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당사자인 본인만 모르고


어머니의 고희연은
혜숙의 몸 상태를
풍문이나 알음알음으로
긴가민가 전해 듣던 모든 이들이
직접 보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혜숙이 암에 걸려
언제 죽을 지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꼬리를 물고
민주화 운동 각 부문 각 지역으로
장안뿐만 아니고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정작 당사자인 아내와 우리 가족만이
모를 뿐이었다.

이제 나흘 후면
퇴원하고 통원 치료를 해야 한단다.

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본인이 우선 먼저 알고
가족이 안 연후에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든
번져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든
대비하는 게 순서이고 정상일 터인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진 게 아닐까???

혜숙의 운명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과 가족만 몰라서야 되겠는가???

곰곰 생각해도 그런 경우야말로
혜숙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모독이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혹하게 따돌림 당하는 일 아니겠는가???

더 이상 머뭇거려선 안 되겠지.....

그러니까 어머니 고희연 있던 다음 날이던가?
해 저물고 땅거미 질무렵
나는 혜숙에게 산책이나 좀 나가자 했다.

혜숙은 좋아라 밝은 표정 지으며 따라 나선다.

한적한 교정
우거진 숲을 찾아
우리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 한양대 캠퍼스 전경

나뭇잎사귀와 풀잎사귀
정성들여 가꾼 교정의 봄꽃들

약동하는 4 월의 생명을 주체하지 못하듯
저마다 푸르름을 뽐내고 향기를 내뿜는다.

가지가지 색깔로 단장하고 치장하고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아쉬워선가 반가워선가
저무는 해따라 어둠따라
풀벌레 소리들
점점 더 세차게 울려 온다.

서울 한복판이라지만
비 내린 뒤끝이라선지
공기도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무더기로 쏟아져 내릴 듯
사방팔방에서 반짝거린다.

" 당신하고 단 둘이서 이렇게 오붓하게 있으니까 참 좋다...
공기도 맑고... "

혜숙은
내 팔뚝 잡은 손에
꼬옥꼬옥 힘을 주면서
행복에 겨워한다.

아 ~ ~ ~ !

이 분위기에서...
생명이 정지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사형 선고를...
꼭 지금...
내 입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만
아무말도 못 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다.

" 당신 웬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대???
몸이 좀 이상한 거 아냐???
어디 불편한데 있어???
기왕에 여기 있는 동안 종합 검진 좀 받아보자..."

나는 무엇을 숨기려다 들킨 모양
훔치려다 들킨 모양
깜짝 놀라 당황한다.

" 으~응???..... 아냐... 난 괜찮아....."

" 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참 편안해...
일상 생활에서 아둥바둥대다가 해방된 기분이야...
약국을 남에게 맡겨 놓고 있는게 처음에는 그렇게도 불안하더니
지금은 걱정도 안 되고 그저 황홀한 느낌이야...
어머니는 애들 돌보느라 무척 힘드실텐데 그런 걱정도 안 들고...
이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벌 받겠다. 그지??? 하호호호....."

내가 없는 동안
혜숙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약국을 지켜야 했고
나를 대신해서 집안 살림을 혼자 감당해야 했으니.....
단 하루도 긴장을 풀어 놓지 못한 생활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갈데까지 다 간 다음에서야
쓰러져 입원한 거 아닌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었으면
이렇게나마 병원에 입원해 쉬고 있는 게
너무 편하다고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이라고  
황홀한 느낌이라고
할 까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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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당신 암이래


어둠이 점점 더 짙게 내리깔리면서  
나는 복잡하게 얼키고설킨 심사와
극도로 긴장된 표정을

혜숙에게 들키지 않고 가릴 수 있어
무척 다행이라 여겨진다.

혜숙과 나 사이에
짙게 가로막힌 어둠을 빌미삼아

이제는 알려야 할 말
혜숙이 꼭 알아야 할 말
가슴 속에 묻힌 말 끄집어 토해 낼
용기가 생긴다.

