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누어서 자는 게 소원



그 때 혜숙의 나이 34 살
여자로서 한창 젊디 젊은

어쩌면 미처 다 피어 보지도
맛보지도 못한 나이  

초등학교 3 학년 1 학년
갓 첫돌 지난 막내를 둔

세 아이의 엄마...

광주에 억지로 끌려 갔다 올라 와
방사선 치료를 받고
항암제를 맞는다. 

혜숙은 점점 더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한다.

물 한모금조차
삼키기를 힘들어 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마다
토해 내기 바쁘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 없이도
헛구역질 해 대며 계속 토한다.

머리털은 뭉텅뭉텅 빠지고
곁에 화장지와 휴지통을 끼고 산다.

내장 속에 쓰디쓴 쓸개액과
아직 남아 있는 액체란 액체 

모두 입으로 토해져 올라오면서
혜숙은 더욱 고통스러워 한다.

식도와 콧잔등이
헐대로 헐고 망가져서
얼마나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던지

방바닥에 떼굴떼굴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한다.

학생 시절 
나를 그토록 따르고
사랑하던 혜숙이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하고
옥바라지 하던 여대생

그 여인을 두고서
' 앞으로는 내가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
결심하고 결혼했는데

이제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상황으로
점점 가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5 월 5 일
혜숙은 갓 돌 지난 막내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야외에 나가 보고 싶단다.

기왕이면 이대 민주동문회가 주최하는
어린이날 가족 행사가 있으니
같이 참석하잔다.

스스럼없는 동창 선후배들이 모이는 자리에
막내는 그렇다치고

나와 시어머니까지 
온 가족을 함께 동행하고 싶어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혜숙이 죽더라도 
철모르고 자랄 막내를
잘 지켜 봐 주고

자식들을 키워 줄
남편과 시어머니를 
스스럼없는 동창들에게
잘 부탁하겠다는 의미는 아닐까?

혜숙이 죽음을 준비하느라고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면서
몸서리쳐 진다.
. 
아내를 온전하게 지켜 내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선지

혜숙의 동창 선후배들과 그 가족을
집단적으로 만나기가 조금은 거북하다.

하지만 막내에게
무슨 기억 하나라도 더 남겨 주려는

엄마로서의 간절한 소원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혜숙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그날 혜숙의 동문들은
우리 가족이 나타나자
기대하지도 못한 일이라면서
반가워 어쩔줄 모른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서오능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엄마와 막내가 함께 노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보내 주기도 한다.

혜숙은 똑바로 누어서 잠들지를 못한다.

수술 중 위에 붙어 있는 횡경막도 함께 잘려 나가
구토하면서 올라 오는 걸 막아 주는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 오면 
몸을 일으켜 앉아서 내려 보내고
가라 앉으면 다시 눕곤 한다.

앉았다 누었다 하기가 더 힘이 드는지
밤에는 아예 앉아서 잠들곤 한다.

혜숙은 앉아서 자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단다.

맘 편히 누어서 자 보는 게
그렇게 소원일 수가 없단다.



 

70. 미움과 증오와 저주


 

물 한 모금 먹어도 토하고
급기야는 침까지도 삼키지 못한 채
입 밖으로 질질 흐르는 모습...

머리털은 거의 다 빠지고 
핏기 없이 창백한 몰골...

혜숙은 암 환자의 마지막 모습으로
점점 변해 가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
건강한 것에 대한 증오도 나온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할 때면 
혜숙은 철딱서니 없는 미운애기처럼
공연히 짜증을 부린다.

밥을 꿀꺽 넘기는 소리 
수저와 밥상이 톡톡 부딪치치는 소리
김치 씹는 사각사각 소리 등등

평소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기억에 남겨 두려고 해도 더듬어지지 않는 소리 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를 낸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도 느닷없이
“그래! 맛있게 잘들 먹어!”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옆방으로 나가 버린다.

나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표정도
점점 미움과 증오로 변해 간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배배 꼬인 꽈배기처럼 뒤틀려 나타난다.

언젠가는 내가 물 한 사발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을 느껴
돌아 보니

혜숙이 증오서린 눈길로
나를 노려 보고 있다.

원혜영이 개발해 가져 온 야채 엑기스와 현미효소
김영인이 지어 준 보약
최정순이 한약재를 넣어 삶아 보내 준 개고기
연구원 식구가 보내 준 장어탕 등등

몸에 좋다는 음식과 보약을 버리기 아깝다며
한사코 시어머니께서 드시라 하고서도
막상 시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보고는
얄미워 한다.

말 마디마디마다 평소처럼
정상적이지 않고
배배 꼬인 투로 변해 간다.

" 내가 싫지? 지금 내가 귀찮아 죽겠지? 피곤하지?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그렇지?"

사실 나는 혜숙이 그럴 적마다
정말 피곤했다.

