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이 아닌 괴물로 죽은 자


영화 쿼바디스 (Quo Vadis,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는

1896년 폴란드의 소설가 헨리크 센키에비치가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55년 머빈 르로이 감독이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 등을 주연으로 만든 세계적인 명화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폭군으로 악명 높은 네로....
그는 이미 어머니와 아내를 죽였고 방탕하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칭 시인이며 예술가로

매일 시시한 시를 읊고 수금에 맞춰 노래를 지어 부르며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
로마에서는 큰 불이 일어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도 로마를 자신의 이상에 맞게 새로 건설하려고 한 네로는

급히 로마로 돌아가 오히려 더 큰 불을 내게 하고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짓는다.


네로의 악행을 알게 된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고...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네로는 황후 포페아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화재를 일으켰다고 발표하고 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처형하기로 한다.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려는 방식은 굶주린 사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을 먹이로 내어 주기로 한 것.

처형의 시간이 다가오자 두려움에 떠는 교인들에게 들려오는 굶주린 사자들의 울음소리.

이때 한쪽에서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자 교인들의 찬송가는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고 네로의 귀에도 들려온다.


한편 로마를 탈출하여 아피아 가도를 걷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게 되고

‘쿼바디스(Quo Vadis,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그의 물음에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베드로는 로마로 다시 되돌아간다.

원형경기장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수많은 관중 앞에서 천국에 대해 설교하고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굶주린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원형경기장으로 내몰린 기독교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기꺼이 사자들의 먹이가 되고 이들의 모습에 네로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낀다.
시민들의 웅성거림 속에 주인공 마커스 비니키우스(로버트 테일러)는

토스카나 지방에서 궐기하여 로마로 들어오고 있는 갈바장군의 소식을 전하고

관중들은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도가 아닌 네로의 짓이었음을 확신하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궁으로 밀려든다.

네로는 궁중으로 도망치지만 그를 지켜줄 근위대조차 남아 있지 않은 궁에서 불안에 떨며 어쩔 줄 몰라한다.


네로는 황후 포페아에게 묻는다. "근위병들은 다 어디에 있지?"
포페아 ; "죽었거나 살아 있다면 반란에 가담했겠지요."
네로 ; "죽었다고? 다 죽어버렸어!

사랑했던 어머니와 아내 옥타비아, 친구 페트로니우스까지 모두 죽었구나.

당신만 남았군.

당신이 나에게 기독교도들을 죽이라고 했잖아.

백성들이 나를 배반하도록 만든 건 바로 너야.

나의 충실한 신하들이 모두 나를 배반한 것도 바로 너 때문이야."


네로는 황후 포페아에게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너야말로 사악한 악마란 말이야." 하고 부르짖으면서 그녀를 목졸라 죽인다.


이때 오래 전 네로 황제에게 쫓겨났던 시녀 악테가 나타난다.

네로는 악테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벌써 오래 전에 내가 널 쫓아냈는데 너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는 거야"


네로를 진심으로 섬겼던 시녀 악테는 대답한다.

"언젠가 제가 필요하실 때가 올텐데 그 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렸었지요."


네로는 악테에게 "내게 반항하는군(Defied me), 없어져버려(Begone!)......

악테, 근데 저들이 날 어떻게 할까?(Act Ⅱ what will they do to me")"


악테 ; "죽일겁니다. (They will kill you)"
네로 ; "그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악테는 네로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건네며 말한다.
"당신께선 이제까지 괴물처럼 살아오셨어요.

이제라도 황제답게 당신의 손으로 스스로 생을 마치세요.

(You lived like a monster. Now die like an emperor my own hand)"


그러자 네로 황제는 말한다.
"난 괴물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 신이 그렇게 한 거지 ( I didn't wish to be amongst the gods willed it)"
하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내탓이 아니라 신의 탓이라고 부르짖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9주기를 맞이하면서 괴물로 살고 있는 네로의 후예들을 본다.
기독교인을 탓하고 시민들을 탓하고 근위병들을 탓하고 마누라를 탓하면서 목졸라 죽이고

마침내는 신을 탓하는 네로의 후예들을.


2019. 05. 19



 

가정 아끼듯 학생 사랑하신 선생님 나의 선생님 / 최 민 화

 

김찬국 선생님은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번으로 만나 뵙게 된 분이고, 첫 번째로 강의를 듣게 된 분이고, 이 후 나의 삶에 음으로 양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선생님은 강의 시간마다 우선 출석을 부르고 학생 하나하나 얼굴을 모두 확인하신다. 결석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형편과 사정을 묻고 살피신다. 그런 연후 학생들의 안부를 위해 함께 기도드린다.

구약개론 시간에는 기도를 마친 다음 하루 한 학생씩 차례로 일어나 시편 23편을 영어로 외우게 하신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머리에 쥐가 날만큼 극심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한 치의 예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하고 엄격한 자세와 표정으로 학생들의 기를 여지없이 분쇄시켜 버리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외울 수밖에. 나는 그 후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온 시편 23편을 지금껏 영어로 외우고 산다.

입학 후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선생님은 구약개론 시간에 느닷없이 영문 시사주간지 <TIME>을 구입해서 서너 페이지를 번역해 리포트로 제출하라신다. 그 당시는 복사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여서 책을 직접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일에 맞춰 대충대충 리포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선생님은 2주 쯤 후에 빨간색 볼펜으로 번역이 어설픈 내용을 일일이 지적해 놓으신 리포트를 내게 돌려 주셨다.

매주 월 수 금 제3교시가 수업 시간이면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도 같은 시간에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과목 시험만큼은 시험기간 마지막 날, 마지막 2 시간에 걸쳐 치르신다. 우선 주관식용 빈 시험지를 두 장씩 나누어 주시고 칠판에 시험문제를 적으신다. 2시간 동안 답안을 충분하게 적을 수 있도록 탁자 위에는 빈 시험지가 놓여있다. 시험이 끝나고 1주일 후에는 어김없이 학점을 적어 시험지를 돌려주신다. 그리고는 1주일 후에 재시험을 치루겠으니 학점에 이의가 있으면 재시험에 응하라고 하신다. 처음 중간시험에서 나는 애매하게 C학점을 받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또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재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재시험 문제가 중간시험 문제와 같은 거였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나는 당연히 재시험을 치렀다.

중간고사 후 숨 쉴 겨를도 없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구약개론 참고도서를 읽고 200자 원고지 30매 분량의 리포트를 제출하라 하신다. 나는 역시 마감 시간에 허둥지둥 리포트를 제출했다. 2주 쯤 후에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리포트 페이지마다 빨간색 볼펜으로 원고지 쓰는 법과 맞춤법을 꼼꼼히 지적해 놓고 내게 돌려 주셨다. 그리고는 바로잡아 다시 작성해서 제출하라신다. 다시 작성해서 제출한 원고지를 선생님은 또다시 빨간색 볼펜으로 띄어쓰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적해서 내게 돌려 주셨다. 훗날 나는 피치 못할 형편과 사정으로 시사 월간지 편집 일을 맡는 등 20년 가까이 출판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해 왔다. 70년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었던 시기에 영문 시사주간지를 그때그때 살펴보는 습관과 원고지를 바르고 철저하게 작성하는 일은 바로 나의 직업이 되었던 것이다.

6월 중순 쯤 일까? 봄 학기 강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선생님은 수강생 모두를 댁으로 초청하여 성창운(윤순) 사모님과 가족을 일일이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장래의 가정 분위기를 현장에서 체험하며 배우도록 하신다. 그러니만큼 입학해서 한 학기만 지나면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고 성내운 교수님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신 사모님을 비롯해서 당시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딸 성혜, 서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들 창규, 그리고 중학생 초등학생이던 홍규, 은규 등 온 가족과 학생들이 함께 허물없어진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내가 수업 받고 있던 반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매 학기마다 매 년마다 선생님은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듯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함께 어울리게 하신다. 선생님께 한 학기만이라도 수업을 받아 본 학생들이라면 아마도 이 분위기, 이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게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수업을 받은 제자에 그치지 않고 섬기시는 교회에서, 이웃에서, 사회에서, 선생님이 가고 머무시는 모든 곳에서 뵐 수 있는 모습이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1972년에 복학하여 19743학년에 재학 중 43일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선생님은 그 해 연세대 신과대학장이셨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으면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김찬국 선생님께서 교수님들과 함께, 학생들과 함께,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나와 고난당하고 있는 나의 동료들을 염려하고 걱정하시어 간곡히 기도하시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생님께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들어오셨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선생님이 나로 인해서 구속되신 것이 아닌가 여기실 분들이 계실텐데 선생님의 구속 내용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선생님은 1973년 말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셨다.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418일 유신헌법 비판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 하지만 새 학기를 앞두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유신운동의 기세가 더욱 강렬해지자 박 정권은 197443일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최고 사형까지 처벌하겠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선생님은 대통령긴급조치법 1호와 4호 위반, 국가내란 선동 혐의로 구속되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확정되어 복역 중 1975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셨다.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되었던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성윤순 사모님이 매일같이 서대문구치소를 찾아가 담장 안을 바라보며 선생님을 염려하며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있을 적에 선생님과 사모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빨랫감을 넣어주고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빨랫감 팬티 속 고무줄에 깨알같이 글씨를 적어 무려 10여 개월 동안 비밀리에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름하여 고무줄팬티 통신은 그 애절한 사연과 함께 지금도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장남 창규(산부인과 전문의)가 보관하고 있다.

