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 / 차 례


卷頭言 들녘같은 사람 / 고은
卷頭言 최민화 -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시인 김정환

제 1 부

1. 포기는 성공의 아버지 

2. 운전교육대에서

3.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 
4.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5. 봉원산거

6. 1973년 가을
7.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1974년 1월 

8. 1974년 4월 구속이 맺어준 인연 

9. 남산 지하실
10. 징역 5년 이상 사형 언도 

11. 석방 그리고 계속되는 수난
12. 연행 여행과 미인계 사건

13. 전지전능한 '말씀'

14. 장준하 선생

15. 의문의 죽음

제 2 부

16.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17. 허물없이 편안하게
18. 냉동기술학원 

19. 통닭구이

20. 아버지와 아들

21. 김지하의 양심선언
22. 의리의 사나이 장영달

23. 마지 못한 각서

24. 마지막 축제
25. 월간 <씨알의 소리>

26. 세민약국

27.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28. 10.26과 비상계엄령

29.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30. 고향에 대하여 

31. 함석헌 선생의 눈물

제 3 부


32. 대전교도소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33. 일곱 번째 복학과 제적

34. 김대중 피고 사형 언도

35. OB 모임

36. 삼고초려

37. 두꺼비 민청련

38. 레이건 방한 반대와 민청련에 대한 폭행

39 민청련 합동송년회

4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통일문제 사건

41. 2.12 총선투쟁

42. 민중문화운동협의회

43.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44. 광주사태진상규명특별위원회와 민족해방기념대회

45.  학원안정법반대 투쟁위원회

46. 악명 높은 남영동

47. 수사단장 박처원과 면담

48. 명피의자와 명수사관
49. 특별사동

50. 글을 마치며




卷頭言 들녘같은 사람 / 고은 (시인) 



나는 1970년대 이래

역대 독재 체제와의 싸움을 통해서

그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동시대인의 한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희생과 온갖 시련도

나 자신의 자그마한 고행과 더불어 얼마든지 증언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동지들과의 연대와 합치를 통해서

그 인간적인 미덕에 대해 한없는 매혹을 체험한 바도 없지 않다.


최민화 씨는 74년 이래 변함없는 이 세상의 후배로서

변함없는 친밀성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함석헌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선배에 대한 겸손과 동지에 대한 원만

그리고 후배들에게 대해

들녘과도 같은 덕성을 발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실로 풍운이 긴박한 개인 생활의 난관을 이겨내 왔다.

나는 그의 딸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와 격의없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왔다.


이런 최민화 씨가 지난 날의 아슬아슬한 고행과

그 극복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내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의 어제, 오늘 내일의 영광을 기원하는 바이다.


 1996년 3월 <우리는 하나> (최민화 저 / 현암사 간) 서문 중에서





최 민 화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1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2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3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4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 ...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1-6.jpg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1 부 / 1. 포기는 성공의 아버지


1969 년 3 월 나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개가 그러했겠지만 당시 사회 경제적 사정이라는 게 대학을 다니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시골 살림의 형편과 사정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학력 차이가 극심할 때였을 뿐 아니라
국 공립 대학도 아니고 사립대에 진학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적만 하더라도 농촌이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자라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대학을 서울로 유학해야 했다.

이런저런 까닭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개교 이래 두 번째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만큼 대학교에 동문 선배와 친구가 있을 턱이 없어
나는 동아리 모임에 참여하면서 열심으로 활동했다.

친구와 선배들을 사귀고 교수님들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다.


▲ 1969년 연세대 교정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 김찬국 교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캠퍼스와 화려한 계절의 낭만에 묻히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키우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3 선 개헌 파동'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4 년 중임제 헌법으로 재선된 지 불과 1 년 여가 지났을 뿐
임기도 넉넉하게 남겨 둔 싯점이었다.

연초부터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갑자기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차질없이 완수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안보를 더욱 튼튼히 다져야만 한다고
강조해마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 임기가 4 년씩 두 번
그러니까 8 년으로 제한되는 중임제 헌법 내용을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 한해서
3 선까지만 연임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합리적 이성과 양식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억지 주장에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뒤숭숭했다.