혜숙이 저토록 고통스러워 하니
나무랄 수도 없고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이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겐
정말 보여 주기 싫었다.
  
" 내가 죽을 것 같애? 나 안 죽을 꺼야! 
내가 살만큼 살다 죽을 꺼라구! "

신경질은 점점 더 날카로워 진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한 모습 자체를 미워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기 혼자만이 겪고 있는 현실을 

혜숙은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죽어 가는 암 환자의 심리 상태에서 두 번째 단계를
혜숙은 예외 없이 겪고 있는 것이다.

너는 멀쩡하고 아무 걱정 없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어야 하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거부하고 부정하는
첫 번째 단계로 가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과 거부
증오와 저주가
뒤섞여서 나타나기도 한다. 

 

 

71. 사람 사람들 ㅡ 올곧은 사나이 설 훈

 


이 글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가만히 되돌아 보니

내가 감옥에서 출소한 날부터
어린이 날까지...

그러니까 22 일 동안에 벌어 진
파란만장한 편린들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끝도 한도 없을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두가
소중한 느낌이고 경험들이지만

이제 잊을 것은 잊고
지울 것은 지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겠다.

많은 이들이 혜숙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직접 찾아 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 분들에게
우리 집에 방문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부탁했다.

혜숙이 온종일
풍욕과 냉온욕, 마고약 찜질 등에
열중하고 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꺼려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데는 어쩌랴...

아주 지워 버릴 수만은 없는
방문객 두 경우만 더듬어 기록해 본다.

5 월 중순 경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있는 설 훈이
연락도 없이 집으로 찾아 왔다.


▲ 국회의원 설훈


설 훈은 마산 출신으로 70 년대 후반
고려대에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그 후 80 년 5 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또다시 구속되었다.

함께 연루된 이들 가운데 나이가 어려 막내뻘이던 설 훈은
그 서슬퍼런 군법회의 법정 재판 과정에서 주눅들지 않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을 향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강렬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사나이 설 훈은
지역 연고와 배경 등이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부터 김대중 총재 비서와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오로지 한 길로 향해 왔다.

설 훈은 1983 년 고려대 출신을 대표해서 나와 함께 민청련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고
내가 맡고 있던 운영위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85 년 2 월 12 일에 실시되는 제 12 대 국회의원 선거 대응 방침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로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 전두환 정권은 한 선거구마다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 제도에서
집권 정당인 민정당이 목표하는 의석수를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야당이었다.
제 1 야당인 민한당은 정치 지도력이 애매모호하고 선명성도 부족했다.
전두환 정권과 집권 민정당의 2 중대라 불리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영삼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김대중 씨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절망적인 풍토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많은 후배들과 학생운동 진영에서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민주화보다도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5. 16 쿠데타와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 쿠데타가 10. 26 사건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12. 12 와 5. 18 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부 중심의 쿠데타가 우리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적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를 가장한 국회의원 선거가 역사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일제 강점기 36 년 해방 이후 1 년도 채 안 되는 장면 정권을 빼고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30 년 여 독재 권력... 이어서 계속되는 전두환의 군부 독재 권력을
과연 민주적 절차로, 평화적으로 바꿔 낼 수가 있겠느냐는 거다.

한편으로 김영삼 김대중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 신민당을 창당하고 후보 전술을 통한 절차적 변화를 모색 해 갔다.

신민당의 출현과 김영삼 김대중 씨의 정치 지원 활동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결의 분위기가 크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청년 운동을 대표하던 민청련에서는
후보 전술에는 반대하는 대신 군사 독재 정권을 물리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정치 사회 세력과
함께 연대해서 싸워 나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때 신민당에서는 설 훈에게 서울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분들도 설 훈에게 출마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설 훈은 고심하던 끝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설 훈의 출마를 반대했다.


민족민주 운동의 정통성과 도덕성 선명성을 대표하는 민청련의 중요 간부가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 일선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설 훈은 이에 맞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서
대중 정치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청련에서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설 훈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당시에 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새벽에 설 훈을 만나 설득했다.
그 날 아침 민청련은 사의를 받는 형식으로 설 훈을 면직시켰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전략 선거 지역이었던 성북구에는 설 훈 대신 이 철이 출마하게 되고
설 훈은 내게 퍼붓던 말 그대로 이 철을 당선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발벗고 나서서 열성을 다 했다.


서울 성북구에서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나와 함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이철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물리쳤다.


이는 유권자들이 당시 제1야당인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되었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되는데 그쳤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적으로는 민정당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철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당당하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쨋거나
설 훈의 정치적 등장과 성장의 기회를
다치고 잘라 내는 악역을 맡았던 셈이다.

설 훈이 우리 집에 문병 오던 때
그는 동교동 자택에서 기관원에 둘러 싸여 연금 중이던
김대중 선생의 비서역을 맡고 있었다.

