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잔상(殘想)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최 민 화
Ⅰ.
1978년 늦여름인가,
나는 원효로 함석헌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기억을 더듬고 가다듬고 해도 별로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는 아니었던 듯싶다.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다가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으로,
박선균 목사님께 ‘틈나는 대로 열심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다’는 다짐을 덧붙여서
다시 떠넘겨(?)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이야말로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그 날 함 선생님의 표정은 여늬 때와 뭔가 좀 다르셨다.
약간 상기되어 흥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시기도 하고,
‘허……참!’ 하시기도 하고, ‘생각’이 많으신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지 그랬다.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심정을 상하신 일 같기도 하고, 곁에서 느끼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세요?”하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계속하신다.
“허…참! ……이거 원 …… 허…참!”
나 역시 곁에서 계속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나 깊은 ‘생각’이 있으신 것이리라 여겨지고,
혹시 내가 곁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신가, 해서 자리를 물리려 했다.
“저기 가 있겠습……"
하고 외채로 떨어져 있는 〈씨알의 소리〉 사무실을 향해서 몸짓을 돌리려 하자,
선생님은 때 맞추듯 ‘허……참!’ 하시고는 ‘이거……어떡허지?'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말씀이시다.
“무언데요?……”
한동안 도대체가 영문을 알 길 없어 하는데
“허…참!……아 글쎄……”
하면서 계속 뜸을 들이신다
“허……저…계 선생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순간 나는 ‘계훈제 선생님 신변에 무슨 일이 닥쳤나’ 하고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처럼 함 선생님께서 심각하고 중차대하게 여기시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뭐하고 다니느냐는 핀잔은 아니실까? 하는 자책감이 뒤엉켰다.
“계 선생님께서 또 잡혀 가셨어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함 선생님께 여쭈었다.
“허!……그게 아니고 ……계 선생이……혼례를 올리신대”
느닷없고 뜬금없는 말씀에 순간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뒤죽박죽이고,
어안이 벙벙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천하의 중앙정보부를 따돌리고,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뚫고,
소리소문 없이 혼례를 올리시기까지 이르른다는 게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제 하에서 김구, 박헌영 등 많은 분들이 치열한 운동을 벌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안식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일은 감시 지역을 벗어나 있거나,
감시망을 피해서 철저하게 잠적한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도대체 복장이나 외모가 남다르신 데다가 백주에 드러내서 활동할 일 다 하시고,
야밤에 비밀하게 결사할 일 다 하시면서,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뜸뜸이 이어지는 함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방금 계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단다.
동거하신 지도 10 년 여가 되었단다.
초등학교 4학년 되는 아들도 있으시단다.
사모님은 화가이신데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란다.
그러저러해서 그동안 사모님 집안을 위해서도 그렇고,
드러낼 수가 없는 형편이시었단다.
그런데 아들이 커 가면서 사리분별할 나이에 접어드는데,
언제까지 세상 모르게 숨고 묻어 두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우선 함 선생님께 먼저 이실직고해서 아뢰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 가까운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시늉이나 갖추고 싶으시다는 거다.
뜸뜸이 말씀을 이어가시는 함 선생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나에게까지 이제껏 감쪽같이 속이다니’ 하며 못내 서운한 듯도 하시고,
‘그 오랜 세월 무서운 감시망을 피해서 내외분 모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나,
참으로 무서운 분들이구먼’
하며 안쓰럽고 경외하는 표정이기도 하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혼자 될 줄로 알았는데,
장성하는 아들까지 있다니’하며 대견하고 감격해 하시는 듯도 하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
나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인 채로 두서도 없는 말씀을 드리자,
“…그렇지?……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먼……”
하신다.
Ⅱ.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소리’ 소문으로 번졌다.
아예 집안 일을 가지고 떳떳하게 자랑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야말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몸둘 바를 몰라 하고,
하염없이 부끄러움을 타면서, 차라리 그냥 묻어 두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계 선생님의 심정은 이미 아랑곳없다.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혼례식 자체가 집안과 개인사를 넘어선 시대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한판 크게 벌려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박정희 유신정권이 말기 증상에 단말적 기승을 부리기로서니,
관혼상제의 풍속까지야 못하게 막겠느냐는 거다.