야당과 재야 종교계 학계 시민 사회계 등 지식인들은
박정희 1 인을 위한 장기 집권 음모요 정권 야욕이라고 비판하며 들고 일어섰다.

그 해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교에서까지
3 선 개헌 음모를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터져나왔다.


▲ 삼선개헌결사반대 시위


그 해 6월 29일 나는 격렬했던 연세대 3 선 개헌 반대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에 수배자가 되어
일정한 거처 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배회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나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방학을 맞이하고 한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그래도 잠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걱정만은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유전 무전 여행도 할 수 있었고
서울 근교 산과 고향 인근 저수지 등에서 텐트를 치고 거처(?)를 마련해서 생활하기도 했다.


경찰 집계에 따르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12개 대학에서 3만 2천 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학생 541명과 시민 35명이 연행되었다.


7월 7일의 시위는 전국에서 벌어졌고 경찰의 진압도 강경했다.

전국의 각 대학교에는 거의 휴교령이 내려졌고 고등학교도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 3선개헌반대 시위에 퍼부어지는 경찰 곤봉세례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미 많은 고등학교에서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7월 10일 대구에서만하더라도 대구고 학생 500여 명

대륜고생 300여명, 경북고생 300여 명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개헌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어 11일에는 안동고 학생 1천 여 명, 계성고 학생 1천 여 명이 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고

7월 12일에는 김천중고등학교에서 1천 여 명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었다.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시위는 대학이 휴교로 봉쇄된 상태에서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시위에 가담하는 사례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고등학생들의 3선개헌반대투쟁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6월부터 7월까지 학생들의 격렬한 3선개헌반대투쟁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의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7월 17일 제헌절을 맞이해서 야권에서는 범투위 발기인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김재준 목사, 고문으로 윤보선, 유진오, 함석헌, 이재학,

박순천, 장택상, 이희승, 김상돈, 정화암, 임영창 등을 추대했다.

그러는 동안 각계각층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강연과 집회 시위 등으로 저지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당시 제 1 야당인 신민당은 7월 19일 서울에서 시작하여

7월 26일에는 군산 등 전국에 걸쳐 반대유세를 시작했다.


신민당은 원내외에서 동시에 투쟁을 전개한다는 전략하에

원내에서는 개헌 저지선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개헌안 발의 자체를 차단하고

원외에서는 개헌반대유세를 전국적으로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7월 29일과 30일 신민당 소속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이

느닷없이 3선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중앙정보부 개헌공작의 성과인 일부 야당 의원들의 개헌지지는

온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도처에서 변절의원 화형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민당이 삼선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강력하게 저지하고 나서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본회의 보고를 생략한 채 8 월 9 일 개헌안을 정부로 직송하였고
박 정권은 국무회의에서 전격적으로 의결하여 공고해 버렸다.

그리고는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저지하고 탄압하는 내용을 포함한
국민투표법안을 8 월 30 일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 3선개헌안을 변칙통과시키고 국회별관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여권 의원들


새 학기가 들어 서기 직전 공안 기관에서는 시위 주동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수백 여 명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그리고 9 월 14 일 일요일 새벽 공화당 의원들이 야음을 틈타면서 삼삼오오 국회 제 3 별관에 모여
개헌안을 단독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런 형국이었던만큼 가을 학기에 접어 들자마자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나는 지명 수배로 피신하고 있던 중에도 기독학생회 회원들과 계속 모임을 갖고
삼선개악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해 나가기로 결의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학생 시위에도 직접 가담하였다.


9월 3일 4일 5일에는 연세대 학생 1천 5백 여 명을 비롯,

고려대, 서울공대, 성균관대, 그리고 대전대와 영남대 계명대 부산법대, 전남대 의대 등 전국에 걸쳐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9월 11일 전국의 38개 대학이 무기휴교 중이었지만 개헌 반대는 시위의 무풍지대였던 여자대학으로까지 번졌다.

이화여대생 4천 여 명은 검은치마와 흰 웃도리로 복장을 통일하고 성토대회를 열기도 했다.

