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알카사르(Alcazar)


알카사르(Alcazar)는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이며, 레콩키스타 시절 이슬람과 싸우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국에 있는 여러 알카사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세르반테스 언덕 위에 해발 548m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처음 지어져 관아로 사용되었고, 이후 이슬람 지배를 거쳐 카스티야가 수복한 후

이슬람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가 낡고 오래된 요새를 개축할 것을 명하여
1538년부터 1551년에 걸쳐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아들 펠리페 2세가 완공된지 10년만에 천도 이후 화재와 나폴레옹 전쟁, 스페인 내란 등으로 파괴었으나

1939년부터 1957년에 걸쳐 복구되었다. 현재는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데하르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빼어난 건축물이다.
최초 건축은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서고트인, 이슬람교도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되었다.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성이므로 이곳의 역사는 에스파냐 전쟁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에 불을 질렀고, 스페인 내란 때는 프랑코군의 모스카르도 대령이

공화파의 포위에 맞서 72일 동안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알카사르는 폐허가 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그 뒤 다시 지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 군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를로스 5세의 튀니지 정복 기념동상, 무기 변천사를 보여주는 전시실,

스페인 내란 당시 모스카르도 대령의 집무실, 군복 전시실 등이 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좋은 편이다.







군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품도 모두 군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시대별 전쟁과 무기 등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81182&cid=40942&categoryId=40283
https://blog.naver.com/roh_ys/221201525561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é)


톨레도의 산토 토메교회(스페인어: Iglesia de Santo Tomé)는 무데하르 양식의 탑과
엘 그레코가 1586년에 완성한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 소장되어 있어 매우 유명한 교회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성화에 관한 설명을 듣는 일행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Count Orgaz)

엘 그레코. 1586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물감. 480×358㎝. 에스파냐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이 작품은 산토 토메 교회의 수호성인이며 25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신실한 오르가즈 백작(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위해 두 명의 성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위쪽의 천국과 아래쪽 지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갑옷을 입힌 창백한 시신이 땅 속으로 내려지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천국의 가장 위에 있는 예수의 무릎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겨자 빛이 나는 노란색, 선홍색, 어두운 파란색이 내는 튀는 색조들이

이 장면을 어둠속으로 삼켜버리는 검은 배경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뒤쪽의 군중들 사이에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은 엘 그레코의 자화상으로 생각된다.
횃불을 들고 왼쪽 아래에 서 있는 아이는 엘 그레코의 아들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쪽-성모, 오른쪽-세례 요한 혹은 다른 성인...

이런식의 구도는 정교나 비잔틴미술-성화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디시스(Deesis)라고 하며 이콘Icon 그림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에서 배운 비잔틴의 특징(디시스)을 스페인 기독교의 그림에 접목시켰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그림은 하늘과 지상의 모습으로 나뉜다.
하늘에는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모, 세례요한이 있고 주변에는  성서 속의 성인과  펠리페2세, 식스투스5세도 함께 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오르가즈백작의 어린 영을 하늘의 자궁으로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부분


지상에는 죽은 오르가즈 백작을 들고 있는 성인 스데반(왼쪽)과 성오거스틴(오른쪽)이 있고,
주변에는 카톨릭 신자와 그 지역의 유지들,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도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엘 그레코 자화상, 아들-호르헤 마뉴엘도 보인다.
맨 오른쪽 안드레 누녜즈는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이다. 
완성된 작품이 훌륭해서 값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엘 그레코의 아들-호르헤 마뉴엘


성 스테파노의 맨 밑 옷자락에 순교하는 장면과 소년은 엘 그레코의 8살 아들로
옷에 삐져나온 손수건에는 출생연도 1587년이 적혀 있다.

위 그림 네모 안에 있는 인물이 엘 그레코 자화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75463&cid=42645&categoryId=42645

https://blog.naver.com/heredoggy/221379667394 





성구실(Sacristia, Sacristy) 입구


성가대석과 내진(메인 미사집전)을 마주보고 왼쪽에 위치한 성구실은

단순한 성구실이 아니라 톨레도의 작은 미술관이다.


작품도 평범한 것들이 아닌 엄청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고,

다른 방에는 중세 성직자들이 입었던 미사용 제복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구실 천정


성구실 천정 부분


성구실 천정 부분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엘 그레코. 1579년 제작. 캔버스에 유채. 285×173cm.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주문한 사람은

로마의 파르네제 그룹에서 사귀게 된 친구와 인연이 있던 톨레도 대성당의 사제장이었다.


대성당에서 사제가 의식용 옷을 입는 장소에 걸릴 예정이었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The Disrobing of Christ (El Espolio)>은 톨레도에서의 첫 작품이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돌며 오랜 수업을 거쳐 만든 엘 그레코만의 양식이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다.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이다.
이는 복음서에 특별히 기록된 순간은 아니고,

비잔틴 미술에 선례는 있지만 서유럽 기독교 미술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이다.


전경 오른쪽에는 십자가에서 못이 박힐 부분에 구멍을 뚫는 사람이 보이고,

이를 보는 세 명의 마리아가 전경 왼쪽에 보인다.

 
화면 중앙의 예수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조롱을 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모습은 예수의 옷을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복음서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중앙 왼쪽 갑옷을 입은 병사는 관람자를 바라보며 관심을 예수 쪽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로마군의 백부장,

혹은 [황금 전설]에서 예수의 피로 잘 안보이던 눈을 치료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군인 롱기누스,

혹은 본디오 빌라도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예수 손의 밧줄은, 처형장으로 가던 예수가 지쳐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자

군인들이 예수를 밧줄에 묶어 끌고 갔다고 한 성 보나벤투라의 글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의 그림 중에서는 가장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고전적 드로잉 수업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많은 인물들로 화면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한 화면에 모아놓고,

공간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 등은 피렌체의 폰토르모나 로마의 로소 피오렌티노가 개발한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다.


눈물이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엘 그레코가 창안한 것으로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예수와 하늘의 소통은 수직의 구름 기둥으로 표시되고, 그의 희생은 화면의 시각적 중심인 붉은 의상에서 강조된다.


주요 인물 의상의 선명한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은

화면 왼쪽 군인의 갑옷에 반사되어 색채의 화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교회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성직자들은 군중의 머리가 예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

복음서에 없는 세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점 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작품 완성 후 화가와 주문자가 합의해서 가격을 결정했는데,

이 작품의 경우 양자가 생각한 금액의 차이가 4배 정도나 되었다.


결국 둘 사이에 분쟁이 났다.

