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플렛홈

우리 일행은 기차 편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에서 내렸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이 개통될 때 최초로 개장한 역 중 하나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콤소몰스카야 지하철역 건물은 웬만한 기차역보다도 더욱 고풍스럽다.
러시아의 지하철역은 출입구만 뚫려 있는 다른 나라 지하철들과는 달리, 
이렇게 지상에 역 건물이 만들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건출물 또한 제각기 특색이 있고 아름다워서 또다른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야경

 

모스크바의 기차역

 

모스크바에는 기차역으로 모스크바 역이 없다.

우리나라는 서울에 서울역, 부산에는 부산역이 있다. 
당연하고 익숙한 기차역 이름 짓는 방식이 러시아와는 정반대이다.

러시아의 기차 역명은 출발지가 아닌 종착역 기준이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역 명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구 소련 시절 지명인 레닌그라츠키 역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역 명은 모스코프스키 역이다.

러시아 기차역은 보통 행선지 방향의 도시 이름을 붙인다.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방향의 기차들이 출발하는 경우 
'레닌그라츠키 역'에서 탑승해야 한다.

 

모스크바에는 아홉 개의 큰 기차역이 있다. 

1. 레닌그라드 역(Leningradsky Station) - 레닌그라스키 바그잘(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북쪽 방면의 발착역이다. 
헬싱키, 상트 페테르부르크, 트베리, 노브고로드, 무르만스크, 
페트로자보츠크, 프스코프, 탈린 방면과 연결되는 발착역이다.

톨스토이호, 레닌호, 붉은 화살호가 이곳에서 발착하며,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8시간이 소요된다. 
지하철역은 콤소몰스카야 역에 내리면 된다.

2. 리가 역(Rizhsky Station) - 리쉬스끼 바그잘 (Рижский вокзал‎)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 방면의 기점이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리쉬스까야 역이다.

3. 벨라루시 역(Belorussky Station) - 벨라루스끼 바그잘 (Белорусский вокзал‎)
모스크바에서 서쪽 방면으로 가는 기차역이며, 칼리닌그라드, 빈, 베를린, 
바르샤바, 스몰렌스크, 민스크, 브레스트, 빌니우스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모스크바 익스프레스, 벨라루시호, 쇼팽호, 오스트 웨스트 익스프레스, 
프라하 익스프레스, 폴로네이츠호 등의 국제 열차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지하철역 벨라루스카야 역에서 내려 기차역으로 가면 된다.

4. 사볼로프 역(Savyolovsky Station) - 사볼로브스끼 바그잘 (Савеловский вокзал)
상트 페테르부르크, 우글리시 방면으로 가는 지방 열차의 발착역이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노보스로보트카야 역이다.

5. 야로슬라블 역(Yaroslavsky Station) - 야로슬랍스끼 바그잘 (Ярославский вокзал‎)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가는 열차의 발착역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곳이 바로 이 야로슬라블 역이다.
지하철  콤소몰스카야 역에서 내려 가면 된다.

6. 카잔 역 (Казанский вокзал‎, Kazansky Station)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방면의 발착역으로 로스토프, 카잔, 
볼고그라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역은 콤소몰스카야 역에서 내리면 된다.

7. 쿠르스크 역- 쿠르스끼 바그잘 (Курский вокзал, Kursk Station)‎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흑해 연안 지역으로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가까운 지하철은 꾸르스까야 역이다.

8. 키예프 역(Kievsky Station) - 키옙스끼 바그잘 (Киевский вокзал‎)
우크라이나, 몰도바, 동유럽 방면의 발착역으로 포프, 벨고라드, 부쿠레슈티, 
부다페스트, 프라하, 소피아, 키예프, 오데사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다크라 익스프레스, 푸쉬킨호, 스로바키아 익스프레스, 
부다페스트 익스프레스 등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지하철역은 키예프스카야 역에서 내리면 된다.

9. 파벨레츠 역(Paveletsky Station) - 빠벨레쯔끼 바그잘 (Павелецкий вокзал) 
파벨레츠, 볼고그라드, 아스트라한 방면과 연결되는 열차가 발착한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파벨레츠카야 역이다.

 

모스크바 기차역 약도.

이 많은 역들 중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기차역은 레닌그라드 역과 야로슬라블 역이다.
우선 지하철을 타고 콤소몰스카야(Komsomolseukaya) 역에 내리면 
이 역 주변에만 레닌그라드와 야로슬라블, 카잔역 이렇게 3개의 기차역이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려면 레닌그라드역 - 레닌그라스키 바그잘 (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에서,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려면 
야로슬라블역 - 야로슬라브스키 바그잘 (Ярославский вокзал‎)로 간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기차역

도착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엔 총 6개의 주요 기차역이 있다. 

1. 모스크바역(Moskovsky vokzal) -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Московский вокзал)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차역으로 수도인 모스크바와 
러시아 북쪽의 무르만스크 방향, 코카서스, 그루지아 같은 중앙아시아로 가는 노선과 
러시아 남동지역의 도시들로 출발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2. 라도가역(Ladozhsky Station) - 라도쥐스키 바그잘 (Ладожский вокзал‎)
2003년 개통한 최신 기차역으로 핀란드와 모스크바에서 오는 열차를 통과시키는 것 같다. 
키지섬(끼쥐섬)이 있는 페트로자보츠크를 갈 때 이 역을 이용한다. 
지하철 라도쥐스카야 역 (Ладожская‎)에서 내린다.

3. 바르샤바 익스프레스 (Варшавский Экспресс, Warsaw Express)
발틱 3국과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향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 체흐날라기치스키 인스치둣 역(Технол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이 그나마 가까운 편이다.

4. 발트역(Baltiysky Station) -발차스키 바그잘 (Балтийский вокзал)
발틱 3국의 국가들과 동유럽으로 가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 발치스카야 역(Baltiyskaya)에서 내린다.‎

5. 비테프역(Vitebsk Station) - 비채프스키 바그잘 (Витебский вокзал)
중부 유럽 및 발틱 3국, 벨로루시의 민스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러시아의 남부도시 스몰렌스크, 푸쉬킨, 파브블로프스크 등으로 출발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은 푸쉬킨스카야 역(Пушкинская)이다.

6. 핀란드역- 필란스키 바그잘 (Финляндский вокзал, Finlyandsky vokzal)
핀란드의 헬싱키 같은 북유럽이나 러시아 북쪽 도시들로 운행하는 열차가 발착한다. 
지하철은 플로샤지 레니나 역(Площадь Ленина‎)에서 내린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과 연결되는 지하철 역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대로 끝의 보스타니아 광장에 있다.
걸어서 예르미타쥐 있는 곳까지도 충분하니 굳이 지하철 이용할 필요 없을 듯.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을 볼 수 있는 
키지섬(끼쥐섬)이 있는 페트로자보츠크로 가는 기차역은 새로 생긴 
라조스키역(Ладожский вокзал)에서 타면 되는데 약간 외곽 쪽이라 지하철로 이동해야 한다.
가까운 지하철역은 라도쥐스까야 역 (Ладожская‎).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을 향하여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카잔 역이다.

카잔역은 근대적인 레닌드라드역과 달리 무슨 성채나 교회처럼 지어놓았다.
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864년이지만 지금의 네오 러시안 양식으로 다시 지은 공사는 
1913년에 시작했다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중단돼 1940년에야 끝났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시대 건축양식에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건축가 
알렉세이 시추세프(Shchusev/ 1873~1949)가​ 옛 타타르 양식과 모스크바 크렘린 타워에 
아르누보 스타일을 뒤섞어 복고적이면서도 매우 분방한 설계를 구사해서
레닌그라드역 오른쪽에 있는 콤소몰 지하철역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2013년 영국 BBC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 톱텐에 꼽혔다고 한다.​
모스크바와 동남쪽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 수도 카잔을 잇는 역이다.
볼가강 유역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관문이어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역사 오른쪽에 솟은 첨탑은 옛 카잔왕국의 왕궁 타워를 본떴다고 한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9개의 철도역 중 
가장 오래된 기차역이고 모스크바 북서쪽 지역으로 발착하는 철도역이다. 
콤소몰스카야 광장에 위치한 이 역은 동서 방향, 

특히 상트 페테르부르크 방면으로 운행하는 열차가 많다. 
또한, 이 역에서는 탈린, 에스토니아, 핀란드 헬싱키 등지로 가는 

국제 열차가 거의 대부분 출발한다. 
인근에는 야로슬랍스키 역과 카잔스키 역이 위치한다.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과 5호선의 환승역인 콤소몰스카야 역이 위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야경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대합실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대합실

 

열차 시간표

 

탑승 게이트

 

캐리어 가방을 끌고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를 타러 가는 우리 일행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붉은 화살호'는 옛 소련 시절 공산당 간부들이 이용했다는 고급 열차이다.
지금은 모스크바 - 상트 페테르부르크 구간 705.6 km을 오가는 야간 기차이다. 
모스크바 레닌그라스키 바그잘에서 23시 55분에 출발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Московский вокзал)에 다음날 오전 07:55분에 도착
8시간이 소요된다.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외부
보통 30량 이상의 객차가 연결되어 있어 정해진 위치에 서 있어야 제시간에 탑승할 수 있다.

 

붉은 화살호(Красная стрела) 내부

 

 

 

[영상] 모스크바 레닌그라츠키 역(Ленинградский вокзал)

 

내가 머무를 침대칸
정갈하게 준비된 간식 - 간식은 빵과 초콜릿 과자 등이 작은 박스에 담겨 있다.

 

의자를 접으면 이렇게 침대가 된다. 

누워보니 푹신하고 안락하다.

 

침대 옆 벽면에는 이렇게 콘센트가 있어 스마트폰, IT기기를 충전할 수 있다.

 

4인용 침대칸

 

통로 

침대 기차라 통로가 좁다.
객실 양 끝에 화장실이 있고,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있다.

 

화장실
비행기 안에 있는 화장실 같다. 

 

화장실 옆에도 휴대폰을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다.

 

출발하고 얼마 후 열차 승무원이 아침 식사 메뉴를 미리 주문 받으면서 
여권과 기차표를 일일히 검사하고 가져간다.

 

멀리서 새벽 동이 터오르고...

도착 1시간 전 쯤에 이렇게 카스테라가 제공된다. 
커피는 100루블 정도를 내고 따로 요청해야 한다. 
식사와 주문한 커피를 받으며 전날 출발 때 거둬간 여권과 기차표를 이때 다시 돌려받는다.

 

인증샷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플렛홈
밤새 달려 마침내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다.

철도 승무원은 대부분 여성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플렛홈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오른쪽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흉상이 있고 
벽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라 씌여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대합실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으로 연결된 열차 노선도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참으로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ㅎ)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대합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Moskovsky vokzal) 전경

모스코프스키 역은 1851년 개통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철도의 터미널 역으로서 
모스크바 쪽 터미널인 레닌그라츠키 역과 맞춰 지어졌다. 
똑같이 콘스탄친 톤의 설계 하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 쪽 역이 2층 위로 
편의시설이 확장되어 다소 바뀌었지만 외관과 실내가 판박이로 똑같이 생겼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기/종점 역의 건축을 맞추는 것은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기점 야로슬라브스키 역에 맞춰 건설하는 것으로 반복되었다.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야경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코프스키 바그잘 전경

이 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번화가이자 관광의 거점인 넵스키 대로의 끝지점에 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노면전차로의 환승 연계도 괜찮은 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1호선 키롭스코비보르스카야선의 플로샤지 보스타니야 역과 바로 연결된다. 
이 지하철역은 세계 최초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흔한 유리 스크린도어와는 달리 반백 년 전 초창기의 스크린도어답게 
투박하고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 있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스크린도어의 굉음과 압박이 대단하다.

 

[영상] Moskovsky Railway Station in St Petersburg, Russia (Since 1847)

자동번역기를 설정하여 생성할 수 있다.

 

베덴하(VDNKh) 역 플렛홈

 

아름답고 우람한 베덴하역 정문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베덴하 전철역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 (베덴하 VDNKh ВДНХ) 조감 사진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Выставка достижений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상설 박람회장이다. 
약칭인 베덴하(러시아어: ВДНХ)로 불리기도 한다.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대외적으로 소련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위상을 홍보하기 위해 지은 전시장이다.
현재는 문화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놀이공원도 조성되어 
모스크바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인기 있는 곳이다.

모스크바 북동쪽에 위치한 베덴하는 
과거 소련 시절에 시작된 러시아 최대 박람회장이자 무역 전시장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경제적인 업적에 대한 대외 선전수단과 농업,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이 박람회를 영구적으로 진행했었다.

현재는 경제관련 박람회장이라기 보다는 관광지의 개념이 조금 더 강하겠다. 
이 박람회장은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체 2,375㎢의 대지에 조성되어 있다.

1989년까지 박람회장에는 82개의 파빌리온(Pavilion)이 건설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각 공화국과 국가 기관의 명성 유지를 위해 
막대한 건설 예산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각 공화국의 파빌리온으로는 우크라이나 파빌리온, 우즈베키스탄 파빌리온 등 
각 민족의 전통 양식을 담은 것도 많다.

소련 시절 베덴하는 매년 300개 이상의 국가 및 국제 박람회 및 다수의 연구자, 
기업인 등의 세미나와 회의가 열렸다. 
또한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며 매년 약 1,100만 명의 국내 이용객과 
60만 명의 외국인이 베덴하를 찾았다.

소련 붕괴를 거쳐 1992년 전러시아 박람회장(ВВЦ)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나 
2014년에 다시 국민 경제 달성 박람회로 개명되었다. 
베덴하(ВДНХ)라는 약어는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기존의 전시회 외에도 놀이공원과 쇼핑센터도 있어서, 
모스크바 시민의 휴식, 쇼핑의 장이 되고 있다.

 

베덴하 정문 인증샷

 

베덴하 정문 인증샷

 

베덴하 정문

분수들, 조각들, 총면적 136헥타르의 공원들, 250개 전시관들 하나하나가 
건축의 보물이거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설물이다. 
현재 베덴하는 거의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모스크바가 그사이 급속히 커졌기 때문이다. 

사실 1930년대 말 이 지역은 시외곽으로 집시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건축부지를 준비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건축자들은 서서히 집시들을 지역 밖으로 몰아냈다. 
숲을 없애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심지어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품을 실어나르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에 
별도의 노선을 증설했다는 전설이 있었을 정도다.

베덴하 개장 후 첫 두달 반 동안 300만 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다음 해에도 또 수백 만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이곳은 운명이 바뀌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노동자로 전시회장에 왔다가, 
경연대회에서 수상하고 훈장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출세가도를 달리곤 했다. 

1941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회장은 문을 닫았고 
많은 전시품들은 모스크바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인상적인 점은 독일의 폭격 기간 내내 전시회장 구역에는 
폭탄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고, 단 하나의 시설물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덴하 정문 지붕 조각 작품

 

소비에트 시대 사회주의의 상징이었던 밀단을 남녀가 치켜든 조각상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지 근 30년이 지났는데 아직

모스크바엔 여기저기 소비에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가는 베덴하에 들어가는 돈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 
대규모 건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온 대표단들의 여행 경비며 숙박비, 식사비까지 말이다. 
메달과 상장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정부는 상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수천 장의 인증서와 상장이 발급됐다.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선전보다도 효과적이었다. 
수십만, 수백만 명이 자신이 사는 도시와 농촌으로 돌아가 모스크바의 부유함과 웅장함,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 
그저 열심히 일하기만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국이 공업과 농업부문의 기록 경연대회로 탈바꿈했다.

 

첫 번째 중앙 분수

베덴하 정문 아치에 들어서면 양쪽에 각 7개씩 14개의 분수가 있다. 
각 분수는 빨간색 광택 화강암으로 정팔면체 테두리에 담긴 물 속에 있다. 
분수에는 중앙 부분에서 부채꼴로 뻗어나가는 12개의 수직 및 12개의 방사형 제트가 있다.

 

첫 번째 중앙 분수

 

첫 번째 중앙 분수

 

첫 번째 중앙 분수

 

레닌 기념비


베덴하에 관한 전설은 매우 많다. 게다가 그 중 몇 가지는 뜻밖에도 사실이다. 
한 때 베덴하에 전쟁에 대비해 물과 식량을 비축해 둔 벙커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 벙커에서는 300명이 이틀 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진실로 밝혀졌다. 레닌 조각상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가 벙커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 전국에서 레닌 동상이 철거됐을 때도, 이곳의 레닌상은 건들지 않았다.

 

레닌 기념비

 

레닌 기념비 인증샷

 

레닌 기념비

 

레닌 기념비

 

파빌리온 no. 1.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Pavilion No. 1 "Central"은 전시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구조물이다. 
첨탑을 포함한 파빌리온의 총 높이는 97m에 달하고 총 면적은 9,378.2㎡ 이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소련 붕괴 이후 베덴하는 식물 상태에 빠졌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이미 베덴하라는 노동 기념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시관들은 다양한 상점과 시장에 대여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온갖 물건을 다 팔았다. 
꿀, 모피, 집적회로, 인도산 향, 벨라루스산 니트의류 등... 
전시회장 내 공원 산책로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시설물들은 망가지지 시작했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최근 몇 년 동안 모스크바 공원들의 대대적 재건이 이루어졌으나, 
베덴하는 여전히 아무도 작업을 맡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베덴하는 연방정부 관할이고, 
일반 공원들은 모스크바시 관할이기 때문에 빚어진다. 
그런데 얼마 전 베덴하가 시청 관할로 이양됐다. 
이는 조만간 베덴하의 전시관들이 새단장을 하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환경 미화작업이 펼쳐질 것이며, 썪어가는 연못들을 깨끗이 치우고 
신성한 노동의 이 '사원', 공원 건축의 명물로부터 

장삿꾼들을 내쫓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파빌리온 no. 1. 트레 티야코프 갤러리 박람회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대는 베덴하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상징 중 하나이다. 
분수의 타원형 그릇에는 황금 덩어리의 밀, 

산업용 대마 및 해바라기가 큰 덩어리로 짜여져 있다.

뭉치 주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상징하는 16명의 금박을 입힌 소녀의 동상이 있다. 
문화 유산이 생성될 당시 소련에 속해 있던 행정 영토 단위의 수에 따라 그 수는 16 개이다. 
소녀들은 손에 농업용 식물을 들고 있는데, 

이는 그녀들의 고향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다.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분수 "민족의 우정" 야경

 

분수 "민족의 우정" 야경

 

모스크바의 메인 스케이트장 야경

베덴하에서 겨울철의 주요 주제는 남극 대륙 발견 ​​200 주년이었다. 
대형 스케이트장과 어린이용 아이스링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민족의 우정" 분수와 "Stone Flower(돌꽃)" 분수를 얼음길로 둘러싸고 있다. 
인공 얼음 덮개의 면적은 20,000 평방미터 이상이다. 

 

모스크바의 메인 스케이트장 야경

 

중앙 정원

 

Stone Flower (돌꽃) 분수

돌꽃 (Stone Flower) 분수는 베덴하에서 유명한 4대 분수 중 하나이다. 
우랄(Ural)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동화의 생생한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분수는 
수많은 세부 조각품으로 가득 차 있다. 
구성의 중심은 보석 사이에 피는 꽃 모양의 그릇다. 
주철 볼류트로 장식된 화강암 받침대에는 

연방 공화국 자연의 선물이 담긴 16개의 청동 정물 작품이 있다.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Stone Flower (돌꽃) 분수 야경

 

Stone Flower (돌꽃) 분수 야경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슬라브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는 러시아에 아날로그가 없는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박물관이자 교육 단지로, 러시아 언어 애호가와 건축, 문화 및 

역사 전문가 모두에게 일종의 매력 포인트이다. 
여기에서 러시아와 세계에서 글쓰기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다른 민족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하는지, 

수세기 동안 구두 연설과 어떻게 접촉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글쓰기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는 텍스트가 사회의 영적, 문화적 생활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글쓰기의 주요 상징인 편지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서 설명한다.
마지막 부분인 "논문 문화"는 구두 연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민속, 언어적 특징, 비언어적 의사 소통에 대해 알려준다. 
방분객은 특별한 느낌의 고치에서 자장가와 서사시를 듣고 비디오를 볼 수 있다

 

Stone Flower (돌꽃) 분수와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야경

 

글쓰기를 위한 슬로보센터

 

보스토크 발사체

1950년대에 '우주(Космос)' 전시관 옆에는 

높이 25m에 이르는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커다란 스탈린 동상 안에 

작은 스탈린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트료시카 인형 같은 구조였다. 

 

사연은 이렇다. 
먼저 동상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세우면 담당자가 와서 승인했다. 
그런데 큰 스탈린 동상을 세우기 시작하자 

축소 모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누구도 그것을 부수라는 지시를 내릴 용기가 없었다. 
당시의 '개인 숭배'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일은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소 모형을 큰 동상으로 잘 덮기로 했다.

스탈린은 모순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복종을 이유로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상을 줄 수도 있었다. 
어느 날 스탈린은 '그루지야' 전시관(그는 그루지야 출신이다) 건설 현장을 보러 
베덴하에 왔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경비원이 그에게 다가와 두려움에 떨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탈린 동지, 이곳에서는 흡연이 금지돼 있습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거뒀다. 경비원은 체포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크렘린에서 사환이 와서 이 경비원에게 
주의 깊은 경계심을 보여준 것에 대한 상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보스토크 발사체

보스토크 발사체는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이 지구 역사상 최초의 
유인 비행을 한 우주 궤도에 보스토크 -1을 발사한 것이 이 장치였기 때문에 
러시아 우주 프로그램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보스토크 발사체 모형은 10월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7 월 8일 베덴하에 설치했다.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황금 귀 분수 (Golden Spike Fountain)는 베덴하에서 세 번째로 큰 분수이다. 
전시 조경 공원의 카멘스키(Kamensky) 연못 3번 중앙에 위치해 있다.

"황금 귀"는 납작한 바닥에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양배추, 호박, 옥수수, 토마토, 사과, 포도 등 3개의 야채와 과일이 들어 있다. 
고대부터 옥수수의 귀는 재생, 생명, 수확 및 

다산을 의미했기 때문에 분수의 상징성은 분명하다. 
황금귀 분수는 베덴하에서 가장 멋진 분수로 평가된다.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Golden Spike Fountain (황금 귀) 분수 야경

 

[영상] 베덴하(VDNKh) 방문 기념

 

 

박람회장에는 82개의 파빌리온(Pavilion)이 건설되었는데 각각의 파빌리온은

하나하나가 건축의 보물이거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설물이다. 
이것은 소련의 각 공화국과 국가 기관의 명성 유지를 위해 
막대한 건설 예산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각 공화국의 파빌리온으로는 우크라이나 파빌리온, 우즈베키스탄 파빌리온 등 
각 민족의 전통 양식을 담은 것도 많다.

이제 각각의 파빌리온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파빌리온 no. 18. 벨로루시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파빌리온에는 벨로루시 공화국의 전시 및 무역 센터가 있다. 
1954년에 지어진 건물의 표현적인 건축 구성은 
금색 얼룩에 직면한 집단 농부의 모습인 조각 "모더랜드"로 장식되어 있다.

 

파빌리온 no. 68. 아르메니아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2003년부터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전시 및 상업 센터가 
이 파빌리온과 레스토랑 "Ararat" 에서 운영되고  있다.

 

파빌리온 no. 14.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파빌리온 no. 14. 는 1939년에 지어졌다. 
2019년 11월 23일, 베덴하는 전시회 기념일에 복원된 파빌리온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로 공식 개막하는 중요한 행사를 주최했다. 
센터의 활동은 러시아에서 아제르바이잔의 문화 및 비즈니스를 대표하고
국가 간의 협력과 개발을 목표로 할 것이다.

 

파빌리온 no. 10. 몰도바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이 파빌리온에서는 국가 디자이너의 옷 부티크, 전통 몰도바 요리 레스토랑, 
몰듀 벨리르프롬의 보석 전시 및 판매, 건강 제품이 판매된다.

 

파빌리온 no. 4. 키르기즈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이 파빌리온은 원래 산업, 농업 및 문화 분야에서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업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는데 복원이 완료되면 
키르기즈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로 운영될 예정이다.

 

파빌리온 no. 6. 압하지야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전후 전시 재건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SSR을 포함한 
3개의 발트 공화국 모두를 위한 별도의 파빌리온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Pavilion No. 6은 리투아니아 민속 동기를 바탕으로 
스탈린주의 제국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복원 작업이 끝나면 압하지야 공화국의 무역 및 전시 센터가 이곳에 열린다.

 

 파빌리온 no. 66.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전시, 문화 및 박람회 센터
우즈벡 민족 건축을 모티브로 한 스탈린 제국 스타일의 파빌리온.

 

결혼 궁전. 421동


VDNKh Wedding Palace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
결혼 등록, 결혼식, 테마 행사, 음악 반주 조직, 뷔페 또는 결혼식 연회 장소,
사진 및 비디오 세션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 

(예 : 결혼식 궁전 자체가 맨션으로 양식화 됨)

 

파빌리온 no. 57. "러시아는 나의 역사"

역사 공원 "러시아-나의 역사"는 러시아의 국가와 문화의 형성과 수립의 
중요한 시기를 알려주는 멀티미디어 교육 및 전시 단지이다.

 

파빌리온 번호 64. 러시아 철도 전시장
현재 이 파빌리온은 복원 중이며 앞으로는 여기에 러시아 철도 통합 전시장을 열 계획이다.