설 훈은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께서 형수가 위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계시고
" 병마에 쓰러지지말고 싸워서 꼭 쾌유하기를 바란다"
는 말씀을 전해 달라셨면서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나는 김대중 선생이 오랜 세월 투옥과 망명과 가택연금으로 생활 형편도 그리 만만치 않으실텐데
성의는 고맙게 받겠지만 봉투는 도로 가져가서 더 요긴한데 쓰시도록 해 달라고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설 훈은 보내신 분 뜻도 있는 거니까 약소하지만 형수님 치료비에 보태셔서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될 꺼 아니냐면서 다시 내민다.

이 때 곁에 있던 혜숙이 느닷없이 소리를 지른다.

" 훈이 씨! 내가 암이라고 곧 죽을 것 같애?...
나 이 돈 없어도 안 죽어!...
나 그냥 내버려 두고 이거 필요없으니까 도루 가져가라구!..."

설 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이없어 한다.
그러다가 이게 웬 봉변이냐 싶던지 무안해 어쩔줄 몰라 한다.

" 형수요! 뭔 말을 그리 하요! 이 돈이 무슨 더러운 돈이요?
도둑질한 장물인 줄 아냔 말요!
보낸 분 성의도 있는 건데 이러믄 됩니꺼?!"

매사에 솔직 대담하고 직설적인 성품을 지닌 설 훈은
역시 자기 감정을 숨김없이 쏟아 붓는다.

이렇듯 혜숙은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갔다.
건강한 것을 공연히 미워했고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저주한다.
동정어린 관심에 증오를 품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가슴 속 깊이 배어 있는 동지애를
서로가 진하게 느끼면서 나는 설 훈에게 양해를 구했다.
설 훈이 던져 놓고 간 봉투 속에는 무려 100 만 원이 들어 있었다.

 


 

 

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87 년 6 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태 전 민청련이 운동 방침으로 정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 슬로건이
점차 신민당과 재야 모든 정치 사회 단체의 주요 운동 방침으로 되고

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사망 사건과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 양에 대한 성 고문 사건
연세대 이한열 군의 최루탄 사망 사건 등등으로

고문 추방과 직선제 개헌 투쟁을 위한 국민운동 본부가
지역과 부문과 계층을 망라해서 발족되고

마침내는 6 월 민주대항쟁의 물결을 이루어 내고
투쟁 목표를 관철해 냈던 그 해 그 달...

어느 날 저녁 어스름한 무렵...
대문밖에서 나와 혜숙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대문 열고 나가 보니 채광석이다.
채광석은 바다 풍경이 아름답고 아름드리 송림으로 이름 난 안면도 출신이다.


▲ 채광석(蔡光錫, 1948년 7월 11일~ 1987년 7월 12일)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71 년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대에 강제 입영당하고
제대하고 복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2 년 6 개월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80 년 봄에 다시 복학했지만
5.18 광주 사태 이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시 구속되었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시인으로 문학 평론가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터였다.

채광석은 그 날 술이 얼큰한 상태로
문밖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혜숙이 보고 싶어 왔다면서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더니
소고긴데 지나오다 보니까 요 아래에 정육점이 있어서 사 왔단다.

나는 속으로 평소에 채광석의 성품으로 보아
'친구집에 소고기를 사 들고 다닐 줄도 아나?' 하고 의아스러워 했다.

" 웬 일이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 안주도 할 겸 우리 혜숙 씨랑 같이 먹을려고 그런다 임마."

채광석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 박혜숙! 당신 죽으면 안돼!..."
하고 점잖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고기를 빨리 구어 오라고 성화다.
고기를 구어 먹으면서 광석은 " 혜숙아! 이 고기 먹고 빨리 병 나아야 돼! "
하면서 입에 넣어 주려는 시늉을 부리기도 한다.

" 혜숙이 기지배야! 죽긴 왜 죽어! 죽으면 안 돼!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한이 맺혔는데 왜 죽어! 이 기지배야!
이제 민주화가 코 앞에 닥쳐 왔는데...
우리가 얼마나 바라던 건데...
억울하지도 않냐?...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 씨부랄누무 기지배야!"

술 처먹으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장안에 욕쟁이로 유명했던 그는
이날도 혜숙을 향해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우리 주위에서는 그의 욕설과 독설적 비난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혜숙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뻗혀 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에서
고기를 굽고 역겨운 냄새까지 피워가며 술주정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혜숙이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것을 전제로
금방 죽을 사람인 것을 전제로 해서

죽지 말라고
죽긴 왜 죽냐고
죽으면 억울하지도 않냐고
바짝바짝 약을 올리고 앉았으니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며
피가 마르도록 아둥바둥 살아날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의 입장에서
심사가 좋을리 있겠는가?

내 생각에도 옆지기 편이어서가 아니라
혜숙의 심사로야 당연하지...

참다 못한 혜숙이 소리를 지른다.

