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당사자인 본인만 모르고
어머니의 고희연은
혜숙의 몸 상태를
풍문이나 알음알음으로
긴가민가 전해 듣던 모든 이들이
직접 보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혜숙이 암에 걸려
언제 죽을 지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꼬리를 물고
민주화 운동 각 부문 각 지역으로
장안뿐만 아니고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정작 당사자인 아내와 우리 가족만이
모를 뿐이었다.
이제 나흘 후면
퇴원하고 통원 치료를 해야 한단다.
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본인이 우선 먼저 알고
가족이 안 연후에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든
번져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든
대비하는 게 순서이고 정상일 터인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진 게 아닐까???
혜숙의 운명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과 가족만 몰라서야 되겠는가???
곰곰 생각해도 그런 경우야말로
혜숙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모독이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혹하게 따돌림 당하는 일 아니겠는가???
더 이상 머뭇거려선 안 되겠지.....
그러니까 어머니 고희연 있던 다음 날이던가?
해 저물고 땅거미 질무렵
나는 혜숙에게 산책이나 좀 나가자 했다.
혜숙은 좋아라 밝은 표정 지으며 따라 나선다.
한적한 교정
우거진 숲을 찾아
우리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 한양대 캠퍼스 전경
나뭇잎사귀와 풀잎사귀
정성들여 가꾼 교정의 봄꽃들
약동하는 4 월의 생명을 주체하지 못하듯
저마다 푸르름을 뽐내고 향기를 내뿜는다.
가지가지 색깔로 단장하고 치장하고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아쉬워선가 반가워선가
저무는 해따라 어둠따라
풀벌레 소리들
점점 더 세차게 울려 온다.
서울 한복판이라지만
비 내린 뒤끝이라선지
공기도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별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무더기로 쏟아져 내릴 듯
사방팔방에서 반짝거린다.
" 당신하고 단 둘이서 이렇게 오붓하게 있으니까 참 좋다...
공기도 맑고... "
혜숙은
내 팔뚝 잡은 손에
꼬옥꼬옥 힘을 주면서
행복에 겨워한다.
아 ~ ~ ~ !
이 분위기에서...
생명이 정지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사형 선고를...
꼭 지금...
내 입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만
아무말도 못 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다.
" 당신 웬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대???
몸이 좀 이상한 거 아냐???
어디 불편한데 있어???
기왕에 여기 있는 동안 종합 검진 좀 받아보자..."
나는 무엇을 숨기려다 들킨 모양
훔치려다 들킨 모양
깜짝 놀라 당황한다.
" 으~응???..... 아냐... 난 괜찮아....."
" 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참 편안해...
일상 생활에서 아둥바둥대다가 해방된 기분이야...
약국을 남에게 맡겨 놓고 있는게 처음에는 그렇게도 불안하더니
지금은 걱정도 안 되고 그저 황홀한 느낌이야...
어머니는 애들 돌보느라 무척 힘드실텐데 그런 걱정도 안 들고...
이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벌 받겠다. 그지??? 하호호호....."
내가 없는 동안
혜숙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약국을 지켜야 했고
나를 대신해서 집안 살림을 혼자 감당해야 했으니.....
단 하루도 긴장을 풀어 놓지 못한 생활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갈데까지 다 간 다음에서야
쓰러져 입원한 거 아닌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었으면
이렇게나마 병원에 입원해 쉬고 있는 게
너무 편하다고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이라고
황홀한 느낌이라고
할 까 . . . . .
'▷ 사랑과 희망으로 > 2. 생명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 당신 암이래 (0) | 2008.01.22 |
---|---|
35.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0) | 2008.01.22 |
36. 변해 가는 표정 (0) | 2008.01.22 |
37. 자주색 투피스 (0) | 2008.01.22 |
38. 퇴원 수속 (0) | 2008.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