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내 복에 무슨 재혼?

 

 

채광석의 죽음으로
나와 혜숙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음은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었다.

"나 죽으면 당신 재혼할 꺼지?"

혜숙은 베개를 높이 쌓아 놓고
기대어 자다가도 문득문득
이런 말을 자주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지경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입에 발른 듯
아양떠는 시늉도 할 수 없고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속 들여다보이는 말을 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퉁박을 주며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혜숙은 답답해 죽겠는지
또 물어 온다.

"당신 재혼 할 꺼지? 그렇지!"

나는 '당신이 죽지 말고 살아 있으면 될꺼 아냐!'
하는 외침이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아 내면서 한숨을 푸욱 내 쉰다.

"그래도 한 5 년은 기다리겠지?"

아! 이제 혜숙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가 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혜숙이 죽으면 안 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꾸 되물으며
대답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우정 화를 잔뜩 머금고

"나한테 무슨 복이 터졌다고 재혼 복까지 있겠어!!!"
"그런 복이 있다면 5 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고 대꾸한다.
혜숙은 약이 오르고 화가 나면서도
싸울 기운이 없는지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또 되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3 년 상은 치뤄 주겠지?"
"......"

나는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대꾸도 안 한다.

혜숙은 며칠 지나서 또 떠 본다.
나는 계속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혜숙은 더욱 더 약이 올라 있다.

"그러면 1 년은 넘겨 주겠지?"

하고 낮춰서 물어 본다.
나는 혜숙이 너무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심사도 복잡하고 편치 않아서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1 년은 넘겨야 되겠지?"

혜숙은 더욱 더 속상해 한다.
훗날 혜숙은 그 때 너무 약이 오르고 속상해서
죽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우리는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하나마나한 말들을 밑도끝도 없이 주고받곤 했다.

혜숙의 친구들 사이에
'내 복에 무슨 재혼이냐'는 말이
우스갯말로 둔갑해서 퍼져 나갔다.

최민화는 재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혜숙이 약이 올라 죽지 못하고
그 복을 가로채서 깨뜨려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아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이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올 때마다
나에게 끝내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에미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한 가정의 부부는 생활을 함께 하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아 가게 된다.

한 쪽에서 작은 인기척만 있어도
상대방의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느끼고 알만큼 일심동체로 되어 간다.

평생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생각이 닮고 마음이 닮을 뿐만 아니라
모습까지 닮아 가는 것이다.

나와 혜숙의 관계 역시 그랬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에서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아도
혜숙은 나의 활동 반경과 행동거지를 대충대충 다 꿰고 있다.

서로가 각자 다른 장소에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읽어도
판단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게 서로 일치한다.

혜숙과 나는 사회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시 서로 닮아 있다.

삶의 가치관과 신념
인생관과 역사관이
서로 비슷비슷 닮아 있고 일치하는데

이런 배우자를
어디서 다시 찾고 만날 수 있겠는가?

10 여 년 세월 동안

생활을 같이 하고 호흡을 함께 하면서
불편없이 알맞게 맞추어 놓은 것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서
새로 구할 수 있겠는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훈련하고 노력해서
이만큼 서로를 일치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혜숙이 같은 분신을 만나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혜숙이처럼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재혼하는 복은 없는 게 낫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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