그 결과 화가는 원하는 가격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을 받았고, 교회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엘 그레코는 그림 값 문제로 분쟁을 자주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화가가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물건을 제작하는 장인이 아니라,

인문적 지식과 독창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문자의 수정 요구에도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가끔은 소송 비용이 그림 값보다 더 들더라도

작품 가격을 낮게 매기려는 주문자에 대항해, 예술적 자유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김진희 / 미술평론가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코. 1607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102 x 84cm. 톨레도 대성당


엘그레코(ElGreco)는스페인이 낳은 화가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일찍부터 미켈란젤로의 영향을받아 로마에서 수학한 후

나중에는 톨레도에 정착하면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종교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고 색채와 명암의 교묘한 대비로 인해

모든 화면에는 엘그레코 특유의 황홀한 흥분 상태가 감도는 독특한 그림이다.


수많은 빼어난 종교화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베드로의눈물’(1605~1610년제작)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왼쪽 팔목에는 주님으로부터 약속받은“하늘나라의 열쇠”(마태16,19)를 건채 두손을 꼭 마주잡고

허공을 우러러 보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은 엘그레코 특유의 길쭉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다.


흰머리칼과 얼굴 가득한 턱수염,완강한 근육을 가진 어부출신의 베드로는

알 수없는 허공의 한점을 우러러 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새벽 첫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한다.
항상 수건 한 장을 가슴에 넣고 다니며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뉘우쳐져 크게 울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울었으므로 베드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서 항상 짓물러 있었다고 한다.
 엘그레코가 그린‘베드로의눈물’이란 작품이 걸작으로 손꼽힌 것도 알 수 없는

허공을 우러러보며 울고 있는 베드로의 비통한 표정이

초자연적인 영성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던 것은 새벽닭이 운 순간이다.

이때“주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으므로”(루가22,61) 비로소 주님의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서에는 베드로의 눈물에 앞서 또 한사람의 눈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주님의 눈물이다.


주님은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리아 자매와 따라 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신 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흘리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주님의 눈물. 우리는 울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우리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나는 라자로처럼

비참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흐느껴운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문밖에서 울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신다.“이제 그만 나오너라.”


베드로가 주님의 으뜸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눈물을 엘그레코의 그림처럼

 ‘베드로의눈물’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 제 눈에도 주님처럼 눈물이 넘쳐 흐르게 하소서.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베드로처럼 흐느껴 울도록 하소서.

눈물로 우리는 영혼을 정화시키어 하느님의 영광 속에 죽음의 동굴을 벗어나게 하소서. 최인호 / 소설가

<화가의 모습을 한 성 누가> 엘 그레코. 1608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53 x 71cm. 톨레도 대성당


16세기 종교화의 대가 엘 그레코는 톨레토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령 크레타에서 태어났지만 40 여 년 간 톨레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이 있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통칭된다.
엘 그레코의 흔적은 톨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산타 크루즈 미술관, 톨레도 대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단 병풍 뒤쪽
승천을 의미하는 엘 트란스파렌테(투명하다는 의미)에는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신비함을 더한다.

제단 병풍 뒤쪽 부분


회랑 끝에 있는 묘지
대주교 Tenorio 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그의 무덤 역할을 겸한  예배당을 계획한 듯하다.

회랑 끝에 있는 묘지


참사회 회의실(Sala Capitular)
여기는 역대 추기경들의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고, 추기경들이 사용하던 물품들도 있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스페인 여행-톨레도]금실로 그리는 그림 ‘다마스키나도’/Damasquinado/Film/Lord of the Ring/Golden Yarn



참고 : https://minipak93.blog.me/30145776148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톨레도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이며, 중요한 예술적 보배들을 간직한 곳이다.
이 유명한 성당은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 깊은 건물 중 하나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유럽 북부의 거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매혹적인 새로운 요소가 이에 더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모습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 마르틴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짓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기초 작업은 페트루스 페트리가 맡았는데 그는 1291년에 사망했다.


고딕 양식이 지배적이지만, 건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세워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지금도 오래된 서고트 족의 예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는 '모사라베 예배당'(1504)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회랑은 무데하르 양식, 즉 기독교 통치기까지 살아남은 무어 양식의 특징을 몇 가지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 요소는 세 개의 중앙 현관 위편에 새겨진 복잡한 조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아마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보배 덕택일 것이다.

하나는 '트란스파렌테'(1721~1732)라는 이름을 가진 나르시소 토메의 작품으로,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제작한 놀라우리만치 화려한 제단 장식이다.


그는 윗편의 둥근 천정을 깎아 구멍을 내 자신이 조각한 인물상들이

태양 광선을 받아 영적인 빛으로 이루어진 후광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마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엘 그레코의 장엄한 그림 <엘 에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일 것이다.


엘 그레코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나 예술적 이력 대부분을 톨레도에서 쌓았으므로

톨레도 대성당이 그의 걸작 중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썩 어울리는 일이다.
이러한 예술적 보물들 덕택에 이 건물은 성당인 동시에 박물관이기도 하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톨레도 대성당에서 보물실의 백미라 불리는 가장 유명한 보물이 바로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이다.
성체(聖體, 예수님의 몸) 강복 때 성체를 올려놓는 대(臺),  금은보석으로 꾸민 높이 3m, 무게 180Kg의 화려한 모습이다,
성체현시대 중앙에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있다.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금은보석은 주로 남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부분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아랫부분


왕관


보물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


파이프오르간


[스페인 여행-톨레도]그라나다 정복 역사가 새겨진 ‘톨레도 대성당’/Toledo Cathedral/Transparent



참고 : http://blog.daum.net/nhk2375/7165936




톨레도(Toledo)


톨레도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70킬로미터(km) 거리에 있는 인구 6만 여 명의 작은 도시로,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전 1천 여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로마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고트 왕국, 이슬람 왕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삼면이 타호 강으로 둘러싸인 바위산 위에 건설되었고,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고향인 카스티야-라 만차 지방 톨레도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덕분에 톨레도에는 로마시대 유물인 원형경기장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유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사실상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단위 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 중에 하나로 꼽힌다. 


각종 종교 시설이나 박물관은 물론 일반 가정집까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 때문에 1561년 필리페 2세의 천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상실되었어도

톨레도는 여전히 스페인의 정신적인 수도로 불리고 있다.


톨레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데하르 양식 건축물이다. 
무데하르는 이슬람 지배가 끝난 뒤에도 스페인에서 살았던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며,

무데하르 양식이란 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과 서구 문화가 결합된 건축 양식이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다.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이전의 건축물로는 비브알마르돔 모스크, 라스토에르네리아스 모스크 등이 있으며,
그리스도교도가 지배한 이후에도 무데하르 양식은 계속되었다. 


