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8장]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 남기고 영면

2012/11/04 08:00 김삼웅

 

 

 

김근태가 꿈꾼 나라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였다.”(인재근)

그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는 따뜻한 품성이었다. ‘투사’의 이미지 때문에 흔히 극단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는 혁명보다 개혁, 투쟁보다 참여를 선택한 민주주의자였다. (한승동)

 



 

김근태는 말했다.
“나는 정직과 진실에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 정직하고 성실한 99%의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믿는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정치가 다만 현실일 뿐이라면 개선과 개혁은 어떻게 가능하며, 왜 우리가 피흘리며 군사독재와 싸워야 했는가.”

이명박의 반동적 ‘민간독재’에 분노를 터뜨리며 ‘2012년의 결단’을 추구했다.
2010년 가을부터 그의 말투는 어눌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진 데다, 두 어깨가 굽어져갔다. 고문의 깊은 트라우마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의 훈장’이라고 덕담을 건넸으나 결국 그는 ‘훈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모든 고결한 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까뮈) 그대로였다.

 



 

그가 생애를 두고 추구하는 목표가 민주주의였다면, 병마에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 민주주의적 ‘목표’는 인간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치였다. <한겨레> 성한용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담론과 슬로건’을 묻자 “경제의 인간화라고 할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각(지)자들, 무릇 권력을 탐하는 쿠데타 패거리가 아닌,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혁명가와 민주인사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존엄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근태가 군부독재 시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것이나, 정치판에 진출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탁류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불변의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애착은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까웠다. 그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란 정명을 붙였다. 그에게 하나의 수식어만 주어진다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자’다. 그래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덧붙이거니와 김근태가 추구한 본원적인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고, 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수단이고 외피였다. 그의 말과 글과 행위를 분석하면, 인간을 경외하고 인권을 존중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따뜻한 속살이 드러난다.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껴안은 것이나, 서울역 노숙자들을 찾고 노숙을 체험한 일 등은 입이나 구호로만 떠드는 사람들의 ‘소외계층 사랑’과는 격이 달랐다. 지난날의 힘겨웠던 삶이 내면을 깨끗하게 하고, 내면에 꽉찬 휴머니즘이 ‘인간의 존엄’으로 배양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류의 발전이나 문명의 진보는 ‘인간의 존엄’을 향한 긴 여정이다. 모든 철학ㆍ사상ㆍ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천부인권, 주권재민, 사인여천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1486)를 간행하여 이슈로 제기한 이래 학문과 철학, 종교적으로 연구가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 조지 카텝이 근년에 쓴 <인간의 존엄성>이다.

카텝은 “인간의 존엄은 인간 개개인이나 인류 전체의 정체성에 부여된 실존적 가치”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존엄이 도덕적 가치가 아닌 실존주의적 가치라는 주장이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존재 자체도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문제는 실존적이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은 개인 혹은 인류의 적절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개인, 그리고 다른 종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인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조지 카텝 지음, 이태영 옮김, <인간의 존엄>, 말글 빛냄)

 



 

이제 마무리 하자.
김근태의 이름에는 동시대의 인물들과는 크게 다른 실존적 울림이 담긴다. 젊은 시절 그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며 독재와 싸우고 모진 놈들을 만나 지옥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스노부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정권교체와 정치개혁에 온몸을 던졌다. 많은 일을 이루었으나,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삿된 정상보다 그의 길과 역할은 훨씬 값지다.

그의 생애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민중의 아픔, 민주주의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겪으면서, 반동적 권력 그리고 시대의식이 없는 도구적 지식인ㆍ정치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이었다. 두려움 없는 저항정신과 사심없는 비판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심했으나, 따뜻한 심성과 깨끗한 도덕성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과 함께 대회전을 앞두고 파란많은 생을 접었다.

 



 

64세,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범인들이 600년을 산대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다하고 갔다. 새는 떠나도 울음소리는 남듯이, 그는 실존적 긴 울림을 국민들 가슴에 남긴 채 홀연히 떠났다. 어느 죽음인들 애절함이 없으련만, 김근태 선생의 때 이른 죽음에는 애절함과 더불어 통절함이 묻어났다. 많은 국민이 애통해하였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 벵갈 출신의 작가 타고르의 시, <혼자서 걸어가라>를 김근태 선생의 영전에 헌사한다.

혼자서 걸어가라

당신이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거든 혼자서 걸어가라.
그들이 면벽한 채 움츠리고 떨고 있다면
오, 고독한 이여,
마음을 열고 혼자 외쳐보라.

황야를 건널 때 그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난다면,
오, 고독한 이여,
가시밭길을 내딛고,
붉은 피를 흩뿌리며, 혼자서 걸어가라.

폭풍이 몰아치는 맘 그들이 빛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오, 고독한 이여,
고통의 번갯불로, 당신 가슴에 불을 붙여라.
그리고 홀로 타게 내버려두라.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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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8장]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 남기고 영면

2012/11/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민주사회장으로 엄수된 3일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가 열리고 있다.

 

김근태는 11월 27일부터 여러 장기의 기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30일 새벽 5시 31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장례 절차는 그의 동지ㆍ후배들의 뜻에 따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발인제는 3일 오전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미사와 영결식은 당일 8시 30분부터 명동성당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연말 연초의 혹한에도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애도하였다. 그러나 국가 폭력의 하수인 이근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추모객 1,000여 명이 참석한 영결식에서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착한 사람들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고 그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 세상을 다스리시는구나’ 하게 하소서.”(시편 58. 10~11)라고 기구하였다.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운구 행렬은 청계천 전태일 다리와 민주통합동 도봉갑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노제를 지내고, 오후 1시 30분 고인의 생전의 뜻에 따라 민주화의 동지 전태일, 문익환 등 130여 명의 민족ㆍ민주열사가 묻힌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ㆍ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의 친구 조영래의 옆 자리였다.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자이크와 “2012년 투표하라. 참여하는 사람이 권력을 만들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라 적힌 걸개그림이 세찬 바람에도 찢기지 않고 버티었다. 고인의 꿋꿋한 의지를 닮은 듯 했다. 추모문화제과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들은 “우리 모두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고 입을 모았다.