같은 날 숙명여대생 1천 여 명이 3선개헌반대 결의대회를 열었다.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적으로 통과되면서 각 대학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대학 뿐만 아니라 경기고등학교 등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 나는 수배된 지 2 개월 여 만인 1969 년 9 월 21 일
오산 고향집에 잠깐 들렀다가 잠복 중이던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연행되어 조사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경찰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우중충하고 너저분하기 짝이없는 보호실에서
무슨 파렴치하거나 흉악한 죄를 짓고 들어 온 듯한 사람들 십 여 명과 함께 쌀쌀한 밤을 지새우는 동안 내내
나는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데 없는 심경에 젖어 있었다.



그 때 30 대 쯤으로 보이는 분이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정성과 열정을 기울여가며 내게 들려 준 이야기 가운데
내가 평생동안 잊지 않고 귀감으로 삼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분의 말인즉슨 자기도 연세대를 나왔고 학교 다닐 적에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가담했는데
졸업 후 누군가와 사업을 함께하다가 동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자기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들어 오게 되었다면서
학교 동문 선배 입장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처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내게 알려 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이 실제로 연세대를 나온 선배인지 아닌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 와 있는 건지 아닌지
하는 등등의 내용에 관심이나 호기심을 갖고 있을 분위기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심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간절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 분의 말을
못들은체 외면만 하고 있거나 매정하게 거절할 주변머리도 없는 나로서는 그냥저냥 조용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분은 내게 성공의 비결은 빨리 포기하는 데 있다고 했다.
경제가 안 좋고 사정이 안 좋아 질 때, 사업이 잘 안 되고 점점 어려워져 갈 때
자기도 일찌기 정리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지 않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업에 집착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는 욕심이
결국은 사업을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지만 포기야말로 성공의 아버지라고 했다.
사업에서나 인생에서 집착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알아야
결국은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이 대목에서 생생하고도 신선한 느낌과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그 어떤 지식이나 신념에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서 깨우침과 위안을 얻으면서 내 자신을 지켜 온 바가 적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한 공포 분위기에서 고문을 당할 때
나는 그 때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이 비굴해지지 않도록
비굴하기보다는 차라리 내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도록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의연하게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감옥에서 사색하고 명상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도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세계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경지야말로 바로 자기의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는 세계
즉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는 훈련에 다름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창세기 43 :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야곱은 이미 죽은 줄로 아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떠나보내야 했다.


야곱은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많았던 터라

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와같은 일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제단에 올려졌던 이삭은 이미 생명마저 포기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포기하면 새로운 소망이, 떠나면 더 좋은 곳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니 말이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나는
당시 학생처장 이근식 교수님이 경찰서로 찾아오셔서 

간곡한 부탁과 보증으로  군에 입대할 것을 약속하고 불구속 입건 처리로 풀려났다.

당시 정법대 학생회장이던 노길남과 함께...

 

1 부 / 2. 운전교육대에서


그 후 1970년 11월
나는 논산 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 여러 연대 가운데서도
가장 춥고 배고프고 고달프다던 30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는 가평 1군단 운전교육대에서 운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이가
한 내무반에서 4~5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교육생 구대에서 학생장을 맡게 되었다.

학생장은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을
자치적으로 지도하고 통솔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같은 동료들을 강요하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다가 고참병인 구대장에게 바쳐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처음에 한 두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나는 양심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바치고 나니까
나에게는 매일 무서운 매질이 퍼부어졌다.

그때 어금니가 부서진 것을 나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평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휴식 시간 중 교육생 가운데 한 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부대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이 긴급 소집되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인근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탈영한 교육병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육지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실제로 구경하고
훈련소에서 전방 운전교육대로 이송될 때 비로소
직접 타 보았다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과 사정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드넓은 바다와 높게 치솟은 한라산 자락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섬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마음껏 숨쉬고 자랐을 그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제식 훈련을 하고
사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적응하기도 몹시 힘들었을 것이었다.

더우기 낯설고 물설은 전방에 갇혀서
협박당하고 기합받아가며 극심한 훈련을 견디어 내기란
그야말로 평온한 천국에서 생활하다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같은 심사였을 것이었다.

