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Auguste Rod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어머니 메리 체퍼와 경찰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 사이에서 출생했다. 
로댕은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Petite École)

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했다. 

로댕은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으로부터 
드로잉을 비롯한 미술 교육을 받았다.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그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학생들의 인격을 발전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Eternal spring,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조각 "영원한 봄 (Eternal spring)"은 "지옥의 문"이라고 불리는 파리 장식 및 
응용 예술 박물관의 미완성 정문의 구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복잡한 작품의 구성 중 하나인 "키스(The Kiss)" 조각과 주제 면에서 인접해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제퍼와 지구(Zephyr and the Earth)" 또는 "젊음(Youth)"이라고 불렸다. 

연인의 이미지는 젊은 마음에 떠오른 감정을 의인화한다. 
로댕은 석재 가공의 특별한 방법을 적용했다. 
오목한 부분에서 대리석을 완전히 선택하지 않고 형태를 일반화했다. 
결과적으로 인물은 모호한 윤곽을 얻고 약간 빛을 투과하는 대리석의 흰색 층은 
사랑 장면의 순수함과 순결한 인상을 준다.

 

Cupid and Psyche,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2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장난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었던 에로스가 
처음으로 너무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인간 여인인 
프쉬케 (Psyche, 영혼을 의미)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하지만 입학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두 작품을 더 제출했지만 그마저도 거부되었다. 
그랜드 에콜에 입학하기 위한 요청사항이 그 당시 높지 않았는데도 
입학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로댕은 심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들이 거부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판정가들이 
로댕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1857년 로댕은 프티 에콜을 떠나게 된다. 
그 후에는 생활비를 위하여 조각가의 조수 등을 지냈는데, 
이는 오히려 관학의 형식주의적 타락을 막아주는 결과가 되었다. 
20여 년간을 장식품들과 건축장식들을 제출하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24세 때 최초의 걸작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Maria)가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졌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 
신부는 로댕이 다시 조각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데이말드 신부가 보기에 로댕은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조각을 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Romeo and Juliet, 1905.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7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은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동물 조각가였던 
앙투안루이 바리(Antoine-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했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바리의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있으며,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으며,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 장식들을 만들며 미술활동을 계속했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Poet and muse, early 1900s. by Auguste Rodin. marble, height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의 연인은 카미유 클로델이다.
1881~1882년 로댕은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지만,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들어 조각계에는 뤼드나 바리, 카르포 등이 등장했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어, 이 3인의 출현도 
아카데믹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새로운 전도(前途)를 개척하여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댕의 제작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생활에 쫓겨서 조각작품의 발표가 늦어졌다. 

 

Bronze Age, between 1877 and 1914. by Auguste Rodin. gypsum, height 1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52

 

로댕이 최초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청동시대(靑銅時代 1896)〉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사원은 그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을 다한 로댕의 오랜 기간의 탐구와 관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조각을 하나의 형(型)에 따라 제작하는 사람이나, 
고정된 미(美)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한 사람의 청년의 육체를 통해 생명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로댕은 시종 기성관념과 충돌하여 가지만, 그는 살아 있는 것같이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속에 산 인간을 놓고 생명의 상호 접촉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빛과 그늘의 역할을 아주 크게 비약케 하여 
조각의 면(面)이나 요철(凹凸)을 내적 생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여 초인적인 노력으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다. 
인상(人像)은 외치고, 두려워하고, 노호하면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 모습을 보여 약동의 분방성(奔放性)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된 것은 기왕에 걸쳐 있던 건조의 구렁으로부터 
끌어 내어 점토에 살아 있는 언어를 부여했다. 
더욱이 만년에는 〈발자크 상(像)〉(1898)을 발표하여 더 한층 물의를 자아냈다. 

그것은 문호(文豪)가 잠옷 바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데, 이 제작은 부분을 떠나 
조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조형하여 모든 것을 내부에 포함시켜 
외면의 묘사로서는 불가능한 내면적인 웅대성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조각 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로댕은 전생애를 통해 조각에는 별재(別在)하는 웅변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표현의 방법을 모조리 개선하여, 
조각을 근대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Auguste Rod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438~440번 홀은 20세기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는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회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판화, 조각 분야에서도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색채의 마법사’로 통할 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감각으로 색을 사용했다. 
20세기 초반 야수파 운동을 주도하며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마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늘 경쟁의식을 느꼈다.

1869년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고향에서 서기로 일했다. 
스무 살 되던 해 맹장염 수술을 받고 요양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이웃 사람의 권유로 풍경화를 그리면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1891년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이듬해 저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모로는 당시 고전주의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이 공존했던 프랑스 미술계의 다리 같은 존재였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고전주의적 화풍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화법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실험했다. 
1895년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하여 학교를 다니면서도 1898년까지 모로에게 그림을 배웠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05년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고 
둘은 색과 빛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다. 
1905년 그들의 전시회를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그들의 그림을 혹평하며 
‘야수(Les Fauves)’와 같다고 조롱했고 이후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다. 

1905년 거트루드 스타인의 소개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났고 친구이자 라이벌로 평생 교류했다. 
두 예술가는 서로 영향을 받으며 폴 세잔 이후 현대 미술의 양대 축을 이룬 예술가로 성장한다. 
1906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와 이국적인 조형물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영향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1907년부터는 과감한 색채가 특징인 야수파 스타일을 버리고 장식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아울러 회화에서 인체 형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조각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징병을 면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 당시 그린 그림에서는 마티스 특유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 대신 우울하고 칙칙한 무채색 톤의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파리를 떠나 니스로 거처를 옮겼고, 더욱 강렬하고 대비가 두드러지는 색채를 사용했다. 
1925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30년대 이후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과거를 답습한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히티, 미국 등지를 여행했고, 직물 디자인, 유리 공예, 

책 삽화, 성당 벽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했다. 
1939년 부인과의 이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은 예민한 예술가였던 그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고 급기야 1941년에는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안락의자나 침대에 누워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작품을 만들었다. 
색종이 작품으로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하면서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풍부해졌다.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남부 로제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색종이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954년 그가 37년 동안 살았던 니스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니스에 마티스 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Room of Henri Matisse,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 · 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동비중(同比重) · 순일(純一) · 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 정밀(靜謐)· 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Dance, 1909~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9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러시아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슈츄킨은 마티스가 파격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에 유명해지기 전까지 열렬히 후원해주던 사람이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
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한편, 쫙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는 
마티스가 불어넣은 역동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선, 색채, 형태의 혁명적 적용을 달성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본능적이고 근원에 가까운 행위를 다룬 이 작품은 
2006년 말 영국 가디언 신문에서 '죽기 전에 봐야할 그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두 개의 장대한 짝을 이루는 패널 "Dance"와 "Music"은 마티스가 
1908~1913년 사이에 제작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5 개의 인물은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변형은 열정적인 흥분과 모든 것을 소비하는 리듬의 힘을 표현한 것이다. 
빠른 관절 운동은 불굴의 활력으로 몸을 채운다. 
그리고 "약간 밀도가 다른" 붉은 ​​색은 내부 열의 상징이 된다. 
물들은 코스모스의 진한 파란색에서 춤을 춘다. 
푸른 언덕은 무용수들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으며 발 아래로 떨어지고 탄력적으로 솟아 오른다. 

그러나 캔버스의 구성에서 볼 때 마티스는 "댄스"에서 

줄거리의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여 표현하고 있다. 
논리와 비례감은 본능과 의식을 조화로운 전체로 통합한다. 
그것은 또한 그림에서 작용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에 있다.

 

Music,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260 x 3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음악(Music)'은 1910년에 그린 '춤(Dance)'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마티스는 예비 스케치 없이 '음악'을 커다란 캔버스에 작업했다. 
구성을 여러번 다시 생각한 흔적이 캔버스에 변형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화가의 열정처럼 완전한 창작의 몰입에 빠져 있다.

'음악'은 춤과 동일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녹색, 빨강, 파랑의 동일한 표현의 조화이다. 
음악가와 가수의 단순화된 다섯 명의 인물은 춤에서도 일치한다. 
'춤'에서 인간은 지상과 하늘을 동시에 향유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언덕을 올라간다.  
일상에서 벗어나 시공의 바깥에 존재하는 상징화된 이미지이다. 
반면 '음악'은 응축된 고요와 고립된 인물들의 절대적 부동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악기 연주 및 노래에 대한 총체적 집중은 감상자를 몰입하게 하고 놀라게 한다. 
열린 입은 공명을 발하는 것 같다. 

노래 부르는 인물들에서 감상자는 인간의 목소리를 육체적으로 경험한다. 
악보의 표기처럼 배치된 인물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몰입하고 있다. 
음악으로 전체가 하나로 묶여 있는 공간은 단지 캔버스 안의 세계만이 아니다.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미지의 세계이며 구현 가능한 세계이다. 
음악으로 조화로운 세계이며, 춤으로 함께 하는 세계. 

춤 작품에 매우 만족한 슈추킨이 다음으로 주문한 것이 음악이다. 
보통 마티스와 피카소는 비교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마티스의 그림은 사물을 자신의 감성대로 최대한 표현하려고 했다면, 
피카소의 그림은 비판, 분석으로 사물 자체보다는 은유로 바꾸어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사물을 기억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Bowling,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5 x 1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에서는 세 명의 청년, 아마도 마티스의 아들과 조카가 공놀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쇠로 된 공을 교대로 굴리며 표적을 맞추는 놀이에서 마치 
그의 대표작인 춤(Dance)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마티스는 게임을 인간의 창의성의 표현이자 삶의 코드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본다. 

보색 관계를 교묘히 살려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진다. 
청결한 색면 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자기만의 예술을 구축해 나간다. 
누군가 그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침내 그의 경쟁자이던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지침이 되어 그 성격을 결정지었다.

 

Nymph and satyr,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요정과 사티로스(Nymph and Satyr)"에서 마티스는 자연의 배경에 알몸을 그린다. 
언덕은 부드럽게 하늘로 올라가고 맑고 빛나는 지구의 색은 아쿠아 마린 물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녹색-파란색 톤의 세계에 마티스는 두 가지 선명한 색상 악센트를 도입했다. 
분홍색(님프의 몸 색깔)과 붉은 색 (사티로스 satyr)이다. 

인물의 수를 2개로 줄였고 마티스는 다시 두 개의 아치형 인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생성된 하모니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큰 손을 뻗은 

의도적인 남성 인물의 접근 방식에 의해 더욱 위협적이 되었다. 
여성 인물이 잠든 것처럼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솔직한 에로티시즘은 예술가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림의 주제는 아폴로와 다프네, 판과 시린가의 고대 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열정과 탈출이라는 두 성별의 영원한 반대를 담고 있다.

