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6. 1973년 가을



한편 나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학생회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각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있었지만
일반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 기관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짐에따라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고도의 자기 희생을 결단하지 않으면 진실을 외치기가 매우 힘든 시대였다.

 

학생 운동은 주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몇몇 대학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모임이
학생 운동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연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각 대학마다 전통과 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 학생 서클의 지도부들끼리
간헐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해 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서클에 비해 상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에 연합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조직된
YMCA와 YWCA, 그리고 KSCM이라는 기독교 학생 단체를 모두 통합하여

1968년 연맹체로 구성한 대표적 기독 학생 단체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학생회(SCA, SCM 등)의 연합 조직인 것이다.
 
KSCF는 서울 지구, 영남 지구, 호남 지구 등
전국을 3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인천, 충청도와 강원도를 포함하는
서울지구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3 개월여 만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임원 5명이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 4 명은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풍문으로만 나돌던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2시간 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경찰이 서울 문리대 교정에 난입하여
시위 학생 180 여 명을 강제 연행해서 그 중 20명을 구속하고
57 명을 즉심에 회부하여 구류 25 일에 처했다.

         ▲ 10. 2 서울문리대 학생 선언문

 

서울대 10.2 데모를 주동한 강영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등은
KSCF의 학사단 운동 출신 임원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대부분의 서울대 소속 KSCF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또는 지명 수배를 당했다.

 

유신 초기 공포와 절망으로 주눅든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2시위로 서울문리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 연행되는 학생들

 

서울대 10.2 데모 사건은
유신 계엄령 이후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대학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시발로해서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10월 16일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친동생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던 중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정 건물 앞에서

담당수사관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중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는 공무원과 교수 등

54명의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도 이 간첩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고조되고 있는 학생운동의 분위기를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가려는

박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연세대 기독학생회 이재웅(72학번, 정외과) 등과 함께 시위와 철야 농성을 이끌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11월 27일 연세대 학생시위의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학생회관 1층 로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밤샘 농성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당시에 이미 신촌의 명배우로 유명했던 명계남을 만나서

철야 농성에 사회를 맡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회관 로비에는 400 여 명의 학생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6시 경 초저녁에 시작된 농성의 열기 또한 식을 줄 몰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유려한 명계남의 사회는

지루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되었다.

새벽 5시까지 400 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나는 명계남에게 약간의 도피 자금을 쥐어 주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지 말고 잘 피해 있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명계남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 가두로 진출한 학생 시위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번지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유신정권은 모든 대학에 휴업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대학은 휴업과 함께 조기 방학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신체체 이후 처음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의 대학이 데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신문과 방송에서 전혀 사실대로 보도를 못 하자
언론사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고
기자협회에서는 사실 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12월 7일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10월 2일부터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고 학사처벌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지명수배 조치도 해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10월 12일과 1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정보 기관에 요시찰자로 분류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1973년 당시 서대문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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