" 광석이 형! 형이나 몸조심 잘 해!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야!
형이 그렇게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지난 번처럼 교통사고 당해서
나보다 먼저 콱 죽어버릴지 어떻게 아냐구!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니까 형이나 조심해!
형이나 조심하라구!!!....."

몇 해 전 일이다.
이신범 유인태 최 열 조성우 채광석 등 친구들 여럿이
이대 앞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갖다가
혜숙이 운영하는 약국에 들러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고 자리를 옮기던 중에

채광석은 지하도로 건너기가 귀찮았던지
차가 질주하는 이대 입구 사거리를 가로지르다가 택시에 들이 받혔다.

이 광경을 처음 목격한 최 열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석을 부축하고
사고 택시에 태워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채광석이 술에 취하면
어디에서 재우거나 집에까지 바래다 주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빗대어서 화가 난 혜숙이
채광석을 향해 독설을 퍼 부은 것이다.

그 날, 나는 채광석과 함께 근무했던 후배를 불러내어
광석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도록 부탁했다.

광석은 우리 집 대문을 넘자마자 골목을 나서면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 혜숙아! 혜숙이 기지배야!... 죽지 말아!...
죽으면 안 돼 이누무 씨부럴누무 기지배야!...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제 다 돼 가는데 씨부럴녀나!!!..."

채광석은...
6 월 민주대항쟁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결국 국민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 29 항복 선언 직후

민주화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분위기에서
그 감격, 그 감동과 흥분에 취해
후배들과 날밤을 새고 새벽녁까지 어울리다가
우리 집 근처 아현동에서 질주하는 택시에 받혀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
우리 집에 다녀간 지 보름 남짓 만의 일이다.
.
.
나와 함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한

친구이자 탁월한 시인이요 문학 평론가였던 채광석은
서른 아홉 나이로 그렇게 허망하게 요절한 것이다.


채광석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안면읍에서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83년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했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1974년 5월 22일 소위 오둘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 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저서로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우리 동료 선후배들과 문인들은 ' 민족문학가 고 채광석 동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성대하게 꾸려 보냈다.


▲ 1987년 7월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고 채광석 시인의 장례식


그리고 1 주기와 2 주기에 맞춰
그의 전집 5 권을 펴냈다.

13 주기 기일이던 2000 년 7 월 12 일에는
안면도 휴양림 길목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이 글을 연재하면서
채광석의 혼령이 나에게
숨가삐 지나치지 말고 좀 쉬어 가라며
자꾸만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지...
한동안 도무지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그래... 이 눔아~~~!!!
오랜만에 너랑나랑 되지 못한 말이라도
주섬주섬 훌훌 털면서 회포나 풀어 보자꾸나...

그는 태안군 안면도 양지말에서
안면 면장을 지내시던 아버님과 어머님 슬하
4 남 2 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안면도 창기초등과 안면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1 년 10 월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쿠데타 전초전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완전무장한 공수단 병력을 진주시켰고
학생들을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하면서 연행하여
제적시키거나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위수령이 발동되던 다음날
채광석은 안면도 고향집에서 체포되고
그 길로 강제 입영되어 강원도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에서 만기 제대하고 복학한 광석은
1975 년 4 월 10 일, 서울대 농과대학생 김상진이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 "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할복자살한 사건을 접하자마자 충격을 금치 못하고

5 월 22 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치루는 시위를 감행하는 등
소위 "오둘둘 사건"을 주동하여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무려 2 년 하고도 1 개월이 넘는 세월 옥고를 치루는 동안
그는 감옥에서 시(詩)작 활동에 열중하여 많은 옥중시를 남기고
훗날 결혼하게 되는 강정숙에게 쉴새없이 옥중 연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그 후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0 년 5 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계엄 쿠데타가 발동되자
채광석은 또 다시 체포되어 40 여 일 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2 년부터는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하고

계간 '창작과 비평'과 시 전문지 '시인'등에
문학평론과 시 등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1984 년에는 나의 권면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현 민족예술인총연합 전신)를 창립하고
나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초대 총무간사를 맡아
이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1985 년에는 나와 함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창립에 앞장서면서
나는 청년단체 대표위원을
광석은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87 년 7 월 12 일...
연보를 보니까 그 놈 생일이던 바로 다음 날에...
여성단체연합에서 주최하는 민요한마당 행사에 참여한 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향년 39 세...
7 월 14 일, 재야 민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민족시인 故 채광석 민주문화인葬"이 엄수되고
그의 유해는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 주기에 두 권, 2 주기에 세 권
길지 않은 이승의 세월에서 남긴 그의 전집이 완간되었고

그가 남긴 시 가운데
"기다림"과 "부활"은 비장한 곡으로 다듬어져
널리 불려지는 노랫말이 되었다.

