕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또한 어머니께서 이웃과 말다툼을 한다거나 언성을 높여 따지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자라면서 혼이나 야단은 많이 받아 보았지만 언성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이다.

어머니는 누구를 대하든지 항상 친절하고 단정한 예절이 몸에 배어 있으시다.


차나 술을 따를 때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밝은 미소를 머금고

왼손은 주전자 밑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따르신다.


1936년 3월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으로 진학하여 간호부 조산부 과정를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결혼 전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셨다.


▲ 1936년 (昭和 11년)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 졸업증서


▲ 1939년(昭和 14年) 3월 23일 어머니 간호부 면허증.


▲ 원산도립병원 소아과 기념사진


▲ 일본 규슈(九州)의 오이타현(大分縣)에 속해 있는 벳푸시(別府市) 수학여행 (앞줄 왼쪽이 어머니)

    비둘기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으신 모습~


▲ 벳푸시(別府市)는 대규모 관광지이며 벳푸만에 접해 있다.


▲ 벳푸시(別府市)는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 벳푸시(別府市)에는 약 3000개가 넘는 온천이 있고 대중탕만도 약 170여 개에 이른다.


▲ 벳푸시(別府市) 天神町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6․25 전쟁으로 월남한 함흥중앙교회 교인들은 서울 남산 서쪽 자락에 반성교회를 세웠고
반성교회는 이후 한성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월남한 어머니의 친척들은 대체로 한성교회를 다녔고 나와 내 누이도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한성교회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등으로 봉사했다.


영생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56년 4월 1일 영생여고보 동창생들이 자금을 모금하고 출연하여 모교 재건위원회를 발족하고

1978년 4월 영생학원을 설립했다.

1990년 1월 남녀공학 7학급으로 영생고등학교가 인가되고 3월 개교하여 제1회 입학식을 가졌다. 


▲ 1990년에 재건된 영생고등학교의 교훈탑. 이 교훈탑은 한신대학교에서 기증했다.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 영생고등학교 교정




09. 전설적인 테너 이인범과 어머니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 이후 함흥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한 이학봉(李學鳳) 목사님은

해방 후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낸 테너 이인범(李仁範) 교수의 부친이시다.

<순교자>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가 김은국(金恩國)씨는 이학봉 목사님의 외손자다.


어머니는 영생여고보와 함남도립함흥의료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다니던 중 방학이 되면

네 살 연상인 테너 이인범(李仁範 1914~1973) 교수가 이끄는 중창단원으로 뽑혀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성가를 공연하고 선교활동을 하셨다.


중창단원으로 때로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와
목사의 딸로 평안남도 강서 출신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 ~ 1995년) 등도 함께 합류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평소에도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을 좋아하시고 아주 구성지게 잘 부르셨다.


이인범은 40년대와 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테너 가수였고, 

연세대 음악대학장으로 재직한 60년대에도 대학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내면서 무대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음악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3년에 한번은 꼭 독창회를 열었고

'한국오페라단'을 창립해서 이 땅에 오페라의 씨를 심고 가꾸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인범은 평양 숭실중학 시절부터 음악회마다 독창을 도맡다시피 했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남자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음대가 없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유학생인 김영환이 일본에서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 양악대와 합창단을 조직하고 평양을 비롯한 전국 공연을 다니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김영환이 사임한 뒤 연희전문은 후임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중이던 현제명을 불러들여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전국 최고의 음악그룹으로 향상시켰다.


이인범은 현제명을 사사하며 음악부에 들어가 연희4중창단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제1 테너를 맡아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을 보면 이미 전국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테너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훗날 한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총장을 역임한 작곡가 바리톤 김연준,
1950∼60년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아나운서 황재경(베이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모윤숙의 동생인 모기윤 등이 당시 이인범과 함께 활동한 학생들이다.


▲ 1936년 연희전문4중창단. 왼쪽부터 이인범 모기윤 김도집 김연준


이인범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일본고등음악원 유학 중이던 1939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수석 입상을 차지한 일이다.


이인범은 1등 없는 2등상을 받았는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한국인이라고 1등상을 주지 않는 심사위원들에 대해 커다란 비난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 수상은 재일 한국 유학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용기를 얻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듬해 도쿄에서 기념독창회를 가졌는데
이 독창회는 이인범이 천부의 미성과 음악적 재질을 가진 당대의 독보적인 테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음악회였다.