<경향신문>은 사설 <민주화운동의 큰 별 김근태를 보내며>(12월 31일)에서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진정성의 정치를 실천한 몇 안 되는 존재였다”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늘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추모했다.

<한겨레>는 사설 <‘인권’, 영면한 김근태의 영원한 희망>(1월 4일)에서 “그의 영면으로 말이 많은 빈자리가 한없이 크지만, 오히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유지가 눈 속의 댓잎처럼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까닭을 전하고, “전기 고문 속에서도 그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 곧 민주주의와 인권의 희망이었다. 이제 누구인가. 그가 남긴 그 희망을 품고 전진할 이들은” 이라고 생자들의 의무를 일깨웠다.

영국의 권위지 <더 타임스>는 1월 3일치에서 5단 크기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이 한국 정치인 부고를 한 면의 3분의 1 이상을 할애해 취급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기사에서 그의 민주화 투쟁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도 30일치 인터넷판에 부고 기사를 싣고, “그의 얼굴에 늘 보이는 미소는 그가 독재정권에서 당했던 고문 흔적을 가렸다”고 썼다. 19대 총선에서 도봉구민들은 고인과 함께 민주화투쟁에 헌신해온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다.

고 김근태동지를 대신하여 인권상을 수상하는 인재근의원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사후에 진행되었다. 고문생존자 단체 ‘진실의 힘’은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고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 2012년 6월 27일 부인 인재근 의원이 남편을 대신해 받았다. 인재근은 수상소감에서 “김근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였을 것” 이라며 “고문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며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도 설립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법부와 기득권 세력의 비상식을 겨눈 영화 <부러진 화살>을 찍은 정지영 감독은 고인의 고문 실상을 주제로 <남영동 1985>를 제작하고, 석좌교수로 활동했던 우석대학에서는 2012년 9월 7일 <김근태 민주주의 연구소>(소장 최상명 행정학 교수)를 개설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종합대학에서 정치인 개인의 연구소를 개설한 것은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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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8장]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 남기고 영면

2012/11/02 08:00 김삼웅

 

 

2011년 3월 8일 민주당 내 재야·친노·486 그룹을 망라한 '진보개혁모임' 창립대회에서 김근태 공동대표와 임채정 전 국회의장, 정세균 최고위원 등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보좌진을 해체하고 자동차도 팔았다. 수입이 없어서 비서에게 줄 월급의 마련도, 승용차의 기름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품성대로 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여느 정치인들처럼 입으로는 ‘서민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의나 집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할 때면 버스나 전철을 타는 곳으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중고차라도 한 대 사주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반대했다.

“자가용에선 혼자서 나라를 생각했지만 이젠 내 옆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부딪힐 수 있어 좋다”고 말하곤 하였다.

 


6월항쟁 24돌이던 지난 2011년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이행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시민들과 함께 앉아 있는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모습

 

김근태는 사망할 때까지 도봉구 창1동에서 살았다.
2004년에 처음으로 매입한 집이었다. 70년대에는 부천시 신곡동과 신내동에서 살다가 1980년 5월 인천남구 구월동, 1983년 5월 부천시 역곡동으로 이사하였다. 서울시민이 된 것은 1986년 3월 강북구 수유2동으로 전입하면서였다.

이어서 수유2동과 수유3동의 전세로 전전하고, 1995년 10월 말 형의 집 근처인 도봉구 창1동으로 이사하여 2000년까지 7년을 살았다. 김근태의 가족이 전세를 면한 것은 2000년 4월 재선 뒤 창1동의 삼익빌라를 매입하면서였다. 김근태는 이 집에서 6년여를 살다가 운명하였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김근태는 3선 의원과 장관, 집권당 대표를 지낸 정계의 중진인데도 그의 집은 평범한 서민생활 그대로였다. 부부가 함께 물욕이나 사치ㆍ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젊은 시절부터 노동자ㆍ서민과 더불어 살겠노라 다짐해온 의지의 소산이었다.

김근태는 정치권에서 신분과 위상의 변화에도 도덕적 결백성을 지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박해와 정치적 격랑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결백성’ 때문이다. 그는 지식인의 엄격성과 정직성을 신조로 하면서 스노브(속물)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켜냈다.

김근태는 매년 9월경이 되면 몸살ㆍ열병을 앓았다.
1985년 9월에 고문을 당한 이후부터다. 멀쩡하다가도 9월이 되면 거짓말 같이 열병이 도져서 열흘 쯤 앓는다. 이때가 되면 각별히 조심을 하고, 정치활동의 일정도 느슨하게 잡았다. 병마가 서서히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2006년에는 파키슨씨 병 증후군이 나타났다. 약을 계속 먹어서인지 병세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것은 2011년 가을이다.
뇌정맥혈전증이란 진단이 나왔다. 몸 상태가 안 좋아 MRA를 찍으니 뇌졸증과 비슷한 것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병이라 했다. 혈압도 높지 않고 하여 의심조차 안 했던 병이다.

뇌정맥혈전증은 신경계 교란으로 생긴 것인데, 보통 전기고문을 받으면 신경계 교란이 생긴다. 외국 의료잡지에도 논문이 실렸다고 한다. 10월 중순까지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등 그렇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상 손수건을 들고 다닐 정도로 만성비염을 앓고 있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비염이 생긴 것이다.

김근태는 12월 초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남달리 사랑했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병세의 악화로 끝내 딸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은 거칠 것이 없었다.
검찰ㆍ족벌언론과 3각편대를 이루면서 퇴임 뒤 향리로 내려간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일가)에 대한 융탄폭격으로, 끝내 그를 투신자살의 길로 내몰았다. 이어서 노무현 국민장의 뙤약볕 아래 3시간을 버티었던 김대중 전대통령도 얼마 뒤에 서거하였다.

