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1. 포기는 성공의 아버지


1969 년 3 월 나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개가 그러했겠지만 당시 사회 경제적 사정이라는 게 대학을 다니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시골 살림의 형편과 사정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학력 차이가 극심할 때였을 뿐 아니라
국 공립 대학도 아니고 사립대에 진학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적만 하더라도 농촌이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자라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대학을 서울로 유학해야 했다.

이런저런 까닭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개교 이래 두 번째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만큼 대학교에 동문 선배와 친구가 있을 턱이 없어
나는 동아리 모임에 참여하면서 열심으로 활동했다.

친구와 선배들을 사귀고 교수님들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다.


▲ 1969년 연세대 교정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 김찬국 교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캠퍼스와 화려한 계절의 낭만에 묻히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키우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3 선 개헌 파동'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4 년 중임제 헌법으로 재선된 지 불과 1 년 여가 지났을 뿐
임기도 넉넉하게 남겨 둔 싯점이었다.

연초부터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갑자기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차질없이 완수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안보를 더욱 튼튼히 다져야만 한다고
강조해마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 임기가 4 년씩 두 번
그러니까 8 년으로 제한되는 중임제 헌법 내용을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 한해서
3 선까지만 연임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합리적 이성과 양식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억지 주장에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뒤숭숭했다.

야당과 재야 종교계 학계 시민 사회계 등 지식인들은
박정희 1 인을 위한 장기 집권 음모요 정권 야욕이라고 비판하며 들고 일어섰다.

그 해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교에서까지
3 선 개헌 음모를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터져나왔다.


▲ 삼선개헌결사반대 시위


그 해 6월 29일 나는 격렬했던 연세대 3 선 개헌 반대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에 수배자가 되어
일정한 거처 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배회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나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방학을 맞이하고 한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그래도 잠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걱정만은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유전 무전 여행도 할 수 있었고
서울 근교 산과 고향 인근 저수지 등에서 텐트를 치고 거처(?)를 마련해서 생활하기도 했다.


경찰 집계에 따르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12개 대학에서 3만 2천 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학생 541명과 시민 35명이 연행되었다.


7월 7일의 시위는 전국에서 벌어졌고 경찰의 진압도 강경했다.

전국의 각 대학교에는 거의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등학교도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 3선개헌반대 시위에 퍼부어지는 경찰 곤봉세례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미 많은 고등학교에서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7월 10일 대구에서만하더라도 대구고 학생 500여 명

대륜고생 300여명, 경북고생 300여 명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개헌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어 11일에는 안동고 학생 1천 여 명, 계성고 학생 1천 여 명이 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고

7월 12일에는 김천중고등학교에서 1천 여 명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다.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시위는 대학이 휴교로 봉쇄된 상태에서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시위에 가담하는 사례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반대투쟁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6월부터 7월까지 학생들의 격렬한 3선개헌반대투쟁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의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7월 17일 제헌절을 맞이해서 야권에서는 범투위 발기인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김재준 목사, 고문으로 윤보선, 유진오, 함석헌, 이재학,

박순천, 장택상, 이희승, 김상돈, 정화암, 임영창 등을 추대했다.

그러는 동안 각계각층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강연과 집회 시위 등으로 저지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당시 제 1 야당인 신민당은 7월 19일 서울에서 시작하여

7월 26일에는 군산 등 전국에 걸쳐 반대유세를 시작했다.


신민당은 원내외에서 동시에 투쟁을 전개한다는 전략하에

원내에서는 개헌 저지선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개헌안 발의 자체를 차단하고

원외에서는 개헌반대유세를 전국적으로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7월 29일과 30일 신민당 소속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이

느닷없이 3선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중앙정보부 개헌공작의 성과인 일부 야당 의원들의 개헌지지는

온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도처에서 변절의원 화형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민당이 삼선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강력하게 저지하고 나서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본회의 보고를 생략한 채 8 월 9 일 개헌안을 정부로 직송하였고
박 정권은 국무회의에서 전격적으로 의결하여 공고해 버렸다.

