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Archaeological Museum of Corinth)
 
아고라 주변 유적에서 출토된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도기와 석회암으로 만든 스핑크스, 로마 황제 네로의 두상 등이 3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동물 무늬 도기. 고대 그리스 기형(器形)의 하나.


그리스인은 연회석에서 포도주를 물에 타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때 사용되었던 대형의 용기를 말한다.
또 묘표 ∙ 유회(遺灰) 용기로도 사용되었다.


2개의 손잡이가 있고 기형에 따라 종형(鍾形)이나 악형,

손잡이의 모양에 따라 소원주형이나 소용돌이형으로 구별해서 말해진다.
청동제, 도제(陶製)로 된 것이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훌륭하고 멋진 장식을 가진것도 적지 않다.


기하학 문양(geometric) 도기


처음 그리스의 도기는 기하학 문양(geometric)이었다.
초기 코린토스 양식이라 불리는 도기들은 이집트나 시리아의 오리엔트 양식의 문양을 본 받고 있다.


그때까지 그리스 도기는 기하학 문양이었지만 코린토스 양식이 빛을 발한

기원전 8세기 말부터 사자나 스핑크스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흑색상 (Black figure) 도기
기원전 600년 경부터 전형적인 그리스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만(卐)자 무늬 도기. 기원전 8세기


흑색상 (Black figure) 도기.


사람이 까맣게 표현된 것은 도자기 전체에 검은색 유약을 입히고

그림을 넣을 부분에서 사람은 남겨 놓고 바탕 부분을 긁어낸다.


그러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은 검은색으로 남고

긁어낸 배경은 원래 도자기 표면의 붉은 색이 된다.


적색상 (Red figure)도기.


적색상 도기는 흑색상 도기와 반대로 인물의 색이 붉고 배경이 검다.
적색상 도기는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을 긁어낸다.


재미있는 동물그림 크라테르(Krater). BC 6세기

크라테르처럼 큰 그릇에는 신화나 영웅 이야기를 나타내는 그림이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쟁 이야기 그림이 있는 크라테르.


만자 무늬 크라테르


코린토스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도기


오른쪽 사자 또는 스핑크스가 그려지기 시작.


왼쪽은 입 주위에 수평으로 된 두 개의 손잡이가 붙은 잔 모양의 술그릇. 스키포스(skyphos)라고 한다.
후기 기하학 문양의 시대가 끝나면서 동방의 동식물 문양 (BC 6세기 경)이 코린토스 도기의 주류가 되었다.

코린토스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도자기


코린토스 도기, 왼쪽 작은 도기가 향유병


코린토스 각종 도


운동선수들이 사용한 기름병


코린토스 각종 도


흑색상 도기


하얀색 바탕에 여러 색으로 표현한 White ground technique와 오른쪽은 킬릭스(kylix)


킬릭스(kylix)는 수평인 두 개의 손잡이를 가진 포도주를 마시는 술잔이다.
안팎 양면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바닥에 원형으로 그림을 그려 와인을 마시면 그 그림이 드러나도록 했다.

여신이 있는 킬릭스(kylix)


레키토스(lekythos).

 올리브유를 보관할 때 사용하는 신화와 영웅 이야기가 그려진 향유단지


레키토스는 올리브유나 의식용 향유를 담는 그릇으로,

가늘고 긴 목 부분에 손잡이 하나가 달린 날씬한 원통모양이다.

다양한 종류의 레키토스(lekythos)


사진 왼쪽에 코린트식 백지 레키토스 (Lekythos corinthian White-ground Lekythoi)가 있는데

도자기로 된 향유단지의 일종이다.


적화식, 백지흑화식도 있지만 BC 5세기 후반 경부터 말 경까지는 백지에 채묘가 그려지고

'백지 레키토스'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대체로 장제용에 쓰였다. 적화식에서 한걸음 더 발달한 기법이다.


다양한 종류의 코린토스 도기들
위쪽 코린토스 도자기 제작 발전 과정이 적혀 있다.



코린토스 박물관 (Archaeological Museum of Ancient Corinth) 영상 




참조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wabool/221084208108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656656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205&cid=42635&categoryId=42635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Archaeological Museum of Corinth)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은 그리스 코린토스(Corinth)에 있다.
건축가 스튜어트 톰슨(W. Stuart Thompson)이 1932년 완공한 것으로 세 개의 전시실과 대형 뜰로 구성돼 있다.


코린토스에서 발굴된 조각, 도자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두 개의 주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 소장된 아스클레피온(Asklepieion)에서 출토된 테라코타는 예약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박물관은 선사시대로부터 헬레니즘을 거쳐 비잔틴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기원전 6세기경의 <대리석 스핑크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아들로 추정되는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디오니소스의 머리가 장식된 모자이크>, <비잔틴 꽃병> 등이 있다.


출입구 옆에 도리아식(doric style),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코린토식 기둥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스의 건축 양식


도리아식(doric style)
그리스 미술양식의 하나로 주로 건축양식에 쓰이며 간소한 장중미가 특징이다.
기둥은 기반부가 없는 형상이며, 수직방향의 흠은 매우 얕고 모서리는 각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목조건축양식을 석조건축에 응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폴로(Apollo), 파르테논(Parthenon), 헤라(Hera) 신전 등이 대표적인 도리아식 건축물이다.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
그리스 고전 건축양식의 한 가지로, 이오니아로부터 일어나 아테네 전성시대 이래 한 세기동안을 지배하였다.
기둥에 주춧돌이 있고 곡선상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기둥머리에 그 특색이 있는데 우미(優美)·경쾌한 느낌을 준다.


코린트 양식 (Corinthian order)
알렉산더에 의해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자 그리스 미술에도 상당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데
이는 작은 도시국가의 한계에서 벗어나 아시아까지 뻗어나간 거대한 제국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리스 미술과 구분되는 이 시대의 미술을 동방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쫓아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런 헬레니즘 미술에서 나타난 화려한 장식적 특징을 코린트양식이라고 하는데
코린트라는 이름은 당시 지중해 연안의 교역으로 부유한 상업 도시명이다.


아칸서스 잎을 묶은 듯한 모양의 주두(柱頭)가 특징적인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반적으로 건축물에 화려한 장식이 많이 가미되었다.


특히 동방에 새롭게 건설되는 도시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건물은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에피다우로스의 원당(圓堂) 등의 열주(列柱)는 그 좋은 예이다.


이 양식은 화려한 장식효과를 즐기던 로마인에 계승되어 곧 복잡하게 구성된 콤포지트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건축과는 별도로 BC 7세기경 코린토스 지역에서 만들어진 동방화 양식의 도기(陶器)도 코린트양식이라고 불린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앞 석상들


박물관 앞뜰에 머리가 없는 석상들이 서 있다. 로마시대 복제품들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조각 작품과 벽화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그리스가 로마에 예속되자마자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수많은 미술 작품들을 반출하였다.
그리스의 조각 작품을 많은 로마인들이 소유하게 되면서

그리스에서 들여온 조각 작품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결과이지만 이 작품을 복사한 사람들 덕분에 그리스 원작이 보전될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미리 조각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주문자에 맞추어 두상만 따로 만들어 조립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앞 석상들


로마인들은 그리스 조각뿐 아니라 자신의 초상 조각을 개별 주문해서 자신의 집을 장식했다.
주문자들이 전신을 제작해 달라고 하면 이상적인 신체의 모습을 고를 수 있도록 몸체 조각을 미리 만들어 놓고
주문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추어 몸체에 머리를 얹어 전신 조각으로 조립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집 대문 앞에 집 주인을 알리는 문패 삼아 세워 두기도 했다.
박물관 앞에 머리 없는 석상들은 아마도 이런 용도로 사용할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몸체 조각들인 듯하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출입구


리아체 청동상.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마냐 그레치아(Magna Graecia) 국립박물관


로마인들이 그리스 조각 작품들을 반출하기 위해 배에 싣고 가다가

폭풍우나 파도로 바다 속에 잠긴 귀중한 작품들도 많았다.


로마인들이 다른 작품들과 함께 배에 싣고 가다가 바다 속에 있던 리아체 청동상(The Riace Bronzes)이다.

기원전 5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청동 전사상 2점은

1972년 이탈리아 리아체 해변에서 발굴될 때까지 2천 여 년 동안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위 왼쪽의 머리에 띠를 맨 전사상은 피디아스의 작품(BC460~450)으로,
오른쪽 투구를 쓰고 있는 전사상은 폴리클리투스의 작품(BC430)으로 추정하고 있다.


리아체 청동상은 1972년 8월 16일, 모나스테라체에서 휴가를 즐기던

이탈리아의 젊은 화학자 스테파노 마리오티니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칼라브리아 근처의 리아체 해변에서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고,
해저에서 사람의 다리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한 곳은 해변에서 300미터 떨어진 거리에 수심은 8피트였다.

리아체 청동상


리아체 청동상(이탈리아어: Bronzi di Riace)은 나체의 전사를 조각한 두 점의 유명한 그리스 전신 청동상으로,
약 기원전 460년~430년 사이에 주조된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두 청동상은 각각 "A"와 "B"로 구분한다.

원래는 방패와 검을 쥐고 있었으며, 지금은 눈동자도 사라졌고 머리숱도 한 움큼 빠졌다.
주로 사용된 것은 청동이지만 이빨은 은이고 눈의 각막은 상아와 대리석, 입술, 젖꼭지, 눈썹은 구리로 되어 있다.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기원전 550년 제물용 대리석 스핑크스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그리스로 와서 그리스 스핑크스가 되었다.
스핑크스 옆에 날개 달린 대리석 석상이 있는데 코린토스 공예 조각가의 솜씨라고 씌여 있다.


훼손되었지만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코린토스의 뛰어난 조각 작품이다.


