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 동료들이 마련해준 나의 회갑연

































































































































































엠네스티 청년학생 석방 환영회에서


1984. 08.18 민청련 민족해방 36주년 기념대회 / 흥사단 대강당


1984. 08.18 민청련 민족해방 36주년 기념대회 / 흥사단 대강당


1984. 08.18 민청련 민족해방 36주년 기념대회 / 흥사단 대강당


1984. 08.18 민청련 민족해방 36주년 기념대회 / 흥사단 대강당


1984. 11.25 관악산 노동문화제


1985. 3.10 노동절 기념대회 / 홍제동성당


1985. 3.10 노동절 기념대회 / 홍제동성당


1987년 12월


1987년 4.14 석방환영회를 마치고


1987년 석방환영회에서


1987. 10.31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주의 현판식장


1988. 6.30 김천소년교도소에서 김근태 석방을 기다리며


1988. 6.30 김천소년교도소에서 김근태 석방을 기다리며


1988. 6.30 김천소년교도소에서 김근태와 함께


1988. 6.30 김천소년교도소에서 석방된 김근태와 서울로 오는 도중 금강휴게소에서


1988. 6.30 김천소년교도소에서 석방된 김근태와 서울로 오는 도중 금강휴게소에서



1989. 6.9 장영달 옥중기록 출판기념회


1989. 6.9 장영달 옥중기록 출판기념회


1989. 11.23 김병곤 동지 쾌유를 위한 목요기도회 / 기독교회관


1989. 11.23 김병곤 동지 쾌유를 위한 목요기도회 / 기독교회관


1989. 12 성내운 총장 영결식 / 광주대학교


1989. 12 성내운 총장 빈소에서


1989. 12 성내운 총장 장지에서 / 충남 공주 선영


1990. 9.19 문익환 목사님 모친상 / 한일병원 영안실


1990. 9.19 문익환 목사님 모친상 / 한일병원 영안실


1990. 12.8 김병곤 빈소에서


1990. 12.10 김병곤 운구행렬 중에


1990. 12.10 김병곤 운구행렬 중에


1991. 12 문익환 목사님 석방환영회 /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1991. 12 문익환 목사님 석방환영회 /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1991. 12. 8 김병곤 동지 묘비 제막식 / 마석 모란공원


1991. 12. 8 김병곤 동지 묘비 제막식 / 마석 모란공원


1991. 12. 8 김병곤 동지 묘비 제막식 / 마석 모란공원


1991. 12. 8 김병곤 동지 묘비 제막식 / 마석 모란공원


1991. 12. 8 김병곤 동지 묘비 제막식 / 마석 모란공원


1991. 12.28 전민련 송년회


1992. 8 김근태 석방 / 홍성교도소


1992. 8 김근태 석방 / 홍성교도소


1992. 8 김근태 석방 / 홍성교도소


1993. 10.28 민청련 창립 10주년 및 민청련동지회 결성식


1994. 6.3 곽배희 선생 출판기념회


1994. 6.3 곽배희 선생 출판기념회


1995. 6.23 박현채 선생 회갑기념회에서


1998. 3.11 한승헌 감사원장 취임축하연







 

들녘같은 사람 / 고은 (시인) 

 

 

나는 1970년대 이래

역대 독재 체제와의 싸움을 통해서

그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동시대인의 한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희생과 온갖 시련도

나 자신의 자그마한 고행과 더불어 얼마든지 증언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동지들과의 연대와 합치를 통해서

그 인간적인 미덕에 대해 한없는 매혹을 체험한 바도 없지 않다.

 

최민화 씨는 74년 이래 변함없는 이 세상의 후배로서

변함없는 친밀성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함석헌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선배에 대한 겸손과 동지에 대한 원만

그리고 후배들에게 대해

들녘과도 같은 덕성을 발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실로 풍운이 긴박한 개인 생활의 난관을 이겨내 왔다.

나는 그의 딸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와 격의없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왔다.

 

이런 최민화 씨가 지난 날의 아슬아슬한 고행과

그 극복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내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의 어제, 오늘 내일의 영광을 기원하는 바이다.

 

 1996년 3월 <우리는 하나> (최민화 저 / 현암사 간)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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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이 그리웠던 계절 / 지성평 (환경관리공단)

ㅡ 최민화 감사님을 보내며

 

 

길가에 백일홍 꽃잎이    
빗방울에 흩어 내리던 어느 날

 

기약 없이 떠나보내야 할 그를 위해

선물을 사고 행사장을 준비하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그대는 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묻은 채

그 환한 미소로
못다 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낯선 선창가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를 볼 것이다.

 




최 민 화 ㅡ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 1 -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난...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난...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아...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아...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 2 -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肉)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아,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 3 -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 4 -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아~~~!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아~~~ 형...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등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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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민 화 / 고 은




지붕 위 박 몇덩이
실컷 익어

밤중에도 하얀 박 몇덩이
그렇게 넉넉한 사람이었다

최민화

핏대 세워 토론하는 화곡동 어느 집에서
그는 넉넉하게 입다물었다가
너털웃음으로 동지들의 불화를 풀어주었다.

그 밑창의 고통 따위 숨기고
허허허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아무런 흔적 없이 예수 믿어

이런 사람도 있다

잘 드는 칼보다 도끼보다
이를테면 용문산 용문사 천년의 은행나무 뿌리
불거져 나온 그런 세월인양

* 고 은 시집 < 만 인 보 > 11 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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