그리고는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저지하고 탄압하는 내용을 포함한
국민투표법안을 8 월 30 일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 3선개헌안을 변칙통과시키고 국회별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여권 의원들


새 학기가 들어 서기 직전 공안 기관에서는 시위 주동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수백 여 명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그리고 9 월 14 일 일요일 새벽 공화당 의원들이 야음을 틈타면서 삼삼오오 국회 제 3 별관에 모여
개헌안을 단독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런 형국이었던만큼 가을 학기에 접어 들자마자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나는 지명 수배로 피신하고 있던 중에도 기독학생회 회원들과 계속 모임을 갖고
삼선개악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로 결의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학생 시위에도 직접 가담하였다.


9월 3일 4일 5일에는 연세대 학생 1천 5백 여 명을 비롯,

고려대, 서울공대, 성균관대, 그리고 대전대와 영남대 계명대 부산법대, 전남대 의대 등 전국에 걸쳐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9월 11일 전국의 38개 대학이 무기휴교 중이었지만 개헌 반대는 시위의 무풍지대였던 여자대학으로까지 번졌다.

이화여대생 4천 여 명은 검은치마와 흰 웃도리로 복장을 통일하고 성토대회를 열기도 했다.

같은 날 숙명여대생 1천 여 명이 3선개헌반대 결의대회를 열었다.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적으로 통과되면서 각 대학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대학 뿐만 아니라 경기고등학교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 나는 수배된 지 2 개월 여 만인 1969 년 9 월 21 일
오산 고향집에 잠깐 들렀다가 잠복 중이던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연행되어 조사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경찰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우중충하고 너저분하기 짝이없는 보호실에서
무슨 파렴치하거나 흉악한 죄를 짓고 들어 온 듯한 사람들 십 여 명과 함께 쌀쌀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내내
나는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데 없는 심경에 젖어 있었다.



그 때 30 대 쯤으로 보이는 분이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정성과 열정을 기울여가며 내게 들려 준 이야기 가운데
내가 평생동안 잊지 않고 귀감으로 삼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분의 말인즉슨 자기도 연세대를 나왔고 학교 다닐 적에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가담했는데
졸업 후 누군가와 사업을 함께하다가 동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자기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들어 오게 되었다면서
학교 동문 선배 입장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처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내게 알려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이 실제로 연세대를 나온 선배인지 아닌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 와 있는 건지 아닌지
하는 등등의 내용에 관심이나 호기심을 갖고 있을 분위기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심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간절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 분의 말을
못들은체 외면만 하고 있거나 매정하게 거절할 주변머리도 없는 나로서는 그냥저냥 조용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분은 내게 성공의 비결은 빨리 포기하는 데 있다고 했다.
경제가 안 좋고 사정이 안 좋아 질 때, 사업이 잘 안 되고 점점 어려워져 갈 때
자기도 일찌기 정리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지 않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업에 집착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는 욕심이
결국은 사업을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지만 포기야말로 성공의 아버지라고 했다.
사업에서나 인생에서 집착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알아야
결국은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이 대목에서 생생하고도 신선한 느낌과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그 어떤 지식이나 신념에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서 깨우침과 위안을 얻으면서 내 자신을 지켜 온 바가 적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한 공포 분위기에서 고문을 당할 때
나는 그 때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이 비굴해지지 않도록
비굴하기보다는 차라리 내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도록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의연하게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감옥에서 사색하고 명상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도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세계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경지야말로 바로 자기의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는 세계
즉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는 훈련에 다름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창세기 43 :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야곱은 이미 죽은 줄로 아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떠나보내야 했다.


야곱은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많았던 터라

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와같은 일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제단에 올려졌던 이삭은 이미 생명마저 포기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포기하면 새로운 소망이, 떠나면 더 좋은 곳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니 말이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나는
당시 학생처장 이근식 교수님이 경찰서로 찾아오셔서 

간곡한 부탁과 보증으로  군에 입대할 것을 약속하고 불구속 입건 처리로 풀려났다.

당시 정법대 학생회장이던 노길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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