로마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제3 전시관


아프로디테(Aphrodite) 대리석 초상. 고대극장에 있었던 기원전 2세기 원작의 복제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
여성의 성적 아름다움과 사랑의 욕망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제우스의 딸이라고도 하고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에서 흐른 정액이

바닷물과 섞여 생겨난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주로 탐스러운 가슴을 드러낸 벌거벗은 몸으로 표현된다.

로마 신화의 베누스와 동일시된다.


아프로디테(Aphrodite) 대리석 초상. 옥타비아 신전 페디먼트 장식의 일부.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대리석 초상.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The Julius Claudius Family)"의 시조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다.
카이사르 사후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권력을 쥐었고, 공화정 로마는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대리석 초상. 1세기 경 제작.


영어 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 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마음껏 휘두르는 전제군주나 독재자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인다.
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는 실은 로마의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되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가 아니었다.


네로(Nero) 흉상


네로 황제가 고린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기원후 60년 경에 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방탕한 생활로 인한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 몇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후대에는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보더라도 네로는 분명 폭군이자 암군이었으며,
여러모로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스클레피에이온에서 출토된 제우스(Zeus) 두상의 모습. 고대 로마시대 제작.


주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us) 두상. 기원후 2세기.


로마 황제 카라칼라(Caracalla)의 두상.


옷 조각상


조각상


머리와 아래 치마 부분이 잘려나간 여인 조각상.


대리석으로 마치 얇고 부드러운 천을 짜듯 섬세하기 그지없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조각상. 기원전 1세기 후반~ 기원후 1세기 초반.


오른쪽 디오니소스(Dionysus) 흉상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며 풍요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이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여신의 딸 세멜레와 제우스의 아들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고대 코린토스 투구


고대 코린토스 투구


로마시대 조각 작품들


물, 분수가 나오는 입구


로마시대 부조작품. 원형극장 벽면에 있던 것이라고.


조각 양을 메고 있는 헤르메스


올림포스 12주신에 속하는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티탄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혹은 산의 님페라고도 한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령의 신이자 여행의 신, 상업의 신, 도둑의 신이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고 두 마리 뱀이 감겨 있는 독수리 날개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다.


헤르메스는 지상에서부터 지하까지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드리옵스의 딸 페넬로페 혹은 드리옵스와 사이에서 판을 낳았고, 아프로디테와 사이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


로마시대 부조작품. 원형극장 벽면에 있던 것이라고.


Crafted corinthian stonecarvers 코린트식 조각가 공예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코린토스 고대극장 무대에는 3가지의 주제를 묘사하는 부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아마존(Amazons)은 복수형으로 아마조네스라고도 한다.
전투의 신 아레스와 님프인 하르모니아의 자손으로서, 캅카스 또는 소(小)아시아 지방에 살았다.


여자만의 부족이어서 남자가 태어나면 모두 이웃나라로 보내거나 죽여 버렸고,

씨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절에 다른 나라의 남자와 만났다고 한다.
여자는 활을 쏘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 오른쪽 유방을 도려내 버리고 키웠다고 전한다.


싸움의 신 아레스를 숭배하며 사냥과 전투를 즐겨, 트로이 전쟁에도 참가,
아마존족(族)의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었는데도

아킬레우스는 아름다운 여왕의 죽은 얼굴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가 가지고 있던 허리띠를 빼앗고자 원정을 하였고,
테세우스도 공격해 왔으므로, 그녀들이 나서서 반격하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그리스인과 아마존의 전투


헤라틀레스의 12가지 과업 중 아리만토스의 멧돼지 생포


에리만토스(Erymanthus)는 그리스 아르카디아 북부 아카이아에 있는 산이다.
에리만토스의 멧돼지(Erymanthian Boar)는 사방으로 날뛰면서

주변 논밭을 파헤치거나 곡식을 시들게 하는 등의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네 번째 노역으로 이 메돼지를 생포하기 위해 메갈리아로 가던 중

켄타우로스들이 모여 사는 폴로에 숲으로 들어가 족장인 폴로스를 방문하였다.


폴로스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포도주 항아리를 보여주는데,

오래전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켄타우로스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그에게 포도주 항아리를 열도록 하자,

물로 희석시키지 않으면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 냄새를 맡고 켄타우로스들이 몰려왔다.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로 그들을 쏘았고,

화살에 맞은 많은 켄타우로스가 죽게 된다.


켄타우로스 중 우두머리인 알레토스는 케이론의 동굴로 도망친다.
헤라클레스가 알레토스에게 쏜 화살은 그의 팔을 꿰뚫고 형제 케이론의 무릎에 꽂히게 된다.


케이론은 영생불사의 능력이 있었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대신 불치의 상처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자
후에 자신의 불멸을 프로메테우스에게 양도하고 죽게된다.


한편 켄타우로스 폴로스는 강력한 헤라클레스의 화살의 위력을 궁금해하며

만져보다 떨어뜨려 자신의 발굽에 찔리게 되어 죽게 된다.


메갈리아에 도달한 헤라클레스는 큰 소리를 질러 멧돼지를 수풀에서 몰아내고

골짜기에 두껍게 쌓인 눈 더미로 몰아서 지치게 하였다.


멧돼지를 생포하는데 성공한 헤라클레스는 멧돼지를 어깨에 매고 에우리스테우스에게로 갔다.
멧돼지를 보고 겁이 난 에우리스테우스는 항아리에 숨어서 멧돼지를 없애라 요청하는데,
이 장면은 고대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소재가 되었다.
멧돼지는 헤라클레스가 아르고스의 왕 앞에서 때려죽인 것으로 전해진다.

신들과 기간테스(Gigantes, 거인족)의 전쟁


올륌포스 신들과 기간테스(Gigantes, 거인족)의 전쟁은 마지막 신들 간의 전쟁이었다.
올륌포스 신들은 먼저 티탄족(Titanes)과 전쟁을 치른 후에 튀폰 (또는 튀포이오스)과의 대결을 치르고

마지막으로 기간테스와 전쟁을 한다.


기간테스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떨어진 핏방울을 가이아가 받아서 처녀생식으로 낳은 자식들로

바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올륌포스의 젊은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올륌포스 신들은 기간테스를 이기기 위해 인간 어머니들에게서 태어난 두 명의 신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였다. 이들 외에도 제우스의 자식들도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아테나 여신은 자신의 유명한 별칭들 중 하나인 팔라스(Pallas)라는 이름과 동일한 거인을 만나

그의 살갗을 벗겨내 방패가죽으로 사용했으며, 또

한 엥켈라도스(Enkelados)라는 거인을 시실리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영웅을 숭배함

고대 그리스 신앙생활의 독특한 영웅숭배를 묘사한 작품.


영웅숭배는 고대 그리스 종교생활의 독특한 양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영웅들이 죽은 후에 무덤이나 야외 신전에서 의식을 행하여 그들을 추앙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기리는 무덤이나 신전에는 마치 연회인 듯한 곳에서 영웅들이
카우치 (소파와 침대의 중간 기능을 하는 의자)에 누어 숭배자의 제물들을 받는 것처럼 표현된 조각물을 봉헌했다.


레카이온 대로 서쪽에 있던 바실리카 파사드를 장식했던 프리기야 노예조각.


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군(Seven Against Thebes)의 출발을 묘사한 석관.


테베(Thebes)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1년씩 번갈아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고

먼저 에테오클레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에테오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리네이케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거부하였다.
아르고스로 간 폴리네이케스는 왕의 궁전 입구에서 칼리돈 왕 오이네우스의 아들로서

살인죄를 짓고 쫓겨난 티데우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한편 두 딸을 각각 사자와 멧돼지에게 시집보내라는 신탁(神託)을 받은 아르고스 왕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람의 행색을 보고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다.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는 각각 사자 가죽과 멧돼지 가죽을 몸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딸 데이필레와 아르게이아를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위가 차지하여야 할 테베와 칼리돈의 왕권을 되찾기로 하고,

먼저 테베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아드라스토스가 총사령관이 되고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비롯하여
파르테노파이오스·카파네우스·히포메돈·암피아라오스 등 7명의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7장군에는 총사령관 아드라스토스를 빼고 이피스의 아들 에테오클로스를 넣기도 하고,
폴리네이케스 대신 아드라스토스의 형제인 메키스테우스를 넣기도 한다.


예언자 암피아라오스는 이 전쟁에서 질 것이고 전쟁에 참가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가담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리필레가 폴리네이케스로부터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결혼 예복을 뇌물로 받고 부추기는 탓에 참전하게 되었다.


아드라스토스는 군사들을 이끌고 테베를 포위한 뒤 공격에 앞서 티데우스를 협상 사절로 보냈으나,
에테오클레스가 왕위를 양보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여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티데우스는 테베에 머무는 동안 테베인들과 운동시합을 하여 모두 이겼다.
화가 난 에테오클레스는 티데우스가 돌아가는 길에 50명을 매복시켜 죽이려 하였다.
티데우스는 이들과 싸워 49명을 죽이고 하이몬의 아들 마이온만 살려 주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테네 부근 코로노스에 살고 있던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찾아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이는 오이디푸스의 지지를 받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아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는 축복 대신 저주를 내렸다.
이에 반하여 테베 측은 승리를 보장하는 예언을 들었다.


7장군의 공격이 한창 치열할 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스파르토이의 자손으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희생해야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에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성벽에서 용의 동굴로 몸을 던져 희생하였다.
이는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가 군신(軍神) 아레스의 아들인 용을 죽여 신의 저주를 산 데 대한 속죄의 의미였다.