 산티아고 데 아라발 성당,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와 트란시토 시나고그(유대인 교회) 등도

무데하르 양식의 건축물이다.


16세기 종교화의 대가 엘 그레코는 톨레토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령 크레타에서 태어났지만 40 여 년 간 톨레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이 있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통칭된다.
엘 그레코의 흔적은 톨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고 산타 크루즈 미술관, 톨레도 대성당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톨레도는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랜 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며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기념지로 선포되었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톨레도(Toledo) 전경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랑받는 광기, 돈키호테(Don Quixote)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키호테는 400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친숙하게 화제에 올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재창조되면서 늘 사람들 곁에 머물러왔다.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재기 발랄한 시골 귀족 라 만차의 돈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의 주인공이다.


소설이 발표된 이후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에 빠져 어이없는 소동을 일삼는 충동적 몽상가로 회자돼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이상을 위해 행동을 아끼지 않는 불굴의 인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우스꽝스럽긴 하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한번쯤은 그처럼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 됐다.


돈키호테의 장엄한 이야기는 라 만차라는 스페인의 어느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는 쉰 가까운 나이에도 군살 없이 골격이 튼튼하고 얼굴이 삐쩍 마른 시골 귀족이었다.


마흔이 넘은 가정부와 스무 살이 채 안된 조카딸과 함께 농사일을 관리하며 살아가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기사소설에 탐닉하게 된다.

당대 유행하던 기사소설에 너무 빠져든 그는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고, 책을 사느라 경작지까지 모두 팔아치운다.


며칠이고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책을 읽던 그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모두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결국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 미쳐버린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기로 마음먹는다.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칼과 창,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아래 덮개가 떨어져 나간 투구를 어설프게 손질한다.
그리고 당당한 기사로서 ‘돈키호테 데 라 만차(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인다.


또 머리는 부스럼투성이인데다 볼품없이 삐쩍 마른 자신의 말에도 ‘로시난테(Rosinante)’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다.

돈키호테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같은 마을 농부인 산초 판사(Sancho Panza).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입담 좋고 착한 그는 돈키호테의 충직한 하인이 된다.


산초 판사는 섬 하나를 정복한 후 그 섬의 영주로 앉혀주겠다는 돈키호테의 약속에 솔깃해져 처자식을 남겨두고

험난한 모험의 길에 함께 나선다.


돈키호테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으며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하며 긴 여정을 시작한다.


비록 망상에서 비롯된 다짐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약하고 상처받은 자에게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악당으로 ‘보이는’ 상대를 마주하면 불굴의 용기를 발휘한다.


돈키호테가 벌인 우스꽝스러운 소동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는 풍차와 벌인 싸움이다.
평원을 지나던 중 멀리 풍차 30~40개가 나타나자 풍차들을 거인들로 착각하고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든다.

산초 판사가 그건 풍차일 뿐이라며 만류하지만 어느새 세차게 돌아가던 풍차 날개에 부딪혀 로시난테와 함께 나둥그러진다.


기행은 멈추지 않는다.

신부가 인도하는 장례 행렬을, 억울하게 죽은 자의 시신을 탈취한 악당의 무리로 여겨,

신부에게 시신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다.


초원의 양떼를 적군의 행렬로 착각해 양들을 공격하다 목동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어느 이발사의 면도용 대야를 빼앗고는 그게 진귀한 황금투구라며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사악한 무리’를 무찌르기 위한 공격에서 어쩌다 재수 좋게 ‘승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두들겨 맞는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돈키호테의 소동으로 산초 판사는 물론 로시난테,

그리고 산초의 당나귀도 함께 고초를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 성한 곳 없이 다치더라도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돈키호테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연민도 스며 있다.


한번은 양떼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여러 달 밀린 품삯을 주지 않고

어린 하인을 학대하는 농부를 크게 꾸짖으며 매질을 멈추게 하고 밀린 품삯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사내의 슬픈 사연을 들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위로를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모험은 서서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롱을 보낸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이해심이 그의 광기 이면에 숨어 있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돈키호테를 자신들의 저택에 정중히 초대해

돈키호테의 망상에 맞장구치며 함께 생활한 어느 공작 부부도 있었다.


이들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고는

실제로 산초에게 바라따리아라는 섬을 다스리도록 해준다.
섬으로 떠나기 전 산초에게 건넨 충고에서 돈키호테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행동으로 벌을 주어야 될 사람을 말로 학대하지는 말게.
그 불행한 자에게는 형벌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한데, 다른 나쁜 말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관할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본성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나."


라 만차 마을 신부는 돈키호테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돈키호테와 같은 고향 사람인 산손 카르라스코라는 학사는 신부와 함께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지체 높은 부자가 만류한다.

“돈키호테가 그의 허튼 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결국 신부, 이발사, 학사 등 고향 마을 사람들은 속임수를 써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마을로 데려온다.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쯤 지나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고 알론소 키하노 영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돈키호테는 숨을 거둔다. 제정신을 되찾자 곧 세상을 떠난 것이다.
꿈꾸지 않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며, 그런 그에게 삶이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후 400년 동안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톨레도 구 시가지 전경


톨레도 구시가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도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다. 
도심의 미로처럼 얽힌 좁은 길은 이슬람 도시의 특징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 점령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 곳곳에는 중세의 향기가 가득하다.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 톨레도 대성당은 순수한 스페인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길이 120미터(m), 폭 60미터의 위풍당당함에 세련된 건축과 조각,

엘그레코, 발라스케스 등의 예술 작품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다.


로마 시대에 건축되어 서고트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 된 알카사르도 톨레도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스페인 내전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축물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무데하르 양식에 고딕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언덕 위에 알카사르(Alcazar) 건물이 보인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성밖 타호(tajo)강 풍경


타호(tajo)강

타호(tajo) 강이 반원을 그리며 도시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중세도시로서, 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타호(tajo)강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타호강(江)에 놓인 고딕 양식의 다리이다.

이전에 있던 다리는 1023년의 홍수로 손상되었고 14세기 말에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가 보수하였다.


산마르틴 교구와 가깝다고 하여 산마르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5개의 아치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아치는 길이가 40m이다.

