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은 성 이삭 대성당 앞 네바 강 왼쪽 제방에 위치해 있다.
1782년부터 1925년까지는 피터 광장(Peter's Square)으로
1925년부터는 데카브리스트 광장 (Decembrists 'Square)으로 불렸다가
2008년부터 상원 광장 (Senatskaya Ploshchad)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상원'은 캐서린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 광장"으로 옮겨진
러시아 제국의 상원을 의미한다.

상원 광장은 동쪽의 해군성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상원 건물과 현재 러시아 헌법재판소 본부 건물이 있다. 
표트르 대제를 기리는 동상인 청동 기마상 기념비는 1782년부터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이곳의 공식 명칭은 '피터 광장'이다.

데카브리스트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상원 광장에서일으킨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 December)에서 기인했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인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파리를 점령한 것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4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1세는 비록 삽질을 거듭하긴 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황제를 따라 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아래의 농노들이 
언젠가 들고 일어나 결국 지배층들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선제적으로 해나가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게 된다.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Alexander N. Muravyov)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Salvation union)이라는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Southern Society),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Northern Society),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된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1779~1831)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상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 대상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 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상원 광장에서 봉기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준비와 조직이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 날부터 피를 보기 꺼려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반란군 3천 명은 총격 끝에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에게 진압당했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장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져 다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00여년 뒤 결국 러시아 제정이 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당하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다 같이 망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 명인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어 가 본 적이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 Union of Salvation 2019 (Decembrist revolt 1825)

한글 자막 제공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청동 기마상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를 기념하는 기마상이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서사시 <청동의 기수>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청동의 기수 / 푸쉬킨>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 (Bronze Horseman)>의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쉬킨은 그를 위하여 3장 476행으로 구성된 대 서사시를 썼다.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엄숙하고 정연한 모습을.

네바 강의 힘찬 흐름을.
강변의 화강암 둑을.
고운 문양 새겨진 철책을.

생각에 잠긴 밤들의 투명한 어둠을.
백야의 섬광을.

시에서 푸쉬킨은 네바 강의 심한 홍수 동안 가난한 사람 예브게니(Evgenii)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묘사한다. 
예브게니는 동상을 저주하고, 그처럼 부적합한 위치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사망시킨 표트르 대제에게 분노한다. 
기수는 살아나면서 도시를 통해 예브게니를 쫓는다. 
이 시는 강 가장자리에 떠 있는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끝난다.

1903년에 예술가 알렉산더 베노이스(Alexandre Benois 1870~1960)는 
그의 삽화와 함께 시집을 출판하여 아르누보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것을 창조했다.
이 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라인홀드 글리에르(Reinhold Glière 1875~1956)는 이를 바탕으로 발레를 안무했고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 1881~1950)의 
교향곡 10번 심포니(1926~7)는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오른쪽에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로마노프 혈통과 결혼한 독일 공주 출신 캐서린(Catherine) 2세는 
궁전 쿠데타를 통해 왕좌에 올라 법적 권리가 없었으며 자신을 
표트르 대제의 정당한 상속자로 대표하고 싶었다.
그녀는 청동기마상의 건축을 주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한 러시아 통치자 계보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청동기마상에 문구를 새겨 넣도록 했다.

전 유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도록 거대한 청동 말의 앞다리가 번쩍 들려 있지만 
실제 동상의 무게를 오랜 세월 지탱하는 것은 뒤쪽의 말 꼬리가 
다리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낸 조각술에 있다고 한다.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

받침대의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
"1782년 캐서린 2세가 페트로 1세에게" 라고 씌여 있다.

표트르 대제(Pyotr Alekseyevich, Peter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 산업· 상업· 기술· 문화 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1770년 I. F. 쉴리가 조각하고 유리 펠튼이 그림

천둥 스톤(Thunder stone)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되는 천둥 석(Thunder stone)은 거대한 원석 돌 위에 
천둥이 내리쳐서 조각을 냈다는 현지 전설에서 이름을 얻었다. 
청동 기마상을 제작한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 1716~1791)는 
원래 위치에서 석재를 조각하고 이동하기를 원했지만 캐서린 대제는 
바위를 절단하지 말고 원형 그대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습지 지형으로 땅이 견고하지 않아서 러시아인들은 거대한 돌을 
운반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마리노스 하버리스(Carburis 1729~1782)그는 볼로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본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다. 
1770년 그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공병단의 장교가 되었다.
하버리스는 노동자들에게 땅이 얼어 붙은 겨울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큰 돌을 얼어 붙은 땅 위로 바다로 끌고 가서 도시로 운송하도록 했다. 
그는 직경 13.5cm (6 인치) 정도의 청동 구체 위를 궤도 위로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개발했다. 
이 과정은 나중에 볼 베어링 발명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위업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장소의 돌을 상원광장으로 가져 오는 데 동물이나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버리스가 그 방법을 고안 한 후, 400 명의 남자가 돌을 옮기는 데 9 개월이 걸렸다.

캐서린 대제는 그들의 작업을 독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천둥석이 바다에 도착하자 천둥석 전용으로 거대한 바지선이 건설되었다. 
이 바지선은 두 대의 대형 전함이 양쪽을 지원해야 했다. 

절단되기 전의 돌의 크기는 7×14×9m였다. 
화강암의 밀도에 따라 무게는 약 1500톤으로 측정되었다 .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는 이 부분을 
잘라서 받침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상당히 적어졌다.

19세기 전설에 따르면 청동 기마상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 
어떠한 적군도 이 도시를 정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의 이름이었던 레닌 그라드가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900일 동안 포위당하는 동안 동상은 모래주머니와 나무 보호소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보호하여 900일 동안의 폭격과 포병을 사실상 온전하게 유지했다. 

 

Opening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Engraving by AK Melnikov, drawing by A.P. Davydov, 1782
표트르 대왕 기념비 개관식. AP Davydov, 1782년 AK Melnikov가 조각하고 A.P. Davydov가 그림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가 디자인한 청동 기마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으며 도시의 설립자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거대한 대리석 위에 뒷다리로 서 있는 
청동 말의 등에 걸터 앉아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상징적인 표트르 대제의 동상과 동상이 올려져 있는 유명한 석조 받침대를 살펴보자.

기념물은 1760년대에 외국인 왕비, 예카테리나 2세가 옛 군주와 자신을 연결시키고 
러시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의뢰한 것이다. 
청동 기마상이 서 있는 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시민들은 힘겨운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에도 이 동상을 보호했고 
여전히 반석 위에서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모습은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가까이 보면 말이 발굽으로 뱀을 짓밟고 있다. 
이 뱀은 반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각상의 세부 묘사, 특히 뒷다리로 서 있는 말 다리의 

불룩 솟은 근육을 눈여겨 보면 팔코네(Falconet)는 이 정도 수준의 사실성을 

구현하기 위해 말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조사했다.