 

파빌리온 no. 11. 카자흐스탄 공화국 전시 및 무역 센터

카자흐스탄 공화국 파빌리온 (구 카자흐스탄 SSR 인 "Metallurgy") 의 건축적 외관은 
카자흐스탄 국가 건축의 동기를 반영한다. 
주요 외관은 3경간 아치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집단 농부와 철강 노동자의 조각품과 
시인 챰블 차바예프(Dzhambul Dzhabayev 1894-1979)와 
농업 노동자인 치그낵 버시프 (Chiganak Bersiev 1881-1944)의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파빌리온 no. 17. 박물관 "4 요소"

스탈린주의 제국 스타일로 디자인 된 목재 산업 전용 파빌리온. 
처음에 박람회에서는 식재와 재조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주제가 확장되었고, 
전시회는 목재 사용 및 가공 방법도 시연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 주제가 주요 주제가 되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공공 서비스 궁전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다.
2018년 12 월 18 일, Pavilion No. 71에 공공 서비스 궁전이 문을 열었다. 
수도에서 공공 서비스 제공을 위한 130번째 센터가 되었으며 
러시아 전역에 위치한 부동산 개체의 소유권을 등록할 수 있는 최초의 센터가 되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또한 베덴하의 공공 서비스 궁전에는 공공 서비스 역사 박물관 및 전시 단지가 있다. 
전시회는 홀로그램 팬 및 VR 게임, 오래된 문서 및 유물 사본, 
미니어처 역사적 인테리어 모델, 실제 타자기, 기계, 주판 및 전신 추가와 같은 
최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누구나 실제로 시도할 수 있다.

 

파빌리온 no. 71. 공공 서비스 궁전 (mfc)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시대의 공무원 의상을 입어보고, 
개인 기념품 문서를 만들고, 회계사, 전신 기사 및 비서의 역할에 자신을 느끼고, 
과거, 미래로 나아가고 심지어 화성에서 자신을 찾는 모든 것이 
박물관 및 전시 단지에서 가능하다. 

 

파빌리온 no. 8. 젊은 자연 주의자
이 파빌리온은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다. 
작업이 완료되면 미래의 공원 내에 가족 및 레저 센터가 열린다.

 

[영상] 파빌리온 no. 2. 로보스테이션(Robostation)

 

이 파빌리온은 2021년 1월 15일까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이 파빌리온에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의 

독특한 로봇을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전시 "로보 스테이션"이 있으며 

로봇의 발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Robostation"에서 로봇 초상화를 그리고, 거대한 로봇 물고기를 처음으로 보고, 
로봇의 미래 예측을 얻고, 스마트 로봇에게 까다로운 질문을하고, 
조커 로봇과 함께 새로운 로봇 농담을 배우고, 농구와 테이블 축구를 하고, 
로봇 슈트를 되살려 로봇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 

 

파빌리온 "책". 건물 516

북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다.
여기에서 독서하는 동안 휴식을 취하고 토론 및 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커피 한 잔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새로운 책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고대 사원의 건축학적 엄격함과 현대적인 공간의 내적 안락함이 결합되어 있다. 
파빌리온에는 아늑한 카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및 
좋은 책이 물론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 즐겁다. 
거의 모든 책을 편안하게 읽거나 안락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책을 사서 집에 가져갈 수도 있다.

 

건조 분수

물이 채워진 전통적인 물 그릇이 없다는 것이 분수의 주요 특징이며, 
이는 베덴하의 청년 및 성인 손님에게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394 평방 피트에 34 개의 분수 모듈이 있다. 
폼 랜스와 LED 조명이 있고 분수대는 빛이 역동적이다. 

 

파빌리온 no. 26. 모스크바 교통 박물관
이 파빌리온은 1937년에 지어졌으며 1954년에 재건되었다. 

 

기억에 남는 사인 

"1941-1945년 위대한 애국 전쟁의 전선에서 죽은 전 연합 농민 노동자들에게."
조각 구성은 평화와 전쟁을 분리하는 상징적인 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동상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애국 전쟁의 전통적인 
겉옷 (모자와 재킷)과 작업용 수공구를 볼 수 있다. 

 

파빌리온 no. 31. 박물관

이 파빌리온은 현재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다. 
역사적으로 인피부와 모직물, 그리고 린넨 및 모직 산업의 성과가 여기에 있었다.

 

파빌리온 no. 51 . 육류 산업

이 파빌리온은 복원을 위해 폐쇄되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박물관 및 전시 활동을 조직할 계획이다.

 

파빌리온 no. 35. 글라브타바크(glavtabak)

이 파빌리온은 1954 전후 전시회의 개막을 위해 예술가 V.S. Kondratyev에 의해 지어졌다. 
현재 복잡한 복원을 위해 문을 닫고 있으며, 작업 완료 후 이곳에 카페를 오픈할 예정이다. 

 

파빌리온 no. 40. 베이커스 학교

Horse Breeding 박람회의 3 개 파빌리온 중 하나가 현재 대대적인 정비를 진행하고 있으며 
완공되면 School of Bakers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다.

 

파빌리온 no. 41. 국립 승마 전통 센터

처음에 이 파빌리온은 18-19 세기 러시아의 
승마 단지 전통에 따라 지어진 "말 사육" 단지의 일부였다. 
총 4개의 파빌리온 (42번)이 포함된 이 복합 단지에는 동물의 공개 검사, 
강의 및 보고서 전달을 위한 경기장이 있다.

 

파빌리온 no. 44. Expert Methodological Center "Special Childhood"

이 파빌리온에는 창조적 클러스터 프로젝트가 있다. 
파빌리온의 복잡한 복원도 진행 중이며 이후 현대적 사용에 적응한다.

 

파빌리온 no. 47 . 공예의 집 (House of Crafts)

이 파빌리온은 베덴하의 공개 워크샵을 위한 공간인 Crafts Park의 주력 프로젝트로, 
해당 지역의 장인, 예술가 및 산업 디자이너가 한자리에 모인다.
예술 그림, 꽃다발 만들기 또는 스튜디오 조명의 기초와 같은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창의적인 워크샵이 매일 이곳에서 열린다.

 

파빌리온 no. 62 . 국제 발레센터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국제 발레 센터는 발레의 역사에 대한 마스터 클래스와 강의가 열리는 교육 플랫폼이지만, 
무엇보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꿈을 이루고 춤을 배우는 발레 학교이다. 

 

모스크바 레이아웃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2019년 11월 1일, 모스크바 모델 파빌리온이 재건축 후 문을 열었다. 
업데이트 된 레이아웃은 이전보다 거의 1/3 더 크다. 
이제 미니어처의 기존 수도 개체 외에도 "우크라이나" 호텔, 
돈스코이 수도원, 캐서린 궁전 등을 볼 수 있다.

수도 레이아웃의 주요 특징은 건물의 놀라운 디테일과 조경 요소의 가장 내부이다. 
1 : 400 규모의 429 평방 미터에 23,000 개의가 표시된다.

그중에는 호텔 "우크라이나", 키예프스키 기차역, 안드레브스키 다리, 

돈스코이 수도원, 캐서린 궁전 등의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재구성은 조명 구성 요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이아웃의 새로운 사각형이 설치되고 일반 조명 시스템에 연결되었으며 
기존 조명 쇼가 새로운 형식에 맞게 조정되었다.

 

파빌리온 no. 461. "스마트 시티" 

이 파빌리온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시민의 삶을 편하게하고, 시간을 자유롭게하고, 편안함을 주는 
새로운 기술이 모스크바에서 발전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무료 도시 Wi-Fi, 리셉션에서 킬로미터 길이의 줄이 없는 의사와의 온라인 약속 

또는 한 번의 클릭으로 얻을 수 있는 정부 서비스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 모든 것이 이미 모스크바에 있다.
모스크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Smart City 파빌리온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능형 전송"  
이 구역에서는 특수 터치 스크린을 통해 
도시의 선택한 지역의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중복 또는 교통 제한이 있는지, 수리가 진행 중인지,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차량 수이다. 
투어 참가자는 전기 버스, 카 셰어 링, 무인 택시와 같은 진보적 인 교통 수단에 대해 알려준다. 
후자에서는 존재감 효과로 가상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도시 관리 센터". 
이 영역에는 리소스 소비를 추적하는 레이아웃이 포함되어 있다. 
화면에서 파이프에 충분한 압력이 있는지, 충분한 수압이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주택에 전기와 물이 어떻게 공급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원 공급을 신속하게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단시간에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특수 모델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급차 디스패처로 시도할 수 있다. 
손님은 테스트 모드에서 의사 팀을 위한 신청서를 작성하도록 제안되며, 
작성하는 데 2 ​분이 주어진다. 이것이 디스패처의 표준이다.

"디지털 의학" 
이 전시회는 모스크바 의료 분야에서 가장 큰 IT 프로젝트인 
통합 의료 정보 및 분석 시스템 (UMIAS)에 전념한다. 
정보 키오스크에서 예약 시간을 선택하고, 의사 방문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전문의 예약 일정을 숙지하고, 특정 의료 기관에 대한 환자의 할당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UMIAS Connect 응용 프로그램과 체중계, 혈압 모니터, 혈당 측정기, 
심박수 모니터, 피트니스 팔찌 및 기타 장치의 통합과 데이터를 
전자 의료 기록으로 전송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안내해 준다.

"모스크바 전자 학교" 
전시회는 대도시 교육 시스템의 발전에 대해 알려준다. 
센터의 가이드는 "Moskvenok", "Electronic Journal" 및 
"Electronic Diary"서비스의 기능을 보여준다. 
대화형 패널을 사용하여 학생들은 미래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며 
공학, 의료, 학업 및 IT 수업이이를 도울 것이다. 
전자 도서관 기금은 손님을 위해 열려 있으며 강의 스크립트, 튜토리얼 및 
가상 실험실에 액세스 할 수 있다.

"개선 및 편안함" 
이 영역에서는 말 그대로 돋보기 아래에서 공공 시설의 작업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대화형 패널의 다양한 개체 (깨진 랜턴, 버려진 쓰레기, 부서진 벤치)에서
돋보기를 가리켜야 한다. 
이에 대응하여 시스템은 도시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활성 모스크바"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도시의 꽃에 물을 주고 수도의 녹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배울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잔디와 화단이 있는 대화형 벽으로 이동하여 
특수 금속 물 뿌리개로 화면을 터치해야 한다. 
그 후 화단에 꽃이 피고 공원의 나무가 피어난다. 
인터랙티브 벽 "Know Moscow"에서는 수도의 상징적인 물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보도 읽을 수 있다.

 

파빌리온 no. 64. 러시아 철도 전시장
현재 파빌리온은 복원 중이며 앞으로는 여기에 러시아 철도 통합 전시장을 열 계획dl다.

 

체스 클럽


체스 클럽은 관리 건물 no. 206 바로 뒤에 있다 . 
지적 게임의 팬들은 프로 및 아마추어 토너먼트를 위해 여기에 모일 수 있다.
베덴하 손님은 400평의 사계절 목조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보편적인 놀이방은 편안한 벤치가 있는 12개의 나무 테이블이 있다. 
여기서 완전 무료로 플레이 할 수 있다.

체스 클럽에는 게임 룸, 모자 실, 창고, 게임 장비 보관실 및 
위생 시설 등 여러 건물이 있다. 
건물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영상] 공중에서 보는 베덴하 (VDNKh from the air, Moscow)

 

[영상] 베덴하 공원 구석구석 (VDNH park in Moscow)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를 그린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은 
러시아를 명실공히 대표하는 국민화가이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일리야 레핀은 톨스토이와 가까이 살며 30여 년 간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종종 만나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도 톨스토이의 영지에 같이 머물며 그린 초상화 중 한 점이다.

 

Leo Tolstoy Barefoot. 맨발의 톨스토이.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그는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된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간다. 
영지에서 농노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계몽 실험을 벌이던 톨스토이는 

1848년에 다시 고향을 떠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빚을 많이 졌다. 
급기야 1855년에는 도박 빚 때문에 야스야냐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 · 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Yasnaya Polyana Fleece Blanket에서 아내와 Leo Tolsto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 · 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Portrait of Leo Tolstoy in peasant dress. shoeless. 1901. by Ilia Repin. 
oil on canvas. 207 X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 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이반 투르게네프나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Trait of Leo Tolstoy as a Ploughman on a Field. 쟁기로 밭을 가는 레오 톨스토이. 1887. 
by Ilia Repin. oil on canvas. 40 x 2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

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1753~1821) 공작의 소유였다.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 이 영지에 정착했다. 

니콜라이 볼콘스키는 이곳에서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Maria Nikolaevna, 1790~1830)를 낳았다. 
그러나 딸  마리야가 두 살 되던 해에 볼콘스키의 아내가 사망했고 
볼콘스키 공작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마리야만을 열심히 길렀다. 
딸 마리야는 볼콘스키 공작이 죽은 후 이 영지를 물려 받았다. 

1년 후, 마리야는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4~1837)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4살 연상인 마리야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 
이 영지는 마리야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는 결혼 후 이 곳에서 다섯 남매 (4남1녀)를 낳았다. 

레프 톨스토이(Lev Nic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마리야 사이 

4남 1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어머니 마리야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죽게 된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까닭에 톨스토이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 또는 숙모로 불린

척집을 전전하며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후견인 ‘숙모’ 요르골스카야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톨스토이를 기르다시피 했으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불우한 기억의 그늘을 드리우며 여성상을 형성하는 데 
어두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친척집이 있는 카잔으로 이주한 후 톨스토이는 카잔대학에 들어가 
동양어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도에 자퇴를 한다. 
당시 교수는 그를 ‘공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불량 학생으로 평가했다.
톨스토이는 독학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그리스어, 라틴어, 터키어 등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하니 실제로는 어학에 꽤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백작은 학업과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읽기 좋아했고 
도박, 사냥, 음주, 집시 여자 등 다른 데 관심이 많았다. 
열아홉 나이에 성병에 걸려 대학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일기를 남기는 습관은 강박적일 만큼 평생토록 이어진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농노들을 교육하고 그들 생활을 
개선하려는 계몽 활동을 벌이지만 농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를 맛본다. 
그는 모스크바와 툴라, 페테르부르크를 돌며 

한량 생활을 하다가 엄청난 노름빚까지 지게 된다. 


톨스토이의 모순된 성격은 이렇듯 이미 젊은 시절에 드러났다. 
그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거만했고 내성적인가 하면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했으며, 감상적이면서도 격정적이었다. 

이상주의자이면서 쾌락주의자였다.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빠진 자신에 대해

독한 환멸과 자책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1851년에 형 니콜라이를 따라 캅카스 지역으로 내려간 레프 톨스토이는 
군에 입대해 체첸 전투에 참전한다. 
크림 전쟁 때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중위로 진급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상황을 목도했다. 
이즈음에 가명으로 데뷔작인 <유년 시절 (1852)>을 발표하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쓴다. 

<유년 시절>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로 이어져 자전소설 삼부작을 이룬다. 
사실, 그의 저작 대부분을 ‘자전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며 유년에서 소년 시절로 건너간다. 
이들 초기작에 담긴 예술, 사랑, 죽음 그리고 인생의 문제는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에 계속 따라다니는 주제가 된다. 

군을 제대하고 그는 두 차례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 여행 중에 생전 처음 단두대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에 빠진다. 
두 번째 여행에서 빅토르 위고, 아나키스트인 푸르동 등을 만나기도 한다. 
전쟁과 여행을 통해 체험한 일들은 나중에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서 농부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초등 독본’이라는 교재를 펴낸다. 
유렵을 여행한 목적 중 하나도 학교에 필요한 교과서를 만들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또한 훗날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토지공유제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는 
농민들이 토지를 공유하는 농장을 만들고,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의 사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Leo Tolstoy in the forest. 숲에서 휴식을 취하는 톨스토이. 1890. 
by Ilia Repin. oil on canvas. 50 X 6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누워 책을 읽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엄격한 작가의 모습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보여준다.  
러시아 국민화가 레핀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류 시절 경험했던 

야외의 빛을 화폭에 담아내는 기법이 살짝 보이는 이 작품에는 

러시아 미술계의 톨스토이로 불렸던 
일리야 레핀의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친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다분히 안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와 레핀이 친교를 맺은 것은 1880년 모스크바에 있는 레핀의 아틀리에서이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므로 종종 만나서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곤 했다.
레핀은 여러차례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야에 머물렀으며
그때마다 레핀은 이 위대한 작가나 그 가족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이들의 우정은 톨스토이가 사망할 때까지 3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by Ilia Repin. oil on canvas.

서른넷 노총각 레프 톨스토이는 1862년 궁정 의사의 딸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와 결혼한다. 
청혼한 지 일주일 만이었고 신부 나이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 간의 결혼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흔한 일이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만 하더라도, 그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재혼했을 때 둘은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다섯이나 났다. 
여담이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문호가 
한 번도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청혼 전 베르스 집안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듯이 소냐 (소피야)와 카드 상자를 앞에 두고

낱말 첫소리 잇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순간적인 끌림이 있었을지언정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겨를도 없이 결혼에 골인한 셈이었다. 
톨스토이에게 결혼은 어지러운 생활을 마감하는 구원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 전날 자신의 일기장을 신부에게 공개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다. 
신랑의 일기를 읽고서 어린 새댁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도박에 빠져 빚을 진 일을 포함하여, 열네 살 때 창녀와 가진 첫 성 경험, 
영지에 사는 농부 아낙과의 육체 관계를 비롯한 여성 편력 등 
과거 성적 방탕과 온갖 치부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일기에서 젊은 유부녀에게 성적으로 계속 끌리는 자신을 ‘짐승’으로 
그녀를 ‘악마’로 표현했다(이때 이야기는 〈악마〉라는 미발표 단편에 실린다). 
소피야는 남편의 옛 정부(情婦)인 아낙이 자기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명랑하고 뚱뚱한 여자이고 심지어 그녀가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서자(庶子)는 나중에 
적자(嫡子)들의 마부로 일하며 집안에 남아 있게 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사생아 
스메르쟈코프가 카라마조프 가(家)의 하인 겸 요리사로 살았듯이 말이다.

일기 공개가 톨스토이 자신에게는 지난날 잘못을 청산하고 
안정된 삶을 새로이 꾸리며 거듭나려는 대단한 결심이었을지 모르지만, 

부인 소피야에게는 의심과 다툼으로 점철되는 악몽 같은 

결혼 생활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톨스토이 부부는, 그중 다섯이 아주 어릴 때 죽기는 했으나 

자녀를 열셋이나 낳아 길렀고, 톨스토이가 외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48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남편보다 열여섯 살 어린 아내로서는 복잡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톨스토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터이다. 
이상주의자인 작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려다 보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자주 싸우기는 했으나 소피야는 차라리 평범하고 헌신적인 아내에 속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20년 가까이는 그런대로 온전하고 원만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었다. 
소피야는 이곳에서 남편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다. 
둘 사이에서 13명(9남 4녀)의 자녀들이 탄생한다. 
다섯 명 (4남 1녀)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총 8명 (5남 3녀)이 생존했다. 

레프는 1881년 (53세)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을 사 들여 겨울을 보냈다. 
겨울만 보내고 그는 빨리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레프는 영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이 영지는 약 5백만 평(1,600헥타르)에 이르렀다. 
영지 윗 부분에는 고밀도의 원시림과 4개 연못, 
약 350명의 소작농이 살았으며 농민의 집이 네 군데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넓혔다. 
원래 정원의 면적은 4배나 늘어났고 총 5개의 정원이 있었다. 
레프는 오전 7시에 기상 후 공원을 걷는 등 운동을 했고 이 후 시간에 글쓰기를 했다. 
곡물 수확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 
그는 농부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1878년을 전후로 해서 흔히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부부 사이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쓰던 무렵부터 톨스토이가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크게 변화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피야는 자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챙기면서 
작가 남편의 비서와 편집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인 1863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869년 발표한 <전쟁과 평화>만 해도, 
톨스토이가 악필로 갈겨쓴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아내 소피야가 여러 번 읽고 
정서해서 옮겨 쓰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이 
제때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도박벽과 간질병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를 구원한 아내 안나처럼. 
적어도 결혼 초기에 소피야는 ‘내조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Leo Tolstoy reading. 1891. by Ilia Repin. pencil. 24 X 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젊은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허위로 가득한 사교계를 싫어했다. 
톨스토이에게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육체에 탐닉하면서도 육체를 경멸했고 여자를 좋아하면서 여자를 증오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도 외적인 매력에 홀려 빠져든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교계에서 잘나가는 훤칠한 사내들은 몰락하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은 대체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전쟁과 평화>의 엘렌,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의 아내처럼, 사고사나 자살 혹은 타살로

반면, 어쩌면 당연하게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과 이념을 반영한 

주인공은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 베주호프,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름 ‘레프’에서 따왔다), 

<부활>의 네흘류도프 등과 같이.

사랑과 결혼에 관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비관적으로 바뀐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커플과 가정을 보여준다. 
돌리와 스티바(스치바)​ 오블론스키 커플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유형의 부부이다. 
바람피운 남편이 밉지만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간다. 

카레닌과 안나는 진작 갈라서고도 남을 법한데도 사회적 체면과 

아들 양육권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쇼윈도 부부’에 불과하다. 
카레닌은 ‘오쟁이진’ 늙은 남편일 뿐 악인은 아니다. 
그는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을 자기 딸로 받아들인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달려오는 기차처럼 본능에 충실한 열정적인 커플이다. 
안나의 육체에 충만한 활기와 솔직함은 브론스키를 매혹하지만 

또한 그것은 집착으로 바뀌어 브론스키의 마음을 떠나게 한다. 
진정 어린 사랑도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백작 부인 안나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지만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오히려 상탄을 누린다. 
둘의 사랑은 운명적으로 시작해 비극적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육체적 사랑이라면 

키티(키치)와 레빈의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가깝다. 
키티와 콘스탄친 레빈은 어찌 보면 차선책으로 맺어진 짝이다. 
처음에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키티는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레빈의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이니 말이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작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류층 사교계를 멀리한 채 농지 경영에 전념하며 육체노동을 즐긴다. 
키티는 그런 레빈에게 의지하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이들을 이상적인 커플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면이 느껴진다.

톨스토이가 결혼 전에 쓴 〈가정의 행복〉(1859)에는 가정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30년 뒤 〈크로이체르 소나타〉(1889)라는 중편 소설에서 질투에 눈먼 나머지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를 등장시켜 결혼 생활의 완전한 파탄을 선언한다. 
살인자의 인생 고백이라는 형식을 빌어, 육체적인 욕망만 있을 뿐 
낭만적 사랑이란 없으며 결혼은 구속이라 말한다.

“얼마나 지속되느냐고요? 아주 오랫동안이죠. 어떨 때는 평생이 되기도 하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부인이 대답했다.

“그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시간은 아주 드물지만 일 년 정도고, 
보통은 몇 달, 몇 주, 며칠, 또는 몇 시간이죠.” 

그는 자신의 의견에 모두가 놀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건 완두콩 깍지 속에 훌륭한 완두콩 두 알이 

나란히 들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권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Leo Tolstoy working at the round table. 1891. by Ilia Repin. Private collection

나는 언제가 죽는다. 그렇다면 삶은 무의미한 것인가? 
5년의 각고 끝에 탈고한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를 

명실공히 러시아 최고 작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드넓은 영지에서 나오는 부와 위대한 문학가라는 명예를 함께 누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을 꾸린 지주 귀족에게 어느 날 깊은 회의와 의혹이 찾아든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따위 물음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의문에 답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이슬람교, 불교, 동양 사상 등을 포함한 
종교, 철학, 과학, 문학, 역사 저작들을 두루 탐독한다. 
자신의 삶을 철저히 돌아보고 반성한다. 

이른바 ‘회심(回心)’으로 불리는 정신적 위기, 

내면적 방황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민과 의문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품어왔던 생각이었으나, 
1881년 겨울 모스크바 주민조사 작업에 참여해 빈민굴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그곳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마주친 일이 회심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회록>을 완성한 1882년을 기점으로 톨스토이는 예술가, 소설가에서 
사상가, 설교가, 도덕가로 변모한다.

이후 그는 인생과 종교, 철학을 논하는 저술을 집필하는 데 전념한다. 
소설을 쓰더라도 장편 대작보다는 교훈을 담은 중단편이나 우화 위주였다. 
후기 작품으로는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하지 무라트〉, 
〈크로이체르 소나타〉, 〈신부(神父) 세르게이〉, 희곡인 〈산송장〉 등을 꼽을 수 있다. 

1887년에 나온 <인생론>은 ‘신의 말이 없고 인간의 이성 만을 강조하여 교회와 교의에

불신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검열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말년 역작인 <부활(1889)>은 당시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도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대주기 위해 잡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부활>에서 교회와 사법제도를 비판한 톨스토이는 1901년 
러시아정교회 종무원으로부터 ‘사이비 교주’로 찍혀 파문을 당했다.

‘회심’ 또는 ‘변심’ 이후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전 삶을 통째로 거짓이라 선언한다.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원시 그리스도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예술을 부정하고 가족을 기만의 산물로 여겼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1898)>에서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모든 소설을 거부하고, 우리가 불후의 명작으로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싸잡아 비난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미켈란젤로의 미술,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시, 
바그너의 악극, 베토벤의 후기 음악 등을 나쁜 예술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예술은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여겼다. 
농부들이 일하며 어울려 부르는 노래가 
아무런 감정도 감염시키지 못하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술 담배를 끊고 채식을 고집했고, 시골에서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기를 바랐다. 
문명을 멀리하고 자연, 도덕, 영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급기야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하고 농부로 살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하는 바람에 부인 소피야를 분노케 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만나려고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러시아와 세계 각지에서 야스나야 폴랴나로 몰려든 탓에 부부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다.

 

Portraits Study, by Ilia Repin. 