 

 

 석방 후 연세대학교에서 76개월 해직되어 계신 동안에도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시집 등 그 당시 판매 금지된 책들을 선생님께서 커다란 가죽 가방 가득히 넣어 둘러메고는 모임이 있을 적마다 부지런하게 팔러 다니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내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근무할 적인데 선생님께서 연구원 간행물을 주문하고 판매하는 량과 금액이 상당했다. 선생님은 좋은 책을 보급하고 어려운 필자나 출판사를 돕고 더불어 돈을 모아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넣어 주시기 위해서 구차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작은 일을 참으로 열심히 부지런하게 꽤 오랫동안 하셨다.

1978년 선생님은 나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 주셨고 이대입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나의 아내를 선생님과 사모님은 각별하게 챙겨 주셨다. 1987년에는 위암 투병 중이던 아내를 약국으로 방문하여 당시에 적지 않은 거금 30만 원을 아내 손에 꼬옥 쥐어 주시면서 다른데 쓰지 말고 꼭 맛있는 거 사먹으라셨다.

1990년 선생님께서 연세대학교에 복직되어 부총장으로 재직하실 때, 선생님은 내게 학교에 다시 복학하여 졸업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네 차례 실형을 사는 동안 학교에서 일곱 차례 제적을 당한 상태였다. 나는 다시 복학해서 학교를 졸업해야 할 필요성도 의미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벌여 놓은 사업도 있고 아내의 병을 돌보아야 할 일도 있어서 학교 수업까지 병행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선생님께 간곡하게 형편과 생각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의 사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3학년으로 복학하면 필요하게 될 2년 동안의 등록금을 대체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정년퇴임하시기 전에 내가 졸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시면서 막무가내로 강요하신다. 나는 선생님의 끈질긴 집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여겨서 3학년에 복학하여 1992년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내가 새삼스럽게 졸업식장에 참석할 리 없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계셨는지 선생님은 내게 굳이 전화를 걸어, 내 아내와 어머니 아이들까지 데리고 졸업식장에 반드시 참석한 연후에 본관 건물 앞에서 만나 우리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셨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지 22년 만에 졸업하게 된 일은 그 해 전국 모든 대학의 졸업 시즌에서 톱뉴스가 되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몇몇 종합일간지에서는 특집 기사로 소개되었다.

선생님은 200981982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소천하신 후 사모님께서는 2011년 고 김찬국 교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시고 마침내 2013113일 김찬국 교수님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확정되셨다. 이로써 선생님께서는 1974년 이래 선한 싸움을 하다가 불법으로 구속 수감되고 실형을 언도 받은 후 전과자의 신분으로 경제적 사회적 핍박을 받아가며 광야를 떠돌던 생활을 포함하여 40여 년 만에, 소천하신 지 4년 여 만에 비로소 온전하게 당신의 신분과 권리를 되살릴 수 있게 되셨다.

김찬국 선생님~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늘 사랑이 넘치시던 선생님, 참으로 선하고 인자하고 거룩하신 선생님, 인간이 하나님일 수 있다면 세상에서 딱 꼽을 수 있는 주 하나님이신 선생님. 이 글을 쓰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은 선생님께 어린 추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문일 게다. 아니 이 땅에서 다시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뵐 수가 없어서 일게다.

김찬국 선생님~ !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평안하시고 세상에 남아 있는 저희를 생전에서처럼 부디 잊지 말고 살펴주옵소서.

 

한겨레신문 2009년 08월 21일

[가신이의발자취] 가정 아끼듯 학생 사랑하신 ‘나의 선생님’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
» ‘고무줄팬티 통신’
선생님은 제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만나 뵌 분이십니다. 첫 만남부터 환한 얼굴에 다정다감함이 온 몸에서 배어 넘쳐흐르는 인상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때로는 시대의 예언자로 단호하십니다. 수업 중에는 결석한 이들의 사정을 일일이 확인하고 안부를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빈틈없이 엄격하고 철두철미하게 가르치십니다. 영어시간도 아닌 ‘구약개론’ 시간에 느닷없이 시사잡지 <타임>을 구입해서 서너 장씩 번역해 오라고 하십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과제로 200자 원고지에 리포트를 작성해 오라 하십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원고지 쓰는 법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검토하고 빨간색 펜으로 수정, 지적해서 학점을 달아 되돌려 주십니다. 두 달 남짓 지나서는 신입생들을 모두 선생님 댁으로 초청하여 성창운(윤순) 사모님과 가족을 일일이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장래의 가정 분위기를 현장에서 체험하며 배우도록 하십니다. 휴교령 등으로 등교를 할 수 없을 때에도 당신 수업만큼은 댁으로 학생들을 모아서 꼭 마무리를 하십니다. 그러니만큼 입학해서 한 학기만 지나면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고 성내운 교수님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신 사모님을 비롯해서 딸 성혜, 아들 창규, 홍규, 은규 등 온 가족과 학생들이 함께 허물없어집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제 수업반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 학기마다 매 년마다 선생님은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듯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함께 어울리게 하십니다. 선생님께 한 학기만이라도 수업을 받아 본 학생들이라면 아마도 이 분위기, 이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수업을 받은 제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섬기시는 교회에서, 이웃에서, 사회에서, 선생님이 가고 머무시는 모든 곳에서 뵐 수 있는 모습입니다.

1974년 연세대 신과대학장 재직 때 서슬퍼런 긴급조치법 1호와 4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됐던 군사독재시절, 유일하게 내보내고 들어올 수 있는 빨랫감 팬티 속 고무줄에 소식을 적어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10여 개월 동안 비밀리에 주고받은 ‘고무줄팬티 통신’(사진)은 애절한 사연과 함께 소중한 유물로 남을 것입니다. 7년 6개월 해직되어 계신 동안에도 어려운 출판사를 돕고 좋은 책을 보급하고 더불어 돈을 모아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넣어 주시기 위해서 그 연세에 커다란 가죽 가방 가득히 책을 넣어 메고는 모임이 있을 적마다 부지런하게 팔러 다니시던 모습하며, 제게 주례를 서 주시고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제 아내를 찾아 어려운 살림에도 87년 당시 적지 않은 거금 30만원을 손에 꼬옥 쥐어 주시면서 다른 데 쓰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시던 선생님,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늘 사랑이 넘치시던 선생님, 참으로 인자하고 아름답고 거룩하신 선생님, 인간이 하나님일 수 있다면 세상에서 딱 꼽을 수 있는 주 하나님이신 선생님. 이 글을 쓰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은 선생님께 어린 추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문일 겁니다. 아니 이 땅에서 다시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뵐 수가 없어서 입니다.

김찬국 선생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평안하시고 세상에 남아 있는 저희를 생전에서처럼 부디 잊지 말고 살펴주옵소서.

 

불초 제자 최민화 올림 / 전 환경관리공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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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잔상(殘想)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최 민 화

     Ⅰ.


  1978년 늦여름인가,

나는 원효로 함석헌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기억을 더듬고 가다듬고 해도 별로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는 아니었던 듯싶다.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다가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으로,

박선균 목사님께 ‘틈나는 대로 열심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다’는 다짐을 덧붙여서

다시 떠넘겨(?)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이야말로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그 날 함 선생님의 표정은 여늬 때와 뭔가 좀 다르셨다.

약간 상기되어 흥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시기도 하고, 

‘허……참!’ 하시기도 하고, ‘생각’이 많으신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지 그랬다.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심정을 상하신 일 같기도 하고, 곁에서 느끼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세요?”하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계속하신다.

 

  “허…참! ……이거 원 …… 허…참!”

 

  나 역시 곁에서 계속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나 깊은 ‘생각’이 있으신 것이리라 여겨지고,

혹시 내가 곁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신가, 해서 자리를 물리려 했다.

 

  “저기 가 있겠습……"

 

하고 외채로 떨어져 있는 〈씨알의 소리〉 사무실을 향해서 몸짓을 돌리려 하자,

선생님은 때 맞추듯 ‘허……참!’ 하시고는 ‘이거……어떡허지?'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말씀이시다.

 

  “무언데요?……”

한동안 도대체가 영문을 알 길 없어 하는데

 

  “허…참!……아 글쎄……”

하면서 계속 뜸을 들이신다

 

  “허……저…계 선생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순간 나는 ‘계훈제 선생님 신변에 무슨 일이 닥쳤나’ 하고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처럼 함 선생님께서 심각하고 중차대하게 여기시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뭐하고 다니느냐는 핀잔은 아니실까? 하는 자책감이 뒤엉켰다.

 

  “계 선생님께서 또 잡혀 가셨어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함 선생님께 여쭈었다.

 

  “허!……그게 아니고 ……계 선생이……혼례를 올리신대”

 

느닷없고 뜬금없는 말씀에 순간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뒤죽박죽이고,

어안이 벙벙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천하의 중앙정보부를 따돌리고,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뚫고,

소리소문 없이 혼례를 올리시기까지 이르른다는 게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제 하에서 김구, 박헌영 등 많은 분들이 치열한 운동을 벌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안식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일은 감시 지역을 벗어나 있거나,

감시망을 피해서 철저하게 잠적한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도대체 복장이나 외모가 남다르신 데다가 백주에 드러내서 활동할 일 다 하시고,

야밤에 비밀하게 결사할 일 다 하시면서,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뜸뜸이 이어지는 함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방금 계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단다. 

동거하신 지도 10 년 여가 되었단다. 

 

초등학교 4학년 되는 아들도 있으시단다. 

사모님은 화가이신데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란다. 

 

그러저러해서 그동안 사모님 집안을 위해서도 그렇고,

드러낼 수가 없는 형편이시었단다. 

 

그런데 아들이 커 가면서 사리분별할 나이에 접어드는데,

언제까지 세상 모르게 숨고 묻어 두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우선 함 선생님께 먼저 이실직고해서 아뢰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 가까운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시늉이나 갖추고 싶으시다는 거다.

