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10. 징역 5년 이상 사형 언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검거된 대학생의 수는
102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인원이었다.


유신 독재권력은 연행된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조작 수사하여

간첩과 빨갱이로 둔갑시켰다.


연행된 이들 중 무려 253명을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죄목으로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구속된 이들은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가족들에게
접견은커녕 어디에 가 있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

3월에 잡혀간 내가 7월 말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오산에 계신 부모님으로서는
내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건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궁금하실게 당연했다.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서울구치소에서는 수용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4개월 여 동안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되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에서는 두 방에 1명 씩을 분산해서 수용했는데
나는 지금도 서대문 공원에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12사동 상층 절도범 방에 수감되었다.

한 방에 있는 절도범들은 모두
하루에 한 차례씩 가족이나 친지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인 나만 접견이 불허되었다.

나는 가족이 매일 접견하러 오는 한 절도범과 상의한 끝에
그의 아내를 내 누이가 간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오산기독병원으로 찾아 가게 해서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기별을 전해 주고
읽을 책과 영치금을 우편으로 보내 주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그 후 나는 누이에게 내 소식이 전해 지고
또 누이로부터 기별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이 닿으면 바로 연락이 오련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기별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여인네가 누이를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돈을 받아 갔는데
그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 버린 것이다.

군법회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각종 고문과 조작 수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부분적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상대에 재학 중이던 김병곤은 사형이 구형되자

최후진술에서 재판부를 향해 일갈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생들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군법회의 재판을 비판하면서

박 정권을 나치 정권에 비유하고,
피고인들의 투쟁을 정당한 국민 저항운동이라고 변호하던 끝에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다"라고 했다.


이것이 대통령 긴급조치 4 호를
비방하고 위반했다 해서 법정 구속이 되기도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변론하던 발언을 문제삼아

바로 구속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 구속 수감 후 1975년 2월 17일 석방되는 강신옥 변호사


나는 최후 변론대신 숨이 막힐 듯 얼어붙은 법대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노래를 힘차게 불러제켰다.


참으로 박 정권의 탄압은 무지막지했다.
7월 13일 1 심 판결을 받은 53명에게
사형 14명, 무기징역 15명, 징역 20년 18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이 선고되었다.


급조된 군법회의 법정에서
구속된 이들 가운데 204 명이 징역 5년 이상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여기에는 민청학련 조직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윤보선 전대통령과 박형규 목사님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김지하를 통해서 자금을 지원한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6일 귀국길에 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속되고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은 반독재 저항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주여, 이땅에 정의를!",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재판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가을 학기에 들어서자마자
반정부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편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해서 발단이 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과 함께
전국민적인 반정부 저항 운동으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신 체제 권력의 무지막지한 횡포와
탄압의 잔악성이 전세계로 번져
국제 사회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비인도적이거나 비열한 처우 또는
잔인한 처벌로 침해당할 때
인류 세계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켜내야 했다.

반인권적 국가 권력에 대한
국제적 경제 제재 조치가 검토되고
진상 조사와 항의 방문 등이 잇따랐다.
급기야는 전세계적인 정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와중에 8 월 15 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대미문의 법으로 권력을 휘둘러서
민주화 운동을 막으려던 박 정권은
국내외의 비난과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박 정권은 2심 형량을 낮췄고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난 지 10개월 여 만인 1975년 2월 15일
구속자 대부분인 148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 아닌 민청학련 관계자 4명과
배후 세력으로 몰린 여정남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 21명은 제외되었다.

인혁당 관계자 가운데 사형을 언도받은 8명에게는
1975년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박 정권이 8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하던 1975년 4월 9일
우리나라를 제외한 전세계 모든 언론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국제 사회는 이 날을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의 날"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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