" 여보! 어차피 알게 될텐데...
마음가짐 단단히 먹고 잘 들어...
무슨 병인지 알고 대처를 해야지...
김용일 박사 첫 번 면담했을 적에 들었는데...
.
.
.
당신...
위는 다 잘라내고...
.
.
.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 잘라냈대.....
.
.
.
위 역할은 장에서도 대신할 수 있대...
시간이 지나고 습관이 되면...
그다지 큰 불편 안 느끼고 살 수 있대...
.
.
.
수술 끝나고...
떼어 낸 부위 조직 검사까지 마친 결과...
.
.
.
위암 3 기로 나왔대...
.
.
.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던데...
5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서...
.
.
.
15 퍼센트 정도래...
5 년만 무사히 버티면 된대. 그 다음에는 암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거래.
당신 자신과 가족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대. 5 년만 버티면 된다니까
이제 우리 당신 몸만 신경써야 돼. 앞으로 5 년 동안 우리 오로지 당신
몸만 위해서 살자. 응??? 여보~~~!!! "

나는 어둠에 낯을 가린채로
김용일 박사가 내게 냉정하게 설명하듯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막판에는 대사를 달달 외워 둔 연기자마냥
더듬거리지도 않고 호흡과 높낮이를 맞춰가며
거침없이 내뱉었다.

" 어~~~억? 아니...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 "

" . . . . . . "
  
혜숙은 정말로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혜숙에게는 내 말이
전혀 뚱딴지 같고 허무맹랑했던 듯 하다.
전혀 황당무계하고 금시초문인 듯 하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는데
내가 오히려 뜻밖이라는 느낌에
순간 당황스럽다.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면 이 순간
혜숙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을까?

참 좋다는 분위기에
편안하고 황홀하다는 기분에
심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지러울까?
얼마나 몸서리치고 있을까?

느닷없이 청천벽력 얻어 맞은 듯
천방지축 갈피잡지 못하고 뒤죽박죽일까?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나?

나는 한숨 내 쉴 여유조차 없다.

숨 죽이고
솟구처 오르는 울음
가슴에 쓸어안고
참아 내야 한다.

"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나 원래 위궤양 있었던 거 당신도 알잖아?
그게 좀 심해져서 위 일부분만 잘라 낸 거란 말야!
위가 지금 있는데 왜 없다고 그래???
어디서 그런 말 듣고 다니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혜숙은 내게 마~악 화를 냈다.

한숨 쉴 여유없이 숨소리 죽이며
솟구치는 감정 억누르고 있는데
그만 견뎌내지 못하고
울음이 입 밖으로 새 나온다.

" 여보! 저기..... 이럴게 아니고... 흐~흑.....
내일 김용일 박사한테 같이 가서 얘기를 직접 들어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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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 들어보나마난데 뭘 그래! 내가 견디다 못 하니까 오빠가
육동휘 오빠 병원에 데리고 가서 내시경 검사, 조직 검사 다 하고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시설 좋은데서 하는게 더 좋겠다 그래서
이 병원으로 온 건데 뭘 그래!
수술하기 전에 조직 검사 결과도 다 듣고, 수술 받고 난 다음 상태도
오빠들한테 다 들었단 말야.
아무려면 내가 명색이 약사인데 지금 내 병이 어떤 상탠지 모르겠어?
당신이 어디서 잘못 안 거야. 당신 좀 이상하다.....
당신 혹시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 아냐?
당신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솟구치는 감정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흐윽~흑 거리는 나를 두고서

혜숙은 오히려 안스럽다는 듯
설득하고 다독거리려는 게 아닌가?

혜숙의 반응이 주치의 말대로
죽음을 앞둔 암 환자 심리 상태에서
첫 번째 단계와 바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확인하고 있는 순간이다.

더 이상 혜숙을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혜숙이 알고 있는대로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고 거부하는 편이 낳을 듯 싶다.

