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중으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강 사장은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쇄물을 도맡아 온 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문과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을
70 년대 초반부터 신변의 위험과 사업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인쇄해 준 유일한 분이다.

전북 남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님 슬하에
모태 신앙을 이어 받아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학교를 못 보내는 대신으로
글이라도 계속 접할 수 있는 인쇄소에 취직하도록 권면했다.

고향 남원에서 1 년 여 인쇄소에 다니던 그는 4 . 19 혁명이 일어 나자
어린 마음에 별천지 세상으로 바뀌겠다 싶었던지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서울을 향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낙엽이 짙게 물든 가을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 여행삼아 갔다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해서 눌러 앉았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또한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그는
입산한 지 1 년 여 만에 다시 세상으로 하산했다.

집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1963 년 다시 상경하여 인쇄소에 취직했다.

10 년 가까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72 년 박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가운데
계엄 치하에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애가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이 후로 그는 엄혹한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 단체를 찾아 다니며
그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온 기능과 직업을 통해서
필생의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줄곧 민주화 운동에 기여해 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70 ~ 80 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구류를 살고 했다.

1980 년 4 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다가
이듬해 5 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석방되기도 했다.

나는 첫 직장이던 1977 년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일 적부터
필요한 인쇄물을 강은기 사장에게 맡겨 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등
내가 주도하고 관계했던 모든 단체의 유인물 역시 강은기 사장이 도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등 기독교 단체의 인쇄물도 거의 강은기 사장이 맡았다.

그는 실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 단체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담당해 온 산 증인이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운동에 헌신해 온 민주 인사다.

그는 오랜동안 나와 같은 교회에 소속된 나의 선임 장로이기도 해서
나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본다.

그는 2002년 여름...
갑자기 췌장암으로 진단 받고 줄곧 병원에 입원해 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병실을 찾았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리고 2002년 11 월 9 일
그는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를 알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이들은
누구랄 것없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민주인사 故 강은기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그를 안장했다.

식순 가운데 그에게 바쳐 진 조시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 사람 웃으며 간다 ㅡ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유시춘 (소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우리들에게
사계가 늘 겨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손톱밑 반달같이
여리고 뽀오얀 새눈 돋는 봄날과
시퍼런 삼나무 녹음
그 그림자까지 시퍼렇던 뜨거운 날과

먼길 흘러
저 혼자 깊어져
마침내 바다같은 한강하구 박차고
내 마음의 철새들 떠나는 날에도

성명서와
플랑카드와 스티커와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민주가족' '민주통일'
'민' 字 항렬 인쇄물에 뒹굴던
우리 청춘은 늘 춥고 시렸다.

겨울 새벽 동쪽 하늘에 맨살로 걸린
그믐달이 친구였다.

날 선 분노 때문에
70 년대 80 년대 그때에는
을지로 뒷골목
세진인쇄 강은기 그 아저씨
늘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쇄물 몇 리어카 찍어 간
장영달 이해찬 수배되고 감옥 가면
그래서 쌓인 빚 늘어 가면
태백 정선 광부같이
한번
씨익 웃고 말았다.

밤새 찍어 준
인쇄물과 함께 그 아이들 사라지면
대신 경찰서에 끌려가
아마도 그리 말없이
씨익 웃다가

매타작에 죽을 고생하다가도
다시 만나면
그저 한번 씨익 웃었다

강은기
그 아저씨 가슴에는
비수같은 적개심이 없었다

생활이 운동이었다
운동이 곧 생활이었다
숭늉처럼 따뜻하고 융숭 깊었다

세진인쇄
빚진 사람들아
슬퍼마라 울지마라

그 아저씨 이제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가느니

강은기
그 아저씨
외상값 못 갚은 친구들아
'국민의 정부'에 상기 가슴시린 벗들아
애통해 마라

그 사람 스스로
바다에 버린 양식

이제 곧
밀밭되어 보리밭되어
온 누리에 푸르게 물결칠 것을

그 사람
저기 말 없이
씨익 웃으며 가느니

( 전문 옮김 )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0) 2008.01.22
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0) 2008.01.22
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0) 2008.01.22
82. 네 번째 명함  (0) 2008.0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