톨스토이는 생애 후반기 들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기실 그는 살아오며 주변에서 많은 죽음과 마주했고 

평생토록 삶과 죽음에 관한 사유에 몰두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어머니는 어린 레프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여행 중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톨스토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는다며 모스크바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녀 가운데 다섯 아이를 잃었다. 
특히 막내아들 이반이 일곱 살로 죽었을 때는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 

크림 전쟁에 참전해 살육의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파리 여행 때 기요틴에 목이 잘린 남자를 눈앞에서 보고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그는 1856년에 셋째 형 드미트리, 1860년에는 맏형 니콜라이를 병으로 잃었다. 
그는 형 니콜라이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톨스토이가 느지막한 나이에 결혼을 서두른 것은 
우애가 남달랐던 형 니콜라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충격 탓도 있었다.

<유년 시절>, <전쟁과 평화>부터 <안나 카레니나>, 〈세 죽음〉, 〈광인의 수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톨스토이는 여러 소설에서 죽음을 다루었다. 
〈세 죽음〉에서 귀부인(여지주)과 마부와 나무의 죽음.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불륜녀 안나의 자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잘나가던 판사의 죽음…. 

그 가운데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탐구서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여성 심리 표현의 대가였다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죽음 분석의 달인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다른 작품에 나타난 죽음이라는 사건을 살펴보자.

지주 톨스토이는 1869년 8월 말, 매물로 나온 영지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 
결혼으로 생활에 안정을 찾았고 그해 발표한 <전쟁과 평화>가 
큰 성공을 거두어 명성까지 얻은 시절이었다. 
도중에 피곤함을 느낀 그는 아르자마스라는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했다. 
어느 여관방에 여장을 풀고 몸을 누였으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사각형의 작은 방’에 홀로 누워 있자니 
느닷없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건 으스스함, 낯선 친밀함, 낯익은 두려움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엄습한 우울과 공포의 감정을 
15년 후에 〈광인의 수기〉라는 미완성 단편에 남겼다. 
〈광인의 수기〉에서 ‘광인’이 여관방에서 느낀 서늘한 공포는 
훗날 눈 덮인 숲속으로 사냥 나갔다가 길을 잃으면서 증폭되어 다시 나타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덮어버리는 흰색은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광인의 수기〉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광인의 수기〉에서 죽음의 공포가 유발한 우울증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뭐가 그토록 두려워 도망치려 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 걸까. 
무언가 끔찍한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나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삶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내 관심사, 즉 구입하려는 영지나 아내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 어떤 생각도 즐겁기는커녕 그저 무의미하기만 했다.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죽음이 끔찍한 것인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 
어쩐 일인지 삶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켰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은 톨스토이를 대신해서 
죽음이라는 난제를 두고 답을 구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총 8부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에서 유일하게 

표제가 붙은 장(章)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죽음’이다. 
톨스토이가 형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듯이, 레빈은 형의 임종을 지키며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죽음 앞에 고뇌한다. 
그는 유한한 삶에 허무를 느끼며, 심지어 죽음 자체에 혐오를 드러낸다. 
죽음 탓에 행복할 수 없고, 죽음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업적과 열망을 무(無)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형의 모습과 죽음의 접근은 레빈의 영혼 속에 

형이 찾아온 그 가을밤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 

죽음의 접근과 불가피함에 대한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금 그 감정은 예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죽음의 의미를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이 더욱 두렵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그러한 감정도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죽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랑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그 사랑이 절망의 위협 아래서 더욱 강해지고 순수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은 자신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버티다가 터져버리는 거품 같은 유기체"
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 욕구에 시달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불러온 삶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톨스토이는 가출만큼이나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밧줄이나 노끈 따위를 치워버리고 
좋아하던 사냥도 그만두었다.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미루었다. 
이것은 <참회록>(고백록)​에서 묘사한 톨스토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일 뿐 아니라, 어떤 사악한 힘, 사악하고 협오스럽고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되는 힘의 잔인한 조롱이었다.
그 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악에 대한 그런 종속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가진 건강한 인간 레빈은 자신의 목숨을 매지 않도록 끈을 숨기고 
자신에게 총을 쏠까 봐 총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 두려워할 만큼 수차례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레빈은 총으로 자살하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매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서둘러 자살하기를 원치 않았던 까닭은 일단 먼저 최선을 다해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때 자살해도 늦지 않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다. 
그 당시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던 나는 매일 밤 혼자 남게 되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선반과 선반 사이의 횡목에서 목을 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에 있는 끈들을 모두 치워버려야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나의 생명을 제거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총기를 들고 사냥에 나가는 것도 그만 두었다.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나는 삶을 두려워하고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서도 
여전히 삶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 소피아와 가족들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용서받는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은
성 어거스틴,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강한 성욕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성차별적인 사상도 아울러 비판받고 있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동양에 전해지는 우화라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불설(佛說) 비유경(比喩經)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이다.  
안수(岸樹)는 강기슭의 나무 즉 절벽의 나무, 

정등(井藤)은 우물 속의 등나무 덩굴을 말한다.  
조금 길지만 여기서는 안수정등을 원문에 가깝게 인용해 본다. 

"한 나그네가 넓은 들판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이 불길이 일어나 

에워싸는가 싶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미친듯이 쫓아왔다.  
코끼리를 피해 달아나다 보니 등나무가 덩굴을 늘어뜨린 우물에 이르렀다.  
그는 덩굴을 붙들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 세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니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등덩굴을 생명줄 삼아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덩굴을 쏠아대는 것이 아닌가.  
만일 쥐가 갉아먹어 넝쿨이 끊어지거나, 팔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지면  
독룡들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때 등나무에 매달린 벌집에서 꿀물이 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 다섯 방울, 꿀을 받아먹는 동안 

그는 위태로운 처지도 잊고 황홀경에 빠졌다.  
나그네는 달콤한 꿀맛에 취해서 그만 자신이 우물 절벽에 매달려서  
코끼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갉아먹어 언젠가는 떨어져 용의 밥이 되리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꿀을 먹으려고 덩굴에 연결된 벌집을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벌집에 있던 벌들만이 날아들면서 쏘아대곤 하였다."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던 톨스토이 부부 

불교식으로 보면, 불길은 ‘욕망’, 코끼리는 ‘죽음의 운명’, 

등나무 덩굴은 ‘목숨’,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세월, 

독룡 세 마리는 ‘탐 · 진 · 치의 삼독(三毒)’ 즉 번뇌,  
독사 네 마리는 ‘지 · 수 · 화 · 풍의 사대(四大)’,  
다섯 방울의 꿀은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五欲樂)’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안수정등 설화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인간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인생을 이 설화에 나오는 나그네의 처지에 비유했다. 

"나 역시 나를 갈기갈기 찢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란 뱀으로부터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인생이란 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이런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지난날 나에게 위안을 준 꿀을 핥아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꿀도 이제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고, 하얀 생쥐와 검은 생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가 매달려 있는 가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내 눈에는 뱀이 뚜렷이 보이고, 꿀은 이미 단맛을 잃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피할 길 없는 뱀과 생쥐들뿐이고, 

그것들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참된 진실인 것이다."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아

 

이 사진을 보면 아내 소피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라냐의 집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 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톨스토이의 최후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영지를 가진 부유한 귀족(백작)이었으나 

말년에 토지사유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땅을 비롯한 전 재산을 

농민 등에게 나눠주려고 했고 소피아는 극력 반대했다. 
“재산을 모두 다 나눠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소피아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피아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톨스토이가 몰래 집을 나왔다가 며칠만에 죽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종종 악처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이중 8명만 성장함),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쓸 때 7번이나 정서를 하는 등 
평생 톨스토이의 작품 활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년에 요구했던 전 재산의 포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저택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영지 안의 숲 속에 있다. 
가는 길에는 중간 중 간 화 살 표지가 서 있었으나 정작 무덤 앞에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나뭇가지를 휘어 공원의 꽃 밭에서 흔히 보는 반원형의 
낮은 울타리를 쳐 놓았을 뿐 비석이고 뭐고 아무 표시도 없었다. 
파란 잔디에 덮인 길다란 관모양의 직육면체 흙 더미가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톨스토이 사망 초기에는 무덤 주위에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쳐져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인 소피아의 무덤은 영지 인근 코차코프스 키의 톨스토이 가족 묘지에 따로 있다고 한다.

 


<참회록>에는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톨스토이의 내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참회록>을 쓰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새기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탐구했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출간하고 4년 후에 <참회록>의 소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을 발표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담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訃告)를 접한 지인들 반응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것은 애도의 감정이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가능해진 인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기대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란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재난이라는 듯 행동한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은 피해 갔다는 데서 ‘모종의 기쁨’마저 느낀다.

상갓집 문상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조문객을 불러 물어볼 정도로 
남편 사망 시 나오는 국가 지원금을 더 받을 낼 방법이 없을까 궁금해 하고, 
이반 일리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조문객은 이날 저녁 

동료들과 벌일 카드놀이에 늦을까 봐 그게 걱정이다. 
이반 일리치의 친구들이 보인 행태는 이반 일리치의 예전 모습일지도 모른다. 
직장 동료의 불행이 자신에겐 다행으로 다가오고, 
가족 친지의 죽음에서 재산 상속이나 보험금을 떠올리며, 
장례식장조차 친교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세태이기는 마찬가지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에서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은 걸. 어쨌든 나는 아니잖아.”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서도 위 구절과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에브리맨>은 보석상 아들로 태어나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로 살았던 한 이름 없는 남자의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2장 서두를 장식하는 이 한마디로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지난 삶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만큼이나 인상적인 명문장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었는데 왜 그게 끔찍한 것이었을까? 
이반 일리치 골로빈은 마흔다섯 나이로 사망했을 때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부장이나 임원, 정부 기관 고위 공무원 쯤 되는 지위에 오른 셈이다. 
마흔 다섯이면 19세기 말 당시 기준으로도 죽기에 이른, 
죽기에는 뭔가 억울할 법한 중년의 나이이다. 

그의 인생은 대체로 ‘유쾌하게’ 만사형통으로 흘러왔다. 
원인 모를 병으로 덜컥 몸져눕기 전에는 말이다. 
그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할 때는 신중했고 

사교적인 자리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약자들을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를 즐겼다. 
점차 높은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인맥을 확보하면서 그에 맞게 처신했고 
적당히 개화된 의식을 내비치며 이미지를 포장할 줄도 알았다. 
결혼에 대해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좋은 귀족 가문에 
외모도 괜찮은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가 이 아가씨를 사랑했고 또 인생관에 공감대가 있어서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속한 상류 사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편파적인 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를 고려해서 결혼했다. 
그런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최상류층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주는 일을 한다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단란한 신혼은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끝이 난다. 
아내의 짜증과 잔소리가 늘어날수록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피해 자신의 직무로 파고들었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아내와의 불화에서 달아나 글을 쓰고 

이상을 실현하는 데 골몰했을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가 결혼 생활에서 원하는 것은 집밥과 집안 살림과 잠자리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재미를 느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짓밟을 수 있다는 권력 의식, 부하 직원들에게 받는 존경심, 
스스로 뛰어나다고 느끼는 업무 수행 능력과 더불어 동료들과의 수다, 
카드 게임 따위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렇게 결혼 후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이반 일리치는 고참 검사가 되었으나 노리고 있던 

더 좋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연봉 5천 루블짜리 자리’를 찾아 페테르부르크로 청탁 여행을 떠나는데, 
마침 운 좋게 인사 이동이 생기면서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된다. 
그 덕에 부부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까지 찾아든다. 

이렇듯 이반 일리치에게 인생의 행복은 번듯한 자리와 두둑한 월급봉투, 
남들처럼 품위 있는 생활 같은 ‘평범한’ 것들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사를 해서 새로 구한 멋진 집에서 들뜬 기분으로 
손수 집 단장에 나선 그에게 사소한 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옆구리를 다친 일은 곧 잊힌다. 
시시한 친구나 친척 따위는 떼어내 버리고, 고위층 인사들을 집에 초대하고 
상류층 사교계와 교류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사노라 바빴기 때문이다.

집 단장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는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 보기도 하고 커튼을 이쪽저쪽에 고쳐 걸어보기까지 했다. 
한번은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법을 직접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워낙 건강하고 민첩한 그는 다행히 균형을 잡아 많이 다치지는 않고 
튀어나온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히기만 했다. 
부딪힌 곳이 욱신거렸지만 금세 나아졌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 그렇게 그들은 살았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

나중에야 이반 일리치는 건강이 나빠졌다는 걸 느낀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타성에 젖어 
뻔한 질문만 던지고 형식적인 진단을 내릴 뿐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법정에서 그가 피고를 심문할 때 드러낸 방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여기에는 교회, 병원, 법원, 정부 등 모든 제도와 

문명을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시각이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는 여기저기 의사들을 찾아다니고 
이런저런 치료법에 관심을 기울이건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강의를 정리한 책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믿음을 논하는 장(障)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사례로 들고 있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는 언제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은 ‘믿음’을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으로 구분하면서, 
의식적 차원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불멸성을 믿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아주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으며 대다수 우리는 그런 인간형에 속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논의에 들어맞는 내용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이 정언 삼단논법의 논리를 거부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은 카이사르 같은 ‘일반적인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자신처럼 특별한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카이사르는 필멸의 인간이라 죽는 게 당연하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나’는 절대 죽을 턱이 없을 거라 믿고 싶어 한다. 
마치 보편타당한 진리와 개별적인 사실 간의 차이를 주장하는 듯하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법원으로 출근해 
재판 업무에 매달려보지만 예전처럼 직장 일이 그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통증은 심해지고 짜증이 늘어 가족과 불화만 깊어진다. 
자신은 혼자 고통에 시달리는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갈 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소멸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 순간 그는 방어벽들 사이로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 죽음을 보고야 말았다. 
어슴푸레 나타난 것뿐이니 곧 사라지려니 생각하면서도 
그는 무의식중에 옆구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옆구리가 다시 쑤시듯 아파왔다. 
그는 다시금 죽음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죽음은 꽃나무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참회록>에는 톨스토이가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게 된 동기를 짐작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이거나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이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즉 ‘죽음’으로 바뀌는 현상에 관해 적고 있다.

그렇게 삶을 살다가 오 년 전에 뭔가 몹시 이상한 일이 내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삶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덮친 것이다. 
나는 혼란에 빠졌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곧 지나갔고, 나는 예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런 무력감의 순간이 

동일한 형태로 점점 더 자주 반복되는 것이었다. 
삶이 정지해버린 듯한 이 느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동일한 질문을 통해 표출되고 하였다. 

“왜?”, 
“그래, 그렇다면 그다음은?”

"… 치명적인 속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만 증세를 보여 환자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다가 
이후 증세가 점점 더 반복되면서 급기야 떨쳐버릴 수 없는 고통이 된다. 
고통은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환자는 그저 약간 거북한 느낌으로만 치부했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 바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울적한 상황에서도 이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병든 주인의 용변을 치우는 일을 도맡아 하는, 농부 출신 하인 게라심이다. 
그는 순박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건강한 젊은이다. 
이상하게도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으면 

통증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반 일리치가 게라심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음,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마음 때문이다. 
가족이나 동료가 보이는 동정은 꾸며진 예절에 불과하지만 
게라심이 전하는 연민은 선량한 심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병든 육신을 집에 남겨둔 채 화려하게 차려입고 싱싱한 몸뚱이를 뽐내며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외출하는 아내와 딸, 예비 사위보다야, 
어깨에 다리를 걸쳐 놓게 해달라는 주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하인이 더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게라심의 말에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태도가 드러난다. 
하인이 보여주는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따뜻한 말과 행동에 주인은 감화된다.

이반 일리치에게 몸의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 던지는 뻔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치료만 받으며 괜찮아질 거라는 식으로 빈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해주길 바라면서도, 

그러한 본심을 표출하지 못한다. 
아직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죽음학자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설’에 따르면 
인간의 죽음을 일생 동안 연구한 그녀는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쳐 임종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반 일리치는 분노와 우울에 빠져 있고 아직 ‘수용’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꺼이꺼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달래주고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법원 동료인 셰베끄가 찾아오자, 이반 일리치는 소리 내어 울거나 
다독임을 구하는 대신 진지하고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상소심 판결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고는 끝까지 그 의견을 고집했다. 
바로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지난 삶을 되짚어 본다. 
어린 시절에는 좋았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고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은 미심쩍은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엔 기쁨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이젠 모두 부질없고 추악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삶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일순간 무너질 수 있는 게 삶이다. 
이반 일리치는 지금까지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뭐든지 다 제대로 했는데 어떻게 잘못 살았을 수가 있었어?’라고 반문하지만,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그가 관료주의 매너리즘에 빠져 내린 잘못된 판결로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유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반 일리치의 직업이 판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던 입장에서 그는 이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가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진 불상사는 가장 높이 오른 순간 맞닥뜨린 
지위의 추락과 삶의 전락을 의미하는 듯하다. 
죽음의 판결이 내려질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는 점점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고독 속으로 숨어든다.

"결혼…. 뜻하지 않게 했던 것. 
환멸,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이 생명력 없는 업무, 그리고 돈 걱정, 
그렇게 보낸 1년, 2년, 그리고 10년, 20년. 언제나 똑같은 삶.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가는 삶.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죽는 것만 남았어!"

"처음 인생이 시작되던 바로 그 지점에 밝게 빛나던 한 점의 빛이 있었다. 
그러나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두워져갔고, 
어두워지는 속도 역시 점점 빨라져만 갔다. 
‘죽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가는구나.’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그러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이 생각은 
영혼 깊은 곳으로 돌덩이처럼 굴러떨어졌다. 
삶도, 기승을 부리던 고통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가장 끔찍한 고통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인정할 수가 없어.’ 
그토록 반듯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 
어느덧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된다. 
그는 무심한 타인들의 처세에서 자신이 여태껏 해온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합리화시켜보려 하지만, 자신의 인생 전부가 
거대한 허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보이는 거짓됨을 혐오했으나 알고 보니 
자기 안의 양심 자체가 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를 죽음에 몰리게 한 것은 낙상 사고나 맹장, 신장의 이상이 아니었다. 
이반의 삶은 무난했으나 무의미한 삶이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삶에 의심을 품지 않은 죄, 타인에게 삶의 기준을 맞춘 죄, 
인생의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은 죄, 자기반성과 성찰을 게을리한 죄가 있을 터이다.

단말마의 비명이 방을 울린다. 
그는 검은 자루 속에서 몸부림치는 신세다. 
죽음 앞에 눈을 가린 사형수 꼴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진다. 
나락 끝에서 무언가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본다. 
그게 삶과 죽음의 고통을 끝낼 탈출구일까.

임종의 순간을 이토록 치밀하게 묘사한 작가가 또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마무리하는 두세 페이지에서 
독자는 톨스토이가 파놓은 심연 속으로 서서히 빨려드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오고 각성의 순간은 늘 짧다. 
가족이 임종을 지키는 짧은 시간 동안 이반 일리치는 
내적 변화를 겪으며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자기 삶을 모두 부정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고통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부정의 과정을 통과해 긍정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울먹이며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에게서 애절한 눈길과 손길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진심 어린 연민이 전해지고 
그의 내면에서도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스며 나온다. 
그는 욕망을 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라고 속삭이는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감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화해로 이어진다. 
비로소 이반 일리치는 자신과 화해하고 또한 타인과 세상과도 화해한다. 
농부 게라심이 보여준 이타적인 선과 더불어,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대하는 
거짓 없는 연민의 몸짓에서 그는 빛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는 두 시간이나 더 사경을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가 고통에 벗어나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단순함’은 
소설 앞 부분에서 그의 삶을 규정지으며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해서 끔찍했다’고 할 때의 
단순함과는 구별되는 단순함이며, 이반 일리치가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외칠 때 ‘기쁨’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이 느끼는 ‘모종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이반 일리치가 ‘그것을 하면 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얼 가리킬까? 
죽음이 있던 자리에 나타난 ‘빛’은 무엇일까? 
선한 마음, 타인과의 교감, 용서와 사랑, 참된 삶, 올바른 삶, 
어쩌면 행복이나 자유, 영혼 같은 것일까?

 

육체적 죽음 뒤에도 육체를 초월하여 영혼이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여긴다면 
죽음이 두려울 까닭이 없을 터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을 따르자면

(플라톤은 이성을 영혼으로 연결시키는 무리수를 두기는 했다), 
죽음은 육체의 종말이지만 영혼 입장에서는 자유의 획득이다. 
영혼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좋은 것이 된다.

말년에 톨스토이는 종교와 교회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와 신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런 그가 영혼불멸설까지 믿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영혼의 존재는 믿은 듯하다. 
위 단락에서, “끝났습니다!”라고 의사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선고를 내린 후 
이반 일리치가 사지를 뻗고 죽기까지는 시간의 틈새가 놓여 있는데, 
이를 혼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찰나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죽음으로 영혼은 ‘잠시’ 자유를 얻은 셈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에서 ‘빛’을 

‘영혼의 빛’이나 ‘영적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구원, 영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부활’은 내세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삶의 도덕적 갱생’을 의미한다​. 
톨스토이가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는다’는 식으로 
죽음이라는 문제를 대충 봉합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죽음이 무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야 죽음을 이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죽음 없는 삶은 없고, 삶 없는 죽음도 없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에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이 난다. 
우리는 언제가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이다.

게라심의 말을 소환해 본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내 삶이 유일하고 고유하며 유한하다는 사실을 늘 의식한다면, 
관성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어찌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 하지 않겠는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작품에서 소년 니콜라이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현자를 찾아 나선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의 입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자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삶을 산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는 항상 인생에 대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 · 난민구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지배층이 저지른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에 대한  
폭압과 착취에 대한 속죄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톨스토이 작품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자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주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작품에 담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에서는 자기 자신을 삐에르에,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부활'에서는 네플류도프에 투영하고 있다.  
이점에서 또 다른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로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과 차별화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러나 둘은 태어난 배경뿐만 아니라 문학정신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다.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이고 부유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중인 계급 신분이었던  
가난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도 어둡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인간의 삶이란 논리로는 도저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암울한 여행이었다. 

이에 비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의 예술 위에  
논리 정연한 건축물을 지으려 한 현실주의자였다.  
인간심리에 대한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최상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삶이란 그가 논리로 풀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만큼 온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아마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신화적인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랜 동안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확실히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여러분은 왜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다.  
죄(罪)에 있어서나 부활(復活)에 있어서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다.”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내부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이 탄생한 요람이다.    
보존을 위해 책상 위를 유리로 덮어 놓았다. 

 

톨스토이 집필실 서재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친필 원고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박물관 안에는 실제 톨스토이의 개인 물건들과 
22,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 박물관 안의 가구들도 1910년대에 사용되었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는 톨스토이의 고손자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가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오늘날 야스나야 빨랴나는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톨스토이의 문학에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국제 컨퍼런스, 학술회의, 세미나 등이 열리고 있다.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2만 2000여 권에 달하는 톨스토이의 서재

 

톨스토이 생가 내부

 

톨스토이 생가 내부

 

[영상] SBS ‘톨스토이 생가’ 내부 모습 大공개

 

[영상] Yasnaya Polyana 톨스토이 생가

 

온실 출입구

 

온실 단지

 

온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인 N. S. 볼콘스키 (Volkonsky)가 윗쪽 연못 위 
공터에 지은 온실은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재산이었고
할아버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온실

볼콘스키(Volkonsky)와 톨스토이(Tolstoy )가족의 3 세대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온실에서 원예 수업과 재배로 바쳤다. 
톨스토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M. N. 볼콘스카야(Volkonskaya)와
톨스토이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도 원예와 재배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1867년에 온실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레오 톨스토이는 같은 장소에 새로 온실을 지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온실 단지

 

온실 단지

 

가든 파빌리온

1888 년에 지어졌다. 
여름에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 및 
니콜라이 게(Nikolai Nikolaevich Ge)를 포함하여 
야스나야 폴랴나의 손님이 파빌리온에 살았다.

 

가든 파빌리온 

 

Leo Tolstoy's favorite bench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톨스토이는 이곳을 특별한 느낌으로 대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벤치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이 나무들을 존경합니다. 
이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이곳으로 산책합니다. 
가끔 여기 앉아서 글도 씁니다 .” 
라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겸 교수였던 
알렉산더 골든바이저(Alexander Borisovich Goldenweiser)에게 말했다.

 

레오 톨스토이가 가장 좋아했던 벤치

 

깔때기 목욕탕

보론카 강에 있는 목욕탕
톨스토이 생전에는 사유지에서 강으로 이어지는 길을 "쿠팔나야"라고 불렀다. 
강을 건너는 교차로 근처에 수영장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거의 매일 목욕을 했다. 
종종 아들이나 방문 손님과 동행하기도 했다.

 

전망대. 로어 파크의 전망대 타워

 

이정표

 

낮은 연못 (Lower Pond) 길

 

낮은 연못 (Lower Pond)

야스나야 폴랴나의 이 아름다운 장소는 톨스토이 가슴에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하부 공원은 어머니(Maria)가 산책하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여기에 그녀는 장미덤불, 개암나무, 화살나무(euonymus) 등을 심었다. 
그 덤불은 여름에는 눈에 띄지 않으나 가을에는 밝은 분홍색-빨강 "모닥불"로 타오르며 
공원 전체에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그리고 윗쪽 연못 근처에는 그녀가 한때 심었던 은빛 포플러가 여전히 살고 있다. 
가족의 전설에 따르면 공원 깊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그녀는 종종 
부동산 사업에 열중한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 자작 나무 다리

야스나야 팔랴나 영지에 영국식 조경 공원을 만들 때 공원을 지나던 계곡이 
두 개의 댐으로 막혀서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부, 중간 및 하부라 이름한다.
하부 공원 낮은 연못(Lower Pond)에 우아한 자작 나무 다리가 가로 질러 지어졌다. 