양쪽 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또 다른 것은 16세기에 세워졌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고 톨레도를 지켜온 다리로

오늘날에는 중세 도시의 자취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타호강에는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도 놓여 있다.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산마르틴 다리(San Martin Bridge)에서 가이드와 함께


알칸타라 다리(Alcantara Bridge)


타호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중세의 산세르반도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제국 오현제(五賢帝) 중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치세인 104년에서 106년 사이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왕인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 때 재건하였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語)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강에는 산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알칸타라 다리를 건너면 다리끝 아래 타호강 강변에 La Cubana (애저 요리 전문점 34-925-220088) 레스토랑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애저 요리로 유명한 라쿰바나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레스토랑은 창가에서 바라다보이는 타호강과 알칸타라 다리 또한 일품이다.



애저 요리


애저요리는 스페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배내에 있거나 막 태어나 사료를 먹기 전까지의 새끼 돼지.
우리나라에서 새끼 돼지를 이용하는 애저 요리는 조선 시대 중엽에 시작됐다.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에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 요리이다.

전라북도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겨 먹은 보양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안에서는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를 찬물에 1~2시간 담가서 핏물을 제거한다.
돼지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전피·인삼·마늘·생강·청주를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다 삶아지면 밤·은행·대추·양파·대파를 넣어 한 번 더 끓여 양념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삼베 보로 싸서 편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며 탕으로 끓이기도 한다.

애저 요리


스페인에서는 도살장에서 태어난 지 20일에서 21일 된 새끼 돼지를 구입하여 레스토랑으로 전달되는데
이미 도살장에서 배를 갈라 창자 등의 내장을 모두 꺼내 보내진다.


커다란 타원형의 질그릇에 새끼 돼지는 가느다란 나무 판을 대고 올려지는데

그 아래엔 사분의 일의 물이 고여 있어야 한다.


배를 뒤집어서 올린 후 소금을 뿌리고 장작 오븐에 넣어진다.

180도의 온도로 1시간 30분 살이 부드럽게 익혀지도록 한다.


물을 넣는 이유는 수분으로 살이 퍽퍽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오븐이 가장 중요한데 전기 오븐으로는 이러한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 오븐은 지붕을 둥그런 것을 가장 고급 재질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오븐에 따라 맛이 승부를 낸다고 한다.

둥그런 지붕안에서 열이 회전을 하면서 맛이 좋게 익혀진다.


하얀상태에서 익혀지면 다시 꺼내 뒤집는데 (배가 밑으로)

이번에는 돼지 기름으로 만든 버터를 껍질에 칠을 하고200도로 온도를 조절한 후 45분을 더 익힌다.

금색으로 껍질이 서서히 변해갈때까지 익힌다.

성벽
점심을 먹고 산마르틴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간다.

성벽 출입문


톨레도 대성당 앞 골목길



스페인 미궁의 고도, 톨레도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56691&ref=y&cid=40942&categoryId=4024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67827&cid=51089&categoryId=51089
https://structurae.net/structures/san-martin-bridge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0178&cid=51949&categoryId=5520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24&cid=40942&categoryId=4028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83383&cid=40942&categoryId=32348
https://cafe.naver.com/firenze/583113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amgomna&logNo=221358712971





마드리드 왕궁 관람을 마치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알무데나 성모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알무데나 성모대성당(Catedral Nuestra Senora de la Almudena)


흔히 줄여서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la Almudena)이라고 한다. 왕궁 주변에 있다.
16세기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문제와 에스파냐 내전, 재정 결핍 등의 이유로 1789년에야 완성되었다.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당시 아랍어로 '알무데나'라고 부르는 성벽에서 성모상이 발견된 데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후 마드리드를 정복했을 당시 성모상을 성벽에 숨겨둔 것으로 추측된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알무데나 대성당 종탑


알무데나 대성당 돔


알무데나 대성당 기둥


요한 바오로 2세 동상









알무데나 대성당은 마드리드의 수호 성모 알무데나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한다.
예전에 무슬림들이 스페인의 일부를 지배했었는데, 그 당시 무슬림 공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벽에 숨겨두었던 성모마리아 상이 300년뒤에 우연히 발견되면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 보이는 성모마리아 상이 바로 그 성모상




파이프오르간


스테인드 글래


천장에 그려진 그림도 다른 대성당과는 다르다. 마치 별이 떨어지는 것같은 느낌의 그림






알무데나 성모대성당 관람을 마치고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솔(SOL), 시벨레스(Cibeles), 콜론 광장을 둘러본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이 거대한 광장은 축하 행사, 종교 의식, 처형 등을 거행해 온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입구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카페, 바, 상점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전경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 제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솔(SOL) 광장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은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불린다.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한다.


솔(SOL) 광장의 상징 곰 동상
마드리드 지역의 옛 이름은 우르사리아(Ursaria)였고 그 의미는 '곰의 땅'이라는 뜻이어서 곰 동상이 마드리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소귀나무 열매(산딸기)를 먹는 곰 동상
곰의 왼쪽 발꿈치를 만지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부분만 칠이 다 벗겨져 있다.


솔(SOL) 광장 곰 동상 근처 이 자리가 버스킹을 하기에 명당 자리인가 보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이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통치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이탈리아 통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759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계몽전제군주로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층보다

중산층과 계몽 지식인들을 통하여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부동주의에 갇혀 있던 스페인 민중은 1766년 에스킬라체 난을 통하여 반발하였고,
이후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의 추방이나 파블로 데 올라비데의 프로젝트와 같은

보다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통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선왕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는 행정 개편과 세 번째 부왕령의 설치를 통해

효율적인 통치와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카를로스 3세 동상 윗부분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파르네제의 이사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줍은 성격에 책임감이 강했으며 이복형들에 밀려 스페인 왕위계승은 요원해 보였다.


모친 이사벨은 이탈리아 영토들을 되찾아 자신의 아들들에게 주길 원했고, 실제로 1724년 비인조약을 성사시켜
카를로스가 안토니오 파르네제의 사후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는 데 기여했다.


1724년 펠리페 5세의 장남인 루이스 1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사벨은 왕세자로 있던 페르난도 대신 남편 펠리페 5세가 재차 통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는 노쇠해진 왕 대신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고,
아울러 왕세자의 건강이 이상 징후를 보일 때마다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사벨 왕비는 1733년 프랑스와 첫 번째 왕가협정을 체결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고,
실제로 다음 해 카를로스는 나폴리를 공격하여 부친의 이름으로 이곳을 통치하였다.


