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과 밀정을 피할 ‘암호’를 만들라
비밀결사 조직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김재명의 결심
교신 위해 한글·아라비아숫자 조합해 해독 어려운 암호 만들어내
체포되고 한 달쯤 지난1928년 8월11일 초췌한 모습의 김재명.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 임경석 제공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김재명은 우편물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각 도 위원회 책임자와 원거리 교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기구가 관장하는 우편제도를 활용하는 것은 비밀결사 간부로서 위험한 행위였다. 교신하려면 안전을 보장하는 두터운 장치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믿을 만한 통신 연락장소가 있어야 했다.
그런 곳을 포스트(Post)라고 불렀다. 각 도에 하나씩 포스트를 세웠다. 예를 들어 경기도 포스트는 ‘경성부내 조선지광 잡지사’였고, 함경남도는 ‘함남 덕원군 적전면 당하리 장명강습소 박조산 앞’이었다. 국외 조직에도 포스트를 뒀다. 만주총국 포스트는 ‘용정촌 대성중학교 내 우광섭 앞’이고, 일본총국은 ‘도쿄시 간다구 니시키초 3-12 나이토가타 장심덕 앞’이었다. 국내외 각지에 모두 14곳의 포스트가 설립됐다.1 그곳에 우편물이 도착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도위원회 책임자에게 전달되도록 조직을 꾸렸다.
암호 통신문은 사용 뒤 곧바로 소각
포스트만으로 부족했다. 안전을 보장하려면 또 하나의 장치가 있어야 했다. 암호였다. 당사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통신문을 작성할 필요가 있었다. 예기치 않게 문면이 노출되더라도 쉽사리 판독돼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통신문은 암호로 작성하되, 사용 뒤에는 곧바로 소각하기로 약속됐다. 발각될 단서를 남기지 않도록 보안장치를 겹겹이 수립했다.
어떻게 암호체계를 짤 것인가? 김재명 책임비서는 이 고난도의 과제를 다른 곳에 맡기지 않았다.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결국 조선인이라면 쉽게 제작·판독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했다. 동료 강진과 협의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암호체계는 조선어 자모 구성에 입각했다. 한글 자모음 24글자와 아라비아숫자 9개를 네 유형으로 대응시켰다. 한글 자모를 사용한 만큼 일본인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체계였다. 정보 분석관이나 암호해독 전문가가 조선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라면 판독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김재명의 암호체계는 조선어 문장을 숫자로 치환했다. 한글 자모를 숫자에 대응시키는 논리적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함경남도 도위원회 책임자 박문병에게 “속히 상경하라”고 지시하는 메시지를 보낼 일이 생겼다고 하자. 통신문 속에 “7355614782 97486861544147516448”이라는 수열을 표시하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이런 대응관계를 만들었을까.
첫째, 숫자판을 만들었다. 김재명은 종횡으로 각 10행씩 선을 그었다. 그렇게 바둑판 모양의 숫자판을 만들고, 맨 윗줄과 맨 왼쪽줄에 1부터 9까지 숫자를 적었다. 가로줄은 올림 순서로, 세로줄은 내림 순서로 적었다.
둘째, 열쇳말을 만들었다. 세 음절로 이뤄진 열쇳말을 정해, 교신 당사자끼리 공유했다. 예컨대 공청 중앙부와 함남도위원회 사이의 교신 열쇳말은 ‘금강산’이었다. 이 열쇳말에서 중요한 것은 음절이 아니라 ‘음소’였다. ‘금강산’은 ㄱㅡㅁㄱㅏㅇㅅㅏㄴ이라는 9개 음소로 분해되고, 각 음소는 숫자판의 첫 번째 세로줄에 차례대로 배치됐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어떤 순서로 쓰이는지는 교육받은 조선 사람에게 이미 상식과 같은 것이었다. 자음은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순으로, 모음은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순으로 불리지 않는가. 이 순서대로 숫자판의 여백을 채우면 됐다.
김재명은 전국 각지의 산하기구와 통신하기 위해 네 개의 열쇳말을 만들었다. ‘금강산’은 강원도, 전라북도, 함경남도, 일본총국 위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 외에 ‘백두산’(전라남도·충청남북도·함경북도), ‘남극성’(황해도·경기도·경상남도), ‘대동강’(평안남북도·경상북도·만주총국)이라는 열쇳말을 사용했다.
셋째, 말하려는 문장의 음소를 숫자판에서 추출하게 했다. 숫자판에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 글자가 다 들어 있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둘 이상 포함됐다. 보기를 들어 ‘ㅅ’은 여섯 곳에 분포했다. 세로 9행과 가로 7행, 세로 8행과 가로 9행, 세로 7행과 가로 3행, 세로 6행과 가로 7행, 세로 3행과 가로 1행, 세로 1행과 가로 6행에 있었다. 이 중에서 아무것이나 임의로 선택해도 좋았다. 세로 7행과 가로 3행이 마음에 드는가? 그렇다면 암호 통신문 발신자는 73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김재명이 책임비서 자격으로 서명한 1928년 4월8일자 국제공청 대표 강진의 신임장. 임경석 제공
숫자판·열쇳말·음소 조합, 탁월한 암호
이처럼 암호화 과정에는 불규칙하고 우연적이며 비논리적인 속성이 포함됐다. 이 점이 김재명의 암호화 알고리즘에 내재하는 탁월성이었다. 이 속성은 추적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작용했다. 난수표에서 논리적 연관을 추출해야 하는 암호해독 전문가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열쇳말과 숫자판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떤 우수한 전문가도 김재명의 난수표를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김재명은 이 간명하고도 뚫기 어려운 암호 알고리즘 작성 능력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의 교육 경력에 관해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거나, 유학 중인 재종형제들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중등교육을 이수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의문을 해소할 확정적인 정보를 아직 얻을 수 없기에 단정하기는 곤란하지만 어느 쪽이든 중등 수준 교육을 이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교육 경력에 더해 그의 타고난 재능과 천품이 암호체계의 개발 능력을 가져다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김재명이 비밀결사의 중앙부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회 대회에서였다. 서울 근교의 한 농가에서 은밀하게 열린 당대회에는 전국 각 도의 대의원 11명이 참석했다. 충남북을 제외하고는 각 도 대의원이 다 모였고, 중앙간부와 준비위원회 대표도 참석했다. 그중에서 김재명은 전남 대의원 자격으로 출석했다.
