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네 번째 명함

 

 

첫 직장으로 나는 70 년대 후반
월간 < 씨알의 소리 > 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했다.

주위 동료들이 더러 선망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내게 맡겨 졌다.

이 후로 나는
감옥에 들어 가 있는 동안을 빼고
계속 직장 생활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직장으로 나는
당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추천으로
우리나라에서 전통 있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현암사에 입사해서
대작 "한국미술 5 천년"의 기획 출판을 맡아 했다.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뒤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째 감옥을 살게 된 나는 출소하자마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출판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각각의 단체에서 상임위 의장, 청년단체 대표위원
실행위원 등을 맡아 활동해 왔다.

그러던 중 민청련 시위 사건으로
김근태 등과 함께 구속되어
네 번째 감옥을 살고 나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네 번째 감옥을 사는 동안
나는 인쇄 공장에 출역하게 되었다.

인쇄공장에는 활판인쇄기, 옵셋인쇄기, 조판 정판실,

최신형 마스타 인쇄기, 재단기 등등의 기계들과 제본실이 있었다.

원고가 들어 오면 편집과 조판 교정에서부터
인쇄와 제본까지 일괄해서 처리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0 개월 여 동안 인쇄 공장에 출역하면서
나는 제작 공정의 모든 실무를 직접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내 팔자에 인쇄 사업이 예정돼 있었던건가?...'

월간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미술 대작의 기획 출판을 맡고
연구원의 출판부서를 운영하는 책임과
인쇄 공장의 실무를 익히는 등으로

나는 우연치 않게도 10 여 년 동안
출판 인쇄 분야의 모든 실무와 운영을
두루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마음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자신감...
해 낼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나는 네 번째 명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갈 준비를 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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