이후 비인평화조약을 통하여 카를로스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는 대신

나폴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3세 초상화>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 캔버스에 유화. 1765년경 제작. 151.1cm×109cm. 마드리드 프라다 미술관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가 자손이 없이 1759년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앞서 체결된 1748년 아헨 조약에 따라서

스페인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카를로스 3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앞서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서 감행한 여러 개혁들은 그가 스페인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이 되었으며,
카를로스 3세가 모든 영역에서 계몽군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개될 유럽의 대 격변을 보지 못하고

1788년 12월 14일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죽기 전 뒤를 이을 카를로스 4세의 통치를 염려하여

1777년부터 자신의 대신으로 있었던 플로리다블랑카를 곁에 두도록 당부할 정도였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계몽전제군주로서 동시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나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2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조치들은 스페인의 전통주의와 부동주의에 부딪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후대에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스크 기념비
시벨레스 광장으로 가던 중,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 있다.


시벨레스(Cibeles) 분수


분수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수사자 두 마리라 끄는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여인의 조각이 있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 시벨레스의 형상이며 광장의 명칭도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각작품은 18세기에 제작되었고 스페인 신고전주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시벨레스 궁전


시벨레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ibeles)은 마드리드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원래는 코무니카시오네스궁(스페인어: Palacio de Comunicaciones)이라 했다.


알칼라 문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있다. 1778년에 카를로스 3세의 명으로 궁정 건축가 사바티니가 건축했다.
문이 위치한 곳은 19세기 말까지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가 되었는데,
아라곤에서 이 문을 통해 마드리드로 오는 상인들에게 마드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해 세웠다.


문에는 5개 통로가 있는데, 중앙의 3개는 아치 형태이다.
양쪽 끝 통로 상단에는 장식이 붙어 있다. 알칼라문 주변을 에스파냐 독립을 기념해 독립광장이라고 한다.

콜론광장 콜럼버스 기념탑


콜론 광장에는 거대한 콜럼버스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거대하면서 높은 기념탑 꼭대기에는 콜럼버스가 서 있다.
콜럼버스의 스페인어 이름이 콜론이라고 한다.


콜럼버스, 하면 아무래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그가 찾아낸 건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것.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다던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덕분에 그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엄청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쳐왔던 것이다.

콜럼버스 기념탑 윗부분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해다.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졌다.
대서양을 지나서 인도로 가고자 했던 그는 인도에서 엄청난 황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배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물주였다.

포르투갈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스페인으로 갔다.


이사벨 여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여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1492년 8월 3일, 꿈에도 그리던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도를 찾아내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항해에 성공했을 경우 우선 세습귀족 자격과 해군제독의 계급

그리고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과 무역거래에 8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자격과 권리가 후손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을 찾아낸 콜럼버스는 이후 3차례 더 신대륙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고 한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더 이상 그를 받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왕의 후광이 사라진 그는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 기념탑 아랫부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했던 ‘세습’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세비야에 있는 까떼드랄에 있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은 뒤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고, 스페인 곳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광장도 생겨났다.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콜론 광장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건물은 또 있다. 쌍둥이 빌딩인 콜론 타워(Torres de Colón).
스페인 건축가 안또니오 라멜라(Antonio Lamela)가 설계를 했다는 이 건물은

196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102m인 이 빌딩들은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데, 위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두 빌딩을 연결한 구조물의 모양이 플러그와 똑같아 스페인 사람들은 '엥추페(El Enchufe)'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콜론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 국립도서관이 있다. 앞에서 보면 도서관이고 뒤로 돌아가면 국립고고학박물관인 건물이다.
국립도서관과 국립고고학박물관 안에는 일반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한다.

스페인 국립도서관


고풍서린 건물에 여섯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뻬 5세가 1712년에 세운 왕궁도서관이 훗날 소유권이

왕실에서 내각으로 넘어가면서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상


국립도서관 앞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이사벨 여왕 동상


도로 곁에는 이사벨 여왕이 말을 탄 채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옆에 설치된 두 개의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이사벨 여왕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참조 : https://blog.naver.com/wnfusmlekd/2213190631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5&cid=40942&categoryId=31593

https://jbhm1004.blog.me/2209244760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0694&cid=56790&categoryId=567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706&cid=40942&categoryId=4025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491&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327&cid=42864&categoryId=50859
http://blog.ohmynews.com/olives/499019





마드리드 왕궁 (Palacio Real de Madrid)


마드리드 왕궁은 스페인 건축물의 절정이라고 평가받는 마드리의 대표적인 명소로 그 화려함과 규모에 놀랄 만하다.
18세기에 지어진 왕궁은 역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9세기 이슬람의 알카사르(요새)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왕궁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때 화재로 미술품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루이 14세의 손자였던 펠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 건축가 유바라에게

베르사유 궁전처럼 지으라고 했지만 착공 전에 사망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쳤다.


이후 그의 제자 사케티가 프란시스코 데 사바티니, 벤투라 로드리케스 등과 함께

1764년 왕궁을 완공하여 현재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왕궁의 주된 건축 양식은 고전주의 바로크 양식이다.
현재 국왕 일가는 교외의 사르수엘라 궁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외에는 일반에게 공개된다.

사방 150m의 왕궁 내부에는 3,000여 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을 관람할 수 있다.


사케티가 설계한 왕관의 방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매우 화려하다.

베네치아 화가 티에폴로가 그린 천장화도 볼 수 있다.


가스파리니 방은 마테오 가스파리니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드레스룸이다.
도자기 방은 벽면이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고, 1880년에 지은 연회장은 알폰소 12세가 왕비를 위해 지었는데

164명이 식사할 수 있는 유럽 최대의 연회장이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콜럼버스가 가톨릭 부부왕에게 신대륙을 바치는 모습이다.
2,500여 개에 이르는 태피스트리와 고야, 보슈,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의 회화,

화려함의 극치인 금은 세공품, 샹들리에 등 볼거리가 매우 풍성하다.


마드리드 왕궁의 전면


원래 9세기에 세워진 무슬림의 요새가 있던 자리로, 무슬림이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새를 궁전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대형 화재로 소실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출신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펠리페 5세가

이 자리에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왕궁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가 설계를 끝내고 착공 전 사망하자

그의 제자였던 사게티가 승계받아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와 함께 17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 거주하지는 않는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가스파리니 방’,

벽 전체가 황금 비단으로 꾸며져 있는 ‘황금의 방’, 145명이 한꺼번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탁이 자리한 ‘연회장’에서

스페인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왕궁 안의 아르메리아 광장에 있는 약물 박물관도 왕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코스이다.

마드리드 왕궁 전면
마드리드 왕궁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여는데 3천여 개의 방중에서 50여 개만 개방하고 있다.


마드리드 왕궁


궁전 아래의 서쪽 편에는 정원이 있다. 스페인어로는 "캄포 델 모로"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이슬람 군주가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마드리드를 탈환하고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성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사바티니 정원이 위치한다. 이 정원은 정원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펠리페 왕자와 레티시아 오르티스 왕세자비 결혼식이 2004년 5월 22일 궁전의 중앙 광장에서 치러졌다.