 

1782년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모습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가 성 이삭 대성당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상에서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청동 기마상과 성 이삭 대성당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Ivan Ⅳ)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패기와 야심에 찬 젊은 표트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0년 간은 러시아에 또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보된 행정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문호 개방 등 강력한 국제적 지위를 다져가게 되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공국 표트르 대제가 과감하게 전개한 개혁 정책의 결과였다.

17세기 초 러시아 개혁의 주역이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여러 외국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세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말에 편자를 능수능란하게 박는 일, 주거 공간을 힘들이지 않고 짓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 부대들과 병정놀이를 하거나 기계 기구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정부는 흑해 진출로를 학보하기 위해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가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터키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터키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터키는 당시 그들의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를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다. 
그러므로 함대를 소유하지 않은 러시아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가 이처럼 함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 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 해군 병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를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터키와의 전쟁은 일단락지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터키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계획을 생각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 서유럽의 문화를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포병으로서 이 사절단에 합류해 행동을 같이했다.

1697년 봄, 기묘한 무리들이 서쪽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다. 
마부, 고적수, 나팔수, 행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으며 

관복 차림의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들 중 유난스레 남루하고 초라한 옷을 걸친 표트르는 
행렬 속에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7척이 넘는 장신이었던 그는 큰 키 외에도 턱 부분에 
독특한 혹과 유난스럽게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가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동 행렬은 스웨덴 지배에 있는 발트 해의 리가 항을 지나 프로이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표트르는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도 그의 탁월한 성격은 자주 노출되었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번은 보오르하베의 외과교실에서 해부학 강의를 받던 중 그의 일행이 
시체 관찰을 기피하자 표트르는 느닷없이 이렇게 명령했다.

"저 시체의 힘줄을 입으로 물어뜯어라."
신분노출에 대한 염려보다는 신하들에게 서유럽의 선진 과학을 
많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이처럼 가차 없이 명령했던 것이다. 
그는 과학적이고 지적이며, 나름대로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표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가 영국을 여행할 때 영국은 그를 위해 스피트헤드 앞 바다에서 

대규모의 모의 전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상당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가 영국에 체류할 때 겉옷 하나만 걸치고 월리엄 3세를 방문했으며, 
그가 묵었던 곳은 전쟁 중의 야영장 같았고 고급 식기의 사용법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표트르가 서유럽 여행을 하던 중 169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약 14개월 간의 여행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 뒤 유럽에서는 표트르 대제에 관한 갖가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여행 중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에 후에 그의 신분이 드러났음에도 
유럽 사람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비쳐졌다. 


여러 곳을 다니며 큰 술잔치를 벌이는 습관이나 호색적인 일면 때문에 
그는 우스갯거리로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관찰력을 가졌던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표트르 대제를 '지혜로운 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네바 강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청동 기마상

권력 투쟁으로 보낸 청년기
표트르 1세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이었다.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사람으로, 그에 대한 평가도 가지각색이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후진성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웅이자 동시에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킨 폭군이기도 했다. 
그는 잔인한 숙청이라는 면을 기준으로 하면 이반 4세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Pyotr Alexeyevich Romanov)는 열 살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은 이복형 표도르 3세(Fyodor Ⅲ)를 계승해서 

차르가 되어 43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렇지만 그의 치세는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Alexei)는 두 부인으로부터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알렉세이가 죽고 나서부터 명문가 출신이었던 부인들의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결국 유혈 충돌을 불러왔다. 
표트르의 외가 친척 두 사람이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만성질환으로 인해서 사실상 황제의 직위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던 표트르의 형 
이반 5세(Ivan Alexeyevich Romanov)가 표트르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고 
표트르의 외가인 나르시킨(Narshkin) 가는 권력에서 제외되었다. 
심신이 허약한 청년과 열 살 먹은 소년을 명목상의 차르로 세워 놓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표트르의 이복누나인 소피아(Sofia Alexeyevna)였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을 일반인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알렉세이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표도르 3세가 차르를 계승했을 때 그는 세 살이었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으며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트르는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장난꾸러기였다. 
그는 부근의 상가와 수공업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인쇄, 석공, 목공 일을 배웠다. 
그는 특히 외국을 오가는 항해사들과 무역상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차르가 된 이후에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장난감 무기로 아이들을 무장시켜서 군대를 조직하여 병정놀이를 하는 데 열중했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세 살 위의 아름다운 

에우도키아 로푸키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소피아는 당시의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그녀는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을 쓰고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활했던 표트르는 러시아 민중들의 고통과 
러시아 사회 자체의 후진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선진 유럽 국가를 모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바다를 이용한 교역의 확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발트 해와 흑해로의 진출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그런데 이는 각각 스웨덴과 오스만튀르크가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695년이다. 
차르가 아니라 오스만튀르크와 벌어진 전쟁에 포병 장교 신분으로 종군한 것이다.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돈 강 하구의 튀르크 요새 아조프를 포위하고 거센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고 버텨 냈으며 러시아 군은 상당한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 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러시아 군보다 
특별히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의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과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추진한 개혁에서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1696년에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하자 
그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곧바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표트르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고 나서 유럽으로 파견할 사절단을 조직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 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표트르 자신도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로 
신분을 위장해 함께 장기간의 해외 순방에 나섰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203m)가 넘는 거인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Glaisher Street, Deptford의 표트르 대제 기념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표트르 대제는 1698년 몇 달 동안 영국 런던 남동부 지역 
뎁트포드(Deptford) 왕립 조선소에 머물면서 조선 공부를 하는 동안 꽤 잘 해냈다.  
뎁트포드는 템즈 강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표트르 대제의 체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사절단은 유럽 최고의 산업 현장을 돌면서 필요한 기술을 흡수하고 
뛰어난 외국인 기술고문들을 여러 명 고용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대튀르크 동맹을 결성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후계자가 없는 스페인의 왕좌를 놓고 
계승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와는 제대로 협상을 
해 보지도 못하고 표트르는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본국에서 스트렐치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분쇄되었으나 14개월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표트르는 1699년 그동안 사용하던 러시아식 달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선언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그동안 러시아가 고수해 오던 폐쇄적인 
전통주의를 포기하고 유럽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흑해와 발트 해를 확보해야 하는데, 표트르는 먼저 
튀르크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흑해로의 진출을 뒤로 미루고 
스웨덴이 지배하고 있는 발트 해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스웨덴은 열여덟 살이던 카를 12세 (Karl Ⅻ)가 통치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자신도 스물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 어린 카를 12세를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오스만튀르크와 그의 아조프 점거를 인정하는 선에서 평화 협정을 타결한 다음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시 '잉그리아(Ingria)'라고 불리던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영토로 자신만만하게 진군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카를 12세는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스웨덴 군의 전투력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에 
이제 막 근대화가 시작된 허약한 러시아 군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1700년 최초로 대회전이 벌어진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은 불과 1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에게 격파당해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력이 전사했다. 
이 승리 이후 카를이 표트르를 계속 추격했다면 후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카를은 공격 방향을 돌려 폴란드를 침공했다. 
카를은 폴란드를 상대로 한 일련의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폴란드에 입성했으나 이후 그들 사이에 벌어진 내분에 말려들었다. 
그동안 표트르는 잃었던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전투는 여러 해 후에야 속개되었다. 
폴란드 문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4만 4,000명이라는 대군을 몰아 선공을 가했다. 
이번에 그는 곧바로 모스크바를 향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 군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표트르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카를의 부대를 보충하기 위해 
남하하던 스웨덴 군 병력을 도중에 요격해서 격파해 버렸다. 
그러자 카를은 퇴각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곳의 코사크 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으나 보급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문제였다. 
표트르는 스웨덴 군이 진군하는 방향의 앞쪽으로 넓은 지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펼쳐 
스웨덴 군의 현지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보급도 거의 끊어진 상황에서 1708년 겨울을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서 보낸 스웨덴 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다음 해 여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남쪽에 있는 폴타바 요새를 포위했다. 
스웨덴 군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으며 동맹군인 코사크 기병대는 
러시아 군 기병대의 교란 작전에 말려 자신들의 근거지까지 내주고 멀찌감치 후퇴했다. 
표트르는 폴타바에 4만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병력의 열세와 기병대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에도 
스웨덴 군은 꼬박 이틀 동안 눈부신 선전을 했다.