혜숙이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도록 하는 게
옳을 듯 싶기도 하다.

죽음을 앞두고
몸서리치는 공포와 절망을
혜숙이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전혀 모른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혜숙을 위해서
더 편안할 듯 싶기도 하다.

" 허~억..... 허~억....."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 내는 대신
가슴 속 깊은데서 치솟아 오르는 한숨을
그냥 토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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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변해 가는 표정


그러고부터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나는 혜숙에게
절체절명한 기로에 처해 있는 지금의 상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죽기살기 각오로 마음 단단히 먹고
영육간의 고통을 한시바삐 극복해 나가자
애원하고 호소하는 눈빛이었고

혜숙은 나에게 더 이상 그따위 쓸데없는 말로
사람 속 뒤집어 놓지 말라고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 내려는 표정이었다.

서로 오랜동안 떨어져 있다 재회해서 깨가 쏟아질 듯
가슴 부풀어 있을 분위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막무가내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당당함이
점점 두려움과 공포로 변해 가는
혜숙의 눈길과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삼키곤 했다.

나는 다시 주치의 김용일 박사를 찾아갔다.

" 선생님..... 저도 환자 본인이 자기 병을 정확하게 아는 게
치료에도 도움이 되고 극복하는데도 더 효과적이겠다 싶어서
제 아내에게 지금 처해 있는 상태를 어제 저녁에 다 얘기했는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데 어떻하면 좋죠?...
한편으로는 불안해 하는 모습도 보이고 해서...
혹시 부정하고 거부하는 암 환자의 첫 번째 심리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제 아내 경우는 어차피 치료 받는 과정에서 알아 차릴 것 같구 해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제가 일단 말을 먼저 꺼내 놓았으니까 이제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하거든요?....."

" 글쎄... 좀 생각해 봅시다."

나로서는 이 순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화급한 일인데
주치의는 그러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이시다.

그 일은 일단 보호자에게 맡겨진 문제로 정리된 게 아니냐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봤다가
딱히 해야만 되겠다고 그런다면
못 한달 수만도 없는 일 아니냐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뭔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 졌다.

" 기왕에 말문을 열어 놓았으니까 환자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마음을 단단히 잡을 수 있도록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말씀 좀
해 주십시요....."

나는 아예 떼거지를 쓰다시피 했다.

"....."
      
하지만 김용일 박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다.

내게는 사회 선배되고 누구라면 알만하게
가문 있는 집안에서 자라
김용일 박사와 초 중 고등 동기 동창이던 정대철 전 의원께
훗날 들어 알게 된 일...

어렸을 적부터 집안끼리 막역하게 왕래하고
서로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였단다.

선친도 당대에 이름떨친 명의였고
경기 중 고등 적부터 공부도 썩 잘했단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장래가 보장된 실력이었는데
가문있는 명의 집안 가지고는 행세 못 하던 세상

예상치 못한 일로 경쟁에 밀려
한 때 실의에 빠져 있다 미국으로 유학갔단다.
아까운 인재인데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그래서였던가?
왠지 모르게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김용일 박사한테
떼거지부리듯 허심탄회 할 수 있었던게...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실을 은연중 숨기려다
어이없이 들통나버린 일도
주치의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놓인 간격을
허물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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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자주색 투피스


다음날부터 아침 회진 때마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나 말 할까? 저제나 말 할 까...

김용일 박사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들으나마나 하나마나 한 말 몇마디 나누고는
그냥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나와 눈길 마주치기
여~엉 불편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은 말같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닐테지...
회진 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하기 보다는
따로 불러 하시겠지...
곧 부르시겠지...

그럴 때마다 혜숙의 표정은
미묘하게 밝아 진다.

그것 봐!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잖아!
괜히 전문가도 아닌게 알지도 못 하면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고 난리야!.....

그럴수록 전투에서 밀려난 것처럼
나는 더욱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거부하고 부정하는 단계의 벽이 이렇게 높으면
어느 세월에 증오하고 저주하는 단계를 넘고
우울증에 빠지고 자포자기하는 단계를 넘어서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계에 들어 서겠는가?