펠리페 4세(Felipe IV)의 동상


광장 중앙에는 펠리페 4세(Felipe IV)의 동상이 있다. 마요르 광장 중앙에 있는 펠리페 3세의 아들이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정치를 등한시하고 사치를 일삼는등 스페인의 전성기를 끝내기 시작했고

펠리페 4세는 30년간의 전쟁에서 패하는 등 그리 존경 받을만한 인물들이 아님에도 이들이 마드리드의 중심지에 있는 것은

이들도 스페인 역사의 분명한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마상은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피에트로 타카(Pietro Tacca)의 작품.
기마상 주변으로는 네 귀퉁이에 청동 사자상이 있고 우화를 기반으로한 조각들과 분수가 있는데 19세기에 추가된 것이라 한다.



마드리드 왕궁 옆면


매월 첫째 수요일 정오에는 왕궁의 위병 교대식이 있다.

마드리드 왕궁 조감도


마드리드 왕궁 후면



마드리드 왕궁 후면 상단


카를로스 3세 조각상

1층 통로에 카를로스 3세의 조각상이 있다.


제우스 조각상

우측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제우스 조각상이 있다.


계단을 올라서 바라본 천정


계단 위 천장에 그려진 로코코 양식의 천장화가 눈길을 끈다. 
18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인 코라도 지아갱토(Corrado Giaquinto)의 프레스코화이다.

계단 위 프레스코화 아래쪽으로는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창이 배치되어 있다.


계단 위에서 바라본 마드리드 왕궁 내부의 모습


제우스 조각상 아래에 걸려 있는 스페인 국장은 스페인 왕을 상징하는 왕관 아래로 15세기 스페인 통일 이전의 다섯 왕국인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그라나다 왕국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왕의 거실 천장화


18세기 이탈리아 출신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그림으로
비너스라고도 불리는 아프로디테와 로마의 시조라 불리는 그의 아들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이야기를 담은 것.

태피스트리(Tapestry)


이 태피스트리는 성경 사도행전 13:6~12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중간에 새겨있는
"L. SERGIVS PAVLIVS ASIAE PROCOS: CHRISTIANAM FIDEM AMPLECTITVR. SAVLI PREDICATIONE"

라는 라틴어는 성경 사도행전 13:6~12에 등장하는 서기오 바울이 믿음을 갖게 된것을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의 작품이다.

유럽의 왕궁과 귀족이 사는 집에는 어김 없이 등장하는 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Tapestry)는 염색된 실로 짠 그림으로 인한 장식 효과 뿐만 아니라

방한, 방풍, 방음, 햇빛 가림 등의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했다고도 한다.

웅장한 기둥과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


내부 장식

마드리드 왕궁은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티에폴로, 고야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궁전의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내부 장식


내부 장식


스페인 왕가가 수집해온 역사적인 작품들이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13세기 이전의 무기를 비롯하여 포르셀린, 가구 등도 소장품에 속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보틴 레스토랑은 1725년에 오픈하여 지금까지 계속 영업을 해온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다.
기네스북에도 공식적으로 등재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레데리 포사이드 등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하는 유명작가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헤밍웨이는 실제로 자주 왔다고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많이 먹는 음식은 당연히 장작화덕에 구운 코치니요(애저구이)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에서 점심식사 기념으로 인증샷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이라고 기네스북 등재되었다는 인증서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의 역사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듯.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 방법인 듯.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내부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주인이 직접 요리하고 서빙도 한다.


Baby pig 요리 하몽. 돼지다리를 몇 개월에서 몇 년간 말리면 하몽이 만들어진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요리실


레스토랑 보틴(restaurante sobrino de botin) 테이블. 식전 빵


구운샐러드와 새끼통돼지구이와 감자 요리


왼쪽 Baby lamb과 오른쪽 Baby pig 요리.


양고기는 소고기보다 엷으나 돼지고기보다 진한 선홍색이다.
근섬유는 가늘고 조직이 약하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고 특유의 향이 있다.


성숙한 양고기는 향이 강하며, 이 특유의 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조리할 때, 민트(박하)나 로즈메리를 많이 이용한다.
생후 1년 미만인 어린 양의 고기는 새끼양고기(lamb)라고 하며

생후 12 ~ 20 개월의 고기는 이얼링머턴(yearling mutton)이라고 한다.

Baby pig 요리


Black sausage from Burgo.

순대같이 생긴 이 음식은 블랙 소시지이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39500416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93%9C%EB%A6%AC%EB%93%9C_%EC%99%95%EA%B6%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4655&cid=42864&categoryId=50859
http://yaraba.tistory.com/1041
http://yaraba.tistory.com/104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ksrmfkal&logNo=22010010686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01099&cid=48180&categoryId=48246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v5photo&logNo=221100483697

https://blog.naver.com/planet_tour/220004955504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아르테미시아〉 캔버스에 유채 / 142×152cm / 163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구가한 화가였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답게 그는 카라바조를 연상시키는 명암법을 주로 썼으나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인 빛을 구사해 다소 슬프고도 애잔한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 그림은 샤스키아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여주인공은 기원전 4세기경 오늘날 터키 보드룸에 있던

카리아의 여왕 아르테미시아(ArtemisiaⅡ ?~BC 350?)이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지은 마우솔로스의 묘 ‘마우솔레움(Mausoleum)’은

그 거대함과 정교함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아르테미시아에 관해서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유해를 태운 뒤 남은 재를 잔에 넣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아르테미시아는 강한 부부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혹적인 빛을 듬뿍 받은 채 아르테미시아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여종이 잔을 들고 앉아 있다.


렘브란트는 여종의 등에 닿는 빛뿐 아니라,

여왕을 비췄다가 반사되어 다시 여종의 얼굴을 밝히는 빛까지 그려냈다.


화면 왼쪽은 짙은 어둠이지만 여분의 빛으로 어렴풋하게 형체를 드러낸

또 다른 여종의 모습이 보인다.


레이덴 출신의 렘브란트는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엄청난 지참금의 소유자였던 샤스키아와 결혼에 성공하면서 인생의 절정을 달리게 된다.

