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에 맞선 그때 운동권은 어떻게 살았냐면

[서평] 민청련 역사의 기록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

이준영(news)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이에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이준영 씨가 서평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 서울 종로구 삼각동 소재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하는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민청련 부의장 ⓒ 푸른역사 제공


2019년 6월에 방영된 SBS스페셜 다큐멘터리 <요한, 씨돌, 용현>의 주인공 김용현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대의 의인(義人)'이라고 불렀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초반 생으로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그해 13대 대선 부정선거 감시 및 폭로활동에도 앞장선 민주화운동가였다. 1989년에는 천주교정의구현연합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으로 정연관 상병의 의문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민주화운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감시와 미행은 물론이고, 연행에 이은 구타·고문도 감내해야 했다. 이후 그는 권력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에 은거했다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갑자기 나타나 민간구조대로 제 몸을 사리지 않고 사고현장을 지켰다. 사태가 수습되자 홀연히 산으로 떠난 그는 봉화치 산으로 다시 돌아가 산불감시원으로, 토종벌 지킴이로 은거하며 살았다. 이후 그는 풀벌레, 들짐승과 함께 묵묵히 자신만의 생명운동을 이어가며 자연인으로 살았다.


혁명가라기보다는 순교자에 가까웠다


▲ 민청련 초대 집행위원을 자원한 1.장영달 2.박우섭 3.연성수 4.박계동 5.이범영 6.홍성엽 ⓒ 푸른역사 제공
김용현씨의 이야기는 점점 세속화·기득권화되어가는 민주화세대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세대론에 기대 민주화운동 세대를 쉽게 폄하하는 세태에도 경종을 울렸다. 권위주의와 독재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헤쳐오는 과정에서 김용현씨와 같이 민주화운동의 현장과 우리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그곳에 언제나 함께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잠시나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책 앞표지 ⓒ 푸른역사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던 청년들의 이야기다. 교과서를 통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배운 세대나, 영화 <1987>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이 시대를 접한 젊은 세대들에게 1987년 6월항쟁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흔히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시위를 상기하기 쉽다. 아니면 정치적 민주화를 주도했던 김대중·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이나 연단에 올랐던 문익환 등의 재야지도자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전술을 제시하고 조직사업 등의 실무를 집행한 주체였지만, 그 후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탐하지 않았고 묵묵히 자신의 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세대였다. 이들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아래 민청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이 책은 민청련의 이름으로 쓰인 영화의 각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1987년 당시 30, 40대의 청년들로서,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유신투쟁을 전개했던 학생운동 출신의 역전의 용사들로서 민주화운동의 '허리'와 같은 세대였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어쩌면 민청련 세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순교자에 가까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빵잽이'라고 부르며 우스갯소리 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들이 웃어넘기는 죄목과 공소장, 신문기사들에는 체제전복·국기문란·좌경용공과 같은 무서운 단어들이 즐비했다. 이들에게 순교자와 같은 희생정신과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의 무도한 국가폭력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문과 투옥은 계속되었지만,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김근태 등 민청련의 초기 지도자들은 19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였다. 이들은 4.19학생혁명의 후예였으며,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통해 사회의식·민족의식을 각성한 세대였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체제가 유신으로 치달아가던 시기에 몇 차례의 수배와 투옥을 거치며 직업적인 운동가의 길을 걷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 이래로 지하에서 형성되어온 민주화운동의 네트워크를 가동해 광범한 청년운동가 집단을 묶어세우고자 했다. 이들의 뒤를 받쳐준 중추 세대는 197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투옥과 수배를 거치며 단련된 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후 베이비부머세대로서 대체로 농촌 출신이었으며 여러 명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구성원이었다. 이들의 대학진학은 다른 형제·자매와 가족구성원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명문대 학생이 된 이들은 선택된 자식들이었고, 집안을 일으킬 기대주였다.