 

Fruits, flowers, panel 'Dance',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는 그림의 깊이로 빠르게 멀어지는 각도에 

테이블을 펼치고 이젤에 설치된 대형 패널 "춤(Dance)"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로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패널 "춤(Dance)"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림의 에너지 센터 ​​중 하나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Dionysian thyrsus를 연상시키는 긴 꽃 줄기의 힘에 해당한다. 
테이블, 패널, 들것, 바닥의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평면은 

수직, 대각선, 수평의 롤 뿐만 아니라 색상 반점에 의해서도 상호 작용하여 

마티스가 가치 있는 논리와 선명도를 그림 구성에 가져온다.

 

Moroccan Amido,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모로코를 처음 여행했을 때 그린 것이다. 
모로코 아미도(Moroccan Amido)에는 일반적인 동양적 이국주의도, 

민족주의적인 요소도 없지만 모델의 자연스러운 용이함, 

태양으로부터의 축복을 생각하는 기쁨이 있다. 

빛으로 가득 찬 색, 탕헤르 호텔에서 포즈를 취하는 10대 신랑은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그의 긴 다리가 있는 경쾌한 인물은 마티스가 설정한 캔버스의 좁은 형식에 자유롭게 들어 맞아 
청년의 마른 구조와 그림의 공간을 구성하는 컬러 평면의 강조된 수직 리듬을 모두 충족시킨다. 
마티스는 그을린 피부, 하얗게 빛나는 셔츠와 조끼, 짧은 바지의 순수한 색 반점을 포착한다. 
아미도의 몸매는 볼륨감과 무게감이 동시에 가볍고 약간 비대칭적이며 
마티스가 공간에 배치해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Standing Zora,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13년 마티스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모로코 그림 여러 점이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 컬렉션에 등장했다. 
그중에서 "스탠딩 조라(Standing Zora)"는 1912년 말 
모로코를 두 번째로 여행하는 동안 마티스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모로코 아미도"(Hermitage)와 한 쌍으로 구상되어 그려졌다. 
두 그림은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 소리에서 "Standing Zora"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림의 구성과 색상 등 전체 구조는 작가가 받은 깊은 인상을 보여준다. 
마티스 방식의 인상은 "Standing Zora"에서 변형되었으며 
아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은 신비한 동양의 표시가 되었다. 

그림의 공간은 캔버스의 평면을 따랐다. 
짙은 녹색 로브를 입은 조라 초상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매우 밝은 진홍색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눈에 띈다. 
검은색 장식 점선이 있는 흰색 테두리는 거의 균일한 색점으로 
리드미컬한 분해를 도입하고 미묘한 느낌을 향상시킨다. 
매혹적인 색의 마법,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아몬드 모양의 눈을 멈춘 시선의 요술 등 
모든 것이 외국 문화의 위대한 비밀을 구현하여 마티스에게 강력한 창조적 충동을 부여한다.

 

 Standing Moroccan in green cloth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5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말 두 번째 모로코를 여행하는 동안 그렸다. 
모델로 거무스름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밝은 녹색의 옷을 입은 남자를 묘사한다. 
평등하고 엄숙한 부동성은 캔버스의 전면을 거의 완전히 채우는 
엄격하게 정면으로 설정된 인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상한 방식으로, 아랍의 이 위엄있는 인물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는 것 같다. 

그림은 녹색, 파란색, 분홍색 황토색과 같은 빛나는 색상으로 구체화되며 
가볍고 투명한 캔버스 레이어가 흰색 바탕에 놓여 있다. 
그림의 차가운 색조는 마치 뜨거운 공기 속의 오아시스의 신기루, 
훅하면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 
구성 라인의 역할이 최소화되어 눈의 윤곽이 그려지고, 
입과 코, 버너스 후드의 윤곽이 그려진다.

 

Bouquet of flowers. Calla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2년 10월부터 1913년 2월까지 

두 번째로 모로코를 여행 할 때 그렸다.
정물, 인테리어, 풍경이 포함된 이 구성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녹색과 회색-청색 톤의 대비는 신중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부드럽게 빛나는 노란색과 함께 희미한 햇살을 연출한다. 
마티스는 채색되지 않은 흰색 영역과 색상 패치를 번갈아 표시한다. 
마티스는 전체 그림의 밝은 색상 구조와 일치하는 스모키 그레이 색상의 
가볍고 정확한 윤곽선으로 쌀쌀하고 세련된 꽃의 윤곽을 그린다.

 

Family portrait 가족 초상화, 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3 x 19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Arab coffee shop, 1913. by Henri Matisse. glue paints on canvas, 176 x 21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아랍 커피 숍(Arabian Coffee House)"은 모로코 연작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이다. 
마티스가 1913년 초 제작한 이 작품은 같은 해 4월 그림에 포함된 
명상적 성격을 미묘하게 감지한 세르게 슈츄킨(Sergei Shchukin)이 구입했다. 
이 작품에서는 절대적인 내면의 침묵, 자신의 몸의 느낌을 잃어버린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의 명상적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붕어가 있는 어항과 뒤편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극히 평온한 상태...
마티스가 항상 추구하던 이 평화로운 공간은 따뜻한 색상의 황토색과 
핑크, 파스텔톤의 청록색과 연회색으로 조화시킨다.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동양적인 곡선의 형태는 남겨 놓는다.
간결한 마티스의 동양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표현이 구체화되었다. 
현실과 관습의 교차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세상은 높은 시학과 평화를 발견한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13.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46 x 97.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마티스 아내의 초상화는 1913년 여름 파리 근교 자신의 집 정원에서 그려졌다. 
아내 아밀리(Amelie)는 우아하고 캐주얼하며 동시에 
녹색 정원 의자에서 남편을 위해 포즈를 취한다. 
마티스는 자세를 표현하는 데 있어 표현적으로 정확하며 옷의 완벽한 맛을 강조한다. 
그림을 만드는 동안 작가는 의식적인 세속적 초상화의 
전통적인 계획을 사용했지만 완전히 색다른 소리로 채웠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다른 현실이다. 

아내 아밀리(Amelie)의 얼굴은 녹색 그림자에 잠겨 있다. 
단단하게 짜여진 회로도 기능으로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 가면은 모델의 내부 본질을 숨길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명료성과 논리를 거스르는 비밀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녀의 생생한 긴장감과 조화를 이루고 신비하게 교란하며, 
전체적으로 퍼지는 파란색과 파란색-검정색 톤의 그림, 내부에는 밝은 녹색이 있다. 
1914년 "예술가의 아내 초상화"는 S. I. Shchukin 컬렉션에 인수되었다.

 

Conversation, 1908~10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77 x 2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대화(Conversation)"는 1908~1913년에 제작진 마티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청록색의 구도는 1909년 여름 마티스가 시골집에서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인 마티스와 그의 아내 아밀리(Amelie)는 이미지를 
극도로 단순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변화하는 삶의 특정 순간부터 시작하여 마티스는 
"현실에 대해 보다 안정된 해석을 위한 예술가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더 진실하고 깊은 의미를 포착한다" 
고 말한다. (Matisse. "Painter 's Notes")  

잠옷차림의 마티스와 실내복을 입은 아내가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높은 위치에 그림 밖으로까지 솟아있는 반면, 
낮은 위치의 아내는 의자 안에 자루같은 가운데 휩싸여서 매우 수동적으로 보인다.
외부의 배경도 남편은 나무와 아내는 연못과 매치된다.  
곧게 뻗은 나무에 비해 3개의 연못은 모두 잘린채 보인다.

마티스는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의 색으로 
평면 회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색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 준 그는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도 파란색이 주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카펫이나 벽의 색상이 아니다.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연관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색상은 감정적으로 중요하며 깊이 또한 매혹적이다. 

파란색의 다차원성에 순종하여 녹색은 잔디의 색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표시, 생명의 표시가되며 곧고 강한 나무 줄기인 "생명의 나무"에 의해 강조된다. 
순수한 색의 빛, 이상적인 세계에서 두 가지 
영원한 시작을 구현하는 기호를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반대와 중력에서 직선 (남성적 원리의 논리)과 기발한 곡선 
(예측 불가능, 여성의 감성)은 존재의 신비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주철 격자는 그 그림과 함께 
과거의 불가사의하고 읽을 수 없는 모노그램과 닮았다.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Portrait of L. N. Delectorskaya), 193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5.4 x 2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파란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는 1935~39까지 마티스의 화풍에 
빼 놓을 수 없는 모델이 되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9년에 아내와 결별한 마티스에게 있어 리디아는 더 이상 모델일 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0년부터 리디아는 모델 일에는 거의 손을 떼고, 
아내와 지금으로 치면 관리이사의 역할을 같이 해야 했다.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고 모델의 급료의 지급, 방문자의 선별, 
그리고 아픈 마티스를 위해 간병인의 역할도 도맡아 했다.

 

Portrait of Lydia N. Delektorskaya, 194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4.5 x 4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리디아는 러시아 출신의 골격과 체격이 큰 모델로 마티스를 만나기 전까지 다소 비참한 생활을 했다.
12살에 고아가 되어 파리로 흘러들어 와, 소르본 의대를 다녔지만 돈이 없어 곧 그만두고
상점 점원과 약간의 모델일, 그리고 이것저것 닥치지 않고 생활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1932년 22살 때 우연히 마티스의 작업실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Blue pot and lemon, 189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9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보관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1897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인상주의적 비전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들어가는 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그 자체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가 밝은 색상의 통일로 표현된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창에서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은 컬러 반사 신경으로 화면의 분위기를 채운다. 
레몬과 파란색 냄비는 색의 본질과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서 소리의 색채가 될 수 있지만 
마티스는 일관되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색을 빛에 종속시킨다. 

 

Sunflowers in a vase, 1898~189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46 x 3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꽃병 속의 해바라기'는 마티스가 툴루즈의 코르시카에서 그린 작품이다.
밝은 남부의 자연과 눈부신 태양의 빛을 만나는 코르시카로의 여행은 
마티스가 변덕스럽고 깜빡이는 인상주의적인 빛 공기 요소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마티스는 마치 세잔처럼 공기를 두껍게 하고 빛과 형태를 강화한다. 
그리고 아마도 우연이 아니라 절단 이미지가 있지만 태양 에너지, 해바라기를 계속 방출한다. 
이 꽃들과 활기 넘치는 반죽의 본질은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Fruit and coffee pot, 189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3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 말에 제작된 이 작품은 부드럽게 시뮬레이션된 과일, 
접시, 컵 등이 밝은 환경에 담겨 있지만 용해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넓은 획이 있는 커피 포트의 정력적인 조각은 
가소성의 느낌을 높이고 색상 윤곽은 각 개체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색상은 이전 작품에 비해 분명히 더 큰 독립성을 얻고 있다. 
커피 포트 표면의 다채로운 반사 신경의 강도, 식탁보의 짙은 색 그림자,  
이 모든 것이 정물의 색채 사운드를 향상시킨다. 
마티스가 만든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에 덜 의존하게 된다. 