그렇지만 6월 28일 정오 무렵에 스웨덴 군은 결국 와해되고 카를은 
가까스로 1,500명의 병력만 수습해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 탈출했다. 
표트르가 막강한 스웨덴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그때까지 표트르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유럽 각국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1710년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의 도약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가 꾸준히 그를 부추긴 결과였다.

1711년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발칸으로 남하했다. 
그는 강적 스웨덴을 격파한 기분에 들떠서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정교도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발칸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항복을 선택했다.

아흐메드 3세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아조프 요새를 돌려받고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흑해 함대를 인수받는다는 조건만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덕분에 스웨덴의 카를 12세도 고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표토르 대제의 동상 (Statue of Peter the Great), by Mikhail Chemiakin, 
Petropavlovskaya Fortress, St. Petersburg, Russia

표트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스웨덴과의 전쟁 도중에 시작되었다. 
이 도시가 들어선 네바 강의 하구는 원래 대단히 척박한 지역이었다. 
황량한 습지는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는 지역으로, 
스웨덴 군이 건설한 요새 니엔스칸스(Nyenskans)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표트르는 이 척박한 습지에 미래 러시아의 수도를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1703년 이 지역을 확보하자마자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이전의 표트르는 다혈질이기는 했어도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의 잔혹한 일면이 드러났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석조 건물의 건축을 금지시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여기에 퍼부었다.

그가 투입한 자원에는 스웨덴 출신의 전쟁 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만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하다 죽어 간 

수만 명의 목숨과 바꾼 거대한 위령비였다. 
그는 사람들을 무기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고된 노동을 시켰다. 
질병과 과로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한겨울에 수백 명 단위로 죽어 나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선언되던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상태였으며 스웨덴과의 전쟁도 마무리되지 않아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시점이었지만 
표트르는 그다음 해에 수도 이전을 강행했다.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이미 러시아와 전력 차가 크게 벌어졌는데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줄기차게 전쟁을 지속하다 

1718년 겨울, 노르웨이 원정 중에 전사했다. 
이로써 비로소 두 나라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1721년 표트르는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벌이면서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는 새로운 수도가 들어선 지역에 대해서 장차 스웨덴과의 
소유권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전체를 사들이는 형식을 취했으며, 
핀란드의 점령 지역은 스웨덴에 모두 돌려주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전략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핀란드와의 접경 지역은 
제국의 명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1721년 스웨덴과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표트르는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동방의 황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에게 붙는 '대제(the Great, le Grand)'라는 칭호에는 절차가 수반된다. 
어느 나라든 먼저 국내에서 국민들에게 선출된 대의기관의 의원들이 먼저 의결하고 나서 
다른 국가에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표트르의 경우는 스웨덴과 폴란드가 즉시 이 칭호를 승인했고 점차 유럽 각국이 따랐으며 
마지막까지 승인을 보류하고 있던 프랑스는 그가 죽은 지 25년 후에 외교문서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 칭호를 사용하여 국제적인 공인 절차를 마쳤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근본부터 바꿔놓은 인물로 충분히 
'대제'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뿐 아니라 즉위 초기에 그의 권력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통치 기간 내내 분리주의자들이나 
그 자신의 강압 정치에 반발한 민중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여러 차례의 반란 중에서도 가장 큰 고비는 

민중봉기의 성격이 강한 '불라빈의 반란'이었다. 
대북방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707년에 발생한 이 거센 봉기는 
원인도 표트르였으며 목표도 표트르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표트르의 강압 정치는 강력한 개혁 정책과 맞물려서 고대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농노들의 삶 자체를 위협했으며 지방은 물론이고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조차 도망치는 농노들이 속출했다. 
표트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고수했다. 

그가 도망친 농노들을 추격하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고용하자 농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코사크의 지도자 콘드라티 불라빈(Kondrati Bulavin)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불라빈이 농노를 추격해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현상금 사냥꾼 부대를 기습해 
전멸시키면서 시작된 이 반란은 비참한 상황에 있던 러시아 농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급격히 번져 나갔으며, 여기에 표트르의 개혁에 불만을 가진 성직자와 분리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러시아 남부 지방 전역이 2년 이상 표트르의 통치를 벗어난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었던 개혁 자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표트르의 개혁은 제도, 행정 조직, 군대, 법률 같은 분야뿐 아니라 
권위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린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개혁과 같은 
예민한 분야에서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방법론에서도 
오직 힘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개혁에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남성들이 기르던 수염을 밀어버리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밝은 미래가 약속된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트르의 개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나 개혁에 대한 저항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러시아에서 
관습화되어 버린 권력형 부패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수많은 인사들이 부패 혐의로 처형되거나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표트르의 신임을 받는 
동지나 친구 들이 채웠지만 그들 역시 쫓겨난 사람들만큼이나 부패한 인물들이었다. 
표트르의 측근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개혁의 동지였던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였다. 
멘시코프는 야전에서도 이름을 날려 최종적으로 대원수(Generalissimo)까지 
오르는 인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점령 지역에 새로 만들어진 이조라 공작령 (Izhira, Dukedom of Ingria)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권력형 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했으며 영지에서 가혹한 착취로 원성을 샀다. 
1711년에 표트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사실 표트르로서는 이러한 경고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치였다.

