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1985년 지옥의 남영동을 나선 다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빛을 온몸에 받았다.

아, 이 햇빛 속으로, 이 낮익은 거리로 나는 돌아온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헤아려 보니 스물대여섯 번 체포당했고,

십수년 동안 수배받아 피신해야 했으며,

5년 6개월 동안 형을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맛보아야 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 그 길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것이고,

또 조금이나마 역사의 방향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렸다는 것입니다.


1985년에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재야와 야당이 연대하여 고문 등 용공 조작 대책위를 만들고,

그것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대책위로,

다시 박종철 치사 사건의 대책위로 이어져서,

궁극적으로 뒤에 1987년의 6.10민주대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결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서로 어깨를 결고

심장을 나누어 가지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과분한 평가를 받았고,

덕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오랜 친구 조영래, 후배 김병곤, 이범영,

지금 몹시 아픈 이을호를 비롯해서 이름 없이 역사의 책무에 충실했던,

소리없이 그들을 도왔던 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의 보상은 그 분들의 것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나를 키워준 그 강과 들

 

남한강

 

굳이 고향을 말하자면,

경기도가 온통 고향이라고,

특히 소년 시절을 보듬어 준 남한강 상류가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교장 선생이시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 덕분에,

평택 청북초등학교와 진위초등학교를 다녔고,

양평군에서 원덕초등학교를 다니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겪은 첫 시련은

자주 전학을 다니면서

늘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강박감이었지 싶습니다.

 

그래도 고향은 어린 소년에게

더없이 넉넉하고 너그러웠습니다.

 

남한강에서 동무들과 멱을 감고,

밤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들판에서 세찬 바람을 향해 달렸고,

풀이 자라나는 소리를 들으며 켰습니다.

 

지금도 양평 너른 평야나 남한강가를 가게 되면

차를 세우고 한참을 서서

나를 키워 준 그 들과 풀과 강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새침하던 여학생 “연봉”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하는 그리움과 함께.

 

그러다 정말로 첫 시련을 만났습니다.

경기중학교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때 심정으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 뒤 광신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 3년 동안이 내 평생에서 가장 열심히

모질게 공부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불 좀 끄고 잠을 자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밤 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겪은 좌절과 실패, 열등감이

결국은 나에게 불확실한 미래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행 열차를 타고

또 한참을 걸어 통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http://news.kbs.co.kr/tvnews/4321/2011/02/22497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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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과 아들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할 당시 서른 한 살 새댁이었던 큰딸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팔순넘은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여분간.. 가족들은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곤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청석 여기저기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죽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채 사형당한 오욕의 세월을 지워 버리는데는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다신 정적을 없앤 이런일이 일어나선 안되겠죠. 정적을 없애는 이런..."

지난 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후 52년만에 지난 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 받았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간첩의 후손이라는 멍에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산 조봉암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사법 판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은 뒤에도 죽산의 딸 조호정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적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곤 집 근처 사찰로 가서 태워 버립니다,

<녹취> 조호정 : "나도 이제 80이 넘고 그러니까 나 가기전에 됐으면 좋겠다고 그 얘기밖에 다른게 없어요."

독립운동가로 제헌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등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제2대,,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80여만표와 200여만 표를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59년 7월.사형당했습니다. 국가 변란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이 50여년만에 판결을 뒤집으며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인터뷰>이동근(前 대법원 공보관) : "간첩죄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이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52년만에 종전 판결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하얀 수의에 덮여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호정 :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그렇게 험하게 가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얼굴이 편안해. 아..이런 말 한번도 안 해봤는데..조금 미소짓고 가만히 있어..아유 참...그러고 끝이 나거예요."

장남 규호씨의 고통은 더 컸습니다. 당시 10살이었던 조규호씨는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직장 생활 조차 힘들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조규호(62/죽산 조봉암의 장남) : "얘기하면 뭐해...편안하게 할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아니면 모르지."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생가터를 발굴하고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강화도의 한 마을.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생가터는 알수 없습니다. 간첩 혐의로 사형됐기 때문에 행적을 알만한 사람 대부분이 언급 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김기헌(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장) : "죽산 선생이 이곳에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물론 공부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생의 제적등본입니다. 등본에는 사형 당했다는 것만 표기돼 있을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현재 생가터로 추측되고 있는 곳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터뷰>이응식(강화읍장) : "세 군데 이사를 다니면서 다 조봉암 선생님이 사셨거던요. 첫번째 어느 자리든 택해서 생가로(지정해야하지 않나)"

대구에 있는 한 공원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묘를 위해 찾았습니다. 지난 1975년.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입니다.

