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 민주올레 23]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⑥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영화 '1987' 속의 내과의 오연상 1987년 당시 중앙대용산병원 내과의였던 오연상은 간호사 1명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려가 물고문 과정에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을 처음으로 검안하였다.
▲ 영화 "1987" 속의 내과의 오연상 1987년 당시 중앙대용산병원 내과의였던 오연상은 간호사 1명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려가 물고문 과정에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을 처음으로 검안하였다.
ⓒ 우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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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로초등학교를 뒤로 하고 9호선 흑석역 방면으로 이동하다 보면 흑석시장 입구 한 건물 3층에 있는 '오연상내과'가 보인다. '병원과 동작민주올레가 무슨 상관?', 성급한 사람은 순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 1987 >을 본 사람들은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경찰에게 물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검안의로 불려간 중앙대용산병원 내과의 오연상을 기억할 것이다. '오연상내과'는 그 오연상이 당뇨전문클리닉으로 2009년에 개원해 운영하는 의원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의사 오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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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시 중앙대용산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내과의 오연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간호사와 함께 제일 먼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을 방문해 고문으로 이미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을 검안한다.

이미 사망해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경찰은 고문에 의한 사망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 장소마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니라 중앙대용산병원으로 조작하려고 시신을 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기려 한다. 이때 오연상은 몰래 병원에 연락해 시신을 응급실로 받지 않도록 조치하는 등 용의주도함을 보여준다(영화 < 1987 > 속 어리벙벙한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이다). 

사망 장소 조작에 실패한 경찰은 이번에는 '쇼크사'로 밀어붙이면서 화장 처리를 통한 사건은폐를 기도한다. 하지만, 최환 공안부장의 저지로 이마저도 실패하고 다음날 사건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진다.

이때 '보통사람' 오연상은 경찰의 회유와 감시를 뿌리치고 병원으로 몰려온 언론과 용기를 내 인터뷰한다. 오연상은 언론에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폐에서는 수포 소리가 들렸다"라고 말해 물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로써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라는 경찰의 발표는 그 힘을 잃게 된다. 이 일로 오연상은 경찰에 의해 며칠간 호텔에 격리조치 되기도 한다.

오연상의 이러한 용기는 부검의로 참여한 국과수 소속 황적준 박사가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물고문 과정에서 발생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고 감정서를 작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해서 박종철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던 것이다.

오연상의 용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오연상은 그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는 제1회 'KNCC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연상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검안의였던 오연상이 2009년 개원한 의원이다. 오연상은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자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본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렸다.
▲ 오연상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검안의였던 오연상이 2009년 개원한 의원이다. 오연상은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자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본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렸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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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은 경찰과 검찰의 합작품

영화 < 1987 >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보여준 검찰의 축소·은폐·조작 가담 사실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권력의 주구 역할을 하는 경찰과 달리 검찰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집단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점잖은 스타일의 최환 공안부장 역에 배우 하정우가 캐스팅 되면서 터프한 스타일로 그려진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실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검찰은 최환 공안부장만 빼놓고는 경찰과 철저히 한통속이었다.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도 '경찰의 명예회복' 운운하면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에 따라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긴 것도 검찰이었다.

그 결과 시간을 번 경찰이 5명(조한경,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강진규)이 아니라 2명(조한경, 강진규)의 '업무과욕으로 벌어진 우발적 사건'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이는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 댓글 사건 등에서 꼬리 자르기를 하면서 '개인적 일탈행위'였다고 둘러대던 일의 1987년 버전이었다. 5명이 했다고 하면 '수사기관에서의 고문은 일상적이고 조직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공격을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필사적으로 2명이 했다고 말을 맞추고 조작했던 것이다.

뒤늦게 사건 수사를 맡아 피의자가 참여한 현장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대역을 통한 실황검증으로 마무리하고 4일 만에 사건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서둘러 2명을 기소한 것도 검찰이었다. 심지어 검찰은 영등포교도소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조한경과 강진규가 수사검사 안상수를 면회해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음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검찰이 고문경관 없이 실시한 현장검증을 비판한 언론보도(1987. 1. 24, 동아일보) 당시 검찰은 수사의 기본도 지키지 않고 고문경관 없이 현장검증을 실시하여 언론에서는 이를 '실황검증'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 검찰이 고문경관 없이 실시한 현장검증을 비판한 언론보도(1987. 1. 24, 동아일보) 당시 검찰은 수사의 기본도 지키지 않고 고문경관 없이 현장검증을 실시하여 언론에서는 이를 "실황검증"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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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땅히 진실을 밝혀야 할 검찰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진실을 밝힌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바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안유, 한재동)과 감옥에 있던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 등의 목숨을 건 활약으로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축소·은폐·조작의 실체가 온 천하에 폭로될 수 있었다.

검찰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반성은커녕 '5월 12일 사건을 인지하고 내사를 진행 중이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고문경관 3명(황정웅, 반금곤, 이정호)을 추가로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또다시 축소하려는 뻔뻔함을 보여줬다.

검찰은 이후 국민과 언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축소·은폐·조작에 관여한 윗선 수사를 진행해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 등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하지만 이때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무혐의로 빼준다.

이런 검찰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왜 검찰은 수사는커녕 조사도 받지 않나'라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축소조작 묵인 검찰은 왜 조사 않나(1988. 1. 14, 동아일보) 검찰은 경찰과 합작하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 은폐에 앞장섰음에도 수사는커녕 조사도 받지 않았다.
▲ 축소조작 묵인 검찰은 왜 조사 않나(1988. 1. 14, 동아일보) 검찰은 경찰과 합작하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 은폐에 앞장섰음에도 수사는커녕 조사도 받지 않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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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거사위와 검찰총장의 사과?

지난 10월 11일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위원장 김갑배)는 대검진상조사단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사 결과를 보고받았다면서 "사건 발생 초기 검찰이 치안본부의 조작·은폐 시도를 막고 부검을 지휘해 사인이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임을 밝혀낸 점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검찰은 정권 안정이라는 정치적 고려를 우선해 치안본부에 사건을 축소·조작할 기회를 줬고, 치안본부 간부들의 범인도피 행위를 의도적으로 방조했다"라고 해 검찰의 잘못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앞선 지난 3월에는 문무일 검찰총장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를 찾아가 사과하여 가슴 뭉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박정기 아버지는 지난 7월 28일 돌아가셨고, 아들 박종철이 있는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다).

그런데 며칠 후 충격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지난 10월 29일 <경향신문>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이 당시 수사검사였던 박상옥 대법관(62)에게는 조사 요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단독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 중 유일하게 현직에 남아 있는 박 대법관에 대한 특혜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평했다.

1987년 사건 당시 수사검사는 신창언(주임검사), 안상수, 박상옥이었다. 이들은 사건 이후 모두 출세의 길을 걸었다. 신창언은 1994년에 헌법재판관이 됐고, 안상수는 자신이 마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힌 주역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국회의원을 네 번이나 지냈다. '막내검사' 박상옥은 2015년에 6년 임기의 대법관이 됐다. 지금도 공직에 남아 있는 인물은 박상옥 대법관뿐이다.

'막내검사' 박상옥 대법관은 어떻게 또다시 면죄부를 받게 됐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들(왼쪽부터 박상옥, 안상수, 신창언) 1987년 1월 2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수사검사였던 박상옥은 지금도 대법관으로 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들(왼쪽부터 박상옥, 안상수, 신창언) 1987년 1월 2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당시 수사검사였던 박상옥은 지금도 대법관으로 있다.
ⓒ 안검사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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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검진상조사단이 신창언과 안상수에게는 출석요청이라도 했지만, 박상옥 대법관에게는 출석요청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창언과 안상수는 출석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니 결국 사건 수사검사 세 명 전원을 조사하지 않은 채 조사 결과를 검찰과거사위원회에 보고했던 것이고,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그걸 그대로 발표한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졸속 수사를 31년 만에 다시 조사하겠다고 나온 검찰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졸속으로 조사하고 졸속으로 발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31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졸속 수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2015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외압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위증한 것이 확인된 현직 대법관 박상옥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게 됐다. 우리는 '졸속 검찰'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대검 진상조사단과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졸속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검찰은 여전히 적폐청산의 대상일 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촛불혁명은 적폐청산으로 완성돼야

정권교체는 촛불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촛불혁명은 사회 요소요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적폐세력을 청산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검찰개혁도 그 중 주요한 과제의 하나다.

이제 발걸음을 다음 탐방지로 옮기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냈던 영화 < 1987 >에 오연상과 함께 등장하는 '보통사람들'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해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5692





[동작 민주올레 22]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⑤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흑석동에 있는 공립 은로초등학교의 전신은 1908년에 세워진 사립 은로학교다. 흔히 대한제국기 유길준(1854~1914)이 지은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유길준이 중심이 돼 과천군 하북면(1914년 이후 시흥군 북면)의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면립학교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면장이 설립자 또는 교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은로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노량진 본동에 있었는데, 1940년 흑석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현재의 은로초등학교 은로초등학교는 1908년에 세워져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 현재의 은로초등학교 은로초등학교는 1908년에 세워져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 은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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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유길준과 은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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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로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유길준은 대표적인 개화론자였다. 유길준은 개화파의 아버지격인 박규수의 문하에서 신학문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김옥균과 김홍집, 박영효와 홍영식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박규수가 죽은 후에는 실학자이자 시인인 강위의 문하에 들어가는데, 이때 온건 개화파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김윤식과 어울리면서 급진 개화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유길준은 1881년 조사 시찰단 단장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에 머물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유길준은 1882년 일본에 온 박영효의 통역을 담당하다 함께 조선에 돌아오고, 이번에는 민영익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간다. 이때도 유길준은 임무를 마친 후 귀국하지 않고 보스턴대학에 들어가 두 번째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유길준의 학비를 조선 정부가 냈으니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유길준의 유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고종이 개화파와 결별하게 됐고, 그 여파로 유길준의 유학비용 지원이 중단된 것이다. 유길준은 유럽을 돌면서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에 귀국한다. 유길준은 갑신정변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했다는 이유로 귀국 직후 체포돼 1892년까지 7년간 연금 당한다. 이때 유길준은 자신의 유학생활과 유럽탐방 경험을 살려 자신의 경세관을 담은 <서유견문>을 집필하면서 울분을 달랜다.

유길준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연금에서 풀려나 2년이 지난 1894년 갑오내각이 들어섰을 때다. 그는 군국기무처의 구성원이자 의정부 도원으로서 각종 개혁안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데 주력했다. 이어 을미사변으로 만들어진 을미내각에서는 내부대신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개화사상을 펼쳐나간다.

이때 서재필과 협의한 끝에 독립신문의 창간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한 것도 유길준이었다. 단발령이 선포될 때는 고종과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는 역할을 맡기도 하고,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유길준이었지만,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다시 위기에 몰린다. 내각을 이끌던 김홍집은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성난 군중에게 던져져 난도질당하는데, 유길준은 체포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조선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까지 꾸미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의 한 섬에 4년간 유배당하기도 하는 유길준은 1907년에야 다시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 위기에 몰렸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 기고를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것을 순종이 높이 산 덕분이었다.

이렇게 귀국한 유길준은 이제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포기하고, 노량진 본동에 있는 용양봉저정을 하사받아 살면서 은로학교를 비롯하여 계산학교, 노동야학회 등 교육기관을 세우는가 하면 실력양성론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 흥사단도 설립한다.
 

유길준과 은로학교 전경(1926. 10. 4, 동아일보)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사에 유길준의 얼굴 사진과 은로학교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 유길준과 은로학교 전경(1926. 10. 4, 동아일보)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사에 유길준의 얼굴 사진과 은로학교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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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과 하북면 주민들, 은로학교를 함께 세우다

이제 유길준은 '대한제국이 개혁에 실패하게 된 것은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였으니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한 애국계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면내 각 리(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를 지역 유지인 유상준 등과 함께 매일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한다. 유길준은 은로학교를 설립할 때 용양봉저정의 부속 건물 일부를 허물어 건자재를 대기도 한다.

하북면 주민들은 의연금을 내기도 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 과정에 부역으로 참여하기도 하면서 은로학교 건립의 한 주체로 참여한다. 이렇게 해서 은로학교는 800여 평 대지에 40여 간의 교실을 갖춘 명실상부한 면립학교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4월 15일 정식 인가를 받을 때의 설립자는 면장 박교원, 초대 교장은 유길준, 총무와 회계는 배선영과 이원시였다.
 

은로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유길준인 것으로 보여 사진에 1915년이라 찍혀 있음에도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이 사망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은로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유길준인 것으로 보여 사진에 1915년이라 찍혀 있음에도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이 사망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은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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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로학교, 위기에 빠지다

은로학교는 초창기에는 주민들의 갹출과 노들나루 도선료 수익금의 1/3을 학교운영비로 투입하면서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1917년 한강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재정상 어려움에 빠지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보다 앞선 1914년에 2대 설립자로 있던 유길준이 사망한 것도 은로학교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정미7적의 한 명인 조중응(1860~1919)이 3대 설립자로 취임한 것이다. 여기에 유길준과의 갈등으로 총무직에서 물러났던 배선영이 1918년 교장에 취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결국 은로학교는 1920년에 이르면 제8회 졸업식을 그해 6월에야 가까스로 치르고 9월에는 학교 문을 닫고 만다.