그러나 멘시코프 공작은 2년 후에 다시 10만 루블의 공금을 횡령해 
대형 부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멘시코프가 중병에 걸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표트르는 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투옥했을 것이다. 
그가 극적으로 병에서 회복된 후 부정 행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제 갓 마흔을 넘긴 표트르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트르는 실질적으로 차르가 되었던 스물네 살 이후로 혼자서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표트르의 심신은 젊은 시절부터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는 술에 의존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알코올은 야금야금 그의 정신과 육체를 먹어 들어갔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나타나면서 표트르는 점차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잔인하고 괴팍한 사람이 되어 갔다. 
명석했던 판단력도 급속도로 빛을 잃었다. 
정신적인 결함은 육체적으로도 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면 신경통에 시달리는가 하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시로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했다. 
위험한 상태로 간신히 버텨 오던 상황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는 첫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가 낳은 왕자로, 표트르의 열다섯 자녀 가운데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셋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유일한 아들이었다. 
강제로 왕궁에서 쫓겨난 어머니와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 밑에서 
반동주의적인 성직자들에게 교육받은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러한 아들에게 표트르는 가혹하게 황태자 수업을 강요했다. 
알렉세이는 열세 살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해서 그다음 해에 실제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열여덟 살에는 모스크바 시의 성곽 공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 이후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수행하기 쉽지 않은 임무를 계속 맡겼으며 
어린 알렉세이는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면 표트르는 열정이 부족하다며 아들을 비난하고 알렉세이는 아버지에게 반발했다.

알렉세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과 어울리다 
아예 이마저 포기하고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재되어 있던 부자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알렉세이의 결혼이었다. 
1710년 표트르는 스무 살의 알렉세이를 그보다 네 살 연하인 독일의 명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둘째 딸 샬로트(Chalotte Christine Sofie of Brunswick-Wolfenbuttel)와 결혼시켰다. 
샬로트의 언니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의 카를 6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혼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혼 생활은 당연히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샬로트가 1715년 둘째 아이인 후일의 표트르 2세(Pyotr Alexeyevich)를 낳고는 며칠 만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의 장례식 날 표트르는 아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알렉세이의 반응은 해외 도피였다.

그는 핀란드 출신 정부와 함께 동서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로 피신했으며 
카를 6세는 알렉세이의 말만 듣고 표트르가 아들을 암살하려 한다고 굳게 믿어 
그를 나폴리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부자의 오랜 갈등은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1718년 알렉세이의 측근이나 친구들은 모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반역자 처형 방식에 따라 긴 창으로 꿰어 매달아 놓는 페일 형(Pale)이나 
바퀴에 묶여 온 몸이 부서지는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세이의 어머니 에우도키아는 근거 없는 간통죄로 기소되었으며 
알렉세이도 법정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알렉세이가 정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기필코 옛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끝이 갈라진 채찍으로 등을 맞는 나우트 형(knout)에 처해져 
두 번에 걸쳐 마흔 대를 맞고 나서 이틀 만에 사망했다.

알렉세이의 처형은 망가진 표트르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회복이 불가능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721년 힘겨웠던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고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표트르가 대제의 칭호를 받을 무렵 그는 이미 
세상사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 (Yekaterina I)

표트르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인물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Yekaterina I)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배의 
유일한 방향타인 표트르를 움직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표트르에게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친구 멘시코프가 그에게 선물로 보낸 '성적 노리개' 정도의 존재였다.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人)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핀란드 만 부근을 시찰하던 도중 물에 빠진 병사를 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차가운 물에 뛰어든 것이 병세를 악화시킨 것이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표트르가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후계 절차가 매끄러웠더라면 
러시아는 훨씬 더 일찍 개명한 강대국으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표트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인들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억압적이고 권위적인데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통치자를 섬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표트르는 오직 자신만이 보고 있던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방해가 된다면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처형하거나 생존조차 어려운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아예 그 뿌리를 뽑아 버렸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표트르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
표트르는 그의 개혁의지를 밀고 나가는 데 정말로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국민의 무지와 

용감하게 싸운 기사 정신의 소유자로 보기는 어렵다. 
이반 뇌제와 비교할 때 잔인성에서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를 화나게 만들면 그의 손에 잡힌 모든 물건이 곧 무기였다. 
상대방의 코를 쇠꼬챙이로 쑤셔 찢어버리는가 하면 

고문이나 사형을 시킬 때도 사람을 몹시 괴롭혔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며 죽어간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잔인성은 혈육이나 친지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에브드키아 로푸히나가 고풍스럽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1698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세이도 그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가해 옥에서 죽게 했다. 

그리곤 아들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자신이 설계한 
선박의 진수식에 참여하기 위해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당시 표트르는 리투아니아 농민 출신의 예카테리나라는 여자와의 사이에 
또 다른 자식을 낳고 수년 동안 함께 지냈다. 
1712년에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후 칭호까지 주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뒤에도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표트르는 죽을 때까지 안면신경통에 시달렸고 때로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병과 유사한 병을 앓고 있었으며 중년이 되었을 때는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후에 그는 합병증이 생겨 1725년 2월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의 업적과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과 20세기 스탈린주의자들이 저마다 표트르 대제를 
자신들의 선구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부 역사가들은 표트르 대제를 혁명가로 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역사가들은 점진적인 개혁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표트르가 러시아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통치 형태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슬라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적 풍습과 문화를 경시한 배신자였고 
서구주의자 시각에서는 시대를 바꿔놓은 진정 위대한 영웅이었다. 
이처럼 표트르 대제를 놓고 붙여볼 수 있는 수식어, 정의어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진정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200년 이상이 된 지금도 그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전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업적 중 일부분에 대한 것만 일방적인 견해로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표트르 자신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러시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러시아가 운명의 전환점에 있을 때 공을 세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에 기독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한 키예프 대공 

블라지미르도 분명히 나라를 구했던 인물이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이반 뇌제도 당시 국가를 

몰락의 구덩이에서 구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표트르 대제가 유난스럽게 두드러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러시아가 

세계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으며 조야한 농담을 즐기기는 했으나 즐겁게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통치자로서 표트르는 전제적 영주의 방법, 즉 채찍과 자의적인 지배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이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제군주로 늘상 행동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 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있고 근면했으며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 교역· 교육· 과학· 문화· 대외 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영상] 청동 기마상 (Bronze Horseman)

 

 

 

성 이삭 성당의 나무 모형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 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 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성 이삭 대성당 모형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 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성당을 만들 때의 목재 틀

늪지대 위에 대규모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다. 
기초을 다지기 위해서 총 2만 4천 개의 말뚝을 밑에 박고 그 위에 성당을 올렸다.
40만 명이 동원되어 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몽페랑 흉상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은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 감독한 프랑스인으로 약관의 20대에 전 유럽인이 참가한 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간 러시아에서 성 이삭 대성당 및 성당 주위의 마린스키 궁전 등 건물과 
겨울궁전 내 지금의 1호 전시실인 표트르 대제의 방, 궁전광장 등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고 러시아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러시아에 묻히길 원했지만 당시는 이미 다른 황제인 알렉산드로 2세가 
그의 시신을 그의 조국 파리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성 이삭 성당 내부

내부 장식은 22명의 예술가에 의해 꾸며졌는데,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중앙 큐폴라에 그려진 카를 브리료프의 작품은 꼭 한 번 볼 만한 그림이다. 
모자이크도 63점이나 있고 그중 '예언자 에제키에리의 환상', 
'대홍수', '최후의 심판'이 볼 만하다.
성당을 장식하는 300점 이상의 부조와 동상, 무게가 10t인 3개의 문도 훌륭하다.