그의 탈영 사실을
나는 불과 15 분 여 만에 확인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CP라고 불리는 부대 본부로 가서
일어난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나는 그 당시 계급이 상병인 구대장에게
온갖 협박과 강요와 구타를 당하면서
그야말로 견디기 힘들만큼 주눅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장으로 있는 구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했고
이제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부대장에게 불려가게까지 되었으니
나는 이제 초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나보다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야전 잠바 양쪽 어깨와 군모에
대위 계급장을 단 하늘같은 부대장은
지휘봉을 든 채 열중 쉬엇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부대장은 내게 탈영 전후의 정황을 보고받고
몇몇 사실을 확인한 다음
탈영 사건 후 내가 어떻게 조치했는가를 물어 왔다.

그리고는 출신 학교 등 나의 신상에 대한 일까지
이것저것 심문하듯 물어 왔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부대장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하늘같은 부대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모든 신경세포가 바짝 긴장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신속하게 확인하고 보고해서 다행이네...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테니까 곧 잡을 수 있을꺼네..."

하면서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어안이벙벙했다.
중대장은 입술을 내 귀 가까이에 대고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도 3년 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네...
정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었지...
애로 사항이 있나? 있으면 뭐든 얘기해 보게"

그 때 나에게 가장 절실한 애로 사항은
학생장의 직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저......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구대장님을 통해서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알았네..."


탈영병은 부대장의 말대로 3 시간 여 만에 붙잡혔다.
붙잡힌 탈영병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마치 혼절해버린 사람 같았다.

부대장은 탈영병에게 어떠한 기합이나 구타도
일체 가하지 못하도록 모든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했다.

특별히 나에게도 탈영병이 소위 '고문관'으로
따돌림당하지 않도록
한 내무반에서 각별하게 보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결국 우리와 함께 운전교육 전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부대로 무사히 배속되었다.

나는 학생장의 직분을 다른 교육생에게 물려 줄 수 있었고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온 범칙과 비리도 어느정도 시정되었다.

교육 훈련을 마치고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수송부로 배치되어 복무 중이던

1971 년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에서 난생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나는
감시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야당 후보에 기표했다.


▲ 중앙선 지평역 옆 1군 50병기대대 연병장에서


▲ 50병기대대 수송부에서

도대체가 헌법을 자기 권력 야욕의 도구로 일삼는 박정희 후보를
자유로운 형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찍는 사람들의 심사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제 1 부 / 3.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


1972년 4 월 나는 제대하자마자 연세대에 복학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4 학년이거나
아직 군 복무 중에 있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하고 있던 나는
후배들과 한 반에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였던만큼
학업이 뒤쳐지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스러웠다.

그러니만큼 무엇보다도 학업에 열심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적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때 만큼이나
긴장하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내가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도록 놓아 두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개헌을 하고
뒤이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목적한 바대로 마지막 임기 3선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취임하고 보니까 한참 남아 있는 4년 임기조차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던가 보다.

해가 한 번 바뀌었을 뿐 임기도 한참을 남겨 둔 상태에서
이번에는 아예 원없이 영구 집권할 요량을 부려 댔다.

그 해 10월 17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우리 백성이 조선조 말엽이나
일제 시대에 들어 보던 말이다.

한글로 국어를 삼은 이래 해방된 조국에서는
금시초문이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1867년 우리나라로는 고종 황제 적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분립된 권력을 완전히 빼앗아
왕권을 복고시키고 개혁을 단행해서 새롭게 뜯어고쳤다는
'메이지 유신(維新)'을 본받자는 거였다.

일본이 유신을 단행했기 때문에
우리 땅 한반도를 정복할 수 있었고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던
그 100 여 년 전 일본의 원대한 정신과 기상을
우리가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유신 헌법을 공고했다.


당시 국회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 (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하고
평생을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의원도 3분의 1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골라서 지명하게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꼭둑각시를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도 아무나 나서지 못하게 했다.
대통령은 꼭둑각시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선출하게 했다.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국민 투표를 통해 찬반을 묻겠지만
모든 국민은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의사를
방송이나 언론은 물론 타인에게 표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 유신 헌법을 적극 찬성해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선전만이
방송이나 언론, 공공기관 단체를 통해
온통 난무하게 했다.