이러한 성장배경을 지닌 이들은 강한 엘리트의식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또래집단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회의 모순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에 더욱 커다란 분노를 품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운동의 길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현실에 대한 저항감은 입신양명이라는 개인적 욕망을 초월하는, 자기희생적인 사회적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1980년대 청년이 되어서도 민주화운동을 지속하며 고민과 결단 끝에 자기희생을 실천한 세대였다.

내 이웃의 현대사이자 민청련 세대의 무용담


▲ 1987년 대통련선거 유세장에서 민청련이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속되고 있다>와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 푸른역사 제공


민청련이 창립된 1983년 시점에서의 조직구도는 40대가 대표직을 맡고, 30대들이 기층조직을 이루는 양상이었다. 민청련은 1980년대 내내 명확한 정치노선을 제시하고,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녹화사업·군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1985년 2.12총선 대응 활동, 5월 광주항쟁 진상규명 투쟁, 김근태 의장 고문 폭로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월 항쟁과 1987년 대통령 선거 등 굵직한 정치적 이슈의 중심에 민청련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의 CNP논쟁, AB논쟁, 1987년 대선 전술논쟁 등 이론·노선 투쟁을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 책은 민청련이라는 조직과 그 구성원들이 써 내려간 회고담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커다란 흐름을 이해하는 데 손색이 없는 교과서적인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내용의 전개가 명쾌하다. 운동의 당사자들이 직접 쓴 스스로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조직들과 복잡한 이론·노선투쟁도 아주 쉽게 해설하고 있다.

한국민주화운동을 더 공부해보고 싶은 청소년들이나, 대학에서 한국현대사 강의를 수강한 경험이 있는 청년세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간행된 <한국민주화운동사> 제3권을 통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을 일별한 뒤 곧바로 이 책을 통해 주요 사건사와 인물사, 그리고 논쟁사를 보완하는 독서를 시도해보기를 권유한다. 1980년대를 직접 겪은 세대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기성세대들 역시 나의 이야기이거나 내 이웃의 현대사로서 접근한다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민청련 세대의 '무용담'이기도 하다. 왕년의 무용담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택'(tactics, 전술)일텐데, 역시 이 책에서도 독자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것은 정치노선이나 이론투쟁과 같은 딱딱한 내용이 아니라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투쟁전술들이다.

기억에 남는 선전전술을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요즘과 같은 SNS 시대에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수십 만 명의 독자에게 가 닿는 선전이 가능하지만, 이 당시에는 기껏해야 수백 장의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해 검거까지도 불사해야 했다. 검거를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한 '택'들이 고안됐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야간에 주택가를 돌면서 우편함에 일일이 유인물을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낮에 거리에서 배포하는 방법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천정 환기구를 열고 바깥에 유인물을 올려놓고 하차하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이 바람에 날려 시내가 유인물로 뒤덮였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거듭되며 신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세로로 긴 플래카드를 유인물과 함께 두루마리처럼 말아 접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고 그 매듭에 담뱃불을 묶어 놓는다. 이것을 시내의 빌딩에 가지고 올라가 창문 밖에 두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건물을 빠져나온다.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가 비닐 끈이 끊어지며 플래카드가 펼쳐지고 그 안의 유인물이 흩뿌려진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시 생각해보기