 

중앙홀의 정면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레이아웃은 18 세기 정교회 종교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부 면적은 4,000 평방 미터가 넘는다.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사원 입구는 건물의 남쪽, 북쪽 및 서쪽에 3 개의 큰 문이 있다.

중앙홀 정면의 화려한 전경으로 녹색의 화강암 기둥과 가운데 
회중석으로 들어가는 왕의 문 (Royal Doors) 주변이 엄청 화려하다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 성상화 칸막이) 중앙 황금의 문 안쪽 회중석에 
스테인드 글래스로 제작한 예수상이 돋보인다.

 

정교회에서 부활절에만 열리는 황금의 성문(Holy Doors)

궁정문(Royal doors) 사이로 1843년 뮌헨에서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보인다. 
특이한 점은 흔히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동방정교회의 색 대신 
카톨릭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대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금박을 입힌 조각, 공작석과 청금석 기둥의 아름다움, 
모자이크 이미지 등 다양하고 화려한 예술품들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주요 제단의 왕실 문이 열리면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제단 
스테인드 글래스 이미지에 관심이 끌리게 된다.

이는 녹색 에메랄드와 옅은 보라색 자수정으로 장식된 금 자수가 있는 
자주색 망토를 입고 황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단 창문의 거의 전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틀 안에서 곧 구주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것 같다. 

창 아래 부분은 보기에 간신히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관객을 향해 떠다니고 있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의 손에는 흰 십자가가 있는 흔들리는 주홍색 깃발이 있다. 

부활하신 구주의 웅장한 차원은 이미지의 중요성과 지배적인 위치를 나타낸다.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 윗부분은 후광 광선의 역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색을 밝게 하여 더 밝은 조명으로 강조된다. 
유사한 장식 요소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지만 정교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면적이 28.5 평방미터인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모습.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 글라스 창 중 하나이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창이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에 있는 보석은 납의 도움으로 삽입된 볼록한 프리즘이다. 
후광의 색상 효과는 3층 유리의 개별 레이어가 부분적으로 제거되어 
노란색이 녹색 색조를 띠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뮌헨의 장인들은 또한 단색 유리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림의 구름은 단단한 스모키 그레이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십자가의 배너는 
루비로 만들어졌으며 배너의 십자가는 흰색으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의 일부는 특수 페인트로 칠하고 
머플로에서 소성한 다음 기계 가공을 거쳤다. 

사람의 얼굴과 노출된 인체 부위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소위 '양피지' 유리를 발명했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은 막대로 연결된 두 개의 금속 프레임으로 구성된다. 
두꺼운 거울 유리가 외부 유리에 삽입되고 스테인드 유리 창 자체는 
납 납땜으로 고정된 컬러 반투명 유리 요소로 내부 프레임에 장착된다. 
여닫이 창에서는 금속 패스너로 제자리에 고정된다. 

 

녹색의 화강암 기둥 사이에 성인들의 성상화가 많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성모자 상, 가운데 성냐 카테리나, 왼쪽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들의 성상화들

 

천장화 <최후의 심판>

 

러시아 정교회의 특징은 홀과 회중석 사이에 이코노스타시스가 있고 
가운데 황금의 문이 설치되어 카톨릭 교회로 착각할 수도 있다.

 

중앙홀 상단에 있는 <최후의 만찬> 성상화

 

우측홀 아래쪽에도 회중석이 설치되어 가운데 성상화 칸막이 이코노스타시스가 보이고 
중앙의 문을 왕의 문(Royal Doors) 또는 황금의 문이라 부른다.

 

동쪽에는 고대 러시아 교회의 제단 장벽과 같이 주요 제단과 성상화 칸막이(iconostasis)가 있다. 
성상화 칸막이의 세 개의 큰 아치는 교회의 제단 입구로 사용된다. 
중앙 아치는 두 개의 청금석 기둥과 왕의 문(Royal Doors)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호화로운 장식에서 메인 돔의 드럼 디자인은 매우 중요하다. 
벽면에서 튀어 나온 열두 천사상은 대리석 기둥과 함께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고 드럼의 명확한 분할에 기여한다. 


전기 도금법으로 만든 조각품 사이에는 열두 사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북창에 의해 조명이 잘 비추는 천사의 금박이 벽 배경에 
밝은 점으로 돋보이며 그림과 함께 풍부한 장식 효과를 만든다.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816 평방 미터의 면적을 가진 "영광의 성모"광장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캔버스의 원형 구성은 사원의 건축에 ​​의해 결정된다. 
장식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난간은 건축 형태에서 
그림 같은 형태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다. 
환상은 드럼의 엔테블러처를 증가시키고, 이미지가 없는 플라폰드의 중심은 
공기 공간의 깊이와 궁창의 무한함을 불러 일으킨다. 

 

다양한 유형의 예술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본 돔의 
드럼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대성당 내부 장식의 중요한 특징은 금으로 장식된 세부 사항, 
청동 주물, 부조 장식, 기둥의 베이스와 수도, 메달리온, 케이슨, 화환 등이다. 
총 300kg의 금이 대성당의 금박에 사용되었고 또 다른 100kg은 돔의 금에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은 다양한 유형의 장식 및 응용 예술과 건축을 통합 한 놀라운 예이다. 
수많은 그림, 모자이크, 조각, 유색 돌과 금박의 환상적인 조합은 
풍부하고 포화된 색 구성표를 만든다. 

 

성당 내부에는 천장과 벽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많은 이콘화들과 
성인, 종교 스토리가 담긴 그림들이 가득하다. 
이 당시 유명했던 러시아 화가 브를료프의 그림들이 많이 있다.

 

메인 돔 플라폰드의 구성은 딜레브(I. Dylev)가 만든 비둘기 조각으로 완성된다.
86.5m 높이의 금고 아래를 맴돌며 성령의 상징이다. 
비둘기 조각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84kg이고 비둘기의 날개 길이는 2.06m이다. 
조각품의 빛은 전기 도금 방법으로 적용된 은층으로 제공된다.

 

돔 중앙의 비둘기 
비둘기는 기독교 삼위일체 중 성령을 의미한다.
비둘기의 시선으로 내려오면 성모 마리라가 있고 세레 요한도 있다.

