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의 길 / 장준하
1
민족주의자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삶, 고달픔과 보람을 민족의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민족적인 삶이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받고 있을 때 민족적인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눈물과 노력은
모두 이런 민족적인 간난을 극복하려는 데 바쳐진다.
하물며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존재조차 없어지려 할 어두운 시절에는,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눌리어
그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려는 암울한 시절에는 민족주의자는 자기의 생명조차 민족적인 삶을 되찾는 싸움 속에 서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의 생명, 민족의 존재가 이미 없어져 버릴 때는
민족의 한 사람인 그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생명과 존재조차 없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생명과 존재와는 따로 있는 자기, 민족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 있는 자기,민족이 눌리고 헐벗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자기는 이미 자기 아닌 자기이며,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기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참으로 인간적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살아간 길의 갈림점이었다.
애국자의 길과 매국노의 길, 민족적 사랑의 길과 배신의 길이 갈리는 길목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민족․반민족적인 길에 빠져버리거나 스스로 택하는 자의 모든 '개인적인' '인간적인' 번뇌는
아무리 그것이 절실하고 불가피하고 자기대로 푸념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이미 진실로 '인간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모습, 또 그의 본질은 자기를 성장시켜 가고 실현해 가는 것이지 노예의 부귀와 영화에 있지 않은 것이다.
저 길바닥에 던져진 한 개의 돌멩이조차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끝까지 그가 돌임을 지켜갈 때
그는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거니와, 설사 옥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그때는 하나의 돌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노예의 부귀와 영화야 참으로 인간적인 영광과는 정반대의 길이며,
오히려 노예 가운데도 이를 벗어나려는 싸움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민족적인 삶의 길이 험난했던 민족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일조차 이렇게 험난했다.
말 그대로 말은 쉽지만 행동은 힘들었고, 그랬기에 구슬처럼 맑게 살아간 젊은 시인조차"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옥중에서 조차 절규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의 지난날, 더욱 가까이 최근에는 정말 험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시궁창이 이리로 흘러들어 왔고, 세계의 모순, 세계사의 범죄가 이 땅을 무대로 일어났다.
산 곱고 물 맑은 강토에 살던 착한 우리 백성들은 홍수처럼,
악마의 불길처럼 밀려드는 이 세계사의 시궁창 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악 중의 악인 제국주의가, 악마 중의 악마인 군국주의가 그 가장 표독한 이빨을 우리 민족에 들이댔던 것이다.
누리고 뺏고 마침내 말도 빼앗고 성조차 갈려고 했다.
까닭 없는 싸움터로 내몰아 앞세워 죽이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빼앗아 갔고, 인류의 족보 위에 한민족의 존재조차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하건만 이 표독한 이빨 앞에서도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
비록 총칼 든 전투, 이름난 의사․열사가 아니더라도 들판에서, 공장에서, 낯선 이국 땅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이 싸우는 민중에게는 바로 민족적인 삶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었고,
국토가 뺏기는 것은 생활의 터전이 뺏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광복은 생활의 터전과 자기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
이와는 달리 애국이 자기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 지식과 논리가 삶의 터전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 지도층에서는 민족에 대한 배반도 일어났다.
하지만 항쟁의 길이 고달프고 외로운 듯했지만,
그 실은 온 민중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 승리의 영광은 더욱 보람찬 것이었다.
2
장구한 싸움 끝에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이 왔다.
빼앗긴 자가 망하고, 억누르던 자가 쫓겨가고, 포악한 침략전쟁이 패망하여
우리 민족의 삶을 다시 찾은 이 해방의 순간보다 더한 감격이 어디 있겠는가?
민족해방의 환희, 그렇게도 그리던 기쁨, 이 기쁨을 기다리며 참고 견딘 어두운 고통, 이 고통스러운 싸움 속에서 그리던 희망,
그 기쁨과 희망을 이제 현실로 실현하려는 설렘, 이 벅찬 설렘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으랴.
이 벅찬 설렘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알차게 영글어 갔다면 이에 비길 행복이 어디 있으랴만,
세계사의 흐름은 이렇게 쉽사리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지 않았다.
압제자 일본 군국주의를 무장해제하기 위해 남북한에 나누어 진주한 외국군은
군사적 진주와 점령에 그치지않고 이것을 정치적 진주와 점령으로 굳혀갔다.
세계사의 새로운 모순, 동서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범죄가
우리의 강토, 우리 민족의 생명 위에서 새로운 운명을 장난질했다.
그 위에 세계사의 이와 같은 새로운 모순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새로운 외세에 의한 민족의 양분이란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이를 권력장악의 조건으로 이용한
일부 신생 권력층에 의하여 안에서, 밖에서 강요한 양분체제에 대응하였다.
통분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민족은 양분되었고, 통일을 갈망한 민주의 염원은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내외가 상응한 분단체제에 묶여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통한 냉전체제에 의한 민족의 분단은 기억하기도 참혹한 열전으로까지 터지고 말았다.
세계의 갈등이 그 가장 참혹한 대결을 우리 민족을 택하여 벌이고 말았다.