▲ 1985년 민청련 탄압에 맞서 고문수사를 규탄하는 농성을 하는 민청련 간부들의 부인들 ⓒ 푸른역사 제공


그러나 민청련의 역사가 이런 소소한 무용담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청련이라는 이름 뒤에는 남영동·치안본부·안기부·취조실·고문과 같은 독재의 유령들이 항상 쫓아다녔다. 책에는 민청련 지도자 김근태와 이을호 등 고문 피해자들과 수배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그려진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고문과 반인권적인 탄압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가족애와 동료애, 그리고 인간의 위대한 신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 민청련은 1987년 6월 항쟁의 산파역을 도맡을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역사는 대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나, 국본 출범의 모태가 된 재야의 민통련, 야당의 민추위 등을 줄기로 하여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야와 야당 조직의 '허리'를 이룬 사람들 중 대다수가 민청련 출신의 30~40대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뿌리와 조직적 활동의 모체는 민청련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청련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이 책의 성과는 1987년 6월항쟁의 역사를 풍부화하는 성과이며, 나아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이론사·조직사·인물사를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1988년 이후 1992년 민청련이 해소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집필 초기 기획된 민청련 회원 자녀들의 이야기 '민청련 가족사'가 추후 과제로 미뤄졌다는 점 또한 아쉬움을 더한다.

민청련의 고난은 곧 가족들의 고난이기도 했으며, 자아가 형성되던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의 수배·고문·투옥은 그들의 우주를 뒤흔든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아 이 두 가지 과제 즉, 민청련을 중심으로 한 1990년대 민주화운동사의 서술과 민주화운동 가족사의 집필이라는 후속작업으로까지 꼭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화두로 던졌던 김용현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글을 마치고자 한다. 김용현씨의 사연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가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과거의 인연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김용현씨가 감독과 나눈 필답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휠체어에 의탁한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았느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눌해진 말 때문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대신해야 했던 그의 대답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젊었던 민청련 회원들 역시 김용현씨처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많은 동료들이 온갖 고초를 당해 건강을 잃거나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많은 민청련 회원들은 여전히 이름없는 우리의 이웃으로 지하철 옆 자리에, 아파트 주민대표 회의장에, 동네 생활협동조합에, 그리고 투표소 선거 대기줄의 맨 앞자리와 촛불집회의 맨 뒷자리에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이제는 거의 반백이 된 초로의 아저씨·아줌마들이 촛불집회가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촛불을 든 자식뻘 되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무용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민청련이 먼저 간 동지들에 바치는 조사(弔詞)이자, 스스로의 역사를 정리한 집단적 자서전임과 동시에 후대에게 전하는 비망록이다.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날선 감정들이 유령처럼 사회를 배회하는 요즘, 땀과 눈물로 써 내려간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찬찬히 되짚어 보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1987년 대선 이후, 김근태가 바라 본 '두 개의 전선'


1988년 6월 30일 가석방 돼 감옥 문을 나선 김근태는 민청련 회원들의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혹했던 1983년에 민청련을 창립하고 민청련뿐만 아니라 사실상 운동 전반을 이끄는 지위에 이르렀지만,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를 주장하고 그것이 한 원인이 돼 대선 패배로 이어짐으로써 김근태의 위상은 이전보다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김근태에게는 자기 한 사람의 위상이 낮아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분열되고 무너진 운동 세력의 전선을 어떻게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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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이후 와해된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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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자신의 생각을 9월 3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의 기념강연에서, 또한 그즈음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특별대담에서 밝혔다.

김근태의 강연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김근태가 아직 감옥에 있던 87년 대선 이후 운동세력 내부에서 진행돼 오던 통합 논의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서 민청련이 창립된 1983년 이후 이에 자극 받아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운동 등 운동조직들을 중심으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한편으로 재야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 두 연합체가 다시 통합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을 만들었다.

그런데 민통련이 제 역량을 갖추고 활동력을 키워나가는 도중에 김대중, 김영삼을 주축으로 한 야당 세력이 재기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 순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 여세에 떠밀려 민통련과 양 김 세력이 연합전선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였고 이 연합전선의 깃발 아래 6월민주항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으로 쟁취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이 분열하고 그에 따라 운동 세력도 분열함으로서 국본이라는 연합전선은 붕괴됐다. 운동 세력 내부를 보면, 연합체인 민통련이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의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민통련이 예전과 같은 운동 세력 총연합체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운동 세력의 새로운 연합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던 것이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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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세력 내부에서 각 그룹 마다 논의해 오던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에 대해 김근태는 출옥 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한 자기 생각의 대강을 9월 3일 성만민청련 창립식 기념강연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얼마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과의 특별대담 '민족민주운동의 현 단계와 과제'를 통해 밝혔다.