 

Dishes on the table, 190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7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898년에서 1903년 사이에 제작된 대부분의 마티스 작품은 날짜가 없다. 
이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는 서명과 1900년이 적혀 있다. 
작가의 작업 연구자들은 1900년 정물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을 강조한다. 
인상주의에 대한 열정은 과거의 일이다. 

"테이블 위의 접시"에서는 색상의 도움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이 채용된다. 
그림 공간은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구성의 역동적이고 안정적인 요소는 절대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마티스는 차가운 반사 신경에 의해 짙은 청색과 적색의 비율로 그림을 만든다. 
이 칙칙한 색조로 자랑스럽게 서 있는 초콜릿 그릇에 순수하고 빛나는 색상이 빛나고 
흰색 그릇에 이국적인 라일락, 핑크, 블루 반사 신경이 나타난다. 
그림의 축제 성격을 결정하는 색상이다. 

 

Dishes and fruits,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1 x 6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접시와 과일"이 제작된 1901년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회고전이 열렸다. 
반 고흐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색의 선택은 아마도 전시회 방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에서 순수한 색은 강렬하다. 

마치 태양의 열을 흡수하는 것처럼 깊고 복잡한 라일락-바이올렛 톤과 
오렌지 주전자의 강력한 코드를 제공한다. 
밝은 빨간색 정강이가 있는 차가운 그늘의 노란색 레몬은 
잘 익은 토마토뿐만 아니라 캔버스의 전체 그림같은 구조에서도 공명한다. 
강렬한 색상, 다이나믹한 스미어는 화면에 활력을 더 해준다.

 

Vase, bottle and frui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정물화의 첫인상은 캔버스 표면을 지배하는 차분한 색상의 깜박임이다. 
하지만 언제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림은 감정이자 논리다." 
그림의 공간에 펼쳐지는 활기찬 다이아몬드 모양의 테이블은 안정된 중심을 형성한다. 
과일의 밝고 순수한 색상, 눈에 띄지 않게 드러난 캔버스의 중앙 축 
(우유 용기 및 어두운 병) 및 주변의 물체의 명확한 배열은 
스트로크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거의 고전적인 선명도를 제공한다. 

엑스레이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마티스가 다른 그림 위에 그렸다. 
어두운 바탕은 정물의 배경을 통해 보여진다. 
마티스는 느슨하게 배치된 흰색 도료, 노란색, 빨간색, 녹색 페인트의 
"흩어진" 장식용 획을 사용하여 이 바닥을 걸었고, 
이것은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검정색 톤에 환상적인 진동을 주었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야수파(Fauvist)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Luxembourg garden, 190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1년경 마티스는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의 전망과 함께 여러 풍경을 그렸다. 
인상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작업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특정한 느낌과 논리에 따라 만들어 낸다. 
인상주의적인 매력을 희생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원(Luxembourg Gardens)의 구성은 큰 색점으로 그려졌다. 
그림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효과가 있다. 
색상은 밝은 가을날의 인상을 준다. 

마티스는 양식을 단순화하고 세부 사항은 생략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주제와 

예술가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구성하는 힘"
이라고 마티스는 말했다.

 

Lady on the terrace,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8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07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콜리어(Collioure)에서 그렸다. 
열린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성은 마티스의 아내 아밀리(Amelie)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이 극도로 단순화되었다. 
작가는 컬러 윤곽선으로 윤곽이 잡힌 큰 컬러 평면으로 컴포지션을 만든다. 


그림은 그림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색상과 마찬가지로 캔버스의 리드미컬한 구성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장한다. 
활기찬 선으로 수평 난간, 물 위의 움직이는 요트, 언덕의 부드러운 모양, 
아내의 품위 있는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마티스는 
삶의 맥박과 엄숙한 평화가 느껴지는 세상을 만든다. 

 

Collioure's view, 1905.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59.5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지중해 연안의 남쪽 마을인 콜리어(Collioure)에서 
마티스는 1905년 여름과 1906년 봄과 여름을 보냈다. 
이 작품의 색상은 매우 강렬하다. 
밝은 남쪽 자연의 느낌, 눈부신 햇살이 채색된 그림자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다. 
그것은 기와 지붕을 짓는데 사용되는 주황색, 빨간색, 라일락 분홍색, 
진홍색 점, 태양에 의해 "구워진" 지구, 집의 벽 및 바다 위에 있는 
교회의 종탑의 복잡한 병치에서 발생한다. 

물의 붉은 색과 차가운 파란색의 대비가 더위를 더 해준다. 
덮이지 않은 흰색 흙의 부분은 페인트를 밝게 만들고 캔버스를 여분의 빛으로 채운다. 
1905년 가을에 악명 높은 살롱이 문을 열었고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이 전시한 그림은 
전례없는 개방적인 색감, 단순한 기술, 충동성 등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예술가들은 비평가 복셀에게 그들을 "fauves, wild"라고 부르는 이유를 주었다. 
여기에서 "fauvism(야수파)"이라는 이름이 20세기 예술의 트렌드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야수파의 수명은 1905년에서 1907년까지로 짧았지만 
마티스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예술 장르를 소유하게 되었다. 

 

Dishes and fruits on a red and black carpet, 1906.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1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1906년 봄과 여름, 알제리 비스크라 여행을 마치고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콜리우르에서 지내면서 이 정물화를 그렸다.. 
민속 공예가의 작품인 빨간색과 검은색 목도리 깔개는 비스크라(Biskra)의 예술가가 가져왔다. 
양식화된 반복 패턴으로 덮인 밝은 깔개는 캔버스의 거의 전체 면에 걸쳐 펼쳐진다. 


접시와 과일을 그 위에 올려 놓은 마티스는 그것들을 
평평한 공간에 "보관"하여 색이 있는 장식적인 장소로 바꾸려고 한다. 
자랑스러운 유리 용기만이 상대적인 독립성을 보여준다. 
가느다란 모양은 캔버스를 구성하는 직사각형의 "놀이"에 건설적인 수직성을 제공한다.

 

Bouquet (Vase with two handles), 190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74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Bouquet"의 색 구성표는 순수하고 축제적이다. 
그림을 만드는 역동적인 붓놀림이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정물 작업을 할 때 마티스는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에서 진행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자연의 노예적인 복제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방 공간, 일상 생활의 산문적인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사진의 중앙 부분에 집중된 블루톤의 차가움은 이 이웃에 깊이, 
밝은 노란색-오렌지색을 제공하여 화면의 평면을 "유지"한다. 
테이블의 분홍색-진홍색 표면이 이를 확인한다.

 

Seated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0.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작가가 색채, 그림 및 구성 분야에서 발견한 것을 사용하여 
작가가 자연과 어떻게 작업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검은색 윤곽선은 플랫폼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형의 
크고 흠 잡을 데 없이 구성된 인물을 포함한다. 
노란색이 풍부한 아름다운 녹색 색상은 자연스러운 일광 느낌을 만든다. 

명확하고 중단된 윤곽선은 이제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빛이 몸과 상호 작용하여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부피는 빛과 그림자의 비율로 드러난다. 
검은 윤곽선과 검은 그림자는 여성의 몸의 따뜻함을 향상시킨다. 
이 모델은 1908년 마티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Nude woman. Black with gold,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모델의 그림을 캔버스의 절대 중심으로 만든다. 
공간의 해답이 완전히 바뀌어 작가는 공기의 착시를 주는 밝은 배경과 내부 요소를 제거한다. 
이 모든 것이 여성 이미지를 상징적이고 중요하게 만들었다. 
주요 변형은 색상에서 발생했다. 
마티스가 인물의 볼륨을 강조하는 검정색과 노란색은 신체의 흑백 발달이 아니다. 
검은색과 노란색의 대담한 대비는 금이 있는 곳에서 
번쩍이는 골동품의 어둡게 패티닝  청동 느낌을 준다.

 

Nude woman,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0.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앉은 여인(Seated woman)"과 같은 모델을 그린 이 작품은 앞의 그림 
"누드. 블랙 위드 골드(Nude woman. Black with gold)"의 변형이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델의 모습은 상당히 표시된 공간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티스는 캔버스의 수직의 위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서서 그린다. 
벌거벗은 몸통의 위치, 엉덩이에 천을 잡고 있는 손의 위치는 
그리스의 멀고 영원한 이미지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델의 몸은 "크레프트 업", 살아 있는 관능미가 떠났고, 
그 비율이 더욱 "클래식"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생성된 이미지에서 명확성을 추구하고 
모델의 얼굴에 약간 눈에 띄는 슬픔으로 채색한다.

 

The Red room, 1908.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80.5 x 22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1908년, 회랑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작업장에서 마티스는 
1908~1913년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The Red Room"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유명한 러시아 수집가 세르게 슈츄킨(S. I. Shchukin)의 

모스크바 저택 식당을 위한 것이다. 


마티스는 꽃병, 과일, 꽃으로 방을 장식하는 특성으로 전환했다. 
빨간색과 진홍색 톤의 고급스러운 패브릭, 파란색 패턴의 활기찬 곡선이 벽에서 내려온다. 
그녀는 테이블의 평면을 차지하여 단일 전체를 형성하고 
방의 3 차원 공간을 흡수하며 캔버스 평면의 장식 가능성을 권위있게 주장한다. 


이 기법은 마티스가 이 작품 The Red Room에서 타협없이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붉은색의 평탄함을 확인하면서 그 안에 
꽃병을 휘두르는 여성 인물이 움직일 수있는 공간과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푸른 정원이 열리는 창문의 폭을 연출한다. 

여성의 모습의 부드러운 윤곽, 창 밖의 나무의 부드러운 윤곽과 함께 
일직선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조용하고 침묵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드러난 조화의 밑에 있는 "명확함과 질서"를 긍정한다. 
뒤에 꽃이 만발한 나무가 있는 녹색 정원이 열리고 캔버스 깊이로 눈이 움직인다. 
그림의 구성 리듬은 완벽하게 디버깅되고 의미가 있다. 
직물 장식에 존재하는 압력, 성장의 힘은 느낌과 열정에 대한 은유이다. 

 

Still life with a blue tablecloth,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8.5 x 1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1909년 마티스가 만든 최고의 정물화 중 하나다. 
마티스는 그가 사랑하는 파란색 식탁보를 사용하여 꽃병, 병 및 과일과 
앞의 작품 "The Red Room"에서 변형된 형태로 그렸다. 

