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이며, 중요한 예술적 보배들을 간직한 곳이다. 이 유명한 성당은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 깊은 건물 중 하나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유럽 북부의 거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매혹적인 새로운 요소가 이에 더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모습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마르틴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짓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기초 작업은 페트루스 페트리가 맡았는데 그는 1291년에 사망했다.
고딕 양식이 지배적이지만, 건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지금도 오래된 서고트 족의 예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모사라베 예배당'(1504)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회랑은 무데하르 양식, 즉 기독교 통치기까지 살아남은 무어 양식의 특징을 몇 가지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 요소는 세 개의 중앙 현관 위편에 새겨진 복잡한 조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아마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보배 덕택일 것이다.
하나는 '트란스파렌테'(1721~1732)라는 이름을 가진 나르시소 토메의 작품으로,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제작한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제단 장식이다.
그는 윗편의 둥근 천정을 깎아 구멍을 내 자신이 조각한 인물상들이
태양 광선을 받아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후광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마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엘 그레코의 장엄한 그림 <엘 에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일 것이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나 예술적 이력 대부분을 톨레도에서 쌓았으므로
톨레도 대성당이 그의 걸작 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썩 어울리는 일이다. 이러한 예술적 보물들 덕택에 이 건물은 성당인 동시에 박물관이기도 하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톨레도 대성당에서 보물실의 백미라 불리는 가장 유명한 보물이 바로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이다. 성체(聖體, 예수님의 몸) 강복 때 성체를 올려놓는 대(臺), 금은보석으로 꾸민 높이 3m, 무게 180Kg의 화려한 모습이다, 성체현시대 중앙에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있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금은보석은 주로 남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부분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아랫부분
왕관
보물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파이프오르간
[스페인 여행-톨레도]그라나다 정복 역사가 새겨진 ‘톨레도 대성당’/Toledo Cathedral/Transparent
초원의 양떼를 적군의 행렬로 착각해 양들을 공격하다 목동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어느 이발사의 면도용 대야를 빼앗고는 그게 진귀한 황금투구라며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사악한 무리’를 무찌르기 위한 공격에서 어쩌다 재수 좋게 ‘승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두들겨 맞는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돈키호테의 소동으로 산초 판사는 물론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의 당나귀도 함께 고초를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 성한 곳 없이 다치더라도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돈키호테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연민도 스며 있다.
한번은 양떼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여러 달 밀린 품삯을 주지 않고
어린 하인을 학대하는 농부를 크게 꾸짖으며 매질을 멈추게 하고 밀린 품삯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사내의 슬픈 사연을 들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모험은 서서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롱을 보낸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이해심이 그의 광기 이면에 숨어 있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돈키호테를 자신들의 저택에 정중히 초대해
돈키호테의 망상에 맞장구치며 함께 생활한 어느 공작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고는
실제로 산초에게 바라따리아라는 섬을 다스리도록 해준다. 섬으로 떠나기 전 산초에게 건넨 충고에서 돈키호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행동으로 벌을 주어야 될 사람을 말로 학대하지는 말게. 그 불행한 자에게는 형벌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한데, 다른 나쁜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관할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나."
라 만차 마을 신부는 돈키호테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돈키호테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산손 카르라스코라는 학사는 신부와 함께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지체 높은 부자가 만류한다.
“돈키호테가 그의 허튼 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결국 신부, 이발사, 학사 등 고향 마을 사람들은 속임수를 써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마을로 데려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쯤 지나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고 알론소 키하노 영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돈키호테는 숨을 거둔다. 제정신을 되찾자 곧 세상을 떠난 것이다. 꿈꾸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며, 그런 그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후 400년 동안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톨레도 구 시가지 전경
톨레도 구시가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다. 도심의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은 이슬람 도시의 특징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 점령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 곳곳에는 중세의 향기가 가득하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톨레도 대성당은 순수한 스페인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길이 120미터(m), 폭 60미터의 위풍당당함에 세련된 건축과 조각,
엘그레코, 발라스케스 등의 예술 작품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다.
로마 시대에 건축되어 서고트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 된 알카사르도 톨레도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스페인 내전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축물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무데하르 양식에 고딕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언덕 위에 알카사르(Alcazar) 건물이 보인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성밖 타호(tajo)강 풍경
타호(tajo)강
타호(tajo) 강이 반원을 그리며 도시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중세도시로서, 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타호(tajo)강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타호강(江)에 놓인 고딕 양식의 다리이다.
이전에 있던 다리는 1023년의 홍수로 손상되었고 14세기 말에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가 보수하였다.
산마르틴 교구와 가깝다고 하여 산마르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개의 아치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아치는 길이가 40m이다.