기왕에 거쳐야 할 단계라면
하루빨리 한시바삐 겪고 넘어서
투병 생활에 전심전력 기울여야 되지 않겠는가?

삶을 위한 투쟁을 당장에 시작하고
삶을 위한 고난의 대장정에 바로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혜숙이 수술한 지 20 일 째 되는 4 월 22 일
퇴원 수속하라는 전갈이 왔다.

전날부터 혜숙은
화사로운 봄 날
무슨 옷을 입고 퇴원할까?
고르고 궁리하면서 들떠 있었다.

그러고보면 혜숙은 학창 시절
나와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100 여 일 동안 구속되었다 석방된 일 말고는
가장 오랜동안 가정을 떠나 있던 셈이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상 일 잊어버리고 입원해 있는게
이리 마음 편할 수 없다던 혜숙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그렇게 바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다.

안방 장롱 속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서
세탁소에 맡겨 살짝 다림질 해 가지고 오란다.

속 옷은 그 옆에 옷장
몇 번 째 서랍에 있으니
알아서 잘 골라 오란다.

나는 오랜동안 떨어져 있어선지
아무래도 눈에 익지 않아 이리저리 뒤져 본다.

이거겠다 싶어 혜숙이 시킨대로
정성스레 싸 든다.

혜숙은 들뜬 마음으로 보따리를 풀어보더니 대뜸
누가 이런 걸 가져 오라고 그랬냐면서
느닷없이 신경질을 냈다.

나는 어안이벙벙한 채
오른손으로 머리 뒤꼭지를 긁고 있다가
나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집앞까지 택시 타고 가는 건데
그냥 입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혜숙은 눈을 흘기고
입원해 있는 동안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지
알고 있기나 하느냐면서

입으나마나 줄줄 흘러내리는 옷을
어떻게 걸치고 다니느냐고
마구 화를 냈다.

이런 적 없었다.
지금도 얼굴 화장 전혀 안 하듯이
옷가지에 관심두고 신경쓰는 모습
본적도 느낀적도 없다.  
  
남편이기도 하지만
혜숙은 나를 존경하는 선배로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늘 자부심을 가져 왔다.

그러니만큼 이날 이때까지
말다툼이나 자잘한 신경질조차 부려본 적 없다.

나는 혜숙의 설명을 재삼재사 머리에 되새겼다.
그리고 혜숙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차곡차곡 꼼꼼히 뒤져
자주색 투피스를 찾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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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퇴원 수속


4 월 22 일, 혜숙은 아침부터 퇴원할 생각으로
마음이 한껏 들떠 있다.

처제와 병원 원무과에서 퇴원 수속하던 중에
복잡한 일이 발생했다.

구속될 당시에 나는 연구원에서
연구출판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근무하다 시국 사건에 연루되면
쫓겨 나거나 적어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표를 내거나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독일 정부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의 기독교 기관 지원 아래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 발전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교 연구 기관이다.

그러니만큼 내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일이야말로
설립 목적과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연구원에서는 내가 구속되고 재판 받는 동안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비용까지 도맡아 주었다.
        
일반 직장에 비해서도 그리 적지 않은 월급과 상여금까지
꼬박꼬박 지급해 주었다.

그러다가 정보 기관에서 연구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거세지고
그러니만큼 재정적 형편도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혜숙을 통해서 연구원의 형편과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석방되기 바로 한달 여 전에 사표를 제출했다.

문제는 의료보험이었다.
의료보험 제도가 생기고 지금처럼 일반화 되기 이전에도
우리 가족은 병원에 다니는 일도 없이 줄곧 보험료를 내 왔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연구원 직장의료보험에 줄곧 가입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혜숙의 퇴원 수속을 밟으려다보니까
내 사표가 수리되면서 불과 1 개월 여 전부터
우리 가족 모두가 의료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의료보험 적용 여부에 따라 비용 부담이
그 당시 200 만 원 내외에서 800 만 원 정도로
4 배 가량 차이가 난다.