여기에 두 전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족(鼎足)을 이루었던 김근태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진보민주 진영은 3년여 사이에 민주화의 3대 축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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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8장] ‘2012년을 점령하라’ 유언 남기고 영면

2012/11/0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자신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려 회복한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권에서 5, 6공 시대로 역류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의를 날카롭게 투시하던 그의 시선은 민주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활동으로 나타났다. 분주하게 거리를 누비면서 리영희 선생이 말한 ‘1인분의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2008년의 촛불집회에 시민들과 함께 참여하고, 2009년 ‘용산참사’의 현장에도 빠지지 않았다.
용산에서는 여러 날째 살을 에는 차거운 바람에 콧물이 흐르면 수시로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슬퍼해주십시오. 그래야 서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울먹였다. 그의 목이 메이는 듯 하자 어느 중년 여성이 따뜻한 음료수 한 병을 건네주자 그는 마시는 듯 하더니 옆에 있던 청년에게 넘겨 주었다.(저자의 목격)

 



 

2011년 그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해결을 위한 3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이들을 성원하였다. 그리고 위기에 몰린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하자 이를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2008년 2학기부터 한양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한국정치론을 강의했다.
2011년에는 전주소재 우석대학에서 석좌 교수로 임용되어 강의를 맡았다. 강의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고, 그의 강의는 대학가의 화제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이 취임 초기부터 난폭성을 드러내자 ‘민간독재’라고 줄기차게 비판했다. 2009년 봄 이명박 정권의 사병화된 검찰의 날선 수사가 노무현의 심장을 겨냥하자 “검찰의 정치수사를 중단하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많은 현역 정치인들이 침묵할 때이다.

천안함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폭격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신공안 정국이 조성되었다.
김근태는 MB정권과 수구세력의 광신적 반공주의와 맹목적 냉전의식, 민족분단의 영구화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제3기 민주정부의 수립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야권통합에 힘을 보탰다. 민주통합당의 ‘통합’에는 그의 숨은 노력이 컸다. 민주통합당은 그를 상임고문으로 추대하였다.

 


송영길 민주당 인천시장 후보가 24일 인천 부평역 유세에서 정세균 대표, 김근태 선대위원장과 함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사찰 대상에는 김근태가 포함되었다. 비록 총선에서 낙선한 원외 인사이지만, 그의 비중과 끝임없는 민주화 활동을 MB정권은 샅샅히 추적하였다. 민간인 김종익 씨를 불법 사찰한 국무총리 지원관실 원충연 전 조사관의 수첩에 김근태를 비롯하여 이용득 전 한국노총 위원장,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의 동향보고 사실이 나와 있다.

국무총리실이 이러했을 때 전문 정보기관에서는 어떠했을까 의문이 따른다. 그는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주도할 때 일상적이 되다시피한 수배와 사찰에 이골이 난 까닭에, 그리고 사생활이 깨끗하고 사회활동이 공개적이어서 불법사찰에도 빌미가 잡힐 일이 없었다.

김근태는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2009년 8월부터 신자유주의 극복과 대안 모색을 위해 공부모임을 만들어 입원 직전까지 22차례의 세미나를 열었다.

김근태는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한 편의 글을 올렸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사실상 유언이 되다시피한 대국민 메시지였다.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의 의지와 소망이 담긴, 짧지만 울림이 긴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는 걸개 그림으로 만들어져 그의 영결식장과 안장식장에 내걸렸다.

김근태는 2012년의 대선에 큰 비중을 두었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메시지보다 3개월여 앞서 정치경영연구소와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 (앞장에서 일부 소개)에서 대선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민생문제’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에 비중을 두었다.

내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세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출대기업에만 이롭고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물가는 폭등하는 고환율 제도나 부동산 버블의 원인이 되는 인위적 저금리 등의 정책을 고쳐 나아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철학과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루기 힘들고, 민생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제의 구성주체 중에 재벌과 부자들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제정책운용의 철학적 기저를 거시지표 중심의 ‘국가경쟁력’ 보다는 국가 구성원 하나 하나가 경쟁력을 갖추는 ‘국민경쟁력’에 기초하는 경제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이 놓인 국제사회 현실에서 보더라도 냉전 이후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냉전이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여기에 친미세력과 친중세력이 동아시아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한국은 그간 정치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확대 심화,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교역이 획기적으로 늘고 인적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큰 변화, 즉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관계를 고민하고 추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정권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비전의 정책연합을 기초로 통합과 연대의 과정을 이루는 원탁테이블의 구성을 통해 한나라당과 1:1구도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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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31 08:00 김삼웅

 

 

2008년 4월 9일 실시된 제18대 총선은 김근태에게 횡액이었다.
투표 5~6일 전까지만해도 여론조사에서 훨씬 앞섰던 것이 개표결과 패배로 나타났다. 뉴라이트재단 상임이사 출신인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한 것이다. 개표 결과 김근태 3만 1,335표(46.2%), 신지호 3만 2,613표(48%)였다.

1,278표 차이의 낙선이었다. 제18대 총선에서 서울 지역에 출마해 박빙의 접전을 펼치다 낙선한 상당수 통합민주당 후보들이 상대측의 ‘뉴타운공약’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4·9 총선 서울 도봉갑에서 맞붙는 김근태 통합민주당 후보(왼쪽)와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

 

김근태의 상대 후보는 뉴타운은 물론 삼성 계열사도 유치하겠다고 화려한 공약을 남발했다. 선거 뒤에 이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근태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12년 동안 해온 지역사업과 국가차원의 역할을 설명했지만 뉴타운 광풍을 누르지 못했다. 18대 총선에서 김근태의 낙선은 정치권에서 이변 또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언론의 보도다.

김근태 전 장관은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후보 경선을 했던 대선 주자급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치권 안팎에서 김근태 전 장관의 패배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의 화려한 정치경력 때문이 아니다.