김근태 생각의 핵심은 운동 세력의 재편에 대한 논의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연합전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선을 두 개로 나누어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하나는 민족민주운동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전선이었다.

두 전선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 계급에서 차이가 있었다. 민족민주전선은 다수의 동자, 소생산자, 농민, 도시빈민, 중소자본가를 토대로 한 전선이고,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민중운동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반면 국민전선은 중소자본가와 비독점대기업을 주 토대로 하며,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제도정치의 야당 세력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각 전선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의 차이는 이들의 정치노선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국민전선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취에 중점을 두지만 민족민주전선은 민중의 이익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분단의 극복을 추구한다.

김근태는 국민전선이 비록 불철저한 민주주의에 자족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이 군사독재와의 비타협적 투쟁에 앞장서는 한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며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운동세력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민족민주전선을 튼튼하게 꾸려내는 것이라고 했다. 튼실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고 그 힘으로 국민전선이 이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이러한 구상은 지난 대선에서의 운동 세력 간 대립과 분열을 해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김근태 자신은 그러한 일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한 것처럼 보였다.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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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지도부에 대한 비판

한편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그 힘으로 야당과 운동세력에 대한 공세를 펴나갈 기세였다. 그것이 전두환 때처럼 폭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운동 세력을 국민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려는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정세에 속에서 민청련은 하반기 총회를 앞두고 치열한 배부 논의에 들어갔다. 관례적으로 해왔듯이 11차 총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조직 단위와 부서에 대한 평가작업에 들어갔다. 그 기조는 9차총회 이후 민청련이 내세운 '청년대중운동론'이 실제 활동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민청련은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동서울, 남서울, 북서울이라는 지부를 건설했고, 나아가 경기도의 안양과 성남으로 지부를 넓혀나갔다. 이러한 지역지부의 건설은 분명한 성과였지만, 총준위 평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지도력 부재'의 문제가 지적됐다. 

지도력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민청련은 각 대학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조직이라는 틀을 벗고,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노동청년들을 자기 조직원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목표는 쉽사리 달성되지 않았다. 각 지역 지부는 여전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주요 회원이었고, 이전의 지도부가 중앙에서 중앙 권력을 향해 투쟁했다면, 지역 지부는 지역 차원에서 지역 권력과 투쟁하는 일종의 중앙의 지역화를 수행하는 양태였다.

그러한 지역 단위의 정치투쟁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애초에 설정한 '청년대중운동론'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인지에 대해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 지역 지부는 그때그때 지역에서 발생하는 노동쟁의에 대응할 뿐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지침은 없는 상태라고 자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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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학생운동 쪽에서 거세게 치고나온 통일운동이었다. 이는 학생운동 속에서 성장한 이른바 민족해방(약칭 NL) 계열 노선이 외화된 것이었고 따라서 민청련 회원들은 지도부에게 NL에 대한 태도의 표명을 요구했다.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공개적이지는 않았지만, NL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통일운동에도 지지와 지원은 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5공 비리와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투쟁을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방침'으로 NL이라는 '노선'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김성환 지도부는 당시를 풍미하던 NL에 대해 비토는 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그것은 회원들에게 지도부의 노선 부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학생운동에서 터져 나온 통일운동 열풍에 대해 김근태 전 의장이 성남 강연회에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김 전 의장은 그것이 성과와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고 했다. 즉 기존의 운동 세력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관습에 젖어 있었는데, 학생운동이 그것을 단숨에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했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대선 패배 이후 침체돼 있던 운동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통일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투쟁의 배합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즉 5공 비리나 광주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 그쪽의 투쟁 동력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이 통일 문제를 워낙 거세게 치고나옴으로서 전체 운동의 흐름에 일종의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운동의 질곡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비판했다. 또한 학생운동은 본원적으로 대중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음에도, 그들이 사회 운동 전반을 자신들의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어떤 면에서 사실상 운동 전체를 지도하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이러한 비판은 민청련에게 그다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후에 김근태의 행적에서 알 수 있게 되지만, 김근태는 이제는 민청련의 범위를 벗어나 전체 운동의 재편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그만큼 민청련 회원들과의 접촉면은 넓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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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1차 총준위 논의는 지도부 교체로 모아져 나갔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민청련으로서 새 지도부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 그룹들과 접촉면을 갖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에게 그러한 처방이 충분한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민청련동지회 주 :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다음 49회부터 민청련 해소까지의 글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내용을 알차게 보강한 뒤 다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1379