그러나 샤스키아가 죽은 뒤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감한 붓질에 물감 덩어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대담한 그의 화풍은
매끈한 채색과 명료하고 단정한 고전적인 취향으로 돌아선 네덜란드 사회에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그의 몰락은 비단 자신의 진보적인 그림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스키아가 죽자 그는 하녀로 있던 헤이르테 디르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렘브란트가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른 하녀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 일종의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발, 그를 법정에 세움으로써

엄격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네덜란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렘브란트는 이후 헨드리케 스토펠트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또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욕을 먹으면서도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아내 샤스키아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남겨진 유산을 한 푼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2×62cm / 177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루이스 멜렌데스(Luis Egidio Melendez, 1716~1780)는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1752년에 정식으로 출범한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전신 격인 곳에서 공부했고 상을 탄 이력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회원들 간의 불화로 인해 부자가 모두 아카데미에서 제명을 당하자 적당한 후원자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 많은 집 아들이라는 식의 낙인 때문에 왕실 화가로의 입성 역시 좌절한 그는 이탈리아 등지를 전전하다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재력 있는 후원자를 구하지 못한 많은 화가들이 그러하듯

멜렌데스는 주로 정물화를 선주문 없이 그려 직접 판매해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멜렌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을
훗날 카를로스 4세로 왕위에 등극하는 왕세자 부부에게 보내 인정받으면서 그림 주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세자 부부가 멜렌데스의 그림을 걸어두려고 했던 곳이 하필이면 왕립아카데미 건물 2층이어서
결국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아란후에스 궁정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사회가 심지어 미술계마저도 실력보다 인맥과 처세술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검은 배경, 명료한 선 그리고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묘사는 산체스 코탄이나 수르바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대상들의 표면 처리가 너무나도 뛰어나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거의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루이스 멜렌데스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49×37cm / 177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2층 87실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크티스(Ichthys)’는 ‘Iesous Christos Theous Yios Soter’
즉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딴 말과 일치한다.


기독교 박해시절, 신자들은 물고기 그림으로 자신의 종교를 암호처럼 드러내곤 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물화 속 물고기들은 바로 신앙의 고백이라 설명할 수 있으며,
빵이 놓여 있는 식탁은 ‘빵과 포도주’로 대변되는 미사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멜렌데스의 작품은 이런 설명보다는 그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으로,
일상에서 무심하게 보아오던 것들이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찬란하게 회복하는

‘사물 그 자체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라파엘 멩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당대의 유행을 좇아

엄격한 데생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화풍을 전개했다.


드레스덴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주로 초상화 작업을 했다.
그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미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과

함께 고대 조각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빙켈만은 ‘근대의 그리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 칭하며

모든 미술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빙켈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라파엘 멩스의 작품은 따라서 고대 조각상과도 같이
단단하고 완성미 높은 데생에 입각하여 차분하고도 고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또한 빙켈만 못지않은 이론가로 《회화에서 미와 취미에 관한 성찰》(1762)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멩스는 이탈리아 문화에 높은 취향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스 3세에게 발탁되어 스페인 궁정에 입성하게 된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속 그녀는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와 결혼한 직후의 모습이다.
고야가 그린 합죽이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주로 아란후에스에 거주하였는데,
그림 속 배경도 그녀가 자주 거닐던 그곳 정원일 것으로 짐작된다.


멩스는 이런 저런 잡다한 배경을 가능한 한 생략하고 단순화했고,

파스텔 색조에 꼼꼼한 세부 묘사, 선명한 윤곽선으로 인물의 품위를 드높였다.

라파엘 멩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 152×110cm / 1765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0실


〈왕세자 시절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속 카를로스 4세 또한 아직 젊어서인지 제법 훈훈한 미남이다.
멩스의 그림 속 그들은 30년 뒤 고야의 그림 속에서 보듯이 타락하고 다소 지쳤으며,
음모와 배신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고용한 화가 고야에게조차 조롱거리가 되지만,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4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체포〉 캔버스에 유채 / 344×253cm / 1620~1621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는 루벤스의 수제자로 안트베르펜에 있던 공방에서 그림을 익혔다.
그는 루벤스가 바쁠 때 스승을 대신하여 공방 일을 건사할 만큼 신임이 두터웠고, 그만큼 실력 또한 출중했다.


루벤스의 추천을 입고,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재력과 권력을 겸비한 후원자들을 만나면서
초상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그는 역시 루벤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은 초기작으로,
말년의 엄격하고 기품 있는 단정하고 정적인 선과 색을 주로 사용한 그림들과 달리 루벤스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리스도의 체포〉는 겟세마네에 올랐다가 유다를 대동한 로마 병사들에게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암흑을 밝히는 횃불 하나가 그림 왼쪽 중앙에 그려져 있다.
이 작은 빛에 노출된 그림 속 인물들의 꿈틀거림은 단번에 루벤스를 연상시킨다.

〈그리스도를 모욕함〉 캔버스에 유채 / 223×196cm / 1618~162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8실


〈그리스도를 모욕함〉에서는 예수가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당하는 모욕을 담고 있다.
성서에 적힌대로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마테오의 복음서》 27장 29절) 예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벤스의 그림 속 남자들처럼 탄탄하고 다부지고 늠름하기까지 한,

소위 아이돌 스타 같은 몸을 자랑한다.

<구리뱀> 캔버스에 유채 / 205×235cm / 1618~162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구리뱀〉 속 다부진 체격의 남자들과 흐트러진 금발의 여인,

과장된 자세와 박진감 넘치는 구도 또한 스승을 닮아 있다.


그림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힘겨운 여정에 지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노한 하나님은 독이 있는 뱀을 풀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다.


이에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러면 죽지 않으리라”(8절)라고 말했다.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T자형 기둥에 달아, 이들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

구약과 신약의 예표론에 의하면, T자형 십자가에 매달린 구리뱀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예시한다.


이 그림들은 모두 안토니 반 다이크가 스무살 남짓 때 그린 것으로,
당시 마흔을 넘겨 절정에 달한 스승 루벤스의 관록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모두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8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스의 심판>. 패널에 유채. 199×379cm. 1639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29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플랑드르 바로크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화가였다.
카라바조의 바로크가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통해 관람자의 심리를 압박한다면 루벤스는 단연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선과

다채로운 색으로 동영상의 한 장면 같이 살아 꿈틀대는 느낌을 주는 ‘동적인 바로크’의 대가라 할 수 있다.


루벤스는 훤칠한 외모와 언변, 그리고 그 언변을 든든하게 받쳐줄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로,
심지어 다섯 개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사교적인 성품까지 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교관 노릇까지 했다.


새로 지은 부엔레티로 궁을 장식하기 위해 펠리페 4세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다량의 작품을 주문하였다.
루벤스의 경우는 거의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기로 계약되었는데, 〈파리스의 심판〉도 그중 하나다.


