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실린 사진들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강남 압구정에 위치한 갤러리 '눈(NOON)'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사진들로써 정해창 선생님의 1930년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사진 입니다. 당시 유리원판에 담긴 영상들을 구본창 선생님의 프린트 재현으로 볼 수 있었는데.... 몇 점 안되는 작품이었지만 우리나라 사진史에 아주 희귀한 회고전으로 기록 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우리의 잔잔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러하고...
이 사진들의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으로 짐작되는데 한국적인 토속미가 철철 흐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보다 한층 여유로운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원작자가 별다른 설명을 해두지 않아 각각의 사진이 어느 지역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시대 생활상을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재 정해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풍경사진전(총 4회)을 개최한 분 입니다. 이화여대 동양미술사 교수역임과 사진예술 강의도 했다는데... 이러한 사진전을 통해 옛 시절로의 회귀하는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929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최초의 사진 전람회인 정해창 예술사진전람회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년간 사진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는 정해창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닜는 사진 오십여점을 가지고 리제창씨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 일부터 시내 광화문 빌딩에서 개최한다는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중에는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사단의 지보(至寶)
정해창은 학처럼 단아하고 기품있게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세상의 엄청난 지각변동속에서도 한없이 자아를 성찰하고, 내면세계를 다지면서 초연한 삶을 살았었다. 우리나라가 온통 외래문화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사진을 통해서 진정 우리의 체질에 맞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은 얼마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를 통해 단순한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아닌 가슴 깊숙한곳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가슴벅찬 감동이 밀려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의 사진은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위대한 사진가로 평가받는 경우라도 외국작가들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낯설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감수성이나 미적감각이 그네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정해창의 사진은 현대사진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색채의 현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려 더 강한 미적충격을 전해준다. 그가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 풍경, 오브제 등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사진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시작(보는 방법)이 매우 독특한것이었고 또 한장 한장의 사진에 웅축되어 나타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이웃집 아낙네 오브제의 배치를 통한 상상력의 구현이라는 동떨어진 세계를 오가면서 그가 만든 사진들은 한국적인 미의 표현이 단순한 소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의 미에 대한 의식과 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술사진 또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다른 사회적 기능들과 더불어 사진의 한 분야로 존재했고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정해창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 가능성을 실현한 사진가로 손꼽힐 수 있다. 그 까닭은 예술에 대한 판단기준이나 사회적 요구가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할 지라도 보다 근본적인 미적 충동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갖는 가치의 영속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사진은 사라져버린 전통 미의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정해창은 확실히 한국사진계의 보물로 여겨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966년에 나온 한 잡지의 글을 빌면 '사진가이며 사진이론가인 유재 정해창씨는 한국사단의 지보(至寶)'였다.
특이한 지적배경을 가진 사진가
정해창은 한국의 사진가로서는 보기드문 지적 배경과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직전인 1907년 3월 서울 종로4가에서 출생한 정해창은 자를 하연(何涎), 호를 유재(悠哉)라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1922년 서울에서 보성중학을 수료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일본유학시절 어학을 공부하면서도 미술과 사진 등 시작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동경의 전단화회(川端畵會)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학을 연구하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사진의 추기시대,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이 사진의 질을 결정하기도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인화지 제조기술이나 특수인화법 등 화학에 관련된 사진의 문제를 연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해창이 사진가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후일 그가 대학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고, 동양 미술과 고고학의 권위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와 동양학을 연구하는 사이에 사진술을 습득한 것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을 살펴보면 그가 공부했던 동양미술의 영향을 깊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온 정해창은 종로의 본가에 근거를 두고 사진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성에 목적을 둔초기의 영업사진시대가 지나고 순수한 표현방법으로서의 예술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해창이 자신의 전공과 별 관계가 없어보디는 사진작업에 매달린 것은 당시의 이러한 부누이기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도 믿어진다. 1929년 3월 정해창은 광화문에 있는 광화문빌딩2층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개인사진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관객들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고 언론들의 반응 또한 꽤 컸던 것같다. 그 이후로 정해창은 대구, 광주, 진주 등을 도는 지방순회전시를 비롯해서 1939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람회에 이르기가지 4회의 개인 전람회를 열었으며,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예술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했고, 사진가라면 누구나 참가했던 공모전 또는 콘테스트 등에 한번도 사진을 출품한일이 없었을 만큼 자신의 사진에 자신 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4번째 전람회를 끝으로 사진작업을 그 만두었다. 그는 말하기를"사진은 회화일 수 없었고 기계나 재료를 시험 검토해야하며 게다가 매일 촬영을 다녀야 함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충분한 예술적 구상을 가질 시간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한다. 사진작업에 전 시간을 바칠수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그늘 짓눌렀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가식적으 로 사진을 계속하고 허명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정해창의 네번째 전람회가 끝난 직후인 1940년 대부터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사진재료가 거의 고갈 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사진작업을 중지한 이유의 하나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 했고(이때 그 학교에서 사진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양으로 사진예술을 강의했다고 한다.)6.25전쟁 후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양미술사를 담당했었다. 1960년 우연히 다리를 다쳐 집안에 칩거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재(불상, 불화, 석등, 석탑, 사찰 등)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한국 석비의 양식'이 있다. 이처럼 정해창은 사진작업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나 꾸준히 한국적인 미를 탐구했다. 그는 사진외에도 서예나 조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1941년과 51년 두차례에 걸쳐 서예 개인전람회를 열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인(私印)도 조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적 기질과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가졌던 정해창은 한국사진의 큰 흔적을 남기고 1968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사진은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현재 약 200여장의 유리원판이 남아서 우리에게 그의 사진계를 전해주고 있다.