 

Lady in green, 1909.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여름에 그렸다. 
모델은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등장한 여인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직립 자세, 날씬한 목, 자신감 있는 머리 위치, 달 모양의 타원형 얼굴 등. 
그림의 녹색은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깊고 풍부하며 개발하기 어렵고 수심과 울창한 녹지의 
시원함을 불러 일으켜 신비와 삶의 의인화가 된다. 

그러나 겉보기에 유비쿼터스 그린의 마법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 있고 간결하게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완전히 독립적이다. 
밝은 초록색 블라우스, 정확히 그림 중앙에, 전체 이미지를 고정하는 것처럼 
빨간 카네이션-브로치와 같은 유일한 밝은 점이 켜진다. 
젊은 아가씨는 차분하고 엄숙하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검은 눈동자에 약간 신비하다.

 

Girl with tulip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2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40

 

이 작품은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아티스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소녀는 마티스의 이웃인 쟌느 바드렌(Jeanne Vaderen)이다. 
그림의 여 주인공의 모습에는 일종의 부드러움과 우울함, 
고통스러운 연약함과 정교함이 있다. 


모델의 그림을 약간 구부림으로써 마티스는 캔버스 구성에 약간의 비대칭을 도입했다. 
마티스는 중심 축 안에 쟌느의 머리와 팔, 분홍빛을 띠는 
두 개의 몸매를 유지하면서 탄력 있는 새싹의 톤을 강화했다. 
색상과 인물의 병치 및 상호 작용은 그림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중요한 색채와 리드미컬한 악센트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강력하고 찢어진 튤립 줄기, 날카로운 강한 잎의 짙은 녹색,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꽃의 성장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블라우스의 밝고 쉽게 발달된 녹색 톤, 
닫힌 손의 타원형, 거대한 눈의 슬픔은 사람의 내면 세계의 비밀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특이성을 가리는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하고 
색의 일관성과 타원형과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롤을 고수한다. 
이 삶의 조화는 예술가가 보라색-파란색과 옅은 노란색의 넓은 영역의 
대조를 방해하는 긴장감으로 만들어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Pink figurine and a jug on a red chest of drawers, 1910.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이 작품 역시 마티스가 집을 빌린 파리 근처의 이씨 레 물레노I(ssy-le-Mouléno)에서 그렸다. 
집 근처의 정원에 마티스는 넓고 가벼운 작업장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대화" (작업장이 내려다 보이는 방의 창에서), "댄스(Dance)", 
"음악(Music)"과 같은 대형 작품이 그려져 있다. 

정물의 배경을 이루는 이 공방의 판자벽은 이번 작품에서 많이 그려져 있다. 
마티스는 자신의 작품을 화면에 도입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 기울어진 여성의 분홍색 조각상이 있다. 
마티스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작품에서 여러번 발표했다. 
주전자와 유연한 한련 줄기와 그릇처럼 현실 세계의 주제가 아니라 주어진 구성의 주제가 된다.

 

Seville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90 x 11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은 마티스가 1910년 10월에 떠난 스페인 세비야에서 그렸다. 
마티스는 세비야 호텔 방에서 이러한 작업을 했다. 
꽃과 새가 보이는 소파의 에메랄드 장식의 멋진 장식은 
세상에 피는 제라늄의 밝은 점을 유기적으로 포함하고 
테이블에 있는 노란색 목도리의 작고 어두운 패턴과 충돌한다. 

풍부한 색상 반점과 복잡한 장식품의 대비와 에코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구별되며 
밝은 핑크 톤과 함께 인테리어의 답답한 향신료를 향상시킨다. 
그러나 연한 초록색 커튼이 펄럭이면서 신선한 바람의 숨결이 그림에 들어오고 
보이지 않는 창문의 존재가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강렬하고 빛나는 핑크 톤이 아침 햇살에 대한 은유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벽과 바닥을 하나의 평면으로 결합함으로써 마티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폭동을 수용하여 그림 공간을 조화시킨다. 

 

Spanish still life, 1910~1911.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89.5 x 11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이 작품도 마티스가 스페인 세비야 같은 호텔방에서 그렸다.
그러나 그림의 구성은 익숙한 동기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테이블과 소파는 캔버스의 전면에 접근하여 "세비야 정물"의 전경 물체를 대체했다. 
색 반점이 커지고 색조가 더 강해져 장식적인 리듬이 변경되었다. 


직물은 그림의 아래쪽과 중간 부분을 특히 적극적으로 채우는 크고 선명한 패턴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 장식적인 고급스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식탁보의 활기찬 디자인과 진한 파란색 직물의 눈길을 끄는 양식화된 과일과 꽃은 
테이블 위의 제라늄과 고추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티스는 캔버스와 화분, 그리고 두 개의 주전자의 구조에서 물리적 존재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구도의 중심이되어 이 화려한 세상에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Vase with irises, 1912.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117.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꽃 창포가 있는 꽃병 (Vase with irises)"은 마티스가 

1912년 겨울을 보냈던 모로코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렸다. 
"Spanish Still Life"에서와 같이 작가는 호텔방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 캔버스는 1904~1910년의 작품과 비교할 때 
자연의 전이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신선함으로 표시된다. 


그림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구성의 기초는 고전적인 무대에서 마티스가 

꽃이 만발한 화병을 선물한 대리석 꼭대기에 화장대이다. 
라일락 색상의 강렬한 스트로크는 꽃잎의 자연스럽고 기발한 장식을 이끌어낸다. 

꽃과 강한 녹색 줄기를 둘러싼 흰색 캔버스의 작은 영역은 

색조를 감소시키지 않고 그림에 빛을 가져온다. 
나무와 도자기의 따뜻한 갈색 - 붉은 질감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돌의 시원한 표면과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며, 꽃의 강렬한 삶에 비해 역동적인 패턴이 차분한 것 같다. 


마티스가 창조한 시각 감각 세계는 거울이 객관적인 환경을 반영하지 않고 
기묘한 빛과 신비한 검은 색으로 가득 차 있어 일상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신비로운 거울의 세계와 나란히 살고 있다. 
공간의 색상 변화는 그림의 배경에서 계속되며, 녹색 톤이 검정을 통해 놀랍게 깜박인다. 

 

Ballerina, 1927. by Henri Matisse. oil on canvas, 65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0

1920년 마티스는 7년 이상 그의 모델이 되어 니스 시대의 

많은 작품의 정신을 알리는 19세 소녀를 만났다. 
헨리에트(Henriette Darricarrère)가 발레를 공부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자신의 외모, 잘 조각된 강인한 형태뿐만 아니라 

예술성에도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그녀는 자신을 오다 리스크 , 스페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댄서로 쉽게 변신시킬 수 있었다. 
발레리나는 색 구성표와 구성 균형의 단순함으로 유명하다. 
배경은 거의 추상적이다. 
그림을 강조하는 서로 다른 색상의 4 개의 수평 띠가 있다. 
헨리에트(Henriette)가 무엇에 앉아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의상의 벽과 끈은 같은 색이며, 발레리나의 스타킹과 바닥도 가까운 색조다.

 

Henri Matisse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Winter Landscape. 1909.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70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Vasilievich Kandinsky, 1866 ~ 1944)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 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프랑스어: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다. 

 

Sketch for composition V. 1911.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95 x 13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이 작품으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 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 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 Compo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 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 · 우발적 · 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 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으로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Sketch for composition VI, 1913.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300 x 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는 실제 장면에 기초해서 추상화를 그리곤 했다. 
그림을 보면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절제된 폭력, 오른쪽에 충돌하고 있는 두 척의 배, 
크게 흔들리고 있는 노, 가운데 배처럼 생긴 형체는 거대한 파도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밝은색의 사선은 대포를 암시하고 오른쪽 위에는 로마군기가 보인다. 
이 그림은 어느 해전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대의 그것과 같이 이 작품도 거칠고 혼란스럽다.

이 장면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통해 
배나 폭풍우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런 느낌을 전해주려 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형상만을 이용했다. 
이 그림을 언뜻 보면 어두운 그림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절제되어 있는 여러 부분으로 인해 경쾌한 작품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 칸딘스키의 이러한 그림들은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받았다.

 

Landscape. 1913.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88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그림 공부를 착실히 한 표현주의 화가였다. 
당시 여성화가에 대한 위상이 좋지 않았던 시절, 
둘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칸딘스키 36세, 뮌터 나이 25세 의 뮌헨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서 만나 사랑하며 함께 그림과 여행을 즐기게 된다. 

두 사람은 바이에른 지방의 무르나우에서 동거를 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했다. 
1911년에 창립된 '청기사'와 교류하며 활동을 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청기사파는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떠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고,  
꾸준한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둘은 잠시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는 이후의 오랜 동안 이별하게 되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뮌터는 그를 기다렸지만,  
칸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장군의 딸과 결혼한다. 

칸딘스키를 기다리던 뮌터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뮌터는 한동안 그림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도 칸딘스키와 함께했던 무르나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뮌터의 작품에는  
그녀 삶의 모든 정서와 풍경이 담겨져 있다. 
맑고 상징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 
그리고 검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내면의 정서를 담아 형상화하였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작품을 나치로부터 온전하게 지켜낸 뮌터는  
후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뮌헨 시립미술관에 모두 기증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상] Wassily Kandinsky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Little schoolgirl, 1907.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3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르 포코니에 (Henri Victor Gabriel Le Fauconnier 1881~1946)는 
헤스딘(Hesdin)에서 태어난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다. 
1901년 앙리 포코니에는 프랑스 북부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법을 공부한 후 
장 폴 로렌스 (Jean-Paul Laurens)의 스튜디오에서 회화 수업에 참석한 다음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에서 회화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의 이름을 Fauconnier에서 Le Fauconnier로 변경하고 1904년과 1905년 
살롱 데 인디펜던트(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전시하여 Henri Matisse 와 일치하는 대담한 색상을 구현다. 
그는 1907년 에 브리타니로 이주하여 플루 마낙의 바위 풍경을 
단순한 형태를 구분하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갈색과 녹색의 징계 톤이 특징인 원형 입체파 스타일로 그렸다.

 

Village in the mountains, 1910.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앙리 포코니에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의 입체파 형태를 개발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 시작될 때 앙리 포코니에는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6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성공과 영향력을 가져왔다. 
그는 1920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 되었다.
그는 파리 (1946)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ke, 1911.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92 x 7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ignal, 1915.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8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Luxembourg Gardens. Monument to Chopin,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8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 1910)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가난한 배관공의 자제로,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30대 중반에 이미 환상과 전설,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이 시기에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되었다.