10 주기 때 추모 문학의 밤 행사를...
13 주기를 맞이해서 마침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던
광산 구중서 교수의 글씨와
조각가 김운성의 제작으로

안면도 휴양림에서 각계 각층 300 여 분이 참석한 가운데
채광석의 시비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 후 대 여섯 차례 그의 시비를 들를 때마다
가족에게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거운 짐 잔뜩 지워 놓고 요절한 놈 주제에

뭔 복을 타고 났길래
아름다운 풍광하며 우거진 송림
뭇사람들이 모이고 지나는 길목에
저리 보기드믈도록 빼어난 거처를 장만했나...

난... 난...
도대체가 어림도 없을 성 싶어
부러움을 한아름 안고 돌아서곤 했다.

2000 년 7 월 12 일
"안면도의 푸른솔로 살아 오라!"는 제하로
'채광석 시비 제막식 및 문학의 밤'
자료집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을 옮겨 적는다.


기 다 림 ㅡ 채광석 시비 수록시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이름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리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 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전문 옮김)



채광석...
그는 진작부터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가?

그의 시 "기다림"에서처럼
그는 경제 성장이 어떻고
마이 카 시대가 저떻고
다가오는 팔팔 올림픽이 어떻고
또 저떻고 하던 적에

자유와 민주와 평등
그리고 통일의 새 날을 위해
고독한 밭에 나가 불씨를 묻었다.

흥청이고 망청이는 도시에서
외진 산골에서

피맺힌 역사 한맺힌 이들의 사연들을
가슴 속 깊이 되새기고
뜨거운 불씨를 지피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진리를 외치고
욕설을 퍼대며 불씨를 피우다가

자유의 여신이 활활 타오르는 그날
몸뚱이를 바치리라고 했다.

자기 목숨만으로 부족하면
대대손손 이어가며
불씨를 묻으리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광석의 몸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밧줄을 타며 ㅡ 채광석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에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 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땡볕 아우성치는 여름이나
혹한 내리꽂히는 겨울이나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산 사나이들 밧줄을 탄다

비바람이 밀치고
설한풍이 손끝 발끝을 흔들고
뇌성벽력이 몰아친다 해도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목숨이기에
단속반원들 우르르 달겨들어 패대기치더라도
리어카는 우리들 목숨의 줄이므로

비루먹이고 병들게 하고
꼬드김 손찌검
발길질 똥바가지질 몽둥이질 이간질 쳐대도
노동 삼권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민주화는 통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전문 옮김)


칠월의 거리에서 ㅡ 채광석 형에게
도종환(시인,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형이 새벽의 거리에서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십 년

나는 형이 묻힌 산엘 찾아가지 않았다
많은 날을 바람부는 거리에 서 있었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장 골목 목로주점 찾아가
후배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걱정하던 젖은 목소리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 떠올리며
급하게 소주잔을 뒤집었다

형이 떠나던 그해 여름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퍼붓는 빗발 피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짧은 생애 내내
이 시대의 머리 위로 퍼붓는 빗줄기 피하지 않고
형이 갔던 것처럼

나도 그 이후 십 년
피하지 않고 내 길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산 속이 아니라 이 거리 어딘가에
형이 함께 있으리라 믿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내동댕이 쳐진
노동자의 벗겨진 신발 옆에
형이 함께 있을 것 같았고

철거반원의 햄머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사람들 곁에
함께 악을 쓰다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감옥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철문을 발로 차며 거세게 항의하다 끌려가
먹방으로 돌아와 긴 긴 사랑의 편지를 쓰며
밤을 새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내기 괜찮냐 이렇게 물으며
철창 너머 서 있을 것 같았다

망촛대 꺾어 흔들며
산비탈에 혼자 누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터를 잃고 쫓겨난 지 오래인 나를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보곤 큰 소리로 이름 부르며
길 건너 달려올 것 같았다

자유와 밥과 사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을 타며
갈라진 땅의 모질고 큰 절망과
그 절망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것 같았다

칠월 어느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다 못한 이야기 너무 많아 무어라 무어라 소리지르며
길 저쪽으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등만 보이며 젖어젖어 빗속으로
몸짓만 보이며 하염없이 빗속으로

(전문 옮김)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김진경 (시인)


어린 시절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는
산자락을 두른 저녁 연기를 뚫고
들릴 듯 말 듯 들판의 끝까지 쫓아와서는

개울창에 숨어 노는 우리들의 멱살을 붙잡아
여지없이 저녁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이 육실헐 눔 어디 가서 지랄허고 자빠진겨"

부르는 소리 뒤에 군시렁거리는
그 기름진 어머니 욕의 힘일 것이다.

채광석,
그는 욕을 할 줄 안 마지막 사람이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술 취한 한밤 전화기에 대고 퍼붓는
그의 기름진 욕을 거름 삼아

그의 소리는 푸르게 뻗어
암담한 저녁에도 여지없이 멱살을 잡아
우리를 목숨의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군시렁군시렁 욕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감시의 눈길을 피해 가야 하는
그 멀고 추운 길을
우리는 낄낄거리며 두려움 없이 걷곤 했다.