 

약 3톤의 무게로 투각 도금된 샹들리에

 

실내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 내부 장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사도, 선지자, 천사, 돔의 북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es)가 있다. 
조각, 건축 및 회화의 합성의 예는 르네상스의 전통으로 만들어진 메인 돔의 드럼이다. 
12개의 천사상이 있는 사도들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다. 
천사 위에는 조각상과 하나의 수직을 형성하는 기둥이 있다. 
이 솔루션은 건축 구성의 가벼움과 무결성을 강조한다.

 

성전 서쪽 금고에 있는 선지자들과 동쪽에 있는 천사들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림, 모자이크 및 조각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코노스타시스의 장식이 특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은 다섯 인물로 구성된다. 
그룹의 논리적이고 구성적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양손을 들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전체 인물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주님의 열망이 위쪽으로 향한 동기는 왼쪽 천사의 포즈를 성공적으로 해결한다. 

이 조각품은 안정적이고 명확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석한 군인들의 모습다. 
그들은 이탈리아 바로크 조각의 영향으로 시각적인 균형을 이룬다. 
주님이 뻗은 손의 모습은 유난히 가볍고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며 
선지자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금고, 돔의 드럼 및 이코노스타시스의 조각은 전기 도금 방법을 사용한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성 이삭 대성당 건설 중에 처음으로 이러한 규모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용기에 황산구리 용액으로 흑연으로 덮인 미래 조각품이 배치된다. 
양극은 그것에 연결되고 전기 배터리의 음극은 황산염(vitriol)로 낮아진 구리판에 연결된다. 
전류가 흐르면 조각된 흑연의 얇은 층에 구리가 증착된다. 
상대적으로 얇은 구리 층으로 인해 전기 주조 조각은 상당히 가볍다. 

이를 통해 몽페랑(Montferrand)은 대성당의 질량을 줄이고 정착지의 불균일성을 완화할 수 있었다. 
전기 도금 작업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공장에서 수행되었다. 
몽페랑의 제안에 따라 금고의 조각은 벽돌 세공이 아니라 
장식적인 내부 금고를 형성하는 특수 금속 구조물에 부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건축 관행에서 볼 때 혁신이었다.

사원 문에 새겨진 조각은 청동으로 주조되었고 장식적인 푸른 녹으로 덮여 있었다. 
성 이삭 대성당에서 러시아 조각가들이 만든 350 개 이상의 작품은 
19 세기의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플라스틱의 독특한 컬렉션을 나타낸다.

 

러시아의 조각가 이반 비탈리(I.P. Vitali)가 제작한 여러 모양의 부조로 장식된 
3개의 각 오크 문 위에는 비문의 의미를 나타내는 줄거리가 있다. 
넓은 망토를 입고 정력적으로 논쟁하는 남자와 침착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철학자,
명상으로 가득찬 노인 아테네 인의 긴장된 모습,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구성을 결합한 바울 자신의 모습이 있다. 

 

북쪽 문의 부조는 흥미롭다. 
사원의 모든 내부 문에는 둥근 메달의 틈새와 흉상이 많이 있다. 
비탈리(Vitali)와 그의 조수는 기존의 이상화 된 이미지와 크게 다른 여러 이미지를 만들었다. 
많은 흉상은 누군가의 특정 기능을 재현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장식용 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43년 몽페랑(O. Montferrand)이 개발한 실내 장식 
프로젝트가 승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석재 샘플이 선택되었다. 


성당 내부의 바닥은 밝고 어두운 회색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으로 된 석판으로 포장되었다. 
인테리어의 주요 건축 부문에 따라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 줄무늬가 디자인을 강조한다. 
돔 아래 바닥의 중앙 부분은 티비디안 대리석의 화려한 대리석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벽과 철탑은 쇼크샤(Shoksha) 반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코린토스 양식(Corinthian)의 수많은 플루트 기둥은 분홍색 
티비디안(Tivdian)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인테리어 장식 솔루션의 주요 색조를 정의한다. 
기둥의 도금한 수도 수준을 지나가는 프리즈의 황기도 그것으로 만들어진다. 
녹색 제노아(Genoese)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직사각형 프로파일 슬래브 형태의 
노란색 시에나(Siena) 대리석은 4 개의 중앙 철탑을 장식하여 따뜻한 색조로 내부를 활기차게 만든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주요 이콘스타시스 앞에는 쇼크샤(Shoksha) 반암 석판이 놓여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처마 장식 위에는 대성당의 다락방과 아치형 천장과 돔의 치장 벽토, 
"석고"라고도 불리는 인조 대리석이 있다. 
이 재료의 주성분은 초크, 설화 석고, 석회, 시멘트, 

대리석 칩 및 유색 안료를 포함하는 세립 석고이다. 


덩어리를 벽에 적용하고 경화 후 착색된 돌을 모방하기 위해 주어진 패턴에 따라 
오목한 부분을 긁어 추가 안료가 도입되어 자연석의 정맥과 내포물이 생겼다. 
인조 대리석은 부석과 백랍 재로 수작업으로 연마하고 

습지 말꼬리 식물의 줄기로 최종 광택을 내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일반적으로 성 이삭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뛰어난 광채와 다양한 마감재로 놀랍다. 
벽 클래딩에는 다소 밝은 석재가 사용되었지만 

색상 대비가 능숙하게 분포되어 잡 색감을 만들지 않는다. 
다양한 유형의 석재가 건물의 건축물을 강조한다. 
따라서 다른 색상의 도움으로 주문의 요소가 강조된다. 


분홍색 기둥은 벽의 흰색 표면에서 명확하게 읽히고 엔타블레이처의 색상은 
어두운 반암으로 명확하게 윤곽이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사원 내부는 엄숙함과 축제의 느낌을 준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말라카이트는 불투명하고 깨지기 쉬우며 매우 아름다운 돌로 
밝은 청록색에서 새틴 광택이 있는 짙은 녹색에 이르기까지 색상이 다양하며 
밝은 말라카이트는 어두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미네랄은 쉽게 처리되고 연마된다. 

러시아에서는 18세기에 우랄에서 많은 공작석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구리 광산의 활발한 개발과 관련이 있다. 
화학적 조성 측면에서 말라카이트는 구리의 수성 탄산염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소위 "새싹"이라고 불리는 
둥근 형태의 형태로 가장 자주 발견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왕실 문을 둘러싸는 기둥에는 황금빛 반짝임이 있는 진한 파란색 바다크 산 

청금석이 늘어서 있으며, 이는 품질면에서 세계 최고로 간주된다. 
아프간 청금석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색이 매우 강하며 
섭씨 1000도 이상 가열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화가들이 이 돌을 사용하여 때때로 퇴색하지 않는 군청색 페인트를 만들었다. 
성 이삭 대성당과 같은 규모에서 청금석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청금석 기둥의 높이는 약 5m, 지름은 0.5m이다.