테베의 성에는 7개의 문이 있었다.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지키는 힙시스타이 문,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가 지키는 프로이티다이 문,

파르테노파이오스는 악토르가 지키는 보라이아이 문, 카파네우스는 폴리폰테스가 지키는 에렉트라이 문,

히포메돈은 히페르비오스가 지키는 온카이다이 문, 암피아라오스는 라스테네스가 지키는 호모로이다이 문,
에테오클로스는 메가레우스가 지키는 네이스타이 문을 각각 공격하였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격투를 벌이다 모두 죽어 오이디푸스의 저주가 이루어졌다.
티데우스는 멜라니포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그를 죽였으나, 자신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티데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뜻으로 불사신이 될 수도 있었으나, 암피아라오스의 방해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자신을 끌어들인 폴리네이케스와 티데우스를 증오한 암피아라오스가
여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멜라니포스의 목을 잘라 티데우스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티데우스는 잘린 목의 골을 파먹었고 이 광경에 아테나도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밖에 파르테노파이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가 던진 돌을 맞고 죽었으며,
카파네우스는 제우스도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말을 한 벌로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죽었다.
암피아라오스는 페리클리메노스의 창에 찔리려는 순간, 제우스가 벼락으로 갈라 놓은 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7장군의 테베 공략은 실패로 끝났으며 아드라스토스만이 살아서 아르고스로 돌아갔다.
10년이 지난 뒤, 암피아라오스의 아들 알크마이온 등 7장군의 후예들인

에피고노이(단수형은 에피고넨)가 다시 테베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테베공략 7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기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테베공략 7장군 Hepta epi Thēbās》,

안티마코스의 서사시 《테바이스 Thebais》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 얼굴이 있는 모자이크 바닥.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


코린토스에 있던 로마시대의 한 빌라에서 발굴된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원의 중심에 머리를 상아와 과일로 장식한 디오니소스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둘레를 삼각형이 연이어진 기하학적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목가적 풍경의 목동 모자이크


출입구 위 천장 아래를 장식했던 모자이크


벽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


각종 신체부위 조각 작품


고대 코린토스에서는 사람이 병에 치유된 신체 부분을 점토로 만들어

치유의 신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각종 신체부위 조각 작품


남성 성기 조각.
매음업이 번성했던 환락과 타락의 도시 코린토스에 성병이 만연했던 까닭인듯.


석관. 코린토스 돌 조각가의 작품.


코린토스 인들은 석회석을 능숙하게 깎아 신전과 공공건물과 심지어 석관까지도 조각하였다.
코린토스인 돌 조각가들은 인기가 많아 에피다우로스와 델피의 중요한 신전을 건설하는데 초빙되었다.


유골과 부장품 (부장품 제작 기원전 590년~570년)


석관


석관 뚜껑



참조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6566569
http://lhg5412.tistory.com/246

https://blog.naver.com/wabool/221084208108
https://blog.naver.com/correctgame/220840360704

https://blog.naver.com/correctgame/2208412751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48037&cid=43128&categoryId=4312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97989&cid=58143&categoryId=5814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155&cid=40942&categoryId=330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87222&cid=50335&categoryId=503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074&cid=40942&categoryId=4046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167&cid=59014&categoryId=5901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5920&cid=43843&categoryId=4384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19373&cid=40942&categoryId=31538
https://namu.wiki/w/%EC%95%84%EC%9A%B0%EA%B5%AC%EC%8A%A4%ED%88%AC%EC%8A%A4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sm=top_hty&fbm=1&ie=utf8&query=%EB%8F%84%EB%A6%AC%EC%95%84%EC%8B%9D





아크로 코린트(Acros Corinth)와 베네치아 성벽


앞에 우뚝 솟은 곳이 높이 575m 아크로 코린트(Acros Corinth)다.

그리스어로 ‘아크로(Acros)’란 높은 곳,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코린토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성을 쌓고 도시를 세웠다.


아크로 코린트 사방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밑에서 올려다 본 성벽은 정말 난공불락 철옹성 같아 보인다.


아크로 코린토스는 가파른 석회암 덩어리로 되어 있어

고대 그리스에서 최상의 천연 요새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로마, 비잔틴, 베네치아, 투르크인들에게 차례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재건설되고 보완되었다.
베네치아군과 터키군이 이곳에서 공방전을 벌이면서 외벽을 경쟁적으로 증축한 것이

현재 아크로 코린토스에서 볼 수 있는 베네치아 성채이다.


제우스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일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른바 시시포스의 산이란 전설도 간직하고 있는 곳.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시시포스. 티치아노.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아크로 코린트(Acros Corinth) 성벽의 모습


아크로 코린트 (Acros Corinth)


코린트인들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고도가 높은 이 지역에 요새를 지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웠다. 


 고대시대에는 이곳에 많은 신전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신전이

북동쪽 정상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이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신전 남동쪽에 있는 피레네 샘은 코린트 유적지의 페이레네(Peirene)샘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이 샘 덕분에 아크로코린트는 오랫동안 공격에 대항할 수 있었다.


신화에 의하면 아르테미스(Artemis)가 살해당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눈물로 마술을 걸어 여자인 페이레네를 샘으로 변신시켰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Sisyphus)는

 어렸을 적부터 너무 익히 아는 이야기다.


시시포스가 산꼭대기를 향해 돌을 굴려 올리고 굴러 내려오면

다시 올리는 형벌을 받아 영원히 반복한다는 신화가 얽힌 산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베네치아 성벽에 둘러쌓인 환락의 도시가 있다.


다시 오기 힘든 여정에 꼭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일행과의 일정상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시시포스의 신화 이야기와 함께

인터넷의 도움으로 꼭대기를 답사한 분들의 자료를 빌려서 살펴본다.

세 개의 문을 지나야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베네치아 성 첫 번째 문.


코린토스 유적지에서 자동차로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면 성곽 정문 아래쪽에 조성된 주차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걸어서 100 미터쯤 올라가면 외성의 제1 문을 만난다.


입구는 산의 서쪽에 있고 문은 3개가 있는데 각각 투르크식, 프랑크식,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깎아지른 바위에 겹겹이 성벽을 쌓고 성벽과 성벽을 이어주는 성문 3개가 살짝 보인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1 / 아우톨리코스(Autolycos)의 도둑질을 잡아낸 시시포스


아우톨리코스는 전령의 신이자 도둑들의 수호신인 아버지 헤르메스로부터

절대로 들키지 않고 훔치는 기술을 물려받은 도둑질의 명수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의 소떼를 훔친 뒤 색깔과 모양을 바꾸어 더 이상 누구의 소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우톨리코스의 신출귀몰한 재주도 교활한 시시포스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알아채고 소의 발굽에 칼로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는 글자가 찍힌 소의 발굽 자국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여

아우톨리코스로 하여금 소를 훔쳐간 사실을 자백하게 만들었다.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가 도둑맞은 소들을 되찾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의 소떼를 훔친 데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딸 안티클레이아를 시시포스와 동침시켰다.


일설에는 도둑질을 빌미로 시시포스가 아우톨리코스에게 딸을 요구했다고도 한다.
그 뒤 안티클레이아는 이타카의 왕 라에르테스와 결혼하여 오디세우스를 낳았는데,

결혼할 때 이미 오디세우스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시시포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베네치아 성 두 번째 문.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 아크로 코린트 .

아크로 코린트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에 구축된 아크로폴리스이다.


그리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 위에 이곳을 지배했던 로마인들, 중세의 프랑크인들,
베네치아인들이 여러번 개축하고 증축하면서 다양한 축성 양식이 혼재된 성곽을 보여주고 있다.


아크로 코린트는 깎아지른 바위 산위에 구축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산꼭대기와 7부에서 9부 능선을 감싼 성곽 둘레가 무려 2 Km에 달한다.


1821년 그리스가 오스만 투르크와 독립전쟁을 벌일 때에도 이 요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떠한 외적도 감히 범접하기 힘들만큼 험악한 지형과 성곽의 견고함이 대단해 보인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2 / 티로와 시시포스


시시포스와 살모네우스 (Salmoneus)는 형제였지만 사이가 몹시 나쁜 원수지간이었다.
시시포스는 델포이 (Delphoi)의 신탁에 어떻게 해야 살모네우스를 죽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살모네우스의 딸 티로 (Tyro)에게서 얻은 자식이 살모네우스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이에 시시포스는 티로와 결혼하였고, 티로는 시시포스에게 두 아들을 낳아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티로는 결국 제 손으로 두 아들을 죽이게 된다.


베네치아 성 세 번째 문.


제3문을 넘으면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던 산꼭대기에 오른다.
제1문에서 제3문까지 오르는 산길은 200여 미터 정도의 험준한 등산로이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3 / 이스트미아 제전의 창설


코린토스에서는 해신 팔라이몬을 기리는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렸다.
코린토스에서 이 제전이 열리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딸 이노는 시시포스의 형제인 아타마스와 결혼하여 멜리케르테스를 낳았다.
하지만 이노는 자매인 셀레네가 제우스에게서 낳은 디오니소스를 돌봐주었다가 헤라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멜리케르테스와 함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게 된다.


이때 돌고래 한 마리가 메가라와 코린토스 인근 해안에서 멜리케르테스의 시신을 건져다 소나무에 걸어놓았는데
이를 당시 코린토스를 다스리던 시시포스가 발견하고는 조카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시시포스는 멜리케르테스에게 팔라이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그를 기리는 장례 경기로 이스트미아 제전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베네치아 성 세 번째 문.


세 개의 문을 지나야 비로소 베네치아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난공불락의 요새.


아크로 코린트는 그리스 최고의 성채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성채의 견고함이나 규모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성채는 목숨과 재산을 지키는 보루이다.
이토록 험악한 바위산에 성채를 쌓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과 절박한 심정을 현대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난공불락의 성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4 / 죽음을 피한 시시포스


코린토스의 왕이 된 시시포스는 어느 날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유괴해가는 것을 보았다.
제우스는 그녀를 오이노네 섬으로 데려가 범하여 아들 아이아코스를 낳게 하였다.


아소포스는 사라진 딸을 찾아 그리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시포스는 아소포스에게 아이기나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서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에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소포스가 요구를 들어주자 시시포스는 그에게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름다운 아이기나를 품에 안고
오이노네 섬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아소포스는 아이노네 섬으로 쳐들어갔지만 제우스는 벼락을 내리쳐서

아소포스를 다시 원래의 물줄기로 되돌려 보냈다.
이때부터 아소포스 강의 바닥에서는 시커먼 석탄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제우스는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분노하여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꾀 많은 시시포스는 오히려 타나토스를 속여 토굴에 감금해 버렸다.