<인터뷰>신동숙(82/故 도예종씨 부인) : "사형했다는 걸 알고 와서 그 소리 듣고 통곡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갔었어요."

성묘를 마친 85살의 강창덕옹은 개인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모셔둔 영정앞에서 또 한번 묵념을 올립니다.

<녹취>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애국 선열에게 간곡히 기원합니다. 첫째 영면하시고 명복을 빌고."

지난 74년 소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강창덕옹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른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인터뷰>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왜 나도 안죽고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나고."

같은 무기수로 살다 풀려난 나경일씨는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들 문석씨는 아버지가 투병중에 수술을 받을때도 고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아버님이 고문실로 착각하셨어요. 수술실을. 당시에 고문실이 조명이라든지 비슷했던가봐요. 그 악몽을 재연하고 계신거예요. 나쁜 놈들..나를 왜 여기 잡아 넣느냐. 참. 그때 아들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렇게 강인한 분이 셨는데."

김진생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간뒤 1년만에 유골로 돌아온 남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3살 노인의 응어리가 녹아있는 알 듯 모를듯한 내용의 메모만이 당시 김 할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진생(83/故 송상진씨 부인) : "(왜 이걸 쓰신거죠? 어머니) 뭐 한때 내가 이래저래 내 생각대로 이래 한게 있었지."

지난 1975년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해전 반독재를 주도하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관련자들은 당시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불과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록에는 간첩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절절합니다.

<녹취> "수사관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고 단단한 몽둥이로 발바닥,허벅지, 팔을 때렸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두 번인가 세 번정도 실신을 했습니다."

<인터뷰>김형태(사건 담당 변호사) :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들 그런 것도 받아줘야 되거든요. 근데 다 기각하고 그냥 항소심 같은데선 아무것도 안하고 결심을 해버려요."

당시 사형 선고를 내렸던 대법관들은 재판장이었던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이었던 이병호 판사를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이일규 판사만 사실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절차가 위법하다며 사형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냈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지난 2007년. 이일규 판사는 타계를 앞둔 1년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녹취>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인혁당이 배후로 지목됐던 민청학련 사건도 대학생과 일반인등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왔습니다. 지난 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후 1000여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한다는 혐의로 180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인터뷰>이철(민청학련 관련 1심서 사형선고) : "아버지는 몸져 누우시고, 어머니는 고생하시다가 몸이 불편해지시고, 딸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은 병들어 눕고, 이런 집안이 한 두곳이 아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돼 12년 형을 선고 받았던 최민화씨도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민화(민청학련 관련 1심서 12년 선고) : "“이 사회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그런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세상은 이제 오지 않겠지라고 하는 그런 회한도 좀 있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이들 사건은 지난 2005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두 사건은 모두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과 배상 결정이 내려지면서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터뷰>오승용(전남대 정치학 박사) : "국가는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권의 최후보루인 사법부...그 성스러운 곳에서 내려진 잘못된 판결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굳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지 않더라도 시대의 아픔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은 뒤늦게 국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이 문제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그걸 보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많다고 얘기한다면 저는 당연히 안받아야 되는거죠. 그 대신 35년전에 우리 가족들의 삶으로 돌려달라는 거죠. 그거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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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박 씨의 시련


이튿날 새벽
형사들이 찾아 와 박 씨를 연행해 갔다.

그리고 그는 폭행치사죄로 구속되고
재판을 통해서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 때 일어난 일이니까
그가 만기 석방되려면 35 세가 된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가정 또한 얼마나 큰 시련을 당했을까.

변호사 측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요구할 때마다
돈을 끌어대야 했고

결국에는 논과 밭을 떼어 팔아
재산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초범이고 범죄의 동기와 죄명
연령과 석방 후의 생활 보호 관계 등 여건이 좋으니까
형기의 3 분의 1 정도 복역한 다음

가석방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변호사 측의 말을 한가닥 기대로 삼고
그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꿈에도 상상 못했던 별천지 지옥같은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동안
그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는 가정을 한없이 그리워했고
산과 밭, 논과 들이 있는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없다.