기둥의 표면은 이 돌의 취약성 때문에 사용된 "러시아 모자이크"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되었다. 
돌은 몇 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판으로 절단되었다. 
그런 다음 돌의 패턴에 따라 잘라내어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고 
개별 판 사이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조정했다. 
세트는 뜨거운 왁스와 로진매스틱을 사용하여 금속 또는 석재 주형에 접착되었으며, 
불규칙한 부분은 매끄럽고 연마되었다.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아주 작은 돌들을 색깔별로 붙여서 만든 성화로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내부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과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 이름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믿음의 조상의 아들’이지 
그리스정교나 동방정교, 혹은 카돌릭에서 말하는 성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 이삭은 ‘이삭 달마시안’이라고도 불리우는 
지중해 북동쪽의 작은 나라 달마시아의 성인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그 먼 곳의 성인의 이름을 이 성당에다가 가져다 붙였을까? 
성 이삭의 축일이 5월 30일이었는데 그 날이 바로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란다. 
표면적으로는 정교 성인을 위한 성당을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지었지만 
그 저의에는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첫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설계 공모를 몇 차례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182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인 20대 후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엄한 건물을 원하자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m 높이 돔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운 도시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지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으면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 m, 두께 26~28 cm인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울 원기둥 48개는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 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을 세웠고,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상으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40년 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사회 치고 역술을 즐기는 러시아에서 
당시의 유명한 점장이가 성당이 완공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초창기에 예언했다는 것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튀어 나온 건물의 주요 볼륨 모서리에는 4개의 
작은 종탑이 있어 사원의 실루엣을 성공적으로 보완한다. 
그들은 종탑 자체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는 
가벼운 금박 돔으로 완성되었으므로 메인 돔보다 훨씬 작다. 
대성당의 피라미드 구조로 인해 메인 돔이 있는 거대한 드럼 위로 
역동성과 열망이 생기고 건물 전체가 주변 공간과 연결된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돔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삭 대성당의 돔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열고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둥과 벽에서 총알자국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교용 건물로서의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대성당이 있다. 
공원을 벗어나 네바강 쪽으로 나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세나츠카야 광장 복판에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성당을 마주 보며 세워져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2세기 로마 대리석상 '파르네스의 헤라클레스' 복제품이 서 있다.
조금 지친듯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씌운 자기 몽둥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원엔 고골리부터 글린카, 고르바초프에 이르는 여러 작가, 정치인의 조각상도 있다.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정면은 높이 17m, 무게 114 톤의 화강암 기둥이 있는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은 사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화강암 기둥 위에 설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 (St. Isaac 's Cathedral)은 세련된 화강암 기둥과 대리석이 사용된 
외부 장식에 있는 러시아 고전주의의 기념물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현관의 짙은 빨간색 기둥, 메인 돔의 열주 및 회색 대리석 벽 클래딩과 
금박 돔이 있는 건물 지하의 멋진 조합은 전체 구조에 의식적인 느낌을 준다. 

대성당의 현관은 웅장함과 고귀함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6열로 된 현관 하나는 네바(Neva) 강과 청동 기수(Bronze Horseman)상을 향해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 이삭 광장(St. Isaac 's Square)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성전의 두 입구는 도시 계획 기능으로 인해 제단과 관련하여 측면으로 판명되었다. 
성전의 제단은 서쪽에 대칭으로 반복되는 8열 현관으로 외부에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벽의 매끄러운 평면은 상단에 거대한 판금과 

볼류트가 있는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잘린다. 
건물의 웅장함한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건축가 몽페랑은 창문과 문의 크기를 
엄청나게 늘려 사원의 실제 크기에 대한 생각을 왜곡했다. 
동쪽 외관을 제외하고 세 개의 외부 문은 각각 

42평방 미터 크기의 현관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벽의 전체 평면의 1/3은 불필요하게 주요 주문보다 

우세한 거대한 다락방으로 채워져 있다. 
그 크기는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의 동쪽 정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봉헌된 부분은 해체할 수 없었다. 
몽페랑은 4개의 종탑의 수직 관절과 벽의 윗부분에 모돈이 있는 
수평 처마 장식으로 거대한 다락방을 다소 부드럽게 했다. 
모서리에 위치한 기둥은 건물의 주요 구획의 수직적 특성을 강조한다. 

성 이삭 대성당은 기념비적이며 장식적인 예술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성당의 건축은 회화 및 조각과 직접적인 예술적 관계에 있다. 
외관의 장식용 솔루션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조각에 의해 결정된다. 

관람 파트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매표소에서 각각 따로 표를 판매한다. 
ISIC 카드 소지자 기준으로 두 곳 모두 입장하는데 300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한 곳은 콜로네이드. 즉 성당 돔 지붕 테두리에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나머지 한 곳이 
성당 내부 겸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에서는 200루블에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성당 한쪽 구석에서 200루블에 기념 주화를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다.

내부관람 시 특정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여느 정교회 성당이 그러하듯 오후 6시에 매표소가 문을 닫은 뒤로는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가 시작되고, 관광객 또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단 이때부터는 기도예식을 진행하므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고, 
최대한 조용히 둘러보다가 나감을 추천한다. 
이때에는 당연하게도 여성 관광객들은 정교회 규칙에 따라 머리 부분에 천을 둘러야 한다.

 

성 이삭 성당 3D 레이아웃

메인 종은 이삭의 이미지와 표트르 1세부터 니콜라스 1 세까지 
러시아 주권을 묘사하는 5개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외관 장식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빼어나다.
페디먼트 옅은 부조, 천사 동상, 외부 문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사원의 각 건축 세부 사항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면은 흉내낼 수 없는 조각 주제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돔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돔을 받치는 각 기둥은 특별히 개발된 설계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100kg의 순금이 기둥의 도금에 사용되었다. 
대성당 콜로네이드는 도심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다. 
대성당의 돔은 핀란드 만에서도 볼 수 있다.

평일, 공휴일 및 일요일에 하루 16시간 동안 4만 농노가 역사적인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농노 건축업자의 4분의 1이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842년에 대성당은 3,200만 은 루블을 사용하여 세워졌다. 
대성당은 1858년 5월 30일에 봉헌되었고 예배를 위해 개장했다.

 

사원의 돔

건축가 몽페랑(Montferrand)은 40년 동안 장기 건설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점쟁이는 사원이 건축 된 후 건축가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몽페랑은 건축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몽페랑은 작업 완료 후 한 달 남짓 후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2 세가 성전을 조사하던 중 성도들의 조각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달마티아의 이삭, 몽페랑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24천사가 돔 아랫부분을 에워싸고 있다. 
이 천사상은 거푸집에 지어부어 만드는 전통적 청동 주물 방식이 아니라 
전기 도금법을 응용해 정밀하게 뜨는 전기주물(electrotyping) 방식을 처음 적용한 동상이라고 한다.