민청련동지회 님의 방 http://www.ohmynews.com/NWS_Web/I_Room/Open/Open_Article.aspx?MEM_CD=00757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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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 통일운동의 대열에 민청련도 참여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학생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에 전 역량을 투입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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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비리'를 투쟁의 축으로

민청련의 지역지부인 동민청, 남민청, 북민청, 안민청 등은 사회단체들과 연대한 공동올림픽 촉구 집회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각자 자기 지역의 공단 등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일에 집중했다. 또 중앙에서는 정치권에 등장한 이른바 '5공 비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대중투쟁으로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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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비리'란 전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의 직책에 앉아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고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전두환의 재임 중 비리까지 밝혀진 사건이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5공화국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새 헌법에 따라 처음으로 청문회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정치권에서는 '5공 비리'가 드러난 것은 노태우 정권이 전임 전두환 정권과의 연계를 끊고 차별성과 독자성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면서 강권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이 뒤에서는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민청련은 5공 비리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토대로 여러 단체들과 연합해 '광주학살 부정비리 원흉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운동의 610남북학생회담 및 8.15남북공동행사에 가려져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연말에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와 맞물려 전국민적인 투쟁으로 불타오른다.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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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향한 교육, 청년학교

한편 민청련 각 지역지부와 중앙이 나름의 활동을 펴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조직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책실이었다. 정책실은 중앙위원회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실장 이승환을 비롯해 한홍구, 노동진, 김종민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9차 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방침으로 결정된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정책실이라는 기능 속에서 고민하던 중, 청년대중에 대한 교육사업에 착안했다. 이를 위해 10차 총회에서는 교육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했고, 이 기구에서 '청년학교준비위원회'를 꾸려 사업구상을 펼쳐나갔다.

민청련에서는 이전에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내용이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라든가 '여러 투쟁 노선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들이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었던 셈이다.

청년학교를 구상한 이들은 기존의 교육과는 다르게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일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보통의 '일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구상했다. 대개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운 우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지식들은 정권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과거와 현실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청년학교는 그러한 제도권 교육이 심어준 거짓의 껍데기를 부수고 "우리 민족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준비를 마친 위원들은 1988년 7월 19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마련한 강의 공간에서 제1기 청년학교를 개강했다. 교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진균이 맡았고, 이승환, 한홍구, 박기목, 윤석연 등이 간사로 운영을 맡았다.

강의는 매주 수, 금요일 2회씩 총 16강으로 구성됐다. 강의 주제는 첫 강의 '세계관'으로 시작해 자주, 민주, 통일, 한국경제의 구조, 80년대 운동, 애국과 매국의 역사 등이 전반기 강의였고, 이어서 후반기 강의로 사회참여와 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주민운동 등이 이어졌다. 강의 제목만으로는 기존 교육과 차별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강의는 철저하게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됐다.   

