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3.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


1972년 4 월 나는 제대하자마자 연세대에 복학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4 학년이거나
아직 군 복무 중에 있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하고 있던 나는
후배들과 한 반에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였던만큼
학업이 뒤쳐지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그러니만큼 무엇보다도 학업에 열심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적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때 만큼이나
긴장하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내가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도록 놓아 두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개헌을 하고
뒤이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목적한 바대로 마지막 임기 3선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취임하고 보니까 한참 남아 있는 4년 임기조차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가 보다.

해가 한 번 바뀌었을 뿐 임기도 한참을 남겨 둔 상태에서
이번에는 아예 원없이 영구 집권할 요량을 부려 댔다.

그 해 10월 17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우리 백성이 조선조 말엽이나
일제 시대에 들어 보던 말이다.

한글로 국어를 삼은 이래 해방된 조국에서는
금시초문이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1867년 우리나라로는 고종 황제 적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분립된 권력을 완전히 빼앗아
왕권을 복고시키고 개혁을 단행해서 새롭게 뜯어고쳤다는
'메이지 유신(維新)'을 본받자는 거였다.

일본이 유신을 단행했기 때문에
우리 땅 한반도를 정복할 수 있었고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던
그 100 여 년 전 일본의 원대한 정신과 기상을
우리가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유신 헌법을 공고했다.


당시 국회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 (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하고
평생을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의원도 3분의 1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골라서 지명하게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꼭둑각시를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도 아무나 나서지 못하게 했다.
대통령은 꼭둑각시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선출하게 했다.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국민 투표를 통해 찬반을 묻겠지만
모든 국민은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의사를
방송이나 언론은 물론 타인에게 표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 유신 헌법을 적극 찬성해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선전만이
방송이나 언론, 공공기관 단체를 통해
온통 난무하게 했다.

10월 유신을 찬성하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스럽고 불순분자이고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반국가적이고
빨갱이고 그랬다.

'10월 유신' 비상계엄령 치하에서
온 나라 백성은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힌 채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들어 있었다.




그 때 민주주의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표현되는
그 숨막히던 절망과 공포 속에서
나는 남은 대학 생활과 나의 전체 운명이
순탄치 않은 곡절을 겪게 되라라고 예감했다.

외국으로 떠나버리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것도 최소한 동의하지 않는 침묵적 저항일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양심을 지켜야 했다.
두려움을 떨쳐야 했다.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함석헌 선생을 찾아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그 당시 함석헌 선생은
정신적 지성과 양심적 행동을 겸비하신 상징으로
우리 백성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 마지않던 터였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의 함자를 기억하기는
초등학교 5 학년 경인듯 싶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