잊혀진 미의식의 원형
정해창의 사진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평온한 한국미의 형상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미적감수성을 시각화했으며, 그 미적 감수성은 어느 외래 문화에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순수한 한국미의 원형이 그의 사진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계각국의 예술작품을 보면 문화적 전통과 가치가 풍부한 나라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의 경우도 그것이 만들어지기는 똑같지만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고 소화하는 사진가들의 의식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차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앗제의 사진은 파리를 주로 찍어서가 아니라 그가 파리를 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프랑스 사람다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생명 력을 유지하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현대사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도 그들의 사진이 독특한 일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기 뒤에는 항상 사진가가 서 있으며, 사진가의 의식은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경과를 통해 규정되고, 그 의식이 바로 사진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명제이다. 우리가 정해창의 사진을 평가할 때 간과해서 안될 점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능에 접근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정해창은 고무인화법이나 브롬오일법 등의 특수한 이미지를 인화지에 옮기려는 인상주의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인화 제작한 당시의 사진이 소실되어 실제 그러한 사진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선택과 접근방식에서 그의 미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가 사용했던 기술적방법은 아니다. 그가 남긴 유리원판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5"X7" 사진보다 약간 작은 가로 163mm, 세로 120mm의 크기이며, 일부는 5"X7"의 약 1/3 정도 크기밖엔 안된다. 그리고 그가 인화해서 전람회장에 걸었던 사진들은 대부분 전지나 4절 크기였고, 때로는 전지를 6장 또는 12장씩 연결해서 병풍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정해장이 주로 취급한 소재는 인물, 풍경, 인형등이 오브제들로 첫번째 개인전람회 때 전시한 사진들은 정물이나 인물을 찍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풍경사진들이었다. 두번째 전람회는 당시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진행된 지방순회전이었는데 첫회 때의 작품 10점과 인물 등을 찍은 사진 40점이 걸렸다고 한다. 또 세번째 전람회때는 정해창의 인간존재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오브제를 통한 연출사진 50점이 전시되었다. 마지막 사진전람회였던 4회전에는 주로 풍경사진과 한국여인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여성인물사진들이 선보였다. 오늘날의 필름도 아닌 무겁고 감광도가 극히 낮았던 유리 원판을 갖고 작업했었고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으리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해창의 사진들 중 우리의 시선을 가장 강하게 붙잡아 매는 것은 평범한 여성들의 인물사진이다. 대부분 한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모습은 그네, 부채, 소나무 등과 어울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얀 한복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의 모습(사진1)은 막연하게나마 우리들의 어머니가 젊었을 때 간직했을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좋은 사진에서 볼수 있는 풍부한 톤을 없지만, 오히려 톤의 단조로움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며, 김소월이나 조지훈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그렸던 하얀고깔의 여인을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한국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의 원형이 살아숨쉬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은 여인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지 않고 사진밖의 어떤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여인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평온한 세계로 옮겨지면서 진한 여운이 남는다. 당당하지는 않지만 움츠려들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에서는 생명력 있는 한국여인의 슬기가 발견된다. 단풍나무 아래서 안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사진3)에서 자식을 객지에 내보내고 눈물짓는 어머니의 애뜻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비약일까.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정해창이 생각한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이요, 여성을 보는 방식(ways of seeing)이었다. 그가 여성을 보는 방식은 다른 사진가들과 비교 해서 볼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진에서 흔히보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카메라의 렌즈에 시선을 고정한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사진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영업사진이나 현대의 패션사진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델이 되는 여성들의 시선이 결국 사진을 소유한 사람(대부분 남성)의 시선을 향하는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전통에 입각한 전형적인 보는 방법이다. 그것은 물론 서양사회에서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위치와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유명한 그의 저서'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주제로 다뤘고 증명해 낸 사실이 바로 이 문제였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전통적인 보는 방법이 아무런 비판과 검토도 없이 영업사진의 형태로 그대로 도입되었고, 우리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소재문제가 아니라 그의 보는 방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정해창의 강한 서정성과 미의식은 일련의 풍경사진에서 잘 나타나다. 그의 풍경사진에서 사물을 관조하면서 유유자적하는 동양화가의 시선이 그대로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