강사로는 소설가 김영현, 노동운동가 장명국 등이 참여했고 민청련 선배 활동가로 김희택, 연성수, 권형택, 김희상, 현역 간부로 의장 김성환과 청년학교 측 한홍구가 직접 참여했다. 1기 강의에 참여한 학생은 70여 명으로 다른 지역지부 활동에 비해 규모가 컸다. 직업별 비중을 보면, 사무직 노동자와 대학생이 각 35%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1.청년학교 교장 김진균 2.간사 한홍구 3.정책실장 이승환 4.교육위원장 박기목 5.정책실 노동진 6.정책실 김종민
 1.청년학교 교장 김진균 2.간사 한홍구 3.정책실장 이승환 4.교육위원장 박기목 5.정책실 노동진 6.정책실 김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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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청년학교는 지역의 청년단체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곧이어 충남민주청년연합에서도 청년학교를 개강했고 광주, 부산 등으로 번져나갔다. 충남민청의 경우, 지역 교육청에서 비인가 교육 시설이라며 폐쇄하라는 공문을 보내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청년학교 운동이 정권에게 상당한 타격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NL의 흐름 속으로

그런데 민청련 중앙에서 청년학교 개교를 논의하던 중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청년학교의 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중앙위에서는 청년학교를 민청련의 '부설'로 할 것을, 청년학교준비위 측에서는 '후원'으로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중앙위에서 부설을 주장한 것은 청년학교의 교육방침이나 인선 등이 민청련 중앙의 지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청년학교 준비위원들은 기존의 민청련 교육이 주로 학생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런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대중 교육은 그런 민청련과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준비위 측의 주장대로 청년학교는 민청련의 후원 아래 일정한 독립성을 갖고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표면상 드러난 논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청년학교를 꾸린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풍미하던 이른바 NL계열의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주제도 NL운동의 핵심개념인 '자주, 민주, 통일'이 뼈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중앙의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청년학교 활동은 그 자체로는 크게 활성화됐지만, 민청련 중앙에 대해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김근태 석방되다

한편 민청련의 지역지부 사업이 또 하나의 성과를 거두었다. 9월 3일, 성남민청련이 창립됐다.

성남은 일찍이 70년대 초 서울 재개발 사업으로 밀려난 서민들이 모여 들어 만들어진 도시로 주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특히 1980년 6월 9일, 광주 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던 때에 21살의 성남 노동자 김종태가 서울 신촌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했다. 이후 김종태를 기리는 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모임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 활동가 중 한 명인 허남정(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이 주축이 돼 민청련 지부를 결성한 것이다. 이로서 민청련은 서울 이외 경기 지역에 안양에 이어 성남에 근거를 갖게 됐다.

  (위)성남민청련 현판식. (아래)성남민청련 초대 위원장 허남정과 성민청 임원 명단
 (위)성남민청련 현판식. (아래)성남민청련 초대 위원장 허남정과 성민청 임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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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청 창립식에서는 뜻깊은 강연이 있었다. 민청련 초대 의장 김근태의 강연이었다. 김근태는 이에 앞서 6월 30일, 구속된 지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김천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는 대학생과 노동자를 비롯한 양심수가 1천 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므로 김근태의 가석방은 특별한 경우였다. 민청련에서는 그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6월항쟁이 있던 87년 연말,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에서 김근태를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80년 광주 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민청련에게 이는 뜻밖의 뉴스였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원로들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은 정치와 상관없이 전 세계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이므로 수상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고 민청련도 수긍했다.

그런데 정작 옥중에 있는 김근태를 대신해 부인 인재근이 수상을 위해 출국하려 했으나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미국에 가지 못했다. 결국 88년 5월, 재단 관계자인 로베트 케네디의 딸이 직접 상을 들고 방한해 인재근에게 수여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이 김근태 석방에 대한 압력을 넣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정부는 6월 30일 김근태를 석방했다.

