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유럽에 다녀오겠습니다.
일주일동안 프랑스 파리 OECD 본부에서 열리는 사회정책장관회의에 참석합니다.

 

“기회의 확대 - 적극적 사회정책을 통한 국민의 편익증진 방안”이라는 주제로 회의가 열리는데

가족․아동정책, 연금문제, 빈곤경감 정책 등에 관해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복지 선진국인 유럽에 가서 복지정책에 대해 배우고 오겠습니다.

 

제가 유럽을 다녀오는 동안 우리당에서는 성대한 당원축제가 열립니다.

특히 이번 전당대회는 25만 기간당원이 당의 지도부를 직접 뽑는 매우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우리당이 명실상부하게 ‘기간당원’에 의해 운영되는 완전히 새로운 정당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신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그 현장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모든 분들이 지혜를 모아 잘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도 ‘기간당원제의 완전 정착’은 매우 감격적인 일입니다.

재야활동을 마무리하고 제도정치권에 입문한 직후 저는 엄청난 돈이 드는 정치현실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깨끗한 정치,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리 끝에 제가 속한 지구당만이라도 당비를 내는 당원에 의해 운영해 보기로 마음먹고

‘기간당원’을 모집하고, 당내에 ‘기간당원제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순진한 김근태, 철없는 김근태라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나중에는 비명을 지르는 심정으로 정치자금 양심고백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당비를 내는 25만 기간당원에 의해 운영되는

기간당원 중심의 정당체제가 완성되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봅니다.


얼마 전, 꽃샘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경칩을 맞아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갑작스런 한파로 얼어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개구리뿐이겠습니까.

10여년전에 ‘기간당원제 도입’을 주장한 저의 생각도 마치 너무 일찍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 같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조금 일찍 잠에서 깨었을 뿐 봄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기간당원이 내는 당비가 당 운영비의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당대회도 기간당원들의 열렬하고 자발적인 참여와 활약 속에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기간당원의 직접투표로 지도부를 뽑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록 며칠 추웠지만 분명 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추위는 잠깐이고 햇살은 갈수록 곱고 따스할 겁니다.

잠에서 깬 나무들마다 새 잎과 꽃들로 만발할 것입니다.

 

귀국하는 날엔 따스한 햇살사이로 화사한 봄꽃을 보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2005.3.28

김근태






일본이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지지발언 덕분에 가능성이 한층 커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축하하고 도울 일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키지 않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본 열도를 휘몰아치고 있는 ‘극우경향’ 때문입니다.

독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억지를 부리고,

또 후손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지금의 일본 상황은

‘비정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독도문제는 물론이고요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대결과 투쟁’의 길로 내몰 염려가 다분합니다.

이런 일본이 국제적인 리더십을 가진 나라로 발돋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마음 편하게 지켜보고 동의할 이웃은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은 유엔의 정신에도 걸맞지 않는 일입니다.

유엔 안보리는 국제사회에 평화를 확산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그냥 진출한다면 심각한 가치충돌이 일어납니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국제사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과거의 침략행위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반성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합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 분쟁에 불을 지르는 나라라는 인식을 바꾸지 못한 채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한다면 이웃들은 위협을 느끼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북한에 대한 일본의 태도도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저는 지난해 일본을 방문해 정관계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일본 사회의 리더십들이 어떤 의도를 갖고 북한 몰아세우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북한은 이미 일본의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를 정도로 우울한 사회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해

과거의 정한론처럼 북한을 활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리더십을 지닌 나라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제, 21세기입니다.

21세기에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맞는 방식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일본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아시아를 강점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21세기에 맞는 길은 협력의 길, 화해의 길입니다.

상생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일본사회가 스스로 평화의 길로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선량하지 않은 이웃과 함께 지내야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를 이끄는 리더십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

올해는 을사늑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당시 대한제국 말기의 리더십들은 일제의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권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물론 강제와 강압에 의한 조약인 만큼 원천무효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리더십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 점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고종황제를 비롯해 당시 대신들은 모두 싸우다가 죽었어야 했거나

아니면 모두 자결을 해서라도 치욕적인 상황에 저항했어야 합니다.