1885년부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앙리 루소의 작품은 초기에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과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의 이유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후에 <경악(驚愕 : 숲속의 폭풍 1891)> <잠자는 집시, 1897> <뱀을 부리는 여인, 1907>
<시인의 영감, 1909>과 같은 그의 그림은 참신성과 원시적인 자연스러움을 근거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원시림과 같은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성, 
강렬한 색채는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앙리 루소는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2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View of the area from the Vanves Gate,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1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1884년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18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A tiger attacking a bull. In the rainforest, 1908~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4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과 전설,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기하학적인 구성에 연유한다. 
그의 그림은 전문적인 기교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열정을 통해 
원시적인 세계를 환상에 기반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서투름과 투박한 뒤에서 역설적이게도 숭고한 신비로움을 준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일어난 기존 가치관의 전도와 새로운 가치 기준, 
새 질서에의 욕구 의지는 급속한 템포로 예술 분야의 변혁을 촉구했고, 
특히 유럽의 정신 세계는 세기말적인 ‘~주의(-ism)의 과잉', '사상의 혼돈'이 찬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루소의 어린이 같고 환상적인 화풍은 
회화사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사실주의 기법과 닮아 있으나 
실제로 화폭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인물의 신체 비례는 너무나 어색하고 과장되어 있고, 
등장하는 동식물 또한 자연과 닮아 있지 않아 
오히려 추상적 형태보다 환상성을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우거진 나뭇잎이나 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잎사귀 몇 개를 그려 우거진 나무로 표현하였고 
풀의 모양에 있어서도 실제의 형태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렸다. 

열대의 밀림에 신비롭게 된 꽃도 루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며, 
거기에 배치되는 하나하나의 장면도 루소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루소가 그린 밀림 지대에는 건조한 초원에서 서식하는 사자가 살고 있고 
미녀가 숲속에서 나체로 드러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밀림의 생태적인 현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상념 속의 열대 밀림을 창작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진/부 감정을 위촉한 결과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회답해 왔다고도 한다.

 

St. Trinity in Paris, 1911. by Albert Marche. oil on canvas, 81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알버트 마르쉐 (Albert Marche)의 작품은 다른 포브스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Fauvist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Still life. Dishes, 1920. by Amede Ozanfan. oil on canvas, 72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아메데 오장팡 (Amédée Ozenfant 1886~1966)은 프랑스 입체파 화가이자 작가였다. 
1909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의 Collège de France에서 강의에 참석했다. 
1915년 Max Jacob 및 Guillaume Apollinaire 와 공동으로 오장팡은 1916년까지 편집한 
잡지 L' Elan을 창간했으며 그의 순수주의 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거주지와 스튜디오에 
자신의 아틀리에인 l' Académie Ozenfant를 설립했다. 
그는 1936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해 5월에 오장팡(Ozenfant)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약 2년 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있는 Ozenfant School of Fine Arts는 1939년부터 1955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는 1944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장팡은 1955년 프랑스로 돌아와 1953년에 재귀화 될 때까지 미국에서 널리 가르치고 강의했다. 
그는 남은 생애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1966년 칸에서 사망했다.

 

Still life with a mirror, 1912.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92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till life with a cat, 1921.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78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Landscape, 1925. by Leopold Survage (Sturzwage), oil on canvas, 54.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레오폴 쉬르바주 (Léopold Survage 1879~1968)는 핀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였다. 
22세에 심한 병을 앓은 후 쉬르바주는 그의 경력을 다시 생각하고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0년 모스크바에서 Jack of Diamonds 그룹과 함께 전시했으며 
1911년 Salon d 'Automne 에서 Archipenko의 촉구로 프랑스에서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1922년까지 쉬르바주는 신고전주의자들을 찬성하여 입체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쉬르바주는 상징과 신비주의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Postcard, 1932~1948.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92.3 x 6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1881~195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페르낭 레제는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그는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 · 인물을 그렸다. 

 

Composition, 1924.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는 뒤에 무대 장치와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순수 영화를 제창함으로써 전위 영화의 길을 열었다. 
1930년 전후부터 곡선을 자주 사용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식〉, 〈아담과 이브〉, 〈트럼프놀이〉등이 있다.

 

Court scene, 1928. by Eve Alix,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Green landscape, 1920~1921. by Andre Lot, oil on canvas, 5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Diana on the hunt,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310 x 13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Allegorical scene,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279.5 x 8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in Provence, 1928. by Alexander Truin. oil on canvas, 
50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figure, 1924. by Andre Favori, oil on canvas, 72 x 4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Catching herring,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46 x 11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idge,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9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eton coast, 1911. by Leon Hubert. oil on canvas, 46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onoring the midshipman, 1950. by Guy de Vogue. oil on canvas, 
80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rotracted conversation, mid-19th century. by Karl Spitzweg (?). oil on canvas, 
6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late 19th century. by Caspar Ritter. oil on canvas, 
55 x 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early 1890s.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Warrior with a banner, 1821.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59.6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athing Diana, 1872.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41.2 x 5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ea view, 1837.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63 x 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oy with dog, 19 century.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97 x 72.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around 1900. by Ludwig Hoffmann.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orest landscape, around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by Fritz Ebel.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with a lake, 1840~1860.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107 x 1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asant children,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by Edward Ackerman. oil on canvas, 

42 x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hipwrecked, 1855. by Johann Wilhelm Cordes. oil on canvas, 
120.5 x 1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cenery, 1828.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80 x 1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430번 홀은 모리스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와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의 작품을 전시한다. 
모리스 블라맹크는 프랑스의 화가로 1899년 앙드레 드랭과 

사귀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블라맹크는 마티스 등과 더불어 야수파 운동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고흐의 영향을 받아 원색의 밝은 색조로 

점과 곡선을 사용하여 유동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세잔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1918년부터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예술에 있어서 이론이란 의사의 처방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자임에 틀림없다. 지식은 본능을 말살해 버린다. 
그림의 창작은 유통(流通)이 자재(自在)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가장 야수파적인 화가였으며 

포비즘 속에 산 화가이기도 하였다. 


블라맹크는 1876년 파리에서 출생했으나 그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이라 한다. 
양친은 음악가로 자제의 교육에는 무관심한 보헤미안 기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자전거 경주 선수를 해 가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그는 본능에 의하여 화가가 되려고 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모리스 블라맹크는 "화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아 직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어린이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라고도 하였다. 
그는 앙드레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와 사귀어 포비슴 운동에 가담하였다. 
블라맹크는 무엇보다도 생명력의 표현을 화면에서 추구해 보려던 화가이다. 

"나는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
고 말하던 블라맹크의 패기는 색채의 과잉과 범람으로 화면에 마구 넘쳐 흘러 
야수파 중에서도 더한층 높은 음색의 절규가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1880~1954)은 프랑스의 예술가, 화가, 조각가이다. 
앙리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을 주창하였다.
드랭은 1880년 파리 외곽의 일드프랑스, 이블린, 샤투에서 태어났다. 
블라맹크와 마티스를 만난 뒤 그림을 기리기 사작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앙드레 드랭은 1895년에 그림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8년 Académie Camillo에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동안 
그는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회화 수업에 출석했고 그곳에서 마티스를 만났다. 

1900년에 드랭은 모리스 블라맹크를 만나 스튜디오를 공유하였고, 
함께 인근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1901년 9월부터 1904년까지 
Commercy에서의 군 복무로 인해 작업은 중단되었다. 
퇴역 후 마티스는 드랭의 부모에게 드랭이 공학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에 전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였고 이후 드랭은 줄리안느 아카데미에 출석했다. 

드랭과 마티스는 1905년 여름동안 지중해 마을 콜리우르(Collioure)에서 함께 작업했으며, 
같은 해 말에 살롱 도톤에서 매우 혁신적인 그림을 공개했다. 
생생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상으로 인해 비평가 루이 복셀은 그들의 작품을 
"les Fauves" 또는 "야수"라고 조소적으로 불렀고, 이것이 야수파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Room of Maurice Vlaminck and Andre Dera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1906년 3월, 유명한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앙드레 드랭을 런던으로 보내 런던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30점의 그림(그 중 29 점은 아직 현존)에서 드랭은 휘슬러나 모네와 같은 
이전의 화가의 작품과 완전히 다른 런던의 초상을 선보였다. 

대담한 색상과 구성으로 드랭은 템스강과 타워 브리지가 등장하는 여러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보고 미술 평론가 T. G Rosenthal는 이렇게 평가했다.
"모네 이후로 런던을 그렇게 신선하게 묘사하면서도 
영국적인 본질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랭은 템즈강을 묘사할 때 여러 개의 점을 찍는 점묘법을 사용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점들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에, 분할 점묘라고 불리는 색상의 분리 그 이상이며,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물 안에서 분할된 색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Seine view, 190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54.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by the lake,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81.3 x 10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own, 1908~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4 x 9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Bougival, 1909.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house on a hill, 1925~1926. by Maurice de Vlaminck. oil on canvas, 
33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 190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ad among the mountains, 1907.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Houses by the water, 1910.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102.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he rock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0.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Clay jug, white napkin and fruit,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Basket with bread, jug and glass of red win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5 x 1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Table and chairs,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88 x 8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Still life with a skull,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72 x 11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rove, 1912.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1.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Landscape with a boat near the coast (Quarry-Senis-Denis), 1915.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0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Martigues. Harbor in Provence,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41 x 9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n Unknown Man Reading a Newspaper (Chevalier X), 1911~1914.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62.5 x 9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93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Portrait of a girl in black, 1913. by Andre Derain. oil on canvas, 116.5 x 8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0

 

[영상] Maurice Vlaminck and André Dera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422번 홀은 강렬한 색상의 페인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야수파(fauvist)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모든 그림은 20 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다.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야수파는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야수파의 주요한 화가로는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문하생인 
앙리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라울 뒤피(Raoul Dufy),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진 푸이(Jean Puy),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야수파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였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했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즘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즘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이처럼 야수파는 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미술활동이었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은 주요 사조로써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야수주의를 시작으로 화가의 주관이 색채로 표출되는, 
즉 관념적 사상이 색채로써 표출될 수 있는 색채의 추상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수파의 화가들은 하늘과 바다는 푸른색, 나무가 울창한 산은 초록색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개성 강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3세계 미술의 성향인 원시주의(Primitivism)에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하고 강렬하게 색채를 왜곡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진 생략된 묘사와 허술한 표현 그리고 성의없어 보이는 
붓질의 흔적이 더해진 야수파의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추한 그림 ’ 
그리고 ‘미치광이의 반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들은 야수파의 작품들을 야수적이라고비꼬았으며, 
'야수파'의 미술적 사조에 가담된 화가들을 ‘야수들’이라 조롱하는 가운데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Red dancer,1907.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99.7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1877~1968)은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1877년 1월 26일 로테르담에 가까운 구시가지인 항구도시 델프스하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되던 1892년 
로테르담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과정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시간을 부둣가에 나와 

선원들과 매춘부들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1897년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가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간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사풍자 잡지에 삽화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반 동겐은 마티스 이후 야수파를 일군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감각적으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들로 유명하다. 
선원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낸 그는 
가난한 집안의 사정 때문에 1896~1898년에서야 

로테르담 예술학교에서 화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보헤미안같은 생에 대한 태도와 미술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한 불만 등으로  
화가 마티누스 실트(Martinus Schilt)의 작업실 이층으로  옮긴 뒤 
이곳에서 삼년동안 지내게 되며 그동안 주로 창녀들이나 
배의 선원들을 그의 그림의 테마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퇴페적인 여자들의 그림들이 이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Antonia La Coquinera, 1906.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로테르담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20세 때인 1900년 파리에 옮겨간 후 
몽마르트르 지역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칠장이, 풍자 답지 삽화가, 
카페 예술가, 신문을 배달할만큼 가난에 찌들어진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 몇몇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친분을 맺고 주간지에 그의 삽화를 기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던 반 동겐은 
1902년부터 점차 채색 중심의 대담한 화풍의 그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등과 함께 살롱 도톤전에 참여했다.

