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누런 신문지처럼

 

 

요즘에는 2 주에 한 번씩으로
주사하는 방법이 달라졌는가본데

혜숙은 3 주 째 한 번
그리고는 1 주 후에 한 번
다시 3 주 째와 1 주 후...

이런 방식으로 6 개월 동안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하던지
혜숙은 주사를 맞고 나면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듯
토하고 또 토하고

토할 것이 없어 헛구역질하느라
혼절할 지경에 이르르곤 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 나가서
백구머리한 여승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몰골이 남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고
혐오감을 줄 정도로 변해 갔다.

가발을 장만해서
병원 가는 날이나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혜숙은 가발 쓰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동네 길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으면
혜숙은 타자마자 가발을 벗어 제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거울로 뒷자석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의아해 했다.

택시를 탈 때는 분명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일 꺼라고 여겼던 모양인데
백미러로 보니까 평상복 차림을 한
여승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파계한 여승이 가족과 함께 탔거나
불륜스런 관계 쯤으로 여겼을 법했다.

혜숙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말문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
내 머리가 좀 이상해서 그러시죠?
요즘 새로 나온 패션으로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가봐... 당신은 어때 여보...
당신도 이상해? 당신은 괜찮지?"

나는 혜숙의 속마음을 안다.
혜숙은 운전 기사에게
자기의 백구머리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농담을 던졌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신랑이고 우리는 부부'사이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혜숙은 가발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나중에는 머리 패션을 모자와 머플러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동안(童顔)형이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
더욱 어려 보였다.

반면에 나는 제 나이보다도
좀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보니
때때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신발 상점에 들러 운동화를 고르는데
점원 아가씨가 내게는 아저씨라 부르면서
혜숙에게는 얘~~~쟤~~~ 해 가며
이거 신어 보라는 둥 저게 좋겠다는 둥
반말을 해 대는데
아마 고등학생 쯤 되는
아빠 따라온 딸인 줄 안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혜숙은
그 후부터서든가...
시장에 가든가 택시를 타든가
음식점이나 커피�에 가든가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눈치만 보이면
여보... 당신... 소리를 자주 되뇌이곤 했다.

혜숙은 물만 간신히 조금 삼킬 뿐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 했다.

잣을 좀 먹는가 싶으면 잣을 사오고
새우를 먹는가 싶으면
시장에서 제일 고소하고 먹기 좋은 새우를 사오고 했지만
입에 대고 맛을 보는 정도지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소문로 옛 배재학당 입구에 보양죽집이 있다.
근 30 년 야채죽과 전복죽, 버섯 인삼 새우 등등
각종 죽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한 때 그 집에 들러
하루에 한 종류 씩 각종 죽을 포장해서 사 왔다.

그 중에서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혜숙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변해 갔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내려가면
좀 힘들어 질꺼라 했다.

그리 되면 거의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혜숙은 체중이 닷새에 1.5 kg 씩 줄어 들었다.

퇴원할 당시 48 kg 이던 체중이
두 달만에 34 kg 으로 줄어 들었다.

항암제를 두 달 째 맞는 날
주치의가 우리를 불렀다.

"박혜숙 환자는 이제 항암제를 그만 맞는 것이 좋겠어요...
항암제를 맞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치료에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의학적 노력에 매달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막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우선 고단백질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저항력을 키워서 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현대의학에서도 이제 손을 놓아버리는구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지 않은가?

이제 한 주간이면 마치게 되는 방사선 치료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받아 주지조차 않는 신세로
방치되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혜숙은 더 이상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집에서 멍하니 숨만 쉬며 누어 있곤 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로구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어
내장을 감싸고 있는 뼈마디가 모두 드러나다시피 했다.

얼굴이며 피부는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회색 먼지에 싸인 채
처박혀 있는
빛바랜 신문지 색이다.

톡 건드리면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누렇고 바싹 마른 케케묵은 신문지처럼
그렇게
핏기가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하며
베개에 기대 앉아
겨우
숨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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