은로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학교 교육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열기가 고조된 1922년의 일이다. 처음에는 대종교를 내세워 다시 열기 위한 시도도 하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지역주민의 힘으로 만든 노량진교육회(회장 이석진, 총무 이원시)가 은로학교를 후원하는 중심 역할을 하면서 다시 열게 된 것이다. 이후 은로학교는 꾸준히 300여 명의 학생수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1934년의 학생수는 363명(남-269, 여-94)에 이르렀다.

그런데 은로학교의 위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23년 교장 배선영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학교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학교 대지와 건물을 담보로 일본인 삼정길(森政吉)에게 2000원의 빚을 진 사실이 밝혀지면서 은로학교는 풍파에 휩싸이게 된다. 1920년 학교가 폐교되면서 면민들의 관심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학교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교장 배선영이 몰래 자신의 명의로 바꿔 놨던 것이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 면민대회를 개최해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다

이렇게 되자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면민대회를 소집해 면민들의 힘을 모으는 방식으로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선다. 우선 면민 공동으로 1000원을 모금하고 해동은행에서 1000원을 차입하여 2000원의 빚을 갚는다. 이어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학교 명의를 '면민 공동소유'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교장 배선영이 일방적으로 학교의 땅과 건물을 담보로 또다시 빚을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배선영은 '면민 공동소유'가 법적으로 불가능함을 내세워 명의이전 요구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면민들은 이번에는 소유권을 배선영 한 명이 아니라 공동설립자로 되어 있는 유억겸(유길준의 아들), 이응삼(본동리 대표), 차정환(노량진리 대표)을 포함한 4명이 분할 소유하게 해달라는 소송까지 걸었지만, '분할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역공한 배선영의 농간으로 이마저도 기각당하고 만다.

하지만 시흥군 북면 사람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면민들은 노량진교육회를 비롯한 지역의 8개 단체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다시 면민대회를 열어 배선영을 포함한 유억겸, 이응삼, 차정환 등 4명의 설립자가 동반 사퇴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믿을 수 없는 배선영을 몰아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뻔뻔한 배선영은 이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면민들은 다시 소송에 돌입하는데, 불안감을 느낀 배선영은 1928년에 이르면서 다시금 은로학교 대지와 건물을 일본인 사택(寺澤)에게 저당 잡혀 2000원을 빌린 다음, 용산에 사는 또 다른 일본인 금정(今井)에게 2500원에 몰래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다. 

이 사실을 안 면민들은 배선영을 '배임횡령죄'로, 금정을 '장물고매죄'로 고소한다. 그러나 면민 소유임에도 소유권이 배선영 개인 명의로 돼 있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배임횡령죄'나 '장물고매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다.
  

시흥군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28. 10. 30)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면민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교장 배선영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 시흥군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1928. 10. 30) 시흥군 북면 사람들은 은로학교의 위기에 맞서 면민대회를 소집하여 면민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교장 배선영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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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은로학교를 산 일본인 금정은 2주 만에 급사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배선영마저 갑자기 죽는다. 교장 배선영과 면민들 간에 벌어진 6년여의 갈등은 결국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북면 사람들이 면민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면서 은로학교를 살리기 위해 보여 준 모습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마을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은로학교를 실질적인 면민 공동소유로 만들어내고자 한 시도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은로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

사실 은로학교는 시흥군 북면 취학아동의 교육기관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은로학교는 노량진청년회·용흥청년회 같은 지역단체와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시흥지국 같은 언론단체들의 강연회, 주민 위안공연 등 각종 행사가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고, 노동야학-부녀야학을 비롯하여 정식 교육을 받기 힘든 노동청년이나 여성들의 야학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면 사람들의 '복합 교육문화 공간'이었다.

이때 저명 인사들이 강연을 위해 은로학교에 오기도 한다. 동아일보시흥지국에서 주최한 '독자위안대강연회'(1926. 2. 27)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한위건이,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시흥지국이 후원한 '하계남녀강연대회'(1926. 8. 14)에서는 경성청년연합회의 백신애(여성해방과 경제조건), 박원희(우리의 사명)가, 같은 해 '추계강연대회'(10.18)에서는 유각경(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과 홍병선(YMCA, 교육과 조선의 장래)이 은로학교를 방문한다.

용흥청년회가 주최한 '춘계강연회'(1928. 6. 2)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과 당시 최고의 인기 잡지였던 <개벽>(천도교 발행) 편집인 이돈화 등이 은로학교대강당에서 연사로 나선다.

은로학교에서는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문화프로그램도 여러 차례 개최됐다. 특히 '납량 활동사진 대회'(동아일보시흥지국 개최, 1927)라는 이름의 영화 상영회는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3일간의 상영을 마친 후 2일을 더 연장하여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상영한 영화가 조선영화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영화 제목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1934년에는 극작가이자 영화인으로 만담가이기도 했던 윤백남을 초청하여 '독자위안 야담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납량 활동사진 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7. 8. 8) 보도에 따르면 이때 시흥군 북면에서는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 "납량 활동사진 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7. 8. 8) 보도에 따르면 이때 시흥군 북면에서는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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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로로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았던 이경응씨는 노동야학을 창립하여 20여 명의 지원자를 확보, 야학을 시작했다. 1929년, 노동야학에 참여하는 아동 수가 무려 240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밖에 은로학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수해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분향소가 설치돼 추모객들의 통곡이 이어진 장소도 은로학교였다. 

이 정도면 은로학교는 지역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교육기관이었다고 할만 하다. 오늘날 지역사회 활성화를 위해 마을과 학교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 고민을 푸는 열쇠를 바로 일제강점기 은로학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아닐지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4245





[동작 민주올레 21]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④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효사정문학공원'에서 내려와 '심훈생가 터'를 구경하고, 흑석동 로타리를 지나면 중앙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역주민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일까? 2008년 두산그룹에서 학교를 인수한 후 예전과 달리 담장을 없애고 개방형으로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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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산이 인수한 후 기업식 구조조정을 하면서 중앙대는 경영대 중심으로 재편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과는 폐과 또는 대폭 축소됐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는 대학 본연의 자세를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학과 강제통폐합에 반대해 노영수 학생(당시 독어독문학과)이 공사 중이던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올라 고공시위를 벌이다 퇴학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노영수 학생은 이후 퇴학무효 처분 소송에서 승소해 퇴학 처분을 취소시키고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산그룹의 중앙대 구조조정 움직임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겉과 속이 꼭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중앙대 캠퍼스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중앙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영신관 중앙대의 흑석동시대를 연 1938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실질적인 설립자 임영신의 이름을 따서 영신관이라 이름 붙였다. 입구에는 임영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영신관 중앙대의 흑석동시대를 연 1938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실질적인 설립자 임영신의 이름을 따서 영신관이라 이름 붙였다. 입구에는 임영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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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가 이곳 흑석동에 자리 잡은 것은 1938년의 일이다. 하지만 중앙대의 뿌리는 더 깊다. 현재 중앙대는 자신의 역사를 1918년 인사동 중앙교회 부설 중앙유치원의 설립에서 찾고 있다. 1916년 정동교회 유치원의 분원으로 시작해 1918년에 독립한 것이 중앙대의 시작이라며, 100주년기념관 건립과 함께 10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했다. 지난 10월 11일에는 중앙대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도 벌였다.

그런데 대학의 시작을 유치원에서 찾는 것은 왠지 옹색해 보인다. 그보다는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1922년부터 운영한 중앙유치원 사범과에서 중앙대의 시작을 찾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1935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중앙보육학교가 창립 13주년 기념축하회를 본교 대강당에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중앙보육학교는 중앙유치원 사범과에서 독립하여 1928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세워진 학교다.

이 중앙보육학교가 이어 중앙여자전문학교(1945), 중앙여자대학(1947), 중앙대학(1948)을 거쳐 마침내 종합대학인 중앙대학교(1953)가 됐다.

중앙보육학교 교장 박희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타락한 분자'

중앙대의 역사에서 중앙보육학교 시절의 박희도(1889~1952)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19년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박희도는 장두현, 신태화, 김상돈 등과 함께 중앙보육학교를 인가 받은 공동설립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초대 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박희도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당시 기독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 2년 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기독교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신생활>이라는 잡지 사장도 맡았다. 이 <신생활>은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로 평가받는다.

이는 박희도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편집장을 맡았던 제주도 출신 사회주의자 김명식의 영향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잡지 <신생활>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2년간 감옥살이를 더 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희도는 1930년대 초반까지는 사회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박희도가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친일파로 돌아서서 친일성향 잡지인 <동양지광>을 창간해 주간을 맡는다. 이로 인해 광복 후에 친일잔재 청산을 목적으로 한 반민특위에 회부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박희도는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가장 타락한 분자'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박희도의 타락은 단지 친일파로 전락했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박희도는 1934년도에 언론에 대서특필된 <에로교장 Y선생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른다. 1930년대 초 중앙보육학교 교장 시절 박희도와 같은 학교 여제자 간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교육계를 떠나게 된다. 당시 언론은 박희도가 여제자와 '키스내기 화투'를 하다가 정조까지 유린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나중에 그 여제자가 "남편의 폭력과 협박에 못 이겨 박희도와의 일을 허위로 폭로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미궁으로 빠져든다. 사건 폭로 후 전개되는 방식이 요즘의 미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 놀랍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교장직을 내놓고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면서 중앙보육학교는 학생들의 신뢰를 잃어 폐교 위기에 몰리기까지 한다.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승당 임영신
  

임영신 동상 1938년에 흑석동에 처음 지어진 건물 영신관 앞에는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임영신의 동상이 있다.
▲ 임영신 동상 1938년에 흑석동에 처음 지어진 건물 영신관 앞에는 중앙대의 실질적 설립자 임영신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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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에 들어가면 잔디밭 건너편에 오래돼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중앙대가 흑석동에 처음 자리 잡을 때인 193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위기에 몰린 중앙보육학교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임영신이 1935년 인수한 후 흑석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때 처음 지어진 건물을 임영신의 호를 따서 '영신관'이라고 부른다. 건물 앞에는 임영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영신은 사실상 중앙대를 설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정확히는 1935년에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임영신은 1919년에 전주와 천안에서 3.1혁명에 참여한다. 1918년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임영신은 곧바로 천안에 있는 양대소학교의 교사가 됐는데, 다음 해 3.1혁명이 시작되자 3월 12일 전주시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다가 일경에 잡혀 온갖 고문을 받은 후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6월에 가석방될 때까지 3개월간 감옥 생활도 한다.

임영신은 감옥에서 나온 후 몰래 일본으로 가서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를 다녔다. 1921년에는 귀국해서 공주 영명여학교의 교사가 되고, 그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출강하다가 192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임영신은 미국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되는데, 이승만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평생 그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1년 임영신이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승만이 제3자를 통해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영신 나이가 32세일 때인데,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56세였다. 임영신은 고심 끝에 "저는 조선의 독립과 결혼하겠어요!"라면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임영신은 1936년 말 중앙보육학교의 운영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간다. 이때 한순교와 결혼하지만, 곧 파경을 맞는다. 1940년에 귀국한 임영신은 1941년 12월 13일 발족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한다. 하지만 임영신은 김활란, 모윤숙 등과는 달리 소극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분류된다.

해방 후 임영신은 김활란, 박현숙, 최은희, 이은혜 등과 함께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될 때는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냈으며, 1949년에 치러진 안동 보궐선거에서는 장택상을 물리치고 당선해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임영신은 1952년과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임영신의 호가 '이승만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이 담긴 승당(承堂)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1959년에 세워진 중앙대중앙도서관의 처음 이름은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기념도서관'이었다.

중앙보육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박차정

중앙보육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발굴되지 않은 이유와 관련된 것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경남 양산시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양산문화대전'의 양산유치원 편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와 주목된다.

"1923년 2월 8일 양산 유지들의 발기로 청년회관에서 양산유치원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중략) 서울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온 2명이 교사로 일했다. 그 중 1명인 여성운동가 박차정은 동래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인 김약수·김두봉과 친척이었고, 김원봉의 아내였다."(디지털양산문화대전, 양산유치원 중)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중앙보육학교에서 내려와 양산유치원의 교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박차정은 1929년에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중앙집행위원도 지냈는데, 이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기도 한다. 이때 참가학교는 이화, 숙명, 배화, 동덕여고와 근화, 실천, 정신, 태화여학교, 그리고 여자미술, 경성여자상업, 경성보육학교 등 11개 학교였다.
  

박차정과 김원봉 박차정과 김원봉은 1931년 3월 결혼하였다.
▲ 박차정과 김원봉 박차정과 김원봉은 1931년 3월 결혼하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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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의열단 단원이 돼 활동하다가 약산 김원봉과 결혼했다. 그리고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1936)과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1938)도 맡았다. 박차정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데, 1944년 돌아가시는 것도 이때 얻은 부상후유증이 컸다고 한다.