​이때 미술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이들의 작품을 두고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들의 그림이라고 비꼬았다. 
반 동겐은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정적인 관능미가 돋보이는 
<팜므파탈 (Femme Fatale 1905)>을 출품하여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Woman in black hat,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1906년 몽마르트르의 세탁선(바토 라부아르)으로 거주지를 옮겨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시인, 
음악가들과 친분을 맺고 그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때 피카소의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풍부한 예술적 토양과 환경 속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1906년 포비즘 운동에 참가하여 신선한 색채와 
힘세고 북돋운 것 같은 필치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겐은 1907년 피카소 그림의 판매인이었던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와 
계약을 맺은 뒤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당시 드레스덴에 본거지를 두었던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cke)'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색채효과가 뛰어난 초상화 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선풍적으로 유행했다.​

한편, 반 동겐은 1908년 독일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에 가담하여 
드레스덴에서 열린 다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유일한 야수파 화가로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회화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Lucy and her partner, 1911.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30 x 9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주로 서커스나 카바레 같은 도시의 유흥시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여인들의 누드와 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택해 
감성적이면서도 긴장과 불안감이 엿보이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유혹적이되 정적인 관능미가 넘치는 인물 표현으로 
사교계의 큰 호응을 얻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사교계의 공식적인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후기에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가 부각되었지만, 오히려 상류 사회의 호평을 받아 
저명인사나 유명 여배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권력과 부로 치장된 화려한 외관 속에 감추어진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을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퇴폐적인 관능성을 견디어 낸 초상화를 그려 크게 인기를 얻었다. 
만년에는 사교계의 총아로서 오로지 유명인의 초상을 그렸다. 
초상화와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서구에서는 마티스와 같이 야수파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겐은 풍부한 색채의 바다 풍경과 과감하고 간결한 양식의 파리 풍경도 여러 점 그렸다.

Spring, 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초기에 인상파 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 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반 동겐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고 1908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키쉬너(E.L. Kirchner) 등 4명의 대학생들로 창립된 독일 인상파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ecke/Bridge)의 회원이 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들은 더 사실적으로 변하고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며 반 동겐은 192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반 동겐은 1926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27년에는 벨기에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929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반 동겐은 1959년부터 모나코에서 살았고, 
1968년 91세를 일기로 몬테카를로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Roofs and Cathedral in Rouen,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119 x 9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1879~1949)는 프랑스의 포비스트(야수파) 운동 예술가였다. 
프리에스는 오랜 조선소와 선장의 아들로 르 아브르(Le Havr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96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Le Havre School of Fine Arts)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생 친구인 뒤피(Raoul Dufy)를 만났다. 

 

Temptation (Adam and Eve),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73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와 뒤피는 1895~96년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장학금을 받고 함께 파리로 가서 
에콜 드 보자르에서 보나의 교실에 입실하고 귀스타브 모로의 교실에 있었던 
마티스(Henri Matisse), 마르케(Albert Marquet),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를 만났다. 
프리에스는 야수파의 일원이 되어 1907년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Tulips and daisies,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908년 프리에스는 노르망디(Normandy)로 돌아왔다. 
그는 191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1914년까지 가르쳤고, 전쟁 기간 동안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919년 파리에서 다시 살았고 1949년 사망할 때까지 
툴롱과 쥐라 산맥으로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Still life with a statuette of Buddha, 1909.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1 x 4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의 생애의 마지막 30년 동안, 그는 이전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희미한 바로크 풍미는 그의 풍경, 정물화 및 인물화에 활력을 더했다.

 

Hill,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1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생동감 넘치는 아라베스크와 야수파 시절의 화려한 색채를 포기한 프리에즈는 
더 냉정한 팔레트로 돌아와 논리적 구성, 단순한 색조, 볼륨의 견고함 및 
평면의 뚜렷한 분리에 대한 세잔(Cézanne)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Autumn works, 1907.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4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프리에스는 194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파리 교외에 있는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묻혔다.

 

Rural landscape, 1910. by Auguste Chabo. oil on canvas, 77 x 10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1882~1955)는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 님(Nimes)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차보드는 아비뇽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합류했다. 
1899년에 그는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다. 
1900년에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의 부모의 포도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업이 그곳의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1년에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리를 다시 떠나야 했다. 
그는 배에서 일하면서 서아프리카 해안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파리의 밤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 인근 몽마르뜨에서 그는 파리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그렸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튀니지에서 군 복무하는 동안 차보드는 사람들과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이후 파리로 돌아와 야수파(Fauves)와 함께 전시했다. 
수년 동안 그의 파리의 밤 문화 그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제를 포기하자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차보드의 입체파 단계는 1911년에 시작되어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1913년 뉴욕을 포함하여 많은 전시회를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Vlaminck) 및 피카소(Picasso)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푸른 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유일한 색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했다. 
그때부터 그는 프랑스 남부에만 집중했다. 
그는 시골 생활, 농부, 알필(Alpilles)의 언덕과 산책로의 장면을 그렸다. 
그는 1955년 Graveson에서 사망했다.

 

Flowers, 1906.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81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1882~1960)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릴의 에콜 데 보자르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드로잉을 공부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입체주의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1917년에 처음 추상 작품을 제작하였고 추상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Mill on the Marne, 1911.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22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onies, 1906. by Pierre-Paul Girieud.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1876~1948)는 1876년 6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로방스에서 자라 독학으로 화가가 된 그는 1900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몽마르뜨의 테르트르 광장 근처로 이사한 후 현대 미술의 거장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곳에서 피에르 지리유드는 몽마르뜨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의 본사이자 
유명한 카페인 "Lapin Agile"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인 피에르 지리유드의 

그림에 대한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는 전통적 표현의 경계를 넘어 포비즘과 표현주의의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Quay Notre Dame in Le Havre, 1908. by Georges Dupuis. oil on canvas, 58 x 7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s 1874-1932)는 프랑스 화가이다.

 

Portrait of Suzanne Dufy, the artist's sister, 1904. by Raoul Dufy. oil on canvas, 

46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라울 뒤피 (Raoul Dufy 18877~1953)는 프랑스의 화가로 
직물, 도자기 디자이너 사이에서 유행한 다채롭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 · 정밀 · 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큐비즘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회귀하였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09. by Jean Puy. oil on canvas, 131.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876 년 11월 8일 프랑스 로안에서 태어난 진 푸이(Jean Puy)는 

파리의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고 1905년에 다른 야수파(Fauves)와 함께

Salon de Indédependants 및 Salon d' Automne에 작품을 전시했다. 

 

Landscape, 1903. by Jean Puy. oil on canvas, 48.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늘날 진 푸이의 그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Courtauld Institute of Art 등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진 푸이는 1960년 3월 6일 프랑스 Roanne에서 사망했다. 

 

Landscape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50.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망갱 (Henri Charles Manguin 1874~1949)은 프랑스 야수파(Fauves) 화가였다.
앙리 망갱은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에게 사사하고 마티스(Henri Matisse ), 

마르케( Albert Marquet),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 등과 교유하며, 
1905년 살롱 도톤의 유명한 포비슴(野獸派) 출품 사건에 참가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들어졌고,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듯이 격렬한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으나, 
다른 포비스트에 비하면 종래의 형태나 구도에 집착하여, 

온화한 경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Path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73 x 9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Morning in the Cavaliere, 1906.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Flowers, 191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41.7 x 3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421번 홀은 샤를 프랑수아 프로스페르 게랭(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1875~1939)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샤를 게랭은 파리의 보자르 드 파리(l' École des Beaux Arts) 에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와 마티스, 마르케와 함께 공부했으며 1910년 
그래프턴 갤러리(Grafton Galleries)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Room of Charles Guer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Lady with rose 장미를 든 여인, 190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5 x 3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stroll, 1921.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9.5 x 1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irl with a book, 1906.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73.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Walk in the park,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4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Gallant scene, 1908.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45.5 x 5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Terrace,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5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usicia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1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Expectation, 190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6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Nude woman, 1910.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116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Portrait of a young woman, 1909.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52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Moonlit night in the forest in Montmorency, 1897. by Charles Guerin. oil on canvas, 
38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1

 

[영상] Charles-François-Prosper Guéri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rench painting of the early 20century.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420번 홀은 인상파와 포스트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Artemis,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5.5 x 2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는 1912년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고,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쓴다.
1907년, ‘세탁선’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아폴리네르는 가난한 문인이었고, 로랑생은 무명 화가였다. 
둘 다 사생아로 태어났다. 

둘은 연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했다. 
1911년 경, 개성 강한 성격이었던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뒤, 
기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썼다. 
마리 로랑생은 그렇게 우리에게 화가보다는 시인의 뮤즈로 더 알려졌다. 

한참 사랑에 불타고 있던 아폴리네르가 주문해서 두 연인을 그린 루소의 그림은 
로랑생을 시인의 뮤즈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종종 그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 누군가의 뮤즈로 더 알려지곤 한다. 
로댕의 연인이었고 재능 있는 조각가였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그늘에서 괴로워했으며,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 화가보다는 유명한 벽화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여성 예술가들은 예술가 자체가 아니라 뛰어난 다른 예술가의 연인이나 뮤즈로 더 알려진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신비로운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성 예술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예술에 영향을 준 삶에 대해 보기 보다는, 
여성적인 스타일을 이야기하고 대상화된 여성 ‘뮤즈’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Bacchante, 1911. by Marie Laurencin. oil on canvas glued to cardboard, 32.7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마리 로랑생은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독일인 귀족과 결혼을 한다.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충돌로 시작된 이 전쟁 와중에 
로랑생은 적국의 군인과 결혼을 했던 터라 국외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1920년 경에 남편과 이혼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 로랑생은 다른 여성 예술가와는 달리 생전에 유명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마리 로랑생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문인 장 콕토는 마리 로랑생을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낀 불쌍한 사슴으로 비유했고, 
로댕은 야수파의 소녀라고 놀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그녀는 사립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일했다. 
그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Woman leaning on the table, 1901.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 (Eugène Carrière 1849~1906)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는 오귀스트 로댕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그의 작품은 피카소에게 영향을 줬다. 
카리에르의 흑백 양식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잘 나타나 있다.