나는 대학 병원과 의료보험 기관
내가 근무하던 연구원과 약사회 등등으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알아 보고 했다.

마침 가까운 친구의 주선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병원 원무과에서는 서류를 보강하고 구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하루를 연기해서 23 일 퇴원하는 것이 좋겠단다.

그리되면 간호사로 근무하는 처제의 직원 가족 배려 등등까지 적용해서
140 여 만 원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다행이고 잘 됐다 싶었다.

병실로 올라가 보니 혜숙은
자주색 투피스를 예쁘게 입고
짐가방을 품에 안고
침대에 걸터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퇴원 수속 과정에서 일어났던 복잡한 일들을
혜숙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배려를 다 해 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제 하루만 더 있다 나가면
모든 일들이 잘 마무리 될 것이라고 했다.

옷 차려입은 폼이며 기다리고 앉아 있는 자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터라
나는 혜숙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조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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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나 그냥 집에 갈래!



혜숙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짐가방을 든 채 갑자기 병실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 나간다.
나는 뒤쫓아 나가 혜숙을 붙들고 달랜다.

 

 " 나 그냥 집에 갈래!!! "

 

그런 걸 할려면 미리미리 해 두었어야지
왜 지금에 와서 그러느냐는 거다.

 

담당 의사와 병실 간호사들 모두가
오늘 퇴원하는 줄 다 알고
병실 환자들도 다 아는데
인사까지 다 했는데

 

퇴원한다던 사람이
퇴원 수속 때문에
입원비 때문에

하루를 더 붙잡혀 있게 되었으니
창피스러워서 못 있겠다는 거다.

 

800 만 원이든 얼마든
당장 만들어 놓을 테니까

지금 빨리 내려가서
오늘 당장 퇴원할 수 있도록
다시 수속하라고 난리다.

 

내가 자꾸 미그적거리면
혜숙이 직접 원무과로 달려가서
수속을 다시 밟겠단다.

 

혜숙은 숨을 씨근씨근 몰아 쉬며
원무과로 향해 간다.

 

혜숙이 워낙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던 터라
나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한 채
짐이나 받아 들고 뒤를 쫓아 간다.

 

혜숙은 원무과장을 만나
당장에 퇴원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하라고 다그친다.

 

느닷없이 봉변 당한 원무과장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처음부터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차질없이 처리할 수 있는 건데
입원할 때 기록부터 모든 서류를 다시 정리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자기 임의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실무자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만 더 참아 달라고
오히려 혜숙에게 사정한다.
그제서야 혜숙은 화가 좀 풀렸는지 수그러든 표정이다.
 
나는 혜숙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다시 병실로 데리고 간다.

 

하루이틀 사이에 혜숙이
병원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고
예쁜 옷 입고 싶어 하고
뜬굼없이 신경질 부리고 화내는 모습 지켜 보면서

 

암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휩싸인
속내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토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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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확인 사살



다음 날
그러니까 혜숙이 입원한 지 21 째 되고
내가 출소한 지 9 일째 되는 날
혜숙은 퇴원한다.

 

전 날 퇴원했더라면 주치의와
마지막 면담을 할 수 있었을 껄...

 

그 날은 김용일 박사
진료가 없는 날이란다.

 

혜숙에게 질병 상태를 확인시키지 못하고
이대로 그냥 퇴원해야 하는 건가?

 

퇴원 수속하면서 수련의에게 간호사에게
김용일 박사께 인사 좀 드리러 가야겠노라 했다.

1 시간 여 후에 의과대학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잔다.

 

병원 진료실이 아니어선가?
의사의 백색 가운과 환자복이 주는 간격과 벽을 벗고
서로가 생활 복장으로 차려 입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

환자와 의사라는 상대적 업무적인 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분위기다.