1929년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한 최정희(1912~1990)는 제1회 여류문화상(1964), 제17회 대한민국예술원상(1972), 제24회 3.1문화상(1983) 등을 수상한 소설가이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예술인들의 모임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회원이었다. 1931년 10월 단편소설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34년 2월에는 카프사건 2차 검거 때 카프맹원과 연루된 혐의로 전주형무소에 구속되기도 하는데, 8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최정희는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조선문인협회 간사(1941~1942),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유격대 활동(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 활동(1941~1942)을 했고,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1942)에서 <군국의 어머니>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일제를 찬양한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어머니의 마음>(1939), <환영의 병사>(1941), <장미의 집>(1942), <군국의 어머님들>과 <군국모성찬>(1944), <징용열차>(1945) 등이 대표적이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중앙보육학교의 빙상선수 출신 양수복(1935년 졸)은 프로핀테른 극동책임자 출신으로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이끌던 권영태 그룹의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권영태 그룹은 1934년 혁명적 노동조합활동에 기반한 '공산주의자 그룹'을 준비하다 일제에 체포돼 와해됐다. 

이후 양수복이 독립운동에 계속 나선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양수복은 이후 공주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며 독창회도 개최하는데, 성악에도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 예술과 체육방면에 모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대 학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

중앙대생들은 해방이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4.19혁명 당시 중대생들은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설립자 임영신의 뜻과는 달리 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에 4000여 명이 모여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한강인도교를 건너 내무부 앞으로 진출했다.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대에서 모인 4천여명은 결의대회를 마친 후 한강을 건너 을지로 내무부 앞으로 진출하였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대의 교훈이 담긴 플래카드가 보인다.
▲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대에서 모인 4천여명은 결의대회를 마친 후 한강을 건너 을지로 내무부 앞으로 진출하였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중앙대의 교훈이 담긴 플래카드가 보인다.
ⓒ 중앙대민주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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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건너는 중앙대생들(1991년 5월) "중앙대 학생들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1960년 4.19혁명 때부터 생겨났고, 이후 중요한 역사의 고비마다 중앙대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한강을 건넜다.
▲ 한강을 건너는 중앙대생들(1991년 5월) "중앙대 학생들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1960년 4.19혁명 때부터 생겨났고, 이후 중요한 역사의 고비마다 중앙대생들은 대오를 형성하여 한강을 건넜다.
ⓒ 중앙대민주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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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병래, 김태년, 송규석, 지영헌, 전무영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서현무 학생은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한 후 고문 후유증으로 7월 4일에 숨지는 등 6명이 세상을 떠난다. 중앙대는 서울대와 더불어 4.19혁명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학교였다. "중앙대 학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앙도서관 앞에 '의혈탑'(1960)을 세웠고, 중앙대는 영신관 오른편에 4월학생관(현 교양학관, 1962)을 건립했다.
 

의혈탑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의혈탑. 4.19혁명에 참여한 중앙대생들의 뜻을 담아 6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의혈탑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의혈탑. 4.19혁명에 참여한 중앙대생들의 뜻을 담아 6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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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혈탑' 옆에는 '6열사비'도 있다. '6열사비' 앞 추모석에는 '제46회 졸업생 일동' 명의로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꽃은 피어 지나 뿌리가 깊고 씨를 맺어
긴 겨울 지나 새싹 틔워 꽃무리 이루니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케 하나니
우리는 이를 '義血'이라 부른다

  

<6열사비>와 <이내창열사비>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는 4.19혁명 당시 희생된 6명의 열사와 198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6열사비>와 <이내창열사비> 중앙대중앙도서관 앞에는 4.19혁명 당시 희생된 6명의 열사와 198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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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앙대생들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학생들의 민주화 열망을 담아 학생운동에 나서고 한강을 건너 시내로 진출한다.

6.3한일회담 반대운동(1964~1965), 6.8부정선거 규탄투쟁(1967), 삼선개헌 반대투쟁(1969), 교련교육 반대운동(1971), 반유신 투쟁(1973~), 1980년 '민주화의 봄'과 이어진 광주학살 진상규명투쟁, 6월 민주항쟁(1987)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는 늘 중앙대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15년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2016년에 끝내 사망한 백남기 농민도 중앙대 출신이다. 백남기 농민은 중앙대 부총학생회장 시절이던 1980년 5월 14일 송기원 등과 더불어 중앙대생들이 유신잔당과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몰락을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교정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너 서울역 앞에 집결한 후 메고 간 상여 화형식을 주도적으로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망월동 묘지(구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제12회 박종철인권상 수여식 장면 중앙대 출신 백남기 농민은 2016년 제12회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은 백기완 선생과 사경을 혜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을 대신해 수상한 따님 백도라지 씨.
▲ 제12회 박종철인권상 수여식 장면 중앙대 출신 백남기 농민은 2016년 제12회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은 백기완 선생과 사경을 혜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을 대신해 수상한 따님 백도라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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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에 나선 중앙대생들

중앙도서관 앞 '의혈탑' 옆에는 '광주민중항쟁기념비'도 있다. 중앙대생들이 5·18광주민중항쟁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념비다. 사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운동이기도 했다. 이때 중앙대생들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학내에 사복경찰이 진주하고 있던 시절이던 1983년까지 중앙대생들의 시위는 주로 중앙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981년 3월 23일에는 중앙대생 박문수, 김증래가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유인물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했고, 같은 해 5월 7일에는 박영권과 이상이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1982년 9월 9일에는 이근원과 임재선이 도서관 4층에서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고 밧줄시위를 벌였고, 같은 해 11월 3일에는 김연명이 교내시위를 이끌었다. 198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5월 25일과 6월 1일, 10월 6일과 10월 27일에 연이어 교내시위가 벌어졌다. 이들 시위는 모두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

1984년부터는 시위의 양상이 바뀌었다. 1983년 12월 전두환 군사정권이 발표한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교내에 상주하던 사복경찰이 나가면서 학내에서는 이제 대중 집회와 시위가 가능해졌다. 이제 중앙대생들은 '루이스가든'에 모여 집회를 한 후 교문을 막고 있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도 벌이며 시위를 벌일 수 있게 됐다. 

이때 중앙대생들은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학살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고, 다른 대학 학생들과 함께 시내에서 기습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중앙대총학생회장 이내창의 죽음, 그 진실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6열사비' 옆에는 또 하나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바로 '이내창열사비'다. 이내창은 1989년 당시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다. 그해 8월 15일에 남해안에 있는 섬 거문도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그해 봄 안기부는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빌미삼아 그림을 그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을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가 그 자금을 댄 경위도 수사했다.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은 정권의 집중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전날인 14일 학교에서 나중에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지는 젊은 여성과 남성이 이내창과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게 목격되기도 했다. 사건 당일 15일 오전에는 이내창이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이들 2명과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내창은 바로 그날 오후에 거문도의 한적한 해변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구성돼 활동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내창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했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만간 출범하면 반드시 규명해야 할 의문사 사건이다.

이렇게 '동작민주올레 - 흑석길'의 중앙대 탐방을 마친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3650





[동작 민주올레 20]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③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뒤로하고 봉우리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심훈(1901~1936)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이 새겨진 심훈 문학비가 나타난다. 2014년 처음 심훈문학비가 들어설 때는 봉우리 반대편(흑석역 방면)에 있었는데, 지난해 말부터 이곳을 '효사정문학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놨다.
 

<효사정문학공원>에 설치된 심훈 좌상 이곳에 <효사정문학공원>이 조성되면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심훈의 좌상이 등장했다.
▲ <효사정문학공원>에 설치된 심훈 좌상 이곳에 <효사정문학공원>이 조성되면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심훈의 좌상이 등장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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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정근린공원의 일부를 '효사정문학공원'이라 새롭게 이름붙이면서 나타난 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은 물론 <첫 눈> <밤> <기적> 등 총 4편의 시를 각각 새긴 시비가 주변에 들어섰고, 한강이 잘 보이는 경관이 좋은 자리에는 심훈이 벤치에 앉아있는 형상이 설치됐다. 심훈과 나란히 앉아 한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마침내 심훈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흑석 사람 심훈,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심훈은 이곳 흑석동에서 1901년에 태어났고, 인생의 상당부분을 이곳 흑석동에서 살았다. 심훈이 태어난 곳은 '효사정문학공원' 정상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있는 천주교 흑석동성당 자리다. 흑석동성당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있다.
  

<심훈생가 터> 표석 심훈이 나고 자란 흑석동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천주교 흑석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심훈생가 터> 표석 심훈이 나고 자란 흑석동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천주교 흑석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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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1920년 1월,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 밑을 넘나들면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던 일을 일기에 남겨놓기도 했다. 지금은 지구온난화와 1980년대 한강 정비 과정에서 한강 하구에 설치한 수중보 때문에 겨울에도 일정 수위를 유지하면서 한강이 좀처럼 얼지 않지만, 한강변에 백사장이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한강은 여름에는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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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심훈을 기리는 일은 심훈의 고향인 동작구가 아니라 충남 당진에서 주로 이뤄졌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근대화의 와중에 주변을 챙기는 일을 외면하던 동작구를 대신해 소설 <상록수>를 쓴 필경사가 있는 당진(송악읍)에서 심훈을 기리는 사업을 벌였던 것. 지금도 당진에는 '심훈문학관'을 운영하고 있고 심훈문학상 시상과 심훈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심훈을 기리는 일을 한 곳은 당진 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안산시도 심훈을 기리는 일을 했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야학을 하던 샘골이 안산에 있었고, 최용신의 무덤이 있는 안산시 본오동에는 '상록수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최용신기념관'과 함께 '심훈문학기념비'도 있다. '상록수공원'에 가장 가까운 지하철 4호선 전철역 이름 상록수역도 심훈의 <상록수>에서 따왔다.

동작구가 뒤늦게라도 동작이 낳은 최고의 인물 심훈을 기리는 일을 시작한 것은 비록 겸연쩍은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훈, 독립운동에 나서다

심훈은 소설 <상록수>로 유명하다보니 소설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나서 감옥살이도 하고 중국 망명생활도 했다.

심훈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면서 퇴학당하지만, 심훈의 경기고보 동창의 면면은 참으로 화려했다.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은 심훈의 동기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일왕(일본 천황) 폭살계획 모의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해방된 이후인 1945년 10월까지 무려 26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심훈의 경기고보 1년 후배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3월 5일의 남대문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심훈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되어 있는 심훈과 심훈의 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되어 있는 심훈과 심훈의 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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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심훈은 서대문감옥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양한묵(천도교, 1862~1919)의 순국을 목도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불태우게 된다.

감옥에서 나와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심훈은 얼마 안 있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심훈은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난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일제와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을 제창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무장투쟁론을 펼친 인물이었다. 이회영, 신채호와의 만남은 심훈의 사상 형성, 항일 문학작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훈이 프랑스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중국 항주에 있는 지장대학에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는 엄항섭 등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도 두 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은 신채호 선생이 일제경찰에 잡혀 여순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 생각>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고, 단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6년 전 만났던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단재와 우당>이라는 수필을 남기기도 한다.

심훈,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다

심훈은 중국에서 3년간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23년에 귀국한다. 심훈이 비록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혁명가로서의 삶은 유보했을지 몰라도 이후 활동을 보면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선생들에게 배운 비타협 정신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심훈은 중국 망명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국과 함께 '극문회'라는 연극연구단체를 결성해 활동한다. 심훈이 초기 연극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대중적 호소력'에 매료됐던 게 아닌가 한다.

이후 영화에 출연도 하고, 영화감독도 하고, 영화평론도 한다. 1925년에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장한몽>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때 심훈은 직접 이수일 역으로 출연한다.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연재소설은 일반적으로 중요 장면에 삽화가 등장하는데, 영화소설은 진짜 영화배우들이 출연해서 연출한 사진이 나온다.

심훈은 <탈춤>을 완성하고 나서 영화 제작에 돌입하는데, 시나리오까지 완성했음에도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제작비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결국 포기한다. 대신 신문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하룻밤 만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쓴다. 심훈의 감독 데뷔작인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홍식, 한병룡, 김정숙, 신일선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었다.

심훈의 <먼동이 틀 때>는 1927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원래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으로 추진했는데, 일제의 검열로 제목부터 바꾸게 됐다고 한다. 심훈의 <먼동이 틀 때>는 1938년에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금까지의 무성영화 부문에서 5위(1위-나운규의 <아리랑>, 2위-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뽑히기도 할 정도로 두고두고 호평을 받았다.

소설 <상록수> 역시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직접 영화로 만들고자 뛰어다니던 중 1936년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심훈은 소설가보다는 영화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심훈이 만들지 못한 영화 <상록수>는 이후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1961년 작품은 신상옥 감독이 만들고, 최은희, 신영균, 허장강 등이 출연한다. 1978년 작품은 임권택 감독이 만드는데, 이때는 한혜숙, 김희라, 이일웅 등이 출연한다.
  

1961년 작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1961년 작 영화 <상록수>는 배우 신영균이 박동혁 역을, 배우 최은희가 채영신 역을 맡았다.
▲ 1961년 작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1961년 작 영화 <상록수>는 배우 신영균이 박동혁 역을, 배우 최은희가 채영신 역을 맡았다.
ⓒ 신상옥 감독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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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은 언론인이자 연극영화인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와중에 1926년 8월에 만들어진 '라디오드라마연구회'에도 참여한다. 1927년 5월에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극작가 입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입센의 <인형의 집> <유령>이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되는데, 심훈은 이때 입센의 생애를 드라마 시작 전에 발표하는 역할을 맡는다.

심훈은 라디오 강연도 많이 했다. 주로 여성들을 상대로 <부인과 독서> <영화와 여성> <예술가가 되려는 젊은 여성에게>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인육재판>이라는 이름의 라디오드라마용 희곡으로 번안해 방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심훈은 방송인이기도 했다.