 

주권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방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장관인 저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리더십들이 모든 것을 걸고 수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독도문제 역시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독도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리더십들이 이런 점에서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2005.3.21

김근태

 



요즘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불질러 놓은 화두입니다.

 

‘정부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혁신활동’을 시작한지 제법 시간이 지났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아직 개운치 않습니다.

 

지금, 보건복지부도 변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교육하고, 평가하고, 제도를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혁신 노이로제에 걸리겠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혁신 불지피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작년보다 훨씬 과격한 방법도 동원하고자 합니다.

‘혁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직원들을 사실상 협박하고 있습니다.

 

서열과 관행을 파괴한 인사를 단행하며,

젊은 서기관들과 사무관급 직원들로 주니어보드를 구성해

혁신의 전면에 스스로 나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 기업인 GE가 기업문화 혁신을 위해 만든 Work-out 프로그램을

보건복지부에 도입할 준비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공직사회의 문화를 바꿀 차례가 되었습니다.

공직자들이 가슴으로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혁신에 앞장설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혁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혁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공직사회는 ‘국민의 신뢰’를 먹고사는 집단입니다.

공직사회에 대한 불신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은 국가경쟁력을 훼손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공직사회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공직사회는 국민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 공직사회의 경쟁력은 미국이나 유럽의 공직사회와 견줄만합니까?

 

저는 우리 공직사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공직사회는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 집단입니다.

업무에 대한 책임성과 열정도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밤 11시가 넘도록 정부청사의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고,

수많은 공무원들이 땀 흘려 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벽’입니다.

우리 공직자들은 자기가 속한 칸막이 안에서만 일하는데 너무 익숙해져있습니다.

조직 내 타 부서와 협조하고, 다른 정부부처와 협력하는데 서툽니다.

정부조직 밖에 있는 국민과 소통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국민의 소리를 가슴을 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국민에게 설명할 것은 설명하며,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설득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런 경향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책방향과 지침을 정하는 집단이 따로 있었습니다.

정부의 각 부서는 세부계획만 잘 세우면 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정부조직은 그런 의사결정 방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하도록 설계되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일해 왔습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효율적인 실행계획을 만들기 위해

높은 칸막이를 만들고 분장된 업무에만 충실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옆을 돌아볼 틈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정책에 대한 정부 각 부처, 부서, 담당자의 권한과 책임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익집단, 언론, 국회, 사회단체, 국민 등 직간접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참여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사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공무원조직이 효율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IMF 이후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업의 효율이 정부의 효율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가 기업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지요.

 

저는 간부들에게 보건복지부를 미국이나 영국의 보건복지부 못지않은

경쟁력 있는 부서로 만들자고 얘기합니다.

그래야 미국이나 영국보다 나은 “국민통합국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력의 핵심은 ‘벽 없는 조직’을 만드는 것입니다.

타 부서 그리고 국민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수직적 칸막이 체제에 맞게 설계된 시스템을 수평적 열린 시스템으로 바꿔야 합니다.

 

외부와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업무체계,

조직구조, 평가제도 등을 모두 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직자 스스로 환경변화를 인식하고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보건복지부는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삶의 질에 관해 피부에 닿는 정책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이제 보건복지부는 한 단계 더 높은 변화를 이뤄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보건복지부가 변하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2005.3.14
김근태



 



“우리에게 ‘과거’란 무엇일까?”


요즘 들어 이런 고민에 빠질 때가 많다.

자동차 경주를 하듯 분주한 일과를 보내는 것이 요즘 일상이지만,

간혹 자동차가 꼼짝없이 정체구간에 갇혀 짬이 날때면 생뚱맞게도 이런 고민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어떤 대학교수가 정말 생뚱맞은 ‘망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내용과 표현이 너무나 도발적이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짐작 못했던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두려웠다.