그러자 지상에서는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풀어주었고,

타나토스는 다시 시시포스를 찾아가 기어코 저승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를 미리 예상한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아내 메로페에게 절대로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저승의 왕 하데스는 지상에서 그의 장례가 치러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시시포스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시시포스는 아내의 경건하지 못한 행실을 한탄하며 하데스에게 다시 지상으로 보내주면
아내를 응징하고 잘못을 바로잡은 뒤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이에 하데스는 그를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일설에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가 장례를 치르고 오라고 시시포스를 지상으로 돌려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상으로 간 시시포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오래오래 장수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요새 출입문 바닥 돌은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하다.


세계2차대전 때, 독일군이 주둔했을만큼 요충인 이곳은

비잔틴, 프랑크족,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가 차례로 지배했다.


1208년 수성을 하던 레온 스구로스는 성이 함락되려하자

말을 탄 채 산 정상에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했다.

눈 앞에 성벽이 위압적으로 펼쳐지고 그 왼편으로 멀리 평야가 바다를 향해 펼쳐진다.


어느 신전에선가 사용되었을 기둥이 초소의 대들보로 재활용되고 있다.


견고한 성채는 외적을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성곽은 외적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타락에 의해 스스로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을 쌓던 절박감과 단결력은 성곽이 보호해주는

안일과 평온에 젖어 부지불식간에 무너지기 일쑤이다.


코린토스 역시 그랬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철벽의 성채를 만들었지만,

번영이 가져다준 사치와 향락이 견고한 성채를 허물었던 것이다.
물리적 성채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의지와 덕목으로 다져진 마음의 성채인 것이다. 

200평 정도 되는 공터에서 고고학자들이 측량을 하고 있다.
저 돌담이 2000 여년 전에 쌓은 성이라고.


사진 앞쪽 돌 창문의 모양이 이슬람 모스크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 근처에는 평평한 연병장 같은 공터가 있다.
산 아래 고속도로가 평야를 가로지른다.


한때 천 여명의 여사제이자 창녀들이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마음껏 나누어주던 신전으로 가는 길은 백척간두 절벽 위의 오솔길이다.

산 정상


시시포스(Sisyphus) 신화 이야기 05 / 시시포스의 형벌

하지만 시시포스의 속임수와 약은 행실은 나중에 저승에서 커다란 벌로 돌아왔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받은 벌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렸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는 수필집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와 같은 시시포스의 노역을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를 상징하는 상황으로 묘사하였다.


쇠락하는 성벽 너머로 코린토스 지협과 두 개의 바다.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에게해(Aegean Sea)가 뚜렷이 보인다.


주변엔 무수히 많은 토기 파편들이 2500여 년의 세월동안 여기에 그대로 있어 왔다.


코린토스는 항구 도시다.  그런 탓에 외지인들의 왕래가 많았고,

물산이 집산되고 상품 교역이 빈번하여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경제적 번영은 시민들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풍요롭게 했지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은 쾌락을 추구하는 퇴폐적 문화를 확산시켰다. 

물론 험한 바다를 누비는 뱃사람들의 거친 욕망을 분출시키는 해방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코린토스는 오랜 기간 항해하는 동안 억제되었던 성적 욕망을

마음껏 풀 수 있는 환락의 장소가 되었던 것 같다.


해발 575 미터의 아크로 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일천여 명에 가까운 여사제이자 창녀들이 거주했었다고 하니
코린토스의 퇴폐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 듯싶다.

남아 있는 성벽


아크로 코린트(Acros Corinth) 위성 사진


참조 ; http://quintessential.tistory.com/366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wabool/221088240695

http://lhg5412.tistory.com/24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97899&cid=58143&categoryId=58143




코린토스 아폴론 신전과 아고라(Agora)의 상점가 유적.


고대 아고라(Agora) 상점. 


아고라(agora)란 ‘시장, 집회, 사교’라는 뜻이다.

통상 공공건물과 열주랑(列柱廊)으로 둘러싸이고

거기에는 프레우테리온과 프리타네이온 외에 신전, 시장, 스토어 등도 포함된다.


정치, 경제, 종교, 사교 등 시민 공공생활의 중심지이며 대부분의 경우 로마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등의 고대 아고라(agora) 유적에서 그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고대 아고라 상점


상점이 있었던 자리. 고대 코린토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으로 복원을 해 놓았다.
아고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상점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코린토스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듯.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Lechaion) 대로.


아고라에서 코린토스 항구까지 쭉 뻗어 난 큰 길 레카이온(Lechaion) 거리 양편을 가득 채웠을 회랑의 빈자리도 쓸쓸하다. 
상점을 지나 이어지는 코린토스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 아고라 터

레카이온 대로와 아크로 코린트
아우구스트 시대까지 비포장이었던 레카이온 대로는 베스파시안 시대에 도로포장이 되어 보행자 전용으로 바뀌었다.

2천 여 전에 조성된 대리석 바닥. 아크로 코린트가 바로 보인다.


대로 양쪽에 빗물이 흘러갈 수 있게 배수로를 만들고 상점들도 만들어져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온 상인들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고대에는 이 길이 바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의 입구에는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라이아가 있었다.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도금한 헬리오스와 파에톤의 청동전차상이 아치 위에 놓여져 있었다.


길게 뻗은 도로 또 아고라 광장과 더불어 그 당시 상가와 신전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으리라.
멀리 계단 중간에서 보면 바다까지 연결된 길이 반듯하게 되어 있어 바다로 갈수록 길이 넓어졌다고.


고대 코린토스 유적에서 길 만은 제자리에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굳건하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코린토스의 서항인 레카이온 항에 이르고 거기에서부터 로마로 가는 뱃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양 옆에 상점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지붕의 건물이 길 가로 늘어서 있었다.


오데이온(Odeion)


오데이온(Odeion)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당이나 대극장으로 지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당시 65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그 시절은 대단한 문화의 요람이었으리라.


그리고 번성된 도시로서 각 상점과 위락 시설 또한 대단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뒷편으로 아크로 코린트 산이 바라다 보인다.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 대로.
코린토스의 유적지는 황량한 폐허가 되어 있다. 화려하고 흥청거리던 거리를 상상하기 어렵다.


중앙광장 아고라


현재 폐허가 된 유적지. 고린도의 지하엔 고대에 형성된 도시 유적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529년 대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 있다.
시지프스 왕국은 그 자하도시보다 한층 더 아래에 있다고 한다.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1년 반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


베마란 1) 고대의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2)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아프시스에 설치된 높은 마루.
아프시스 벽 옆을 따라 사교좌(司敎座)를 중심으로 해서 성직자의 좌석을 배치하고, 프페스비테륨으로 한다.


3) 그리스 정교의 본전 프레스비테륨으로서의 아프시스 앞에 주제단을 배치하고,

그 전면에 분전장벽을 세워서 본당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한다.


지성소(至聖所)라고도 하고,그 마루는 대개 본당보다 높이 만들어졌다.
4) 유대교 교회당 내의 율법 낭독용 교단을 뜻한다.


바울이 재판받았던 곳.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아
코린토스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했던 베마.
이곳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1년 6개월을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이 위에서 사도 바울이 기둥에 묶이고 갈리오 총독이 심문했던 곳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에 와서 전도를 하던 중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당했다.
고발을 받은 갈리오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울에 대한 고발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한 것이니

유대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연설했던 곳이 베마이다.


베마는 그리스어로 난간이라는 뜻. 그 베마가 코린토스의 아고라 한가운데에 있다.
사도 바울이 서기 51년 코린토스를 처음 방문했고, 6년 후 다시 찾았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잡혀서 심문을 받을 때 묶여 있었다고 하는 바위.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베마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사도 바울이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받았던 곳.


사도행전바울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리오가 아카이야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작당을 하여 바울로를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을 충동하여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하고 고발하였다.


바울로가 답변하려 하자 갈리오는 유다인들에게

"유다인 여러분, 만일 이 사건이 무슨 범법이나 악한 범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신들의 고발을 들어 주겠소.

그러나 이것은 말과 명칭과 당신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사건을 처리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고 싶지 않소"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내자 드들은 일제히 회당장 소스테네를 붙들어가가 법정 앞에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도무지 참견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8장 12~17절)


"이 일이 사람들에게 더 퍼져 나가서는 안 되겠으니 다시는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경고해 둡시다."

<공동번역 고린도후서 4장 17절>


고대 아고라 상점터


사치와 향락에 물든 코린토스 유적지


16개의 상점이 줄지어져 있었던 레카이온 대로의 서쪽 상점터.
인구 75,000명이 거주했던 상업도시였다.


프로필라이아 입구 서쪽에는 재판장으로 사용된 거대한 바실리카가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는 10세기부터 그 중요성이 줄어들다가 1858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페이레네(Peirene) 샘


레카이온 대로의 프로필라이아 동쪽, 아고라 중앙에 로마의 상점가와 페이레네(Peirene) 샘이 있다.
중간에 기둥과 상부 가로대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의 하부에 페이레네 샘이 있다.
벨레로폰테스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던 천마 페가수스(Pegasus)를 만났다고 한다


벨레로폰테스는 천마를 타고 키마이라를 퇴치한다.
이오바테스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임무를 완수한 벨레로폰테스를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벨레로폰테스를 죽여 달라던 사위 프로이토스의 청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벨레로폰테스를 자신의 사위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다.


고향 코린토스에서 추방된 벨레로폰테스는 리키아에서 자신의 무용(武勇)을 과시하고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이제 그는 소아시아의 강자 리키아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위기는 고난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승승장구할 때 찾아온다.
성공 뒤에 오는 오만이 파멸의 위기를 몰아오는 법이다.


왕위 계승자 벨레로폰테스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페가수스의 탁월한 역량을 끝까지 시험하고 싶었다.
그는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몰아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했다.