 

Woman with baby on her lap, 189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61.3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이 되지만, 후에 회화를 그린다. 
처음은 신중한 생활을 했는데,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影像)을 화면에 그려보는 것을 궁리했다. 
그 때문에 색채를 다 쓰지 않고 단색으로 그려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게 하여, 
인물을 음영(陰影)에 매몰되듯 녹여서 그리고 있다. 

 

Mother and child, 1880. by Eugene Carrier. oil on canvas, 38 x 5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외젠 카리에르의 작품은 박력과는 먼 표현이지만, 
인상(人像)에는 꿈속을 보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그린 작품은, 부드럽고 단아함을 머금고 있다.

 

Naiad, 1896.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41.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년), 〈들라크루아 예찬〉(1864년) 등이 있다.

나이아데스(Naiad)는 그리스 신화에서 일종의 물의 요정으로 
연못, 호수, 우물, 개천 등 담수에 살고 있다고 여겨졌다.
다른 물, 바다의 요정과 비교해 보면 오케아니스는 큰 바다, 대양, 바다의 요정, 
네레이스는 바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에게 해의 요정인데 비해 
나이아데스는 흐르는 물 중에서 작은 개천, 우물들의 정령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모든 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나이아데스는 자신이 속한 연못이나 물의 원천과 연결되어 

만약 그 물이 모두 마르면 그 요정도 죽게 되었다. 
대부분의 나이아데스는 동물과 인간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아르고 호의 

선원 중 하나인 힐라스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때로는 인간에게 위험하기도 했다.

 

Hamlet, 1898.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41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Town with a cathedral, 1899. by Fernand Maglen. oil on canvas, 137.5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Miners. by Jules Gustave Bess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줄스 베송 (Jules Besson 1868~?)은 프랑스 화가였다. 
50대에 그는 인도 차이나로 이사했다. 
사이공에 있는 그의 제자들의 작품은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Market in Brest 브레스트 시장, 1899. by Fernand Pie. oil on canvas, 64.7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Landscape in Saint-Denis, 1906~1910. by Charles René Picart Le Doux. oil on canvas, 46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샤를 피카르 르두 (Charles Picart Le Doux 1881~1959)는

프랑스 시인, 작가 및 화가였다.

 

Lodge (Spectators), 1906. by Tony Minartz,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는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 레이터였다.

 

Music hall, between 1895 and 1896. by Jean Louis Forein.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장 루이 포랭 (Jean-Louis Forain 1852~1931)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이자 판화가로 
오일, 수채화 , 파스텔 , 에칭 및 석판화를 포함한 미디어에서 일했다. 
그의 많은 인상파 동료들과 비교할 때, 그는 평생동안 더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후세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Plowing, 1902. by René Auguste Seyssaud. oil on cardboard, 4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르네 오귀스트 세이소(René Auguste Seyssaud 1867~1952)는 

프랑스의 인상파이자 현대 화가이다.

 

Road, 1901. by René Auguste Seyssaud. pasted on canvas paper, 30.7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In the restaurant, 1907. by Charles Hoffbauer. oil on canvas, 115 x 16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찰스 호프바우어(Charles Constantin Joseph Hoffbauer 1875~1957)는 
미국 시민이 된 프랑스 태생의 화가였다. 
그는 역사적인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 많은 주제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를 그렸다.

 

Hall of the Dauphin in the Palace of Versailles, 1901.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80 x 9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모리스 로브레 (Maurice Lobre 1862~1951)는 프랑스 예술가였다. 
그는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모리스 로브레는 19세기 후반에 그의 작품이 살롱 드 샹 드 마르

(Salon du Champs-de-Mars)에 전시되면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1888년 그는 살롱에서 명예 멘션과 여행 보조금을 받았다. 
그해 여름 그는 노르망디로 가서 자크-에밀 블랑쉬와 함께 지냈다. 
드가(Degas) 와 휘슬러(Whistler)는 그와 가장 절친한 손님 중 하나였다. 

 

Lobby of the Palace of Versailles, 1903. by Maurice Lobre. oil on canvas, 92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20세기 초에 모리스 로브레는 앙티미즘(Intimist) 스타일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모티프는 편안한 부르주아 환경이 지배했다. 
1905년 4월, 그의 작품은 앙리 거벡스(Henri Gervex) 갤러리의 공동 전시에서 
다른 스타일의 실무자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회는 앙리 마티스, 헤르만 폴, 르네 프리네 , 어니스트 로랑 등과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앙티미즘(Intimist)"라는 용어를 만든 
에드워드 빌라드(Édouard Vuillard)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Shrine relocation, 1899. by Gaston de La Touche. oil on canvas, 145 x 15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가스통 라 터치(Gaston de La Touche 1854~1913)는 

프랑스 화가, 삽화가, 조각가 및 조각가였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419번 홀은 주로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1875-1947)의 풍경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알베르 마르케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초기 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로 야수주의의 성향을 보였으나 
점차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화한 화풍으로 변모했다. 
색과 빛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강과 바다, 항구와 범선이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Room of Albert Marqu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는 1875년 보르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장식화가를 지망하였으나 22세 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더불어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문하생이 되었다. 
마티스와는 절친하였고 같은 아틀리에서 1900년의 만국박람회의 장식화를 
공동 제작한다든지 또는 같은 전람회에 각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림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볼 때 마티스를 양(陽)이라고 한다면 

마르케는 음(陰)이라 할만큼 서로 달랐다고 한다.

 

Louvre embankment and New Bridge,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루브르 제방과 새로운 다리
이 작품은 마르케 자신의 재능적 특징인 건설적이고 명확하고 
쉽게 보이는 구성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준다. 
지평선이 올라가고, 제방의 선은 그림의 공간을 비스듬히 가로 지른다. 
그러나 컴포지션의 역동성은 “평면” 색상으로 균형을 이룬다. 
포비즘(fauvisme)의 교훈을 배웠을 때 마르케는 신중하게 색상의 관점을 약화시킨다.

무더운 여름날의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그림의 컬러 팔레트를 
몇 장으로 줄였지만 정확하게 발견된 비율은 흰색과 새벽 비행기와는 달리 
빛이 넘치고 보라색 음영이 깊고 차가운 것처럼 보인다. 
밝은 녹색 울창한 단풍이 태양을 통해 갈색처럼 붉어진다. 
더운 날의 센세이션은 마르케가 길가의 한가운데 나무가 던지는 그림자의 
명확한 윤곽을 투명한 페인트로 강조한다는 사실에 의해 향상되었다.

상반된 원칙 즉 건축 고전과 일상 생활의 결합, 역동성 및 동시에 구성의 엄격한 계산, 
하프톤 및 순수한 색의 사용 등 마르케의 경관은 독특한 특성을 부여하여 
회화의 고유한 인식 모두를 작품에 알린다. 

 

View of the Seine and the monument to Henry IV, 1906.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센 강과 헨리 4세 기념비 보기
마르케는 인상파가 유지하는 표현적 또는 현실적 가치에 비해 
회화적 특성과 강한 색채를 강조한 포비즘(Fauvism - 野獸派)에 속했다.
포비즘은 1904년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운동은 
1905-1908년에 불과 몇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세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 운동의 주창자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였다.

 

Saint Jean de Luz, 1907.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생 장 드 루즈
마르케는 일찍부터 바다나 항구와 같은 해변의 풍경화를 그렸고, 이러한 기호는 늙어갈수록 
화면에 인적이 없는 고요한 취향을 가미하여 그 제작을 일관하였다. 
같은 모티프의 풍경화에도 뒤피의 경우에는 축제의 광경, 
그 생생한 환희의 표현에 특색이 있으나 마르케가 노리는 것은 대범한 색면 구성 
즉 넓고 넓은 하늘의, 언덕의, 모래 형태의 이조(移調)에 중점을 두고 있다.

 

Gulf of Naples 나폴리 만,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2 x 80.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 (fauvisme, 野獸派)는 현대미술의 서막을 시작하는 그룹이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1905년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 전시회에서  
마르케의 작품을 "야수의 무리 속에 같혀 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하였다. 
야수주의는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의 일단의 작가들이 보인 
도발적인 색채 작업에 대해 경멸적으로 붙인 용어이다.  
야수파의 그림들은 대체적으로 재현적이며 동시에 
매우 과장된 색채를 호화에 주된 요소로 사용하였다. 

 

Hamburg port 함부르크 항구, 1909.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야수파들의 그림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도발에 가까웠다. 
비자연적인 원색과 세련되지 못한 기법, 
정교하게 그리지 못하고 대충 그린 듯한 기법으로 혹평을 받았다. 
야수파는 후기 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 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면서 발전되었다. 
즉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의 강렬함이므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명암,양감 )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표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려 개성적인 자아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어졌고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A rainy day in Paris. Notre dame cathedral, 1910.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81 x 6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파리의 비오는 날. 노트르담 대성당
마르케의 초기 작품은 젊은 마티스의 작업과 구별되는 똑같은 날카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나면서 마르케는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난다. 
마르케의 작품의 본질은 변화한다. 
색깔이 더욱 조화되고 조화로워지면서, 마르케는 

대기의 전달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포비즘의 유산으로서, 마르케는 대담한 다채로운 일반화와 

발레리와 함께 순수한 음색의 사용 경향을 유지한다.

 

Harbor in Menton 망통의 항구, 1905.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6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마르케는 격렬한 색채에 의한 포브의 화가가 아니고, 
그 색조의 대담함에 의해 포비스트라 말하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단조로운 색채로 덮인 그의 화면은 때때로 중후한 이면의 
뉘앙스가 노출되어 몽롱한 애수마저 풍기고 있다. 
포비즘 운동 이후의 그는 구성을 더욱 순화하여 견고하고 평형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르케는 현대 회화에 유니크한 지위를 차지하는 풍경화가로 기억되는 화가일 것이다.

 

Milliners, 1901. by Albert Marquet. oil on canvas, 50.5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알베르 마르케의 작품은 다른 포비즘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야수파의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Maina with Venice in the distance,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60 x 7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찰스 코트(Charles Cotte 1863~1913)는 프랑스 화가다. 
그는 어둡고 떠오르는 브리트니 시골과 바다 풍경으로 유명하다.
1885년에 찰스 코트는 브리트니를 방문하여 매년 몇 달 동안 카마라 쉬르 메르에서 
어부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종교 축제에 참여했다. 
브르타뉴 어의 삶의 항구, 폭풍 및 장면은 찰스 코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제가 되었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쓰여진 장르 구성, 어두운 색, 작가는 상징적인 성격을 주었다. 
1889년 처음으로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발표했다.