양쪽 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또 다른 것은 16세기에 세워졌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고 톨레도를 지켜온 다리로
오늘날에는 중세 도시의 자취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타호강에는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도 놓여 있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가이드와 함께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
타호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중세의 산세르반도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제국 오현제(五賢帝) 중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치세인 104년에서 106년 사이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왕인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 때 재건하였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語)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강에는 산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면 다리끝 아래 타호강 강변에 La Cubana (애저 요리 전문점 34-925-220088) 레스토랑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애저 요리로 유명한 라쿰바나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레스토랑은 창가에서 바라다보이는 타호강과 알칸타라 다리 또한 일품이다.
애저 요리
애저요리는 스페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배내에 있거나 막 태어나 사료를 먹기 전까지의 새끼 돼지. 우리나라에서 새끼 돼지를 이용하는 애저 요리는 조선 시대 중엽에 시작됐다.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에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전라북도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겨 먹은 보양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안에서는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를 찬물에 1~2시간 담가서 핏물을 제거한다. 돼지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전피·인삼·마늘·생강·청주를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다 삶아지면 밤·은행·대추·양파·대파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양념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삼베 보로 싸서 편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탕으로 끓이기도 한다.
애저 요리
스페인에서는 도살장에서 태어난 지 20일에서 21일 된 새끼 돼지를 구입하여 레스토랑으로 전달되는데 이미 도살장에서 배를 갈라 창자 등의 내장을 모두 꺼내 보내진다.
커다란 타원형의 질그릇에 새끼 돼지는 가느다란 나무 판을 대고 올려지는데
그 아래엔 사분의 일의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
배를 뒤집어서 올린 후 소금을 뿌리고 장작 오븐에 넣어진다.
180도의 온도로 1시간 30분 살이 부드럽게 익혀지도록 한다.
물을 넣는 이유는 수분으로 살이 퍽퍽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븐이 가장 중요한데 전기 오븐으로는 이러한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 오븐은 지붕을 둥그런 것을 가장 고급 재질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오븐에 따라 맛이 승부를 낸다고 한다.
둥그런 지붕안에서 열이 회전을 하면서 맛이 좋게 익혀진다.
하얀상태에서 익혀지면 다시 꺼내 뒤집는데 (배가 밑으로)
이번에는 돼지 기름으로 만든 버터를 껍질에 칠을 하고200도로 온도를 조절한 후 45분을 더 익힌다.
알무데나 성모대성당(Catedral Nuestra Senora de la Almudena)
흔히 줄여서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이라고 한다. 왕궁 주변에 있다. 16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문제와 에스파냐 내전, 재정 결핍 등의 이유로 1789년에야 완성되었다.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당시 아랍어로 '알무데나'라고 부르는 성벽에서 성모상이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후 마드리드를 정복했을 당시 성모상을 성벽에 숨겨둔 것으로 추측된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알무데나 대성당 종탑
알무데나 대성당 돔
알무데나 대성당 기둥
요한 바오로 2세 동상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거대한 광장은 축하 행사, 종교 의식, 처형 등을 거행해 온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입구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카페, 바, 상점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전경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 제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솔(SOL) 광장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은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불린다.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다.
솔(SOL) 광장의 상징 곰 동상 마드리드 지역의 옛 이름은 우르사리아(Ursaria)였고 그 의미는 '곰의 땅'이라는 뜻이어서 곰 동상이 마드리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소귀나무 열매(산딸기)를 먹는 곰 동상 곰의 왼쪽 발꿈치를 만지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부분만 칠이 다 벗겨져 있다.
솔(SOL) 광장 곰 동상 근처 이 자리가 버스킹을 하기에 명당 자리인가 보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이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통치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이탈리아 통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759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계몽전제군주로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층보다
중산층과 계몽 지식인들을 통하여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부동주의에 갇혀 있던 스페인 민중은 1766년 에스킬라체 난을 통하여 반발하였고, 이후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의 추방이나 파블로 데 올라비데의 프로젝트와 같은
보다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통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선왕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는 행정 개편과 세 번째 부왕령의 설치를 통해
효율적인 통치와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윗부분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파르네제의 이사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은 성격에 책임감이 강했으며 이복형들에 밀려 스페인 왕위계승은 요원해 보였다.
모친 이사벨은 이탈리아 영토들을 되찾아 자신의 아들들에게 주길 원했고, 실제로 1724년 비인조약을 성사시켜 카를로스가 안토니오 파르네제의 사후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는 데 기여했다.