이에 격노한 제우스는 등에를 보내 페가수스를 찌르게 하였고,
놀라 날뛰는 페가수스에서 떨어진 벨레로폰테스는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가 하늘에서 추락한 것은 곧 잘 나가던 인생의 추락을 의미했다.
추한 모습이 된 그는 절망하여 들판을 방황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벨레로폰테스는 날개를 단 이카루스(Icarus)가 하늘 높이 태양까지 이르려 무한 비상을 시도하다
신의 노여움을 받아 추락하여 죽었던 그 교훈을 잊었던 것이다.


코린토스가 낳은 영웅 벨레로폰테스는 신의 성역에 무모하게 도전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들은 이렇게 늘 인간의 오만(hybris)를 심판했다.
코린토스에 와서 벨레로폰테스의 삶을 되새겨 보며 인생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지혜를 얻는다.


페이레네(Peirene) 샘


아고라 밑에서 끌어온 물은 네 개의 거대한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영웅 벨레로폰테스가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했던 페가수스를 붙잡은 곳이 페이레네 샘이다.


페이레네(Peirene)


페이레네는 강의 신 아소포스(Asopos)를 아버지로 둔 님프이다.

스파르타의 왕 오이발로스(Oebalus)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구전과 전승에서 페이레네의 어머니에 대해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녀가 아소포스가 라돈(Ladon) 왕의 딸 메토페(Metope)와

결혼하여 낳은 열두 명의 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페이레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대 도시 코린토스에 있는 '페이레네(Pirene) 샘'에

이름을 준 명조(名祖)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인들은 이곳에 영감의 원천인 뮤즈 여신이 머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샘물을 마시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또한 페이레네 샘에 가면 날개달린 천마(天馬) 페가수스(Pegasus)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 2세기경?)의 ≪그리스 이야기(Description of Greece)≫,
6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활동한 지리학자 스테파누스(Stephanus of Byzantium, ?~?)의

기록에 관련 신화가 다양하게 남아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이레네는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레케스(Leches)와

켕크리아스(Cenchrias)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켕크리아스가 죽자 아들을 잃은 슬픔에 휩싸인 페이레네는 너무 울다 그만 샘물이 되어 버렸다.

고대 코린토스에는 레케스와 켕크리아스의 이름을 딴 항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페이레네 샘은 강의 신 아소포스가 딸 아이기나(Aigina)를 납치한 자의 이름을 가르쳐준 대가로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Sisyphus)에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수로의 흔적. 수량이 풍부하여 우물은 근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 옆 상점터.


레카이온 대로 양쪽으로 상점과 신전, 목욕탕 등 공공건물들이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아고라 상점터


현재 남아있는 코린토스 유적지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들이 파괴했던 고대 그리스 유적지 위에
자신들이 새롭게 재건한 유적이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큰 전랑이 있었던 건물 중의 한 곳.



71개의 도리아식 열주(列柱).


열주랑 뒤편에는 우물과 와인저장소, 식당과 상점들이 있었고, 주랑의 한복판에 기원후 1세기
켄크레아이 항구와 이어지는 긴 포장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리아식 열주랑(列柱廊)


안쪽에는 길이 164m나 되는 37개의 이오니아식 열주로 이루어진 열주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무너졌다.
원형을 보존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듯.


열주랑(列柱廊)과 시시포스(Sisyphus)의 영원한 형벌 장소 아크로 코린토스


시시포스(Sisyph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코린토스 시의 창건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에피라였다.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벌로 나중에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시시포스는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살모네우스, 아타마스, 크레테우스와 형제이다.


시시포스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한 명인 메로페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 오르니티온, 테르산드로스, 할모스 등 네 아들을 낳았다.


글라우코스는 니소스의 딸 에우리노메와 결혼하여 영웅 벨레로폰을 낳았다.
하지만 벨레로폰은 에우리노메가 해신 포세이돈과 정을 통해서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라에르테스와 안티클레이아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실은 시시포스와 안티클레이아 사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사우스 스토아(South Stoa)를 지나 박물관 후문으로 가다보면 서 있는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列柱).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에게 바쳐진 신전.


처음에는 여섯 개의 도리아식 열주를 가진 형태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사망 이후 이 신전은 3~4미터의 단위에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지고, 가로 12개 세로 6개의 기둥으로 둘러쌓인 형태로 바뀌었다.
페디먼트에는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의 장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만 남아서 코린토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의 경우 코린트인이 창안해낸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머리 기둥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둥의 일부와 기둥이 받친 가로대의 일부일 뿐이지만,
아칸서스 잎을 부조한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풍요를 넘어 사치스런 도시였던 코린트에서 여성미가 풍기는 코린트 양식이 창안된 것도 자연스런 결과인 듯싶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아칸서스 잎 문양으로 화려하게 부조되어 있다.



옥타비아 신전을 배경으로 기념 인증샷


코린토스 박물관 (후문).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 앞에 있다.



코린토스 유적 / Corinth Remains / Apollo Temple / Acanthus



참고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6566569

https://blog.naver.com/wabool/22108824069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3288&cid=40942&categoryId=3153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0845&cid=42635&categoryId=42635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코린트 유적지


고대 그리스에서 상업과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곳.
BC 146년 로마군이 침입해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을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가 BC 44년에 재건함


코린토스 유적지 조감도


유물과 역사를 연구해서 추정한 당시의 조감도를 찍은 사진.
아폴론 신전 터 바로 옆이 고대 아고라 광장.
이곳에는 역시 오데온, 스토아를 비롯해 화려했던 고대 코린토스 시가지의 각종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폴론 신전과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의 샘


글라우케(Glauc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 왕국 크레온 왕의 공주로 크레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아손은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이에 메데이아는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글라우케는 메데이아가 결혼 선물로 보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불길에 휩싸여 죽는다.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하고 동생까지 끔찍하게 죽인 메데이아,
그녀는 이아손과 함께 이올코스로 와서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을 회춘시켜주고,
아이손의 왕위를 찬탈한 아이손의 의붓형 펠리아스에게 처참하게 복수를 한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이올코스에서 행한 잔인한 복수 때문에 고향에서 쫒겨나 코린토스로 망명한다.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환대 속에서 자식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가진 이방인 메데이아를 꺼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들이 없는 크레온 왕은 이아손을 자신의 딸인 글라우케와 결혼시켜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왕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는 메데이아에게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공주를 원해서가 아니라
이방인 마녀인 그녀를 구하고 자식들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는 형제자매를 만들어주어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고 변명을 한다.


한편 메데이아가 공주에게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오리라고 예감하는 크레온 왕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계획에 장애물이 될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이아손은 글라우케와의 결혼에 마음이 들떠 메데이아와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다.


이아손을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처절하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크레온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하루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크레온 왕으로부터 하루의 기한을 얻은 메데이아는 그 하루 동안에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크레온 왕과 글라우케 공주 그리고 남편 이아손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메데이아는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 선물로 할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우스가 자손들에게 준 값진 장신구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할 수 있는” 그러나 독이 묻은 웨딩드레스를 보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글라우케는 신랑의 전처인 메데이아가 보낸 선물을 보고 기뻐하며 웨딩드레스를 입어본다.
옷을 입는 순간, 글라우케는 옷에 묻은 독이 몸에 퍼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는다.
결국 글라우케는 불길에 싸여 숨을 거두고, 딸을 구하고자 한 크레온도 불에 타 죽는다.


나중에 코린토스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글라우케는 연기를 견디다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로 그 우물은 글라우케 샘이라고 불리운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글라우케의 샘
언덕의 송수관을 통해 글라우케의 샘에 있는 4개의 저수지가 채워진다고 한다.


글라우케를 살해한 메데이아의 뒷이야기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새 신부 글라우케를 살해하고 난 후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에게 죽음보다도 더 큰 괴로움을 주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급기야 이아손에게 낳아준 자식들, 메르메로스와 페레스를 죽인다.
그리고는 태양신 헬리오스로부터 날개달린 용들이 끄는 수레를 얻어 타고 아테네로 도망간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는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 메도스를 낳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모른 채 자라 어른이 된 테세우스가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온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의 음모로 테세우스가 위험에 빠진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자기 아들임을 알게 된다.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를 구해내고는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메데이아는 다시 조국 콜키스로 돌아가는데,
아버지 아이에테스가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을 알고는 아버지를 다시 왕위에 올린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지


고대 코린토스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로마의 파괴와 약탈 때문이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군을 막기 위해 아카이아 동맹군(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시국가들의 동맹)을
형성하지만 아카이아 동맹군은 로마에 대패하고 만다.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는 코린토스를 약탈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기원전 44년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병사들이 살아 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코린토스 재건을 시작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코린토스는 재건설되어 옛날의 부귀와 영화를 되찾았다.
사도 바울이 왔을 때 코린토스는 로마 속주 중 가장 발달하고 부유한 곳이었다.


아폴론 신전과 코린토스 상점터 유적


옛 코린토스 유적지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이것도 로마시대에 파괴된 것을 재건한 유물이다.
이 지역은 코린트가 번성할 당시 정치적, 종교적, 상업 중심지역.


코린트는 기원전 8세기에 문명이 시작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에서 중요한 도시국가중의 하나로 발전.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파괴.  이후에 로마에 의해 새로운 부흥시기를 맞는다.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코린트 유적지 전경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방문한 알렉산더. 세바스티아노 리치.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세기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벨레로폰테스의 성공과 몰락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히브리스를 경계하도록 해주었다면,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허영과 쾌락에 흥청거리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검소한 삶을 통해 절제의 미덕을 가르쳐주었다.
절제 곧 소프로쉬네(sophrosyne) 또한 그리스 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좌표가 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에 기인 철학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왔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디오게네스에게 ‘그대는 짐이 두렵지 않은가’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선한 자입니까? 아니면 악한 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물론 선한 자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러면 누가 선한 자를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디오게네스의 침착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햇빛’과 관련된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담대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에게
‘나에게 원하는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며 그리스 전역을 굴복시킨 왕의 위세를 과시했을 때 나타났다.