걸어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그리운 집에 닿곤 했다.

아.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하나로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사람은 많아도
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기름진 사랑을 퍼부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목숨의 밥상에 차려졌던
민주며 평등이며 정의며 사랑이며 하는 것들도
살아 남기 위해 위로만 뻗는 낙엽송 숲의 나무들처럼
멀쑥멀쑥 키만 커졌다. 마네킹 냄새가 난다.
아, 이 숲엔 부르는 소리가 없다.

아, 이 숲엔 우리가 함께 앉을 밥상이 없다.
아, 이 숲엔 그 모든 것을 키우는 기름진 사랑이 없다.

술 마시고 돌아오는 밤
깜빡이 등이 깨어지고 안테나가 부러진 차 앞에서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버릇대로
너만 혼자 잘 먹고 살면 되냐!

군시렁군시렁 욕을 퍼부으며 그가 찾아와
안테나를 부러트리고 등을 깨트린 것 같다.

돌아보면 담 모퉁이를 돌아가는
쓸쓸한 한 사내의 등이 보인다.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삶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랑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늘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전문 옮김)

 

 

 

74. 내 복에 무슨 재혼?

 

 

채광석의 죽음으로
나와 혜숙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음은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었다.

"나 죽으면 당신 재혼할 꺼지?"

혜숙은 베개를 높이 쌓아 놓고
기대어 자다가도 문득문득
이런 말을 자주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지경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입에 발른 듯
아양떠는 시늉도 할 수 없고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속 들여다보이는 말을 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퉁박을 주며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혜숙은 답답해 죽겠는지
또 물어 온다.

"당신 재혼 할 꺼지? 그렇지!"

나는 '당신이 죽지 말고 살아 있으면 될꺼 아냐!'
하는 외침이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아 내면서 한숨을 푸욱 내 쉰다.

"그래도 한 5 년은 기다리겠지?"

아! 이제 혜숙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가 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혜숙이 죽으면 안 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꾸 되물으며
대답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우정 화를 잔뜩 머금고

"나한테 무슨 복이 터졌다고 재혼 복까지 있겠어!!!"
"그런 복이 있다면 5 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고 대꾸한다.
혜숙은 약이 오르고 화가 나면서도
싸울 기운이 없는지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또 되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3 년 상은 치뤄 주겠지?"
"......"

나는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대꾸도 안 한다.

혜숙은 며칠 지나서 또 떠 본다.
나는 계속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혜숙은 더욱 더 약이 올라 있다.

"그러면 1 년은 넘겨 주겠지?"

하고 낮춰서 물어 본다.
나는 혜숙이 너무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심사도 복잡하고 편치 않아서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1 년은 넘겨야 되겠지?"

혜숙은 더욱 더 속상해 한다.
훗날 혜숙은 그 때 너무 약이 오르고 속상해서
죽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우리는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하나마나한 말들을 밑도끝도 없이 주고받곤 했다.

혜숙의 친구들 사이에
'내 복에 무슨 재혼이냐'는 말이
우스갯말로 둔갑해서 퍼져 나갔다.

최민화는 재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혜숙이 약이 올라 죽지 못하고
그 복을 가로채서 깨뜨려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아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이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올 때마다
나에게 끝내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에미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한 가정의 부부는 생활을 함께 하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아 가게 된다.

한 쪽에서 작은 인기척만 있어도
상대방의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느끼고 알만큼 일심동체로 되어 간다.

평생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생각이 닮고 마음이 닮을 뿐만 아니라
모습까지 닮아 가는 것이다.

나와 혜숙의 관계 역시 그랬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에서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아도
혜숙은 나의 활동 반경과 행동거지를 대충대충 다 꿰고 있다.

서로가 각자 다른 장소에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읽어도
판단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게 서로 일치한다.

혜숙과 나는 사회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시 서로 닮아 있다.

삶의 가치관과 신념
인생관과 역사관이
서로 비슷비슷 닮아 있고 일치하는데

이런 배우자를
어디서 다시 찾고 만날 수 있겠는가?

10 여 년 세월 동안

생활을 같이 하고 호흡을 함께 하면서
불편없이 알맞게 맞추어 놓은 것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서
새로 구할 수 있겠는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훈련하고 노력해서
이만큼 서로를 일치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혜숙이 같은 분신을 만나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혜숙이처럼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재혼하는 복은 없는 게 낫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0) 2008.01.22
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0) 2008.01.22
75. 희망의 불씨  (0) 2008.01.22
76. 누런 신문지처럼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75. 희망의 불씨

 

 

혜숙은 첫돌이 마악 지난
막내 아들 중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점점 더 야위어 가자
막내가 세 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기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 져서
누어 있기조차 힘들어 했을 때...

혜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올 12 월까지는 살아야 될텐데..." 했다.