 

  뜸뜸이 말씀을 이어가시는 함 선생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나에게까지 이제껏 감쪽같이 속이다니’ 하며 못내 서운한 듯도 하시고,

‘그 오랜 세월 무서운 감시망을 피해서 내외분 모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나,

참으로 무서운 분들이구먼’

하며 안쓰럽고 경외하는 표정이기도 하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혼자 될 줄로 알았는데,

장성하는 아들까지 있다니’하며 대견하고 감격해 하시는 듯도 하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

  나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인 채로 두서도 없는 말씀을 드리자,

 

  “…그렇지?……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먼……”

하신다.

 

 

     Ⅱ.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소리’ 소문으로 번졌다. 

 

아예 집안 일을 가지고 떳떳하게 자랑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야말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몸둘 바를 몰라 하고,

하염없이 부끄러움을 타면서, 차라리 그냥 묻어 두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계 선생님의 심정은 이미 아랑곳없다.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혼례식 자체가 집안과 개인사를 넘어선 시대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한판 크게 벌려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박정희 유신정권이 말기 증상에 단말적 기승을 부리기로서니,

관혼상제의 풍속까지야 못하게 막겠느냐는 거다.

 

  시공을 넘어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모든 언론과 잡지에서마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순애보로 불꽃튀는 취재 경쟁을 벌이고 난리를 치면서,

텔레비전 뉴스로도 특종감이겠지만,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두 분의 혼례를 알리는 청첩장을 띄울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 해 초겨울,

이미 해가 떨어져 컴컴한 야밤에,

비밀리 마련한 도심 한복판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살피며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문화 예술인, 언론인, 노동 운동가, 청년 운동가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며 계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로

장내는 삽시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고 은 시인의 비장한 감동과 감격어린 시 낭송이 이어지고,

청년 문화패의 사물놀이로 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분위기는 한껏 절정에 달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정보 기관에서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안절부절 야단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선우와 청년 풍물문화패는

역사적인 혼례식의 제물이 되기를 기꺼이 각오하고 자처하듯,

한꺼번에 엮어져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장례식으로는 일제 치하  3.1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 고종 황제의 국장에서부터

민족 사회에 큰 관심과 영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연이어 있어 오다시피 했지만,

축복받아야 마땅할 혼례식으로 감시망을 뚫고,

감시 병력에 첩첩이 둘러 싸인 채, 기습 작전을 감행하듯,

세상 떠들썩하게 야단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 싶고,

그때까지 보고 들은적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혼례식은 한 가정과 한 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기억될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곧 이어서 다가올 앞날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유신 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열망은

재야 민주화 운동권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든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누군가가 쓴잔을 받아 마셔야 할 것 같고,

누군가는 피하려고 해도 받아 마실 수밖에 없을 운명일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그러니만큼 차라리 어둠의 세력이 쳐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몸을 던져 뛰어들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계층과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 온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의논하고, 힘을 모으고, 승부수를 짜내는 동안,

10여 개월 전에 치루었던 계훈제 선생님의 성공적(?) 혼례 행사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방법이 되고, 전술 전략이 되었다.

충분한 훈련이고 실전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혼례 행사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살아나고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치루던 것을 백주 대낮으로 옮기고,

비밀하게 음식점을 빌려 치루던 것을 명동 한복판 YWCA 대강당으로 옮겼다.

 

계훈제 선생님 역으로는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이 맡고,

김진주 사모님 역으로는 윤정민이라 하여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 

 

등장하는 하객들도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들이,

기척을 살피고 발소리를 죽이며 삼삼오오 삽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장면도 같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기관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면도 같다.

 

  하지만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과 역할은 전혀 달랐다. 

 

인물로는 정보기관원이 아니라 비상계엄군이 맡고,

배경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군부 세력이 맡았다.

역할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연행하고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식순을 진행하자마자 단상 쪽에서부터 의자 내던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무장한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마구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쌓인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비상계엄군은 함 선생님을 비롯해서

목사님과 교수와 문화예술인, 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끌려간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화발과 5파운드 몽둥이로,

갖은 고문과 능욕으로 처참하게 수모를 당했다. 

 

함 선생님 역시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 치하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수모를 적잖이 당하셨다. 

 

그리고는 소위 ‘명동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 이름하여

140여명이 구속 구금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시금 돌이켜 보면,

계훈제 선생님과 김진주 사모님의 혼례식은,

약력과 활동 경력 등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어 흔적없이 빠져 있지만,

이르르게 되기까지 저간의 사정도 그러려니와 행사 자체가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 사회 운동에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길이 기억되어서 마땅할 일이다.

 

 

     Ⅲ.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시고

경성제대에 다니시면서 일제의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신다.

 

해방 직후 민족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시고,

이후부터서는 학생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또한 사회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평생을 한치의 틈도 없이

투쟁의 역사, 저항의 역사 현장 한 복판에서 올곧게 보내오신다.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피 생활도 하시고,

몇 차례씩 구속되어 감옥살이도 하신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어언 30년 여를

올곧지 못하게 허둥거려 온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모습,

오른 손을 치켜들고 주의 주장을 외치시는 모습보다는,

자꾸만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선하게 떠올라 눈에 어리고, 눈시울을 가린다.

 

  연세가 드실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겸손하신 모습, 

겸연쩍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는듯한 천진난만하신 표정,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국민복장에 흰 고무신,

일찌기 폐를 잃어 비스듬히 기울어지신 어깨,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손을 비비거나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거나,

손을 입가에 대고 녹이거나 하는 법 없으시고,

아무리 덥다고 국민복 단추 두어개 쯤 풀어 제치고 부채질하는 법 없으신모범생도 같은 품성,

 

사람의 심성이 제아무리 맑을 수 있고,

감성이 제아무리 고울 수 있다고 한들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반듯하고 올곧기는 또 어떠시고…….

 

 

  김진주 사모님께!

 

  사모님,

 

이제 계 선생님께서 이승의 생을 마감하시고 함 선생님 곁으로 가셨네요.

함 선생님께서도 아주 반가이 맞아 주실 꺼예요.

 

함 선생님 먼저 가 계신 동안,

복잡다단하게 얼키고 설켜서 처신이 만만치 않던 세상살이에,

드러내 놓지 못할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느냐고 위로해 주실 꺼예요.

뜨겁게 뜨겁게 안아 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실 꺼예요.

 

생전에 늘 마음과 뜻을 같이 하시던 장준하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안병무 박사님, 장기려 박사님과도 반가움에 겨워 그러실 거구요.

 

모두들 사모님의 안부를 물으시고

참으로 그렇게 고마워 하실 수가 없을 꺼예요.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이 사모님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저간의 사정을 들으시고,

충격과 감격으로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흥분을 삭이지 못하시고,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어요.

고금동서에 이런 기상천외한 드라마가 다 있나 하셨어요.

예단을 마련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정성스레 준비해서 보내셨어요.

 

여곤이가 의학도로 훌륭하게 다 커서 이제 장가갈 나이가 꽉 찼다는 기별을 들으시면

아마도 천상에 없이 기뻐하실 꺼예요.

 

혹시 〈씨알의 소리〉가 다시 복간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으신다면

더없이 기뻐하실 꺼구요.

 

  함 선생님은 이제 사모님을 염려하고 걱정하실 꺼예요.

계 선생님과 천상에서 평안하게 함께 지낼 테니까 슬픔에서 빨리 딛고 일어서시라 하실 꺼예요.

어쩌면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보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신 줄로 여기실 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사모님!

빨리 일어나셔서 문익환 목사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랑 안병무 박사 사모님이신 박영숙 선생님,

장준하 선생 사모님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오래오래 사세요.

장기려 박사 사모님은 평양에 계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요.

 

그러셔야 두 번씩 강제 죽임을 당하고서 네 번째로 마침 마악 꿈틀이고 일어서려는

저희 〈씨알의 소리〉 식구들도 ‘생각’을 더욱 가다듬게 될 거 아니겠어요?

 

사모님들께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소중한 삶을 귀감 삼아서

저희도 크신 뜻을 깨우치고 다짐하며 이어받아가게 될 거구요.

 

  사모님!

 

사모님께서도 그러셨지만,

계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불초를 볼 적마다,

무엇보다 먼저 위암 수술을 받은 안사람 건강이 어떠냐고 늘 염려하시면서 따뜻한 안부를 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수원에서 함께 일을 보다가 선생님 비보를 받고 급히 빈소를 찾아 뵙게 되었어요.

 

한없이 선하고 인자한 표정이신 선생님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를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마악 다시 태어난 〈씨알의 소리〉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두서도 없이,

잔머리에 떠오르는 자잘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미천한 글을 올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드러내서 자랑삼을 것도 아니라고 여기실 일들을,

그래서 굳이 묻어 두고 계신 일들을

이렇게 들추고 밝혀서 씻지 못할 누를 끼치는 건 아닌지 하는 조심과 배려도 없이,

촉박한 시간에 쫓기어서 소홀하기 짝이 없는 글을 올리게 됨을

부디 용서하시고 넓으신 아량으로 양해해 주세요.

 

  사모님!

 

이제 세상에서 마무리하셔야 할 일들도 많은데,

더는 깊이 상심하지 마시고, 다시금 건강하게 일어나세요.