옛날 연못 위에서는 활어를 잡어서 요리를 해 먹었다. 
가운데 하나는 야스나야 팔랴나 연못 중 가장 깨끗하고 깊은 곳이다. 
샘물을 먹고 여름에도 따뜻해 지지 않고 물이 아주 시원했다. 
1890년대에 스레드니(Sredniy Pond)에 목욕탕이 지어졌다. 
톨스토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빨래도 했다.
스레드니 연못의 수위가 상승하면 그 물이 계곡의 가장 깊은 부분에 위치한 
나무 홈통을 따라 아래 쪽으로 흘러간다.

“오늘 나는 정원을 돌아 다니며 늘 그렇듯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거룩한 이상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레오 톨스토이. 일기).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가는 길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 묘지가 있는 곳은 톨스토이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자주 가서 놀았던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사랑하는 형제 니콜라이(Nikolai)로부터 

어린 시절 녹색 막대기에 대한 전설을 들었다.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으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전쟁과 질병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개미 형제"가 될 것이다. 

톨스토이와 형제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달고 안락 의자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함께 앉아 

“한 지붕 아래” 함께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개미 형제애"를 꿈꿨다.
이제 계곡 가장자리에 묻힌 녹색 막대기를 찾는 일만 남아 있다. 

아이들은 이 녹색 지팡이가 발견되면 세상에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오랫동안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철학적인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에 전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녹색 막대기에 대한 그의 사랑하는 형제의 비유를 회상했다. 

톨스토이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어달라고 반복해서 요청했다. 
“내 몸을 땅에 묻을 때 어떤 의식도 행하지 말라.
나무 관,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녹색 막대기 대신 계곡 맞은 편에 있는 
스타리 자카스(Old Order)를 숲으로 운반하거나 운반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매우 이례적이며 너무 단순해 보인다. 
계곡 가장자리에 있는 녹색 마운드, 묘비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있는 것은 
이 무덤, 평화롭고 조용한 오래된 숲이다. 
이것은 삶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톨스토이 묘지

 

톨스토이의 무덤은 모르고 지나치면 무덤인 줄도 모를 정도로 단출하다. 
그 흔한 묘석이나 묘비도 없이 땅과 풀과 하늘과 맞대어져 있다.  
톨스토이는 영지 내에서도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에 묻히고자 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형 니콜라이가 톨스토이에게 "이곳 스타르이 자카즈" 골짜기 끝에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색 지팡이를 숨겼다"고 말한다. 
평생 그 소망을 품고 살던 톨스토이는 
죽어서도 초록색 지팡이가 숨겨져 있는 이곳에 묻히고자 하였다.

육면체 관 크기 그대로, 흙과 풀로 덮인 작은 무덤이다.  
유언대로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표식도 없고 묘석이나 묘비, 십자가도 없다. 
잘 모르고 찾아간다면 무덤 있는 데를 놓치기 쉽다. 
유언을 모르고 찾아간다면 실망하기 쉽다.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과 질병이 없어지게 하는 초록 지팡이'를 숨긴 곳, 
스타리 자카스 (Старый Заказ Old Order) 숲에 그는 묻혔다,  
스타리 자카스(Старый Заказ)는 직역하면 '오랜 금지'란 뜻으로, 
톨스토이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이 묻힐 묘 크기만큼이었던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풀무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Иван)은 ‘성(聖) 요한’(영어로는 ‘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우리나라 ‘영수’나 ‘지훈’처럼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이다. 
‘이반’은 보통 사람의 대명사로, 이를테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자 익명의 흔한 죽음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82세 나이로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객사했을 때 
그는 이미 유언장을 남겨둔 상태였다. 
저작권을 포기할 뿐 아니라, 추모행사 없이 비석도 세우지 말고 
흙무덤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이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한 농민의 죽음처럼 소박하게 장례를 치러주길 원했다. 
그의 가출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생중계되었듯이, 톨스토이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장례에는 지인들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 학생 등 엄청난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고 
국민적인 행사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48년 간 고락을 함께했으나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내 소피야는 
9년 후 그의 무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묘지에 따로 묻혔다.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삶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했고, 
높은 이상과 실제 삶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괴로워했다. 
그는 위대한 작가, 지혜로운 현자였고 모순덩어리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톨스토이는 형들과 함께 우애와 선의 삶을 살자고 맹세하며,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주문을 적은 '마법의 초록 지팡이'를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 어딘가에 심어놓은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묻히길 바란 데가 그 지팡이가 있던 자리였다. 

“진리를 … 나는 … 사랑한다.”, 
“그러나 농부들은… 농부들은 어떻게 죽는가?” 
톨스토이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이반 일리치처럼 톨스토이는 죽음을 맞이하며 ‘빛’을 보았을까. 
어린 톨스토이가 생각한 삶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2019년 8월, 백야(白夜)가 다가온 어느 날, 
나는 야스나야 폴랴나 숲 그늘 아래, 묘비 없는 풀 무덤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였다.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 인증샷

 

톨스토이 묘지에서 나가는 길

 

[영상] Cemetry 톨스토이 묘지

 

[영상] Going to Moscow 모스크바를 향하여

 

[영화] The Last Station (마지막 역) 2009 full -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The Last Station 은 마이클 호프만(Michael Hoffman)이 각본 및 감독을 맡은 
2009년 영어 독일어 전기 드라마 영화로, Leo Tolstoy 의 생애 마지막 달을 기록한 
제이 파리니(Jay Parini) 의 1990년 전기 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톨스토이로, 헬렌 미렌이 아내 소피아 톨스테이아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소피아와 그의 제자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의 유산과 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싸움에 관한 것이다. 
2009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자동번역 생성)

 

 

 

 

 

 

 

톨스토이 생가 야스나야 빨랴나(Yasnaya Polyana) 가는 지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90㎞, 그러니까 서울에서 전주 쯤 떨어진 '툴라' 주(州)에서
다시 남쪽으로 14㎞ 더 가면 톨스토이의 생가가 있는 작은 마을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 Ясная Поляна)'가 있다.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는 러시아어로 ‘밝은 숲속의 초지’라는 뜻으로 
이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활엽수에서 연유된 것이다. 
북쪽에는 유목민 침략에 대비하는 큰 숲이 있어 툴라를 방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Lev Tolstoy in Yasnaya Polyana, 1908, the first color photo portrait in Russia.
1908년, 러시아 최초의 컬러 사진 톨스토이 초상화.

야스나야 팔랴나는 세계적인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 (Leo Tolstoy 1828∼1910)의 

출생지로 1763년 그의 외증조부인 C. F. 볼콘스키가 이 지방을 매입하였다. 
톨스토이는 1862년 결혼한 뒤 귀향하여 이곳에서 48년 동안 살았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그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4∼1869)>에서 

‘헐벗은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톨스토이가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가 된 이후 이곳은 추종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 톨스토이가 농민을 위해 이곳에 세웠던 학교는 문학박물관이 되었다. 
그의 집은 1941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손실을 입은 후 재건되었으며, 
약 2만 2천 권의 장서가 있는 그의 본가와 볼콘스키 대저택, 

공원 등은 톨스토이 기념박물관이 되었다. 
이 박물관은 1978년 레닌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고향집에서 가까운 스타리자카스(Старый Заказ) 언덕 위에 안장되어 있다.

 

[영상] Yasnaya Polyana 가는 길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입구


봉고차와 비슷한 미니버스로 4시간 정도 달려 톨스토이 생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도착하니 입구에 주차장과 기념품 판매점, 레스토랑 등이 있다. 

 

레스토랑

 

우리 일행은 레스토랑을 빌려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다.

 

도시락

 

긴 시간 여정으로 약간은 허기진 배를 채운다. 

 

유료 화장실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안내 광고판

 

엔트리 타워


야스나야 팔랴나 입구에 설치된 원통형 2개는 200여 년 된 것이라고 한다.

엔트리 타워는 레오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N. S. 볼콘스키(Volkonsky)에 의해 지어졌다. 
내부에는 탑이 비어 있어 파수꾼들이 추운 날씨에 가끔 피난처로 사용했다. 
입구 왼쪽에 "카멘카(Kamenka)"라는 작은 집이 있다. 
정원사는 여기에 살았다. 
1890년대에 "카멘카"는 톨스토이의 장녀인 타티아나(Tatiana Lvovna)와 
마리아(Maria Lvovna)가 가르치는 농민 어린이를 위한 학교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 매표소가 있다.

 

엔트리 타워
야스나야 팔랴나(Yasnaya Polyana) 출입구 엔트리 타워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정원사가 살던 "카멘카(Kamenka)"라는 작은 집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 매표소로 쓰인다.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안내도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가의 '영지'로 여러 건물들과 정원, 연못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 우측으로 연못이 나오고
톨스토이의 생가는 위 그림에서 4번 건물, 그의 외증조부 볼콘스키의 집은 6번 건물이다.  

큰 연못

야스나야 팔랴나 영지에 영국식 조경 공원을 만들 때 공원을 지나던 계곡이 
두 개의 댐으로 막혀서 세 개의 연못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상부, 중간 및 하부라 이름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길 좌 우편에 상부 큰 연못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낚시를 하고 여름에는 뱃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썰매와 아이스 스케이트를 탔다. 
연못 기슭을 따라 몇 개의 오래된 버드나무가 보존되어 있으며 
연못 기슭에 목욕탕이 있었다.

 

큰 연못

 

큰 연못

 

"Preshpekt" (프레쉬펙트)

입구 엔트리 타워에서 톨스토이의 집으로 이어지는 그림같은 숲길은 17세기부터 있어 왔다.
자작나무는 골목을 따라 두 줄로 심었다.
1903년에는 오래된 자작나무 대신 여기에 가문비나무를 심었다. 
1965년에 가문비나무는 다시 자작나무로 대체되었다. 
"Preshpekt"는 톨스토이가 "아침기도"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산책로의 일부였다. 
이 자작나무 골목은 톨스토이의 예술 작품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도 전통적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프레쉬펙트(Preshpekt)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인증샷

 

프레쉬펙트(Preshpekt)

 

이정표

 

한글이 표기되어 있는 길 이정표

나무로 만든 모든 방향 안내 화살 표지에 
러시아어 · 영어와 함께 한글이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2003년 삼성전자가 톨스토이 탄생 175주년을 맞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과 함께  ‘톨스토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이후 꾸준히 후원해 온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표지판은 영지 내에 한두 개가 아니다. 

한국인 방문객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톨스토이 문학상’은 제정된 이후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가 되었다.
2017년까지는 표지판에 한글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2018년 중국어로 바뀌었다.

 

[영상] Yasnaya Polyana에 들어 서서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조감 사진

앞쪽 초록색 지붕으로 길게 뻗은 건물은 마굿간
중간에 잘 지어진 초록색 석조 건물은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볼콘스키 하우스 뒷쪽 건물은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뒷쪽 오른쪽 건물이 바로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이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조감 사진

톨스토이의 할아버지 볼콘스키(Volkonsky)가 거처하던 집이다.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이다.
건물 중앙 부분에는 린넨, 카펫 및 가죽 가공을 위한 작업장이 있었다.

볼콘스키 하우스의 동쪽 건물에는 톨스토이의 딸 
타티아나 톨스타야(Tatiana Lvovna Sukhotina- Tolstaya)의 미술 작업장이 있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조감 사진

현재 건물에는 박물관의 행정 및 과학 도서관이 있다. 
볼콘스키 하우스의 전시장에는 임시 전시회가 열린다. 
직접 방문 할 수 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는 톨스토이 외가인 볼콘스키 공작 가문의 영지였다.
이 영지는 톨스토이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1753~1821) 공작의 소유였다.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 이 영지에 정착했다. 
그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Maria Nikolaevna, 1790~1830)를 낳았다. 
그러나 딸이 두 살 되던 해에 아내가 사망했고 

공작은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 
마리야는 공작이 죽은 후 이 영지를 물려 받았다. 

1년 후, 마리야는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1794~1837)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4살 연상의 마리야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것. 
이 영지는 마리야의 결혼 지참금이었다. 


결혼 후 이 곳에서 다섯 남매(4남1녀)를 낳았다.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레프 그리고 딸 마리아. 
레프 톨스토이는 4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레프 두 살 때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지 몇 달 후 죽게 된다. 
어린 시절 레프 톨스토이는 숙모 등 친척집에서 컸고 

청년 때는 도박을 하는 등 방황도 했으며 군입대도 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그러다 1862년 (34세), 레프 톨스토이는 지인의 딸인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이슬레네프 (1862~1910)와 결혼하면서 영지로 돌아온다. 
16살이 어린 그녀는 이곳에서 남편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다. 

둘 사이에서 13명(9남 4녀)의 자녀들이 탄생한다. 
다섯 명 (4남 1녀)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총 8명 (5남 3녀)이 생존했다. 
레프는 1881년 (53세)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을 사들여 겨울을 보냈다. 
겨울만 보내고 그는 곧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는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야 한다. 

레프는 영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이 영지는 약 5백만 평 (1,600헥타르)에 이르렀다. 
영지 윗 부분에는 고밀도의 원시림과 4개의 연못, 
약 350명의 소작농이 살았으며 농민의 집이 네 군데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넓혔다. 
원래 정원의 면적은 4배나 늘어났고 총 5개의 정원이 있었다. 

레프는 오전 7시에 기상 후 공원을 걷는 등 운동을 했고 이후 시간에 글쓰기를 했다. 
곡물 수확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 
그는 농부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영지에는 많은 문화 및 예술가들이 찾아왔다. 
안톤 체홉, 투르게네프, 막심 고르키, 화가 발렌틴 세로브, 일리야 레핀 등. 
톨스토이는 생전에 당대의 누구보다도 더 영향력 있고 존경 받은 인물이었다. 
톨스토이는 1862년~1869년까지 <전쟁과 평화>를 썼고, 
1873년~1877년 사이에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프는 이 영지에서 죽음을 맞지 못했다. 
그의 1910년 (82세) 11월 7일,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모스크바 남부의 
톨스토이 역 (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7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시신은 야스나야 폴랴나로 운구되어 묻혔다.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2009년 작)을 보면 말년의 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톨스토이 사후 영지의 역사 레프 톨스토이 사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러자 레프 사후 1년 뒤인 1911년, 소피야는 곧바로 작가의 서재와 침실 등 
2개의 방을 일반 방문객들에게 개방한다. 

1917년, 볼셰비키가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맏딸 타티야나가 박물관의 첫 관장이 된다.  
1919년 소피아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주의 정부가 싫어서 이후 미국으로 귀화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자손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다. 

1921년에는 주립으로 정식 개관하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게 점령 당한다. 
자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한다. 
거기에 레프 톨스토이 묘지 옆으로 전사한 독일 병사들의 무덤을 줄줄이 썼다. 
당시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모스크바와 톰스크(Tomsk)로 대피시켰다. 
이후 독소전쟁 후에 모두 원상복귀 되었다. 

볼콘스키 하우스 (Volkonsky House) 인증샷

1921년 6월 이 영지는 국유화되었고 공식적으로 그의 기념 박물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작가의 딸인 알렉산드라(Alexandra Tolstaya)가 운영했다. 
박물관의 현재 감독은 톨스토이의 증손자 블라디미르 톨스토이다. 
이 박물관에는 톨스토이의 개인 소지품과 영화, 22,000 권의 도서관이 있다. 
부동산 박물관에는 작가의 저택, 그가 농민 어린이를 위해 세운 학교, 
톨스토이의 장식되지 않은 무덤이 있는 공원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마구간

 

마구간

마구간은 지은지 최소한 2백 년 정도 되었다. 
톨스토이는 말 애호가이자 감정가였다. 
포장 마차에는 항상 여행하고 일하는 말이 있었다.

건물 오른쪽에 마차 창고가 있다. 
오늘날 말은 사유지의 살아 있는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므로 
야스나야 폴랴나는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날 마구간에는 12 마리의 말과 셰틀랜드 조랑말이 살고 있다. 

 

마구간

마구간

 

농기구 등 재고 창고, 헛간
1890년대에 지어졌다.

 

재고 창고, 헛간

 

[영상] Volkonsky House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쿠체르스카야 오두막은 머슴 일꾼들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19세기 농민 오두막의 내부가 온전히 재현되어 있다. 
어린이를 위한 대화형 여행과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내부에서 기억에 남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내부 시설과 당시 농민들의 삶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해설사.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내부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영상] Kucherskaya 오두막 해설

 

쿠체르스카야(Kucherskaya) 오두막 앞에서 인증샷

 

단조 공장
대장간은 아마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는 늦게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이 건물은 1930 년대에 다용도실로 지어졌다.

 

야스나야 폴랴나 숲길

 

지트냐 (Zhitnya)

1890년대에 지어졌다. 
겨울 동안 건초와 짚을 놓는 데 사용되었다. 
예전에는 탈곡기, 쟁기, 써레, 쟁기가 있었다.

 

이정표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은 없어지고 작은 표지석만 남아 있다.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이 있었던 장소에 세워진 작은 비석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톨스토이가 태어난 집과 쿠즈민스키(Kuzminsky) 건물이 두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어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라 이름하였다.
1859년부터 1862년까지 존재했던 톨스토이의 농민 어린이 학교가 여기에서 문을 열었다. 
2층의 밝은 방에는 교실이 배치되고 첫 번째에는 체조 기구가 있다. 
학교에는 작은 자연사 박물관도 있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나중에는 톨스토이의 처제 타치야나 내외가 거처했다.
박물관 전시 기간 동안 윙 쿠즈민스키에는 문학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90년대부터 이 건물은 톨스토이의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삶과 
그의 가족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임시 전시회로 사용되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현재 윙 쿠즈민스키는 테마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포괄적인 투어 일부로 방문할 수 있다.

 

윙 쿠즈민스키(Wing Kuzminsky)
인솔자 김창준 교수의 설명

 

[영상] Yasnaya Polyana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으로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Yasnaya Polyana) 조감 사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는 레오 톨스토이가 살았던 곳으로
러시아의 박물관이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러시아어로 "빛나는 공터"를 뜻한다. 
툴라에서 남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톨스토이는이 집에서 50년 넘게 살았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 책, 그림 등은 진품이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해인 1910년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여전히 집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외관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톨스토이 생가 박물관 인증샷

 

[영상] Yasnaya Polyana

 

 

 

참새 언덕과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루즈니키 스타디움 지도

 

참새 언덕(Sparrow hills)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전경

 

모스크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오스탄키노 텔레비젼 중계탑을 제외하고는 이 레닌 언덕이 제일 높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높아 해발 115m로 우리의 기준으로는 언덕도 아니지만 
산(山)을 보지 못하는 모스크바인에게는 훌륭한 산(山)이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모스크바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주말이면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를 한 신혼 부부들이 이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 또한 러시아의 결혼 풍속도를 알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참새 언덕(Sparrow Hill) 전망대

최근 레닌 언덕이라는 이름에서 1924년 이전에 불려졌었던 참새 언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게르첸과 오가료크가 이곳에서 
러시아의 혁명가가 되기를 결심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강 건너 정면에 보이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주 경기장을 쓰였으며, 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던 곳이다. 

총 수용인원 수는 10만 명 정도이다.

보로비요비 고리(Vorobyovy Gory)는 모스크바에서 걷기에 가장 좋은 장소 중 하나다. 
신혼 부부는 결혼식 날에 여기에 와서 예술가들은 미래의 그림을 찾을 이야기를 찾는다.
 
유명한 모스크바 주립 대학교 (Moscow State University)의 고층 빌딩에서 
참새 언덕 (Sparrow Hills)의 그림 같은 곳을 지나 전망대로 가서 
수도 모스크바의 멋진 파노라마를 감상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는 
러시아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스크바를 보고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강에서 올려다 본 참새 언덕과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

 

참새 언덕 (Sparrow Hills)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 전경

 

참새 언덕 (Sparrow Hills)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국제 비즈니스 센타

 

참새 언덕에서 바라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건물
앞에 전철선로와 바라비요비 고리(Vorobyovy Gory) 역이 있다.

 

참새 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 전경

굴뚝 2개 건물은 중앙급열발전소 
우측 굴뚝 아래 흰색 건물은 정부청사-벨릐이 돔 
굴뚝 사이에 아스탄키노 텔레비전 방송탑이 보인다.
왼쪽 끝 검은 색 빌딩은 우크라이나 호텔
그 옆 스탈린 양식 고층 건물 7개 중 하나는 외무성 건물이다.

 

참새 언덕 (Sparrow Hills)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 전경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전망 외에도 보로비요비 고리(Vorobyovy Gory)는 
산책을 하고 모스크바 강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 지역이다. 

 

루즈니키 스타디움(Central Luzhniki Stadium)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루즈니키 올림픽 종합체육관 부속 경기장 중 하나이며, 
이전의 이름은 레닌 중앙 경기장(Central Lenin Stadium)이었다. 
1956년 개장했으며, 1980년 하계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도 활용되었고, 
현재는 주로 축구 경기장으로 쓰이며, 2018년 FIFA 월드컵 경기장으로도 활용되었다. 
현재의 총 수용인원은 81,000명으로 모두 천장 덮개가 있다.

 

루즈니키 스타디움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 전경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는 1755년 1월 25일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붉은 광장에 있었다. 
전형적인 방사형 도시 모스크바의 심장부로, 

출범 당시부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학, 법학, 의학 3개 학부만으로 출발하였고, 
러시아 제국 시대에는 "모스크바 제국대학(Imperial Moscow University)"이라는 
귀족 출신 위주의 학교였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자녀에 대해서도 입학을 허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학교의 위상도 올라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고위층 자녀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유학하는 것이 
정석 코스로 굳어질 정도였다.

원래 대학 건물은 크렘린 북쪽에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 양식의 새 캠퍼스가 완성되면서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높이가 240m이고 정면의 길이가 450m나 되어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다. 
중앙의 30층 짜리 건물 부분은 대학의 관리부가 있는 관리탑이고 
이 양 옆의 17층짜리 날개 부분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1949년 착공해 1953년 완공되었다. 
높이는 240미터로 1990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였다.
현재도 교육용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브루탈리즘 방식의 건축 중에서도 이런 양식을 스탈린 양식이라고 하는데, 
스탈린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된 과시적인 스타일로 모스크바 시내에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우크라이나 호텔을 비롯해 7개 있으며 이를 '7 자매'라고 하는데 
그 중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 건물이 가장 크다. 

높이도 그렇지만 옆으로도 엄청나게 큰 건물이어서 
한 바퀴 걸어서 돌아보는 데 30분 이상은 잡아야 할 정도이다. 
건물 내부는 걸어다니기에는 하도 넓어서 같은 층 안에서 

횡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꼭대기에 달려 있는 붉은 별은 하도 높아서 작아 보이지만 무게가 12톤에 달한다.

1990년 한소수교 이후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상당히 많다. 
다만 모든 과정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므로 유학 준비가 힘들다.
도서관은 8백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는 스탈린 양식의 웅장한 건물도 건물이지만 
위와 같이 매우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 있어 학생뿐만이 아니라도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여가 시간에 찾는 곳이다. 
단 대학 건물의 내부는 학생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다. 
다만 후문에선 학생증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겉보기에 
너무 관광객스럽지 않게 차려 입으면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도 한다. 
우리를 인솔하는 김창준 교수가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대학의 창설자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ylo Vasilyevich Lomonosov) 동상

정식 명칭은 'M. V. 로모노소프 기념 국립모스크바대학'으로 1755년에 설립되었다. 
이 대학에서 배출한 유명한 사람으로는 혁명적 사상가 라디시쳬프, 게르첸, 

역사가 그라노프스키, 평론가 벨린스키, 교육사상가 우신스키 등이 있다. 
20세기 초두의 사회적인 변혁기에는 학생 운동의 고조로 창설 당시의 학부는

철학, 법학, 의학 등의 3개 학부에서 혁명 후 대폭 증설하였다. 
1987년에 공학, 수학, 컴퓨터 수학 및 사이버네틱스, 

아시아, 아프리카 국제연구소를 비롯하여 각종 부속 연구소와 도서관을 갖게 되었다. 

교수의 총 수는 8,000여 명 이상이고, 그 중 1,000여 명이 박사학위 이상을 가지고 있다. 
대학 건물은 구 교사가 마르크스 거리와 게르첸 거리에 면한 도심에 있고, 
신교사는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건설되었다. 
관광객들이 찾는 본관 건물은 높이 240m의 32층 건물로서 정면의 길이는 450m이고, 
4500개의 강의실이 있으며, 이 건물을 다 둘러보려면 145km를 걸어야 한다. 
건물은 스탈린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아주 웅대한 느낌을 받는다.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

 

참새 언덕(Sparrow Hill) 전망대 인증샷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을 배경으로 인증샷

 

국립 모스크바 대학교(Moscow State University)을 배경으로 인증샷

 

[영상] 참새 언덕 2019. 08. 20.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 (Moscow Metro map)

모스크바 지하철은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에서 운영하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지하철이다. 
1935년 5월 15일에 개통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첫 번째 지하철이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길이는 총 447 km에 달하며, 15개 노선에 265개 역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은 오전 5시 30분에 개장,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영업한다. 
열차 간 간격은 보통 약 2분 간격이나 출퇴근 시간에는 90초마다 한 대꼴로 오기도 한다. 
일일 이용자는 평균 2,442만에 달하며 모스크바의 대중교통 중 가장 높은 이용률을 자랑한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전 세계에서 도쿄 지하철 다음으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지하철이다.