10월 유신을 찬성하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스럽고 불순분자이고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반국가적이고
빨갱이고 그랬다.

'10월 유신' 비상계엄령 치하에서
온 나라 백성은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힌 채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들어 있었다.




그 때 민주주의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표현되는
그 숨막히던 절망과 공포 속에서
나는 남은 대학 생활과 나의 전체 운명이
순탄치 않은 곡절을 겪게 되라라고 예감했다.

외국으로 떠나버리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것도 최소한 동의하지 않는 침묵적 저항일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양심을 지켜야 했다.
두려움을 떨쳐야 했다.
다가오는 운명의 곡절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함석헌 선생을 찾아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그 당시 함석헌 선생은
정신적 지성과 양심적 행동을 겸비하신 상징으로
우리 백성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 마지않던 터였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의 함자를 기억하기는
초등학교 5 학년 경인듯 싶다.

 

 

1 부 / 4.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얼마 전부터인가
싸전마당 한복판에 높은 연단이 세워지고
전봇대마다 확성기가 매달려져 있었다.

"이승만 박사..." 운운
"이기붕 선생..." 운운 하던 소리가
장꾼들의 흥정을 방해하면서
귀청을 울리고 있던 적이었다.

지낼만한 이웃 어른들 중에는
자유당이라고 적힌 완장을 팔뚝에 걸치고
장꾼들을 불러 모으는 이도 있었다.

정 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1960 년 3 월 13 일
오산 장날에 나는 희안한 행렬 끄트머리를
또래들과 더불어 신명나게 따라다녔다.

낯익은 동네 형들이 앞장을 서서
검은 교복으로 우글거리는 학생들을 이끌고 있었다.

"부정 선거..."
"공명 선거..." ... 등
상기된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며 장바닥을 휩쓸고 다녔다.

장꾼들도 행렬 가장자리에서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더러는 손벽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선생인지 면사무소 직원인지 순사인지 싶은 어른들이
행렬 속으로 뛰어 들어 학생들을 붙잡고 끌어내고 하였다.

한참을 그러더니 행렬은 점점 흩어져 갔다.
동네 어른들 중에는

"제 애비는 자유당 완장차고 유세하고 다니는데...
자식 놈이 제 애비보다 백 번 낫구먼..."

하며 대견해 마지않는 이들도 있었다.
1960년 3. 15 부정선거를 이틀 앞두고 있었던
오산중고등학교 학생 가두 시위는
마산과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더우기 3월 15일 이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거사로
4. 19 혁명사는 기록하고 있다.

저녁나절 파장될 무렵 쯤 되자 한 사람은 리어카 위에서
양쪽으로 확성기를 단 나무사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조병옥 박사..."
"장 면 박사..." 운운하며 세 사람이서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유세하고 다녔다.

이런 분위기 적을 전후로
경기도 오산 시골 구석 씨알에게까지 퍼져 오가던
함석헌 선생의 담대한 필력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설만큼씩한 분량으로 신문지상에 여러 날 연재되면서
글머리 밑에 씌어진 "함석헌"이라는 친필 함자가
초등학교 5 학년에 지나지 않던 나의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함 선생님을 직접 뵙기로는
연세대에 입학하고서다.

연세대 기독학생회에서 함 선생님을 연사로 모신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장에 들어 선 나는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긴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서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이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일찍 오게 돼서...
이 학교 교정을 한번 둘러 보았소...
참 크고 훌륭해. 좋은 교정이요.
아름다운 꽃도 많고 나무들도 좋고...
한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면서 봤어...
그런데 젊은 학생들이 왜들 그 모양이야 ! ! !"

청중들이 모여들면서부터 자리를 마련한 학생들은
한창 부산하게 움직거리며 애를 태우게 된다.

한 5 분에서 10 분 가량을 여유로 남기고
맞춤하게 도착해서 좋을 함 선생님은
그 날 강연 시간보다 무려 2 시간 가량을
미리 도착하셨다는 것이다.

강연장에 둘러 보니 청중은 고사하고
준비하는 학생도 하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정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단다.