계 선생님께서 못 다하고 가신 몫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불초    최 민 화 드림.  (전 씨알의 소리 편집장) / 씨알의 소리 제147호 (1999년 3.4월호)

 


 

    환경관리공단을 떠나며 3년 여 동안이라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공직생활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정든 공단을 떠납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무모하게 받아든 직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환경 전문기술 분야에 문외한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 생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생소한 저와 함께 임직을 원만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감사실 직원들께 이 자리를 빌어 우선 먼저 깊은 신뢰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불어서 처실장 님과 팀장 님들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 그리고 이사장 님을 비롯한 임원 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는 평소에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가치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 왔습니다. 제가 취임했을 적엔 감사라는 직분에 우선적으로 적응함은 물론이고 전문성을 배우고 익혀서 남들 못지않은 업적을 남기거나 능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마는 그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공공기관이 취해야 할 자세와 역할을 새기고 직원 여러분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도록 자세를 가다듬어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직분을 마치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채 열정을 다 쏟지 못하고 정성도 부족했던 것들이 참으로 아쉽고 미흡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공단을 일터로 삼아서 섬겨 온 경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걸쳐 오지 중에 오지에 산재해 있는 환경시설공사 현장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직원 여러분과 한나절 하룻밤이나마 함께 했던 일들... 가정과 친인척 주변 관리는 돌볼 겨를없이 오로지 공단 업무와 자기관리에 온몸을 내던져 헌신하는 모습들... 이런 임직원 여러분과의 만남은 제게 매우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전문성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미흡한 처신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 했을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보아주시고 음으로 양으로 격려를 주신 분들께 이 시간을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쉽고 미흡한 흔적을 남기고 임기를 마치는 마당에서 저는 여러분께 감히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정치사회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던 70년 ~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생명과 재산을 바치고 온 몸을 내던져 저항한 일들로 말미암아 미처 이룰 수 없었습니다마는 여러분은 이제 맡은 바 직분은 물론이거니와 기술과 전문성을 한껏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발전하는 만큼 우리 공단도 발전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술과 전문성이 성장하는 만큼 우리 국가도, 국민도 그만큼 커집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역량이 커져야 우리 공단도, 국가도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보다 더 지혜롭고 소신있고 헌신적인 환경관리공단인이 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요. 그래야만이 여러분 자신에게 뿐만아니라 우리 공단에도 마침내는 국가와 우리 민족에도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 오신 정선순 감사님은 저와 함께 30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 그리고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서 헌신해 오신 분입니다. 아마도 제가 부족하고 소홀해서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겨 둔 일들을 잘 해결해 나가실 분이라 믿어서 든든하고 홀가분하게 떠납니다마는 여러분께서 제게 가져 주셨던 것보다 더 큰 관심과 격려 그리고 배려와 안내를 신임 정선순 감사님께 베풀어 주시기를 각별하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환경관리공단 여러분과 함께 했던 지난 3 년 여 동안이야말로 제게는 참으로 뜻 깊고 자랑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섬기실 우리 공단과 가정과 주변 두루두루에 건강과 평화 그리고 발전과 희망이 늘 함께하시길 빌어마지않습니다. 감사합니다 ~ ~ 2007년 8월 최민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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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혁신, 그리고 명상에 대한 소고(少考)

 

 

 1. 요가 수행

 

나는 70 ~ 80 년대 여섯차례에 걸쳐
유치장과 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바 있다.

 

그때마다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환경,
불안과 두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진 엄청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는 곧바로 요가를 시작했다.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요가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두 시간 여 그리고 저녁에는 취침 전까지 세 시간 여 동안
요가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1974 년 내가 요가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마땅한 요가책이 나와 있지 않아서
나는 일본에서 출판된 책을 교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해방 후 반일 교육의 영향으로
일본어를 제 2 외국어 선택 과목에서도 배제하고 있을 때여서
요가책의 내용을 터득하기 위해 나는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

 

특히 생체학에 관련된 용어들이 많아 애를 먹었다.
덕분에 일본어는 신문을 대충 이해할만할 정도로 배우게 되었지만...

 

요가 중의 요가 모든 체위 동작 중의 왕이라고 하는 물구나무서기를
나는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머리를 대고 얼마든지 오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요가의 이론과 실습을
내가 구속되어 있던 기간을 통산하면 5 년 여 동안 전공한 셈이다.
 
요가에서는 변화와 균형과 안정을 3 대 원칙으로 삼고 있다.
즉 변화를 꾀하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렇듯 요가에서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변화를 중시한다.


사람의 몸일 경우에는 먹은 것을 배설하는 흐름이 곧 변화다.

정지해서는 안 된다.
버릇이나 습관은 변화가 아니라 정지다.

 

계절이 변하듯 자연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인간의 감정도 싫건 좋건 변한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도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균형은 어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부분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몸에서 긴장과 이완, 좌측과 우측,
산성과 알칼리성의 균형을 요가에서는 매우 중요시한다.

 

요가 수행의 대부분은 치우침을 수정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안정은 불안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가 바로 안정이다.


음식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양식이 된다고 자기에게도 좋은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

체조와 훈련에 있어서도 자기 신체에 맞지 않는 것은 무리이며
부질없고 불안정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에게 알맞은 것인가 하는 것은
훈련하면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와 균형과 안정을 3 대 원칙으로 해서
요가는 몸을 통일하고 마음을 통일하며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는 호흡식을 결론으로 삼는다.

 

요가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불상처럼 앉아 있거나 온 몸을 곡예사처럼 꼬고 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체위 훈련은 모두
몸과 마음과 호흡을 조절하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다.

 

앉음새가 바르지 못하면 허리가 아프다.
요가에서는 바르지 못한 앉음새를 바로 잡는다.

 

비정상적인 식생활은 병의 원인이 된다.
요가에서는 비정상적인 식생활을 바로 잡는다.

또한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친다.

 

눈에 보이는 신체 활동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
의식할 수 있는 자신과 무의식적인 자신의 활동,
이 모든 것을 조화하고 통일해서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요가 수행의 목표이다.


 

2. 단전과 호흡

 

사람의 몸은 근육과 뼈와 내장으로 구성된다.
이 세 부분의 관계가 원활하면 바른 자세 바른 동작이 된다.

 

협력 방식에 이상이 있으면 이상한 동작이 유발된다.
이 세 부분의 협력은 각자의 특질을 살려 나갈 때 안정을 취한다.
즉 근육은 부드럽고 뼈는 단단하며 내장은 신축성을 마음껏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근육에는 이완되는 것과 수축되는 것이 있는데
각자의 활동이 강할수록 유연성이 풍부해진다.

 

따라서 근육을 이완시키고 수축시키는 자극이 필요하다.
하지만 근육에는 수축되는 자극이 많으므로
보통 동작에서는 이완시키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바른 동작 바른 자세를 가지려면 단전의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단전이란 역학으로나 생리학으로나 몸의 중심점이 되는 곳이다.

 

요추와 항문과 배꼽을 연결한 삼각형의 중심이 단전이다.
그러니까 배꼽 밑으로 5 cm 쯤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생리학적으로 말하면 단전은 자율신경과 체액의 균형을 이루는 중심이 된다.
이 단전에만 힘을 넣고 딴 곳에서는 힘을 빼야 한다.

이런 상태가 될 때 심신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다.


단전의 활동을 강화하려면 상반신의 힘을 빼고
하반신에 힘이 모이도록 하면서 항문을 오무린다.

 

가슴을 펴고 엄지발가락과 오금에 힘을 준다. 

어깨와 목, 손에서는 힘을 뺀다.
목의 근육을 반듯하게 하고 깊숙히 호흡한다.

 

사람이 죽으면 항문이 열린다.
항문이 오무라져 있는지 아닌지를 보고 생사를 구분하기도 한다.

 

물에 빠져 생사지경에 처했을 때 항문을 오무리고 있으면 구조되는 수도 있다.
항문을 오무리면 몸의 안정력이 높아 진다.

 

인간은 먹지 않고 물만 마셔도 50 일이고 60 일이고 살 수 있지만 호
흡은 단 5 분만 멈추면 죽는다.

그러므로 호흡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다.

요가에서는 호흡을 매우 중요시한다.


단전호흡은 요가의 근본이다.
모든 체위 동작도 호흡과 연결하고 일치해야 한다.

 

사람의 피부는 외부의 공격 즉 벌레에 물린다거나 접촉에 의해서 상처가 생기면
긁기도 하고 씻기도 하면서 스스로 조절할 수가 있지만
뼈와 근육과 장기 등은 요가의 호흡과 체위 훈련을 통해서라야 조절할 수 있다.

 


3. 명상과 정신 통일

 

요가 수행의 진수는 명상이다.
명상의 의미는 넓고 깊고 높고 거룩하게 느끼고 생각하며 진실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생활 가운데서건 사이버상에서건
어떤 사람과 우연히 만났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단지 그 때, 그 곳에서,
그 사람과 만났다는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될 뿐이지만
명상을 통해서는 우주 만물 가운데 이 지구상에서,
한반도에서, 멀리 조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아무리 사소한 인연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나 나 자신이나 선조 대대로 내려오면서
어느 조상 한 분이 원해서건 아니건 다른 분과 혼인했더라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 때, 그 곳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란 얘기다.

 

우주 만물... 지구상의 시간과 공간...
모든 환경이 한치도 틀림없이 일치하고
빈틈없는 질서로 선택되어서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란 의미다.
 
명상은 요가의 근본 훈련이요
요가는 바로 명상 행법을 위하고 명상을 뜻하는 말이다.

 

명상은 주의 집중과 의식 집중 훈련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의와 의식 집중을 위해서는 여유가 있고 편안할 것과 호흡이 고르고 깊을 것
그리고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기 쉬운 상태일 것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 감각이나 사고 활동이 강해 진다.


이를테면 사람이 드러누어서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할 때는
주위에 조그마한 소리도 크게 들린다.