수형 생활에 따르는 규율을 어기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게 되면
2 년 반 후에는
그리운 처자식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하루하루를
마음 속 깊이 다짐하고 노력하면서 생활했다.

세월이 흐르고 2 년 반이 지난 무렵부터
그는 감형이나 가석방 이야기가 나돌 때마다
'만기병'을 앓아야 했다.

이번에는 꼭 나가서
아버님 회갑연을 차려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말로 꼭 나가서
귀여운 딸아이 손목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만 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께서 아들 걱정에
한숨과 눈물로 지새우시다가
몸져 앓아 누우셨다는데...

이번에도 못 나가면
생전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불행이 닥칠 것 같고
불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살고 살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그는 마침내 특별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4 년 여 동안 '만기병'을 호되게 앓던 끝에
7 년 형의 만기를 사흘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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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내 복에 무슨 재혼?

 

 

채광석의 죽음으로
나와 혜숙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음은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었다.

"나 죽으면 당신 재혼할 꺼지?"

혜숙은 베개를 높이 쌓아 놓고
기대어 자다가도 문득문득
이런 말을 자주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지경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입에 발른 듯
아양떠는 시늉도 할 수 없고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속 들여다보이는 말을 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퉁박을 주며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혜숙은 답답해 죽겠는지
또 물어 온다.

"당신 재혼 할 꺼지? 그렇지!"

나는 '당신이 죽지 말고 살아 있으면 될꺼 아냐!'
하는 외침이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아 내면서 한숨을 푸욱 내 쉰다.

"그래도 한 5 년은 기다리겠지?"

아! 이제 혜숙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가 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혜숙이 죽으면 안 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꾸 되물으며
대답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우정 화를 잔뜩 머금고

"나한테 무슨 복이 터졌다고 재혼 복까지 있겠어!!!"
"그런 복이 있다면 5 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고 대꾸한다.
혜숙은 약이 오르고 화가 나면서도
싸울 기운이 없는지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또 되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3 년 상은 치뤄 주겠지?"
"......"

나는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대꾸도 안 한다.

혜숙은 며칠 지나서 또 떠 본다.
나는 계속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혜숙은 더욱 더 약이 올라 있다.

"그러면 1 년은 넘겨 주겠지?"

하고 낮춰서 물어 본다.
나는 혜숙이 너무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심사도 복잡하고 편치 않아서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1 년은 넘겨야 되겠지?"

혜숙은 더욱 더 속상해 한다.
훗날 혜숙은 그 때 너무 약이 오르고 속상해서
죽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우리는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하나마나한 말들을 밑도끝도 없이 주고받곤 했다.

혜숙의 친구들 사이에
'내 복에 무슨 재혼이냐'는 말이
우스갯말로 둔갑해서 퍼져 나갔다.

최민화는 재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혜숙이 약이 올라 죽지 못하고
그 복을 가로채서 깨뜨려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아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이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올 때마다
나에게 끝내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에미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한 가정의 부부는 생활을 함께 하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아 가게 된다.

한 쪽에서 작은 인기척만 있어도
상대방의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느끼고 알만큼 일심동체로 되어 간다.

평생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생각이 닮고 마음이 닮을 뿐만 아니라
모습까지 닮아 가는 것이다.

나와 혜숙의 관계 역시 그랬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에서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아도
혜숙은 나의 활동 반경과 행동거지를 대충대충 다 꿰고 있다.

서로가 각자 다른 장소에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읽어도
판단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게 서로 일치한다.

혜숙과 나는 사회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시 서로 닮아 있다.

삶의 가치관과 신념
인생관과 역사관이
서로 비슷비슷 닮아 있고 일치하는데

이런 배우자를
어디서 다시 찾고 만날 수 있겠는가?

10 여 년 세월 동안

생활을 같이 하고 호흡을 함께 하면서
불편없이 알맞게 맞추어 놓은 것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서
새로 구할 수 있겠는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훈련하고 노력해서
이만큼 서로를 일치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혜숙이 같은 분신을 만나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혜숙이처럼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재혼하는 복은 없는 게 낫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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