 

사실, 사석에서 비슷한 뉘앙스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번 한교수의 주장처럼 도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언뜻언뜻

‘결과적으로 근대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는 뉘앙스를 비치곤 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가급적 자리를 피했지만 가끔씩 논쟁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같은 논리로 ‘군부독재’도 옹호하곤 했던 것 같다.

군부독재 자체는 나쁘지만 산업화에는 기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과정이 어떠했건 결과적으로 사회를 발전시켰으니까 공과 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가 패망했고, 군부독재도 국민의 선택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를 발전시켰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논리의 파탄’

‘지성의 공황’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같다.

 

‘결과적으로’ 눈에 보이는 진전을 이루기만 하면 과정이 어떻건,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어떻건 상관없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이완용이나 이광수 같은 친일파를 낳았고,

히틀러 같은 나치주의자들을 길렀으며,

군부독재가 활개 칠 수 있는 토양이 됐다는 점을

이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정파적 계산에만 몰두하다보니

모른 체 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스펜서 존슨의 책 ‘선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과거에서 배움을 얻지 못하면 과거를 보내기 쉽지 않다.

배움을 얻고 과거를 보내야 현재가 더 나아진다.”


우리는 요즘 과거를 털고 미래로 가자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과거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래야 현재가 더 나아질 수 있고, 미래를 환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진실규명’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단죄’만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곧 과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사회가 합의하는 과정이고,

그래야 과거의 교훈에서 현재와 미래를 발전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5.3.7
김근태


 



혼란스러웠다.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씨를 만나고 돌아와서 밤잠을 설쳤다.

그때 입술이 부르텄는데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태를 악화시킨 건 장영달 의원이었다.

내가 다녀온 다음 날쯤인가 여주교도소로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내가 이근안 씨를 면회한 얘기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언론에 귀띔한 것이었다.

 

설 다음날, 방송 카메라 기자들이 집으로 밀고 들어왔다.

첫 번째 온 기자들은 성공적으로 방어해 돌려보냈지만,

그 다음에 들이닥친 기자들이 막무가내로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이근안 씨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비서실에서 주의하지 않고 일정을 짜는 바람에 일이 어긋나서 이근안 씨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상락 전 의원을 설 전에 면회하자는 게 비서진의 생각이었다.

내 의견을 말할 사이도 없이 이 의원을 비롯해 면회를 같이 할 사람들에게

이미 통지를 하고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면회를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민이 있었고,

면회를 가야할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학벌사회인 이 나라에서 가난해서 진학 못한 것도 억울한데

선거에서 좀 과장했다는 이유로 의원직도 뺏고 징역까지 선고한 가혹한 법원의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도 면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근안 씨가 이 전의원이 있는 여주교도소에 함께 있다는 얘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부담스러웠다. 비서관에게 안갈 수 없느냐고 묻고,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 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서 망설였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어슷비슷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다.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솔직히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

2005.2.21
김근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자활후견기관을 방문했다.

첫 느낌은 이름이 좀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그냥 ‘자활지원센터’라고 하면 어떨까?

 

이곳은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훈련도 시키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일할 의지로 충만한 분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는 얼마 전 국민의 질책을 크게 받았던 ‘결식아동 도시락’에

사랑을 담아 만들고 배달하는 일도 한다.

간병일도 하고, 도배 같은 집수리 일도 열심이다.

 

그런 일을 하는 분들 가운데 비교적 자활에 성공한 네 분을 모시고

대통령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실, 그동안 좀 혼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일손이 딸리고 사람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데 공공근로를 시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것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외국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미스매치 되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로 이해가 된다.

빈곤층의 상당수는 근로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고,

또 근로능력이 있더라도 사회와 국가가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훈련시켜야 스스로 일을 해서 빈곤을 탈출할 수 있다.