 

감동한다든지 놀란다든지 흥미로운 사건을 접한다든지 절박한 상황 등등에서는
자연히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게 된다

.
따라서 그런 조건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다.

주의 집중법은 몸을 통한 통일 훈련법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뭔가 한가지 소리에 매달려 그 소리에 집중한다.
 
나는 감옥에서 명상에 들어 갈 때 어떤 날은 풀벌레 소리에,
어떤 날은 하수구로 흐르는 물소리에,
어떤 날은 빗소리에 바람소리에 매달려 집중하곤 했다.

 

단전 호흡을 하면서 한 소리만 집중해서 듣고 있으면
그 소리의 리듬과 음색과 변화의 흐름이 느껴지곤 한다.

 

처음에는 소리를 붙잡고 소리에 매달리면서 집중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의식의 세계 명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요가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음(音),
즉 소리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스스로 소리를 낼 때 숨을 오래 내쉴 수 있는 한 길게 내쉰다.

처음에는 가만히 소리를 내고 이 소리에 집중하지만
나중에는 소리를 멈추어도 마음 속에서 계속 소리를 내게 되고
그 소리에 따라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요가에서 소리로 주의 집중하는 방법을 근거로
불가에서는 '음 ~ ~ ~' 하는 수행법이 있다.

 

의식 집중법은 마음을 통한 훈련법이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관념에 집중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무(無)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무엇인가?'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문제에 생각을 집중한다.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생각에 생각을 집중함으로써
생각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긴장과 이완이 가장 균형잡힌 상태가 곧
가장 안정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4. 선정과 무심

 

명상 훈련에는 몇 가지 수행법이 있다.
그 중 선정행법에는 눈을 감고 하는 경우와 실눈을 뜨고 하는 경우,
눈을 크게 뜨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주로 눈을 감고 수행했다.

 

좌선하고 턱을 끌어 당긴 상태에서 단전 호흡을 하고
조용히 눈을 감은 다음 눈알을 양쪽으로 끌어 모은다.

그리고는 머리털이 머리 위로 힘껏 뻗쳐 올라가는 기분이 되게 한다.

 
즉 자기 머리 꼭대기로 하늘을 떠받치는 기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좌우로 넓게 벌려서 위로 치켜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내밀듯이 하면서 뻗쳐 준다.

 

이렇게 하면 자연히 단전에 힘이 집중되고 항문이 조여 진다.
등뼈가 펴지고 동시에 힘이 집중되면서 가슴에서 위의 힘이 빠져 나간다.

 

단전이 모든 균형의 통일점이므로 여기에 집중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몸의 안정력이 높아 지고 뇌의 안정도 높아 진다.

 

이렇게 해서 몸의 수행이 그대로 마음의 수양으로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면서 무심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무심(無心)이란 이것에나 저것에나 구애받지 않는 상태...
즉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서 사물을 대하는 마음이다.

 

이 무심의 상태를 자연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요가에서는 이 마음의 상태를 바른 마음이라고 본다.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으로 에고(ego) 즉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 되기 쉬운데
요가에서는 이 에고가 악을 만드는 근본이라고 본다.

 

무심은 자기 마음을 버리는 훈련이다.
무심에 이르기 위해 무조건 남에게 봉사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조건이 붙은 마음을 사욕이라고 한다.
이 사욕에서 불평, 불만, 분노, 저주, 증오 같은 것이 생기고
무리한 생각도 생기므로 사욕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조건을 붙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은 마음이 무심이다.
이처럼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마음이 가장 활발해 지는 것이다.

 


5. 무심을 넘어 기쁨으로

 

명상에는 이밖에도 삼매와 불성계발, 법열 행법 등이 있다.
삼매(三昧)란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자기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한마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대립이나 갈등,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나'와 '너'가 함께 살고 서로 살리는 세계다.

 

이를테면 인생을 오랜 세월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 온 할머니 할아버지...
행복한 부부 관계가 곧 삼매의 관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긴장과 경계,
갈등을 넘어서서 몸과 마음을 일치할 수 있는 상태가 곧 삼매의 경지다.

 

하지만 모든 인간 세계를 대상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이 삼매가 자기 마음에 실현되는 것이고
모든 이들의 마음을 바르게 받아들일 때
'사랑'도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와 '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그럴 때 삼매의 세계,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사랑의 세상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의 상태가 그대로 자기의 마음으로 될 때
비로소 진실한 일이 되고 일하는 기쁨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이 곧 깨달음이고 불성(佛性)이다.

 

불성이란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선택해서 부여된 특성이라고 요가에서는 말한다.
불성은 변화하고 진화하는 원동력이고 사물을 성화(聖化)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비단 요가나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원리와도 일치할 수 있겠는데
마음을 성화함으로써 인격자가 될 수 있고 석가의 마음, 예수의 마음이 됨으로써
참다운 감사와 기쁨이 생기고 예배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풀면 물이 물이라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목마른 짐승도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이 물을 자연이랄지 신의 사랑이랄지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마음'이 곧 요가에서 말하는 불성이다.

 

이와같은 '거룩한 마음'에서 바른 사고와 행동 방식이 나오고
올바른 해결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감사하게 예배하는 '거룩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 즉 법열(法悅)이 생긴다.

명상에서는 이 법열의 경지 즉 기쁨의 경지를 최고 목표로 한다.


요가에서는 '내 안에 신이 있다. 그 신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깨달음을 얻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신 즉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 즉 법열을 맛볼 수 있다.

 

이 기쁨의 경지, 법열 즉 니르바나(nirvana)의 경지가
요가의 가르침이요 목표이며 참 모습인 것이다.

 

다시금 풀어 보면 삼매의 단계는 흔히 독서삼매에 빠진다는 말처럼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 세계가 읽는 이의 마음과 정신 세계와
하나되고 통일되는 경지를 일컫는다.

 

철학적으로 풀면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
아무런 조건없이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의 마음으로 하나되게 하고 통일되게 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통한다.

 

여기에서 어머니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식을 대하듯이 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서로에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삼매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고 기독교적 사랑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불성계발은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에는 없지만
자식이 어쩌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보다도 더 이 세상 모든 것을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룩한 마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듯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하느님의 성령이 역사하심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마지막 법열의 단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즉  천국의 세계다.

 


6. 변화와 혁신에 대한 소고

 

70 ~ 80 년대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생활했던 분들이 대개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밖에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데 몰두했다.

 

외국어를 연마하고 역사와 문학, 신학 등을 공부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웠다.
특별히 오랜 시간에 걸쳐 정독을 필요로 하는 저작들을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더없이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환경,
서 있어도 한 방, 앉아 있어도 한 방, 누어 있어도 한 방에 가득찬다는
0.7 평짜리 독방에 갇혀서 절망과 불안으로 나날을 보낼 수는 결코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면 새 삶을 얻을 수 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과 경계심을 버리고 변화를 꾀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인류사회 전체가
가히 폭발적이라하리만큼 큰 폭으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생활이 되고 있다.
변화는 곧 삶이다.


변화하지 않고 정체되는 것은 곧 죽음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변화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요가 수행의 목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변화해야지만이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치고
눈에 보이는 신체 활동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
의식할 수 있는 자신과 무의식적인 자신의 활동,
이 모든 것을 조화하고 통일해서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활기찬 마음으로 희망찬 마음으로 변화를 즐기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고쳐야 할 바르지 못한 버릇이나 습관이 있듯이
변화와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도 장애 요인이 있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관심과 저항이다.

 

따라서 저항의 원인과 내용을 충분히 깨닫고 변화와 혁신을 추진할 때
그런만큼 실패를 방지하고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환경관리공단의 경우
나름대로 변화와 혁신에 대한 무관심과 저항의 내용을 파악해 본 바로는
우선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나 역시 임직원과 함께 참여해서 강의도 듣고 심도있는 토론도 하곤 했지만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어렵고 추상적인 전문 용어나 외래어를 사용하면서
강의하고 설명할 때는 듣고 나서 명쾌하고 알기 쉽게 정리되지를 않고
오히려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음은 우리 공단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으로
변화와 혁신으로 인해서 개인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를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때 저항하게 된다.

 

특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서 안주하려고 하는 직원들은
변화에 따른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해서 매우 배타적으로 저항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처실별 부팀별 사이의 경쟁과 이해 득실,
갈등 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저항도 있다.

 

이런 경우 양쪽의 힘겨루기와 무사안일, 보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업무에 큰 차질을 빗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공단의 경우 건설 현장을 예로들면
현장에서는 안전사고와 품질, 공기 단축 등 고유 업무에 집중하기도 벅찬데
지원 업무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정이 낭비되고
공기가 지연되는 등으로 고객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신뢰를 잃는 경우가 없지 않다.
 
위에서 대강 살펴본 것 외에도 변화와 혁신에 대한 무관심과 저항 요소는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이러한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파악해서 치유할 수 있어야지만이 건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요가와 명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족을 달자면
변화와 혁신은 우리의 목표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앞서도 말했듯이 희망찬 미래에 있다.
변화와 혁신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에 불과할 따름이다.

 

희망찬 미래란 변화와 혁신의 바탕 위에서 균형과 안정을 취하고
몸과 마음을 조화시켜서 자유로운 경지에 닿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불평과 불만, 분노와 저주와 증오 등 자기중심적 에고(ego)를 버리고,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간직한 채
서로가 서로를 하나되게 하고 통일되게 하는 사랑의 세상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우리 공단을 그야말로 환희의 세계, 하느님의 나라로 세우는 것이리라.     


2006년 6월 환경관리공단 사보


















 
공단소식 > 권두언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고 할 때 나는 주저 없이 함석헌 선생을 꼽는다.