시공을 넘어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모든 언론과 잡지에서마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순애보로 불꽃튀는 취재 경쟁을 벌이고 난리를 치면서,
텔레비전 뉴스로도 특종감이겠지만,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두 분의 혼례를 알리는 청첩장을 띄울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 해 초겨울,
이미 해가 떨어져 컴컴한 야밤에,
비밀리 마련한 도심 한복판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살피며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문화 예술인, 언론인, 노동 운동가, 청년 운동가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며 계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로
장내는 삽시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고 은 시인의 비장한 감동과 감격어린 시 낭송이 이어지고,
청년 문화패의 사물놀이로 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분위기는 한껏 절정에 달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정보 기관에서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안절부절 야단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선우와 청년 풍물문화패는
역사적인 혼례식의 제물이 되기를 기꺼이 각오하고 자처하듯,
한꺼번에 엮어져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장례식으로는 일제 치하 3.1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 고종 황제의 국장에서부터
민족 사회에 큰 관심과 영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연이어 있어 오다시피 했지만,
축복받아야 마땅할 혼례식으로 감시망을 뚫고,
감시 병력에 첩첩이 둘러 싸인 채, 기습 작전을 감행하듯,
세상 떠들썩하게 야단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 싶고,
그때까지 보고 들은적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혼례식은 한 가정과 한 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기억될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곧 이어서 다가올 앞날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유신 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열망은
재야 민주화 운동권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든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누군가가 쓴잔을 받아 마셔야 할 것 같고,
누군가는 피하려고 해도 받아 마실 수밖에 없을 운명일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그러니만큼 차라리 어둠의 세력이 쳐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몸을 던져 뛰어들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계층과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 온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의논하고, 힘을 모으고, 승부수를 짜내는 동안,
10여 개월 전에 치루었던 계훈제 선생님의 성공적(?) 혼례 행사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방법이 되고, 전술 전략이 되었다.
충분한 훈련이고 실전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혼례 행사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살아나고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치루던 것을 백주 대낮으로 옮기고,
비밀하게 음식점을 빌려 치루던 것을 명동 한복판 YWCA 대강당으로 옮겼다.
계훈제 선생님 역으로는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이 맡고,
김진주 사모님 역으로는 윤정민이라 하여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
등장하는 하객들도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들이,
기척을 살피고 발소리를 죽이며 삼삼오오 삽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장면도 같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기관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면도 같다.
하지만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과 역할은 전혀 달랐다.
인물로는 정보기관원이 아니라 비상계엄군이 맡고,
배경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군부 세력이 맡았다.
역할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연행하고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식순을 진행하자마자 단상 쪽에서부터 의자 내던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무장한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마구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쌓인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비상계엄군은 함 선생님을 비롯해서
목사님과 교수와 문화예술인, 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끌려간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화발과 5파운드 몽둥이로,
갖은 고문과 능욕으로 처참하게 수모를 당했다.
함 선생님 역시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 치하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수모를 적잖이 당하셨다.
그리고는 소위 ‘명동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 이름하여
140여명이 구속 구금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시금 돌이켜 보면,
계훈제 선생님과 김진주 사모님의 혼례식은,
약력과 활동 경력 등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어 흔적없이 빠져 있지만,
이르르게 되기까지 저간의 사정도 그러려니와 행사 자체가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 사회 운동에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길이 기억되어서 마땅할 일이다.
Ⅲ.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시고
경성제대에 다니시면서 일제의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신다.
해방 직후 민족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시고,
이후부터서는 학생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또한 사회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평생을 한치의 틈도 없이
투쟁의 역사, 저항의 역사 현장 한 복판에서 올곧게 보내오신다.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피 생활도 하시고,
몇 차례씩 구속되어 감옥살이도 하신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어언 30년 여를
올곧지 못하게 허둥거려 온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모습,
오른 손을 치켜들고 주의 주장을 외치시는 모습보다는,
자꾸만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선하게 떠올라 눈에 어리고, 눈시울을 가린다.