 

【K】Russia Travel-Moscow 모스크바 지하궁전 지하철역

 

모스크바 지하철(Moscow Metro) 이용 방법

10개의 직선코스와 1개의 순환선으로 이루어져 트랙의 총 길이가 
2,000km에 다다르는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1930년대 스탈린의 지시로 건설된 만큼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굉장히 빠를 뿐만 아니라 
안전하고 깨끗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각 역사는 각종 모자이크나 대리석 조각들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다. 
빨간색 M으로 표시되는 메트로는 녹색의 플라스틱 동전을 구입하여 개찰구에 넣은 후 통과하는데, 
2019년 5월 기준으로 1회권, 2회권 및 선불 교통카드 트로이카를 구입할 수 있고 
1회권 55루블, 2회권 110루블이다.

또한 동전과 함께 10회 탑승이 가능한 마그네틱 카드와 
1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좀 더 할 일된 가격에 병용되고 있다. 
운행시간은 오전05:30 부터 오전 01:00까지(일반 배차간격은 2~4분, 러시아워는 1~2분)이며 
주요 관광명소는 이 메트로로 거의 다 갈 수가 있어 여행자에게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콤소몰스카야 역은 스탈린 시대에 유래한 모스크바 지하철의 제국양식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 역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사용됐던 모스크바 바로크 모티브들로 꾸며져 있으며 
1958년에는 브뤼셀 국제박람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한참 만에 도착한 승차장은 바닥과 벽면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유럽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의자도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의 조명장식도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럽다. 
승차장 안쪽 면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작품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원형의 천장은 높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말로만 듣던 모스크바 지하철역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콤소몰스카야 역(Komsomol'skaya)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활기찬 
교통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자 모스크바의 관문으로 설계되었다. 
이 역 근처에는 모스크바의 9대 터미널역 중 3개의 역이 몰려 있다.
콤소몰스카야 역 주변이 모스크바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셈.
따라서 기차를 이용해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수도 모스크바의 첫 인상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의 가장 번잡한 교통 허브인 콤소몰스카야 광장 아래에 있으며 
노란색 천장에 장식된 대리석 조각과 색유리를 쪼개 붙인 모자이크화가 유명하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화려함을 더한다.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모스크바 지하철은 이용객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고 규모도 엄청나게 거대하다. 
무엇보다도 각 역 마다 내부 장식이 모두 다르고, 개성있고 아름답게 꾸며놓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모스크바 지하철을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 정부가 체제 선전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따로 모스크바 지하철 관광을 시켜 줬다고 한다. 
특히 아름다운 역으로 꼽히는 곳으로 콤소몰스카야 역, 마야콥스카야 역, 
키옙스카야 역, 플로샤티 레볼류치 역 등이 있다.
도스토옙스카야 역 등 2010년대 이후로 개통되고 있는 신 역사들도 
역 디자인이 좋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지하철 선로가 엄청나게 깊은 지하 대심도에 건설되어 있어서 
지하철 노선 중 많은 부분이 방공호 성격을 겸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방공호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방공호로 썼고 심지어 

조산소(助産所)로도 썼을 정도로 깊고 견고하게 지어져있다. 
이것을 주제로 한 소설까지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핵전쟁을 대비해서 지은 것은 아니고, 
모스크바의 지반 문제 때문에 깊게 들어가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당연히 모든 역이 지하 백여 미터에 있는 건 아니고 다른 국가의 지하철들과 
비슷한 심도에 있는 역도 있고 보로비요비 고리 역처럼 지상역도 있다.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지하철역 입구는 보통 지상에 별도 건물 하나를 올려 출입구를 두는 경우가 많으며, 
입구와 출구는 분리되어 있다. 
여러 노선이 모이는 환승역의 경우 노선별로 각각 입구 건물이 따로 있으며 
(물론 내부에서 환승통로로 연결된다) 도심부에서는 기존 건물에 더부살이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에 흔한 것과 같이 도심부의 일반적인 지하도에 역 입구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역간 거리가 평균 1.7km, 도심부에서도 1km 이상은 하기 때문에 
노선이 17개나 되는 대규모에도 서유럽에 비하면 역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소련 붕괴 이후부터 1990년대 말까지는 러시아 매춘부인 

인터걸들의 주요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90년대 말 러시아 경제가 파산했을 때는 저녁 7시만 되면 러시아 지하철에 
토플리스 차림의 매춘부들이 호객행위를 하곤 했다. 
러시아 경제가 좋아지고 인터걸들이 철퇴를 맞고 음지로 들어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러시아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경찰국가인 만큼 
경찰들이 곳곳에서 CCTV로 감시하여 치안도 좋은 편이다. 
러시아 대부분의 건물이 그렇듯 모든 역의 입구에 금속탐지기와 
X-Ray 검색대, 보안 요원이 배치되어 있다. 
다만, 2010년에 폭탄 테러로 많은 희생자가 나기도 했다.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공산주의 시절의 흔적인지 역무원의 대부분이 여성이다. 
표를 파는 곳에 근무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부정승차를 감시하는 직원도 여성이며, 
에스컬레이터 밑에 있는 부스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여성이다. 
다만 입구의 보안 요원은 남성이 많다.

지하철 탑승을 할 때는 창구에서 표를 구입해야 하는데, 
지하철 직영 노선(1~15호선)은 단일 요금제로서 표 한 장 사면 거리에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다. 
표는 개찰구에 찍는 방식의 종이 재질인데 보통 1회용, 5회용 등 단위별로 가격을 달리하여 판매한다. 
또한 기간제 패스도 있으며 2019년 5월 기준 1일권 230루블, 3일권 438루블이다. 
이용객이 많은데 창구가 많지 않아 길게 줄을 서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승차권 자동 판매기도 있는데 영어로도 안내 문구가 나온다. 
러시아어가 아예 불가능한 관광객들에게 아주 유용하다. 
1회권, 2회권 및 선불 교통카드 트로이카를 구입할수 있는데 2019년 5월 기준으로 
1회권 55루블, 2회권 110루블. 
들어갈 때만 표가 필요하고 나갈 때는 기본적으로 검표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 목적지에서 나갈 때 비치된 휴지통에 표를 버린다.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과거 소련이 붕괴한 후 모스크바 지하철은 소매치기범 같은 좀도둑뿐만 아니라 
스킨헤드 같은 폭력배들도 자주 출몰하는 등 치안이 매우 나빴다. 
이는 지하철만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 자체가 몹시 혼란스럽고 치안도 아주 불안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러시아의 치안이 많이 안정되었고 모스크바 지하철도 
치안이 아주 좋아져 편하게 타고 다닐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이 많이 오가는 만큼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는 자주 발생하니 주의하자. 
여학생이 문 옆에서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동차의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밖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오더니 전화기만 채간 사례가 있으며, 
백팩을 매고 서 있던 중 소매치기가 지퍼를 슬쩍 내려 안의 물건을 털어가려 한 사례도 있다.

러시아어 속어로 무임승차자를 Заяц(토끼)라고 부르는데, 개찰구의 바를 
폴짝 뛰어넘어 도망가는 모습이 토끼를 닮아 붙은 이름인 듯 하다. 
이전에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개찰구에 팔을 짚고 뛰어넘지 못하도록 
피라미드같이 생긴 높고 뾰족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동차의 배차간격이 매우 짧기 때문에 이용하기 편리하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될 정도로 거의 모든 환승역이 개념환승이다. 
물론 그 에스컬레이터 길이는 답이 없다. 
몇몇 환승역은 환승통로가 꽤 긴 곳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짧거나 비슷하다. 
다만 새로 생긴 외곽 노선일수록 막장환승이 많아지는데 중심 지역 노선망은 
거의 예전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방문객 체감상으로는 환승은 매우 편리한 편이다.

 

콤소몰스카야 역 (Komsomol'skaya) 5호선 승강장의 모습.

차량 내부의 소음이 굉장히 심각하다. 그야말로 기차화통 삶는 소리.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도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이며 
장시간 이용하면 청력에 심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국에 비하면 열차 모델도 굉장히 구식으로 보이며 별다른 도색도 하지 않은 
회철색 내지는 목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심히 올드한 느낌이다. 
심지어 2000년대 생산분도 이런 구리구리한 디자인이다. 


최근들어 만든지 5년도 안된 신형 객차도 종종 보이는데 
이런 기차화통 삶는 소리도 없고 튀어나갈것 같은 가속도 자제하는 편이다. 
2019년 현재는 2018년 개최된 러시아 월드컵의 영향으로 
전 차량에서 모든 역에 영어 안내방송을 지원한다. 
역 도착 직전에 러시아어 방송이 나오고 영어방송이 나오는 방식. 
역 출발 직전에는 다음 역을 알려주는 방송이 나오는데 역시 영어방송이 지원된다. 


또한 일부 신차에는 LED 전광판이 달려있으며 전광판 역시 영어 안내를 해 준다. 
차량 내부 노선도에도 영어 역명이 표기되어 있어서 
예전과 달리 키릴 문자를 몰라도 이용이 편리해졌다.
2016년 11월 현재 지속적인 전동차 세대교체가 이루어 지고 있어 
테스트 중인 공기수송 신형동차가 자주 보인다.

방공호로 쓰일 정도로 고심도에 지하철을 만들었기에, 
개찰구에서 플랫폼까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매우 길고 상당히 경사지며 빠르다. 
100m가 넘는 것도 꽤 있을 정도. 
헌데, 이런 에스컬레이터도 느리다고 생각하는지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는 시민들도 꽤 있다. 
물론 충분히 위험한 행동인지라 에스컬레이터에 달린 스피커로 
안전하게 타라고 꾸준히 계도 방송을 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중앙 갈색라인까지 한정이고, 가지처럼 모스크바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역들은 그냥 계단 몇개만 내려가면 되는 경우가 많다.

매표소 직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분들은 영어를 못한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표를 끊는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역에 자동 발매기가 설치되어있고 영어도 지원한다. 
다만 자동 발매기로는 1회권과 2회권 티켓만 구입할 수 있다. 
2019년 기준 1일권, 3일권 등도 구입이 가능해졌다. 


요즘은 모든 매표소 창구 옆에 요금표를 붙여 놨기 때문에 
그걸 찍어서 원하는 표를 가리키면 발매 하시는 분들이 알아서 해 주신다. 
괜히 어줍잖은 러시아어 하다가 자기나 직원분이나 답답하게 만들 바에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다만 요즘엔 월드컵 때문에 외국인이 많아서 그런지 영어가 가능한 창구도 생겼다. 
매표소 위에 '영어 가능'이라고 적어 둔 팻말이 있다. 
지하철을 많이 쓸 거면 1/2회권 대신에 트로이카라는 카드를 사자. 
이게 있으면 지하철부터 무궤도 전차까지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역 내에 화장실이 없다. 
몇몇 역은 출입구 옆에 간이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지만 유료다.

 

아침 출근시간 콤소몰스카야 (Komsomol'skaya) 역 에스컬레이터를 탄 시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
개찰구를 통과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만나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 4대가 나란히 설치돼 있고 
그 사이엔 높이 80cm 정도의 원통형 조명등이 약 3m 간격으로 설치돼 불을 밝히고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처음엔 살짝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우리나라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보다 30∼40%는 빠른 느낌이다.
보통 사람이 걸어서 오르내릴 거리는 아니지만 
걷거나 뛰는 모스크바 시민도 많아 왼쪽 줄은 비워놓는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안내방송을 성별로 구분해서 한다는 점이다. 
도심으로 진입하는 열차는 남자가, 외곽으로 나가는 열차는 여자가 각각 안내방송을 한다.
원형으로 운행하는 5호선의 경우 시계 방향으로 도는 열차는 남자가,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열차는 여자가 각각 안내한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열차 위에 전선이 없다. 
구형 객차는 객차 간 이동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신형 열차는 객차 간 문이 없어 객실 전체가 탁 트여 있고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어댑터가 설치된 것도 있다.
지하철역 환승 통로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언뜻 듣기에도 연주 수준이 전문가급이어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모스크바 지하철 체계는 열한 개의 노선이 바큇살 모양으로 
중앙의 허브에서 도시 외곽까지 뻗어 있고, 5호선과 14호선이 원형으로 
중심과 외곽에서 다른 노선들을 이어 주며 도시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구조로 되어있다.
2018년 현재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은 224개이며, 
노선 길이는 381km로 세계에서 5번째로 길다. 
하루 평균 700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며 2014년 12월 26일 
하루 최대 탑승객 수가 971만 명이었다고 한다.

 

[영상] Moscow Metro 콤소몰스카야 역

 

모스크바 지하철역 중 가장 긴 파르크포베디 에스컬레이터

모스크바 지하철의 가장 큰 특징은 땅속 깊이 위치해 에스컬레이터가 매우 길다는 것이다. 
100m가 넘는 곳이 흔하다.
가장 깊다는 파르크포베디는 평균 깊이가 지하 84m, 최대 깊이는 97m다. 
에스컬레이터 길이는 126m이고, 740개의 계단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면까지 약 3분이 걸린다. 
서울 지하철에서 가장 긴 9호선 당산역의 에스컬레이터가 48m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아래에는 근무자를 의미하는 '제주르나야'가 상주하며 안전사고에 대비한다.

다음 특징으로는 배차 간격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1∼2분만 지나면 오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승차하지 않아도 된다. 
출퇴근 시간엔 1분 이내에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승차장은 1면 2선식의 섬식 승차장이기 때문에 
반대편으로 갈아타야 할 경우 맞은편 열차를 타면 된다.
승차장 양 끝에 현재 시각과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가 지났는지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다. 
승객 입장에서 편리하고 운전하는 기관사에게 유용한 장치라고 한다.

 

승객으로 붐비는 키에프스카야 역

승차장에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스크린도어는 없다. 
그 때문에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지하철 문 닫히는 속도도 빠른 편이고 몸이라도 끼인다면 다시 열어주는 게 아니고 
2∼3차례 짧게 열고 닫히는 정도라 주의해야 한다. 
열차에 오르면 소음이 심한 편이지만, 금방 적응이 된다.

 

일렉트로자보드스카야(Electrozavodskaya) 승차장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지하철역
모스크바 지하철은 1935년 5월 11km 길이에 13개 역을 가진 
첫 번째 라인이 개통됐고 2단계는 1941년 완공됐다.
3단계는 2차대전 중 건설됐는데 이때 지어진 역들은 
독일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지하 방공호 역할을 겸하도록 건설됐다.

4단계와 5단계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냉전 시기에 건설됐다. 
이 역들은 핵 공격을 받아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모스크바 지하철역이 궁전 같은 화려함을 갖춘 데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가 곤경에 처한 시기이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시민들이 사용하는 지하철역을 선택한 것이다.

모스크바 지하철역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탄생 당시 정치적 의도로 출발했지만, 
최근에 건설된 역도 현대식의 고급스러움과 예술미를 갖추고 있어 
여전히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스크바 지하철을 타면서 이름난 역뿐만 아니라 
가능한 많은 역에 내려 내부를 살펴보았다. 
내리는 역마다 다양한 실내장식과 조명 시설은 
각기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미술관을 찾은 느낌이었다.

지하철역 여행을 할 땐 승객이 몰리는 시간은 피하는 게 좋다. 
이용객이 워낙 많기 때문에 러시아워는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제대로 감상하기도 어렵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이 좋을 수 있다.
지하철은 아침 5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운행한다.

 

마야콥스카야 역(Mayakovskaya)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지하철역. 
러시아 혁명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1938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지하철 품평회에서 우승해 당시 소련의 위상을 드높였다. 
원형의 백열등으로 둘러싸인 34개의 천장 모자이크화가 유명하다. 
지하 33m에 위치해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 대피소로 활용됐다.

 

6개의 그림이 걸려있는 마리나로샤(Марьина Роща) 승차장

트로파료보(Тропарёво)역 승차장의 조명나무
2014년 12월 8일에 개통하여 2016년 1월 18일까지 본 노선의 시종점 역할을 하였다.

 

플로샤드 레볼류치(Площадь Революции) 역

붉은광장이 있는 역으로 러시아의 유명 건축가 알렉세이 두시킨이 설계했다.
붉은 대리석 아치 양쪽에 자리한 76개의 청동조각상이 유명하다. 
각 아치에는 군인, 농부, 운동선수, 작가, 비행사, 산업노동자, 
학생 등을 묘사한 조각상이 한 쌍씩 있다. 
개를 데리고 있는 군인의 동상이 인기가 높은데 개의 주둥이를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서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도 쓰다듬고 간다.

 

파르크포베디(Парк Победы) 역

모스크바에서 가장 깊은 역. 
이곳은 두 개의 승차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타는 곳과 내리는 승차장이 다르다. 
두 승차장 기둥의 빨간색과 회색 대리석은 디자인이 같지만, 색상은 정반대다. 
승차장 끝에는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과 
제2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대형 벽화로 장식돼 있다. 
대합실의 둥근 천장 장식도 아름답다.

 

벨로루스카야(Белору́сская) 역

벨라루스와 서유럽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인근 벨로루스키 기차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벨라루스를 테마로 일상생활을 묘사한 12개의 팔각 모자이크화와 다양한 장식을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벨로루스카야 역에는 중앙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다른 부분은 승객들이 이용할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역은 방공호로 바뀌었다. 
벨로루스카야 구역에 대한 폭격이 있었을 때 수도관이 폭격으로 손상을 입자 
물이 쏟아져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의 엔진실과 역의 플랫폼으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역을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52년, 콜체바야 선이 개통되자 콜체바야 선의 벨로루스카야 역으로 가는 구간이 새로 추가되었다. 
1970년대 초기에는 원래 디자인할 때 설치했던 대리석 바닥이 화강암으로 교체되었다. 
1998년에는 새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으며, 
2004년에는 타일과 여행역을 감싸고 있던 벽을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2010년 5월 29일, 콜체바야 선으로 가는 환승 구간은 폐쇄되었다. 
이 구간은 낡은 에스컬레이터를 교체하고 수리를 거친뒤 12월 10일 개장되었다. 
환승구간을 재개통 했을 때 기념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도스토옙스카야(Достоевская) 역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을 딴 역. 
지하철 이용객을 맞는 커다란 도스토옙스키 얼굴과 승차장 곳곳에 
그가 쓴 소설의 장면이 벽화로 새겨져 있다. 
흰색의 아치형 천장 아래 줄지어 선 둥근 조명 구멍이 아름답다.

 

승강장

 

[영상] 출구

 

24. 지하철 출입구

 

 

 

[영상] 노보데비치 호수와 공원 (Novodevichy lake & park)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16세기에 건축돼 요새와 유배지로 사용됐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배경이 됐다는 노보데비치 호수

호수 뒤로 보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러시아어로
 "새로운 혹은 거듭난 처녀'란 뜻의 여자 수도원, 즉 수녀원으로 
1524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가 폴란드령이었던 
스몰렌스크의 탈환을 기념해 건립한 수도원이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추대된 곳이며 표트르 대제가 
이복 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와 첫째 부인 예프도키야를 가두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차이코프스키가 이 호수 공원를 거닐면서 영감을 얻어 
"백조의 호수"를 작곡하는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데
백조의 호수에 백조는 없고 청둥오리만 무리지어 떠다닌다. 

 

차이콥스키가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것은 1876년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백조의 호수'는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됐다가 
밤에는 다시 인간이 되는 오데트 공주와 사랑에 빠진 지그프리드 왕자의 사랑 이야기다.


이 곡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측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발레 음악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냥 안무가의 주문에 따라 단순하며 춤추기 좋은 선율들을 만들어 연결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차이콥스키가 '백조의 호수' 음악을 맡았다는 것 
자체가 러시아에서는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세련된 음악에 맞는 안무가 만들어지지 못한 탓으로
1년 뒤 진행된 공연은 실패로 끝났다.

더욱이 수준 이하의 저질이라는 악평까지 들을 정도였다.
차이콥스키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신념을 무너뜨리진 않았다.

 

'현재의 악평에 두려워하지 말자. 악평은 언젠가는 찬사로 바뀔 테니까...'
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새겼고 결국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찬사를 받는 
최고의 발레 명곡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소련 시대에는 박물관이었다가 지금은 다시 러시아 정교 성당이 되었다. 
모스크바 강변에 있으며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해 질 무렵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게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청둥오리와 비둘기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05. 인증샷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호숫가 도로변 한 곳에 미국 부시 前 대통령의 영부인이 
이 곳을 방문하고 오리 동상을 기증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부시 전 대통령 영부인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오리 동상

 

인증샷

 

인증샷

 

인증샷

 

인증샷

 

인증샷

 

노보데비치 공원의 평화로운 모습.
울창한 나무와 잘 가꿔진 잔디밭, 놀이기구가 따사로운 햇살에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영상]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를 들으며노보데비치 호수를 걸어서 한바퀴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 구글 지도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는 모스크바에 있는 공동 묘지로
16세기부터 노보데비치 수도원 남쪽 벽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왔다.
이 공동 묘지는 이반 마시코프(Ivan Mashkov)에 의해 설계되어 1898년에 재개장되었다. 

 

[영상]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

 

노보데비치 수도원 매표소로 향하는 우리 일행

 

노보데비치 수도원 입구와 개폐장 시간 안내판

 

역사적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들의 묘지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노보데비치 묘역에는 아무나 묻힐 수 없다. 
이곳에 묻히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부 허가가 필요하며, 
지금까지 모두 2만 6천 여명이 이 곳에 안장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잘 조경된 숲길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신 · 구(新舊) 두 곳의 부속 묘지에는 
제정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콜라이 고골 ·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ii) 등 저명한 학자 및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 
2차대전 당시 외무 장관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인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등의 정치인들이 묻혀 있다.
또 대조국 전쟁 (1-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장병들이 다수 잠들어 있다. 
우리로 치면 국립묘지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노보데비치의 성당과 크렘린 궁전의 성당들은 16, 17세기에 
지배자였던 왕족을 위한 묘지로 이용되었다. 

 

벽에는 화장을 한 유골이 안치되었다.
벽면 앞에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아내였던 여성 활동가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 1932~1999)의 묘와 묘비이다.

 

유골을 안치하고 묘비를 세운 벽

 

유골을 안치하고 묘비를 세운 벽

 

묘소와 묘비

 

묘소와 묘비

 

묘소와 묘비

 

소설가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묘와 묘비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Vladimir Mayakovsky)의 묘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1893~1930)는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조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티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콥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셰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면서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에 철저한 반항을 보였다. 
노란빛 자켓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려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하는 
화려한 시위로 유명해진 마야콥스키는 실제 작품면에서도 <바지를 입은 구름>(1915)이나 
<등뼈로 만든 플롯>(1916) 등의 거친 리리시즘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야콥스키는 혁명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해방을 초래하고 
개인의 역량을 개화시키는 혁명의 승리를 노래했다. 
그는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시의 제재(題材)를 찾았다.

그의 시법 또한 혁명적이었다. 
토막토막 짤린 짧은 시구문이 그랬고 의미 및 음조를 강조할 수 있도록 
단어를 행으로 나누어 나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도 혁명적이었다. 
그는 집회나 공장에서 자작의 시를 자주 낭독했는데 그의 이러한 낭송하기 용이한 시는 
고정화된 시어의 파괴를 지향했고 억센 힘과 동적인 비유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다 뛰어난 서정적 재능과 기발한 발상 및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해서 
그의 작품이 단순한 프로퍼갠더로 전락되는 것을 막고 있다. 
특히 혁명 초기의 작품이 그러하여 유토피아적이고 예언적인 밝음이 있다.

혁명 전부터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창조적인 정열이 폭발한 것은 10월 혁명 이후로서 1918년 

소련 극문학의 제일성(第一聲)이 된 <미스테리 부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장대한 비유형식을 빌려 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미래의 사회를 엮은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상케 하는 활력이 있다. 


다음 희곡 <빈대>(1928)와 <목욕탕>(1929)은 몽환희곡(夢幻戱曲), 
혹은 기상천외의 풍자적 수법으로 시정인(市井人)의 근성과 관료주의를 폭로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서사시 <150000000>(1920)도 공상의 비약과 거친 유머에 차 있다. 
20년대에 들어와 미래파의 옛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잡지 <레프>(예술좌익전선)를 발간, 
전위적 문학운동의 중핵이 되는 한편, 레닌의 죽음을 노래한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1924)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혁명의 정열을 격렬하게 노래하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좌절감이 싹텄고 
시사적 문제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낭독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부과한 의무였으나 그 노력도 헛되어 
당시 점차로 재편성기에 접어든 문학계의 공적 권위자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30년 4월 권총 자살을 했는데 죽기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스탈린이 
그를 소비에트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세닌처럼 
냉대를 받지는 않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명성은 높다.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asil'evich Gogol)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오페라 가수 모스카우 프리드호프 소비노프(Moskau Friedhof Sobinow)의 묘

레오니드 소비노프 (Leonid Vitalievich Sobinow 1872~1934)는 러시아 오페라 테너 가수였다. 
1900년대에 그는 여러 유럽 국가에서 수많은 게스트 출연했고 
1904 년부터 1906 년까지 밀라노의 Teatro alla Scala 에 참여했다. 
1909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볼쇼이 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다. 
1917 ~ 1918 년 그리고 1921년부터 그는 볼쇼이 극장의 감독을 역임했다. 
1923 년 소비노프는 RSFSR 의 People 's Artist 명예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33년까지 오페라 무대에서 공연했다. 
러시아의 수많은 거리는 소비노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다. 
2007년 말 가수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그의 고향인 야로슬라블에 세워졌다.
소행성 4449는 1987년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러시아연방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의 묘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 1931~1996)은  소비에트 연방과 
러시아 연방의 정치인으로, 러시아 연방의 제1 · 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당선 이후 1991년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실권자로 떠올라 그 해 말 소련 해체를 주도하였고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최초로 무소속이자 마지막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러시아 경제를 양극화하고, 소련 시절 쌓은 경제 기반을 전부 무너뜨리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96년 체첸전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 사망했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ov)의 묘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ov 1894~1971)는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반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그는 실권자로서는 축출되었지만, 당에서는 추방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1966년까지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남아 있었고,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풍족한 연금을 받으면서 정부에서 제공받은 주택에서 살았으나, 

항상 국가보안위원회의 감시를 받았다.