심훈, 소설 <상록수>로 이름을 날리다

심훈하면 누구나 쉽게 소설 <상록수>를 떠올리게 되지만, 앞서 몇 편의 소설을 더 쓴다. 영화소설 <탈춤>도 있었지만, 1930년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한 것이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일제의 검열로 연재가 중단된다.

< 동방의 애인>은 심훈 자신의 중국 망명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썼는데, 경성, 상해, 모스크바, 동경 등을 무대로 하는 스케일이 제법 큰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김동렬-강세정)이 유명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심훈의 친구였던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서 <불사조>를 새로 연재하지만, 이것 역시 일제의 검열에 걸린다. <불사조>는 일제에 맞선 옥중투쟁 장면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1933년에는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장편소설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특히 <직녀성>은 심훈 자신의 아픈 경험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심훈이 처음 결혼하는 건 1917년 경성고보 3학년 시절이었는데, 결혼 상대자는 철종의 후손인 조선 왕족 이해영이었다. 심훈은 봉건적인 인습에 얽매여 자신과 결혼한 부인 이해영에 대해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소설 <직녀성>은 바로 이 봉건적 인습에 얽매여 결혼한 여성의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심훈은 이 작품에서 결혼,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억압과 차별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심훈의 대표작인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은 실제로 안산 샘골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1935년 1월에 과로로 죽은 인물이다. 남자 주인공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로 당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심재영이 모델이었다는 설도 있고, 최용신의 실제 약혼자였던 김학준이 모델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는 그 둘을 합친 게 박동혁일 것이다.

소설 <상록수>를 쓴 곳은 당진 송악면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인데, 심훈이 당진으로 내려간 1932년에 쓴 소설 <직녀성>의 원고료로 본인이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고 한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이라는 뜻의 필경사는 지금도 부곡리에 남아 있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과 <고향은 그리워도>

심훈은 자신을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후의 명작 <그날이 오면>을 남긴다. <그날이 오면>은 1930년 3.1만세운동 11주년을 기념해서 지은 항일 저항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과 원산노동자총파업, 용천소작쟁의 등도 <그날이 오면>을 짓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을 담은 심훈 문학비 <효사정문학공원>에는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 등 4개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 <그날이 오면>을 담은 심훈 문학비 <효사정문학공원>에는 심훈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 등 4개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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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이 얼마나 조선의 독립, 민족의 해방을 절절히 열망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심훈은 1932년도에 그동안 쓴 시를 모아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시집 출판을 시도한다.

그런데 일제의 검열이 또 말썽이었다. 이곳저곳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심훈은 차라리 출판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다. 결국 시집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그렇게 열망했던 해방이 된 후인 1949년에야 출판된다. 시집 <그날이 오면>에는 심훈의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도 있다. <고향은 그리워도>가 대표적이다.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너머련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5대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잡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취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심훈의 흑석동 집 후원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나 보다. 손수 가꾸던 화단도 있었던 것 같다. 개나리 울타리에 꽃피던 뒷동산이 있던 흑석동은 1930년대 당시 신혼부부의 선망의 대상이던 문화주택도 등장하고, 지금의 효사정 자리에 있던 신사(한강신사 또는 웅진신사)도 등장하면서 변해간다.

고향에 대한 실망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고향은 그리워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해방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고향은 그리워도>는 역시 심훈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고향은 그리워도>가 '효사정문학공원' 시비에 새겨지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효사정문학공원, '일색화'의 아쉬움

뒤늦게 심훈을 기리는 일을 하다보니 나타난 역편향일까. '효사정문학공원'에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그날이 오면> <첫 눈> <밤> <기적> 등 4개의 시비가 다 심훈의 시로 채워져 있다.

효사정문학공원이 심훈의 시로 '일색화'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운 대목이다. '일색화'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지난 회에 소개한 신석정 시인의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정주에게>도 이곳 '효사정문학공원'에 시비로 새겨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석정 만이 아니라 흑석동을 노래한 윤중호의 <흑석동 김씨>나 이시영의 <후꾸도> 같은 시도 좋다. 여기에 조선시대 이래 유명 문인들이 남긴 다양한 문학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한강변을 따라 조성될 <시인의 길>과 결합할 수 있다면 보다 풍성한 <문학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본신사가 있던 곳
<효사정문학공원> 위에는 효사정(孝思亭)이 자리 잡고 있다. 효사정은 최고의 한강 조망명소 중 하나이다.
 
효사정은 조선 초기 인물 노한(1376~1443)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른 후 시묘한 자리에 처음 세웠는데, 성종 때 사라졌다가 500년 후인 1993년에 지금의 자리에 재현해 놓았다. 실제 효사정이 있던 자리가 이곳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효사정의 모양도 옛 사람들이 남긴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효사정이 있는 자리는 심훈의 시 <고향은 그리워도>에도 등장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한강신사(또는 웅진신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월파정, 용양봉저정 등 경관이 좋은 곳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이 곳 효사정 자리는 일본신사까지 들었던 것이다.
   
한편, 이곳에서는 1950년대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군의날 행사의 하나인 에어쇼를 관람하기도 했다.

 

한강신사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제 강점기 한강신사가 있던 곳이다.
▲ 한강신사 지금 효사정이 있는 곳은 일제 강점기 한강신사가 있던 곳이다.
ⓒ 일제강점기 당시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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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 민주올레 19]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②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학도의용병 현충비 6.25한국전쟁 초기에 있었던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병 48명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가 흑석동 한강변에 세워져 있다.
▲ 학도의용병 현충비 6.25한국전쟁 초기에 있었던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병 48명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가 흑석동 한강변에 세워져 있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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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병 현충비'는 흑석고개 정상부에 있는 '효사정문학공원' 입구에 있다. 이 비는 6.25 한국전쟁 초창기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한 대학생과 중학생 등으로 구성된 71명의 학도의용병 중 전사한 48명을 추모하기 위한 비다.

당시 제3사단 사단장으로 포항지구 방어전투를 이끌었던 김석원 장군의 주도로 1955년에 건립됐다.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울 당시 김석원은 성남고 교장을 맡고 있었다.

김석원이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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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국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 일본군 대좌 출신이다. 1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남북간 비공식 물물거래 과정에서 발생한 '북어 사건'으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의 불화 끝에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수도사단장으로 복귀했고 이어 포항전투 직전인 8월 7일 제3사단 사단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김석원은 당시 상황을 그가 쓴 <노병의 한>(1977)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당시 제3사단은 포항여중에 후방지휘소를 두고 있었는데, 그 주력부대는 포항북방 강구(江口)에서 전투 중이었다. ...(중략)... 그런데 내가 강구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동안에 평생을 두고, 아니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가장 가슴 아픈 죽엄과 접촉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1950년 8월 11일 새벽, 우회하여 포항을 공격한 공산군의 기습을 받아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그야말로 호국의 꽃으로 산화한 어린 학도병 48명의 죽음이다. 그들은 6·25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자기 스스로 책가방을 내던지고 맨주먹으로 용약 일선에 달려 나온 애국의 화신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나와 함께 싸우기 위하여 내가 속해있던 수도사단으로 갔다가 제3사단으로 전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항까지 도보로 강행군해 온 조국의 꽃들이었던 것이다."(341~342쪽)
 

김석원도 자신의 휘하에 있던 48명 어린 학도의용병의 죽음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김석원은 1955년 흑석동 한강변에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울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 비를 세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교 재건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고 생각될 무렵인 1955년 5월 나는 6·25동란 전 개성의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의 토치카를 파괴, 아군에게 승리의 길을 터주고 산화한 육탄10용사의 조국애에 넘친 감투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육탄10용사 현충비'를,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6·25동란 시 어린 학생의 몸으로 조국의 위난을 구하려고 총을 들어 기억에도 새로운 포항전투에서 애처롭게 죽어간 어린 넋들을 달래기 위해 '학도의용군 현충비'를 흑석동 한강 가에 세웠다. 조국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조국을 구하기 위해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는 것은 애국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애국이며 인간의 행동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나는 언제나 확신하고 있다."(389-390P)

한마디로 말하면 어린 학생들의 조국애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1955년 6월 21일에 열린 '학도의용병 현충비' 제막식에는 함태영 당시 부통령, 이선근 당시 문교부장관, 김태선 당시 서울시장, 신익희, 정일형 당시 국회의원 등도 참석하였다.   

궁금해하는 독자를 위해 한 가지 덧붙이면 위 글에 등장하는 '육탄10용사 현충비'는  1977년 한강대교와 현충원을 잇는 동작대로 확장공사로 서울현충원 안 현충문 오른편으로 옮겨져 있다. 이때 '학도의용병 현충비'도 시내 삼청공원으로 옮길 계획이었으나 극적으로 이곳에 살아남았다. 

영화 <포화 속으로> 속의 학도의용병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48명을 포함한 71명의 학도의용병 이야기는 영화 <포화 속으로>(2010)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배우 권상우가 학도의용병 구갑조 역을, 가수 T.O.P 최승현이 학도의용병 중대장 오장범 역을, 배우 차승원이 북한군 766부대 진격대장 박무랑 역을 연기했다.
 

영화 <포화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 오장범(최승현 분)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실제 학도의용병 이우근(당시 동성중 3년생)이 쓴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 영화 <포화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 오장범(최승현 분)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실제 학도의용병 이우근(당시 동성중 3년생)이 쓴 부치지 못한 편지이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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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동부지역 방어전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 스토리를 보면 실제 포항전투와는 상당히 다르다. 영화 <포화 속으로>가 3사단 주력이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포항여중에 학도의용병만 남겨놓고 떠났다는 설정과 달리 실제로는 3사단의 주력도 포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 역시 아직 부산항에 도착하지 않고 있다는 영화 <포화 속으로>의 설정과 달리 이미 참전한 지 오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3사단의 병력이 고립될 위기에 처하면서 후퇴를 결정하게 되고, 이때 학도의용병들은 8월 9일 배치된 이후 8월 11일 새벽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전면 공격에 직면하여 포항여중에 있던 제3사단 후방지휘소의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하다 11시간의 사투 끝에 71명 중 48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됐으며 13명이 포로가 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포항전투 이후 학도의용병 중대가 재편되면서 부상당한 김용섭 중대장(당시 서울사대 2년)을 대신해 현역 장교로서 8월 20일부터 학도의용병 부대장을 맡아 희생된 이우근(동성중), 윤정한(성남중), 이상현(중앙대) 학생 등 학도의용병 유해 48구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던 남상선(예비역 대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부닥쳤을 때 책과 펜을 총검으로 갈아 쥔 학도병들의 애국심은 비할 데 없이 굳은 것이었고 그러기에 정규군대로서도 어려웠던 그 전투를 훌륭히 치러내고 산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6·25는 살아있다②>, 1975. 6. 13, <경향신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사>(2004)에서는 학도의용병들의 포항전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도병들이 적의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은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특히 병참부는 대부분의 군수품을 민간선박을 이용해 피해 없이 후송하였고, 병기부는 보유중인 노획무기 중 일부는 땅에 묻고 나머지는 휴대해 구룡포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군 보급품의 후송이 손실 없이 이루어져 아군의 차기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6·25전쟁사> 558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영화 <포화 속으로>는 영화답게 실제 사실과 다른 극적인 요소를 더 추가하여 국방부의 공식입장인 <6·25전쟁사> 이상으로 이들 학도의용병을 전쟁영웅화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도정에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우리가 이들 학도의용병이 죽음에 대한 접근법은 남과 북이 노골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 남한의 소년병만 무려 2만9603명

학도의용병이라는 말은 사실 참전 당시 학생 신분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학적을 불문하고 나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쟁 당시 만 17세 이하의 소년병의 숫자는 무려 2만9603명이었고, 그중 소녀병도 467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3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10%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소년병 연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한국전쟁 당시의 학도의용병 6.25한국전쟁 당시 18세 미만의 소년병은 남한만 총 29,603명이 참전하였고, 이중 약 10%에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하였다.
▲ 6.25한국전쟁 당시의 학도의용병 6.25한국전쟁 당시 18세 미만의 소년병은 남한만 총 29,603명이 참전하였고, 이중 약 10%에 가까운 2,573명이 전사하였다.
ⓒ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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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소년병이 있었을 것이고 비슷한 규모의 전사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어린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끝내 목숨마저 빼앗았던 끔찍했던 전쟁으로 기록될만하다.

한국전쟁 당시 이우근 학생과 같이 자원입대한 경우도 있었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징집 당한 경우도 많았다. 많은 학생들이 길을 가다가 강제징집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형을 대신해서 징집당한 경우도 있었다. 학교에 등교했다가 단체로 징집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UN에서 2002년에 채택된 <아동의 무력충돌 참여에 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선택의정서> 제2조에 따르면 "당사국은 18세 미만인 자가 자국 군대에 징집되지 아니하도록 보장한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강제징집자 중에는 남한군이나 북한군 모두 심지어 13~14세의 어린 소년조차 있었다. 이렇게 징집된 소년병 중 수천 명이 전투 중에 사망하기까지 했다.