그러면 앞으로 6 개월이 남아 있다.
나는 "하필이면 왜 12 월까지야?"
하고 물었다.

"막내가 너무 어려서 엄마를 전혀 모를 것 같애...
중현이가 커서 엄마를 기억하게 되려면 두 돌은 돼야겠지?
나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돼!"

막내가 두 돌이 되려면
앞으로 9 개월이 더 있어야 한다.

혜숙은 9 개월이라는 세월을
더 살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9 개월이 아니라
6 개월 만이라도 더 살아서
막내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남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다.

혜숙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가늠하고 예측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이거다~~~!!!

혜숙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희망은
막내에게 있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절대적 의지가
바로 막내에게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
유일한 희망은
바로 첫돌지난 막내에게 있었고
그것은 막내에 대한 모성 본능이었다.

과학적으로... 임상적으로 증명된 절망 앞에서
한갖 공허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추상적 희망이었지만

혜숙은 본능적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죽음을 이겨 내야 하는 의지...
생명에 대한 집착이
모성 본능에 의해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로
그 명맥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 이 다 .

 

 

 

 

76. 누런 신문지처럼

 

 

요즘에는 2 주에 한 번씩으로
주사하는 방법이 달라졌는가본데

혜숙은 3 주 째 한 번
그리고는 1 주 후에 한 번
다시 3 주 째와 1 주 후...

이런 방식으로 6 개월 동안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하던지
혜숙은 주사를 맞고 나면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듯
토하고 또 토하고

토할 것이 없어 헛구역질하느라
혼절할 지경에 이르르곤 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 나가서
백구머리한 여승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몰골이 남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고
혐오감을 줄 정도로 변해 갔다.

가발을 장만해서
병원 가는 날이나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혜숙은 가발 쓰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동네 길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으면
혜숙은 타자마자 가발을 벗어 제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거울로 뒷자석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의아해 했다.

택시를 탈 때는 분명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일 꺼라고 여겼던 모양인데
백미러로 보니까 평상복 차림을 한
여승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파계한 여승이 가족과 함께 탔거나
불륜스런 관계 쯤으로 여겼을 법했다.

혜숙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말문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
내 머리가 좀 이상해서 그러시죠?
요즘 새로 나온 패션으로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가봐... 당신은 어때 여보...
당신도 이상해? 당신은 괜찮지?"

나는 혜숙의 속마음을 안다.
혜숙은 운전 기사에게
자기의 백구머리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농담을 던졌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신랑이고 우리는 부부'사이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혜숙은 가발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나중에는 머리 패션을 모자와 머플러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동안(童顔)형이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
더욱 어려 보였다.

반면에 나는 제 나이보다도
좀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보니
때때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신발 상점에 들러 운동화를 고르는데
점원 아가씨가 내게는 아저씨라 부르면서
혜숙에게는 얘~~~쟤~~~ 해 가며
이거 신어 보라는 둥 저게 좋겠다는 둥
반말을 해 대는데
아마 고등학생 쯤 되는
아빠 따라온 딸인 줄 안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혜숙은
그 후부터서든가...
시장에 가든가 택시를 타든가
음식점이나 커피�에 가든가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눈치만 보이면
여보... 당신... 소리를 자주 되뇌이곤 했다.

혜숙은 물만 간신히 조금 삼킬 뿐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 했다.

잣을 좀 먹는가 싶으면 잣을 사오고
새우를 먹는가 싶으면
시장에서 제일 고소하고 먹기 좋은 새우를 사오고 했지만
입에 대고 맛을 보는 정도지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소문로 옛 배재학당 입구에 보양죽집이 있다.
근 30 년 야채죽과 전복죽, 버섯 인삼 새우 등등
각종 죽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한 때 그 집에 들러
하루에 한 종류 씩 각종 죽을 포장해서 사 왔다.

그 중에서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혜숙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변해 갔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내려가면
좀 힘들어 질꺼라 했다.

그리 되면 거의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혜숙은 체중이 닷새에 1.5 kg 씩 줄어 들었다.

퇴원할 당시 48 kg 이던 체중이
두 달만에 34 kg 으로 줄어 들었다.

항암제를 두 달 째 맞는 날
주치의가 우리를 불렀다.

"박혜숙 환자는 이제 항암제를 그만 맞는 것이 좋겠어요...
항암제를 맞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치료에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의학적 노력에 매달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막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우선 고단백질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저항력을 키워서 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현대의학에서도 이제 손을 놓아버리는구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지 않은가?

이제 한 주간이면 마치게 되는 방사선 치료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받아 주지조차 않는 신세로
방치되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혜숙은 더 이상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집에서 멍하니 숨만 쉬며 누어 있곤 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로구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어
내장을 감싸고 있는 뼈마디가 모두 드러나다시피 했다.

얼굴이며 피부는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회색 먼지에 싸인 채
처박혀 있는
빛바랜 신문지 색이다.