은퇴 생활시 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했으나 

후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을 남겼고, 이것이 몰래 서방세계로 밀반출되어 출판되었다.

흐루쇼프는 1971년 9월 11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소련 정부는 흐루쇼프에 대한 국장과 소련에 공헌이 큰 위인들이 안장된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보다 한단계 격이 낮은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ov)의 묘 부분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의 묘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일제시대 항일 독립 운동가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이 잠들어 있다. 
김규면 장군은 만주ㆍ러시아 지역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직무대행으로 내정됐던 인물이다. 
장군의 무덤에는 한글로 김백추(Ким Бяк-Чу)라 적혀져 있고 
부인 김 나제즈다 여사와 합장되어 있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선생은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민족 종교 단체를 결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창설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첫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참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선생의 투쟁은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도 빛을 발했다. 
기독교 선교사에서 항일독립군의 지도자로, 그리고 반제국주의 혁명가로서 활약한 
선생의 자취는 러시아 · 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선생은 1880년 함북 경흥의 빈농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 학문을 익힌 선생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쳤다. 
당초 교육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교원의 꿈이 어려워지자 진로를 바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무관이 되려던 꿈도 이룰 수 없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한 일제가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하면서, 
친러시아적 성향이 짙던 함경도 출신의 무관학교 학생들을 경계하며 차별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무관이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개항장인 원산에는 캐나다 장로회와 미국 남감리교회 등에서

파견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하던 펜윅(Malcom C. Fenwick)과의 만남은 
선생의 행로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펜윅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선생은 선교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전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은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새로운 문물과 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지사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 1907년 

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훈춘(琿春)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 소속의 전도사로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오가며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동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대한기독교회는 1909년부터 간도구역을 새로운 정식 선교구역으로 지정하고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선생은 대한기독교회의 순회목사 자격으로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 한인사회의 민족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동휘(李東輝), 김성무(金成茂), 장기영(張基永) 등과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니,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이 그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계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 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아 
해외 한인사회를 망라한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사관학교의 설립은 그와 같은 원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예상과 달리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대한광복군 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동휘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했고, 

선생도 이에 동참해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후 노골적으로 종교적 탄압을 시도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며 

직접적으로 종교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에 따르면,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했고, 일제 경찰들도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기독교회가 일제 종교탄압에 굴복하면서 포교규칙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선생은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이끌고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종교 활동을 통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생 입장에서 
일제의 포교규칙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을 
만든 것인데, 당시의 심경을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독립교회를 선언하는데 찬성하는 300여 교회이고 인원으론 불과 3만여 명이었다. 
노약을 제하고 좀 의식 있는 사람 2, 3백 데리고 독립교회 감독으로 행세하면서 
전조선 예수교회 독립운동을 하려고 힘써 보았다. 
얼마 안 되어 총독부 포교규칙이 발표되었다. 
이 규칙은 교회일꾼 목사로부터 매서인까지 다 총독부 승인받은 자로서만 일하게 하였다. 
그때 영어선교사들은 총독부 규칙을 복종하고, 총독부에 행사하였다. 
영어선교사를 반대하고 교회독립운동 할 좋은 기회였다.”

선생이 대한성리교회를 조직한 것은 일제의 우회적인 탄압에 타협한 

외국 선교사 교단의 한계를 깨닫고 ‘교회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데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훈춘현 초모정자(草帽頂子)에 교단 본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결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8년 3월 연해주 한인사회는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와 

항일의병의 상징인 홍범도(洪範圖), 이동휘 등 중국 ·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은 훈춘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 유동열(柳東說), 이인섭(李仁燮) 등은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때 선생은 한인사회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독교 목회자로서 창당 가입을 유보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동휘와의 오랜 동지적 관계, 그리고 한인사회당을 통한 항일투쟁 방략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이듬해 한인사회당에 참가하게 된다.

1918년부터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하자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일본군에 맞서 싸울 항일무장단체 조직에 전력을 기울였다. 
조선인 정치망명자회의 이후 선생은 훈춘 초모정자에서

대한성리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3월 12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창설되었음을 선언했다. 
대한신민단의 공식적인 창설일은 1919년 3월 12일이지만, 
선생은 그 이전부터 대한신민단 창설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는 1918년부터 한인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어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白軍)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백 명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기에는 그에 앞서 
인적 · 물적 자원 기반을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 상당한 준비 기간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대한신민단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창설의 준비 과정이 있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곧 대한신민단 창설을 공포한 것이었다.

선생은 대한신민단 강령을 통해 “조국(祖國)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며, 
“민족(民族)의 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하고 국부적(局部的) 당파(黨派)와 
불공평적(不公平的) 야심(野心)을 박멸”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민단문답(新民團問答)’을 통해 단체의 기원과 이름을 
‘신민회(新民會)’에서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대한신민단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대첩 등에 참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선생은 
대한신민단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한인사회당과 대한신민단,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이 참석한 이 당대회에서는 
3개 단체의 통일 연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선생은 대한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에 동의하고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의 결정에 따라 선생은 만주에 위치한 

대한신민단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연해주 내 독립군 부대를 지원하는 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1919년 5월 김경천(金擎天)이 연해주 수청(水淸, 현재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지역에서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창해소년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명예단장에 취임했다. 
창해청년단은 수청 지역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 때 명예단장으로서 부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고 

볼셰비키 당국과 교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0년 7월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곧이어 연해주로 돌아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사회당은 1920년 설립된 극동공화국의 초대수상인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의 후원을 받으며 

극동공화국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고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부대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한인사회당 군사부 위원장이었던 선생도 한인 무장부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1921년 6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의해 체포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마자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사용할 

의류와 약품 등의 물품을 준비하고, 아무르주 당국과 독립군 부대 수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블라고베셴스크에 머물던 차였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체포를 면했지만,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블라고베셴스크의 신문에 모함 기사를 게재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오하묵(吳夏默) 등의 이르쿠츠크의 

한인사회주의자들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인사들이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교섭해 만든 단체였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사할린부대, 대한의용군)와 
독립군 통합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에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지를 받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던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었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의 보호를 받아 위기를 면했으나, 

선생은 곧이어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듣기에 이르렀다.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장기영, 이용(李鏞), 한운용(韓雲用) 등과 함께 
이만(현재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만은 극동공화국과 백군 정부의 분계선 지대로 자유시에 있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힘이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홍일(金弘壹) 등이 군비단(軍備團) 군사부를 개편해 만든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선생이 이만으로 건너간 것은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는 
무장부대들을 새롭게 재편하여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1921년 9월 고려혁명의용군 간부들과 자유시에서 이동해 온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은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를 재편했다. 
이 때 선생은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당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사령관에 선정된 이용은 고려의용군사의회 산하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했다. 
대한의용군은 1921년 12월 초 이만전투를 시작으로 연해주 해방전쟁에 투입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6연대와 연합해 인정거장 전투, 

볼로차예프카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1922년 연해주에서 철수를 결심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 해 11월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빨치산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남 · 북만주나 중국 관내로 떠나기 시작했다. 
선생도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영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선생이 상하이로 향한 것은 러시아 내전 종결 이후 변화된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 관찰원 자격으로 참석한 것으로 확인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創造派)가 구성한 조각에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으나, 선생은 주로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이후 선생은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선생이 중국 혁명운동을 지원한 것은 한국의 해방은 중국 혁명운동과 

분리해서 볼 수 없고,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연대하고 단결해야만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4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에서 윤자영(尹滋瑛)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했다. 
상해청년동맹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데 
뜻을 두었던 개조파(改組派)에 참여한 이들이 주로 참여한 단체로 
국제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선생은 이동휘 등과 연락하며 중국 군벌 타도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던 
북벌전쟁(北伐戰爭)을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로 온 한인들과 
노동자들을 광동(廣東)으로 보내는 일에 힘썼다.

1924년 5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 대리(代理)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의 주요 업무는 통신연락이지만, 
이외에도 재정자금의 모집 등도 담당했다. 
그 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소련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통총장 대리직을 맡고 있던 선생이 소련 당국과의 교섭을 맡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 정부로부터의 자금 지원 요청 교섭은 실패했다. 
그 해 12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1925년 2월 상하이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중국인 여공을 학대한 것을 발단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고조되었다. 
5월 30일 상하이에서 반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향해 
영국 경찰이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하자 중국 각지에서 파업과 영업중단,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는 중국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시위로 확산되어 

중국 내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중국 학생계와 혁명가들과 연대활동을 펼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상회청년동맹회를 통해 중국 학생계와 긴밀히 연락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노력했다.

1925년 중국 학생계와의 연대 방안을 모의하기 위해 열린 
상하이청년동맹회 연석회의 도중 선생은 피습을 당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청년이 일본 정탐을 찾는다는 구실로 연석회의장에 난입해 
선생을 구타하려는 순간 이용이 이를 막았다. 
이 때 연석회의 참석자들과 난입한 이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난입자들이 발사한 총탄을 맞고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후일 이 사건을 두고 선생은 보이틴스키(Voytinskiy)와 화요회(火曜會) 인사들이 
협동으로 벌인 ‘파시스트’적인 행동이라고 회고했다. 
이 짧은 일화는 국외의 민족운동 간의 파벌 싸움을 보여준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그 해 11월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한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로 보내고, 이용과 함께 한인들로 구성된 
북벌지원 군대를 만들어 광동으로 파견하며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결렬시키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선생은 중국을 떠나 연해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선생은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는 한편, 
연해주 지역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러중앙집행위원회(ВЦИК)는 1933년 12월 원동 해방 10주년을 기념해 
연해주 해방전쟁에서의 선생의 공적을 포상했다. 
이 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 프셰니친이 선생을 체포하려 했다. 
프셰니친은 지난 1921년 고려혁명군정의회 인사들과 함께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선생은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연해주를 벗어나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

모스크바로 이주한 1934년 이후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선생이 머물던 소련 내에서 변화된 정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Stalin)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5년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지도자들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때 선생의 셋째 아들 김인덕도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에 거주하던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흐루쇼프(Khrushchyov)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스탈린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된 
많은 이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고, 이 때 연해주 해방전쟁에 참여했던 한인 지도자들도 복권되었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선생은 1967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러시아혁명 50주년을 기념해 적기훈장을 수여받고, 
1969년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선생의 유해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그 공훈을 인정받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은 체홉, 흐루쇼프, 가가린 등 
소련의 정치 · 문학 ·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 등과 같이 광범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일관된 노선에 의해 추구되었다. 
그렇다고 선생은 독립군 대장과 같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최이붕(崔以鵬)은 선생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위에만 있던’ 인물로 평가한 바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지도적 위치에 머물기만 한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부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부대를 조직했으며, 
독립군 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인적 및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 나간 지도자였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일본제국주의와 맞설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통합운동이 좌절된 후에도 다시 군대를 정비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 나갔고, 
러시아 내전 종결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부대 조직에 앞장섰다. 
선생은 무장투쟁의 부대를 만들며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을 기울인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의 묘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장군은 일제강점기 

대한의용군사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만주지방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 곳에서 이동휘(李東輝)· 박진순(朴鎭淳)· 김립(金立) 등 

30여 명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다. 
그 뒤 이동휘계의 군사지도자 이용(李鏞)과 손을 잡고 시베리아의 한인군사조직을 
상해임시정부 산하에 규합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1921년 6월 세칭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직전 

5월 18일 오하묵(吳夏默)의 특무대에 붙잡혔다. 
이 때에 같이 붙잡힌 사람으로는 한운룡(韓雲龍)· 박원섭(朴元燮)· 우시욱(禹時旭)· 
주영섭(朱英涉)· 안태국(安泰國)· 임상춘(林常春) 등이다. 
당시 오하묵은 이른바 이르쿠츠크집단의 요인으로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부사령관이었다. 
김규면이 소지한 상자에는 3만여 원의 금은전(金銀錢)과 비밀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 뒤 처형을 면하여 이용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의 위원장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아니고, 다만 적군편에 들어 한국독립의 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쳤던 민족독립운동자이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보데비치 묘역은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모스크바 시내 관광 명소 중 하나였으나 백추 장군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지난 2002년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영상] 독립운동가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은 
러시아에서 황족 다음으로 높은 귀족인 공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Alexei Petrovich Kropotkin)은 
로마노프 왕조 이전에 러시아를 통치 했던 류리크 왕가 스몰렌스크의 대공이다. 
크로포트킨의 아버지는 3개의 지방에서 1200여 명의 농노를 거느렸다.
어머니는 코사크 장군의 딸이었다. 

크로포트킨은 1857년 14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니는 특권 군단 수습기사단(修習騎士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1862~67년 육군장교로 시베리아에 배속되어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 활동에 열중했다. 
자신의 탐사결과에 기초하여 산맥구조선(山脈構造線) 이론을 전개했고, 
이 이론은 동아시아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게 했다. 
또한 빙하시대에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빙하작용에 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연구 결과를 즉시 인정받은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을 거절한 후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시베리아 복무 중에 그는 이미 모든 정부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867년 크로포트킨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러시아 지리학회 지리 부문의 비서가 되었다. 
1871년 크로포트킨은 핀란드와 스웨덴의 빙하 퇴적물을 탐사했다. 

1872년에는 스위스의 쥐라 산맥에 있는 시계 제조업자들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또한 제네바에서 국제 노동자협회(IWA, International Workingmen 's Association ) 회원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국제 노동자협회의 사회주의 스타일 보다는 무정부주의적 신조를 채택했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온 후 친구인 드미트리 클레멘트의 소개로 
사회주의 - 포퓰리스트 혁명 그룹인 차이코프스키 서클에 가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 서클에서 일한 결과, 혁명적인 정치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의 귀족적 배경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지리학 연구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감옥에서 특별한 허가를 받았다.

1874년 경찰의 대량검거 때 다시 투옥되었으나 2년 후 1876년에 크로포트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보안 수준이 낮은 교도소로 옮겨졌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 후 그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가 짧은 체류 후, 
1877년 파리로 이주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곧 서유럽의 급진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1878년 스위스로 돌아와 쥐라 연맹의 혁명 신문을 편집하고 다양한 혁명적 팜플렛을 발간했다. 
크로포트킨은 몇 년 동안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혁명가들에게 암살당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폭동을 주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금되었다. 

1886년에 석방된 크로포트킨은 헨리 시모어(Henry Seymour)와 
샬롯 윌슨(Charlotte Wilson)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 갔고 세 사람 모두 
헨리 시모어의 신문 <The Anarchist (무정부주의자)>에서 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롯 윌슨과 크로포트킨은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인 
헨리 시모어와 뜻이 맞지 않아 헤어지고 아나키스트 신문 <Freedom Press>를 발간했다. 
이 신문은 오늘날까지 계속 발행된다.  

크로포트킨은 <Freedom Press>에 정규적으로 기고했고 샬롯 윌슨은 
1895년 편집자 직위를 사임할 때까지 신문의 행정과 재정을 도맡았다.
이즈음 1887년 4월 15일에 그의 외동딸 알렉산드라(Alexandra)가 태어났다.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크로포트킨은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를 포함하여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1916년 크로포트킨과 장 그레이브(Jean Grave)는 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이 독일과 중앙 강대국에 승리할 것을 옹호하는 문서 (Manifesto of the Sixteen)를 작성했다. 
이 선언문 때문에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류에 의해 한동안 고립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수만 명 군중들은 그의 도착을 환호하여 맞이했다. 
그는 혁명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맡아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무정부주의 원칙을 위반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거절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장기간의 망명 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피력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어느 반항자의 이야기 Paroles d'un révolté〉(1885) · 
〈러시아와 프랑스의 감옥에서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1887) · 
〈빵의 정복 The Conquest of Bread〉(1892) ·
〈들판·공장·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 ·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Memoirs of a Revolutionist〉(1899) · 
〈상호부조 Mutual Aid〉(1902) · 〈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1905) · 
〈1789~93년의 프랑스 대혁명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1909) 등이 있다. 

그가 종종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과학적 기반 위에 무정부주의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상호부조〉에서 그는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종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사교성이 동물 세계의 모든 수준에서 

지배적인 특징임을 증명하면서 인간 세계에서도 상호부조가 

예외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시부족, 농촌 마을, 중세의 코뮌에서부터 강압적인 관료제 국가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 학회 · 적십자사 등 상호지원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 

현대의 각종 협동체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협동결사체의 진화 과정을 추적했다. 
크로포트킨은 현대사의 추세는 사람들이 지배자 · 성직자 · 군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창조적인 기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 · 비정치적 · 협동적 사회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적 경제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임금의 원리를 필요의 원리로 대체했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노동에 참여했건 안 했건 관계없이 
필요한 물건을 공동의 창고에서 꺼내 쓰도록 하는 원칙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사람들이 공업과 농업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함께 하는 사회를 마음 속에 그렸다. 
각 협력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20~40대에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하루 4~5시간을 일하며 
분업 대신 여러 가지 일을 즐겁게 함으로써 중세의 도시생활에서처럼 
인격의 균형이 잡힌 유기적인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다 행복한 생활을 준비시키기 위해 청소년 교육을 강조한 그는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을 골고루 개발시키는 '통합교육'을 실시하여 
균형잡힌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학 · 과학의 기본원리와 인문학의 학습을 중요시하면서도 
책만 가지고 가르치기보다는 적극적인 야외 교육을 통한 실험 관찰 학습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현대의 교육 이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형무소 생활을 토대로 크로포트킨은 형벌 제도의 철저한 수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형무소는 범죄자를 교화시키기는커녕 잔혹한 벌을 가함으로써 
범죄 습성을 굳혀주는 '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한 미래의 무정부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은 법과 형무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와 공동체의 도덕적 압력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자질에다 혁명 조직가와 선전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폭력의 사용을 용인했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투사로 활약하던 초년에는 인민의 반항본능을 일깨우기 위해 
말과 글을 통한 선전활동을 보완할 목적으로 '행동을 통한 선전'인 폭동 행위를 열렬히 지지했다. 

크로포트킨은 영국과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프랑스 · 벨기에 · 스위스의 무정부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가 연합국을 지지하자 많은 동지들이 그를 떠났다. 
그의 결정은 독일의 전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반군사적인 전통을 위배한 처사였으며,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그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구축했던 운동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 끝에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왔다. 
1917년 6월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수 만명의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임시 혁명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그의 무정부주의 원칙을 위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즉시 거절했다.
 
1917년 국가 없는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코뮌과 소비에트 (병사·노동자 위원회)들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자 자유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감격은 비통한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닌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볼셰비키가 증명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만년을 윤리학사의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 2월 8일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 시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Lenin )의 승인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과 반 볼셰비키 슬로건이 있는 배너를 들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그야말로 무정부주의가 러시아의 수도를 누빈 마지막 처음이자 기회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자신이 일관성 있게 주장한 

높은 윤리기준 및 사상과 행동의 결합을 예증한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많은 혁명가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이기주의나 
이중성 또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를 
"단검과 폭탄에 불과하다"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도 찬탄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만이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살았다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정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크로포트킨이라고 말했다. 
1957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드보레츠소베토프 역은 그의 명예를 위해 
크로포트킨스카야(Kropotkinskaya)로 개명되었다.

그의 생애는 세계 5대 자서전 중 하나로 꼽히는 <한 혁명가의 회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노년기의 활동은 소비에트의 검열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왕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바쿠닌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격으로

취급되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분파인 아나코 - 공산주의는 크로포트킨이

창조하지 않았지만, 크로포트킨이 제일 많이 발전시킨 아나키즘 이론 중 하나이다. 


그의 사상의 목표는 아나키즘 이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공상적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는 <상호부조론>에서 다윈의 이론에 반대해 종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닌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에 반대해 물자와 인력의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크로포트킨의 중요한 저작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대혁명>(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 1909)
<빵의 정복>(La Conquêtedu pain, 1892)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혁명적 윤리학>(미완)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크로포트킨은 노동 가치이론을 포함한 자본주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동의하지 않고, 
수행된 일과 상품 가치 사이에 필요한 연관성이 없다고 믿었다. 
대신 임금 노동 제도에 대한 그의 공격은 노동에서 잉여 가치를 추출하는 것보다 
고용주가 직원들에게 가한 권력에 더 많이 근거했다. 
크로포트킨은 이 힘이 생산 자원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국가의 보호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의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그들이 빈곤과 인위적인 희소성을 창출하고 특권을 키운다고 믿었다. 
대신 그는 상호 원조, 상호 지원, 자발적 협력에 기반한 보다 분산된 경제 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조직에 대한 경향이 진화와 인간 사회 모두에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902년 크로포트킨은 저서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을 출판하여 
동물과 인간의 생존에 대한 대안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 당시 프란시스 갈톤(Francis Galton)과 같은 일부 "사회적 다윈주의자" 는 
대인 경쟁과 자연 위계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인간을 포함한 종의 성공을 이끈 다윈주의적 의미에서의 경쟁보다는 
협력에 대한 진화적 강조"라고 주장했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동물계에서 우리는 대다수의 종들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을 위한 투쟁을 위한 최고의 무기를 함께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 광범위한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이해했습니다. 
존재 수단이지만, 종에게 불리한 모든 자연 조건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개인의 투쟁이 가장 좁은 한계로 축소되고...... 
상호 원조의 실천이 가장 큰 발전을 이룬 동물 종...... 
변함없이 가장 많고 번영하며 더 발전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이 경우 얻어지는 상호 보호, 노령화 및 경험 축적 가능성, 높은 지적 발달, 
사교적 습관의 추가 성장, 종의 유지, 그것의 확장과 더 진보적 인 진화. 
반대로 연관되지 않는 종은 썩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의 경쟁적 충동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갈등을 찾는 것이 국가나 교회와 같은 부당하고 권위주의적인 제도를 
파괴하려는 시도에서만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협력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추진력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크로포트킨은 봉건 이전 및 현대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인 원주민의 
협력 경향에 대한 관찰을 통해 모든 인간 사회가 산업화된 유럽의 경쟁에 
기반을 두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회가 개인 간의 협력을 보여 주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한 지도자 , 중앙 정부 및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경우, 
대부분의 산업화 이전 및 권위주의 이전 사회는 사망시 개인의 소유물을 공동체 내에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축적을 적극적으로 방어한다고 결론지었다. 
또는 선물 경제의 형태로 선물을 팔거나 물물 교환하거나 

부를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892년 크로포트킨은 저서 <빵의 정복(The Conquest of Bread)>에서 자발적인 
협력 시스템에서 이루어진 상호 교류를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는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있을 만큼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것을 막는 특혜 분배, 가격 책정 
또는 화폐 교환과 같은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결국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화폐 또는 교환 토큰의 폐지를 지지했다. 

크로포트킨은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의 집단주의 경제 모델이 
단지 다른 이름의 임금 체계일 뿐이고 그러한 체계는 자본주의 임금 체계와 
동일한 유형의 중앙 집중화와 불평등을 낳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 노동의 산물에 대한 개인의 기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려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임금을 결정한 사람에 대한 권위를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로포트킨은 현지 생산에 중점을 두어 국가가 

자급 자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자체 상품을 생산하고 자체 식품을 재배하여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지역 식량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관개와 온실을 옹호했다. 

 

57세 시절에 표트르 크로포트킨 사진, 1900 년경

 

인간애로 가득 찼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
보통 아나키스트, 혹은 무정부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면

과격하고 폭력적인 집단을 떠올릴 때가 많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고정 관념이다. 
아나키스트는 말 그대로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상상을 해보자. 우리는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 꿔본 적이 있나? 
심지어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정부 없는 세상은 도무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영역이다. 
고대 노예제 이후 인류는 항상 국가라는 통치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나키스트들은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이 누구보다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믿고 신뢰하는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이 너무나 신뢰할만 하기에 정부 같은 통치 기구가 없어도 
능히 서로 돕고 협동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에 가깝다. 
대부분 아나키스트들이 성선설을 믿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죽했으면 아나키스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인류에 아첨하는 자들”이라는 별명까지 붙였겠는가. 
인간적인 면모가 너무도 훌륭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에 대해 가장 뜨거운 신뢰를 보여준 따뜻한 아나키스트가 있다. 
혁명가 레닌과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태생의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그 주인공이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러시아의 대공이었다. 
집안이 얼마나 부자였는지 집안이 거느린 농노가 무려 1200명에 이르렀다.
크로포트킨은 전통적으로 군대에 입대했던 가문의 전통을 버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수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다. 
이 때문에 크로포트킨은 가문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기꺼이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유럽 각국에서 쫓겨 다니던 크로포트킨은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때 그를 맞이하는 환영 인파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혁명 임시정부는 그의 높은 지명도를 감안해 그에게 교육부장관 자리를 제시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레닌의 정부가 아니었고 멘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나키스트가 정부에 입각해서 교육부장관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크로포트킨의 생애가 더욱 돋보이는 대목은 
그가 실로 언행일치에 충실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사상은 훌륭하지만 돈과 권력 앞에 이율배반의 행동을 보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이켜보면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말로는 평등한 교육을 외치면서 자기 자식은 사교육을 시키거나 특목고에 진학시키는 
이율배반적 행동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 
말로는 협동과 연대를 외치면서 이익이 눈앞에 닥치면 그것부터 챙기는 지도자는 존경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사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크로포트킨은 “인류는 천성적으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동료를 돕고 희생할 줄 아는 존재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평생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았다. 
반면 그는 한 번도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의 명저 <한 혁명가의 회상> 서문에서 덴마크의 평론가 
게오르크 브란데스(georg Brandes)는 크로포트킨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이 보여준 다양한 사상 중 경제학적으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상호부조론’이다. 
크로포트킨은 경쟁을 앞세워 연대와 협동의 본성을 짓밟았던 

자본주의를 상호부조론을 통해 통렬히 비판했다.
상호부조론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인간은, 아니 더 나아가서 생물은 

이기적으로 생존경쟁을 하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상호부조, 즉 서로 돕고 사는 유전자를 운명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물론 동물들끼리도 가끔 경쟁을 한다. 하지만 경쟁은 생명체의 본질이 아니다. 
대부분 동물들은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을 때보다 서로 돕고 살 때가 훨씬 많다. 
크로포트킨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물 사회를 관찰해 상호부조론에 대한 확신을 더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인간 외에 동물 중에 축적이라는 것을 하는 존재가 있을까? 
축적은 저축과 다른 개념이다. 
저축은 미래를 대비해서 필요한 만큼 모아둔다. 
하지만 축적은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 무한대로 몸집을 불리는 개념이다. 
그래서 개미가 식량을 모아두는 것은 축적이 아니라 저축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평생을 먹고 살 재산을 모아두고도 끊임없이 몸집을 불린다. 
축적을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한 셈이다.