전쟁은 어린이, 여성들의 안전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은 여기에 더해 어린 소년들의 안전에도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학도의용병 이우근 학생의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시 소년병들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는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생(당시 동성중 3년)의끝내 어머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우리가 이들 학도의용병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이들의 희생을 단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6·25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학생들을 기리는 <학도의용병 현충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라면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린 소년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영구히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할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학도의용병 이우근의 부치지 못한 편지 전문을 싣는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아울러 이 편지가 '학도의용병 현충비' 앞에 함께 전시된다면 전쟁의 참상을 보다 더 생생히 전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배우는 명소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자의 바람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온전히 전해져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1197




[동작 민주올레 18]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①


▶ 코스안내 : ①흑석고개(동양공고·동양공전 터) - ②학도의용병 현충비 - ③효사정문학공원(+심훈생가터) - ④중앙대학교 - ⑤은로초등학교 - ⑥오연상 내과 - ⑦평화의 소녀상 - ⑧조선일보 뉴지엄
  
오늘부터 걷는 흑석길은 흑석동에 있다. 한강인도교 남단에서 한강을 등지고 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흑석동으로 통하는 길이 등장한다. 흑석동은 동네가 앞면은 한강 다른 세 면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어 한강 건너에서 보면 마치 하나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일까? 흑석동은 예로부터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이곳 흑석길에는 동작구가 낳은 최고의 인물 독립운동가 심훈의 숨결이 남아 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앙대 학생운동도 흑석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은로학교에서 개최된 북면 사람들의 면민대회는 '마을민주주의'를 실천한 원형으로 접근해 봄직하다.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 노량진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흑석고개 이야기부터 듣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학교촌'으로 불린 흑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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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북면 흑석리 시절의 흑석동은 1936년 일제의 경성부 확장 방침에 따라 인근 노량진리, 본동리, 번대방리, 상도리와 함께 경성부에 편입된다. 1936년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그 이전 "궁벽한 촌에 지나지 않았던" 흑석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성부로 편입되고 또 한편으로는 턱 앞에 놓인 300만 원의 동양 제1인 한강신인도교가 완성하게 됨을 따라 여러 가지로 교통시설도 편리하게 되어서 날로 발전해가는 터인데 또한 이곳은 주택 지대보다도 학교촌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중앙보육학교를 비롯하여 경성상공학교, 양복재봉학교, 은로학교 등이 나열하여 방금 건축공사를 하고 있는 바 전부 금추에는 완성하게 된다고 한다."(1936. 4. 16)

중앙보육학교는 현 중앙대의 전신이고, 경성상공학교는 지금은 도곡동으로 이사 간 중대부고의 옛 이름이다. 또한 은로학교는 원래 고개 넘어 본동리에 있다가 이 즈음에 흑석동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 동양공고와 동양공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동양공과학원까지 1939년에 들어서게 됐으니 흑석동 일대는 말 그대로 명실상부한 '학교촌'의 지위를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동양공과학원의 규모는 1942년의 합격자 수를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토목과 182명(주간 121, 야간 61), 기계과 119명(주간 60, 야간 59), 광산과 42명(야간 42) 등 총 343명이었다.(1942. 4. 9., <매일신보>)

동양공고와 동양공전 학생들,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지금 노량진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흑석고개에는 동양중학교만이 있다. 이곳에 함께 있던 동양공전과 동양공고가 각각 1970년과 1977년에 연이어 고척동으로 이사 갔기 때문이다.
  

동양공고, 동양공전 학생들의 시위 동아일보 기사(1965. 6. 25)
▲ 동양공고, 동양공전 학생들의 시위 동아일보 기사(1965. 6. 25)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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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동양공고와 동양공전이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그 이름을 알린 것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부터였다.

본격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알리는 3.24투쟁이 3일째 되던 3월 26일, 동양공고 2년생 박재동은 "중앙청 앞의 철통같은 데모저지선을 뚫은" 단 한 명의 학생이었다. 하지만 곧 잡히는 몸이 돼 경찰에 의해 짐짝 취급을 당한다.

동양공전, 동양공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은 한일협정 조인과 함께 시작된 3일간의 휴교령이 끝난 1965년 6월 25일에도 언론에 등장한다. "동양공전 학생 약 120명과 동양공고 학생 약 380명이 교문을 나와 데모"를 시작했다. "남한강 입구까지 나왔다가 경찰이 최루탄 5발을 쏘고 저지"하자 "낮 1시 45분경 허성(15)군 등 40여 명이 연행되고 해산"되었다. 이 데모로 휴교령은 7월 3일까지로 연장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김용원, 동양공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동양공고는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지는 8명의 무고한 시민 중 한 명인 김용원(1935~1975)이 1963년부터 강사 생활을 한 학교이기도 하다.

김용원은 흑석동(비계)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강사 생활을 했는데, 부인 유승옥씨는 흑석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했다고 한다. 김용원은 동양공고 강사 시절인 1964년에도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마치 북한의 지령을 받아 벌어진 사건인 양 호도하려고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정보기관에 연행돼 수난을 당한 바 있었다.

그런데 10년 만인 1974년 경기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다시 한 번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때 김용원은 '북한과 연계하여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했고 1974년에 발생한 대학생들의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리고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에 처해진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법학자협회'는 김용원 등 8명이 사형당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했고, 2007년 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는 이들이 사형 당한 후 32년이 지나서야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 무고한 시민을 사법 살인한 사건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마석모란공원에 있던 김용원의 묘 인혁당재건위의 김용원의 묘는 마석모란공원에 있었는데, 지난 10월 18일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묻혀 있는 <이천 민주공원>으로 이장하였다.
▲ 마석모란공원에 있던 김용원의 묘 인혁당재건위의 김용원의 묘는 마석모란공원에 있었는데, 지난 10월 18일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묻혀 있는 <이천 민주공원>으로 이장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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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정, 후배 서정주를 걱정하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를 주로 썼다고 평가되는 시인 신석정(1907~1974)은 1943년 서정주(1915~2000)에게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정주廷柱에게'라는 부제를 달아 보낸다. 이때 신석정은 전북 부안에 살고 있었고, 부안 바로 옆 고창이 고향이었던 서정주는 1942년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가산을 정리해 한강변 흑석정의 한 기와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
- 정주廷柱에게

흑석고개는 어늬 두메산골인가
서울에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드고

좀 착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눈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리라
(1943)


1930년 초에 서울에 와서 1년여 정도 산 게 전부인 신석정은 후배 서정주가 이사해서 살고 있다는 흑석정에 가본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중후반 이래 '학교촌'으로 불리기도 하며 크게 변하고 있던 곳이지만, 흑석정을 어느 '두메 산골' 쯤으로 상상하고 있다. 하긴 흑석동이 경성부에 편입된 게 1936년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흑석동으로 넘어가려면 흑석고개를 넘어야 했으니 흑석동을 '두메산골' 쯤으로 그리는 것도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2연에서 우리는 신석정 시인의 표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키의 서정주를 "좀 착한 키"로 표현하고 있고,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라는 대목에서는 서정주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 시의 압권은 역시 마지막 4연이라고 할 수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리라"라는 표현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읽힌다.
  

시인 신석정  시인 신석정은 후배 시인 서정주를 걱정하여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지어 서정주에게 보내 격려했다.
▲ 시인 신석정  시인 신석정은 후배 시인 서정주를 걱정하여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지어 서정주에게 보내 격려했다.
ⓒ 신석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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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어둔 하늘'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간단히 설명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일제는 1931년의 만주침략, 1937년의 중국본토침략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압박도 더욱 더 강화했다.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강요,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앗는 조선어 말살정책,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전향강요 등이 그것이다.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석정은 이미 각오가 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 신석정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후배 서정주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리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자신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걱정되는 후배 서정주에게 함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쓰고 버텨나가자고 격려하고 고무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정주, 흑석동에서 친일문학에 빠져 들다

사실 서정주는 흑석동으로 이사 온 직후인 1942년 7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해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친일문학에 이미 빠져들기 시작했다. 시인 신석정이 1943년에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쓴 이유도 서정주의 이런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서정주는 선배 시인 신석정의 충고가 눈이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10, <춘추>), <스무살된 벗에게>(1943. 10, <조광>) 같은 글을 통해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최체부의 군속지망>(1943. 11, <조광>)이라는 소설까지 연이어 썼다.
 

서정주 서정주는 신석정의 걱정을 외면한 채 1942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흑석동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 서정주 서정주는 신석정의 걱정을 외면한 채 1942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흑석동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 미당시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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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여서 일제의 압박에도 쉽게 굴복했고,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서정주는 어찌된 영문인지 시인 신석정과의 '불편한 관계'는 당시에도 철저히 무시했고, 이후에도 우리 국민은 물론 신석정에게도 자신의 친일행위를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천순일파?>라는 시를 통해 궤변을 늘어놓기 까지 했다.

(앞 생략)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뒤 생략)


심지어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1987)까지 써 살인마 전두환을 칭송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친일문인 서정주가 흑석동 시절 썼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시 <마쓰이오장 송가>(1944. 12. 9, <매일신보>)를 소개하며 흑석고개에 담겨있는 사연 소개를 마친다. 마쓰이 오장은 조선인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로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한 인재웅이다.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는 인재웅의 창씨명이었다.

마쓰이 오장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멫 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멫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오겠읍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인씨(印氏)의 둘째아들 스물 한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서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0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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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도교 입구 노량진에서 바라본 한강인도교
▲ 한강인도교 입구 노량진에서 바라본 한강인도교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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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도교의 흑역사

한강인도교(한강대교)는 1917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인도교다. 1900년 한강철교가 만들어진 이후 17년 만에 사람이 물 위를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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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인도교의 수난사에는 을축년 대홍수(1925)와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 유명하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도 가장 큰 홍수로 기록되고 있는 을축년 대홍수는 청파동까지 물에 잠기게 했을 정도였고, 중지도(지금의 노들섬)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한강인도교 북면의 다리를 떠내려가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한강인도교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인 28일 새벽 2시 30분에 벌어진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미 서울시민을 내팽개친 채 기차를 타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뒤늦게 피난 중이던 서울시민 500~800명이 죽음을 맞게 됐다.

한강인도교의 흑역사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쿠데타군이 육군본부와 중앙청 등을 장악할 때 공수특전단을 내세워 헌병대의 저지를 뚫고 한강을 건넌 곳이 바로 한강인도교였다.

반면, 한강인도교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보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들, 한강인도교에서 3.1만세운동을 준비하다

한강인도교는 1919년 3.1혁명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비밀리에 회합한 장소였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주축이었다.

이때 전국을 돌며 만세운동의 준비상황을 점검하던 기독교계 인사인 이인환, 박희도, 오화영, 이필주, 함태영, 안세환, 최성모, 이갑성 등 8명이 거사 3일 전인 2월 26일에 한강인도교 위에서 만났다.
 

민족대표 47인 예심결정서를 담은 동아일보 기사(1920. 4. 8)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이면에서 활약한 15인을 합쳐 원래는 48인이었지만, 33인 중 김병조가 해외로 탈출한 관계로 47인이 재판을 받았다.
▲ 민족대표 47인 예심결정서를 담은 동아일보 기사(1920. 4. 8)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이면에서 활약한 15인을 합쳐 원래는 48인이었지만, 33인 중 김병조가 해외로 탈출한 관계로 47인이 재판을 받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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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3.1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기독교계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한강인도교 위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갈 기독교계 인사를 전형하는 일과 함께 안세환을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 파견하기로 하는 결정도 했다.

당시 한강인도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의 한강인도교 회합은 일제의 허를 뚫고 이뤄낸 쾌거였다.

한강인도교에서 만난 8명의 기독교계 인사 중 '이인환'은 이승훈(1864~1930)의 본명이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였는데,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좌장으로 천도교 측과 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승훈은 이미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는데, 3.1만세운동으로 다시 3년형을 선고받는다. 석방된 이후에도 이승훈은 오산학교 경영에 힘쓰면서 민립대학건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벌이고, <동아일보>가 위기에 몰릴 때는 <동아일보> 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갑성(1889-1981)은 당시 세브란스의전부속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의 조직과 연락을 맡았다. 이갑성은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마산 등지를 돌면서 조직과 연락관계를 정비하고 막 올라온 상황이었다. 이갑성은 3월 1일 당일까지도 김창준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부하는 역할을 맡았고, 김원벽(연희전문), 강기덕(보성법상), 한위건(경성의전) 등 학생과 연계망을 가지고 있던 박희도와 함께 학생들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갑성에게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 조경한, 이강훈 등에 의해 일제에 전향해 밀정까지 했다는 의혹이 한동안 제기됐으나, 구체적인 행적을 조사한 결과 문제제기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1940년대 상하이에 나타났던 비슷한 이름의 밀정에 대한 소문이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해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3.1절 특집, 누가 변절자인가>, 2005. 3. 1, SBS).

3.1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박희도(1889~1952)는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박희도는 정춘수, 최린과 더불어 변절자의 길을 걷는다. 더군다나 자신이 경영하던 중앙보육학교에서 기숙사 여학생들을 상대로 한 '위계에 의한 성폭력' 의혹에 휩싸이는 등 변절자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강진과 이종림,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보트를 타고

일제강점기 한강인도교 아래에는 한강에서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보트장이 있었다. 1930년 이곳 보트장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이도 함께 보트를 타며 한강인도교 아래로 진출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은 여느 유람객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왠지 주위를 살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 두 명의 젊은이는 단순히 한강 유람차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강진(김와시리, 1905~?)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던 인물이었고, 이종림(1900~1977) 역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입국해 영등포 외곽에 아지트를 두고 경성제대 반제동맹단 등을 이끌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람객인 양 보트를 탄 채 한강인도교 아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급사 등을 조직하여 적우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삐라살포는 물론 경성방직 노동자 파업지원 등의 활동을 펼치다 1931년 성대반제동맹 사건 등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경찰의 추적을 받다 강진은 결국 체포되고 이종림은 해외로 탈출한다. 
    