김근태의 삶과 신지호의 삶을 비교할 때 ‘김근태의 패배’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민이 선택한 결과였지만, 도봉구민의 뜻이 담긴 결과였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김근태 전 장관은 정치권에서 대표적인 ‘저평가 우량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반인들의 마음을 울리는 매력과 흡인력은 떨어지지만 그의 ‘진정성’과 자질은 정치인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수준이다.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기 대통령감 1,2위에 이름을 오르내렸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주석 10)

 


2008년 6월 20일 저녁 서울 시청광장 앞에서 열린 '48시간 비상국민행동' 44차 촛불문화제에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부인 인재근씨가 함께 참석하여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 철회와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제18대 총선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민주당 고문 그리고 민주당 진보 개혁모임의 대표로서 당의 개혁과 여러 세대 정치인들과 시민 사회를 규합하고 이끄는 역할에 나섰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이 낙선하면 정치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만, 김근태는 그동안 쌓아온 정계의 위상으로, 낙선한 전직 의원인데도 할 일이 많았고, 민주당 진보개혁세력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은 벗어던지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2011년 3월 8일 ‘민주당 진보개혁 모임’을 결성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게 소리처럼 김근태는 다시 바빴다. 건강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운동을 열심히 했다. 틈틈이 땀 흘리는 운동을 많이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도봉구에 내시 환관 묘 수백 개가 방치되어 있는 초안산에 올라갔다 내려온다. 가을이나 겨울에도 한 번 올라갔다 오면 땀에 흠뿍 절었다. 주말에는 동호인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김근태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결성하여 다시 정치일선에 나서면서 2011년 4월 11일치 <한겨레>의 <한겨레가 만난 사람>에서 모처럼 긴 대담을 나누었다. 인터뷰어가 물었다.

“진보개혁모임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모임을 왜 만들었나?”

“한마디로 정권교체 위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김근태는 2012년의 정권교체를 위해 다시 발을 부쳤다. 비록 원외의 처지이지만 여전히 당의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어서 당의 진로와 정책방향을 제시해왔다.

 


30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민주당 내 진보개혁성향 전·현직 의원 모임인 (가칭)‘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서 지도위원을 맡은 김근태 전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대한민국은 신공안정국'이라 규정하고, '민주연대는 민간독재에 맞서 맨 앞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에서 김근태는 대선과 총선에서 민주세력이 패배한 이유, 범야권의 역할, 진보정당과의 관계, 대선승리 방안,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인식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범야권 통합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브라질의 룰라가 12개 정파를 등록시켜 각 정파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이뤄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당, 진보정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 정당과 시민사회, 대중단체 조직, 노동자와 농민 조직이 참여하는 원탁 테이블을 구성하는게 필요하다.”

박근혜에 대한 김근태의 평가는 날카롭다.

“나는 그가(대통령이) 안 됐으면 좋겠다. 지난 대선 때 ‘줄푸세’(줄이고, 풀고, 세우고)는 대표적인 시장만능주의 공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복지를 얘기한다. 일관성이 없고 설명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체계적인 철학과 비전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그가 반대할 때 보니까 정서와 마인드가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더라. 정치인으로서는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국가지도자로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신문 1면을 다 차지한 인터뷰 끝에는, 김근태가 인터넷 홈페이지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누군가 해야 한다면 김근태가 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용했다.

1970년대 어느 추운 겨울날, 저는 수배자로서 길가의 갈대밭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어쩐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이 슬며시 먹빛으로 변하고, 먹빛 하늘이 청동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 같았습니다. 결국 저에게 아침은 왔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죽도록 몸살을 앓았지만, 저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주석 11)

김근태는 이해 7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근황과 시대상에 대해 소신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여당의 중요한 정치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진행하고 <프레시안>에서 보도한 것이다.
두 정권에서 요직에 있었던 누구도 이같이 진솔한 사과를 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민주당의 개혁방향에 대해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민주당이 반 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1대1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인터뷰에서 실업과 비정규직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우자”고 힘주어 역설했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2008년 12월 2일 민주당내 개혁성향 모임인 민주연대 창립대회에서 정세균 대표와 김근태 전 의원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근태는 인터뷰에서 2012년의 대선을 앞두고, “한국사회에 필요한 리더십”과 관련하여 예리한 진단을 내렸다.

두 가지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압도적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회경제적 강자 간의 대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아닌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G2의 책임과 역량을 동아시아에서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방안과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다. 또 6자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 이러한 비전을 갖고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근태는 인터뷰에서 ‘한국사회의 미래상’을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 모델이 더 적합하다고 역설했다.

미국 시스템보다는 북유럽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더 적합한 모델이라고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는 다수와 가진 것이 많은 소수가 대타협을 해 나아가자는 시스템이 다른 그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유럽 시스템에는 사회협약, 사회합의의 구조와 정신이 베겨있다. 그런 제도들을 통해 우리 사회시스템에 대해 논의를 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적 시행착오를 줄이고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 고유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사회 시스템을 보니 한국의 시스템으로도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스웨덴 인구가 천만 명 정도인데 한국은 오천만 명, 남북한 합치면 칠천만 명 정도 되니 동아시아의 큰 스웨덴이 되자는 것이다.

인터뷰어의 “현재 꿈이 있다면?”의 질문에 김근태는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제시한다.