또 그래야 자부심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인 딸을 데리고 산다는 40대 초반쯤 된 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당히 세련되고 미인이며 지금은 자활에 성공하고 있다는 그 아주머니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아마도 설움에 북받쳐서 그랬던 것 같다.

“희망이 있어야 살지요. 희망이 있어야…”

 

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자활사업은 경쟁에서 탈락한 이웃이 다시 경쟁의 장으로 돌아오도록 사회가 돕는 일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이 희망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우리 사회가 이웃과 희망을 나누는 따뜻한 사회로 발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설 연휴를 지내면서 이런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께서도 그런 생각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 사회 희망의 질량도 커지는 셈이니까...


2005.2.14
김근태




 

 

지난 주말에는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에 참여했다.

지금은 독립공원, 그전에는 서대문구치소 병사 위쪽에 있는 달동네였다.

 

‘서대문구치소 병사’는 나에게 아픈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85년, 남영동에서 야만적인 고문을 받고 내동댕이쳐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삶을 되찾기 위해 모든 마음을 다 모았다.

 

매일 세 번씩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다.

그때의 그 ‘따뜻함’이 나를 ‘삶’의 방향으로 되돌려내는 어머니 같은 힘이 되었다.

그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연탄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따뜻함이다.

전형적인 산동네 비탈길에서 40~50명이 늘어서서 연탄을 받아 넘기는 일은 참으로 리드미컬했다.

사랑이 손에서 손으로 따뜻하게 전달되는 듯했다.

 

내 옆으로 한두 명 건너편에는 젊은 여성과 청년들이 떠들썩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두어 명이 구두를 벗어던지고 양말 바람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비탈이어서 굽이 있는 구두가 불편하다고 했다.

왠지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별안간 박세리가 생각났다.

골프화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하얀 맨발’로 물속으로 들어가 공을 쳐내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98년이었던가? IMF 위기로 경제가 어렵고,

국민 모두가 미국에 기죽어 있을 때,

박세리는 미국에서 벌어진 미국의 운동경기인 골프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그때 박세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었던가?

 

민생경제가 어렵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

연탄나누기에 참여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대한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맨발의 사랑나누기’ 같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게 할 수는 없을까?

 

곧 설날이다.

이번 설에는 그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지내야겠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생각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2005.2.7
김근태

 


 

 

지난 주에는 소록도를 찾아갔다.


대구, 경북 지역에 뿌리를 내린 ‘참길회’ 회원 130여명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호남에 기반을 둔 ‘소록도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함께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동행에 나서기로 했다.

‘한센병 환우들과 인사할 때는 손에 힘을 주고 악수를 해야 한다’
‘인사가 끝난 다음에 바로 손을 씻지 마라. 그렇게 하면 수군거림 속에 욕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들이 준엄하게 행동수칙을 정해 주었다.

약간 긴장되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는데 그에 버금가는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녹동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를 향하면서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떠올랐다.

그 피리소리를 들으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삘릴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사이 사이에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흔적없이 사라져간

만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의 한숨과 슬픔이 뿌옇게 다가오는 듯 했다.

얼마간 결심이 필요했다.

노인 환자들이 식사하시는 것을 도왔다.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침이 튀기는 듯했다.

움찔 물러났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환자들을 대담하게 만나는 장면이 순간 스쳐갔다.

‘거리를 두어서는 안된다. 장관이 거리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힘을 주어 악수했다.

병실 모두를 방문해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마을도 찾아갔다.

손 또는 발이 없는 분들과 손과 눈이 마주치는 악수를 했다.

 

그 분들 중 몇 분이 마음을 여는 듯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세상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국가로부터도 외면당해 왔던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에 비해

이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언제 시작할 수 있는가?

자문하면서 소록도를 떠나왔다.

저 건너편에 소록도를 남겨두고 말이다….