 

그러니만큼 인생의 선후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인간적인 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동안 의학적이고 사무적인 언어로만 나누던 건조한 대화도
일상 생활 용어를 섞어 가며 자연스레 나눈다.

 

이번에야 말로 마지막 기회일텐데...
나의 눈빛과 표정에 담긴 뜻을 아시겠지...
간절히 애원하는 부탁을 들어 주시겠지...

 

김용일 박사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한 듯
병상 기록부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 환자는 수술하기 전 내시경과 조직 검사 결과 위암 말기로 진단돼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열어 놓고 위를 모두 절제하고 위에 가까이 붙어 있는
비장과 췌장도 3 분의 2 정도를 잘라냈습니다.
임파선과 신경 등 많은 부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암세포는
모두 찾아서 제거했습니다.
수술 후 잘라낸 부위를 정밀 검사한 결과로는 위암 3 기에서 4 기로
진행하는 중이었던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는 혹시 미처 제거하지 못한 암세포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항암제 치료를 받고 방사선 치료도 6 주 정도 받아야 합니다. "

 

나는 그 와중에 혜숙의 표정을 살핀다.
혜숙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 표정이 없다.

 

자기 몸에 대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과학적 판정, 심판을 그저 무덤덤히 듣고만 있다.

 

의심하거나 궁금하거나 다시 확인하고 싶은 표정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하거나 부정하려는 표정도 아니다.
아무런 질문도 말도 없다.

 

주치의가 내민 차트를 읽고 있는 건지
그저 시선 둘데가 마땅치 않아 거기에다 두고 있는 건지
도무지 표정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온 몸의 신경이 한꺼번에 머리로 치솟아 오르고
졸도할 듯 현기증이 일어 털썩 주저 앉았었다.

 

온 몸의 피가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술술 새 나가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온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혜숙이 나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신경질부리고, 발악하듯 화 내고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처럼 반응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숨이 멈춰 버릴듯 답답해 진다.

 

혹시나 혹시나 거부하고 싶은 몸부림에
가냘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한 심경에
마치 총뿌리를 들이대고 확인 사살하듯
잔인하게 박살 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찢어질듯 쓰라려 온다.

 

 
41. 의사의 보람과 행복



자기의 생명 자신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만큼
나는 혜숙이 의학적으로 꼬치꼬치 캐묻고
이것저것 보다 더 자세하게 확인하기를 바랬다.

 

이를테면 두루뭉수리하게 5 년 생존율이라기보다는
바로 자기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경우
대개 어떤 과정과 노력이 있었는지.....

 

자기가 눈꼽만큼이나마 더 나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려면
의학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보다 더 바람직한 건지.....

하지만 혜숙은 남의 이야기 듣듯 그저 무덤덤하다.


순간, 나는 혜숙을 꼭 껴안고
둘이서 꼭 부둥켜 안고
몇 시간이건 몇 날이건
엉엉 소리지르며 실컷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 이제 내 임무는 여기서 끝나게 됩니다. 앞으로는 내과로 넘어 가서
 담당 선생님이 정해지면 거기서 상담하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김용일 박사는 재수술을 받지 않는 한
의사와 환자로 자기와 만나는 일은 없을 꺼라고 한다.

 

그러기를 바란다고 한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내과 선생님과 의논해야 된다는 거다.

 

나는 정신이 번뜩 하며
가슴 한 켠으로 야속한 마음이 밀려 온다.

 

이제까지 파란만장한 순간순간들을 겪고 거치면서
의지하고 싶기도 했고 매달리고 싶기도 했던 관계를
이제사 피차가 어느만큼 알만 하고 정도 들었던 관계를
이렇게 싹뚝 끊어 버리다니...

낯도빛도 모르는 이한테 훌쩍 떠넘겨버리고 말다니.....

 

나는 그 순간 묘하게도
도망다니다 붙잡혀 경찰서에 연행되는 기분이 든다.