디오게네스는 단지 ‘부디 햇볕을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응대했던 것이다.
순간 불쾌해진 알렉산드로스가 칼을 뽑아 그를 죽이려하다가 멈추고,
이내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코린토스 사람은 아니었다. 또 일찍부터 철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터키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시노페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환전상이었는데, 통화를 조악하게 개조하는 바람에 투옥되어

감옥에서 죽고 디오게네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튼 디오게네스가 위폐 주조라는 황당한 사건을 저지르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그는 세상에서 큰 명성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다.
신탁은 ‘나라 안에서 적용하고 있는 것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의 의미는 통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혁신하라는 뜻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화폐의 개주(改鑄)로 잘못 해석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멀리 아테네로 망명했고, 이런 과거는 종종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때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부정한 행위를 했던 자신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디오게네스가 극도로 청빈한 철학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조 화폐 주조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그가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아테네로 망명하여 금욕주의 철학인 키니코스학파(Cynics, 견유 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BC 445?~BC 365?)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견유(犬儒)학파라는 명칭에서 혹 ‘개 같은 삶’과 무슨 연관이 있나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실 키니코스학파라는 명칭은 안티스테네스가 자주 들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체육장의 이름
키노사르게스(kynosarges)에서 유래되었다. 키노사르게스는 '흰 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를 만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지혜 추구 정신과
스승 안티스테네스의 지독한 절제의 정신을 배워 무욕(無慾)과 자족(自足)의 철학을 실천하는 철학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조국을 빼앗겨 나라도 없고 집도 없는 자. 일상의 양식을 동냥하고 방황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디오게네스는 어린애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바랑에서 컵을 꺼내 내던졌고,
어린애가 빵의 패인 곳에 수프를 넣어 먹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밥그릇도 내던졌다.
그가 통나무로 만든 술통에서 살았던 것도 간소한 삶을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였다.


디오게네스가 아테네를 거쳐 환락이 넘치는 코린토스까지 간 것도
끝없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중들의 그릇된 삶에 경종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니며, ‘나는 인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노숙자와 같은 자신의 삶을 탐욕에 찌든 코린토스 시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육체적 안락과 쾌락을 멀리하고 덕을 쌓을 것을 권면했던 것이다.


그는 “경주를 할 때에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거나 발로 차거나 해서 사람들은 서로 겨루려는데,
훌륭하고 선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 한 사람 서로 겨루려고 하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쾌락과 탐욕의 사회 문화를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사회 풍조로 바꾸려 애썼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받았던 신탁의 본래의 참뜻인 나라에 통용되는 사회문화를 바꾸는 소명을 실천했던 셈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후세에까지 명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이 완전한 결실은 거두지 못했지만, 늘 사회의 목탁 역할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싶다.
디오게네스가 죽은 후 코린토스 시민들이 그를 찬양하여 청동상을 세우고 시구를 새겼던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청동도 세월이 지나면 늙는 것.
하지만 그대의 영예는 디오게네스여, 영원히 썩지 않으리.
그대만이 홀로 죽어야 할 자들에게 자족(自足)하는 방법과,
가장 쉬운 삶이 길을 가르쳤으므로.


디오게네스는 지협(地峽) 이스트모스로 통하는 성문 옆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또 지금의 코린토스에서 디오게네스가 거닐던 체육장인 크라네이온(Craneion)이 어디쯤인지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검약과 절제의 삶은 사치와 방탕에 빠져 갖가지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욕망의 제동장치가 되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폴론 신전 유적지 전경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폴론 신전


아크로 코린토스(Acros Corinth)는 제우스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일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른바

시시포스의 언덕이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아폴론 신전


코린토스가 전성기였던 기원전 6세기에 다른 신전이 있던 자리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가로 53m 세로 21m의 대좌를 38개의 기둥이 감싸는 모습이었고
내부에는 16개의 기둥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둥 7개만 남아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은 중간중간 잘라져 만들었는데
여기 아폴론 신전은 한덩어리의 돌로 만들어진 도리아식 기둥이 특징이다.
도리아식은 남성미가 풍기며 간결하고 장중하다.


고대 코린토스 유적 중 유일하게 그리스 유적이며,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이라고 한다.
돌 하나로 만들어진 기둥으로 신전을 만든 것이 다른 신전과 구별되는 특징.

아폴론 신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신전을 둘러싸는 38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내부의 16개 기둥으로 이루어진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폴론 신전


신전의 내부는 분리된 2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은 화려한 건축적 요소들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 역시 신전으로 사용했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아폴론 신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코린토스에 남겨진 유적 / Ruins/Sanctuary of Apollo / Lechaion road / Bema


참고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wabool/221088240695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555344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97666&cid=58143&categoryId=58143






코린토스 (Korinthos)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고,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고대의 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도시 국가 중 하나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좁다란 지협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 활동이 수월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코린토스는 주요한 도기 수출 국가였으며,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동물, 전사, 식물 모티프의 프리즈로 장식된 코린토스의 특징적인 작은 플라스크가 발견되었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는 아크로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용되어 있던 수많은 매춘부들로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이다.


코린토스의 두 번째 참주인 페리안드로스 치세 때인 기원전 7세기에는 대단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고전 건축 양식 중 세 번째인 매우 장식적인 코린트 양식이 발전했다.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통치하던 때인 기원전 146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파괴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다시 재건하여 이 도시에는 남부 그리스의 정부가 위치하게 되었다.


신약 성서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성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서기 51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6년 후 도시를 다시 찾았고, 두 편의 서간을 썼다.

바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로,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舊)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토스의 건포도라는 뜻)  · 올리브유 · 견직물 ·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위성 사진


코린토스 만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지도


이오니아해(Ionian Sea)와 에게해(Aegean Sea) 사이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코린토스가 있다.
아가야(Achaia)는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의 지명으로 수도는 고린토스. 고린도 교회가 있었다.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의 한 속령으로 고대 그리스 마게도냐 남단을 일컫는다(롬 15:26; 살전 1:7).
원래는 펠로폰네소스 북쪽의 비옥한 지역을 말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마게도냐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아가야라고 불렀다.


BC 27년에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아가야를 분할하여 다시 북쪽을 마게도냐로, 남쪽을 아가야로 명칭했다.
바울 당시 아가야 총독은 갈리오, 수도는 고린토스였다(행 18:12; 고후 1:1).


마케도니아(Macedonia)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이다.

발칸 반도의 그리스 북쪽에 위치했던 왕국이다.


마케도니아는 BC 7세기경 페르디카스 1세가 세웠으며,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전성기를 맞아 그 세력이 인도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는 분열하였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성경에서도 마케도니아는 바울이 선교했던 유럽의 첫 지역.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네압볼리,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등을 방문했다.

(행 16:12; 17:1; 고전 16:5; 고후 7:5; 빌 4:15; 살전 4:10; 딤전 1:3).


마케도니아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헌금했고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바울을 유일하게 후원하였다.(롬 15:26; 고후 8:1-5; 빌 4:15)


코린토스(Corinth)는 그리스의 항구 도시로 상업과 무역이 번창한 상업도시이자

동서문화와 종교의 혼잡을 이루었던 도시이다.


BC 8세기경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도시였으나 BC 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BC 46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며(BC 27)

상업, 무역, 정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운동경기가 수시로 열렸다.
코린토스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도시 중앙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고

북쪽에는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있었다.


또 코린토스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신전이 유명했다.

이곳에는 1,000명 정도의 신전 매춘부들이 있어 도시 전체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코린토스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가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도시의 타락은 코린토스 교회 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전 5:1).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지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들러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1).
바울은 이곳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


바울 이후 교회 역사에서 고린도는 중요성을 잃어갔으며,

1458년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운하(Corinth Canal)는 코린토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8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위성 사진으로 본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가 일찍부터 그리스 세계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동시에 두 만의 바다를 이어주는 지협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라도 한쪽 바다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일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 지협에 운하를 파려는 수많은 계획과 시도가 있었다.


고대 코린토스와 코린토스 다리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이미 기원전 6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이곳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못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골족의 로마 침입으로 중단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계속 코린토스에 남아 살게 되었다.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코린토스 운하 전경


운하의 양쪽 끝에는 조그만 포구가 있고 운하의 양쪽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수면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배가지나갈 때는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다리가 가라앉고 그 위를 배가 지나는 광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코린토스 운하 (Corinth Canal)


길이 6.3km. 바닥 너비 21m. 표면 너비 25m. 깊이 8m. 프랑스 자본으로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鐵道橋)는 폐쇄하였다.
수위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객선이 오가는 코린토스 운하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촬영


2006. 03.11 코린토스 운하 방문 기념 인증샷


멀리 보이는 쪽이 에게해(Aegean Sea), 안쪽이 이오니아해(Ionian Sea)이다.
운하를 가로지르는 80m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난간을 붙들고 있는 손에서 땀이 솟고 발끗이 찌릿해 온다.
다리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물빛을 쳐다보고 있으면 고소공포증이 밀려와 두렵기도 하다.


코린토스 운하 다리


코린토스 시내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고대 코린토스



도시 사이에 뚫린 코린트 운하 / Corinth Canal / Peloponneso s / Railroad bridge



고대 코린토스 (Ancient Corinth) 조감도 입체 영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584&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070&cid=40942&categoryId=3408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075&cid=40942&categoryId=32191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6%B0%ED%86%A0%EC%8A%A4_%EC%9A%B4%ED%95%98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고대 그리스의 공공건축을 모방한 장려한 건물로 세계 10대 박물관 중 하나이다.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는 그리스 조각·회화·공예를 수장하고 있다.


수집품의 중심은 에게문명 후기의 미케네의 출토품, 아르카이크기에서 고전기에 걸친 조상(彫像)·묘비·도기 등이며,
《아트레우스의 비보(祕寶)》 《바페이오의 황금배(黃金杯)》 《알테미시온의 포세이돈》

《안티쿠테라의 청년》 《헤게소의 묘비》 등은 특히 유명하다.