1724년 펠리페 5세의 장남인 루이스 1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사벨은 왕세자로 있던 페르난도 대신 남편 펠리페 5세가 재차 통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는 노쇠해진 왕 대신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고, 아울러 왕세자의 건강이 이상 징후를 보일 때마다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사벨 왕비는 1733년 프랑스와 첫 번째 왕가협정을 체결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고, 실제로 다음 해 카를로스는 나폴리를 공격하여 부친의 이름으로 이곳을 통치하였다.
이후 비인평화조약을 통하여 카를로스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는 대신
나폴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3세 초상화>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 캔버스에 유화. 1765년경 제작. 151.1cm×109cm. 마드리드 프라다 미술관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가 자손이 없이 1759년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앞서 체결된 1748년 아헨 조약에 따라서
스페인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카를로스 3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앞서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서 감행한 여러 개혁들은 그가 스페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이 되었으며, 카를로스 3세가 모든 영역에서 계몽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개될 유럽의 대 격변을 보지 못하고
1788년 12월 14일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죽기 전 뒤를 이을 카를로스 4세의 통치를 염려하여
1777년부터 자신의 대신으로 있었던 플로리다블랑카를 곁에 두도록 당부할 정도였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계몽전제군주로서 동시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나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2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조치들은 스페인의 전통주의와 부동주의에 부딪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후대에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스크 기념비 시벨레스 광장으로 가던 중,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 있다.
시벨레스(Cibeles) 분수
분수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수사자 두 마리라 끄는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여인의 조각이 있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시벨레스의 형상이며 광장의 명칭도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각작품은 18세기에 제작되었고 스페인 신고전주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시벨레스 궁전
시벨레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ibeles)은 마드리드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원래는 코무니카시오네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omunicaciones)이라 했다.
알칼라 문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있다. 1778년에 카를로스 3세의 명으로 궁정 건축가 사바티니가 건축했다. 문이 위치한 곳은 19세기 말까지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가 되었는데, 아라곤에서 이 문을 통해 마드리드로 오는 상인들에게 마드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해 세웠다.
문에는 5개 통로가 있는데, 중앙의 3개는 아치 형태이다. 양쪽 끝 통로 상단에는 장식이 붙어 있다. 알칼라문 주변을 에스파냐 독립을 기념해 독립광장이라고 한다.
콜론광장 콜럼버스 기념탑
콜론 광장에는 거대한 콜럼버스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거대하면서 높은 기념탑 꼭대기에는 콜럼버스가 서 있다. 콜럼버스의 스페인어 이름이 콜론이라고 한다.
콜럼버스, 하면 아무래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그가 찾아낸 건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것.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던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덕분에 그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엄청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쳐왔던 것이다.
콜럼버스 기념탑 윗부분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해다.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졌다. 대서양을 지나서 인도로 가고자 했던 그는 인도에서 엄청난 황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물주였다.
포르투갈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스페인으로 갔다.
이사벨 여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여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1492년 8월 3일, 꿈에도 그리던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도를 찾아내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항해에 성공했을 경우 우선 세습귀족 자격과 해군제독의 계급
그리고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과 무역거래에 8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자격과 권리가 후손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을 찾아낸 콜럼버스는 이후 3차례 더 신대륙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고 한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더 이상 그를 받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왕의 후광이 사라진 그는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 기념탑 아랫부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했던 ‘세습’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세비야에 있는 까떼드랄에 있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은 뒤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고, 스페인 곳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광장도 생겨났다.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콜론 광장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건물은 또 있다. 쌍둥이 빌딩인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스페인 건축가 안또니오 라멜라(Antonio Lamela)가 설계를 했다는 이 건물은
196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102m인 이 빌딩들은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데, 위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두 빌딩을 연결한 구조물의 모양이 플러그와 똑같아 스페인 사람들은 '엥추페(El Enchufe)'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콜론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 국립도서관이 있다. 앞에서 보면 도서관이고 뒤로 돌아가면 국립고고학박물관인 건물이다. 국립도서관과 국립고고학박물관 안에는 일반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한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고풍서린 건물에 여섯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뻬 5세가 1712년에 세운 왕궁도서관이 훗날 소유권이
왕실에서 내각으로 넘어가면서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상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이사벨 여왕 동상
도로 곁에는 이사벨 여왕이 말을 탄 채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옆에 설치된 두 개의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이사벨 여왕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아르테미시아〉 캔버스에 유채 / 142×152cm / 163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구가한 화가였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답게 그는 카라바조를 연상시키는 명암법을 주로 썼으나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인 빛을 구사해 다소 슬프고도 애잔한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 그림은 샤스키아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여주인공은 기원전 4세기경 오늘날 터키 보드룸에 있던
카리아의 여왕 아르테미시아(ArtemisiaⅡ ?~BC 350?)이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지은 마우솔로스의 묘 ‘마우솔레움(Mausoleum)’은
그 거대함과 정교함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아르테미시아에 관해서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유해를 태운 뒤 남은 재를 잔에 넣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강한 부부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혹적인 빛을 듬뿍 받은 채 아르테미시아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여종이 잔을 들고 앉아 있다.