함석헌 선생은 구한말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점점 기울어 가는 1901년에 출생하여 나라가 일제에 강점 당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가 3 . 1 독립운동 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쫓겨나고 정주의 오산고보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두 차례에 걸쳐 2년 여 동안 옥고를 치루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다시 두 차례 옥고를 치루었다. 분단 이후 남한 정부에서 수시로 가택 수색을 당하고 연행과 고문 조사를 당하다가 88세를 일기로 1989년에 서거하셨다.

함석헌 선생이 생전에 남긴 저서와 역서 강연록 등은 무려 100 여 권에 달한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사상가로 역사가로, 시인 종교인 언론인으로, 연사로 투사로 평화운동가로 아마도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분야에 두루두루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아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후 한 동아리 모임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후 나는 뜻을 같이 할 학생들과 함 선생님을 모시고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어 5년 여 동안 매주마다 함께 공부했다.

그의 사상은 폭이 너무 넓고 깊어서 미처 헤아릴 길이 없다. 그가 이미 삼십대에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했다. 오천 년 역사를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라고 하자니 왜곡이고 외세에 짓밟혀 온 치욕의 역사라 하자니 오천 년을 단일 민족으로 버티어 온 그 의미를 해석할 길이 없어 고난의 역사라 했다.

강한 자에게 유린당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고난이라 했다. 강도에게 농락 당하거나 강탈당하는 것을 치욕이요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힘있는 자의 논리요 강도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못나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탈한 저 일본 무리들이 날강도들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적 관점이 왕조를 위시한 지배 계급 중심 사관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우리 역사의 혼은 왕권을 감싸고도는 지배 계층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했다. 오히려 지배 계층에 의해서 역도(逆徒), 역적(逆賊)으로 몰린 이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역사의 숨결이요 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지배해 온 계층을 매섭게 비판한 반면 우리 역사에서 반역자로 처단된 묘청, 홍경래, 동학 그리고 지배층을 위해서 충성했으면서도 역적로 몰린 이순신이나 임경업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역사의 참 주인은 씨알이라고 보았다. 즉 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씨알과 그 무리인 민중이 바로 이 역사를 지키는 담지자라는 것이다.

1928년부터 함 선생님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와 수신(도덕)을 가르치셨다. 그 당시 학생들이 교사에게 불만을 품고 교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고 함 선생님만이 혼자 교무실에 남아 있게 되었다. 흥분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함 선생님께 손찌검을 해댔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계셨다. 후에 학생들이 함 선생님을 찾아가서 본의 아니게 큰 죄를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선생님은 그때 왜 손으로 눈을 가리웠습니까? " 하고 여쭈니 함 선생님은 "그때 내가 눈을 뜨고 학생들을 봤다면 서로가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나... 차라리 안 보고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게 편하지... 괜찮아." 하면서 기꺼이 용서해 주셨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동서고금에 걸쳐 숫한 예화와 실화가 있어 왔지만 참 스승의 모습을 이처럼 생생하고도 역동적으로 보여 준 사례는 없지 싶고 나 역시 이때까지 보고들은 적 없다. 참으로 두고두고 귀감 삼아서 마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1976년 6월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4.19 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유신 독재 권력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과 일상 생활,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 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이렇듯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탁상일기는 지금도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참' 사람이다. 그는 거짓은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만악의 근원이라 했다. 선생은 항상 '겸허'한 분이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았다. 언변과 학식과 덕망으로 볼 때, 그는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출중한 분이었지만 결코 자만한 적 없다. 오만하거나 권위주의적인 모습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은 '사랑'의 사람이다. 선생은 내게 유신 독재 권력과 대항해서 싸우더라도 자연인 박정희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주셨다. 미움은 곧 사악한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높디높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에 떠도는 새하얀 구름을 바라보면서 겨레의 참 스승 함석헌 선생의 얼을 더듬다 보니 새삼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면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이 물밀 듯 스며든다.


감사 최민화
 


 

산 행 기

 - 울창한 숲 속 환상의 길 숨겨 진 무의도


빈 맘으로
거리낌없이
만나서 반가운 이들

한 달에 한 번
부담없이 보고
어울리고 걷고 땀흘리고

무슨 산악회라
이름짓고 지내온 지도
벌써 5 년이 넘어섰다.

산을 정말 좋아하고
자주 오르는 이들에게는

그런 게 무슨 산악회냐고
핀잔들어 마땅한 구석
없지 않겠는데

그래도 지난 5 년 여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월 네 번째 일요일
한 번도 거른 적 없다.

6 월 네 째 주 23 일 산행은
인천 앞바다 무의도

바로 이웃에 사는 산악회 총무
나이답지 않게 그저 철없이 맑고 순수하고
탁구 선수 출신에다 패션 모델 저리가라 키 크고 훤출하고
애기같이 여리고 숫기없고 깜짝깜짝 잘 놀라고 삐지기도 하고
산악회 총무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듯 열심 이만저만 아니고...

김밥이랑 과일 음료수랑
이것저것 준비하고 날라야겠으니
좀 서둘러서 일찍 나와 달랍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궂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말다 한다.

산악회원들 중 어제 한국이 스페인 누르고
4 강에 오른 장면 안 본 사람 없을 텐데...
흥분과 감동에 젖어 날밤 샌 이들 더러 있겠지...
날밤 새진 않더라도 밤늦도록 잠 못 이룬 이들 많겠지...
비도 부슬부슬 내리겠다 그냥 눌러들 있겠는데...

아침 9 시까지
시청 대한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여느 때처럼 으레 2 ~ 30 분 가량
기다렸다 출발할 요량이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감동과 환희에 빠져
밤새도록 수 만 수십 만 인파로
뒤덮혔을 시청앞 광장

언제 그런 난리
벌어지기라도 했냐는 듯
담배꽁초 휴지조각 하나 없이
평상처럼 깨끗하다.

건너편 센타빌딩 건물
TV에서 보던 대로
대형 현수막 폭죽 불똥에 타 그슬린 자국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저 80 년 봄 서울역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87 년 6 월 여기 시청앞에서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의 함성으로 뒤덮혔던 광경

수십 수백 만 인파가 질서정연한 대오 갖추고
붉은 악마 셔츠입고 하나같은 몸짓으로
통일된 구호와 함성으로
온 몸이 저리도록 목이 쉬어 터지도록
흔들고 외쳐댔을 광경

시공을 넘어 한데 어울려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경기도 경기겠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는
응원의 열기...

역사상 전무했다던
자연발생적 광경 또한
세계를 놀라게 하는
뉴스 감이라지 않던가?...

회원들이 얼추 이십 여 분
회사 동료한테 좋은 산악회라 소개받았다며
중년 부인 두 분이 새로 참석했다.

머~얼리 수원에서
빠짐없도록 참석해 온 금슬 좋고 젊은 부부
회원들께 화채와 녹차 대접하겠다며

각종 과일과 화채 재료, 얼음통 물통 설거지통 다라...
녹차와 녹차 재료, 자기 주전자 자기 잔 등 다구 다기...
하다못해 화채 그릇 수저 내프킨까지 그 많은 사람 수대로
몇 짐 싣고 도착한다.

9 시 반 경 무의도를 향해 출발한다.
가는 길...
시청앞에서 신촌 합정동 거쳐 강북 강변도로 타고
영종도 인천 국제 공항 전용도로로 접어 든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촉촉히 내리는 부슬비
곳에 따라 멈춰 서기도 하고
더 세차게 내리기도 한다.

영종도에서 용유도 방향으로 접어드는 입구 왼편
조그마한 섬 잠진도로 들어서는 연결 도로 건너면
이내 무의도 행 선착장에 닿는다.
시청앞에서 한 40 분 걸렸을라나?

국제 공항 들어서기 전에는
영종도 삼목도 용유도 잠진도
제각각 바다 건너 따로따로 독립된 섬이었지만
삼목도 통째로 허물고 바다를 메워
거대한 섬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네 학교 다닐 적만 하더라도
인천 부두에서 일주일에 두어 번
대부도 영흥도 자월도 강화도 교동 연평 백령도까지
돌고 돌아다니는 여객선 타고서라야 가 볼 수 있었던 섬들
배 타고 대여섯 시간 열 두어 시간 걸렸을 섬들
둘러 볼 엄두조차 안 나고 알지도 못했던 섬들
그런 벽지 중에 벽지 섬들인데
서울에서 인천 부두까지보다도 더 빨리 올 수 있다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촉촉한 바닷바람
먼저 나와 손님을 맞이하는데
느닷없이 달려들어
얼굴을 냅다 따갑게 때려 붙인다.

단정하게 매무새한 옷깃 머리칼
주체할 수 없도록
마구 뒤엉클어 놓는다.

그때 아니고 이 글 쓰면서 생각나는 첫 인상
"...허 ~ 참 ... 고~얀 것 ... 내 원 세상에 ....."

짜리~잇한 바닷내가
콧속 깊숙이 스며든다.

무의도가 한달음에 닿을 듯
바로 건너 들여다보인다.

배 타고 출발한 지 3 분
갈매기 떼 먹이 달라 보채는건지
줄줄이 아우성치며 쫓아 오는데
다 왔다고 내리란다.
배 삯 1 인 당 1,000 원, 승용차 대 당 10,000 원

선착장에 내려서니
비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 하나가
손님맞이 하고 있다.