이인범은 시원하고 맑게 트인 미성(美聲)을 올곧게 뻗쳐내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세계의 3대 테너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는데
이중에서도 파바로티의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가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이인범의 오페라 몇 곡에 대해 전문가들은 결코 이인범이 파바로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지금 이런 테너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세계 최고급의 가수로 각광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 무렵 1953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이정자가 셋집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다루다 화재가 났다.

당시는 휘발유가 석유보다 싼 시절이어서 업자들이 석유에 몰래 휘발유를 섞어 팔던 때였다.


휘발유 때문에 삽시간에 불이 부엌에 옮겨 붙자 달려가 곤로를 밖으로 들고 나오던 이인범은
얼굴과 목, 어깨 부분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고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얼굴이 나무등걸처럼 심하게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코와 입으로는 도저히 소리를 뽑아낼 수도, 무대에 설 수도 없게 되었다.


전국을 사로잡던 대스타가 더이상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30대 후반의 창창한 젊은 이인범은 절망 속에서 나뒹굴었다.


당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이인범을

일본의 유명한 병원으로 보내 정형수술을 받도록 지원을 해주기도 했지만

옛날의 준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인범은 그냥 무너지지는 않았다.
순교당한 지조 있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2년 여 동안의 절망과 어둠 속에서 그는 신앙의 힘으로,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섰다.


1956년 5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린 이인범 재기독창회.
대형 사고를 당해 사라진 이인범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장안은 들끓었다.


매표가 시작되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립극장부터 명동입구까지 장사진이 펼쳐졌다.
공연 전날 표가 매진된 그의 재기독창회는 한국 공연사상 최초의 매진 이벤트를 기록한 하나의 사건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단 신협 단장 이해랑과 배우 최남현이 분장실로 달려왔다.
얼굴에 분을 칠하고 상처를 가리려 도와줬으나 왼쪽에만 겨우 분이 먹을 뿐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이인범은 말했다.


“악단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진 지 3년,

이 추한 모습을 하고 음악을 할 것인가, 아주 단념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탄식 속에서

재기와 실망의 십자로를 방황하며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며

불우한 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내 외양은 변하였으나 음성은 되찾았다는 데에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 테너 이인범 교수


그는 한쪽 얼굴을 가리려고 객석을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첫곡 스트라델라의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순 장내는 고요해졌다.
몇 년 만인가. 어떤 고비를 지나왔던가.


이인범의 노래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극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최초로 불러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만든 가곡 ‘가고파’를 비롯해
‘발렌치아’ ‘카바티나’ ‘쿠유스 아니맘’ 같은 고난도의 오페라곡들이 메아리쳤다.


관중들은 절정의 도가니 속에서 박수를 멈추지 못했다. 대성공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부인 이정자 씨가 음악회 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반주를 했다는 사실도 대서특필되었다.


아내 이씨는 황해도 이름 있는 의사 가문의 딸로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을 사사한 숙명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이후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살림과 자녀교육, 남편의 치료 뒷바라지에 헌신을 다했던 희생적인 여인이었다.


훗날 많은 이인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불멸의 스타로 더욱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 있다.


재기독창회에 성공하면서 이인범은 1961년부터 연세대 음대교수로 재직했고
66년부터 73년 타계할 때까지는 음대학장으로 봉직했다.


타계할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음대 학생들이 준비하는 오페라 연습소리를 들으며
하루빨리 일어나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채 60이 안 된 안타까운 나이였다.


나는 자라면서 테너 이인범의 노래를 어머니따라 수없이 들어왔다.

그가 화상을 입었을 때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어쩔줄 몰라 하셨고

재기독창회 때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신문을 보면서 안도하셨다.


연세대에 입학하고 나는 음대학장이던 이인범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채플시간이나 음악회에서 직접 듣고 보면서 각별한 감동을 받았다.


그의 딸 이방숙(李芳淑) 피아니스트는 아버지에 이어

1992∼94년에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내면서

부녀(父女)가 연세대 음대학장을 역임한 드문 기록을 세웠다.


▲ 테너 이인범의 딸 피아니스트 이방숙 교수


이방숙 교수는
“아버지는 녹음기가 평생의 친구였다. 그만큼 자신의 노래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하며 사셨다.
화상을 입은 이후 출타를 할 때는 모자를 쓰고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셨다.
한탄처럼 자가용이 한 대 있었으면 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고두고 그 말씀이 걸린다”

고 술회했다.


이인범은 화상을 당한 이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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