또 한 가지, 인간 외에 주변 동료를 죽이면서까지 자기의 삶을 도모하는 동물이 있을까? 
하다못해 꿀벌이나 개미도 서로를 돕고 산다. 
코끼리들은 무리 중 일원이 늪에 빠지면 혼신의 힘을 다해 동료를 구한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원숭이들의 경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동료 원숭이가 고통을 받으면 자기의 배고픔을 참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은 늘 상호부조 속에서 살아 왔고, 상호부조는 
그런 종족을 보존하고 번성시키는 동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어떤 동물도 경쟁을 통해 약자를 죽임으로써 번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고, 협동을 최고조로 높인 동물만이 
수적으로 우세하며 번성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협동하는 동물의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사실 이것도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어떤 동물이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생각할 것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만 생각하면 하나만 생각하면 충분하지만, 동료와 사회를 생각하면 
배려나 소통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협력적 존재의 지적 능력이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크로포트킨은 동물들의 상호부조 경향을 인류사회에 적응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문화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를 보면 모두 연합이나 공동체, 
함께 사는 세상이 최고조로 발달했을 때였다. 
중세 길드나 고대 그리스 도시 사회는 모두 도시 공동체 정신이 활짝 꽃피웠던 시기였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결탁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종교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됐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언제 공동체 안에서 경쟁에 뒤쳐진 자는 죽여 버리고, 
서로를 경쟁으로 짓밟으며 살라고 가르쳤던가? 
크로포트킨은 “국가가 전체주의로 변모하고 독재화될수록 종교는 그 반작용으로 
끊임없이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로 발전해 국가의 독재를 견제했다”고 해석했다.

또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서로 돕고 사는 인류는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냈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행복감도 훨씬 높였다. 
인류는 돕고 배려할 때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발전했고 더 행복했다는 이야기다.

자본주의가 짓밟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인류의 공동체 정신이었다. 
300년 역사의 자본주의 아래 살면서 우리는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너무 쉽게 잊고 말았다.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는 일에 익숙해진 한국 사회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크로포트킨의 외침을 진심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피에르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을 만나면서 무정부주의자가 됐다. 
정부의 권위를 부정한 탓에 크로포트킨은 스위스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 감옥에 갇히는 등 전형적인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벗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크로포트킨은 성자라 할 만큼 훌륭하다. 
그의 붉고 탐스런 수염과 사랑스러운 모습은 양치는 모습과 흡사하다”라고 묘사했다. 

그를 접한 모든 이들이 크로포트킨을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표현할 정도로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21년 79세 때 심장병으로 사망했는데 크로포트킨의 지지자들은 
‘볼셰비키 비판’을 기치로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장례식을 치렀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의 사회적 운동이다. 
아나키즘이 근대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아나키즘이 폭동, 암살, 테러 등의 
폭력적 운동들로 연상되지만, 아나키즘이란 
그저 지배(권위)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회적 운동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나키란 지배자가 없는 혹은 권위를 거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나키즘이 거부하는 권위는 정부만을 특정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이다. 
만약 누군가 거대한 폭압적 권력에 맞서고 있을때, 
그는 곧 아나키스트이며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동료가 된다.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기 
권력을 추종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폭압적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아나키스트들의 일부가 보여준 암살 및 테러가 
과도하게 일반화되어, 아나키즘에 나쁜 이미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국가의 폭력이 존재하던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자본에 대항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했으며,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발적인 시민단체 NGO를 조직해 온 모든 이들은 아나키즘에 빚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처럼 근대에 새롭게 발견된 이념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와 함께 우리의 본성에 녹아 있는 행동 양식에 가깝다. 
아나키즘은 아프리카의 우리 조상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그들을 생존하게 도와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 쓰여 있는 유전적 지침서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사람들은 종종 아나키 혹은 무정부상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사상의 일종으로 역사에 등장했을 때에도,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는 무질서 혹은 혼돈이라는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정치적 리더십이 이끄는 민족국가 체제에 안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부재는 곧 혼돈을 의미한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정치적 지도자의 존재 또한,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했다. 
권력을 지닌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곧 무정부 상태 혹은 
무질서 상태를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해 온 
지난 인류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절대 권력을 통한 질서의 유지라는 환상은, 지난 세기 인류가 
거대화된 집단을 구성하면서 스스로에게 세뇌시킨 환상일 뿐이다.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의 존재를 머릿 속에서 지우고 상상해보면, 
절대권력의 부재는 결코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소규모 공동체에 나타난 절대권력이 무질서를 불러온다.

아나키즘이 아니라, 질서를 부르짖는 권력이야말로 무질서의 근원이라는 통찰은 
19세기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에게서 왔다. 
그의 책 <질서에 관하여>는 노동자들의 연대와 쟁의를 
무질서로 왜곡하던 당시의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오늘날 그 자들이 뜻하는 질서란, 열에 아홉 명이 노동하여 한줌의 게으른 자들에게 
사치와 쾌락을 제공하고, 극히 역겨운 열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질서란, 열에 아홉이 번듯한 생활과 지적 재능의 정당한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나 예술적 창조에 의해 인간에게 제공되는 쾌락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 돼지 상태로 열에 아홉 명이 전락하는 것이다. 질서란 이런 것이다!
질서란, 가난과 기근이 사회의 일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질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일랜드 농민이며, 디프테리아와 열병 
그리고 식량 부족에 뒤이은 기근으로 죽어가는 러시아 제3제정의 농민이다” 
크로포트킨, <질서에 관하여>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노동자와 시민의 정당한 요구들은 무질서로 포장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권력자들이 말하는 질서의 추악한 모습들을 모두 보여준 뒤, 
그들이 말하는 무질서의 역사적 사례들을 하나씩 나열한다. 
권력자들에게 무질서란 “치욕스러운 질서를 거부하고자 속박을 끊고, 
족쇄를 부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민들의 봉기”다. 
그것은 “임박한 혁명 전야에 닥친 사상의 반역”이고, “고대 노예제의 폐지”이며, 
“왕을 전율케 하고, 일할 권리를 선포했던 1848년의 혁명”이다. 
권력자들이 말하는 무질서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들이다.

1842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드물게,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였다. 

신채호, 박열, 이회영, 김원봉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아나키스트 대부분이 
인문학에 기반을 둔 낭만적인 실천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존재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을 통해 바쿠닌이 아나키즘을 사회혁명 차원에서 실천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여러 이념과 경쟁하던 아나키즘에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주었고,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및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에 이론적 생명력을 제공해 준 인물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고,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아나키즘을 알린 책은 <상호부조론>이다.  
이 책에서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였던 크로포트킨은 툰드라와 아시아의 자연을 통해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사상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아주 작은 동식물부터  
인간사회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와 문명에서 나타나는 상호부조의 원리를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적자생존으로 설명하려던 시도를 비판했고,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서구사회는 물론,  
식민지였던 동아시아까지 잠식했던 사회진화론을 

과학적인 근거들과 역사적인 논증으로 통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비슷한 시기에 쓴 책인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과학의 중요성과, 근대과학에 대한 앎이 어떻게 아나키즘을  
사회에 확산시키는데 더욱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크로포트킨 식의 논증이다.  
크로포트킨은 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나키’라는 관념은 어떤 과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에서 나온 것도 또한 아니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1장 
즉, 아나키즘은 과학적 연구의 산물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로부터 기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반의 사회과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당시의 자연과학의 성과와 비교해 정확히 지적한다. 

”사회과학은 지금도 아직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확성을 가지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풍토나 기후의 연구에 있어서 조차 1개월 또는 1주일 뒤에 어떤 날씨가 될지 미리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학과 같은 미숙한 학문을 가지고 바람이나 비 따위 보다 무한히 복잡한 사물을 다루어  
장래에 일어날 사태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과학자 역시 보통 인간에 불과하며, 그들 대부분이 상류계급에 속해 있고,  
그 계급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즉, 아나키즘은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한에서만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을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여러 지적 운동들과의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난 후,  
8장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라는 장에 이르러,  
그는 아나키즘이 근대과학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그건 바로 “아나키즘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시켜  
전 자연을 포괄하는 현상의 역학적 해명에 바탕을 둔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인간 사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이념들과는 다르다.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은 자연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그 설명에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자연과학은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른가.  
크로포트킨은 이를 헤겔의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형이상학자는 인간의 지적 생활과 감정생활이  
<정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연과학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는 이와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명? 지식? 감정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기네의 연구를 참을성 있게 추진하여 이것들이 모두  
물리적? 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들의 자연 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5장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형이상학자의 말들은 아나키스트에겐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듣기 좋은 말>에 승복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반드시 무지를-즉 불완전한 연구를-감추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욱 나쁘지만 미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관념 및 제도의 연구를 계속”하고,  
인간의 사회발전에 대한 판단이 형이상학자들의 단순한 공식으로 판단하기엔  
“훨씬 무한히 복잡하면서도 실천적 목적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것임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관점을 확장해서, 크로포트킨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위해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의 황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변증법적 방법은 당대의 어느 자연과학자도 승인하지 않는 비과학적 방법임을 말하고 나서,  
19세기의 역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의 그 어느 발견도  
변증법에 의해 발견된 바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형이상학자들이 혐오하는 귀납적 방법이야말로 19세기 자연과학의 승리였음을 선언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념들 또한, 귀납적 방법론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부르주아들의 형이상학적 이념으로부터 민중의 삶을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적자생존을 마치 자연과학의 결과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회진화론자들의 비과학성을 지적한다.  
부르주아들의 상태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기대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 다윈의 이론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시험되지 않은 비과학적 형이상학일 뿐이다.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과 근대과학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이었고,  
그건 바로 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폭력으로부터  
민중을 지켜내는 유일하고 확실한 무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적 이념과는 달리,  
유일하게 과학적 방법론을 유연하게 사용해서 실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사상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에게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들의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측면과 다를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학이 발견한 이론과 결과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론의 힘으로 아나키즘을 지키고 수호한다.  
그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과학적 아나키즘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결론이다.

 

러시아 인민배우 타티아나 사모일로바(Tatiana Evgenievna Samoilova)의 묘

타티아나 사모일로바(Tatiana Evgenievna Samoilova 1934~2014)는 구 소련 및 러시아 영화 배우다. 
1957년 전쟁 영화 <학은 날아간다 (The Cranes Are Flying)>에서 베로니카 역으로 주연을 맡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소련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유일한 영화가 되었다.
그 후 수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를 했다.
1967년에는 영화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에서 주연 안나 카레니나 역을 맡아 열연했다.

1958년 칸 영화제에서 사모일로바는 "가장 겸손하고 매력적인 여배우"로 특별한 언급을 받았다. 
그녀는 1958년  Jussi Awards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을 수상했고, 
1958년에는 독일 영화 비평가상 최우수 여배우 상을 수상했다. 
1959년에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Awards)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70년대에 여러 역할을 수행한 후 사모일로바는 한동안 은둔해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사모일로바는 러시아 에서 가장 높은 영예를 안은 러시아 인민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2007년, 그녀는 제 29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사모일로바는 2000년대에 컴백하여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의 마지막 역할은 이고르 볼로신(Igor Voloshin)의 2008년 영화 니르바나(Nirvana)에서였다. 

사모일로바는 4 번 결혼했는데 모든 결혼이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은 2014년 5월 4일 
사모일로바에 관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공교롭게도 80세 생일 전날 사모일로바는 관상동맥심장병과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다음 날 23:30분에 사망하여 여기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사모일로바는 아들과 그녀의 이름을 딴 손녀가 살아 남아 있다.

 

러시아의 국민 희극배로 불린 유리 니쿨린 (Yuri Vladimirovich Nikulin)의 묘

유리 니쿨린 (Yuri Vladimirovich Nikulin 1921~1997)은 
많은 대중 영화에 출연한 소련과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이자 광대였다.
그의 도움으로 고아와 결손 가정 아이들을 위한 예술서커스 중점학교인 
‘15번 학교’가 기숙학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상] Yuri Nikulin

 

발레리 레가소프(Valery Legasov) 의 묘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Valery Alekseyevich Legasov 1936~1988)는 
소련의 무기 화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이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물리학 및 기술 연구소의 교수였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참사 당시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Kurchatov) 원자력 연구소의 첫 번째 부소장이었다. 
그는 재난의 원인을 조사하고 그 결과의 완화를 계획하기 위해 

형성된 정부위원회의 핵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반복되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많은 중요한 조치를 취하고 

재난 지역의 상황을 정부에 알렸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언론에 파괴된 공장의 안전 위험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인근 프립야트(Pripyat)시의 전체 인구를 즉시 대피시킬 것을 주장했다. 
1986년 8월 그는 국제 원자력기구 (IAEA)의 특별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는 비극의 범위와 결과를 논의하면서 깊이 있는 분석과 정직함을 보여주었다. 

1988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2주년이 되는 날이자 
재난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하루 전에 레가소프는 목을 매 자살했다. 
의사는 체르노빌 재난의 역경이 레가소프가 자살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자살하기 전에 레가소프는 재앙에 대해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히는 문서를 썼다. 
BBC TV 영화 체르노빌 핵 재해의 녹음 분석에 따르면 레가소프는 IAEA 보고서에서 
소련의 핵 비밀에 대한 언급을 정치적 압력이 검열했다고 주장한다. 
레가소프의 자살은 소련 원자력 산업에 충격파를 일으켰다. 
1996년 9월 20일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 (Boris Yeltsin)은 사후 레가소프에게 
재난 조사에서 보여준 "용기와 영웅주의" 에 대해 러시아 최고 명예 칭호인 
러시아 연방 영웅의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Mikhail Afanasyevich Bulgakov)의 묘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Afanasyevich Bulgakov 1891~1940)는 소비에트연방의 극작가이다.
그는 1891년 5월 15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에서 키예프 신학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키예프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근무했다.

혁명 후부터 모스크바에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소비에트 정권에 비판적인 작품을 썼는데 그로 인해 스탈린 치하에서 
그의 희곡 작품들은 여러 번 상연이 금지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그는 1930년 3월,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에게 자신이 소련을 떠날 기회를 주거나 
극장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쓴다. 
한 달 후에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극장 일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다. 
그 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들을 출간할 수는 없었다.

첫 작품 <투리빈가(家)의 날>(1926)은 그의 장편 <백위군(自衛軍)>을 토대로 하고 
혁명직후의 내전시대의 키예프를 무대로 백군장교(白軍將校)의 한 집안의 
이산(離散)과 붕괴를 묘사한 것인데, 애절한 서정과 노여움에 찬 풍자와 유머, 
그리고 숨막힐 듯한 극적 긴장 속에서 반혁명군의 파멸이라는 필연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 밖에 반혁명 진영의 정신적 퇴폐를 주제로 한 <도망>(1928), 사극 <몰리에르> 
<최후의 나날>(푸슈킨) 등의 작품이 있다.

1938년, 희곡 <바툼>이 스탈린이 중심인물이라는 이유로 

상연 금지되자 그는 1929년에 집필을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Мастер и Маргарит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불가코프는 1940년 2월에 
작품을 탈고하고 한 달 후인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출간되지 못하고 27년이 지난 1967년이 되어서야 출간될 수 있었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묘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 1904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의 묘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 1852)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의 묘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 손촙카 마을에서 농업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프로코피예프는 이미 5살의 나이에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6살 때는 체스를 배웠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체스는 프로코피예프 일생 동안 열중하였으며, 
그 당시 세계 챔피언들과 견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

1902년에 이르러 프로코피예프는 작곡에 있어서 
개인적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혁신적인 작품을 이미 작곡하였다.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지만, 소비에트 연방 정치인이자 국가 원수였던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의 사망과 겹쳐서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알지 못하였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묘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는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반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2차 세계대전 조종사 이바노비치 포코프(Vitaly Ivanovich Popkov)

비탈리 이바노비치 팝코프(Vitaly Ivanovich Popkov 1922~2010)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비행 에이스가 된 소련 전투기 조종사였다. 
전쟁 중 그는 약 40 번의 공중 승리를 거두었으며 소련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두 번 수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군에 남아 1989년에 은퇴하였다. 
그는 2010 년 88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류드밀라 자이키나(Lyudmila Georgievna Zykina)의 묘

류드밀라 자이키나(Lyudmila Georgievna Zykina 1929~2009)는 러시아의 국민 포크 가수였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47년 파야트니츠키(Pyatnitsky) 합창단에 합류했다. 
1960년부터 그녀는 솔로 공연을 했다.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초청으로 평양에서 6 차례 공연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이 자이키나를 너무 좋아해서 2008년에는 그녀의 노래가 그의 병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녀를 평양으로 초청했다고 보도되었다. 

자이키나의 많은 영예 중에는 레닌 상(Lenin Prize 1970)과 레닌 교단(Order of Lenin 1979), 
그리고 소련 인민예술가 (1973)와 사회주의 노동 영웅 (Hero of Socialist Labor 1987)의 칭호가 있다.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에 따르면 자이키나는 
"훌륭한 성악가 이상이었으며 그녀는 작곡가의 공동 저자이자 공동 창작자"였다.

그녀의 대표적인 노래로는 Techot Volga 와 Orenburgskii platok이 있다. 
소행성 4879 Zykina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Lyudmila Zykina는 2009년 7월 1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성 앤드류 훈장을 수여받는 자이키나(Zykina), 2004. 06. 15.

 

영화배우 뱌체슬레브 티코노프(Vyacheslav Tikhonov )

뱌체슬레브 티코노프(Vyacheslav Vasilyevich Tikhonov 1928~2009)는 

구 소련과 러시아에서 유명한 배우이다.
그는 모스크바 근처의 파블로프스키 포사드(Pavlovsky Posad)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지역 섬유 공장의 엔지니어였다. 
티코노프는 연기를 꿈꿨지만 그의 부모는 다른 직업을 구상했고 전쟁 중 군수품 공장에서 일했다. 
금속 노동자로 일한 후, 그는 1945년에 연기 경력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어려움없이 VGIK의 Actors 'Faculty에 입학했고 1950년 우등생으로 
VGIK를 졸업한 후 6 년 동안 영화배우 극장 스튜디오에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1948년에 그는 당시 인기 있는 여배우 논나 모르듀코바(Nonna Mordyukova)와 결혼했다. 
티코노프는 시골 가족 드라마로 유명해졌고, 

그 뒤를 이어 여러 전쟁 드라마에서 인가가 절정에 올랐다. 
티코노프는 또한 톨스토이(Leo Tolstoy)의 전쟁과 평화 (1968) 연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9 년 12 월 4 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티코노프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했다.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의 묘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 1932~1999)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아내로 여성 활동가였다. 
그녀는 러시아 문화 유산 보존, 새로운 재능 육성, 

어린이 혈액암 치료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1989년 르미얀체프(Rumyantsev) 교수와 다른 사람들의 지원과 협조로 
고르바체바는 자선단체인 "세계 아동을 위한 세계 혈액학협회"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고르바초프가 모금한 이 기부금과 추가 기부금은 
혈액 은행을 위한 장비를 구입하고 러시아 의사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르바체바는 1993년 10월 뇌졸중에 시달렸다. 
그러나 1997년 그녀는 정치에 여성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Raisa Maksimovna 's Club을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아이들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 7월, 그녀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과 딸과 함께 독일의 뮌스터 대학병원 (Münster University Hospital)에서 
혈액학자인 토마스 브에크니(Thomas Buechner) 교수의 주치로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9월 20일 67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러시아로 송환 되어 모스크바의 Novodevichy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6년 그녀의 가족은 어린 시절 암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모금하는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Gorbacheva) 재단을 설립했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ergeievich Stanislavski 1863~1938)는 
러시아의 연출가이며 배우이자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창립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한 연기 기법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연기 방식의 원조이자 모범이 되었다.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 · 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한다고 여겼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도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배우의 연기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극에서 등장하는 왕이나 영웅 역할같이 과장되고 격한 연기는 
관객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동이라 해도 각광을 받으며 수천 명의 대중 앞에 섰을 때는 경직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바로잡고, 걷고, 앉고, 눕는 법을 새롭게 익힐 필요성이 있다. 
무대 위에서 보고 듣는 법을 재교육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한 그의 구체적인 조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배우는 무대에서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행동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둘째, 배우는 자신이 맡은 등장 인물이 지닌 "내적 진실"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배우는 무대 위에 드러나는 인물의 삶을 현실처럼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표현해야 한다. 
넷째, 같은 장면에 나오는 다른 연기자와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너무 크고 과격한 행동이나 과장되고 괴상한 목소리는 사실적인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등장 인물의 특성을 드러낼 습관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바보같다고 여기는 인물을 
스스로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맡은 배역이 지닌 객관적인 겉 모양을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등장 인물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에게서 관객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옷과 행동만 흉내낸다면, 관객은 배우를 '가짜 인형'으로 느낄 것이다. 
배우는 등장 인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연극에서 겉으로는 잘난체를 하며 남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도, 그/그녀가 삶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일 수 있다. 
이때 그 인물의 목표는 '남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마음 속 진짜 목표를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 중에는 극 중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대사를 할 때만 열심히 연기하고, 
대사가 없을 때는 누워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에게 마음 속으로 
"집중의 원"(circle of attention)을 그리라고 권한다. 
말 그대로 이 원을 그릴 때는, 배우가 집중해야하는 공간을 포함하게 그려야한다. 
처음에는 작게 그려서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가 다른 연기자도 포함되도록, 점점 그 원을 넓게 그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여러 배우들이 서로를 신경쓰면서 호응하는 연기를, "앙상블 연기(ensemble)"라고 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통하는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입구에서
두 명의 입상 기념비를 만난다. 
주인공은 바로 사실주의적 연기 이론을 주창한 연출가 겸 배우이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립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Vladimir Nemirovich-Danchenko)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의 묘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로 낭만파의 작품을 썼으며, 
특히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무조주의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종종 12음렬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강한 대조에,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각각 열 다섯 곡씩이 유명하며, 
오페라와 여섯 개의 협주곡, 그리고 여러 영화 음악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이나 기분을 잘 나타냈으며 듣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교향곡이 대표적이며,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으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총 15개로 이루어진다.
제 1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이 곡을 통해 세상에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당시 예술과 혁명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서유럽의 현대음악 콘서트가 열리면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번 교향곡, 3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2,3번 교향곡에서는 대위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2번 교향곡에서는 극단적으로 27성부 모두 폴리포니를 이루기도 한다.

4번 교향곡은 표제가 없는 순수한 절대 음악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인원(총 134명)이 필요한 기악곡이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이 <프라우다>지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비판 사건으로 초연이 연기된다.

5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중 으뜸으로 뽑힐 만큼 높은 작품성을 지녔다. 
그는 그 무렵 <프라우다>에 쓰인 자신에 대한 비판, 
즉 지나친 형식주의자라는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인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극복-승리라는 내용으로 자주 비교되곤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을 통해 5번 교향곡의 주제가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작품은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악장에 일정 리듬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성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는데, 
1악장은 d단조, 2악장은 a단조, 3악장은 f#단조, 4악장은 d단조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소련 정부는 예술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한다. 
그리고 애국적인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던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이다 라고 발표했지만 
1악장을 제외하고는 묘사적 요소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이전,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난을 했던 <프라우다>에서도 

이 곡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곡은 훗날, 레닌그라드 시(市)에 헌정되었으며, 당시 스탈린상도 수상하게 된다. 
이 곡은 표제 음악이며,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로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짧고 매우 경쾌한 소품 형식이다. 
곡 자체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대작이 나올 것을 기대하였던 사람들에게 
소규모의 경쾌하고 재치있는 곡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은 만든 지 8년 후에 제 10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곡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 쓰여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확대된 타악기군을 포함하는 오케스트라"의 
표준에 가까운 4악장의 교향곡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13번 교향곡과 14번 교향곡에는 성악 부분이 들어가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마지막으로 쓴 교향곡은 1971년의 15번 교향곡이다. 
15번 교향곡은 순수 기악 교향곡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사진, 1950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성악곡에 걸쳐 많은 작품을 썼다. 
관현악곡은 모음곡, 서곡, 교향시가 대부분이다. 
특히 모음곡에서는 발레 음악을 모은 발레 모음곡이 대표적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민족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러시아와 기르기스 민요 서곡 op.115같은 민속적 선율로 곡을 쓰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이라는 교향시 op.131는 196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협주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협주곡이 대표적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미완성 작품까지 모두 3개이다. 
그 중 코(The Nose) Op.15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Lady Macbeth of Mtsensk District) Op.29이 대표적이다. 
코(The Nose)는 고골리의 동명소설을 러시아로 번역한 것으로, 
G. 이오닌, A. 플라이스, J.자미야틴과 쇼스타코비치가 함께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코를 찾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다는 내용의 원작을 
모방하여 코믹적인 요소를 없앤 중후하고 무거운 음악이 오페라 전체에 흐른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0년~1932년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어로 번역한 A. 플레이스와 쇼스타코비치의 공동 작품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의 대본이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규모가 큰 대작으로, 러시아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부정적인 일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극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 성격 묘사에 대한 음악이 어우러진다. 
이 작품은 1934년 초연 된 이후, <프라우다>지에서 
‘음악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들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은 후, 상연이 금지되었다. 
1979년에 원곡이 부활, 상연되었다.