"[필] 한국 축구 16 강 진출 [승]
장하다 ! 무의도 출신 김남일 선수"

16 강은 이미 넘어 섰고
8 강을 넘어 4 강까지 올라 있는 싯점에서야
조금은 김빠진 내용이지만
한국 축구가 선전하기를 바라고
김남일 선수가 무의도 출신임을 알리고 싶은
동네 분들의 뜻에는
아무런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흐뭇하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딴은 그렇겠지...
나부터도 월드컵 대회 전후긴 하지만
김남일 선수는 그래도 머리 속에 들어 있는데
무의도란 섬 이름 들어 본 적 없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혹시 인지도를 조사해 본다면
무의도 섬보다 김남일 선수가 더 높게 나오겠지...
세계적으로는 차이가 더 날테고...

그러니 무의도 분들한테는
"장하다 ! 무의도 출신 김남일 선수" 다.

지금 온 국민이 거의 알고 세계가 주목하는
김남일 선수는 누구냐???
다른 무엇보다도 김남일 선수가 누구냐 하면
그건 바로 우리 무의도 출신이란 말씀이시다.

비단 월드컵 대표 선수 아니더라도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달지 힘든 시합에서 이길 때
출신 학교 교문이나 지역 마을 입구에 나붙는
현수막 글귀 가끔 보아 왔지만
오늘따라 곰곰 되씹어 생각하니
흠잡을 데 없는 명문이다.

마을버스 타고 등산로가 있는 반대쪽 끝
샘꾸미 선착장으로 향한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6 km
지나는 도로변 길목마다
연이어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계속 "필승 / 한국 축구 16 강 진출" 이다.
그리고 "장하다 ! 무의도 출신 김남일 선수"...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될 때부터
그러니까 한일 공동 개최로 결정 나고부터
한국 축구는 오로지 16 강 진출이 목표였었지...

그럼 김남일이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된 걸 기념해서
그때부터 저렇게 섬 지나는 곳곳마다
내걸어 놓고 있는 겐가???.....

샘꾸미 선착장에 다달으니
제법 이것저것 구색 갖추고 있을법한 가게 앞마당이다.

그 곳이 김남일 선수 고모집이란다.
고모되는 분 모습을 뵈니 대물림인가?
다부지고 땅땅한 체격에 건강미 넘쳐 보인다.
그 연세에 머리 노랗게 물들인 것도 그렇고.....

사전 답사 왔던 산악회장과 총무 등 몇몇은
구면임을 내세우듯 안녕하셨냐면서 반갑게 인사한다.

"고모요~~~ 우리나라가 4 강에 올라가믄 돼지 자바 준다 그래서
우리 다른 데로 갈라다가 여기까정 일부러 옹 건데...
돼지는 자바 놨껫쮸???"

"올녀믄 때마처서 오섯써야지 이제 오서갓꾸 그러믄 으뜨켄대유~으?
어지께 자바서 다 머거버련는데유~으....."

"지난버네 우리가 왓쓸 때 고모가 그랫짜나여...
4 강에만 올라가믄 돼지 자바 준다구여....."

"잡낀 자반는디 버얼써 다 머거버리구 한나두 읍때니깐유~으?....."

"또 자브시믄 되자나여... 우리 사네 올라갔다 내려 올 동아네여..."

"으뜨케 그래유~으... 내 워~언 참말루... 봐 유~으...
16 깡 때 잡꾸 8 강 때 또 잡꾸... 이버네 4 강 때두 또 잡꾸...
그누무 돼지가 그러차나두 씨가 말너 버리건는데유~으....."

"아프로 저거두 두 버는 더 자바야 되자나여..."

"두 버늘 더 유~으??? 그랫쓰믄 을매나 조켓써유~으...
이기기만 한다믄야 무슨 수를 써서락뚜 자바야쥬~으....."

앞에 나선 산악회장과 우리 일행은 언제 봐서 허물없다고
지나다 들른 길손 주제에 남의 동네 어엿한 중년 부인을 두고
진심인지 농인지 서로 골려 먹기 내기를 하고 있는 건지
실없고 할 일 없는 사람들처럼 별 내용도 없고 쓰잘데 없이
하나마나한 말들을 주고 받지만
바로 전 날 스페인을 누르고 4 강에 오른 쾌거 때문인지
서로 간에 더 할 수 없이 뭉클한 감동과 뜨거운 정이 오간다.

해발 246 m 호룡곡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그리 높을 것도 험할 것도 없이 그저 편안한 산이다.

호룡곡산 정상 못미처 인당바위가 있다.
산에 오르거나 먼 길 가다보면 그런 거 있지...
지나다가 꼭 머물고 싶고 털썩 주저 앉아 쉬고 싶은 곳.....

한 열 대여섯 명은 넉넉하게 둘러 앉을 만큼
바닥이 평평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산 전체로 보아서도 위치하며 경관 모두가
손님 접대하는 고급 응접실이 들어앉을 곳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양철 판에 흰 페인트 칠하고 검은 글씨 써서
반 팔뚝 굵기에 허리춤 길이만한 막대기 양쪽에 박혀
풀섶 위에 나뒹굴고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니

이 바위에서라야 비로소 호룡곡산 계곡과 정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단다.

정상을 향해 기어 오르는 계곡이 청룡을 연상케 하고
산 전체가 백호의 형상을 띠고 있어
이 곳 인당바위에서 조용히 귀기울이면
마치 청룡백호의 포효 소리가 귓전에 들릴 듯 하단다.

가만히 앉아서 그런 감흥에까지 젖고 빠져들 여유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재촉해 호룡곡산 정상에 오른다.

동으로는 인천항이 한 눈에 보이고
영종도 국제 공항은 코밑으로 내려 보인다.

서쪽으로는 황해바다가 이내 거대한 중국 대륙과 맞닿을 듯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 있고

남으로는 영흥도와 대부도가 길~게 누어 있다.
맑은 날에는 점점이 이어지는 섬들 사이로
서산반도가 아득히 눈에 들어올 듯 말듯 하단다.

북으로는 북한 땅 연백반도와 옹진반도가
아스라이 시야에 스친다는데 흐린 날이어선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의도 북서쪽 방향으로
실미도가 애기섬처럼 붙어 있다.

실미도...
북파 공작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극비 훈련하는 특수부대가 있었다던 곳...

1971 년인가? 내가 군 복무 중일 적인데
훈련 받던 이들이 살인적 처우를 견디다 못해 집단 탈출하여
버스와 승객 볼모로 잡고 백주대낮 서울까지 진입해서
온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고 있는 섬...

우울한 과거 역사를 상징하는 섬.....

춤추는 여인의 옷처럼 생겼다 해서 무의도
무의도에서 활시위를 당기면
화살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이 있다 해서 실미도

만조 때라야 저 혼자 섬 되고
썰물일면 이내 무의도에 붙어버리는 곳

그 유명을 떨었던 실미도가 무의도 한 귀퉁이에
마치 갓난아기가 엄마 치맛자락 잡았다 놓쳤다
엎어져 안간힘 써가며 발버둥거리듯
천진스럽게 붙어 있다.

그러고보면 무의도 사람들
섬도 아닌 섬 섬 같지도 않은 섬
사람도 살지 않고 상대도 뭣도 안 되는 섬
그런 섬보다 어찌 우리 대 무의도를 몰라 주느냐!!!
섭섭하고 서러워 하시지나 않을런지.....
별 쓸데없는 생각 떠 올라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피시~~~익
웃 는 다.

돗자리 펴고 신문지 깔고
각자 싸 들고 온 음식 내 놓는다.

빈 손으로 오면 그런대로
비~~~잉 둘러 앉기도 하고 서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내것네것 가리지 않고 내남적 없이.....

여의도 백상빌딩과 몇몇 건물에서
식당 가게 운영하시는 정 사장님과 사모님
내가 좋아하는 알타리무 잘 익은 김치 가지가지 밑반찬
남은 적 있어도 모자란 적 없이
오늘도 그렇게.....

일식집 운영하는 이 사장
후원회장 몫인 듯 언제나 고급 도시락 여나므 개
필요할 땐 스무 개고 백 개고
오늘은 몇 개???
뭐가 미안한지 고개 수그리며
세 개 밖에 안 싸 왔어~~~

밥 나누고 반찬 나누고 소주 한 잔 나누고
떡 나누고 과일 나누고 커피 한 잔 나누고

이 때 만큼 끈끈한 정 오가는 적 있을까???
이 순간 위해 모이고 오르고 땀 흘리기라고 한 듯이.....

짐 정리하고 쓰레기 담고
한 줄로 나란히 하산한다.

그냥 지나치기 못내 아쉬워
다시 한 번 인당바위에 올라 서서
펼쳐 있는 장관 비~잉 둘러 본다.

바로 밑을 내려다보니 현기증 날만큼 아찔한데
비구름 세 무리가 산허리 저 아래 걸려 있다.

백 여 걸음 내려가는데
안내판이 조금 전처럼 나뒹굴고 있어
이건 뭔가 하고 열 발짝 쯤 들어가 보니
잘 생긴 바위 하나가 비석처럼 꼿꼿이 서 있다.

저 바다가 없었다면 섬 아니었으면
육지 아무데나 가 있어도
이대로 놓아 두진 않았을 것을.....

비석을 삼았던지
방랑 시인 김삿갓 싯귀가 새겨 있던지.....

그 정도 만 아니다.
조금만 다듬으면 부처 모습 쏙 빼닮겠다.

바로 아래 반 발짝 앞으로
네모 반듯한 바위 하나

늙으신 부모님껠지 남편 자식에겔지
한 맺힌 사연 가슴깊이 박힌 선녀 하나가
지극 정성 올리느라 제단 상석용으로 빗어 놓은 듯
위치도 반듯하게 제자리 잡고 있다.