그림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자신 앞에서 한껏 미모를 과시하는 세 여신을 심사하는 장면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연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과를 신들의 식탁에 던졌다.


하지만 누구를 뽑아도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을 염려한 신들은 그 사과를 인간 세상으로 던져버렸다.
신들의 분란이 인간 세계의 분란으로 이어진 것을 그림 속 파리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뱀이 꼬여 있는 지팡이를 늘 들고 다니는 머큐리(헤르메스)가 서 있다.

물망에 오른 세 여신 중 가장 왼쪽은 미네르바이다.


곁에 있는 방패를 통해 전쟁의 여신인 그녀를 식별할 수 있다.
중앙의 여신은 화살통을 맨 아들 큐피드를 대동하고 있어 비너스임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모피 옷을 걸친 오른쪽 여신은 주피터르의 아내 주노이다.
유난히 광채가 나는 비너스의 머리에 아기 요정이 장미가 달린 화관을 씌우려는 모습으로 보아,
사과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로 돌아갈 듯하다.


장미는 종교화에서는 주로 마리아를 상징하지만, 신화에서는 비너스의 꽃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과를 주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예쁜 여자’에 대한 집착은 파리스도 비켜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비너스가 소개해준 여인은 하필이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로, 유부녀였다.


이판사판, 파리스가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자 스파르타가

트로이에 전쟁을 선포해 그 기나긴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신들의 몸매는 살집이 강하게 느껴진다.
풍만한 여체는 루벤스 특유의 밝고 환한 빛을 타고 꿈틀대며 농밀한 관능을 자극한다.


〈사랑의 정원〉캔버스에 유채. 198×283cm. 1633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사랑의 정원>은 바로 자신과 엘레나 푸르망의 재혼을 기념하여 그린 작품이지만

펠리페 4세가 특히나 좋아한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그림 속 어느 한 구석에서도 직선을 찾기가 쉽지 않다.
붓끝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꾸불꾸불하게 이어지면서 화사한 색과 함께 화면 곳곳을 누빈다.

이 역동성이 바로 루벤스의 힘이다.


다채로운 색과 반짝이는 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옷차림의 귀족 남녀들이

무리지어 한껏 흥에 겨워 있는 동안 화면 왼쪽에는 춤을 추는 두 남녀가 보인다.

바로 루벤스 자신과 엘레나 푸르망이다.


그림 속 젊은 귀족 여인은 죄다 얼굴이 비슷한데, 당시에 설마 ‘규격형 성형미인’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테고,
루벤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내 엘레나 푸르망의 얼굴을 여러 각도로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돌고래에 앉아 있는 여신상이 보인다.
여신상의 젖가슴은 분수가 되어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다산을 기원하는 장치이다.

<삼미신> 목판에 유채. 220.5×182cm. 1630~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29실


루벤스의 말기 작품 중의 하나로, 죽을 때까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 속에는 아글라이아, 탈레이아, 유프로시네 등 세 명의 미의 여신이 등장하고 있으며,

풍만한 여성미가 극대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맨 왼쪽에 그려진 여인은 루벤스가 만년에 만난 두 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망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다.

루벤스는 첫 아내와 사별한 뒤 나이 쉰을 넘어 자기보다

무려 서른일곱 살이나 어린 엘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


결혼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아내들에 대한 루벤스의 애정이 각별했는지,

이 그림 속 왼쪽 여신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엘레나 푸르망을,
그리고 오른쪽은 전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를 모델로 했다.


부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한 만큼 루벤스는

이 작품을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얀 브뤼헐과〈시각과 후각의 우의화〉 캔버스에 유채 / 175×263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죽음의 승리>등을 그린 피터르 브뤼헐에게는 화가인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같은 장남은 구분하기 위해 (소)피터르 브뤼헐이라고 부른다.


둘째 아들은 (대)얀 브뤼헐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아들 역시 이름이 같아 (소)얀 브뤼헐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대)얀 브뤼헐(Jan Bruegel de Oudere, 1568~1625)은 루벤스의 공방에서 작업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아갔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가 인간의 오감, 즉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을 주제로 하여
루벤스와 공동 작업한 그림들의 일부가 걸려 있다.


이 그림들 속에 빼곡한 갖가지 사물들은 정물화의 거장인 (대)얀 브뤼헐이 그렸고, 인체 묘사 등은 루벤스가 맡았다.

오감과 관련한 그림들은 농업의 발달과 각종 무역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물질세계에 대한 일종의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많은 것들을 탐하는 기쁨은 에로틱한 쾌감에 가까웠기에,

이들 감각을 의인화한 여인은 주로 누드나 반쯤 벗은 몸으로 그려져 있다.


〈시각과 후각의 우의화〉는 말 그대로 눈과 코가 하는 일에 관한 그림이다.
탁자에 기대서서 푸토(putto, 미술 작품 속 날개 달린 귀여운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건네는

향기로운 꽃을 받아드는 여인은‘후각’의 의인화이다.


그와 달리 앉아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시각’이다.
그림 속 실내에는 환한 햇살이 들어온다.


이 빛과 더불어 실내에 가득한 그림은 모두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그림 오른쪽의 사향고양이는 항문에서 냄새를 풍기는 동물이며,

그 앞의 강아지는 역시 냄새를 잘 맡는 동물로, 여러 꽃들과 함께 후각을 상징한다.

그림 속 그림들 중 오른쪽 귀퉁이에는 두 화가가 함께 작업한 〈성모자상〉이 보인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 〈성모자상〉 패널에 유채 / 79×65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 〈청각〉 패널에 유채 / 64×109.5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b실


〈청각〉 역시 그 감각이 의인화된 여인을 둘러싸고, ‘듣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려놓았다.
특히 이 그림은 17세기 플랑드르, 네덜란드 지역에서 연주되던 모든 악기들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로도 쓰인다.


의자에 기대놓은 사냥총마저도 이 그림에서는 ‘탕!’ 하는 소리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시계들 역시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째깍째깍’이라는 직접적인 감각의 세계를 상징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촉각〉 패널에 유채 / 65×110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대)얀 브뤼헐이 묘사한 갖가지 정물들은 그 세부 묘사가 워낙 뛰어나

이미 그림 그 자체로 우리의 오감 전체를 자극한다.


그의 그림들은 단지 보는 것에서 벗어나 손으로 만져질 듯하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며,
툭툭 씹힐 것 같은 식감을 자극하고 입 안 가득히 향기가 번질 듯 치밀하고 사실적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미각〉패널에 유채 / 64×108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대) 얀 브뤼헐〈후각〉패널에 유채 / 65×109cm / 16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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