고고학에 관한 한 규모와 소장된 유물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며
그중에서도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미술품들이 많다.
박물관 내에 아름다운 카페와 조각 공원 등이 있어 편하게 즐기면서 관람할 수 있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전경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쿠로스(Kouros) 남자 입상.

대체로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팔은 자연스럽게 내린 것이 많다. 기원전 7세기부터 나타남.


코레(KORE)라고 부리우는 여자입상과 남자입상.
코레는 대체로 옷을 입고 있고, 왼팔은 내려서 옷소매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소가 아름다운 스핑크스. 기원전 570


전형적인 쿠로스


레슬링하는 조각. 대략 기원전 510년


지팡이를 짚고 손에 든 메뚜기를 개에게 주려는 모습이 섬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이라고 한다. 기원전 460.


뒷모습도 자연스럽고 완벽하다.


얼굴 부분


석관의 장식품. 헤르메스가 앞에서 인도하고 님프가 위로하며 가는 모습.


석관 부조 장식품


말과 어린 기사
고삐를 쥐고 채찍을 휘두르며 급하게 말을 달려가는 모습이 너무 잘 나타난다. 대략 기원전 140


 어린 소년의 표정에서 정말 빨리 가야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보물들


보물들


아프로디테의 탄생
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원본을 기원후 2세기에 로마에서 복사한 것이다.


아프로디테 얼굴 부분


인증샷


기원전 2800-2300년 작품


기원전 2800-2300년 작품


기원전 2800-2300년 작품

청동브론즈에 눈에는 돌이 박혀 있다.


기원전 2800-2300년.

옛날 것이 형태가 단순해도 보기가 좋아서 오히려 현대디자인 같다.


기원전 660-670 제작.


기원전 660-670 제작.


1세기경 유리병


1세기경 유리 제품


기원전 16세기.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세기.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세기.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세기.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세기.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세~15세기초. 미케네 문명.


기원전 3200~2800년 제작



기원전 3200~2800년


프라이팬의 뒷모습. 기원전 2800~2300년 제작. 문양이 놀랍게 정교하고 섬세하다.



기원전 2800~2300년 제작.


기원전 17~16세기. 미케네문명.


기원전 17~16세기. 미케네문명.


기원전 5300~4500년.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비너스.


기원전 4500~3300년. 신석기시대.


하드리안


로마황제 안토니우스(Antinoos. AD 130~138)


고대 아르테미스. 기원전 1세기 제작.

유방이 28개. 팔에는 사자. 앞에는 피닉스. 옆구리에 벌 모양이 있음.


고대 아르테미스에 대한 설명.



[그리스 여행-아테네]고고학 박물관 문명의 보물/Archaeological Museum/Cyclades/Gold mask




참조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ungjoot&logNo=221376520037&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11209&cid=42664&categoryId=42664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9400-d735521-Reviews-Acropolis_Museum-Athens_Attica.html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Acropolis Museum)


아크로폴리스 박물관(Acropolis Museum)은 그리스 아테네의 박물관으로,

아크로폴리스의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소장 · 전시하고 있는 고고학 박물관이다.


현재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새로 지어진 것이므로,

구분을 위해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역사적 기념물이라 할 만한, 아테네의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1944년생)가 그 지역의 건축가인

ARSY의 미카엘 포티아디스와 함께 설계한 건물이다.


이 박물관에는 아르카이크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 도시의 고전 보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파르테논으로부터 고작 244미터 떨어진, 이 도시의 고대 신성한 바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디자인이 보여주는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빛이다.
빛에 민감한 갤러리 공간과, 넓게 열린 공간이 많은 투명한 섹션들은, 귀중한 전시품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추미의 미니멀리스트적인 사다리꼴 건물 안에서 구세계와 신세계를 연결해 주고 있다.


건축가들은 디자인의 단순성과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고수하여,

건물이 웅장한 역사적 배경과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것은 물론, 아테네의 현대적인 면모와도 잘 어울리게 하였다.


7세기의 고고학적 유적터에 유리로 감싸인 커다란 갤러리가 늘씬한 기둥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의 최상층은 파르테논 마블을 맞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유리 홀로,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이 이 조각품을 소유하고 있어 마찰을 빚고 있다.

홀 전체가 파르테논 신전을 거울처럼 비추도록 기울어져 있어, 파르테논 마블이 돌아온다면
옛날 신전에 걸려 있던 때와 똑같은 축으로 걸릴 수 있을 것이고,

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이 역사적인 건축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테네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


신타그마 광장 위의 국회의사당과 무명 용사의 묘.
근위대가 군악대와 함께 행진하는 근위병 교체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테네 국회의사당 무명 용사의 묘 근위병 교대식


무명용사의 비
전사한 그리스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 건설하기 시작해 1932년 완공한 기념비


2006. 3. 12 무명용사의 비 방문기념 인증샷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 KOPEA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페리클레스(BC495~429)


2006. 3. 12 근위병과 함께 기념샷


2006. 3. 12.   비둘기와 함께 방문기념 인증샷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 성당 


아테네 대성당인 메갈리 미트로폴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12세기에 길이 약 7.5m, 폭 12m의 규모로 지어진 작은 성당으로 '미트로폴리'라고도 불리운다.


흰 대리석 건물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변색이 되어 황색을 띠고 있다.
성당의 원래 이름인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성 아포스톨루 (Apostles) 교회 (성 사도교회)


아테네 고대 아고라  언덕에 위치한 성 아포스톨루 교회(성 사도교회)이다.
바울이 아고라 전도를 기념하여 1000년 경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교회로

실내에는 17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카프니카레아 성당


아테네 에르무(Ermu)거리에  위치한 11세기에 건축된 성당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그리스 정교회이다.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295m의 언덕을 말한다.
아테네시에서 가장 높으 언덕으로 아테네의 최고봉으로 불리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운행되는데 정상에는 하얀색의 작은 교회인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가 있다.

리카비토스의 민머리에서 보는 아테네의 전경은 훌륭하다.


아테네는 벌거벗은 산에 둘러싸여있다. 큰 강이 없는 아테네는 늘 물 부족에 시달린다.
그 이유는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어느날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달겠다며 다투었다.


결국 이들은 시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준 신의 이름을 도시에 달겠다고 제안했다.

포세이돈이 준 선물은 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삼지창으로 바위를 내리쳐, 물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물은 소금물이었다.

아테네는 방패로 땅을 내리쳐 올리브나무가 자라나게 하였다.


올리브 기름과 올리브 열매를 시민들에게 준 것이다.
이를 본 시민들은 아테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아테네에 ‘물 부족’이라는 저주를 내렸다.


이토록 물이 부족한 아테네에 산에까지 물이 안 올라가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리카베투스가 민둥산인 이유는 신화에서 나온 바로 그 이유 때문일까?


하지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물을 품기에 좋다.
그 덕분에, 리카베투스는 완전히 헐벗은 산은 면하게 되었다.


리카베투스는 ‘늑대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산기슭에 우거진 소나무숲에 늑대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카비토스 언덕 (Lycabettus Hill)


아테네는 막 태어난 에리크토니오스를 바구니에 담아

케크롭스의 딸들에게 맡기며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 산을 가지러 팔레네로 갔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한 케크롭스의 딸들이 바구니를 열어본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아테네는 화를 내며 들고오던 산을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바로 리카베투스가 되었다고 한다.


리카베투스의 맨숭맨숭한 정상에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라는 교회가 있는데,

이곳까지 오르면 아테네의 전망이 기다리고 있다.
민둥산이기에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리시크라테스 기념비


아크로폴리스 동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기념비. 높이 약 7m, 너비 2.75m.
BC 334년에 거행된 디오니소스제(祭)의 경기에서

리시크라테스의 합창단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정사각형의 높은 기단 위에 6개의 코린트양식 반주(半柱)를 지닌 원통형 건물을 세우고,

그 위에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정상에는 우승자가 받은 삼각배(三脚杯)를 올려놓기 위한 대(臺)가 있다.
전체 높이 약 7m, 너비 2.75m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전기 말기의 우아한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건축물이다.

아테네 국립극장


아테네 국립도서관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 아카데미 (Athens academy)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 기원전 385년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아테네 아카데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있었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주로 웅변과 화술(話術), 논리를 많이 가르쳤다.


아테네 아카데미가 세워지기 이전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스파르타식 교육 체계와 아테네식 교육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국가 그리스의 대표적이었던 두 폴리스(polis)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성격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7세 이상 어린이들을 한 곳의 기숙학교에 모아

20세까지 강력한 군사훈련 위주로 교육을 시켰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의 어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반면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아테네는 주로 대화 방법과

논리 등 상대를 설득하는 요령을 깨치는 교육이 성행했다.


또 스파르타와 달리 문화 지향적이었던 폴리스의 성격에 따라

음악과 미술, 체육 교육도 활발한 편이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발달했던 교육 형태는 수사학교(修辭學校)라는 것이다.

수사학교란 웅변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최초의 수사학교는 기원전 392년 그리스의 저명한 변론가

이소크라테스(Isokrates, BC 436~BC 338)가 세운 변론술학교였다.


수사학교는 기초적인 문법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와 달리

비교적 나이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아테네 아카데미도 기원전 385년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Akademia)에 세워진 수사학교였다.


당시 학교 대부분은 당대의 철학자들이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 설립했다.
아테네 아카데미의 설립자는 형이상학의 수립자로 일컬어지는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이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플라톤이 세운 학교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플라톤이 숨진 후 스페우시포스(BC 395?~BC 339), 크세노크라테스(BC 396?~BC 314?) 등이 아카데미아를 이어 받았다.


기원전 270년에는 에포케(epokhe, 판단 중지)의 사상을 처음으로 주창한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 BC 315~BC 240?)가 학교를 계승했다.