당일 김천 교도소에는 부인 인재근, 함께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이해찬, 박우섭, 당시 의장 김성환 등이 찾아가 교도소를 나서는 김근태를 뜨겁게 환영했다. 김근태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등과 허리가 몹시 쑤신다고 했다. 또 두통이 심해 잠도 제대로 못자고 하혈까지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당분간 쉴 것을 권유했지만, 당시 상황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하는 김근태 전의장
 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하는 김근태 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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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청 강연의 제목은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감옥을 나온 지 이제 두 달 된 김근태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김근태는 87년 대선에 대해 옥중에서 '김대중 비지'를 천명했고, 그것은 결국 노태우 당선, 그리고 운동권의 대분열이라는 업보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운동 전반이 처한 현실을 되짚어 보면서 무언가 방향을 찾고 싶었다.

이날 강연은 그에 대한 김근태 생각의 대강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른바 '두 개의 전선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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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들어와 학생운동 내부에서 싹이 터서 자라난 NL 계열은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나왔다. 특별히 이 해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를 투쟁의 계기로 삼아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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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학생운동에서의 첫 목소리는 3월 중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NL계열 후보로 나온 김중기에게서 나왔다. 그는 '남북청년학생 체육대회와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남북학생회담을 6월 10일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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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은 북한 학생들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오고, 남한 학생들은 한라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와서 8월 15일에 만나 대동제를 열자는 것이었다. 학생체육대회는 9월 15일부터 17일에 걸쳐 남의 서울대나 북의 김일성대에서 열자고 했다. 서울올림픽이 9월 17일 개막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은 서울올림픽을 통일의 축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서울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에게 받아들여져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라는 구호로 확장됐고 이 깃발 아래 전국 대학생들의 '조국통일운동'이 뜨겁게 타올랐다. 전대협은 이 열기를 모아 6월 9일 연세대에서 '6.10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이 집결을 차단하자 전남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로 분산 개최하여 오히려 열기를 확산시켰다.

6월 10일 연세대에서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이 열렸다.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이날 출정식에는 재야에서 문익환 민통련 의장, 지선, 진관 스님 등 각계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출정식이 끝나고 '통일선봉대'의 지휘에 따라 대학생 수만 명이 연세대학교를 출발해 판문점을 향해 행진을 벌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대학생들은 홍제동 부근에서 경찰의 봉쇄에 막히자 수천 명이 8차선 도로에 들어 누워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큰사진보기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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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을 남북공동 주최로"

대학생들의 이러한 통일운동은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우선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 김대중은 "정부가 남북학생회담을 주선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영삼의 민주당도 동조했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과 노태우 정부도 학생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생들의 남북 교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대화 창구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처신을 택했다.

이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독려하며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치던 정부로서의 고육책이기도 했다. 앞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 등 서방이 불참하고, 84년 LA올림픽은 그에 대한 소련의 보복으로 동구권이 불참하는 반쪽 올림픽에 그쳤었다. 그래서 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에 대한 기대는 더욱 깊었다. 심지어 노태우 대통령은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선언)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편 재야 쪽에서는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이 통일 문제를 가장 선도적으로 치고 나왔다. 민통련은 이미 2월에 문 의장의 주창에 따라 '통일위원회'(위원장 김병걸)를 구성하고 통일문제에 대해 대중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6.10남북학생회담'을 들고 나오자 이에 대해 발 빠르게 움직여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등 원로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었다. 또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단체 68개가 연대하여 '조국통일의 대업을 앞당기기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여기에는 민청련도 참여했다.