1897년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View of Venice from the sea, 1896. by Charles Cotte. oil on canvas, 55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7년 찰스 코트는 파리의 갤러리에서 베니스에서 쓴 일련의 그림 
"바다에서 바라본 베니스의 전망", "베니스가 있는 바다"를 전시했다. 
1890년대에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큰 존경을 받았던 "Nabi"그룹의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그는 1904년 스페인과 1907년 아이슬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에 새로운 주제를 가져왔다. 
1905년 이후 그는 책 삽화로 전환하여 약 60개의 판화를 만들었다. 
1913년 질병으로 인해 Cotte는 그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Exit from the Moulin Rouge 물랑 루즈 출구, 1901~1902. by Tony Minarts,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토니 미나츠(Tony Minartz 1870~1944)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독학 화가인 토니 미나츠는 1896년 National Society of Fine Arts 에서 
그림을 전시하여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Grand Guignol” 스타일의 쇼를 위한 
페인트 패널 로 파리의 퐁파두르 극장을 장식했다. 
미나츠는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전국 미술협회 살롱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Bretons and Bretons, 1907. by Lucien Simon, oil on canvas. 55.3 x 4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뤼시앵 사이먼(Lucien Joseph Simon 1861~1945)은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이자 교사였다.
1891년에 그는 화가 잔느 사이먼 (Jeanne Simon 1869~1949) 의 여동생 과 결혼하여 
그녀의 고향인 브리태니(Brittany)의 풍경과 농민 생활에 매료되었다.

 

Lady in the garden, 1909~1911. by Pierre Laprad, oil on canvas. 5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9

피에르 라프레이드 (Pierre Laprade 1875~1931)는 프랑스 화가이다.

 

[영상] Albert Marque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Louis Valta.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418번 홀은 루이 발타(Louis Valtat 1869~1952)의 자연의 품 속에 풍경을 보여준다. 
루이 발타는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다. 
루이 발타는 20 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비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는 강렬하고 거의 야생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데 중점을 두는 그룹을 창립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오히려 인상파 경향을 특징짓는 보다 섬세한 손길을 사용했다.

 

Children's games (Girls playing with a lion cub), 1905~1906.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디에프에서 

선박 소유자의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발타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리세 호슈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중등 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풍경 화가로 젊은 루이스가 예술에 관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17세에 예술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그는 에콜 (École des Beaux-Arts de Paris)에 지원했다. 
1887년 발타는 파리로 이주하여 에콜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학술 예술가들과 함께 공부했다.

 

Lilac rocks (Sea surf), 1900.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890년, Jauvin d 'Attainville 상을 수상한 발타는 파리의 La Glaciere 거리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는 1893년 독립 예술가 살롱에서 데뷔하여 자신의 아트 스튜디오를 둘러싼 
동네의 거리 풍경을 묘사한 여러 그림을 전시했다. 
그의 경력의 이 초기 기간 동안 발타는 인상주의의 자연스러운 빛 터치와 
Pointillism 에서 발견되는 다채로운 점을 사용했다. 

 

Sea bay in Antheor, 1906~1907. by Louis Valt.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성인이 되었을 때 발타는 결핵에 시달렸기 때문에 
파리의 여름과 지중해 연안의 겨울로 시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지중해 근처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발타는 색채 사용을 강화하고 
특히 바다 풍경을 그리는 데 있어서 포비스트 성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By the boat,189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81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1914년 이후 그는 파리와 루앙과 베르사유 인근 지역에서 작업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꽃, 풍경, 현대 생활의 장면을 포함,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발타의 그림은 그가 아직 20대 였을 때 미술 평론가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93년 쉬르 르 블러 바드 는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Society in the garden, 189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5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에게 가장 초기의 그림인 이 작품은 1898년경에  제작되었다. 
활기차고 분리된 붓놀림과 그림의 격렬하고 역동적인 질감은 발타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와 반 고흐(Van Gogh) 등의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Sun under the trees, 1908~1909.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6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가 가장 유명한 그림을 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였다. 
여기에는 1903년 Les Rochers Rouges dans la Mer와 3년 후 La Dentelliere가 포함되었다. 
이 작품들은 발타가 그의 동료인 앙리 마티스보다 명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포비즘 운동의 비공식적 지도자로 자리 매김하는 것을 보았다.

 

In the south of France, 1908. by Louis Valt. oil on canvas, 60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 발타의 초기 작품은 그의 아버지의 풍경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로서의 완전한 성숙은 마티스(Matisse)를 포함한 두 명의 동시대인과 함께 
1905년 파리의 Salon d 'Automne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으며 그의 그림을 전시했던 시기였다. 
그 후 발타의 그림은 생생하고 거의 뚜렷한 순수한 포비즘의 색상과 
발타가 인상파에 대한 초기 경험에서 유지했던 약간 더 부드럽고 
덜 추상적인 터치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타는 1948년까지 페인트 계속 녹내장으로 고생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고 
결국은 시력을 잃고 1952년 1월 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10~1911. by Louis Charlot.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루이스 샬롯(Louis Charlot 1878~1951)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완성된 이 작품은 루이스 샬롯의 대표작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빈곤을 겪었지만 그림을 그만 두지 않고 파리에서 전시회를 늘렸다. 
루이스 샬롯은 1920년이 되어서야 조르주 쁘띠 갤러리(Galerie Georges Petit) 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Salon d' Automne의 회원인 그는 또한 1927년부터 1943년까지 Salon des Tuileries에 출품했다 . 

 

Village under the snow in Morvan, 1908. by Georges Dufrenois.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8

 

조지스 더프레노이(Georges Dufrenois 1870~1943)는  포비즘과 관련된 프랑스 포스트 인상파 화가였다.
그는 프랑스 티 아이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건축과 회화 사이에서 망설임 끝에 더프레노이는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가 1895년에 작업하기 시작한 그의 초기 작품은 인상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1902년에 그는 베니스로 첫 여행을 했고 
1차 세계 대전 중을 제외하고 거의 매년 1939년까지 반복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위대한 거장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 네제를 발견했다. 
예술 평론가 마리우스-아리 르 블론은 자신의 베니스 작품이 
"베네치아 마스터의 위대한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는 이탈리아 인의 직계 계승에 자신을 두고 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부유하고 귀족적인 베네치아 인으로 남아 있다"고 썼다.

 

House in the garden, 1905. by Charles Lacoste. oil on cardboard, 

2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샤를 라코스테 (Charles Lacoste 1870~1959)는 프랑스 화가였다.

 

[영상] Louis Valtat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Room of Felix Vallotton.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화가들 중에는 평생을 한가지 화풍만 고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 무쌍하게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 화가들도 있다. 
그런 화가들 중 스위스의 펠릭스 발로통(Felix Edouard Vallotton 1865~1925)은 
정밀한 대상의 묘사에서 나비파까지 연결되는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발로통은 스위스의 로잔에 있는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열 일곱의 나이에 로잔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을 보면 꿈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그가 배운 분야는 고전이었다.

 

Landscape at Arques-la-Bataille, 1903. by Felix Vallotton. oil on board, 67 X 10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파리에 도착한 발로통은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 
구스타브 블랑제와 쥘 르페르브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발라통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홀바인과 뒤러 그리고 앵그로였다. 
이들의 작품은 평생 발라통 미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처음 발로통은 초상화가로 미술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885년, 스무 살 되던 해, 정식 살롱전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살롱전에 
출품을 하고 난 후 작품의 주제가 실내 풍경으로 바뀐다. 
작고 정밀한 붓 터치, 선 처리로 아주 섬세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도 
이즈음부터 그가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Interior, Bedroom with Two Figures, 1903-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rdboard, 61.5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그의 이런 기법은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자 했던 1920년대의 신즉물주의 화가들의 
기법과 유사한데, 그를 신즉물주의의 선구자라고 평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로통은 화가보다는 목판화가로 더 미술사에 크게 기록되는 것 같다. 
현대 목판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처음 목판화 제작을 시작한 것은 발라통이 스물 여섯 되던 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뛰어든다.
1890년대 책을 통해 그의 수많은 목판화가 소개 되었고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도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그에게 그래픽 미술가의 선두 주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Lady at the Piano, 1904,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43.5 X 5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많은 잡지에 기고도 하고 포스터 제작에도 열성이었던 발로통은 1893년, 
프랑스 예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기존의 살롱전에 반대하던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이 이어진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아르누보 갤러리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발라통은 나비(Nabi)파와도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이미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 안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품은 나비파는 종교적인 주제와 
초자연적인 주제가 주요 모티브였지만 나중에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까지 폭 넓게 다루었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을 
그 시작으로 해서 표현을 단순하게 하고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서 
작품 속 대상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Woman with a Black Hat,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3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나비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발로통의 작품에서는 

점차 전통적인 기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 그리고 일본 판화의 영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890년 에콜드 보자르에서 개최된 일본의 우키요에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많은 화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구입했는데 발라통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9년, 34세가 되던 해 발로통은 베르넴 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한다. 
베르넴 가문은 르노와르 작품을 구입한 대표적인 화상이었다. 
아내 덕분에 발라통은 금전적인 여유를 얻게 된다. 
물론 베르넘 전느 (Bernheim-Jeune) 갤러리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도 얻게 되었다.

 

Portrait of Mrs. Haazen, 1908.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유화 작품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판화 제작이 줄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술 비평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는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고 독일 잡지에는 그의 비평이 실리는 등 
국제적으로 발라통의 명성이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고국인 스위스 사람들에게 
그가 알려진 것은 1910년, 그러니까 마흔 다섯이 되고서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발로통은 군에 지원한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다. 
비록 군에 입대하지 못했지만 발라통은 그의 장기인 

목판화를 통해 일련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명성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꾸준히 살롱에는 작품을 출품했다. 
암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발로통은 60세 생일을 보내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환갑 다음 날이다.

 

Portrait of G. E. Haasen, 1913, by Felix Vallotton. oil on canvas, 81.7 cm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17

 

1,700점이 넘는 회화와 드로잉을 남겼다고 하니까 그의 다작에는 그저 입이 벌어진다. 
그 외에도 조각과 3편의 소설, 수많은 연극 대본을 남긴 발라통을 생각하면 
끝없이 열기를 뿜어 내는 용광로가 떠오른다.
스위스 화가인 펠릭스 발로통은 1882년에 파리에 왔다. 
그는 본래 목판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영상] Felix Vallotton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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