그런데 제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 판국인지도 모르고
배우는 학생들 머리 속에
'생각'이란 게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쉬 늙어 버릴 사람이고
배움은 이루기가 힘든 것이어서
한시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데
봄날 날씨 좋다고 교정에 앉아 정신 못 차리고
단꿈만 꾸다가는 마지막에 가서
제 망하고 나라 망한다는 것이었다.

"...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려고 이러는 게요?...
도적질한 죄수한테서나 받아 두는 지문을
선량하고 착한 백성들한테
뭣하러 몽땅 찍어 둘려고 그러는 게야!!! ...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래!..."

정치라는 건 본래 더러운 것이라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라는 것이다.

주민증을 바꾸는 속셈도 필경
도둑의 심보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훌륭했을 법한 가문에서 남달리 귀하게 자라신 교수님들,
살기 좋은 외국에서 많은 학문을 쌓고 돌아오신 교수님들,
제 나라에서는 내놓고 자랑해도
뒤질데 없이 존경받을 체면에도 불구학고
앞에 나서거나 크게 주장하는 법 없는 교수님들,
조용한 목소리, 겸손한 표정으로
선진국 이론이나 엮어 전수하는 점잖고 으젓한 교수님들...

이들에 대한 인격적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그럴 법한 부류의 상징이어서 마땅할 함 선생님의 첫 모습에서
적지아니 혼돈을 갖게 되었다.

고작해서 한 발자국도 안 되는 탁상과 칠판 사이에 끼어
한 두 시간이라야 손가락으로 세기에 족할만큼
개념적인 어원만을 간단히 메모하는 것 외에
탁상 위에 펼쳐 있는 노우트를 보기 위해서
손에 쥔 안경이 눈가로 잠깐 옮겨지는 습관을 제하고 나면
거의 구두 밑굽만 떼었다 놓는 정도로 마감되는
조심스런 자태가 전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론들을 엮어서
역사적인 맥락을 깔끔하게 꿰어 내고
반론을 한다거나 재해석하는 따위로
논리정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도대체가
음성이 조용한 것도 아니었다.

 

 

 

1 부 / 5. 봉원산거


처음의 만남이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인연이었던가?...

 

나는 유신 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를 하고
정국은 절망과 공포로 주눅들면서 쥐죽은 듯 고요하던 때에
함석헌 선생님이라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치떨리는 심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계실 것만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퍽 자상하게 맞아 주셨다.
뜻밖에도 신촌 봉원동 산거에 조용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주셨다.

 

우선 연세대에서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찾았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국신학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봉원산거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턱을 15 도 쯤 위로 치킨다.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긴다.

한 소리를 만나 귀속에 담고
명동(鳴動) 깊숙히 파묻히기도 하고
한 생각을 만나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지기도 한다.

 

얼추 모였다 싶으면
적당한 헛기침 소리에 맞춰 자리를 가다듬는다.

 

간디 자서전 (Gandhi's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ht Truth)
을 펴서 차례지어 돌아 읽고 뜻을 푼다.

 

옛적부터 오랜 세월 이 땅의 서원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모이는 차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턱을 15 도 쯤 아래로 떨구고 있을 것이었고

 

스승은 표정을 삭이고 비스듬히 앉아 장죽대를 빨면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함 선생님의 말씀이
한 주일 동안에 생긴 일들과 어우러지고
간디의 삶과 이어져서 가이없이 펼쳐진다.

 

수줍은 미소와 겸양어린 표정으로
들릴듯 말듯 더듬으며 시작해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더듬던 '말씀'이 서둘러 지고 또렷해 진다.
안색이 변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손이 오르내리고 몸이 움직인다.

 

혈색이 벌겋게 물들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리고는 온 몸을 치흔들어 분노하며 외친다.
내키는 대로, 내키는 그대로를 '말씀'으로 쏟아 놓는다.

 

다시 수줍고 겸양어린 모습으로 되돌아
고금에서 동서에 이르는 억 겹 올에서 한 가닥 두 가닥
섬세한 솜씨로 뽑아 내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어느새...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올마디를 좇아 겨를없이 헤맨다.
휘저이면서 이리저리 떠 돈다.