북한과 중국의 동북 3성을 왕래하고 방문하고, 그리고 물류를 이동시키는 상황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도 가난에서 극복되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북한뿐만이 아닌 동북 3성의 조선족, 중국의 한족, 러시아 등과 협력도 하며 머리를 맞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솔선수범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소수집단이 보호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시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친구로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주석 12)


주석
10> <연합뉴스>, 2008년 4월 17일, 기자칼럼, <‘김근태’ 버리고 ‘신지호’ 택했던 18대 총선>.
11> <한겨레>, 2011년 4월 11일, 인터뷰/성한용 선임기자, 정리 석진환 기자.
12> <프레시안>, 2011년 7월 5일, <청년들이여 미안하다, 그러나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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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30 08:00 김삼웅

 

 

범여권내 예비대선주자인 손학규ㆍ김혁규ㆍ이해찬ㆍ한명숙ㆍ정동영ㆍ천정배 후보 6인은 지난 7월 4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근태 전 의장 주선으로 열린 대선예비주자 6인 연석회의에서 만나 대선체제 정비와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선출문제를 논의했다.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당내에서도 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근태는 진보개혁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터라, 이번에도 우리당과의 재통합에 앞장섰다.

국민의 여론에 밀린 민주신당은 2007년 8월 20일 우리당을 흡수합당하여 다시 143석의 원내 1당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4대 개혁입법이 좌절된 것을 비롯하여 대북송금특검, 분당, 이라크파병, 한미 FTA 협상 추진, 천정부지 치솟는 아파트 값의 폭등 등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반현상이 심해지고, 민심도 여당에 등을 돌렸다. 민주신당이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민주신당에서는 정동영ㆍ손학규ㆍ이해찬ㆍ유시민ㆍ한명숙 등 10여 명이 자천 타천으로 대선 후보에 나섰다. 김근태는 여러 날 고심을 거듭한 끝에 입후보를 접기로 결정하였다.

김근태가 대선불출마를 결정한 데는 건강과 함께 대중성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식한 것도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준만 교수는 김근태의 ‘약점’을 대중성 부족이라 들었다.

김근태는 비단 정치권 인맥뿐만 아니라 민주화투쟁 경력, 능력, 인품 등 무엇하나 빠질게 없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에겐 큰 약점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대중성이다. 다른 면에선 탁월한데도 그만 그 대중성에 발목이 잡혀 대권 주자로서 그간 큰 손해를 봐왔던 것이다.
(주석 8)

김근태의 불출마 배경은 당내 사정도 변수가 되었다. 이라크파병과 한미 FTA 협상 반대 ‘투쟁’으로 노무현 정부의 핵심세력으로부터 사이가 벌어졌다. ‘친노그룹’의 진영에서는 김근태를 한솥밥 먹는 동지로 보려하지 않았다. 마치 동교동 주류에서 배척받았던 처지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그는 정치 입문 이래 늘 비주류였다. 장관, 원내대표, 당의장 등을 지냈으면서도 주류가 되지 못하였다. ‘바른 말’과 ‘강한 소신’, 여기에 성격상 대중성의 부족이 만든 현상이다.

김근태가 불출마를 결정할 무렵 한 중견 언론인은 <김근태의 소망>이란 칼럼을 썼다.

“김근태가 대선출마를 포기한 데는 건강탓도 있을 것 같다고 누군가 귀뜸을 했다. 며칠 전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중요한 원인은 아니지만 관련이 좀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왈칵 슬픔이 밀려들었다. 가해자들은 멀쩡한데 피해자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또다시 손해보는 그런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 칼럼의 핵심은 “포기선언 뒤 김근태는 ‘대통합’과 후보연대회의를 위해 뛰고 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다”는 대목이다. 성정이 고운 그는 자신의 처지는 뒤로하고 통합과 연대를 위해 헌신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대선주자를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뭘까? 그는 민주세력이 다시 한 번 집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국민들의 분열이 심각하다. 양극화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민주세력이 갖고 있다.

둘째, 추가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 했다. ‘승자독식’ 철학을 가지고 있는 한나라당은 할 수 없다.

셋째,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임기 안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민주세력이 집권해야 한다.

논리정연했다. 그 과정에서 김근태 개인에게 돌아오는 정치적 이익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민주주의 발전과 정책을 위해 평생을 싸웠다. 87년 6월 항쟁은 절반의 승리였다.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발전해 열매를 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큰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다.”
(주석 9)

 


28일 오후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선가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발대식 '가족행복시대 여는 날'에서 정동영 대선후보(가운데)와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 전 총리, 손학규 전 지사, 오충일 당 대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10월 14일 대통령후보 서울의 최종 경선 끝에 정동영 후보가 누적 득표 21만 6,984표(43.75%)를 얻어 16만 8,799표(34.03%)를 얻은 손학규를 누르고 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이해찬은 11만 128표(22.20%)를 얻었다.

12월 19일 실시된 대선은 민주신당 정동영, 한나라당 이명박, 무소속 이회창,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노동당 권영길, 민주당 이인제 후보의 경쟁구도였다.

투표 결과는 민주신당에 참담한 민심의 이반을 보여주었다.
선거 과정은 물론 그 개인에게 온갖 비리와 네거티브가 드러난 한나라당 이명박이 48.67%의 득표율로 민주신당 정동영을 500여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명박이 총유권자 3,765만 3,518명 중 2,368만 2,063명이 투표에 참여, 투표율은 62.9%로, 직접선거로 치러진 11번의 대선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진보진영은 10년 만에 보수세력에 다시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개표하는 날, 김근태는 뜬 눈으로 이를 지켜보면서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그리고 당의 대표를 지낸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노무현 정부 초기 민주당과의 분당 이후 민주개혁 세력의 분열과 이합집산이 대선의 참패로 나타났다고 진단하고, 민주개혁세력의 단결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김근태는 수구보수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앞날을 설계하는데 여러 날을 보냈다. 패배의 아픔을 달래기도 전에 당선자 이명박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듯이 설치기 시작했다. 임기가 남은 기관장을 쫓아내고, 민주정부에서 추진해온 과거사청산 기관에 대한 해체 발언이 공공연하게 쏟아졌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부인 김윤옥씨가 19일 저녁 여의도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선대위 관계자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공세였다.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은 노무현 정부 중반기 무렵부터 이 말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정부여당을 공격했다. 원래 일본 극우세력이 경기침체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기까지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이라 자평한 것을, 한국의 수구세력이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에 갖다 부친 것이다.