톡 건드리면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누렇고 바싹 마른 케케묵은 신문지처럼
그렇게
핏기가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하며
베개에 기대 앉아
겨우
숨만 쉬고 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4. 내 복에 무슨 재혼?  (0) 2008.01.22
75. 희망의 불씨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0) 2008.01.22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한편으로 그 당시 우리 가정은
경제적 사정까지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 마악 출소하고 혜숙은 약국을 후배에게 맡겨 놓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데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까지 처분해야 할 처지였다.

혜숙은 나에게 재정적 부담을 안기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지
주저주저 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려고 했지만 나 또한 사정을 알기가 두려웠다.

나는 네 번을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내 또래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 형편이 그리 못한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지만 일찌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다 결혼하고서부터는 집을 장만하고 약국까지 운영했으니
다른 동료들보다 형편이 좀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적금을 들고 저축을 했더라면 또는 여유 자금을 만들어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는 데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70 년대 말부터 돈을 좀 모아 둘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받은 만만치 않던 수입 모두를
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써 왔다.

말하자면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의
재정 책임을 맡아 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축한 재산이나
저축한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갚아야 할 비용과 감당해야 할 빚들이 조금씩 늘어 났던 것이다.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감옥에 들어 가게 되면
지명 수배된 동료들이 혜숙을 찾아 온다.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신었던 양말이나 입었던 옷가지
속옷까지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도피 중인 동료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 뿐인가?
약국에는 언제나 다만 얼마라도 현금이 있을테니까
돈이 떨어지면 동료들이 혜숙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혜숙은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주곤 했다.
어느 날 혜숙이 심각한 사정을 내게 털어 놓는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집안 일을 잘 건사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해...
당신한테 지급된 월급과 상여금은
꼬박꼬박 수령해서 수배 중인 동료들한테 전달해 왔어...
쫓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국에 있던 돈도 좀 보탰고...
그러다보니까 빚도 좀 지게 됐어...

여보! 나 지금 돈 때문에 피가 말라 죽겠어...
이거 어떻게 좀 해결해 줘...
내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데 나 죽은 뒤에
나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볼 사람들한테서 받을
원망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당신은 어차피 아이들하고
건강한 몸으로 살아는 갈 테니까...
죽어 가는 내 소원 좀 들어 줘 여보!!!
지금 당장 약국을 정리하고 집을 처분해야 될 꺼야 여보!!!
흐흐흐흑......"

혜숙은 내게 울먹이며 매달리다시피 했다.
집을 처분해야 할 정도라니...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숙이 기록해 둔 메모지를 보았다.
갚아야 할 돈이 모두 합해서
그 때 돈으로 4 천 8 백 만 원 가량이다.

막상 약국을 처분하려다 보니까
그동안 약품을 제약회사에서 외상으로 들여와
현금을 받고 팔다 보니 받을 돈은 거의 없고
갚아야 할 외상매입금만 남아 있었다.

41 평 가량 되는 집과
약국 임대보증금 등등을 합해서 처분하면
대략 5 천 여 만 원 정도가 된다.

혜숙이 소원대로 당장에 빚을 몽땅 갚고 나면
한 2 백 여 만 원이 남게 된다.

우리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고
살만한 전세를 얻으려면
그 때 돈으로 1 천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8 백 만 원 가량의 빚은
계속 더 남아 있어야 한다.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나는 당장에 대답을 못 하고 주저주저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내게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닐테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혜숙은 보름마다 한 번씩
두 번을 더 울먹이며 내게 매달렸다.

이 때 혜숙의 상태는
점점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6 월 중순 경...
혜숙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이 가부간에 대답하고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했다.
나는 혜숙에게 말했다.

"우선 약국부터 정리하고 급한 불부터 꺼 나가자 여보...
집은 우리가 장만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으니 그냥 두고...
내가 집을 안 팔고도 당신 보는 앞에서
1 년 안에 빚을 다 갚을께...
그대신 당신... 앞으로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빚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남은 애절한 소원과 기대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각오하고 다짐했던 계획을
나는 당장에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에게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굴리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해 낼 자신이 있었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그리 시달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공부나 진학 문제에
그리 걱정하고 불안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택에 대한 문제를 걱정해 본 적도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 역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준비해 놓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크면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되는 거지...
하는 자신감이 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1 년 안에 해 낼 꺼야... 해 낼 수 있어...
그런데 우리 혜숙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하지?
그러면 혜숙이 한을 남기게 될 텐데...
혜숙은 올 12 월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했는데...
기간 좀 줄여 보자... 올 연말로... 6 개월로 줄여 보자...
그래 6 개월 안에 감당해 보자'

나는 우선 약국부터 정리했다.
약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분에게
관리 약사와 함께 전적으로 맡아 경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돈으로 우선 시급한 부채부터 갚아 나갔다.
내 사업 자금으로 43 만 원을 남겼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