 

어수선한 경찰서에서 대충대충 조사받다
살인적인 고문이 기다리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떠넘겨 지는 기분이다.

 

" 그래도 외래 진료 받으러 오가면서 가끔 찾아 뵈면 안 됩니까? "

 

야속해 해 본들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니겠나 싶고
무언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나는 약간 퉁명스런 말투로 따지듯 묻는다.

 

" 안 되기는 요... 나야 그래주시면 반갑고 고맙지요...
 일반적으로 모든 의사들이 다들 그렇겠고 나 역시도 그런데...
 의사가 가장 보람을 느끼고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심장 박동이 멈춰서 죽어 있는 사람을 응급처치로 의술로
 다시 살려 냈을 때...
 그래서 살아난 사람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늘 감사해 할 때...
 불치의 병, 고통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가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갈 때...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 줄 때...
 그럴 때 의사는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야속하고 섭섭해 하는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보고 하는 위로의 말이었는지
나는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마감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있다.

 

계속 김용일 박사에게
상담하고 싶고 매달리도 싶다.

 

 " 주변에서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느니
 고기를 먹어서는 절대 안 되고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된다느니
 골치 아플 정도로 참견하고 여러 말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런지요?..."

 

나는 별 상담할 내용도 못 되는 말
그저 알아서 하면 되는 일
상담이라기엔 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말을
그냥 주섬주섬 늘어 놓는다.
 
 " 의학적으로 보면 환자가 위암 수술을 받은 것으로 95 퍼센트 이상의 노력을 다 하게 된 겁니다.

 수술 과정에 이미 현대적 의학과 기술의 성과를 거의 총동원한 것이지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는 나머지 3 ~ 4 퍼센트 정도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혹시 1 ~ 2 퍼센트는 기적이라는 걸로 두든지 음식으로 두든지 하는 건 잘 모르겠고요...

 음식 문제는 앞으로 내과 선생님과 상담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은데요...

 되도록이면 고단백질 위주로 해서 먹고 싶은 것을 드시는게 제일 좋습니다.
 체중이 빠지지 않도록 고기 종류를 많이 섭취하는게 좋고요....."

 



 

42. 운명의 갈림길에서 담담한 모습

 


나는 말꼬리가 그칠새라
이것저것 되지도 않는 질문을 계속 이어 간다.

 

그러면서 혜숙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절박한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상담하기를 바랜다.

 

이 아까운 시간에 혜숙이 빨리빨리
적시적절하게 핵심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뭐하나
하는 생각으로 내 마음은 초조하다.

 

그래도 남아 있는 15 퍼센트의 가능성에
집착하고 매달려서 상담할 말이 있을텐데...

 

왜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만 앉아 있느냐는 불만의 뜻으로

나는 옆에 앉은 혜숙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말하기를 재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숙은 아무 말 없다.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병상 기록부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김용일 박사와 작별하고 내과 전문의 실로 갔다.
담당 주치의는 여의사...

 

얼마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여의사는
혜숙의 언니와 경기여고 동창이면서
의과대학도 같이 다니고
미국 유학도 비슷한 시기에 같이 했단다.

 

내과 주치의 처방에 따라
혜숙은 항암제 주사를 맞는다.

 

이제 부정하고 거부할 수 없는
치료 과정으로 들어 선 것이다. 
         
혜숙은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침착하고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것 같다.

 

나는 차라리 신경질을 부리고
들뜬 마음으로 예쁜 옷 입고 병원 문 나서기를 바라는
혜숙의 모습이 오히려 더 그립다.

 

앞으로 얼마가 될 지도 모르는 세월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혜숙이

그 고통의 출발점에서
차디차리만큼 담담한 모습을 지켜 보면서

나는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는 대신
한숨으로 바꾸어 계속 허어~ 허어~ 토해 낸다.

 

택시를 타고 그리운 집을 향해
봄 기운이 완연한 거리를 달리지만

우리는 계절이나 풍경을 감상할 기분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여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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