김근태는 2006년 8월 24일 당의장 재임시에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뉴딜 행보의 일환으로 시민사회단체를 찾은 자리에서 “지난 10년 동안 정권을 창출하고 민주개혁세력이 민주주의 진전을 이뤄냈을 지 모르겠으나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는 무능했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IMF 경제식민지 체제를 불러온 한나라당이, 이를 극복하고 어렵사리 국가경제를 살려낸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데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한나라당식 ‘잃어버린 10년’의 발상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 등 경제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김근태는 2006년 11월 21일 열린정책연구원의 전문가초청 부동산정책간담회에서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또 다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미리 예방하고, 방지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럴 때 정책 수단은 어떻게 동원되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말씀을 듣고자 하고, 만약에 그런 불행한 상황이 온다면 일본이 경험했던 ‘복합 불황’이나, ‘잃어버린 10년’ 같은 중대한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의견을 듣고자 한다”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했다.


주석
8> 강준만, <김근태 : ‘대중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물과 사상>, 2005년 6월호, 108쪽.
9> 성한용, <김근태의 소망>, <한겨레>, 2007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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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9 08:00 김삼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은 27일 오후 2시부터 한미 FTA 협상중단을 촉구하며 국회 본관 로텐더홀 앞에서 시한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김근태가 이라크파병 문제에 이어 또 한번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난제는 정부의 한미 FTA협상 문제였다. 김근태는 한미 FTA 협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로 인하여 정부와 충돌하고 당내에서도 코너로 몰리고, 수구언론에 의해 매도되었다. 정부는 2006년 2월 3일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상 출범을 공식 선언하고, 2007년 4월 2일, 14개월 간 긴 협상을 마치고 최종 타결의 뜻을 밝혔다. 5월 25일에는 협정문 내용이 공개되었다.
당의장직에서 물러난 김근태는 2007년 3월 27일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추구하며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국회 본관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집권당의 당의장을 지낸 처지에서 단식농성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졸속적인 협상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 길을 택했노라는 설명이었다. 다음은 단식 성명의 요지.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단식이 김근태에게는 큰 생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생채기를 피할 수 없고, 얼마쯤 가지가 부러지고 타버리더라도 천둥번개를 피하지 않고 제 몸으로 막아내는 들판의 나무 한 그루처럼,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김근태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한미 FTA 반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협상단의 화려한 미사여구만을 믿고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천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그 후에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오늘의 협상결과가 또 다른 저성장과 더욱 심각한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국민 앞에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한미 FTA 협상을 두고 국론이 양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대로 묵과한다면, 파국적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심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온통 한미 FTA 체결에 매달리는 협상단과 정부를 이대로 묵과할 수 없습니다. 권한만 있을 뿐 훗날 국민의 삶에 아무런 정치적 책임을 지지도 않을 관료와 정부의 무책임과 무모함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밥을 굶는 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언컨대 지금 우리의 협상은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스위스도, 말레이시아도 미국과의 FTA를 중단했습니다. 자국 국민을 위해 정부가 용단을 내렸습니다. 당장, 지금 진행되는 한미 FTA 협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장, 한미 FTA 협상을 국민과 국회에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주석 6)

김근태의 단식투쟁에는 당내외의 찬반이 엇갈렸다. 반대측은 ‘개인적인 정치쇼’라고 비판하고, 지지측은 ‘역시 김근태’라는 성원이 따랐다.

김근태는 단식 1주일 만인 4월 2일 초췌해진 몸으로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단식을 풀면서 다시 <국민 여러분께 무릎 꿇고 말씀드립니다>는 제하의 성명을 통해, 거듭 한미 FTA 협상의 졸속 체결을 비판했다.

이 성명에서 김근태는 협상의 본질과 함께 이를 강행하는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일부 관료와 일부 보수언론, 일부 정치권이 삼각동맹을 맺고 펼치고 있는 저급한 이데올로기 공세입니다. 이들은 한미 FTA 에 대해 우상숭배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시한에 쫒겨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주장, 합리적인 주장 조차 쇄국주의자, 개방에 반대하는 철부지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협상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한미 FTA를 하면 나라가 살고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외눈박이식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분통하는 심경을 쏟아냈다.

진정성이 담긴 김근태의 목소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 사회 단체의 촛불 집회와 서명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노무현 정부와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낸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 곧 묻히고 말았다. 김근태의 반대 주장은 당차고 결연했다. 그는 계속하여 한미 FTA의 졸속 추진을 비판하였다.

먼저,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해 협상 결과를 파악하고, 정부 관계자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했는지 책임을 추궁하겠습니다. 권한에는 합당한 책임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그동안 정부 관계자들이 협상정보와 협상전략을 독점해온 만큼 책임추궁은 추상같이 엄하고 가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는 6월, 정부간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매진하려고 합니다. 남은 석 달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협정체결을 저지할 생각입니다. 정당과 국회의 울타리를 훌훌 뛰어넘어 정부에 협정체결 유보를 요구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기득권이나 저 자신의 유불리도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열린우리당의 전직 당의장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 여러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가겠습니다.