 

한참을 지나서야 동(東)으로
또 한참을 지나서야 (西)로 옛날로...
제 자리로...
염주처럼 꿰어진다.

 

이런 모양으로 한 해 남짓을 어울려 공부하다가
이듬해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를 당했다.

 

그 후 1975년에 다시 모임을 갖고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Bhagavadgita)를 공부하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모임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려 공부한 이들로는
남학생으로 강경헌(태학관 관장) 강용현(판사) 
김형기(경주 중앙교회 목사)
박경수(한국공항관리공단) 박재순(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부길만(동원대 교수) 신대균(사회운동)
이도성(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이원희(목사)
임지순(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임유식(사업)
조성완(재미 목사) 허우성(경희대 교수) 등등과

 

여학생으로 강인선(성공회대 교수)

김은희(전 조선일보 문화부)  유영림(목사)
전경림(성악가)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참고 사진 : 1964년 봉원산거 퀘이커 모임집 광경




 

제 1 부 / 6. 1973년 가을



한편 나는 '한국을 새롭게'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학생회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각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있었지만
일반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 기관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고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짐에따라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고도의 자기 희생을 결단하지 않으면 진실을 외치기가 매우 힘든 시대였다.

 

학생 운동은 주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해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몇몇 대학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모임이
학생 운동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연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각 대학마다 전통과 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 학생 서클의 지도부들끼리
간헐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해 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서클에 비해 상대적인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대학에 연합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조직된
YMCA와 YWCA, 그리고 KSCM이라는 기독교 학생 단체를 모두 통합하여

1968년 연맹체로 구성한 대표적 기독 학생 단체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어지간한 대학에는
거의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학생회(SCA, SCM 등)의 연합 조직인 것이다.
 
KSCF는 서울 지구, 영남 지구, 호남 지구 등
전국을 3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서울과 경기, 인천, 충청도와 강원도를 포함하는
서울지구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3 개월여 만인 1973년 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임원 5명이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 4 명은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10월 2일에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풍문으로만 나돌던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2시간 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출동한 경찰이 서울 문리대 교정에 난입하여
시위 학생 180 여 명을 강제 연행해서 그 중 20명을 구속하고
57 명을 즉심에 회부하여 구류 25 일에 처했다.

         ▲ 10. 2 서울문리대 학생 선언문

 

서울대 10.2 데모를 주동한 강영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등은
KSCF의 학사단 운동 출신 임원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대부분의 서울대 소속 KSCF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 처분 또는 지명 수배를 당했다.

 

유신 초기 공포와 절망으로 주눅든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 운동과 학생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 운동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할 필요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2시위로 서울문리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 연행되는 학생들

 

서울대 10.2 데모 사건은
유신 계엄령 이후 침묵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대학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시발로해서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10월 16일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친동생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던 중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정 건물 앞에서

담당수사관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중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하는 공무원과 교수 등

54명의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도 이 간첩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고조되고 있는 학생운동의 분위기를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가려는

박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연세대 기독학생회 이재웅(72학번, 정외과) 등과 함께 시위와 철야 농성을 이끌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11월 27일 연세대 학생시위의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학생회관 1층 로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밤샘 농성에 돌입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당시에 이미 신촌의 명배우로 유명했던 명계남을 만나서

철야 농성에 사회를 맡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회관 로비에는 400 여 명의 학생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6시 경 초저녁에 시작된 농성의 열기 또한 식을 줄 몰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유려한 명계남의 사회는

지루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계속되었다.

새벽 5시까지 400 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나는 명계남에게 약간의 도피 자금을 쥐어 주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지 말고 잘 피해 있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이후로 나와 명계남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아야 했다.