2005.1.24
김근태



‘부실 도시락’ 문제가 많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문제의 발단은 ‘준비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하반기, 방학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까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은, 정부 안에서도 준비가 부족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밥 못 먹는 아이는 없게 하자’는 쪽으로 정책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학기 중에 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아이들을 방학 때는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과 주장 앞에 ‘준비가 덜 되어 있다’

‘5만 5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확대할 때 뒷받침이 가능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해내자’ 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실제로 이 일을 맡을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책결정 취지에 대해 일선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정책이라는 재료에 ‘사랑과 정성’을 보태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지행정은 정책이라는 그릇에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일입니다.

특히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귀포에서 부실 도시락이 전달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며칠 뒤 ‘밤골 공부방’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천주교 수녀님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점심도 제공하는 곳입니다.

 

여기 아이들은 모두 명랑하고 활발했습니다.

그 다음에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학생으로부터 ‘못산다고 친구들이 잘 놀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목이 메었습니다.

 

이 여자 아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극화의 두려운 결과이고, 참으로 무서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뇌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외로움보다

주위에서 ‘낙인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번에 우리 사회 복지 시스템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히 복지정책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시는 여러분께 ‘참여’도 함께 고려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공직사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도록 각별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피가 돌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공직사회가 핏줄 구실을 제대로 하는 바탕 위에 지역사회가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널리 모아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05.1.24

김근태

 

일요일, 편지쓰기를 시작하며―.

일요일 오후입니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후배로부터 

 ‘일요일에 쓰는 편지’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그저 부담 없이 짧게 쓰시면 됩니다”

 

그 후배는 정말 부담 없이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쓸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씩??’


하지만 후배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

덜컥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돌아섰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편지를 쓰겠다는 약속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하게 쓰겠습니다.
잘 정리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품었던 ‘생각의 조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일을 보내고 제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추억이건 감상이건 눈물이건 분노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여러분과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말’ 하나도 틀림없이 책임져야하는 장관으로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빚 갚는 심정’도 작용했습니다.

 

읽어주시고 제가 전하는 ‘생각조각’을

여러분이 ‘큰 생각’으로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울고 싶은 일이 많은 지난 한 주였습니다.

먼저, 어이없는 화재로 세상을 떠난

세 남매 때문에 울었습니다.

 

경찰인 아빠는 철야근무를 나갔고,

엄마는 신문배달을 하던 그 새벽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나 열심히 일하던 분들이라

슬픔이 더 큽니다.

 

특히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절규하던

그 어머니 때문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친구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두 주먹 꼭 쥐고 다짐합니다.

 

제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러분께서 절대 이 김근태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울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행사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신이 우리에게 두 팔을 주신 것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안기 위해서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면 기적을 이룬다’

는 영상물이 나를 목메게 했습니다.

사실, 밥퍼 행사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봉사자들의 몸가짐과

마음 쓰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다일공동체 봉사자들도 피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친절한 공무원의 소임을 다한다는 이문행 경장님,

천사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들….

그곳은 정말 너무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었습니다.

“밥을 많이 퍼야 합니다”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세상은 웰빙이니 비만이니 하는 말과 함께 밥을 조금 먹으려는 추세인데

그곳에서는 밥을 많이 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밥을 많이 퍼서 식판에 높이 쌓아 배식 했더니

또 너무 많이 펐다고 혼이 났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실, 좋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몇 번하고 마는 밥퍼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속하는 밥퍼’라는 점이 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김근태”

이렇게 사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그곳에서 밥을 펐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뜬금없는 간첩논쟁에 대해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잘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냉전과 색깔논쟁의 망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이 준동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지난 봄 촛불로 대통령과 민주주의를 구했듯이

언제나 나라와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주에는 의사당에서 단식하던 권영길 의원님을 위로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지만 가슴은 더없이 짠했습니다.

이런 이심전심이

여러분과 저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보내는 편지’가

여러분과 제가 더 깊이 이심전심을 나누는

‘따뜻한 악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덜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2004.12.15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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