성대반제동맹 사건과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호외(1931. 11. 4)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내서 이종림과 강진(김와시리)이 관여한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과 성대반제동맹 사건을 2면에 걸쳐 다뤘다.
▲ 성대반제동맹 사건과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호외(1931. 11. 4)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내서 이종림과 강진(김와시리)이 관여한 조선공산당재조직 사건과 성대반제동맹 사건을 2면에 걸쳐 다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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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강진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학교를 다니고 1922년에는 러시아공산청년동맹(콤소몰)에 가입했다가 조선공산주의자의 단일대오를 형성한다는 명분으로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종파분자로 몰려 제명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후 만주로 넘어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ML계)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붕괴하자 1930년 1월에는 조선으로 들어와 노동자-농민에 기반한 재건을 목표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강진은 해방이후에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활동했는데, 3당합당(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통한 남로당 결성에 반대해 사회노동당을 결성한 사로계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3남매 독립운동가 김형선과 통한의 한강인도교

한강인도교 남단은 1933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형선(1904~1950)이 일경에 체포된 곳이다. 상하이에 있던 박헌영, 김단야 등과 연계해 조선의 독립과 공산당 재건을 도모하며 중국과 조선을 넘나들던 김형선은 1933년 7월 15일 자신의 인천 아지트가 발각되자 체포망을 피해 인구가 많은 서울로 잠입을 시도한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의 경비가 삼엄하자 김형선은 김포에서 장을 보고 오는 사람으로 변장해 재차 진입을 시도하지만, 일제 경찰의 한강인도교 입구 봉쇄를 뚫지 못한 채 검문에 걸려 끝내 잡히고 만다.

김현선에게 한강인도교는 '통한의 다리'였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하운동의 중요인물 노량진과 인천서 체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형선을 "지하운동의 거두"로 묘사했다.
  

김형선과 박헌영의 검거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33. 8. 17) 김형선이 한강인도교 앞에서 일경에 체포될 즈음 상하이에서는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체포되었지만, 둘은 각각 별도로 체포되었다.
▲ 김형선과 박헌영의 검거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33. 8. 17) 김형선이 한강인도교 앞에서 일경에 체포될 즈음 상하이에서는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체포되었지만, 둘은 각각 별도로 체포되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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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출신 김형선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든 3남매 독립운동가 중 장남이었다. 김형선은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마산청년회, 마산해륙운수노동조합 등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질 때는 12명의 발기인 중 가장 나이 어린 멤버였다. 그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26년 8월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모면했다.

여동생 김명시(1907~1949)는 팔로군 포병대장을 지냈고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였던 무정장군의 비서도 지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말 서울에서 진행된 무정장군 환영회에서 무정장군과 함께 말을 타고 종로 일대를 행진하여 '백마 탄 여장군'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30년대 부산과 진해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헌신한 김형윤(1909~1973)은 김형선의 남동생이다.

김형선은 1933년 한강인도교 입구에서 검거돼 8년형을 언도받고도 1941년부터 시행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때문에 해방이 돼서야 겨우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김형선이었지만,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비극의 소용돌이는 피해가지는 못했다. 해방과 함께 재건된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 김형선은 1950년 9월 미군의 폭격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선의 여동생 김명시의 죽음은 더 비극적이다. 1949년 4월 11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일제시 연안독립동맹원으로서 18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부녀동맹 간부로 있었으며 현재 북로당 정치위원인 김명시(43세)는 수일 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경찰서에 구속되었었다 하는데, 유치된 지 이틀 만에 철장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은 김명시가 자살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3남매 중 김형윤이 그나마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에는 한국현대사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선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과 <노들강변>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들강변>은 1930년대 만들어진 신민요다. 문호월이 작곡하고 박부용이 처음 부른 이 <노들강변>의 작사자는 조선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1907~?)이다. 신불출과 문호월이 함께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던 중 한강인도교를 건너다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한강인도교 아래 선술집에서 작사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불출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맹활약한 연극인이자 만담의 개척자였다. 신불출은 <익살맞은 대머리> <말씀 아닌 말씀> 같은 만담을 레코드로 취입하기도 하고 조선 전역을 도는 공연도 하면서 최고의 만담가로 이름을 날렸다.

예명인 신불출이라는 이름 자체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신불출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1931)에 출연해 마지막 장면에서...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외쳤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함께 독립운동에 나섭시다!"

이렇게 외치다가 연행되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던 신불출은 해방정국에서도 만담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월북하여 '신불출만담연구소'까지 차리지만, 남한이나 북한이나 재기발랄한 그의 성향을 감당할 수 없었던 듯 북한에서도 끝내 숙청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아픈 역사다.
 

동작구가 설치한 노들강변 노래 푯말 한강인도교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다.
▲ 동작구가 설치한 노들강변 노래 푯말 한강인도교에서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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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한강인도교

한강인도교는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중앙대·숭실대생이 이곳 한강인도교를 건너 국회(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 앞과 내무부, 중앙청으로 진출했다. 이때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겨났다.

실제로 중앙대생들은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에도 '중지하라 매국외교 삼천만은 통곡한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한강을 건넜다. 또한 1980년 5월 15일에도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강인도교 위로 행진하여 서울역으로 진출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한강인도교를 건너는 중앙대학생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때 한강을 건너 행진한 이래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수천의 대학생들이 대오를 형성하고 한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겼다.
▲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한강인도교를 건너는 중앙대학생들 중앙대생들은 4.19혁명 때 한강을 건너 행진한 이래 역사의 주요 분기점마다 수천의 대학생들이 대오를 형성하고 한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생겼다.
ⓒ 서울시 빅데이터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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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보라매공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가 끝난 후 시위대열이 시내로 진입하는 유력한 코스에 한강인도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90년 7월에는 보라매공원에서 50만 명이 모여 당시 집권 여당 민자당 규탄대회를 치르는데, 이중 3만 명이 한강인도교를 건너 시내로 진입하려다 용산 방면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1991년에는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장례행렬이 모교인 휘문고로 가기 위해 이곳 한강인도교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행진하기도 했다.

한강인도교는 생존권과 주거권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90년 12월 31일 노량진 재개발지역의 세입자 50여 명은 한강인도교를 막고 "겨울철 강제철거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강제 해산당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한강인도교는 100여 년의 세월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한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9859&fbclid=IwAR0DjvL1Re8pwUPn7O9ZzqftyGH6dPZcIY8kLSEMLzJS8oiOWqHB1VLOZ7s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이어 중국 침략(1937)이 본격화되면서 탄압의 강도는 점차 거세졌다. 이렇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 중에 일제에 굴복하는 이도 늘어났다. 하지만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의 항쟁과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지하운동의 형식을 취하면서 더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시기 노량진 일대는 기층 민중운동과 결합하려는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오성세, 노량진 한강반에 아지트를 설치하다

1925년에 결성돼 그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대표적인 단체의 하나였던 조선공산당이 1928년에 해체된 이후,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이끌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은 여러 갈래로 진행됐다.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이 예심 종결 소식을 전하는 동아입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오성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옥사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 중 5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이 예심 종결 소식을 전하는 동아입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오성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옥사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 중 5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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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아래 재건준비위)도 노량진에 아지트를 설치하고 활동했다. 재건준비위는 만주에서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동만특위와 연계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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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직의 경기도 책임자로 만주에서 파견 나온 오성세(또는 오산세, 1907~1932)와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정종명(1895~?)은 노량진 한강반에 설치한 비밀 아지트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한강반은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기초 조직인 반의 하나로 노량진리에 속해 있었다.

재건준비위는 1931년에 있었던 메이데이(노동절) 격문사건으로 조직원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이때 검거돼 검찰에 넘겨진 인원만 107명에 달해 당시 언론에서는 "1차 조선공산당 사건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오성세와 정종명도 이때 검거된다.

오성세는 함경남도 단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오주혁도 만주와 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오성세는 1929년부터 만주 길림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다 1930년 국내로 파견돼 수원농림 출신의 한전종 등과 함께 재전준비위를 결성하고 조직부 책임을 담당했다.

1931년에는 아래로부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건준비위를 해소하고 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 결성도 주도했다. 이어 쟁의부 책임을 맡아 메이데이를 맞아 서울시내 각 공장에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이끌다 체포됐는데, 1932년 11월 8일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에 옥사했다.

정종명,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서다

정종명은 전남 목포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다. 간호사 출신의 정종명은 1922년에 20여 명의 신여성과 함께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정종명의 어머니도 1919년 3.1만세운동 때 거리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된 경험이 있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정종명은 1925년에는 정칠성, 주세죽, 허정숙 등과 함께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어 1927년에는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건설된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여 김활란, 유각경, 황신덕, 최은희, 주세죽 등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 중앙집행위원장과 의장을 맡으면서 사실상 근우회를 주도해 나갔다.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됐을 때는 그에 발맞춰 근우회를 해소하고, 노동자와 농민에 보다 밀착한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때 재건준비위에 참여하여 모플(혁명자 후원회) 부녀부장을 맡게 되는데, 이때 노량진 한강반의 아지트를 출입하며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정종명(1933. 4. 28, 동아일보) 사진 맨 위가 정종명이다.
▲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정종명(1933. 4. 28, 동아일보) 사진 맨 위가 정종명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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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명의 아들 박홍제도 정종명이 잡히기 1년 전인 1930년에 메이데이 격문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이미 김천소년감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마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정종명은 1935년 7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다. 정종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함경남도를 대표하여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기도 한다. 1937년 출옥 후 어느 시점에 근거지를 함경남도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분단과 함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노량진 소년들, 비밀독서회 활동을 시작하다

1932년 설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벽두에 노량진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진다. 2월 23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노량진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대거 연행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소년독서회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연행된 사람은 전 양정고보생 김명룡과 김만수, 김학수 등 총 9명이었다.

당시 용흥청년회와 함께 양대 청년단체의 하나였던 노량진청년회는 자매단체로 노량진소년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노량진소년회는 매년 어린이날 행사를 지역에서 주도하기도 했다.

연행된 9명의 학생이 참여했다는 노량진혜성소년독서회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노량진소년회 내에 비공개로 조직된 독서회 모임이었다. 이 조직은 오성세와 정종명이 참여한 재건조직위가 운영한 통일전선조직인 반제동맹과 연계돼 활동하고 있던 비밀독서회였다.
  

노량진소년독서회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1932. 2. 25)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량진청년회와 동아일보시흥지국의 긴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
▲ 노량진소년독서회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1932. 2. 25)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량진청년회와 동아일보시흥지국의 긴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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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독서회 사건의 관련자였던 김명룡, 김만수 김학수는 체포되기 6개월 전인 1931년 8월에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시흥군 동면 상도리(현 상도동)와 봉천리(지금은 관악구의 청룡동 등 여러 동으로 나뉘어 있다)에서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신의 기본 활동 기반인 노량진 일대의 상가를 직접 돌며 후원금도 모으고, 브나로드 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시흥지국의 재정 후원도 받아가며 강습소를 운영했다.

당시 노량진에 살던 젊은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동료학생들을 조직하고, 노량진에서는 노량진소년회 활동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공개 소년독서회도 조직하고, 나아가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등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불로 양조장 노량진 지점' 서기 이양재의 정체

1936년 1월 9일, '늙지 않는 술을 담근다'는 '불로 양조장'에서 노량진 지점 서기로 일하던 이양재(당시 25세)는 영등포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그가 연행된 것은 노량진 주택가에서 분실한 조직의 비밀문서가 순찰 중이던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일경이 그 일대를 쥐 잡듯이 뒤진 결과였다.

이양재를 조사한 영등포경찰서는 곧 경성과 인천, 경기도 광주로 수사대를 급파하면서 이양재의 동료 14명도 연행한다. 당시 일경은 이를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으로 이름 붙여 발표했다.

광주공산당협의회는 경기도 광주에서 1930년부터 남한산노동공제회 활동을 하던 석혜환, 정영배(정영린) 등이 일제의 탄압이 점점 거세지자 결국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1933년경에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주도자 석혜환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도 활동한 저명한 사회주의자였다. 광주공산당협의회는 용산과 영등포, 인천 등지의 노동현장으로 조직원을 파견하여 노동운동을 벌이는 것은 물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삐라'(선전물)를 살포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을 벌였다.

일경의 발표에 의하면 '불온서적' 1백 권을 공동으로 구매하여 함께 읽으면서 학습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량진에서 이양재가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되면서 조직원이 대거 체포되고 말았다.
  

광주공산당협의회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6.3.6) <불로양조장 노량진 지점>의 이양재가 잡히면서 시작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군단위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광주공산당협의회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6.3.6) <불로양조장 노량진 지점>의 이양재가 잡히면서 시작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군단위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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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산당협의회가 얼마나 치열한 조직이었는지는 사건 직전 먼저 구속된 조직원 구승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경성 시내에 있던 '용일양조소 서부지점'에서 배달부로 근무하며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추진하다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조안득('용일양조소 동부지점' 근무)을 비롯한 7명과 함께 먼저 구속됐다. 구승회는 폭탄을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의 우두머리인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하고자 무려 네 차례나 기회를 엿보았으나, 아쉽게 실패하고 말았다.