▲ 가두로 진출한 학생 시위


구속 학생에 대한 석방 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번지고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유신정권은 모든 대학에 휴업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대학은 휴업과 함께 조기 방학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신체체 이후 처음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전국의 대학이 데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신문과 방송에서 전혀 사실대로 보도를 못 하자
언론사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고
기자협회에서는 사실 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12월 7일 들어서면서 박 정권은 10월 2일부터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구속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하고 학사처벌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지명수배 조치도 해제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10월 12일과 11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정보 기관에 요시찰자로 분류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1973년 당시 서대문경찰서


 

1 부 / 7. 개헌청원 서명운동과 1974년 1월

 

1973년 12월 13일 김관석(NCC 총무), 김수환(추기경), 김홍일(전 신민당 당수),
백낙준(연세대 명예총장),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윤보선(전 대통령),
이병린(전 대한변협 회장), 이인(전 법 무장관),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이희승(전 서울대 문리대 학장), 한경직 (목사), 함석헌(민수협), 김재준(민수협), 천관우(민수협)
등이 모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각하의 적절한 조처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분립체제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발송했다.


12월 24일 시국간담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청원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은 이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이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30인의 서명자 : 장준하(통일당 최고위원), 함석헌(종교인), 법정(불교인), 김동길(연 세대 교수), 김재준(전 한신대 학장),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석, 안병무(한신대 교수), 천관우(전『동아일보』주필), 김지하, 지학순, 박두진(시인),

문동환(한신대 교수), 김정준(한신대 학장), 김찬국(연세대 신학대학장), 문상희(연세대 교수),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

이병린, 계훈제(『씨을의 소리』편집인), 김홍일, 이인, 이상은(고려대 교수), 이호철(소설가), 이정규, 김윤수(이화여대 교수),
김숭경(의사), 홍남순


장준하 선생은 선언문 발표와 더불어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었음을 공포했다.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을 발표하는 장준하


12월 26일 밤, 국무총리 김종필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

장장 1시간 40분에 걸쳐 ‘특별연설’을 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선을 벗어난 행위라고 전제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나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 ...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KSCF에서는 광주에서 동계 전국 모임을 개최하고
박 정권의 독재와 독점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기독학생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처럼 대학이 방학으로 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상치않은 정국 분위기는 전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8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어섰고,

오랜 관습으로 자리잡아 온 신년 하례 인사 등을 통해서  

불과 10일 만인 1월 4일 개헌청원운동본부는 서명자 수가 3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5일에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구영은 유신체제를 ‘삼권귀일(三權歸一)체제’로 평가하며

재야 인사들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문인 및 지식인 61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다수 동포들이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
문학인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며

“미래의 한국 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개헌 서명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 무장경찰에 둘러쌓여 "개헌만이 살 길이다" 고 외치는 신민당 의원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 년 1월 8일 박 정권은 유신 헌법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인 헌법 개정을 발의 제안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회의를 통해서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또는 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백기완 선생을 전격 구속하고
속전속결로 진행된 군법회의 재판을 통해서 징역 15 년과 12 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법회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그 사흘 후에는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함께 구국기도회를 가진 개신교 전도사 이해학 김진홍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전격 구속하고 역시 같은 절차로 징역 15 년과 12 년씩을 선고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대학이 휴업과 조기 방학으로 이어지면서
수업 과정이 부족함에 따라 임시 개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개강 첫 날 유신 반대 시위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김영선 이근후 김구상 등을 전격 구속하고
같은 절차로 각각 징역 7 년에서 5 년을 선고했다.

 

그 닷새 후에는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같은 사정으로 개강하는 첫 날 유신 반대 집회를 벌이자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등
7 명을 전격 구속하고 각각 징역 7 년에서 3 년까지 선고했다.

 

이렇듯 유신 정권은 전쟁 상황에서라야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대통령 긴급조치를
민주인사와 종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동해서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백기완 선생과

연세대 의대 본과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 시위 사건은 내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구속되고 감옥 가는 일이 바로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 오고 있구나 하고 확신했다.

 

마음 한 켠에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벗어 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잠을 못 이루고 날밤을 새운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어쩌다 새벽녘에 잠이 들더라도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소스라쳐 깨어 나기도 했다.

 

춥고 긴긴 밤을 지새우며 드넓은 오산 운암뜰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운 생각을 떨치느라 그야말로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결단을 내리느라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간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 역사로 잊혀져 가는 시절...

그 때 그 시절 사회적 분위기를 김지하의 시 '1974 년 1 월'로 다시금 되새겨 본다.

 
 ◁ 1974 년 1 월 ▷ 
  
 1974 년 1 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꽃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 년 1 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이상 '1974년 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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