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9. 남산 지하실



중앙정보부에서 당시 가장 악명을 떨치던 6 국장 이용택이

순시 중 내 취조실에 들어와 철제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 놈이 사실대로 자백할 때까지 혼좀 내 주라면서 고문을 지시하고 나갔다.


나는 곧바로 수사관 3명에 이끌려 문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쪽문을 열더니 건물 뒷편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습기가 가득 차 있고 천장에는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시멘트벽은 군데군데 누렇게 변색되어 우중충한 분위기다.


▲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넓은 공간에 가구도 없고 캐비넷도 없이 그저 썰렁하다.

다만 철제 책상이 가운데 하나 덩그러니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다.

안쪽으로 경찰서 유치장같은 철망 안에 역시 철제 책상과 앞뒤로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에 앉자 앞에 앉은 수사관이 조용히 묻는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 ..."


저들은 철제 책상을 꽈~앙 내리치더니

"야 임마~!!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하고 소리를 친다.

"... ... 지하실 같은데요~"


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어 하면서 서로 쓴웃음을 짓는다.


"여기까지 내려와서 조사받는 놈 치고 싸질러 놓고 다닌 죄 불지 않는 놈 없엄마~!!"

"조사하는 분들 힘들게 하지 말고... 서로 힘쓰게 하지 말고... 알았찌?"

"네~!!"


"우선 힘 안들이는 걸로 간단하게 주사나 한방 맞고 시작하자~"

하고는 앞에 앉은 수사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다른 수사관이 앞에 앉는다.

"주사를 맞는다고 별다른 부작용이 있는건 아닌데... 남성 역할에 쪼옴 지장이..."

하면서 걱정어린듯 표정을 짓는다.


영화에서나 볼듯한 으스스하고 살기도는 분위기에

난생처음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게 이런거로구나 생각하니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너 정상복(목사,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이 알지?"

"네~!! 압니다 !!!"

나도 모르게 기합이 잔뜩 들어있다.


"정상복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얌마~!! 정상복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알고 있는 줄 우리가 뻔히 알고 있엄마~!!"

"솔직히 털어 놤마~!!"


"알고 있으면 솔직히 이실직고하겠는데... 정말 모릅니다." 


"야~ 임마! 정상복 지금 평양에 있엄마!!"

"평양에서 서울로 왔다갔다 하다가 지금 김일성 품에 있엄마~!!"

"너도 정상복하고 평양에 갔다 왔자넘마~!!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번뜩했다.

수사관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박혜숙과 대질 신문을 한다고 했다.

박혜숙은 이미 다 불었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아니라고만 하니 자기만 윗사람에게 혼이 난다는 거였다.
박혜숙을 당장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그쯤 되어서야 나는
'아! 정말로 박혜숙이 먼저 잡혀 들어와서 진술을 했나 보구나'
하고 깨닫고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평양 가서 김일성 만나는 걸 봤다고 진술한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니
사실이던 아니던 여부를 떠나서 내가 지시했다고 진술하겠습니다..."

나는 다섯 살이나 어린 후배인 박혜숙과 대면하게 되면
혜숙은 여학생의 몸으로 이런 공포 분위기를 감당하기도 힘들텐데
거기에다가 혹시라도 내 앞에서 배신자가 된 기분으로
더욱 비참한 분위기에 빠져 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혜숙이 안쓰러웠다.

이 사실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면서 절대로 없었던 일로 하자고 서로 다짐을 했지만
기왕에 상대방이 진술을 한 것이고 어차피 사실인바에야 대질 신문까지 해 가며
그녀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기가 싫었다.


남산 지하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던건지...

연행되어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수사할 장소가 모자랐던지

그 이튿날부터 나는 하루 24시간을 매일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1975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던 날 저녁

나는 연행된지 6일만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송치되었다.


연행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서인지

다음날부터 나는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거의 매일 출정 조사를 받았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알고 보니

함께 구속된 박형규 목사님의 사촌 동생이었다.

덕분이었는지 나는 비교적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한달 여 동안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과

연세대학교 소속으로 구속된 학생들은 대부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훗날 박혜숙과 결혼하여 살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일을 이처럼 자세하게 말하거나 고백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에 대한 부담이 있을텐데...


기껏해야 출소한 이후 만났을 때

긴급조치 4호 발동 이전에 연행되고 구속되어 내 죄명은 긴급조치 1호 뿐이었는데  
내가 혜숙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백하지 않고 자수기간인 4월 8일까지 숨긴 죄로
긴급조치 4호와 국가내란예비음모 죄까지 뒤집어쓰게 됐다고
우스갯소리 삼아 언급하고 넘어간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로 나에게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생각보다는
인간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박혜숙은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구속되었고
김옥길 총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으로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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