NL과 거리 둔 민청련 지도부

그런데 민청련의 남북학생회담 지지 열기는 학생들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이는 민청련 지도부가 NL계열 학생운동에 대해 지지하지 않은 것과는 별도로,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운동 슬로건에 대해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지도부는 4.26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고, 특히 광주에 기반을 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 정세 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혀내는 투쟁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런 시기에 통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투쟁 역량을 분산시키고 전열을 흐트러트릴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광주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장 다가온 올림픽 이슈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심수 문제라든지 민중생존권 문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강했다. 그래서 광주를 투쟁의 1순위에 놓더라고 적어도 통일 문제가 그 다음 순서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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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림픽에 대한 민청련의 태도는 민중 생존권을 도외시하는 행사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전면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올림픽이 가진 반민중성을 폭로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학생들의 '공동올림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따라서 민청련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열기가 뜨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NL 학생운동에 대한 김성환 의장의 분석은 이러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4.19에 뒤이은 전 민중적 변혁의 열기가 정점에 도달한 '혁명'에 버금가는 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군사독재 정권은 사실상 흔들림이 없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자성이 운동세력 전반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이 미국이라는 존재였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규정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규정력에 착안하는 순간, 그 미국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있는 강력한 대항력으로서 북한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NL에서 '한국 사회의 변혁을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학생운동에서 막연하게 대안으로 보아온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적 대안체제인 소련 안에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즉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가 벌이고 있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소련이 진보적 대안 체제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었다.

이래저래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는 여러 계기들이 등장했고, 그것이 학생운동에서 NL이라는 노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김성환 의장은 그러한 계기들을 인정하면서도 김영환이 <강철서신>에서 이미 역사적으로 사실 규명이 완료된 박헌영에 대해 그가 '미제의 간첩'이라며 북한 측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운동 행태에 대해 찬성할 수는 없었다.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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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냐 통일이냐    

민청련 안에서 벌어진 논쟁의 양태는 6월에 간행된 <민주화의 길> 18호 논조에 반영됐다. 즉 투쟁 방침으로 광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민중생존권 지원투쟁 3가지를 제시했다. 운동 세력 전반을 아우르면서 단결을 지향하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이러한 나열식 투쟁방침은 현존하는 여러 경향성들을 그저 백화점식으로 모아놓은 것일 뿐 선명한 지도지침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때 올림픽을 두고 벌이던 내부 논쟁 중 누군가가  '운동적 패배주의냐, 패배주의적 운동이냐'라고 자조적으로 내뱉기도 했다. '운동적 패배주의'에서 '운동'이란 스포츠를 가리킨다. 온 민중이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는 판에 우리도 잠시 쉬고 그저 즐기자는 비관론이었다. 또 '패배주의적 운동'에서 '운동'은 민청련 운동을 뜻했는데 대중들이 열렬하게 즐기는 마당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청련 지도부의 내부 논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표현된 문구도 상당히 정치적으로 걸러진 표현을 사용했다. 즉 성명에서는 "우리는 애국 청년학생들의 열렬한 통일에의 의지로 추진되고 있는 남북학생 교류가 백번 정당함을 확인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6.10남북학생회담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길>에 실린 정세분석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공비리 척결투쟁을 중심으로 두어 올림픽 이후에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하고... 올림픽이라는 계기에 의해 활성화된 통일운동의 수준을 선도적인 선전전을 통해 유지하고, 학생들이 주장했던 내용이 좀 서툰 점이 있다 해도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이 기층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내용을 찾아 전 대중으로부터 적극적 호응을 받도록 한다... 올림픽 기간까지는 올림픽의 파급효과를 극소화할 수 있는 대처와 행사를 마련하되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감안하여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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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내부에서 성장한 NL

그러나 민청련의 조직 구성원은 각 대학 출신자들이었고, 따라서 당시 각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민청련 활동가들에게도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여러 계기들'은 강렬했다. 다시 말해서, 민청련 내부에서도 NL 계열의 노선에 대한 동조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1988년 6월에 들어서자 NL 노선을 자기 노선으로 삼는 민청련 활동가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 또한 민청련이 발행하는 기관지를 통해 반영됐다. <민주화의 길>에는 "조국통일운동의 신기원을 열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민중신문>에는 "공동올림픽은 민족대단결의 신기원" "공동올림픽으로 통일에의 한걸음을" 등 지도부의 방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논조의 기사들이 점차 지면을 차지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민청련의 노선과 민청련의 지도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내적 계기를 만들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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