도대체 우리에게 언제 그토록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진 무슨 주의가 있었고,
그 주의에 따라 나라와 민족을 두 동강 내어 살기를 원했는가?
그뿐인가? 역사의 똥인 전쟁, 그 가장 더러운 동족상잔을 우리가 청부맡아 했다니
오천년 민족사 앞에, 아니 인류의 역사 앞에 무슨 낯을 들 수 있으랴.
회상하기도 끔찍하고 몸서리치기 싫지만 다시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 평화보다 이긴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과 형제끼리 싸움에 평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는 없다.
어떻든 우리 민족은 금세기 가장 더러운 세계사의 범죄를 청부맡았다.
전후 냉전체제에 의한 남북분단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자기부정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는 이 분단에 대응한 국내세력의 움직임이 어떠했든 기본적 계기는 외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 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단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강변은 분단의 합리화를 위한 거짓 명분일 뿐이다.
어떻든 이 분단체제 그 세계적 주범인 양극 냉전체제도 긴장완화니 해빙이니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의 대결과 대립의 완화,
소련과 중공의 동맹과 대립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변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적어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총칼을 앞세운 대결은 의미를 잃었고,
오히려 대국의 공존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보이게끔 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 무력대결의 근본조건이 바뀌어 가는 상황 아래 우리 민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외세에 의한 자기분열을 강요했던 자기부정의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부정을 고집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3
이와 같은 새로운 정세 앞에서 우리 민족이 해야 할 결단은 스스로 분명해진다.
그것은 갈라진 하나를 다시 하나의 자리로 통일하는 것이다.
이직도 남아 있는 분단의 외적 조건을 주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과 함을 갈라진 양쪽에서 함께 기울이며 기르는 것이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쳐 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앞선 당위이며, 가치며, 무엇이 거기에 따르는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이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4일 남북한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8월말과 9월초에는 적십자회담을 위하여 갈라졌던 동포가 27년만에 오고갔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지상과제가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라고 할 때
어떻게 이 사실을 엄청난 감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말로 따지고 글자로 적기 전에 콧날이 시큰하고 마침내 왈칵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을 감상이라고도 하고 감정적이라고도 할지 모르지만 이 감상이 감정 없이
그가 하나의 인간, 민족분단의 설움으로 지새워 온 민족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생활에 바빠, 일에 쫓기어 이런 소식에 늦은 우리 동포가 있을지 모르나 그 모든 민중의
소리내지 않는 가슴의 밑바닥에 파도처럼 철렁이는 감격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리오.
그리고 이 뜨거운 눈물과 감동과 열정 없이 어떻게 얼음처럼,
소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분단의 벽이 녹아 내릴 수 있겠는가?
실로 남북을 잇닿은 전화줄은 한두 사람의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갈라졌던 형제 동포의 눈물과 호소와 환희를 서로 만지는 가슴이며 손이어야 한다.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결과로 진실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길이 열렸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세계사에도 우리 민족사에도 없을 것이란 말을 감히 하겠다.
생각해 보면 지난 4반세기의 민족분단은 얼핏 말하던 이념과 제도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 한 사람의 생활의 분단이자 곧 파괴요, 나 자신의 분열이요 파괴였다.
남북한에 걸쳐서 민족의 정력은 모두 민족적 적대, 자기파괴를 위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가난이, 부자유의 최대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분단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는 이산가족, 흩어진 가족이란 말에도 보이듯, 우리들 한 집안 또 한 사람의 가장 큰 인간적 불행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져 생각해 본다면 그 역시 민족분열에서 왔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부모 형제가 만나지 못하고, 부부가 헤어져 살고, 형제끼리 죽이고 죽었고, 어버이와 자식을 잃은 불행이 어디에서 왔던가?
남북 분열, 적대적 대결로 남북 양쪽 모두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얼마나 삐뚤어져 달리기만 해서
마침내는 모두 절름발이가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우리 민족의 양분, 무력대결은 휴전선의 튼튼한 철조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또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의 파괴와 왜곡을 뜻한다.
진실로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이 민족평화통일의 첫 발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인간적 고통의 해결이요,
민족사가 자기파괴와 왜곡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막을 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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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과 같은 역사적인 감격을 통째로 받아들이면서도
'정말', '진실로'와 같은 군더더기 같은 말을 그 앞에 붙이지 않으면 안될 애절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이제 다시는 이 민족적 감격이 짓밟혀 버리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국제정세나 국내정치적 이유로도 적어도 지금까지 진전된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거나
동결시킬 명분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국제정세나 이 새로운 후퇴와 동결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며,
국내정치적 이유로 이런 일이 획책된다면 우리는 오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이 가질 수 있는 골자라는 점이나
부정적인 측면을 냉정하게 가리어 염두에 두고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자주평화통일이 전체 민족의 염원이었으되 그 진전이 방해받아 온 것은 기본적으로는 국제정세의 탓이었고,
이번 계기도 국제정세의 발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국제 정세와 주변 열강의 이해가 우리의 남북의 긴장을 요구하기도 했고, 이제는 긴장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조건이 이제 다시 긴장을 요구할지, 아니면 긴장완화와 무력만 사용하지 말고 대결하면서 공존할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아마도 국제정세와 주변 열강은 이런 남북의 평화공존을 요구함이 분명할 것이다.