그래선가 ? 이름하여 부처바위


사람 하나 오갈 것밖에 안 되는 길
작은 오솔길

망망창창 황해바다 허리에 차고
해변따라 능선따라 울창한 숲 사이로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 이름하여 환상의 길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다.
오늘따라 구름과 촉촉히 내리는 비까지.....

해당화 접시꽃 노랭이꽃 개망초
온갖 꽃과 나비들 나무들 이름 모를 들풀 산풀들
산새들 풀벌레들.....

깍아지른 절벽 기암괴석
청룡의 몸통 되는 계곡이 있다.

소리가 있다.

빗소리 바람소리 떠도는 구름 소리
산허리에 걸려 있는 비구름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
나무에 걸려 갈라지고 흩어지고 사라져 가는 소리

나뭇잎 풀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떨어져 너울거리고 낙엽 되어 마르고
썩어 다시 흙이 되는 소리

잎사귀 타고 또르르 굴러 내리는 빗방울 소리
이리 똑똑 저리 똑똑 잎사귀따라 뛰어내리고 떨어지고
낙엽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한데 모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나비 훨훨 나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산새들 지저귐 소리...

갈매기 떼지어 나는 소리
끄악끄악 우는 소리
파도 소리
뱃고동 소리

아 ~ ~ ~ ! ! !

환상의 숲
환상의 길
환상의 소리.....


비좁은 터널 빠져 나온 듯 갑자기 눈이 부시고
은빛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 진다.

전혀 딴 세상 다른 분위기...
하나개 해수욕장

반달형 드넓은 백사장하며 해맑은 바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수평선
대단하겠다 싶을 해질녁 낙조 광경

환상의 길 아니어도
수도권 인근 일대에서
가장 빼어난 곳 아닐런지.....

백사장 위로 방갈로가 줄지어 늘어 세워져 있고
월드컵 열풍인지 김남일 선수 출신지를 상징해선지
바닷물 넘나드는 물가에
축구 골문이 양 편으로 세워져 있다.

온 종일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뽀송뽀송 마른 모래 네모반듯 남아 있는
남의 거처 방갈로 밑으로 기어들어
턱괴고 앉아서 하늘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 라 본 다.

다시 마을버스 타고 선착장에 도착해서
줄지어 늘어선 조개구이 포장마차
전세 내듯 자리 차고 앉아
조개구이 산낙지 수원에서 올라온 화채 녹차로
뒷풀이 한다.

배 타고 다시 3 분 잠진도 선착장에서
관광버스에 몸을 싣는다.

아쉬움이 남아선가? 차창 밖으로
무의도를 한 눈에 둘러 보니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촉촉히 젖어 몸매 비치는
춤추는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그렇게 그렇게
보 이 는 것 도 같 다.

가로수 대신인가?
부슬비에 젖은 해당화가
공항로 길따라

줄지어 무리지어
촉초~~~옥 하게

피 어 있 다.

 

 ( 2002 년 6 월 )

 

 

▽ ▽ ▽ ▽ ▽

 

윗 글 산행기를 쓴게
2002년 6월이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6 년 전이다.


그러고 보니 2001년 늦가을 즈음인가보다.

 

'언젠가는 컴맹에서 벗어 나야겠는데...'

'이 나이에 타자연습을 꼭 해야 하나?...'
'안 하고 말아도 그만일텐데 공연히 사서 고민하는 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괜한 스트레스에 얽매 오다가

 

'앞으로 남은 여생도 그리 짧은 건 아닐텐데...'
'남들 다 하는 거라면 어차피 해결하고 넘어 갈 수밖에 없겠지...'

...해서


밖에서는 새삼스럽게
엄두를 못 내고

우선 집안에서만
막내 녀석 중학교 용 컴퓨터 교과서를 교본으로 삼아

한 3 ~ 4 개월 틈나는대로
때로는 이렇게저렇게 틈을 내가며
질기게 붙들고 늘어져 봤다.

 

그러다보니까
실력(?)^^도 분 당 120 타 정도로 올라 있고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기도 하면서
가끔씩 바둑을 두기도 하고

때로는 남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이제 어느만큼
내공(?)이 쌓였겠거니... 하는 마음에

궁금하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게 타자 속도를 늘릴 겸으로
주저주저하다가

daum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뭔 대화방을 클릭했다.

 

그 때는 "ID" 가 뭔지
"다음 이름"은 뭐고 "닉"은 또 뭔지
어떻게 만드는 건지
도무지 알 턱 없었을 뿐 아니라

그냥 내 이름을 쓰라는 거겠거니 여기고
실명으로 들어 갔다.

 

지금 이 글 쓰는 싯점에서
곰곰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카페"란게 도대체 뭐 하는덴지도 모를 적이어서
카페 대화방은 아닌게 분명하고

실명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던 것 같은데
어디를 어떻게 들어 갔는지는 모르겠다.

 

주저주저한 만큼이나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들어가는 순간

 

"아무개 님 방가워요~~~오~~옹~!!!"
"지두여. 아무개 님 방가 방가 방가 ㅎㅎㅎㅎㅎ"
"나두여~~~어~~ㅓㅓㅓ 방가 방가 아무개 님 ㅋㅋㅋㅋㅋ"

 

도대체가 생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거니와

뭔 뜻인지 알듯말듯한
글씨와 기호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올라오면서

성과 이름이 실명으로 마구 떠오르는데


나는 그만

'으이쿠!!! 잘 못 들어 왔나부다!...'

하고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빠져 나와 버렸다.

 

'가만 있자아..... 내가 뭔 잘못을 저지른거지???'

 

20 ~ 30 분 동안 놀랜 가슴 가라앉히며
이리저리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분위기를 살피고 파악할겸
그누무 말뽄새도 익힐겸...

 

한편으론 기왕에 들여다 본 거
뭐 하는 건지 알아나 보자...하고서는

온 몸과 마음을
바짝 초긴장 상태로 단단히 재무장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다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아무개 니~~~이~~~임~~ !!! 나갔다 또 들어 오셨네요~~~오~~옹^^*^^"
"좀 알까리한데..... 남님용? 뇨님용?????" ㅎㅎㅎ
"남님이넹... 크~~아~악!!! 49 년 생이시네??? 우히히히 @ @ @ @ @"
"엥??? 뭐 어때^^^^^ 아무개 니~임 같이 얘기해여어~~~ㅓㅓㅓ"

 

하는 말들과 기호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떠오르는데

그 속도 또한
내가 그동안 쌓아 올린 내공에 비하면
가히 전광석화같기도 하고
번개가 스쳐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주눅들어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으악! 뭣 모르고 훔쳐 볼려다가 이거 망신살 뻗히는 거 아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새벽부터 식은땀 흘리며 쩔쩔매고 있는데

그런 내 꼬락서니까지도
빤히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듯

 

"괜차나여^^**^^**^^"
"걍 아무 말이나 하셈ㅋㅋㅋㅋㅋ"

 

얼르고 달래는 말들이
간간이 떠 오른다.

 

그제서야 좀 살아 남을 수 있겠다 싶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는데
공휴일이라서 대전 본가에 있는 중이라는
송 아무 아가씨가 임시 방장을 맡고

영월에서 자영업과 리프트 강사를 한다는
노총각 님...

 

그 당시 55 연세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을 오히려 한 수 아래로 둘 정도로
나로하여금 그야말로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게 했던
봄비여인 자칭 할머니...

 

미용사이실까?
앉아서 근무 좀 해 봤으면 좋겠다던 아가씨...

 

등등 6~8 분이
마치 전쟁터에서 콩복듯이 집중 사격하듯
숨쉴 틈 없이 이어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송 아무 방장의 하해같은 배려와
모든 분들의 양해 아래

'눈팅'만 하고 있어도 된다는
귀한 허락을 얻게 되었다.

 

하기사 어쩌다 글 한 줄 올려봤자
다른 님들은 이미 다 지나가버리고도
몇 구비구비 너머 딴 세상 얘기 하고 있을 때

 

멍청하니 뜬굼없고
봉창두들기는 말이나 뒤늦게 하고 있으니

 

그 님들 편에서야
한심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답답하고 걸리적거리고
방해만 되는 꼬락서니일게 뻔했다.

 

두어 시간 동안 대화방에서
이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경험이

내게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편으론 고맙고 소중하기도 했다.

 

'아~~~!!! 세상이 이렇게 변해 있는 거로구나!!!.....'

 

지금도 나는 그때,
그 분위기가 지워지지 않고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이제 내공을 더욱 갈고 닦기 전에는
다시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번개같고 전광석화같은 대화방으로
진격해 들어가기 위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훈련과
세월이 필요하겠는지.....

 


* * * 그 후 * * *

 

그러고서 몇 달 후
다음 사이트의 한 카페방에 가입했다.

 

그러다가 쥔장의 친절한 안내로
대화방에 쫓아 들어 가 보았는데...

 

역쉬...
번개같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도 그러려니와

순간순간 동에서 서로...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설악산 안면도로

수영장에서 멱 감다가 병원으로 상가집으로
종횡무진 오가는 순발력과 감각을

아둔하기 짝이없는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길 없다.

 

...해서 자판 속도야 그 정도로 자위삼고
태그를 좀 배워서 익힐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그동안 기초도 없고
중학교 교과서도 미처 다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글자의 변화와 간단한 테이블 정도 만들어 보고

자세한 소스만 있으면 모방해서 이미지와 문장 정도를
간단하게 바꾸어 넣을 수 있는 정도였을 때다.

 

그 즈음 그런 분위기 적에
차라리 본격적인 창작글로 카페 생활에 적응해 보자고
마음 단단히 먹고 처음으로 공을 들여 써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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