광주공산당협의회의 활동은 군 단위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해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조직원을 파견하면서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례로, 당시 일제에 맞선 대중적 저항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관술, 노량진 전차 종점에도 나타나다

경성콤그룹은 과거 경성트로이카(이재유그룹) 출신의 이관술 김삼룡 등이 주축이 되어 1939년에 결성한 후 1940년 3월 감옥에서 나온 박헌영을 영입하면서 조직의 틀을 갖춰 조직의 이름도 정하고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일제 말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조직이다. 1942년 이후 활동이 크게 위축됐음에도 해방될 때까지 조직을 보존하는 데 성공해 박헌영이 해방이후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경성콤그룹은 1940년부터 1942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한다. 이관술은 김삼룡이 이미 검거된 상황에서 검거 선풍을 차단하고 조직을 정비하고자 이주상의 연락으로 1941년 1월 3일경 김재병과 급히 만나는데, 그곳이 바로 노량진 전차 종점이었다. 이곳 노량진 전차 종점에서는 이틀 후인 1월 5일에도 이관술의 지침을 받은 김재병이 이주상의 연락으로 출판부문의 청목복기(창씨명)를 만난다.

당시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전차는 한강인도교를 건너 '명수대 입구'(흑석리는 일본인 목하영의 주도로 명수대로 부르기도 했다)에서 선 후 노량진 종점까지 왕복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이 경성콤그룹 활동가들로 하여금 은밀히 만나는 장소로 노량진 전차종점을 이용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급한 상황에서 이관술과 김재병의 다리 역할을 한 이주상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한학 외에는 근대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 출신의 혁명가였다. 경성콤그룹에서 금속부문 조직과 선전을 담당했던 김재병은 경찰에 검거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2년 6월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노량진에는 정조가 망해정을 인수하여 정비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다. 정조는 화성행차 때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자주 이용하였다.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은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면서 정조가 직접 이름 붙였다.

1907년에는 고종이 <용양봉저정>을 유길준에게 하사했는데, 그는 '조호정'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용양봉저정>은 일제강점기 때 노량진 수산시장 근처에 있던 <월파정>과 더불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이어 요릿집 '태서관 별장'으로 전락한다. 나라가 망했을 때 명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1932년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된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1936년 일제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나온 직후 '용양봉저정'에 들러 사진을 남기기도 하였다. 안창호는 2년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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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들나루공원의 역사, 노량진 나루터-노량진 정수장-한강선방어전투

박태보의 노강서원 터에서 사육신공원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큰길로 나오면 건너편에 노들나루공원이 있다.

노들나루공원은 과거 조선시대 한양과 삼남지방(충청, 호남, 영남)을 잇는 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가 있던 곳이다. 노들나루공원에는 이곳이 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푯말이 설치돼 있다. 
  

노량진 나루터 예전 표석 지금은 이 표석도 철거되고 서울시가 쇠로 만든 표지판을 세워 놓아 노량진 나투터가 있던 자리임을 연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 노량진 나루터 예전 표석 지금은 이 표석도 철거되고 서울시가 쇠로 만든 표지판을 세워 놓아 노량진 나투터가 있던 자리임을 연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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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이곳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노량진 정수장이 설치된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많이 사는 멀리 인천까지 배수관이 연결돼 물을 공급하게 되면서 이곳은 노량진 정수장으로도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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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정수장은 2001년까지 서울시민과 인천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처음 공원이 조성될 때 이름을 노량진배수지공원이라고 했던 이유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남부수도사업소 시설이 남아 있다. 공원 안에는 이 곳에 노량진 정수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노량진 정수장 터' 기념 표석이 제법 크게 설치돼 있다.

노들나루공원에는 한강선방어전투 기념 조형물도 설치돼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상황에서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진 한강선 방어전투를 기념해 당시 사망한 국군 이름이 새겨진 배경석과 기념 조형물을 조성해 놨다. 

한강선방어전투는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김홍일 장군(1898~1980)이 지휘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장교로 근무한 1932년 당시 이봉창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때 백범 김구의 지시로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공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한강선방어전투는 전쟁 초기 후퇴하는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전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노량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이렇듯 볼거리도 많은 노들나루공원이지만, 그런 구경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정자가 있는 벤치에 앉아 노량진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노량진 일대가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이유는 노량진 나루터가 들어선 이래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던 지역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량진 나루터가 활발하게 역할을 하던 시절 노량진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남지방과 통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량진의 지위는 경인선 개통(1899), 한강철교(1900)와 한강 인도교 설치(1917)로 이어진 근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노량진 일대의 지역주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획득한 정보에 기반해 높은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노량진 본동 살던 박양순, 배화여학교 '3.1운동 1주년기념투쟁'의 선두에

1920년 3월 1일 경성 시내는 일제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성 시민 누구도 1년 전 오늘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던 만세운동이 시작된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일제는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열흘 정도 임시휴교 조치를 내리기도 하고, 3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의 하나인 천도교의 종교 행사마저 열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1년 전 크게 당했던 일제는 경성 시내에 경찰을 미리 풀어서 이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3.1만세운동 1주년기념투쟁'에 끝내 나선 학교가 있었다.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배화여학교, 신명학교이다. 이때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본동리(노량진 본동)에 살던 박양순(1903~?)도 배화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나선다.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기숙사 뒤쪽 언덕과 학교 마당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학교별로 주모자 수십 명 씩을 연행했다. 배화여학교의 스미스, 배재고보의 아펜젤러 등 두 외국인 교장을 '인가취소' 조치해 교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

이때 박양순도 23명의 배화여학교 동료과 함께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는데, 그해 6월에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석방된다. 박양순이 수감돼 있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는 박양순의 수감 당시 사진이 전시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박양순은 그동안 징역 6개월 이상의 경력자만 가능하다는 보훈처의 규정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규정이 바뀌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박양순의 수형기록표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투쟁의 배화여학교 박양순은 1920년 당시 17세의 소녀로 키가 147cm를 갖 넘었다.
▲ 박양순의 수형기록표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투쟁의 배화여학교 박양순은 1920년 당시 17세의 소녀로 키가 147cm를 갖 넘었다.
ⓒ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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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리에 아지트를 두고 있던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1893~?)은 1921년 두 번째 체포될 당시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김경환이 일제에 처음 체포된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님이었던 김경환은 1919년 당시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경북 선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경의 추적에 걸려 체포됐다.

6개월의 형을 산 후 출옥한 김경환은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의 일원이 돼 활동하던 중 국내로 잠입한다.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김경환은 노량진 본동리에 아지트를 두고 멀리 상주와 선산 등 경북 지역의 사찰을 돌면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김경환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곳은 경상북도 문경군 금룡사·대승사·고운사·예천군 용문사와 상주군 내서면 남장사 등이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자금 모금 중 박달준, 김봉률 등과 함께 또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경환은 이번에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경남 양산 출신의 김경환은 <동작구지>(1994)에 시흥군 북면 본동리 출신으로 소개돼 지금도 동작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는 본적지와 거주지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더군다나 여러 차례 정정을 요구했음에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동작문화원 홈페이지에는 변함없이 동작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경환을 잘못 소개하고 있다. 
 

김경환의 판결문 스님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은 2차례 옥고를 치르는데, 두번 째 체포되었을 때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 김경환의 판결문 스님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은 2차례 옥고를 치르는데, 두번 째 체포되었을 때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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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박두종, 6.10만세운동 선두에 서다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맞춰 제2의 3.1만세운동으로 기획된 6.10만세운동은 원래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개량주의로 경도된 신파를 비판한 혁명파)가 중심이 돼 민족협동전선의 형성과 강화라는 전망과 결합해 추진한 사업이었다.

거사 직전 일련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의 권오설을 비롯한 핵심 멤버들이 연행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 학생 등을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추진됐던 일제 강점기 3대 대중운동의 하나다.

이때 주동자 11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던 박두종(1904~1967, YMCA 영어과)은 함경남도 홍원 출신으로 노량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만세운동 당시 시내 죽첨정(지금의 충정로)에 있던 박두종의 하숙방은 주동자들의 아지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로 재정 쪽을 담당했던 박두종은 6월 10일 당일 황금정 5정목(지금의 을지로 5가)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체포됐다. 재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다음해 9월 20일에 석방된다.

당시 재판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박두종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6.10만세운동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색깔론을 들이대고 있었다. 요즘과 비슷하게 이념논쟁으로 끌고가 독립운동의 본질을 호도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재판장이 "피고는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는가"라고 박두종에게 물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박두종의 대답이 놀랍다.

"연구할 마음은 있었소마는 아직 착수는 안 했었오."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박두종의 답변에 재판장은 허를 찔렸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어 재판장은 "만세를 부른 동기를 말해보라"고 질문한다. 이번에도 박두종의 답변이 빛을 발한다.

"동기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오!"

초조해진 재판장은 "피고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있었던가"라고 질문해 스스로 '조선독립'을 먼저 언급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6.10만세운동 관련자 재판을 다룬 동아일보 보도 기사(1926. 101. 3) 박두종은 재판정에서 재기넘치며 분명한 어조로 6.10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6.10만세운동 관련자 재판을 다룬 동아일보 보도 기사(1926. 101. 3) 박두종은 재판정에서 재기넘치며 분명한 어조로 6.10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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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청년들, 노량진청년회·용흥청년회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서다

3.1혁명 이후 1920년대 내내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회 조직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노량진에서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가 조직돼 활동에 나섰다.

1926년 70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노량진청년회는 1924년에 결성된 노강(鷺江)구락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노강(鷺江)은 노량진 앞의 한강을 부르던 별칭이다. 이들은 기관지 <노강>도 발간하면서 노동야학, 강연회, 금주운동, 수재구호활동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처음 결성 당시에는 사무실도 구하지 못해 회원 인국현이 자신의 집을 사무소로 내놨다고 한다.

노량진청년회는 본동리에 있던 은로학교 대강당을 활용해 유명 연사를 초청한 강연회도 자주 열었다.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1926년만 해도 8월에는 "생활개선의 철저한 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남녀대강연회를 개최해 강사로 백신애(경성청년연합회, 소설가), 박원희(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등을 초청해 '여성해방과 경제조건' '우리의 사명' 등을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10월에는 노량진추계대강연회를 개최해 홍병선(중앙기독교청년회)과 유각경(YWCA)을 초청, '교육과 조선의 장래' '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 등의 주제로 강연했다.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한 주민위안 공연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8. 9. 5)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는 주민위안 공연도 종종 개최하였다. 노량진청년회가 개최한 3일간의 소인극은 매회 3,500-3,6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한 주민위안 공연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8. 9. 5)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는 주민위안 공연도 종종 개최하였다. 노량진청년회가 개최한 3일간의 소인극은 매회 3,500-3,6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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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청년회는 동아일보시흥지국의 후원을 받아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동아일보시흥지국의 후원 하에 유명한 사회주의자 한위건(당시 <동아일보> 기자)을 앞세워 '현실을 직관하라'라는 제목으로 영등포, 안양, 군포 등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노량진청년회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청년단체인 경성청년연합회, 경기도청년연합회,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노량진청년회는 무산아동 교육기관으로 노청강습회(1929, 이후)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이후 노청학원으로 이름을 변경한 듯한데, 1932년 '인가 없이 운영한다'는 이유로 폐지명령을 받기도 했다. 1933년에는 정식 인가를 받아 운영하면서 단기부인한글강습소(1935)를 열기도 한다.

용흥(勇興)청년회는 1926년 1월에 발기한 청년 조직으로 노량진 일대에서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양대 청년 조직의 하나였다. 주로 조선일보시흥지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하며 운영됐다. 1927년에는 800여 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하고 청년회관 내에 용흥강습소도 설치해 무산아동과 부녀자를 위한 교육 사업을 벌인다. 
 

용흥청년회의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사진기사(1927. 11. 21) 용흥청년회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노량진 일대 청년 조직의 양대 산맥이었다.
▲ 용흥청년회의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사진기사(1927. 11. 21) 용흥청년회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노량진 일대 청년 조직의 양대 산맥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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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는 강습소 출범 1주년을 맞아 100여 명의 강습소 남녀 아동이 참여하는 용흥학예회를 개최했다. <동아일보>가 이날 있었던 재미있는 해프닝을 보도한다.

당시 시흥군 북면 면장 모씨가 축사를 하면서 "청년사업을 면사무소나 주재소에 지도를 구치 안흐며, 연락을 취치 안느냐?" "그리고 정복을 닙고 나팔을 불며 동리로 행진을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등 애원인지 탄원인지 중언부언 짓거리다가 주최 측의 중지 명령을 받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용흥청년회가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5년에 있었던 용흥강습소의 용흥학예회에는 무려 9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1935. 11. 13, <조선중앙일보>).

용흥청년회도 강연회를 자주 개최했는데 1928년의 춘계강연회에는 이돈화(천도교 개벽 편집인), 방정환(어린이운동가) 등이 연사로 나서기도 한다.