이것은 무력대결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진정 우리가 바라는 통일의 길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주변 열강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에의 노력을
실질적으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더욱 분단을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된다.
그 다음 지금 남북한의 정권 담당층은 주변 열강의 요청과 함께 긴장완화에 적극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밖으로부터의 요청일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만약 주변 열강의 요청이 현상동결일 때 이와 맞서서 통일에의 길을 전진시킬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말하여 이러한 점을 일부러 의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며,이 지난날의 거울에 비추어볼 때 어찌 이런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번 실패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물리치는 길은 양쪽에서 함께 주변 열강이 우리의 통일에의 길과 반대될 때는 물리칠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은 지배의 발판을 민족적 양심, 민주에게 두었을때만 가능한 일이요,
적어도 민중은 이런 각오를 굳게 다지지 않는다면 또다시 지고 말 것이다.
통일은 지배층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적지 않은 염려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무력대결을 회피하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얻는 데 성공해가고 있다.
통일이 급하고 지상과제이기는 하되 전쟁은 참혹하다.
참혹할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것은 통일로 가는 가능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전쟁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음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새삼 이를 확인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역사는 때로 작용과 반작용을 되풀이하는 수가 있다.
지금 이렇게 추구되고 있는 긴장완화와 평화는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한치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우리뿐이 아니다. 저 참혹한 월남전쟁 30년 동안 모두가 죽어가고 있지,아무도 이기지 못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 귀중한 교훈을 새겨서 귀한 옥동자를 다루듯 벅찬 희망과 감격을 안고도 그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지금부터 온 민중이 이 어렵게 얻은 옥동자를 떨어뜨려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금 통일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민족통일을 민중과 달라, 현실적으로 이를 다루는 정부나 관계기관의 일로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는 고향이 그립다든지 흩어진 가족이 보고 싶다든지 하는 감정적 차원에 그치게 하여
직접 이산가족이 아니라면 민중의 실생활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다.
통일 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현재 진전되고 있는 남북문제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점들은 보다 보충하고 염려해야 할 점이지,
남북관계의 진전 자체를 부정해야 할 근거는 못됨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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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보충하고 더욱 진전시킬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의 노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 부정적 측면에 빠지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하고, 그 긍정적인 면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먼저 우리는 분단의 민족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분단의 기본적 계기는 외세였지만, 우리의 힘이 이런 외세를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만 책임을 통감해야 하고,
더구나 분단을 더욱 굳혀만 온 지난 26년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이점에서는 집권층을 비롯한, 또 지식인들까지 포함한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더욱 진지하게 반성하고 절실하게 책임을 느껴야 한다.
분단체제의 모든 가치와 논리, 그리고 정책과 그 실행을 반성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 반성이 진실하고도 진지했다면 그것은 현재의 우리, 현재의 나의 희생을 요구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희생은 보다 가치 있는 삶과 세계로의 전진임이 물론이다.
나의 사상, 주의, 또한 지위, 나의 재산, 나의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분단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위대한 자기 희생 없이는 통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또 새로운 반역이 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분단체제 때문에 누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것, 우리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 민족 앞에 희생해야 할 것이다.
이 위대한 희생을 거름으로 민족통일은 이루어지고, 통일조국은 새롭게 자라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치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 싸웠다. 정치적 자유는 그 자체도 기본적인 것이지만,
보다 큰 민족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오늘 민족적 자유가 현실적으로는 확대되고 있음을 인정 안 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 과정,그 방법에서 정치적 자유의 억압으로 민족적 참여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 과정을 탓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집권자에 의해 확대된 만큼의 민족적 자유를
민족 전체가 향유할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를 위한 법적인 또는 현실적 제조치가 단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족 전체에게 확보되지 못한 민족적 자유란 민족 전체에게는 새로운 외압이며,
따라서 이것은 말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대된 자유 위에 통일을 향한 전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을 향하여 경제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국토계획이 마련되어야 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함양하는 문화구조가 세워져야 한다.
첫째는 정치․경제․문화 어디서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의 민족을 향해 서로 개혁해 나가야 한다.
그 현실적인 단계로, 지금 일컬어지는 복합국가론 같은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이것은 또 외형의 문제이고 내부체제에 있어서 복합사회라고 할 제 제도와 체제의 병존과 같은 사회체제도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사회체제에서 귀중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향한 현실적인 하나의 단계이지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적어도 각 분야에서 대외의존이 청산되고, 자주성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통일민족의 이식과 도덕이 확립된다면 복합적 사회체제가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통일에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하다. 그렇지만 그 길은 기필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 한 사람 몇 사람의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희생되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희생과 설사 있을지 모르는, 지는 것이야말로 보다 영광스러운 이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의 혈로를 뚫기 위해 몸을 던질 때,
이제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그 길을 이제야 우리는 다시 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다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길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씨알의 소리』 1972년 9월호에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