 

두 번째 우주 비행사 게르만 티토프(Gherman Titov)의 묘

게르만 티토프(Gherman Stepanovich Titov 1935~2000년 9월 20일)는 
1961년 8 월 6 일에 유리 가가린이 앞선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도는 두 번째 인간이 된 소련 우주 비행사였다. 
발사 당시 26 세가 되지 않은 그는 여전히 우주를 비행하는 가장 어린 사람이다.

티토프의 비행은 마침내 인간이 우주에서 살고 일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지구를 여러 번 (총 17회) 공전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최초로 우주선을 조종하고 우주에서 하루 이상을 보낸 사람이다. 
그는 또한 처음으로 궤도에서 잠을 자고 우주에서 구토하여 
우주 병으로 우주에서 고통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티토프는 궤도에서 최초의 수동 사진을 만들어 현대 우주 사진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한 10분 동안 사용했던 전문가 급 Konvas-Avtomat 
영화 카메라를 사용하여 지구를 촬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티토프는 소련의 영웅 칭호, 레닌의 2개 상 수상, 그리고 수많은 메달을 받았다. 
그는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노동 영웅, 베트남과 몽골의 노동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달의 먼쪽에 있는 티토프 분화구와 하롱베이에 있는 섬은 
그의 이름을 딴 티탑섬 (Ti Tốp Island)이다.
티토프 우주 센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해에 그는 공산주의 정치가가 되었다. 
우주 비행을 위해 가가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소련 정부가 가가린이 비행한 날인 4월 12일을 우주 비행의 날로 
정하도록 제안한 사람 또한 티토프였다. 

 

오페라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 1873~1938)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Ivanovich Chaliapin) 은 러시아 오페라 가수였다. 
깊고 표현력이 풍부한 베이스 보이스를 소유한 그는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중요한 국제적 경력을 쌓았으며 종종 자신이 선택한 예술 형식으로 
자연주의 연기의 전통을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샬리아핀은 1926년 호주를 순회하며 호평을 받은 일련의 독주회를 열었다. 
샬리아핀의 개인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그는 새로 등장한 소련 러시아의 존경받는 예술가로 대우받았다 .
그러나 새로운 정권 하의 일상 생활의 가혹한 현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뒤따르는 불안정한 기류 그리고 공산당 당국에 의한 

그의 재산의 압류 등으로 1921년 이후 그는 러시아 밖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반 소련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샬리아핀은 처음에는 핀란드로 이주했고 나중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러시아 이주민 인구가 많은 코스모폴리탄 파리는 그의 기지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일생보다 큰 돌봄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헌신을 결코 희생하지 않았다.

샬리아핀의 마지막 무대 공연은 1937년 Monte Carlo Opera 에서 열렸다  
그는 이듬해 1938년 백혈병으로 65 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1984년 그의 유해는 정교한 의식을 통해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그리고 노보데비치 묘역(Novodevichy Cemetery)에 다시 묻혔다. 

 

Portrait of Feodor Chaliapin, 1911. by Konstantin Korovin, Russian Gallery, St Petersburg.

러시아 최초의 인싱주의 화가 콘스탄틴 코로빈 (Konstatin Korovin)이 그린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Ivanovich Chaliapin)의 초상화. 
이 초상화를 바탕으로 묘지 석상을 세운 것 같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에카테리나 세묘노브나 스바니제(Ekaterina Semyonovna Svanidze 1880 ~ 1907)는
스탈린의 첫 번째 아내이다.

조지아의 귀족 부부인 스비몬 스바니제(Svimon Svanidze)와 
시포라 스바니제(Sipora Svanidze)의 딸로 태어났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에게는 2명의 자매인 알렉산드라(Alexandra)와 마리아(Maria), 
그리고 남동생 알렉산드레(Aleksandre)가 있었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아버지인 스비몬 스바니제는 쿠타이시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남동생인 알렉산드레 스바니제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나중에 
트빌리시 오페라 극장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마리아 코로나(Maria Korona)와 결혼하게 된다.

빈곤층 가문 출신이었던 에카테리나 스바니제는 자신의 언니들과 함께 
재봉사로 근무했고 나중에 티플리스(현재의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여성복 매장인 마담 에르비외(Madame Hervieu)를 운영하게 된다. 
마담 에르비외는 군인, 귀족을 위한 제복, 드레스를 판매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6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결혼했고 
1907년 3월 31일에는 아들인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낳았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1907년 12월 5일에는 
지병인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가족들은 나중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주도한 대숙청 과정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스탈린의 첫 아내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부분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Mikhailovich Tretyako 1832~1898)의 묘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스물네 살 때인 
1856년부터 러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작품을 수집했고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처럼 
유명 작가 등의 초상을 그리도록 유명 화가들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그의 꿈은 러시아 미술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한 국민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했다. 
그 후 1892년 자신이 소장한 2천여 점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8년 국유화됐다.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3만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러시아 미술 박물관이다. 
트레티야코프의 꿈이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상] Novodevichy Cemetery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면
웹 사이트 http://novodevichye.com/ 를 찾아 보시라.
여기에서 알파벳 색인과 사진 및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여 
묻힌 인물들의 직업 등을 주제별 영역별로 정리해 놓은 데이터베이스를 찾을 수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Novodevichy Convent)

노보데비치 수도원(Новодевичий монастырь)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구촌의 문화 유산이자 러시아의 보물이다.
모스크바 남서쪽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Novodevichy Convent)은 
16, 17세기에 이른바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Moscow Baroque style)’으로 건축되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의 방어 체계에 통합된 수도원 중에 하나로 
러시아 정치사 · 문화사 · 종교사와 직접적이고 깊은 연관이 있다. 

차르 일가와 귀족 여성들이 이 수도원을 이용하였고, 사망한 후에는 이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러시아 건축의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는 수도원은 아름답게 장식된 내부 시설 안에 
중요한 회화와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Ensemble of the Novodevichy Convent)

원래는 크렘린의 출성이었느데 지금은 여자 수도원이다. 
16세기 말 모스크바 강을 넘어 쳐들어온 타타르군을 12개의 망루에서 발견하여 

포격을 가하기도 했고, 17세기 폴란드와 동맹 관계에 있던 리투아니아가 

진격해 오는 것을 포자르스키가 이곳에서 출격하여 섬멸하기도 했다. 
수도원에 있는 건물 모두가 16세기 러시아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이다. 
수도원은 녹음이 무성해서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Ensemble of the Novodevichy Convent)

'노보데비치' 란 뜻은 러시아어로 '새로운 혹은 거듭난 처녀의' 란 뜻으로
이 수도원이 여자 수도원 즉 수녀원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차르 일가와 귀족 여성들이 이 수도원을 이용하였고, 사망한 후에는 이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러시아 건축의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는 수도원은 아름답게 장식된 내부 시설 안에 
중요한 회화와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수도원 내부에는 스몰렌스크 대성당, 표트르 성당, 대종루 등이 있으며 
수도원을 둘러싼 성벽의 길이가 1㎞에 달한다. 
또한 러시아의 유명 인사들의 묘가 묻혀 있는 묘지도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크렘린에서 모스크바 강(Moskva R.) 서쪽 가까이 있으며, 
석조 성벽으로 둘러쌓인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1524년 모스크바 대공(大公) 바실리 3세 (Vasilii III)가  폴란드령이었던 
스몰렌스크(Smolensk)를 탈환하자 이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쟁 중에는 요새의 역할을 겸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영감을 얻어 '백조의 호수'를 작곡했다는 호숫가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수도원

모스크바 강변에 위치한 노보제비치 수도원은 고풍스런 건물과 황금색 지붕의 첨탑, 
인근 호수 및 공원 등과 어우러져 러시아에서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수도원은 아름다운 호반 주변에 건축되었는데 바로 그 호수에서 차이코프스키가
명상을 하다 영감을 얻어 그 유명한 '백조의 호수'를 작곡 했다 한다. 
하지만 호수에서 백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100여 마리의 청둥오리들이 한가로이 노닌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수도원은 12개의 탑이 있는 높은 축벽(築壁, masonry wall)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는 북쪽(시내)과 남쪽 두 군데에 있다. 

 

[영상] Novodevichy Convent

 

노보데비치 수도원

동서 방향인 스몰렌스키 성당(Smolensky Cat)은 두 출입문을 잇는 축의 가운데에 있다. 
수도원 영지는 반듯하지 않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다.
16세기에 설립된 수도원의 전체 모습이 압도적인 까닭은 17세기 건축양식인 
‘모스크바 바로크양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2개의 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축은 성모 승천 교회(Church of the Assumption)와 종탑(Bell Tower)이다. 
남북 축은 2개의 출입문이 있다. 
북쪽 출입문은 그리스도 변용 교회(Church of Transfiguration)와 연결되어 있고,
남쪽 출입문은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he Holy Virgin)와 연결되어 있다. 
성 암브로시 교회(Church of St. Amvrosi)와 식당은 남쪽 출입문에 가깝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종탑(1683~1690)은 총 5단이며 전체 높이가 72m이다.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의 종루는 붉은색 벽돌로 쌓았으며 흰색 돌로 장식되어 있다. 
수많은 주거 및 서비스 건물이 수도원 담장을 따라 늘어서 있다. 
동서 축에서 멀리 떨어진 종탑을 동쪽 경계와 가까운 곳에 배치한 비범함은 수도원을 둘러싼 길, 
특히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과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관은 도시 배치의 시각적 연결과 건축 공간 배치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스몰렌스크의 성모 마리아 성화(1524~1525, 16세기 그림과 17세기 성화벽)를 위해 
수도원의 두 축이 교차하는 곳에 세운 스몰렌스키 성당은 수도원의 주요 초점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야경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 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부근에는 여러 개의 수도원들이 연쇄적으로 늘어서 모스크바의 

방어 체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중요한 그 일부였다. 
바실리 3세는 이 수녀원에 3천 루블을 기부하고 영지도 내려 주었다. 
'잔혹한 황제' 차르 이반 4세 역시 수녀원을 후원해 주었다. 

표트르 대제의 첫 아내인 에우도키아 로푸히나 황후가 1680년대에 
모스크바 바로크양식으로 많은 부분을 증축했다. 
이 때 새로운 교회들과 종탑이 세워졌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은 러시아 왕실의 많은 여성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는데, 
에오도키아 로푸히나 황후도 표트르 대제와 이혼한 후 이 수녀원에 머물렀고, 
표트르 대제의 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는 이곳에 유폐되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북쪽 출입문 근처 전경

 

노보데비치 수도원 북쪽 출입문 
북쪽 출입문은 그리스도 변용교회(Church of Transfiguration)와 연결되어 있다.

 

북쪽 출입문 망루와 그리스도 변용교회(Church of Transfiguration)

 

수도원 남쪽 벽과 중간문

 

수도원 남쪽 벽과 중간문
남쪽 출입문은 성모 마리아 교회(Church of the Holy Virgin)와 연결되어 있다.

 

소피아 공주와 함께 표토르 1세 부인까지 유폐된 망루가 있는 건물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정쟁의 소용돌이와도 연관되어 있다. 
차르(Tsar) 일족이나 명문 귀족의 자녀가 은둔하거나 유폐당하기도 했는데 
1682년 표트르 1세 (Pyotr I)의 이복형인 이반 5세(Ivan V)와 
이복누나인 소피아 공주(Alekseevna Sophia)가 표트르 1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소피아 공주가 이 수도원에 유폐당했다.
또한 첫번째 부인이었던 에브도키아가 유폐된 장소이기도 하다. 

 

감금된 표토르 1세의 이복누나 소피아공주 초상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lya Repin)의 유명한 작품이다.

소피아는 동복동생 이반 5세와 이복동생 표트르 1세(대제)가 공동 차르가 된 1682년, 
아직 어린 그들을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7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그녀는 스스로 차르가 되려고 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표트르 1세를 지지하는 세력에게 껶여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되고 만다. 

소피아는 1704년 4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이 수녀원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그녀는 
그녀의 측근과 친위대원, 1700여 명이 처행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은 그녀의 처소 바로 밖에서 처형되었는데, 
그림을 보면 창 밖에 주검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소피아가 왜 이리 험암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일리야 레핀(lya Repin)의 작품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는 
권력 무상의 허망한 정서가 철철 넘쳐 흐르는 그림이다. 
그림 한 가운데에는 분노와 복수심과 한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황녀가 있다. 
바로 표트르 대제의 누나 소피아 황녀다.
위 그림은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지 1년 뒤의 모습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입구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 
강이 교차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중요한 방어 거점의 역할도 겸하였다. 
이 역사적인 도로는 더욱이 도시계획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크렘린 궁전과의 상징적 · 물리적 관계는 종탑의 위치를 비롯한 
노보데비치 수도원 내의 공간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스몰렌스키 (성모마리아 Our Lady of Smolensk) 대성당

수도원은 러시아정 교회의 가장 고귀한 성소인 스몰렌스크의 
‘호디기트리아 (길의 인도자 성모)’ 성모 마리아 성화를 위해 헌정되었다. 
수도원의 성당 스몰렌스키 대성당은 이 성화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스몰렌스키 대성당 Detail (부분)

스몰렌스크의 성모 마리아 성화 (1524~1525, 16세기 그림과 17세기 성화벽)를 위해 
수도원의 두 축이 교차하는 곳에 세운 스몰렌스키 성당은 수도원의 주요 초점이다.

수도원은 차르와 귀족 여성들이 드나드는 가장 존경받는 수녀원 중에 하나가 되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에 있는 그리스도 승천 수도원(Ascension Convent)인 
보즈네센스키 스타로데비치(Voznesensky Starodevichy, 노처녀)와 구별하기 위해 
노보데비치(Novodevichy, 새 아가씨 성모 호디기트리아)라고 불렀다. 

이 두 수도원은 또 다른 연관이 있다. 
노보데비치의 성당과 크렘린 궁전의 성당들은 

16, 17세기에 지배자였던 왕족을 위한 묘지로 이용되었다.

 

스몰렌스키 (성모마리아 Our Lady of Smolensk ) 대성당

이탈리아 건축가가 설계한 것으로 짐작되며, 석재 파편을 가미해서 

벽돌로 지은 스몰렌스키 성당은 수도원 전체를 통틀어 최초의 석조 건물이었다. 
3개의 애프스(apse)에서 끝나는 3개의 복도가 있는 건물은 
두 층의 갤러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5개의 둥근 지붕이 있다. 
흰색 회반죽을 칠한 외벽은 지붕선 위에서 

반원형으로 마무리되는 각각의 구역과 수직으로 연결된다.

 

스몰렌스키 (성모마리아 Our Lady of Smolensk ) 대성당

실내 윗부분에는 가벼운 원통형 구조물 위에 십자형 반원천장과 돔이 있고, 
벽과 기둥 및 둥근 천장은 안료에 달걀노른자와 물을 섞은 
템페라(tempera) 화법으로 그린 벽화로 덮여  있다.

고풍스런 고대 러시아 양식을 지향하여 제작된 그림의 주요 주제는 
‘성모를 찬양하는 찬송가 말씀(Akaphist’s text praising the Virgin)’이다.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의 전형인 금박을 입힌 장식의 
나무틀로 된 성화벽(iconostasis)에는 16, 17세기 성화들이 걸려 있다.

 

Dormition Cathedral 수도원 내부는 프레스코화로 가득하다. 

실내 윗부분에는 가벼운 원통형 구조물 위에 십자형 반원천장과 돔이 있고,  
벽과 기둥 및 둥근 천장은 안료에 달걀노른자와 물을 섞은  
템페라(tempera) 화법으로 그린 벽화로 덮여 있다.  

고풍스런 고대 러시아 양식을 지향하여 제작된 그림의 주요 주제는  
‘성모를 찬양하는 찬송가 말씀(Akaphist’s text praising the Virgin)’이다. 

 

금박에 이콘화로 장식된 주교만 출입하는 문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러시아 역사와 왕족의 삶에 관한 중요한 서적들뿐 아니라  
수많은 보물과 그림을 보관하고 있으며, 크렘린의 역사적 기념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1980년부터 노보데비치 수도원에는 주교가 거주하였고, 1994년에 수녀원이 다시 도입되었다. 

금박을 입힌 양각 장식(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의 전형)의 나무틀로 된  
성화벽(iconostasis)에는 16, 17세기 성화들이 걸려 있다.

 

성 모자와 성 루카 
수도원 내부에는 이른바 모스크바 파와 노브고로트파 화가들이 그린 이콘(성화상)이 많다.

 

이콘화 (icon) 

10월 혁명 이후인 1922년 수도원은 문을 닫고  
‘여성해방박물관(Museum of emancipation of woman)’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다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역사예술박물관으로 정비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크렘린의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State Historical Museum)의 분관이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성인이 된 보리스와 글롑 성 삼위일체 이콘화 

 

성자들의 프레스코

 

수많은 이콘성화로 장식되어 있는 스몰렌스크 성당의 이콘제단(Iconostasis)

 

이콘화 (icon) 

이콘화 (icon)는 종교적인 미술과 관계하여 회화 · 조각 · 공예품 등에 나타난 형상으로  
특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구도가 일정한 양식에 의해 유형화(類型化)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 불교에도 각각 특유한 유형의 도상이 있는데 특히 8세기 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라틴계 지방의 동로마 교회 미술의 강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콘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미술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으로 신성시되어 받아들여졌고  
이집트 미술처럼 이콘화의 전통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이들 이콘화의 표현 기법은 사실적인 묘사와 그리스 미술과 표현력이 뛰어난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이 스며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스몰렌스크 성당의 기둥은 성자들의 프레스코로 가득하다.

 

돔 천장의 예수 프레스코

 

성당 복도

 

수도원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이 대주교를 만나고 있다.

 

Smolensk icon of the Mother of God "Hodegetria", 16 century

 

박물관의 러시아 정교회 전통의상

 

러시아 정교회 주교 모자(主敎冠)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

 

러시아 정교회 성서

종탑.

1689~1690년에 지어진 종탑은 총 5단이며 전체 높이가 72m이다.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의 종루는 붉은색 벽돌로 쌓았으며 흰색 돌로 장식되어 있다. 
수많은 주거 및 서비스 건물이 수도원담장을 따라 늘어서 있다. 
동서 축에서 멀리 떨어진 종탑을 동쪽 경계와 가까운 곳에 배치한 비범함은 
수도원을 둘러싼 길, 특히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과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관은 도시 배치의 시각적 연결과 건축 공간 배치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에는 공사 중이라 완전히 가린 모습이었다.

 

수도원 병원

수녀원은 자선 단체의 역할도 했다. 
1724년부터 이곳에는 군사 병원과 고아원, 극빈자 수용소가 생겨났다. 
1812년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군인들이 수녀원을 폭파시켜 버리려고 했으나, 
이곳에 거주하던 수녀들에게 저지당했다.  

볼셰비키 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수녀원은 1922년 폐쇄되었으며 박물관으로 변했다.
그러나 1944년부터는 수녀들이 다시 노보데비치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북쪽 출입문과 연결된 그리스도 변용교회(Church of Transfiguration)

러시아혁명 후인 1922년 이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지정되고, 
1934년 이래 국립역사박물관의 분관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표트르 성당 (Prokhorov Chapel)

Novodevichy 수녀원의 작은 예배당과 종탑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 아름다운 종탑이 공사 중으로 저 모양으로 가려져 있었다.

 

표트르 성당 (Prokhorov Chapel)
깜찍하게 생긴 표트르 성당과 스몰렌스키 (성모마리아 Our Lady of Smolensk ) 대성당

 

성 암브로시 메디올란스키 교회(Church of St. Amvrosiy Mediolanskiy) 

16세기~17세기 말엽 옛 식당과 이리닌스키예의 방(Irininskiye chambers)들이 딸린  
성 암브로시 메디올란스키 교회(Church of St. Amvrosiy Mediolanskiy)는  
3채의 주요 벽돌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층 및 2층 건물들은 일반적인 건축 표현법으로 말하면 대단히 단순하게 지어졌다.  

교회의 파사드(facade)에는 17세기의 전형인 세부 장식이 되어 있다.  
성모 승천교회와 식당(1685~1687)은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으로 된 벽돌 건물이다.  
이 건물은 양파 모양의 돔으로 된 작고 둥근 지붕을 얹은 두 부분을 제외하고는  
주로 낮은 지붕에 1층으로 되어 있다.  
3개의 현관이 건물에서 돌출되어 있고, 

내부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7~20세기의 성화벽이 있다. 

 

성 암브로시 메디올란스키 교회 (Church of St. Amvrosiy Mediolanskiy)

옛 식당과 이리닌스키예의 방(Irininskiye chambers, 16세기~17세기 말엽)들이 딸린 
성 암브로시 메디올란스키 교회는 3채의 주요 벽돌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층 및 2층 건물들은 일반적인 건축 표현법으로 말하면 대단히 단순하게 지어졌다. 
교회의 파사드(facade)에는 17세기의 전형인 세부 장식이 되어 있다. 

 

성 암브로시 메디올란스키 교회를 배경으로 인증샷 

 

수녀원 기숙사

수녀원은 자선 단체의 역할도 했다. 
1724년부터 이곳에는 군사 병원과 고아원, 극빈자 수용소가 생겨났다. 
1812년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군인들이 수녀원을 폭파시켜 버리려고 했으나, 
이곳에 거주하던 수녀들에게 저지당했다.

 

수녀원 기숙사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세상사와 인연을 끊고 살아야 하는 귀족자제들의 은둔 장소이기도 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성모 승천교회(Church of the Assumption)

성모 승천 교회와 식당 (1685~1687)은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으로 된 벽돌 건물이다. 
이 건물은 양파 모양의 돔으로 된 작고 둥근 지붕을 얹은 두 부분을 제외하고는 
주로 낮은 지붕에 1층으로 되어 있다. 
3개의 현관이 건물에서 돌출되어 있고, 

내부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7~20세기의 성화벽이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성모 승천교회(Church of the Assumption)

Novodevichy 수도원의 성모 승천교회는 바로크 사원 식당으로 지어졌다. 
성직자와 왕, 고위 인사들이 이곳에서 자주 식사했다. 
단일 돔 교회와 식당은 높은 지하에 있는 단일 건물이다. 
건물은 흰색 치장 벽토로 무성하게 장식되어 있다. 
창문에는 기둥과 건축가가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성모 승천교회 인증샷

 

노보데비치 수도원 성모 승천교회 인증샷

 

 

17세기 수도원 모습

 

티모페예프 (Vasily Timofeyev) 장군의 화려한 무덤 (1783 ~ 1850)

노보데비치 수도원 내 묘역에는 아무나 묻힐 수 없다. 
이곳에 묻히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부 허가가 필요하다.

 

티모페예프 (Vasily Timofeyev) 장군의 화려한 무덤 (1783 ~ 1850) 측면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의 성당과 크렘린 궁전의 성당들은 16, 17세기에 
지배자였던 왕족을 위한 묘지로 이용되었다.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 수녀원 경내 무덤

 

노보데비치 호수

 

노보데비치 화려한 야경

 

노보데비치 화려한 야경

 

노보데비치 수도원 가정교회 (Church of the Assumption)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

모스크바 강 위로 파란 하늘과 크렘린과 바실리성당, 구세주성당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원이 있으니 여기가 바로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이다.

 

영문으로 된 공원 안내판

 

안내도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 조감도

삼각 모양을 하고 강 위로 툭 튀어나온 부메랑 부분이 통유리로 된 구름다리여서
다리 끝으로 가서 서면 마치 강 위에 서 있는 것 처럼 모스크바 시내의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 언덕

 

부자(父子) 인증샷.

 

Chambers of the Romanov Boyars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을 산책하는 우리 일행들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

 

 Glass Crust 

 

문화센터(Media center) 공연장

 

Glass Crust와  문화센터(Media center) 공연장

 

인솔자 김창준 교수와 동행한 연세대 후배들 함께 인증샷

 

인증샷

 

[영상] 자랴지예 공원(Zaryadye Park)

 

플로팅 브리지 (Floating Bridge)

 

Floating Bridge

 

Floating Bridge

 

플로팅 브리지(Floating Bridge)에서 인증샷

 

플로팅 브리지(Floating Bridge)에서 인증샷

 

플로팅 브리지(Floating Bridge)에서

 

플로팅 브리지(Floating Bridge)에서 

스탈린 양식 건물 세븐 시스터즈 (Seven Sisters) 중 예술인 아파트. 
1953년 완성. 높이 176미터 26층

 

플로팅 브리지(Floating Bridge)에서 인증샷

 

[영상] 플로팅 브리지 (Floating Bridge)

 

자랴지예 식당 (Zaryadye Gastronomic Сenter)

 

자랴지예 식당 (Zaryadye Gastronomic С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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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자랴지예 식당 (Zaryadye Gastronomic С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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