이 시기 아카데미아에서 배출한 폴레몬(Polemon, BC 314~ BC 269),

크라테스(Crates, BC 269~ BC 266) 등의 학자들이 아카데미아 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아카데미’라는 단어로 변형되면서 고대와 중세에 교육기관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특히 13~14세기 이탈리아에서 교육기관으로서 아카데미가 새로 확립됐고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문주의자들의 모임을 아카데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라톤과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플라톤 (Plato, BC 428/427~BC 348/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혹은 eidos=형상)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不滅)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doxa)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써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으로,
이들 양자 사이에는 합리적 지식인 수학적 대상의 지식이 있다.


이때 그는 개념적 인식에 대하여 변증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점차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진하여, 가장 일반적인 것에 이르는 과정과,

이 발전적 개념으로부터 점차 일반성의 낮은 단계로 하향(下向)하는 2개의 과정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는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에 의해 이데아계를 인식하는 곳에 인간의 최고의 기쁨이 있으며,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이 이상에 근접(近接)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테네 귀족의 대표로서 이상적 귀족국가의 구상을 내놓고 철학자에 의한 지배를 제창하여
이 지배자 아래에 군인이 있고 그 아래에 상인이 있는 계층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에는 이성적, 의기적(意氣的), 욕정적(欲情的)인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후 계속 관념론 철학에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년 ~ BC 322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학문 전반에 걸친 백과전서적 학자로서 과학 제 부문의 기초를 쌓고 논리학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여 플라톤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왕자 시절의 알렉산더 대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B.C. 335년에 자신의 학교를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 소요학파, 逍遙學派)의 기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그의 연구는 1) 존재와 그 구성ㆍ원인ㆍ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 이것에는 제1철학, 수학, 자연학이 포함되고,
2) 인간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 여기에는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며,
3) 창조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작술(製作術), 여기에는 시(詩) 등 예술 활동이 포함된다.


제1철학은 후에 형이상학이라 불리워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학문 연구의 대상은 일반적인 것의 획득이고, 이 획득은 감각에 기초한 지각에 의해 개개 사물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며,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체험될 수 없다고 보고 귀납을 인식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사물 생성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으로
1) 질료(質料, 그 hylē, 영 matter) : 생성의 수동적인 가능성,

2) 형상(形相, 그 eidos, 영 form) :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
3) 운동의 시원(始原), 4)목적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이렇게 일체의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며, 가능성(질료)이 현실성(형상)으로 전화ㆍ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질료에는 수동성을, 형상에는 활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시원과 목적을 형상에 귀착시켰다.


여기에서, 운동의 시원으로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것,

즉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움직이는 것'으로 신(神)을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초월적인 이데아를 인정하는 관념론자는 아니지만

역시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관념론적 입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논하는 경우에는 유물론적 색채가 농후하다.
그의 논리학은 존재론,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인식은 단순히 실험의 검증을 최후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하지 않고 정신의 작용만으로도 진리가 추정된다고 하면서, 귀납뿐만 아니라 연역의 중요성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수립한 우주론(宇宙論)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지배하여 온 천동설이었다.

윤리학에서는 노예제 사회에서의 유한(有閑)계층의 사고에 부합하여 관조(觀照)를 정신 활동의 최고 형태라 하고,
그 모범을 가장 완전한 철학자,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사상으로서의 신(神)에게서 찾았다.


사회학에 있어서는, 노예제를 자연에 기인한 것이라 주창하고, 국가 권력은 그 최고 형태를 권력의 이기적 행사가 아닌,
사회 전체에 도움을 주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2면성은 후세의 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중세의 기독교는 그의 관념론을 받아들여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이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이러한 관념론을 타파하는 유물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아테네 아카데미(Athens academy)


아테네대학교(National and Kapodistrian University of Athens)


1837년 5월 처음 세워져 신학과 법학, 의학, 예술의 4개 학부가 설치되고,

33명의 교수와 52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근대 그리스 국가와 발칸 및 동부 지중해지역에서 처음 세워진 대학으로,

당시 교명은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오톤의 이름을 따 오톤대학교라 하였다.


1862년에는 국립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04년 예술학부가 예술과 과학부로 나눠지고
이후 과학부에 물리학과와 수학과가 설치되고 화학과가 추가되었으며, 약학과, 치의학부 등이 설립되었다.


1911년부터 1932년까지 카포디스트리아대학과 국립대학으로 나눠서 운영되다가,

1932년 두 학교는 아테네국립카포디스트리아대학으로 병합되었다.
이는 그리스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기준으로 경제정치과학, 법학, 과학, 교육학, 철학, 신학, 건강과학, 물리교육 및 스포츠과학부의

8개 학부에 36개 학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이 제공된다.


EU 통합 펀딩제도로 유럽연합 내외의 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자, 교수, 교직원 및 시민단체 등에게

국외연수나 연구, 강의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에라스무스 플러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2006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주 캠퍼스는 조그라푸(Zorgrfou)에 위치하며 이 곳에는 과학과 신학, 철학부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건강과학은 가우디 지역, 경제정치과학부와 행정시설 등은

아테네 중심지, 물리교육과 스포츠과학과는 다프네 캠퍼스에 있다.


대학 본관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각각 본관의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그리스 국립도서관,

아테네 학술원과 더불어 아테네 신고전주의 3부작으로 불린다.


내부 정면 내벽 상단에 오스트리아 화가 칼 랄(Carl Rahl)이 그리스 신화와 역사 속 인물들을 그린 벽화가 유명하며,
본관 앞에는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작가 리가스 페레오스의 조각상이 있다.


학내에는 1886년에 설립된 인류학 박물관을 비롯하여

고고역사예술박물관, 성서고고학박물관, 아테네대학교박물관 등의 여러 박물관이  있다.


졸업생으로는 하릴라우스 트리쿠피스(Charilaos Trikoupis)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최초의 여성 총리인 바실리키 타누 크리스토필루(Vassiliki Thanou-Christophilou) 등을 비롯한 15명의 국무총리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Konstantinos Karamanlis), 카롤로스 파풀리아스(Karolos Papoulias)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다.


또한 1963년과 197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조지 세페리스(Giorgios Seferis)와

오디세우스 엘리티스(Odysseas Elytis)가 졸업했다.


마라톤 승전을 알리고 죽은 병사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


4년마다 한번씩 열렸던 이 경기는 시민권이 있고, 범법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제우스에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적이 없던 남자만 참가할 수 있었다.


여성의 경우는 관전조차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경기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벌거벗은 채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까?


색다른 것은, 당시 고대 올림픽에는 운동선수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인, 철학자, 예술가들도 참가해 문학, 예술, 연극 등을 겨루었다는데

현재에는 그 전통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서기 393년 로마제국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반 기독교행사라고 규정하면서

제293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고대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역사 속에 묻힌 올림픽을 1896년 되살린 이는 프랑스의 쿠베르탕 남작.
빈곤한 그리스를 대신하여 돈을 쾌척한 그리스의 대부호 아베로프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 경기장을 복원하여 제 1회 근대올림픽 개최지에 걸맞는 대리석 좌석의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아베로프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리석으로만 된 이 경기장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대경기장과 같이 말발굽 모양의 구조라는 것.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로마시대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에도 각종 육상경기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다.


28회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개막식과 폐막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마라톤의 도착지점이기도 하다.


BC490년, 아테네를 공격한 10만의 페르시아군을 1/5밖에 안 되는 2만의 아테네시민군이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km를 달려온 병사의 죽음을 기리는

이 뜻깊은 경기는 올림픽의 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나저나, 그 병사도 누드였을까?

디오게네스는 헐벗고 다녔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대왕 알렉산드로스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라며 위풍당당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청년 앞에서 남루한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어 긁적거리며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말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


시노페에서 태어나 일명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 불리는 그는 퀴닉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명을 반대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추구한 그는 가능한 한 욕망을 줄이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신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던 것.

그의 세계관에 맞게, 그의 외양은 초라했다.


한 벌의 옷, 한 개의 지팡이, 그리고 약간의 소지품이 든 자루. 그리고 그의 집은 통이었다.
그의 철학이 퀴닉학파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통속에 사는 그의 모습이 개(퀴온 Kyon)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으며 불평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개에게 찬사를 보내며

개처럼 살고자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에피소드만큼이나 알려진 그의 기행은,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서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며 들고 다녔던 그 등불은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었다.

현재 아테네에는 ‘디오게네스의 등불’ 기념비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리시크라테스 기념비(Lysikrates Monument)는

BC 335 년경 소년 합창대회의 스폰서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이다.


그러나 그 생김새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비석을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 부른다.
현재 이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수도원은 1810년 바이런 경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조각들은 사실적인 미를 추구했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누드조각상들이 가득한 곳
벌거벗은 옛 그리스인들을 보고싶다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가면 된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이토록 멋진 몸매를 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된 나체의 조각상들이 박물관을 꽉꽉 채우고 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기원전 4세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자신의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어디서 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에피소드이겠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이 그 조각상을 보고 놀라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언제 아프로디테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라며 수근거렸을 법하다.


1891년에 문을 연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을 본떠 지어졌다.
조각상뿐 아니라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조각, 회화, 공예품들이 한곳에 모였다.
조각상은 대부분 그리스의 신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이 없다보니 소지품으로 정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BC4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포세이돈 청동상은 멋진 자세로 뭔가를 던지기 위해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에 든 것이 삼지창인지 번개인지 알 수 없어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표기해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포세이돈 청동상이라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바닷 속에 빠져있던 것을 건져올렸기 때문인 게 아닐까.
1928년 아르테미시온의 바닷속에서 건졌기에,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상으로 아테네 둘러보기



참조 ; https://blog.naver.com/rabtle/220788503657

https://blog.naver.com/nasci/22079865922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287&cid=42864&categoryId=5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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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71351&cid=43142&categoryId=4314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9720&cid=41978&categoryId=4198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9430&cid=41978&categoryId=41985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5%8C%EB%84%A4_%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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