용흥청년회는 박헌영, 김찬, 윤덕병 등이 주도한 신흥청년동맹과 긴밀히 연결된 청년 조직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8916





[동작 민주올레⑭]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⑧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강서원, 민절서원, 사충서원

노강서원은 사육신공원이 있는 작은 봉우리 북쪽 면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육신공원을 둘러본 후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내려가면 길 인도에 있는 '노강서원(鷺江書院) 터' 푯말을 어렵게나마 찾을 수 있다. 인도에 있는 가로등과 신호등 사이에 마치 숨겨놓은 듯이 설치돼 있다.
 

서울시가 설치한 <노강서원 터> 푯말 이 곳에 노강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유일한 푯말인데, 쉽게 찾기 힘들다.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연도도 1968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 서울시가 설치한 <노강서원 터> 푯말 이 곳에 노강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유일한 푯말인데, 쉽게 찾기 힘들다.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연도도 1968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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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육신공원 주변에는 노강서원을 비롯해 3개의 서원이 있었다. 사육신이 죽은 지 200여 년만인 숙종 7년(1681)에 사육신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은 사육신공원 정상부에 있었다. 처음에는 민절사라는 이름의 사당만 있었으나, 숙종 18년(1692)에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거듭났다. 지금도 당시 기둥을 세운 주춧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충서원(四忠書院)은 사육신공원 대각선 건너편으로 노량진역 동남쪽에 있었다. 노론 4대신으로 불리는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제향하기 위해 영조 1년(1725)에 세워진 서원이다.

지금은 학원가가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서울시가 세운 사충서원 푯말은 엉뚱한 데 있다. 한동안 사육신공원 입구에 표석 형태로 서 있다가 위치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자 이번에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길 건너편으로 노량진역을 지나 서쪽의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 설치했다. 사충서원 제자리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조선전기에는 사육신이, 조선후기에는 박태보가

숙종 때 충신 박태보(1654~1689)를 기리고 모신 노강서원은 1695년에 처음 건립됐다. 박태보는 강직한 선비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선전기에 사육신이 있었다면 조선후기에는 박태보가 있었다. 박태보는 소론의 영수 박세당의 아들로 사극의 단골손님 장희빈이 살던 시대의 인물이다. 정선경이 주연을 맡은 1995년의 <장희빈>(SBS)에서는 탤런트 노영국씨가 박태보 역을 맡았다.

장옥정의 소생 윤(숙종 사후 임금에 오른 경종)을 원자에 책봉하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으며 남인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기사환국(1689) 후, 숙종이 이번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려 할 때 박태보는 86명의 뜻을 모아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소를 직접 작성했던 박태보는 속 좁은 숙종에게 혹독한 국문을 당하게 되고, 진도로 유배 가던 중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노량진에서 죽는다. 노량진에 노강서원이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사람들은 스물네 살에 장원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가 서른여섯 한창 나이에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박태보 설화'와 고소설 직전 단계의 '박태보전'을 여러 버전으로 남겼다.

남중일색 박태보, '박태보 설화'를 남기다

'박태보 설화'는 해방이후 백악산인이 수집하여 <이조오백년야사>(1959, 삼문사 펴냄)에 아래와 같이 채록해놨다. 
  

《이조오백년야사》 표지(1959, 삼문사 펴냄) 1950년대 백악산인이 낸 《이조오백년야사》에는 박태보 설화가 전한다.
▲ 《이조오백년야사》 표지(1959, 삼문사 펴냄) 1950년대 백악산인이 낸 《이조오백년야사》에는 박태보 설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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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의 별호는 정재(定齋)다. 그는 어려서부터 슬기로웠고 또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이었다. 참판 이종엽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 아름다운 풍채에 반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고 정재의 유모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유모는 그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였으나, 그 수단으로서는 곧기 참대 같은 정재에게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유모는 그런 이야기를 정재의 어머님에게 해 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런 여인의 생각을 동정은 했으나 아들을 움직여 낼 것 같지가 않아 남편 서계공(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 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여인에게 적원(積怨)하여 전정(前程)에 장해되도록 하지 말라는 훈계를 했으므로 정재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그 여인과 한 번 동침한 일이 있었다. 그 뒤 여인은 정재의 양친을 뵈옵고 스스로 머리를 쪽져서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중략) 그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렀다. 정재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갔다. 그러자 민중전(인현왕후) 폐하는 소동이 일어나 상소하다가 화를 입고 정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정재가 숨을 모을 때였다.

어떤 여인이 와서 뵈옵기를 청한다기에 들이라 하여 보니 그 여인이었다. 정재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 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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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그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 한 번 청해 사랑받은 마음의 님을 뫼시기에 세상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으랴. 가슴이 메어지도록 그리웠던 사람, 해도해도 다 못할 그 동안의 쌓인 이야기를 들어달라 한마디도 못해보고 간 님 앞에 눈물 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었으랴. 울다가 여인은 일어나 나갔다.

그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는 민후가 복위되고 정재의 사당이 필역되는 날 - 그러나 살아서가 아니었다. 눈에 스미도록 흰 소복을 하고는 사당 뒤 석가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어갔다."



지금의 성평등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지만, 그래도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뛰어난 재주에 잘 생기기까지 한 '절개 있는 선비'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후인들이 만들어낸 사랑이야기(love story)일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박태보의 삶과 죽음을 다룬 고전 소설 '박태보전'에는 죽음을 앞둔 박태보의 이야기가 다르게 적혀 있다. 부인이 울며 머뭇거리자
"사나이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라면서 물리치고 아버지 박세당이 보는 앞에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박태보 설화'와 '박태보전'의 공통점은 박태보를 '강직한 선비' '절개 있는 선비'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태보, 혹독한 고문 닥쳐오는 상황에서 동지 오두인을 먼저 생각하다

하지만 정작 박태보의 진면목은 다른 데 있었다. 박태보는 임금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소를 올린 후 이성을 상실한 숙종이 상소를 본 바로 그날 밤 대대적인 국문 회오리를 일으키려는 상황에서 최고 주동자로 몰려 체포를 앞둔 전 판서 오두인을 찾아간다. 오두인은 박태보보다 나이로도 서른 살 위였다.

그는 오두인에게 "글을 결정하고 상소문을 쓴 것은 모두 내 손으로 하였으니, 공(公)은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여 임금을 속이지 마시오"(<숙종실록>)라고 말한다. 동지 오두인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동지를 먼저 생각하고 동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놓치지 않았던 박태보. 오늘날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핵심 덕목의 하나인 '배려'를 박태보는 3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숙종 앞에 끌려간 86인의 좌장격인 오두인으로서는 모든 책임을 박태보에게 미룰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숙종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오면서 "상소문을 지은 사람은 누구이고 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지만, 오두인은 "박태보가 집필하였고, 여럿이 서로 의논하여 지었습니다"라고 답변해 박태보에게 모든 일이 쏠리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는 함께 국문을 당한 이세화도 마찬가지였다. "오두인의 말에 의하면 박태보(朴泰輔)가 집필(執筆)하였다고 하는데, 상소문을 지은 사람도 박태보인가?"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박태보가 쓰기는 했습니다만 상소의 내용은 70여 인이 서로 의논해서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버텨낸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박태보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박태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집안 내력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불의를 참지 못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태보의 이러한 성격은 아무래도 집안 내력이었다. 소론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아버지 박세당은 조선의 주류였던 주자성리학을 다르게 해석하고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사문난적)로 몰려 유배되기도 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박정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었지만, 젊은 시절 사헌부에 근무할 때 다른 사람들은 쉬쉬하고 있는 데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자 좌의정이던 김류를 상대로 "공의 자제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은닉했다고 한다"라면서 거리낌 없이 논박한 인물로 유명하다.

아버지 박세당과 박태보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박세당과 박태보 사이에서는 이런 일화가 순조 때의 노론계 인물 심노숭의 '자저실기'에 전한다.

"하루는 두 사람이 충청도 직산에 있는 한 비석이 길 동쪽에 있는지, 길 서쪽에 있는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상대방을 설복하지 못하자 각자 따로 하인을 보내서 알아보게 했다고 한다."('자저실기', 심노숭)

이런 일화도 마찬가지로 '자저실기'에 전한다.

"부자가 모두 숫자 알아맞히기를 잘 했는데, 박태보가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를 가리키면서 '몇 개가 달렸다'고 말하니까, 아버지 박세당이 '아니다! 몇 개가 달렸다!'고 하면서 아들 박태보가 말한 개수보다 몇 개 적게 말했다. 부자간에 이를 둘러싸고 언쟁이 일어났다.

결국 하인을 시켜 살구를 다 따서 세어보기에 이른다. 결과는 일단 박세당의 승리였다. 박세당은 화를 내면서 아들 박태보에게 "억지로 아는 체하며 이기려고만 들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그런데 꾸중을 듣던 박태보가 벌떡 일어나 곧바로 살구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잎 뒤에 숨어 있던 병든 살구 몇 개를 따가지고 내려왔다. 결국 박태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태보의 이런 성격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던 모양이다. 박태보가 아이였을 때 하루는 박세당이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방의 장판이 송곳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란 박세당이 사연을 캐물으니 박태보가 "송곳으로 벼룩을 찔러 잡으려고 그런 건데 결국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주변에 친구가 별로 없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버지 박세당의 입장에서 보면 똑똑한 자식 박태보가 자신과 성격을 빼닮았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하기까지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이 이미 겪었던 '고난의 길'을 아들 박태보가 똑같이 걷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내가 살아봐서 아닌데~"라면서 훈계조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세당은 박태보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 이야기를 찾아내 열다섯 살의 아들에게 시를 지어 보여준다. 박세당의 문집 '서계집'에 있는 '시태보(示泰輔)'라는 제목의 시다.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 / 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 / 遲行安穩疾行危
일찍이 머뭇거리며 사람들의 뒤에 처져서 갔으니 / 逡巡曾落人叢後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니라 / 范氏之兒是汝師


똑똑한 아들 박태보가 혼자 너무 앞서 가다가 화를 당할까 걱정하는 아버지 박세당의 마음이 읽힌다. 박세당은 아들을 쉽게 설득하기 위하여 '범씨지아(范氏之兒)'라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고사까지 인용했다. 여기서 범씨는 중국 북송 시절 '악양루기'를 지은 인물로도 유명한 명재상 범중엄이고, 박태보가 자신의 스승으로 삼기를 바랐던 '범씨의 아들'은 범중엄의 아들 범순인(요부)이다. 고사의 내용은 이렇다.
 

범중엄이 둘째 아들 요부를 고향인 고소로 보내 보리 500석을 가져오라고 했다. 요부는 보리를 실은 배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단양에 이르러 오랜만에 친구 석만경을 만났다. 그런데 석만경의 얼굴이 어두웠다. 근심어린 표정으로 사정을 물으니 석만경으로부터 "요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아내를 잃었는데, 장례 치를 돈이 없어 겨우 가매장했을 뿐이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요부는 장례를 잘 치르라면서 보리 500석을 배 째로 내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요부는 아버지 범중엄에게 고향 소식을 전하면서 석만경의 어려운 처지를 말했다. 범중엄이 "그럼, 왜 보리를 주지 않았느냐"고 꾸짖듯이 묻자 요부는 "벌써 배 째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고사는 '보리 배'라는 뜻의 '맥주(麥舟)'라는 한자성어로 전한다. 집안도 좋고 능력도 있고 잘 나가는 범순인은 이렇듯 주변을 챙기며 함께 가는 인물이었다. 범순인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등을 거쳐 후에 재상이 되었다.

수락산 자락에서 '박태보 정신'을 되새기다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노강서원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이 6.25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후, 1968년에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졌다.
▲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노강서원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이 6.25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후, 1968년에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졌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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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한강이 넘치고 청파동 아래까지 물이 찼던 을축년(1925) 대홍수 때는 물에 휩쓸려 나갔지만, 곧바로 다시 건립되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후에는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런 노강서원이 박태보의 무덤이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새로 세워진 것은 1968년의 일이다. 이미 도시화된 노량진에 다시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반남 박씨 사패지가 있는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운 것이다. 수락산 자락에는 아버지 박세당의 무덤도 함께 있다.

노강서원이 노량진을 떠나게 된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지만, 수락산 등산을 하면서라도 강직한 선비 박태보의 또 다른 측면인 '타인에 대한 배려'를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태보에게서 배우다 - 김학규
아깝다 태보여!
옳지 않은 일에는 항상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대
어리석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온갖 고문 다 받고서
진도 귀양길에 노량진에서 스러졌네
 
사람들은
서른여섯 젊은 나이 그대 아까워
남중일색(南中一色) 애틋한 <박태보 설화> 남기고
강직한 선비 기리는 《박태보전》 남겼다네
 
우리는 그대 태보에게서
이제 다른 점을 배우고 있지
 
만사에 옳고 그름 분명하고
남보다 늘 앞서가던 그대 태보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라'던
아버지 세당의 당부를 끝내 잊지 않았으니

그대 태보 86인의 연명받아 올린 상소
숙종의 폐부를 찔러 분노케 할 때
먼저 잡혀가는 판서 오두인에게 말했지
"글을 결정하고 상소문을 쓴 것은 모두 내 손으로 하였으니,
공(公)은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여 임금을 속이지 마시오."
 
그건 만용도 아니고 소영웅주의도 아니었지
오직 동지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이었지
우린 이제 이를 일러
'박태보 정신'이라고 부른다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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