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5. 봉원산거


처음의 만남이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인연이었던가?...

 

나는 유신 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를 하고
정국은 절망과 공포로 주눅들면서 쥐죽은 듯 고요하던 때에
함석헌 선생님이라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치떨리는 심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계실 것만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퍽 자상하게 맞아 주셨다.
뜻밖에도 신촌 봉원동 산거에 조용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주셨다.

 

우선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찾았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신학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봉원산거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턱을 15 도 쯤 위로 치킨다.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긴다.

한 소리를 만나 귀속에 담고
명동(鳴動) 깊숙히 파묻히기도 하고
한 생각을 만나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지기도 한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적당한 헛기침 소리에 맞춰 자리를 가다듬는다.

 

간디 자서전 (Gandhi's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ht Truth)
을 펴서 차례지어 돌아 읽고 뜻을 푼다.

 

옛적부터 오랜 세월 이 땅의 서원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15 도 쯤 아래로 떨구고 있을 것이었고

 

스승은 표정을 삭이고 비스듬히 앉아 장죽대를 빨면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함 선생님의 말씀이
한 주일 동안에 생긴 일들과 어우러지고
간디의 삶과 이어져서 가이없이 펼쳐진다.

 

수줍은 미소와 겸양어린 표정으로
들릴듯 말듯 더듬으며 시작해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더듬던 '말씀'이 서둘러 지고 또렷해 진다.
안색이 변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손이 오르내리고 몸이 움직인다.

 

혈색이 벌겋게 물들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는 온 몸을 치흔들어 분노하며 외친다.
내키는 대로, 내키는 그대로를 '말씀'으로 쏟아 놓는다.

 

다시 수줍고 겸양어린 모습으로 되돌아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억 겹 올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섬세한 솜씨로 뽑아 내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어느새...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올마디를 좇아 겨를없이 헤맨다.
휘저이면서 이리저리 떠 돈다.

 

한참을 지나서야 동(東)으로
또 한참을 지나서야 (西)로 옛날로...
제 자리로...
염주처럼 꿰어진다.

 

이런 모양으로 한 해 남짓을 어울려 공부하다가
이듬해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 후 1975년에 다시 모임을 갖고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Bhagavadgita)를 공부하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모임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려 공부한 이들로는
남학생으로 강경헌(태학관 관장) 강용현(판사) 
김형기(경주 중앙교회 목사)
박경수(한국공항관리공단) 박재순(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부길만(동원대 교수) 신대균(사회운동)
이도성(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이원희(목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임유식(사업)
조성완(재미 목사) 허우성(경희대 교수) 등등과

 

여학생으로 강인선(성공회대 교수)

김은희(전 조선일보 문화부)  유영림(목사)
전경림(성악가)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참고 사진 : 1964년 봉원산거 퀘이커 모임집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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