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7.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1974년 1월

 

1973년 12월 13일 김관석(NCC 총무), 김수환(추기경), 김홍일(전 신민당 당수),
백낙준(연세대 명예총장),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윤보선(전 대통령),
이병린(전 대한변협 회장), 이인(전 법 무장관),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이희승(전 서울대 문리대 학장), 한경직 (목사), 함석헌(민수협), 김재준(민수협), 천관우(민수협)
등이 모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하의 적절한 조처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분립체제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발송했다.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은 이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이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30인의 서명자 : 장준하(통일당 최고위원), 함석헌(종교인), 법정(불교인), 김동길(연 세대 교수), 김재준(전 한신대 학장),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석, 안병무(한신대 교수), 천관우(전『동아일보』주필), 김지하, 지학순, 박두진(시인),

문동환(한신대 교수), 김정준(한신대 학장), 김찬국(연세대 신학대학장), 문상희(연세대 교수),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

이병린, 계훈제(『씨을의 소리』편집인), 김홍일, 이인, 이상은(고려대 교수), 이호철(소설가), 이정규, 김윤수(이화여대 교수),
김숭경(의사), 홍남순


장준하 선생은 선언문 발표와 더불어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었음을 공포했다.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을 발표하는 장준하


12월 26일 밤, 국무총리 김종필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

장장 1시간 40분에 걸쳐 ‘특별연설’을 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선을 벗어난 행위라고 전제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나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 ...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KSCF에서는 광주에서 동계 전국 모임을 개최하고
박 정권의 독재와 독점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기독학생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처럼 대학이 방학으로 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상치않은 정국 분위기는 전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8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어섰고,

오랜 관습으로 자리잡아 온 신년 하례 인사 등을 통해서  

불과 10일 만인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 수가 3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5일에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구영은 유신체제를 ‘삼권귀일(三權歸一)체제’로 평가하며

재야 인사들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문인 및 지식인 61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다수 동포들이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문학인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 무장경찰에 둘러쌓여 "개헌만이 살 길이다" 고 외치는 신민당 의원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 년 1월 8일 박 정권은 유신 헌법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인 헌법 개정을 발의 제안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회의를 통해서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또는 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백기완 선생을 전격 구속하고
속전속결로 진행된 군법회의 재판을 통해서 징역 15 년과 12 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법회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그 사흘 후에는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함께 구국기도회를 가진 개신교 전도사 이해학 김진홍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전격 구속하고 역시 같은 절차로 징역 15 년과 12 년씩을 선고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대학이 휴업과 조기 방학으로 이어지면서
수업 과정이 부족함에 따라 임시 개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개강 첫 날 유신 반대 시위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김영선 이근후 김구상 등을 전격 구속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7 년에서 5 년을 선고했다.

 

그 닷새 후에는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같은 사정으로 개강하는 첫 날 유신 반대 집회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등
7 명을 전격 구속하고 각각 징역 7 년에서 3 년까지 선고했다.

 

이렇듯 유신 정권은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대통령 긴급조치를
민주인사와 종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동해서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백기완 선생과

연세대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 시위 사건은 내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구속되고 감옥 가는 일이 바로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 오고 있구나 하고 확신했다.

 

마음 한 켠에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벗어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잠을 못 이루고 날밤을 새운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어쩌다 새벽녘에 잠이 들더라도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소스라쳐 깨어 나기도 했다.

 

춥고 긴긴 밤을 지새우며 드넓은 오산 운암뜰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운 생각을 떨치느라 그야말로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결단을 내리느라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간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다시금 되새겨 본다.

 
 ◁ 1974 년 1 월 ▷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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