정부간 협정체결을 저지해야 하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협정체결을 저지해야만 시간을 갖고 충분한 재협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재협상의 길은 봉쇄됩니다. 오직 찬성이냐 반대냐, 비준을 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만 남습니다.
(주석 7)

 


6월항쟁 24돌이던 지난 2011년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이행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모습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당시의 한미 FTA 협상은, 그러나 한국의 권익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고 한나라당은 2011년 11월 22일 더욱 불리해진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병마와 싸우면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근태는 긴 한숨을 쉴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주석
6> <오마이뉴스>, 2007년 3월 27일.
7> <오마이뉴스>, 2007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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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

012/10/28 08:00 김삼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은 2006년 12월 28일 긴급조찬회동을 갖고 '원칙있는 국민의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전당대회에서 평화개혁세력과 미래세력이 대통합을 결의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이 28일 긴급조찬회동에서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김근태는 기본적으로는 노무현 정부에 협력하면서도 사안에 따라서는 격렬하게 반대하거나 비판하였다. 노 대통령 탄핵심판 직후 지지율이 높아가던 시점에 정부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라는 당의 총선공약을 파기하려하자 김근태는 노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토론을 하자”며 맞장을 뜨는 발언을 했다. 다수의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과 친노세력의 눈치를 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당내 상황은 날로 복잡해져갔다. 김근태의 리더십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가 당의장을 맡아도 수습이 곤란할 정도로 백가쟁명의 난립상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이르면서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부는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도입을 비롯하여 공공택지 공급물량확대, 신도시아파트공급 6개월~1년 단축, 공공택지 분양가 25% 인하, 분양가 상한제 2007년 9월부터 민간아파트로 확대적용, 후분양제 2008년으로 연기 등 잇따라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으나 시장에서는 크게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민심이 멀어지고 여론이 악화되었다. 집권당 대표인 김근태에게는 밤잠을 설치게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당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계파와 이해에 따라 각종 방안이 제시되었다.
고건 전 국무총리의 영입과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다수의 이른바 ‘통합신당파’와 당의 리모델링을 통한 재창당을 주장하는 친노 그룹의 ‘사수파’, 여기에 통합신당을 추진하되 신중히 하자는 중진 의원 중심의 ‘중도파’의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노 대통령은 “신당은 지역당 회귀”라며 사수파에 힘을 실어줬다.

우리당은 12월 14, 15일 이틀간 소속의원 139명을 상대로 통합신당 추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5명이 응답해 이중 80명이 통합신당 추진에 찬성했다. 이를 토대로 당 비대위는 워크숍을 열어 2007년 2월 14일 ‘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당 사수파의 거센 반발이 따랐다.
(주석 5)

김근태는 2006년 12월 28일 정동영 전 당의장과 ‘원칙 있는 국민의 신당’을 추진하고, 신당이 어느 누구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자율적ㆍ독립적으로 국민의 품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탈노무현’ 신당을 의미했다.

당의 양대 축인 두 사람의 합의에 따라 신당 추진이 진행되었다.
2007년 2월 6일 김한길 의원 등 23명의 집단탈당을 시발로, 김근태는 6월 12일 탈당했다. 정동영도 탈당하고, 연쇄 탈당이 이루어져 우리당은 58석의 원내 3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8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민주신당과 합당을 결의했다.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여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확보했던 우리당은 국회의원 재ㆍ보궐선거와 지방자치선거에서 연패하면서 갈등을 빚게 되고, 다시 분당 상태가 되고 말았다.

우리당은 3년 9개월간 당의장이 연인원 10명에 이르렀다.
정동영 - 신기남 - 이부영 - 임채정 - 문희상 - 정세균 - 유재건 - 정동영 - 김근태 - 정세균 체제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없는 과도기 현상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도토리키재기 식의 인물 부재 상태였다.

김근태는 당내외의 혼란기인데도 원내 대표와 당의장 기간에 국회에서 개혁입법에 당력을 집중했다.
제258회 임시국회에서는 △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 △ 풍수해보험법 △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 △ 국군 포로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 소방공무원법 일부 개정법을 야당과 합의하여 통과시켰다.

제259회 임시국회에서는 △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 동북아역사재단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 △ 남북교류협력법 일부 개정법률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 국가보훈기본법 △ 실종아동 보호 및 지원법 일부 개정법률 △ 고용보호법 일부 개정법률 △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 △ 최저임금법 일부개정 법률 △ 국적법 일부 개정법률 등을 통과시켰다.

제260회, 제261회, 제262회, 제263회 임시국회에서도 민생과 국정개혁에 필요한 법률의 제ㆍ개정이 따랐다. 역시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 친일 반민족행위 재산 국가예속특별법 개정안 △ 소비자보호법 △ 군인연금법 개정안 △ 공직선거법 △ 국가제정법 △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 공직자윤리법 △ 감사원법 △ 고령자 고용촉진법 △ 동물 보호법 △ 재해구호법 △ 공공기관운영법 △ 주택법 개정안 △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 조정법 △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 △ 근로기준법 등의 재ㆍ개정이었다.

김근태가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비정규직 3법’으로 불린 △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 파견 근로자 보호법 개정안 △ 노동위원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이었다. 이에 따라 5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2007년 7월부터 사업주는 기간제 근로자를 2년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이 기간을 넘어 기간제 근로자를 고용하면 해당 근로자는 정규직으로 채용한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 법률의 통과에는 민주노동당의 힘이 컸다.


주석
5> <동아연감>, 2007년 판,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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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7 08:00 김삼웅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 사진은 변종만 시민기자.

 

김근태는 10월 21일 휴전선을 넘어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공단창립 5주년 행사 참석이었다. 개성공단은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 협력의 상징적 사업으로,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인력과 부지가 결합하여 설립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강경책과 연평도해전 그리고 금강산 관광의 폐쇄 등 남북관계의 위기국면에서도 여전히 유지될 만큼, 유일한 남북공동사업체가 되고 있다.

김근태는 북한의 갑작스런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긴장상태에 빠지고, 당내 일부에서도 반대 여론이 비등한데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개성공단을 방문하였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한나라당이 전쟁도 불사한다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크게 위협받은 상황에서 김근태는 “평화가 곧 밥”이라는 성명을 내고 방북길에 올랐다. 자칫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개성공단에서 남북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북한 정권을 향해 핵실험을 중단하라고 말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 역시 신변의 위험을 무릅 쓴 발언이었다. 이후 북한은 2차 핵실험을 포기하고 6자회담에 나오게 되었다.