렘브란트는 여종의 등에 닿는 빛뿐 아니라,
여왕을 비췄다가 반사되어 다시 여종의 얼굴을 밝히는 빛까지 그려냈다.
화면 왼쪽은 짙은 어둠이지만 여분의 빛으로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낸
또 다른 여종의 모습이 보인다.
레이덴 출신의 렘브란트는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였던 샤스키아와 결혼에 성공하면서 인생의 절정을 달리게 된다.
그러나 샤스키아가 죽은 뒤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감한 붓질에 물감 덩어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대담한 그의 화풍은 매끈한 채색과 명료하고 단정한 고전적인 취향으로 돌아선 네덜란드 사회에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그의 몰락은 비단 자신의 진보적인 그림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스키아가 죽자 그는 하녀로 있던 헤이르테 디르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렘브란트가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른 하녀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일종의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발, 그를 법정에 세움으로써
엄격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네덜란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렘브란트는 이후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또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욕을 먹으면서도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아내 샤스키아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남겨진 유산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2×62cm / 177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루이스 멜렌데스(Luis Egidio Melendez, 1716~1780)는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1752년에 정식으로 출범한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전신 격인 곳에서 공부했고 상을 탄 이력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회원들 간의 불화로 인해 부자가 모두 아카데미에서 제명을 당하자 적당한 후원자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 많은 집 아들이라는 식의 낙인 때문에 왕실 화가로의 입성 역시 좌절한 그는 이탈리아 등지를 전전하다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재력 있는 후원자를 구하지 못한 많은 화가들이 그러하듯
멜렌데스는 주로 정물화를 선주문 없이 그려 직접 판매해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멜렌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을 훗날 카를로스 4세로 왕위에 등극하는 왕세자 부부에게 보내 인정받으면서 그림 주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세자 부부가 멜렌데스의 그림을 걸어두려고 했던 곳이 하필이면 왕립아카데미 건물 2층이어서 결국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아란후에스 궁정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사회가 심지어 미술계마저도 실력보다 인맥과 처세술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검은 배경, 명료한 선 그리고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묘사는 산체스 코탄이나 수르바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대상들의 표면 처리가 너무나도 뛰어나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거의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9×37cm / 177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크티스(Ichthys)’는 ‘Iesous Christos Theous Yios Soter’ 즉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딴 말과 일치한다.
기독교 박해시절, 신자들은 물고기 그림으로 자신의 종교를 암호처럼 드러내곤 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물화 속 물고기들은 바로 신앙의 고백이라 설명할 수 있으며, 빵이 놓여 있는 식탁은 ‘빵과 포도주’로 대변되는 미사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멜렌데스의 작품은 이런 설명보다는 그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으로, 일상에서 무심하게 보아오던 것들이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찬란하게 회복하는
‘사물 그 자체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라파엘 멩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당대의 유행을 좇아
엄격한 데생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화풍을 전개했다.
드레스덴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주로 초상화 작업을 했다. 그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미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과
함께 고대 조각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빙켈만은 ‘근대의 그리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 칭하며
모든 미술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빙켈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라파엘 멩스의 작품은 따라서 고대 조각상과도 같이 단단하고 완성미 높은 데생에 입각하여 차분하고도 고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또한 빙켈만 못지않은 이론가로 《회화에서 미와 취미에 관한 성찰》(1762)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멩스는 이탈리아 문화에 높은 취향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스 3세에게 발탁되어 스페인 궁정에 입성하게 된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속 그녀는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와 결혼한 직후의 모습이다. 고야가 그린 합죽이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주로 아란후에스에 거주하였는데, 그림 속 배경도 그녀가 자주 거닐던 그곳 정원일 것으로 짐작된다.
멩스는 이런 저런 잡다한 배경을 가능한 한 생략하고 단순화했고,
파스텔 색조에 꼼꼼한 세부 묘사, 선명한 윤곽선으로 인물의 품위를 드높였다.
라파엘 멩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속 카를로스 4세 또한 아직 젊어서인지 제법 훈훈한 미남이다. 멩스의 그림 속 그들은 30년 뒤 고야의 그림 속에서 보듯이 타락하고 다소 지쳤으며, 음모와 배신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고용한 화가 고야에게조차 조롱거리가 되지만,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욕함〉에서는 예수가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당하는 모욕을 담고 있다. 성서에 적힌대로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마테오의 복음서》 27장 29절) 예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벤스의 그림 속 남자들처럼 탄탄하고 다부지고 늠름하기까지 한,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