김재명은 이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1년 뒤 예정된 제4회 당대회 때까지 비밀결사를 이끌어갈 최고 집행부였다. 그는 이 집행부 첫 회의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지도하는 책임자로 선임됐다.2 당규약에 따른 조처였다. 규약 제48조와 제49조에 따르면 공산당은 고려공청을 지도하며, 당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고려공청 중앙집행기관 책임자를 맡게 돼 있었다.
이 비밀결사는 당 바깥 인사들로부터 ‘2월당’ 혹은 ‘엘(L)당’, ‘엘엘(LL)파’라고 불렸다. 1928년 2월 열린 당대회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2월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레닌주의 동맹’이라는 당내 비공식 결사가 주도했다는 의미에서 엘당·엘엘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명칭은 조선공산당이 1927년 말~1928년 초에 두 대열로 분열된 사실을 반영했다. 이들에 맞서는 또 하나의 대열을 ‘12월당’ 혹은 ‘춘경원당’, ‘서상파’라고 부르는 것에 대칭되는 이름이었다.
김재명이 공청 책임비서로 선임됐음을 보여주는 1928년 3월10일자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제1회 결의록. 임경석 제공
고향 뒷산 ‘음달’을 가명으로 사용
이 비밀결사의 최고위급 지도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선거위원회에서 은밀히 선출된 위원 7명의 명단은 국제당 보고 문건에도 가명으로 표기됐다. “하균, 석철, 음달, 양명, 임두우, 금성, 한석”3이 그들이다. 이 중 ‘양명’만이 실명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명이었다. 일본 고등경찰과 밀정의 조밀한 감시망이 깔렸던 일제강점기 서울 한복판에서 비밀활동을 수행하려면 꼭 필요한 조처였다. 과연 누굴까? 이 가명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밝히는 것은 연구사의 한 과제가 된다.
해결 방법이 있다. 코민테른 문서 여기저기에 산재한 가명 정보를 모으고, 뒷날 작성된 일본 수사기록과 대비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균(차금봉), 석철(김한경), 음달(김재명), 임두우(안광천), 금성(이성태), 한석(한해) 등이었다. 이론에서나 실천력에서나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김재명의 가명에 눈길이 간다. ‘음달’(陰達)이라는 이름이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가명이든 본명이든 ‘그늘 음’ 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는 건 드물었다. 무슨 뜻이 담겼을까? 그것은 고향과 관련됐다. 그의 출생지이자 성장기를 보낸 곳은 남해의 유명한 섬 거문도였다. 음달은 거문도 장촌마을의 뒷산 이름이었다. 음달산은 해발 233m에 달하는 자그마한 산이지만, 해발고도 0m에서 시작한 만큼 상당히 높고 지세가 험난했다. 낮은 산록에는 부모와 조상의 무덤들이 자리잡고, 정상에 올라가면 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망망대해를 조망하던 곳이었다. 그 뒷산 이름을 따서 비밀혁명운동의 가명으로 사용했다.4
책임비서 재임 몇 달 만에 경찰에 체포
비밀 간부로 재임하는 중에 줄곧 그랬던 것 같다. 1928년 3월10일자 당중앙 제1회 결의록, 3월15일자 제2회 결의록에는 예외 없이 ‘음달’이라는 이름이 기재돼 있다. 서명이 필요한 곳에는 영문 알파벳을 썼다. 필기체로 ‘DalUm’이라는 필적을 남겼다. 국제기관에 파견하는 대표 신임장에도 그 이름을 사용했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청 제5차 대회에 고려공청 대표로 강진을 파견할 때, 그가 휴대할 신임장 서류에도 어김없이 그 이름을 사용했다.
뛰어난 암호체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만큼 명민했던 김재명의 재능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직무 수행에도 발휘됐다. 김재명이 재임했던 1928년 전반기 조선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은 그와 무관할 수 없었다. 시군 단위 단일청년동맹 조직운동, 일본 유학생의 조선 순회강연 개최 캠페인, 전국 40여 개 중등학교에서 고조된 동맹휴학운동 등이 그 보기다. 하지만 김재명의 책임비서 직무수행은 1928년 7월13일 갑작스레 중단됐다.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5 그의 재능과 활동력이 충분히 꽃피기도 전에 들이닥친 일대 비극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京畿道, ‘京高秘第8036号, 秘密結社朝鮮共産黨並に高麗共産靑年會事件檢擧の件’, 1928년 10월27일. 梶村秀樹·姜德相 共編, <現代史資料> 29, 東京, みすず書房, 134~135쪽, 1972년.
2.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河均, <중앙집행위원회 보고>, 1928년 3월15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66-68
3. 선거위원회 대표 이경호, <제3회 당대회 선거위원회 보고>, 1928년 2월28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07
4. 음달이 거문도 장촌마을 뒷산에서 유래한다는 정보는 김해 김씨 사군파 문중 대표 김영식 선생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김재술 편, <김해 김씨 사군파 계보 및 유적록>, 1969년 8월 참조.
5. ‘익선동을 포위, 청년 1명 검거’, <중외일보> 1928년 7월16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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