사단은 점심시간에 벌어졌다. 방문단 일행과 남북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북한 여성봉사원이 다가와 함께 춤을 출 것을 권했다. 이 여성은 김근태가 누군줄도 몰랐다. 그는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잠깐 무대위에 올라가 엉거주춤 서 있다가 내려왔다. 끝내 거절하다가는 남쪽 남자들이 옹졸하다고 핀잔을 들을까봐 이끌려 갔다고 술회한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과 수구신문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당 대표가 북한 여성과 개성에서 춤판을 벌였다는 자극적인 신문 제목이 뽑히고, 김근태는 붉은 색깔의 공격을 받았다. 6ㆍ25 당시 행방불명이 된 형들의 얘기까지 깃들여졌다. 서울로 귀환한 김근태는 수구언론의 개혁이 없이는 남북 화해협력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지지자들이 김근태의 춤은 ‘평화의 춤사위’였다고 들고 일어나면서 야당과 언론의 매도는 수그러들었다.

김근태는 열린 마음으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그리고 개성공단이 성공하도록 도왔다. 2004년 12월 20일에 쓴 편지 <불티나게 팔린 개성 냄비>에서는 이렇게 썼다.

롯데 백화점에서 북한산 냄비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뉴스다운 뉴스였습니다. 한국의 설비와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만나 생산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이틀만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상징적인 뉴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 서로 가장 멀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냄비를 매개로 만나게 된 것이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성공단을 터전삼아 남과 북이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들이 근로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당연히 배려를 해야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개성공단은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남과 북이 상생하는 협력의 용광로로 발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이 함께 꿈꾸는 희망의 근거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은 우리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보살필 필요가 있는 그런 곳입니다.(하략)
(주석 4)


주석
4> 김근태, <일요일에 쓰는 편지>, 195~197쪽, 샛별 D&P,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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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6 08:00 김삼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2006년 6월 28일 오전 당사에서 열린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 지도부를 선출한 우리당의 행로는 그러나 만만치가 않았다. 5월 31일 실시된 제4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집권당이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나 지자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고 있으나, 이 때 우리당의 경우는 ‘참패’라는 용어 그대로였다.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전북지사 1명만 당선되고, 기초단체장 선거도 수도권 66곳 중에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7개 대도시의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전패한 것이다. 655명을 뽑는 광역의원 선거(지역구)에서도 수도권은 물론 부산ㆍ대구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대도시에서 1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패했으나, 광주ㆍ전남북은 잔류 민주당 후보에게 손을 들었다.

정동영 의장이 선거 결과가 드러난 6월 1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취임 100일도 못되어서다. 일부 최고위원들도 동반 사퇴하여 우리당은 지도부 부재 상태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집권당의 표류는 국정의 표류로 연계된다.

좀 묵은 얘기지만 김근태는 2002년 대선후보 과정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발언을 남겼다. 이번 당의장 선거에서 패배한 심경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기자가 물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후, 개인적 ‘역사성’을 지키는 일과 대중정치인으로 ‘성공’ 하는 일 사이에서 쉽지 않은 줄타기를 했으리라고 보인다. 둘 사이에 균형을 잡는 데 이제 익숙해졌다고 자평하는가?”

여전히 굉장히 어렵다. 우리 정치의 제도와 관행이 아직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번에 양심 고백한 것은 범죄를 자백한 것과 다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양심고백을 했다면 왜 당당하지 못하나” 이러는데, 옛날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한다면서 왜 도망 다니느냐”고 공격하던 것과 똑같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우리 신념의 실현을 막는 제도와 관행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을 내치는 사회라면 그건 서로 냉소하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주석 3)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동영 의장과 일부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우리당은 6월 7일 국회의원ㆍ중앙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논란 끝에 과도 지도부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키로 했다. 2003년 11월 창당 이래 벌써 4번째 비대위 체제였다. 일천한 헌정사이지만 집권당이 이렇게 흔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대위는 중앙위원회로부터 당헌당규 개정과 인사권 등 전권을 위임받고, 전직 당의장 등 8인으로 구성된 인선위원회에서 6월 9일 김근태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당의장)으로 선임했다.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에 탈락한 지 4개월 여 만에 과도체제의 당의장에 선임된 것이다.
분당 과정에서 원내대표에 선출된데 이어 두번째로 맡는 과도기의 요직이었다. 당내 위기 시기에 그는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번갈아 맡게 되었다. 역량과 위기관리 능력이 그만큼 평가된 셈이지만, 씁쓸한 마음을 쓸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독배를 마시는 심경으로 비대위위원장의 책임을 맡겠다”면서 비상시의 당의장에 취임했다. 비대위 상임위원에는 김한길ㆍ문희상ㆍ이미경ㆍ정동채ㆍ김부겸ㆍ정장선 의원이 선임되고, 유인태ㆍ이호웅ㆍ이강래ㆍ박병석ㆍ박명광ㆍ윤원호 의원은 비상임위원에 위촉되었다.

 


열린우리당은 2006년 6월 7일 오전 당사에서 의원총회를 갖고 향후 당 진로를 논의했다. 김근태, 김혁규, 조배숙 최고위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근태는 취임과 더불어 의장 직속으로 ‘서민경제회복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일자리 창출과 기업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사회적 대타협을 도모하는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그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심을 모아온 정책이었다.

김근태는 6월 28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정부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김병준 전 대통령 정책실장을 내정한 것과 관련, 당의 비판적 여론을 전하고, 인사문제에 있어서 좀 더 광범위한 여론을 수렴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 안 팎에서는 김 의장이 좀 더 강하게 대통령을 압박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의 ‘액운’은 이어졌다. 7월 26일 실시된 서울 성북을과 송파갑, 경기 부천ㆍ소사, 경남 마산갑의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에서 이번에도 모두 패배했다. 또 10월 26일 국회의원 2곳과 기초단체장 등 9개 지역에서 실시한 재ㆍ보궐선거에서도 전패했다. 여당이면서도 영남지역 일부에는 단체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지역갈등은 강고했고, 영남지역의 한나라당세는 가히 철옹성이었다.


주석
3> <인물과 사상>, 2002년 7월호,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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