연세가 드실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겸손하신 모습,
겸연쩍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는듯한 천진난만하신 표정,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국민복장에 흰 고무신,
일찌기 폐를 잃어 비스듬히 기울어지신 어깨,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손을 비비거나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거나,
손을 입가에 대고 녹이거나 하는 법 없으시고,
아무리 덥다고 국민복 단추 두어개 쯤 풀어 제치고 부채질하는 법 없으신모범생도 같은 품성,
사람의 심성이 제아무리 맑을 수 있고,
감성이 제아무리 고울 수 있다고 한들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반듯하고 올곧기는 또 어떠시고…….
김진주 사모님께!
사모님,
이제 계 선생님께서 이승의 생을 마감하시고 함 선생님 곁으로 가셨네요.
함 선생님께서도 아주 반가이 맞아 주실 꺼예요.
함 선생님 먼저 가 계신 동안,
복잡다단하게 얼키고 설켜서 처신이 만만치 않던 세상살이에,
드러내 놓지 못할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느냐고 위로해 주실 꺼예요.
뜨겁게 뜨겁게 안아 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실 꺼예요.
생전에 늘 마음과 뜻을 같이 하시던 장준하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안병무 박사님, 장기려 박사님과도 반가움에 겨워 그러실 거구요.
모두들 사모님의 안부를 물으시고
참으로 그렇게 고마워 하실 수가 없을 꺼예요.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이 사모님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저간의 사정을 들으시고,
충격과 감격으로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흥분을 삭이지 못하시고,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어요.
고금동서에 이런 기상천외한 드라마가 다 있나 하셨어요.
예단을 마련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정성스레 준비해서 보내셨어요.
여곤이가 의학도로 훌륭하게 다 커서 이제 장가갈 나이가 꽉 찼다는 기별을 들으시면
아마도 천상에 없이 기뻐하실 꺼예요.
혹시 〈씨알의 소리〉가 다시 복간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으신다면
더없이 기뻐하실 꺼구요.
함 선생님은 이제 사모님을 염려하고 걱정하실 꺼예요.
계 선생님과 천상에서 평안하게 함께 지낼 테니까 슬픔에서 빨리 딛고 일어서시라 하실 꺼예요.
어쩌면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보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신 줄로 여기실 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사모님!
빨리 일어나셔서 문익환 목사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랑 안병무 박사 사모님이신 박영숙 선생님,
장준하 선생 사모님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오래오래 사세요.
장기려 박사 사모님은 평양에 계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요.
그러셔야 두 번씩 강제 죽임을 당하고서 네 번째로 마침 마악 꿈틀이고 일어서려는
저희 〈씨알의 소리〉 식구들도 ‘생각’을 더욱 가다듬게 될 거 아니겠어요?
사모님들께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소중한 삶을 귀감 삼아서
저희도 크신 뜻을 깨우치고 다짐하며 이어받아가게 될 거구요.
사모님!
사모님께서도 그러셨지만,
계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불초를 볼 적마다,
무엇보다 먼저 위암 수술을 받은 안사람 건강이 어떠냐고 늘 염려하시면서 따뜻한 안부를 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수원에서 함께 일을 보다가 선생님 비보를 받고 급히 빈소를 찾아 뵙게 되었어요.
한없이 선하고 인자한 표정이신 선생님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를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마악 다시 태어난 〈씨알의 소리〉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두서도 없이,
잔머리에 떠오르는 자잘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미천한 글을 올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드러내서 자랑삼을 것도 아니라고 여기실 일들을,
그래서 굳이 묻어 두고 계신 일들을
이렇게 들추고 밝혀서 씻지 못할 누를 끼치는 건 아닌지 하는 조심과 배려도 없이,
촉박한 시간에 쫓기어서 소홀하기 짝이 없는 글을 올리게 됨을
부디 용서하시고 넓으신 아량으로 양해해 주세요.
사모님!
이제 세상에서 마무리하셔야 할 일들도 많은데,
더는 깊이 상심하지 마시고, 다시금 건강하게 일어나세요.
계 선생님께서 못 다하고 가신 몫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불초 최 민 화 드림. (전 씨알의 소리 편집장) / 씨알의 소리 제147호 (1999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