돔에 금을 입힐 때도 당시로는 첨단 방식인 스프레이 페인팅을 했는데 
금 녹이는 용해액에 수은이 함유돼 금물을 뿌리던 인부 60명이 

수은 증기를 쐬고 중독돼 죽었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공습의 표적이 되지 않게 하려고 돔에 잿빛 칠을 했다. ​
돔 아래 둥글게 난간을 두른 곳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전망대이다.

 

정면 윗쪽의 삼각박공 조각

장식 조각의 위치는 건물의 주요 부분에 해당하여 별도의 건축 덩어리를 통합하고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부드럽게 하여 
구조의 개별 요소의 역할과 중요성을 높여 준다. 

19세기 초 건물의 엄격함과 고상한 단순함은 화려함과 효과를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벽의 가소성을 강화하여 페디먼트의 매끄러운 들판을 복잡한 옅은 부조로 채운다. 
이 모든 것이 성 이삭 대성당의 외부 장식에 완전히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성전 내부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외부 조각 

네 귀퉁이에 ​천사상과 불 밝히는 받침대를 세웠다.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조각품은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정교회와 러시아 군주제, 러시아 차르의 숭배를 강조했다.

 

외부 조각

 

북쪽 삼각박공 조각

네바 강 쪽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북쪽 삼각박공에 새긴 부조상의 주제는 
조각가 ‘레 무아(F. Lemer)’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중앙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이고 양쪽에는 천사상과 무덤을 지키는 군인과 여인들이 보인다.  
박공 상부에는 제자 요한 동상, 왼쪽에는 베드로, 오른쪽에는 바울의 동상이 있다
아래 길게 새긴 글귀는 "신이여, 왕이 당신의 권능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이다. 
'왕'은 표트르대제를 가리킨다.

 

남쪽 삼각박공

남쪽 현관의 벽에는 성모 마리아와 자녀, 측면에는 동방 박사가 있다. 
거대한 청동 고부조의 변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강력한 금속 보강재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많은 핀으로 고정되었다. 
덕분에 높은 부조는 처마 장식에 놓이지 않고 대리석 클래딩을 파괴하지 않는다. 

대성당의 현관은 사도의 부조와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는 램프로 천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완성하고 
메인 돔의 난간에는 24개의 천사 동상이 있다. 

 

동쪽 삼각박공

4면 박공마다 부조상을 새겼는데 동쪽 박공은 성 이삭이 4세기 로마황제 발렌스를 
가로막고 서서 계속 가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리는 장면이다. 
조각과 건축 형태의 합성 관점에서 볼 때 동부 현관의 구호가 가장 성공적이다. 

 

사도 요한 조각

박공 위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 한다.

 

4면 박공을 따라  열 두 명의 사도상이 서 있는데 사진 왼쪽이 베드로, 오른쪽이 바울이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서쪽 현관 "이삭(Isaac)은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축복합니다"의 
높은 부조는 엄격하게 대칭으로, 차분하게 지어졌다. 
부조의 구석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모형이 손에 든 골동품 토가에 
몽페랑(O. Montferrand)의 조각상이 있다.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네 명의 전도자의 상징이 있는 조각이 있다. 
서쪽에는 사자가 있는 마가, 남쪽에는 천사가 있는 마태, 
북쪽에는 독수리가 있는 요한, 동쪽에는 누가가 있는 송아지. 
북부 페디먼트의 성 베드로, 폴 및 전도자 요한은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9개는 청동으로 주조도었다.

 

외부 조각 - 천사상

천사상은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천사의 옷과 날개가 벽에서 약간 튀어 나와 조각품이 점차 
벽면으로 이동하고 천사는 유기적인 건축 세부 사항처럼 보인다. 
다락방 천사와 램프가 달린 천사는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며 인공 녹청으로 덮여 있다.

 

풍부한 야외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의 외관에 시각적으로 
과부하가 걸리지만 동시에 화려함과 엄숙함을 선사한다. 

 

정면에 선 코린트식 기둥이 웅장하다. 

한 개 무게가 많게는 114톤이나 되는 붉은 화강암 기둥이 모두 112개다.​ 
중앙 돔은 ​순금을 입힌 것으로도 유명하다. 
돔 성당으로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과 함께 세계 3대 성당에 꼽힌다고 한다.

 

붉은 화강암의 굵은 원주들이 받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뛰어난 건축 기념물 중 성 이삭 대성당은 건축 및 장식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색 돌이 비정상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그들은 화강암, 다양한 유형의 대리석, 쇼크샤(Shoksha) 반암, 각력암(breccia), 
순지트(shungite) 슬레이트, 공작석 및 청금석을 사용했다. 

건축가 몽페랑은 거친 나뭇결의 핀란드 화강암인 라파키비(Rapakivi) 화강암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라파키비 화강암은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블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이 돌은 대성당의 주요 구조인 기초, 기단 및 112개의 기둥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화강암은 1740년대부터 개발된 거대한 비보르크 산괴의 영토에서 채굴되었다. 
피털락(Piterlax) 채석장은 핀란드 만 해안 근처의 여러 섬에 위치해 있어 
석재 블록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쉽게 운송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물에 의해 대성당의 건설 현장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의 기단 블록과 기둥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연마는 돌을 풍화로부터 보호하고 습기 침투를 방지하며 멋진 장식 효과를 주었다. 
붉은 화강암 기둥은 대리석 벽 클래딩의 밝은 회색 배경에 선명하게 눈에 띄며 
돔의 금과 결합하여 우아한 색 구성표를 나타낸다.  
따라서 성 이삭 대성당을 건설하는 동안 화강암은 

건설적인 것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다양한 종류의 대리석이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돌들은 다양한 색상이 될 수 있다. 
유색 대리석은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거나 줄무늬가 있다. 
처리하기 쉽지만 내구성이 떨어진다. 
대리석은 대기의 온도, 습도, 이산화황의 급격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건축에서는 외관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 이삭 대성당은 외관과 내부가 대리석으로 된 몇 안 되는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은 성당의 정면에 사용되었다. 
이 돌의 퇴적물은 러스킬라 마을 근처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8 세기 중반부터 개발되었다. 
러스킬라 대리석 채석장은 밝은 황록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돌을 제공했다. 
대리석은 색상과 구조가 균일하지 않은 패턴으로 처리되어 쉽게 처리되고 거울 광택을 냈다. 


그러나 러스킬라 대리석은 내후성이 충분하지 않으며 외부 장식에 사용될 때 중요한 단점이 있다. 
약 50-60 년 후에 부분 또는 전체 교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이삭 대성당의 정면은 그것과 마주하고 있으며, 
3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외부 문이 새겨진 문이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밝고 어두운 회색 대리석은 비스듬한 바둑판 케이지 형태로 성전 바닥을 포장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대성당 장식에서 티브디아(Tivdia) 대리석은 티브디아 마을 
북쪽의 칼렐리아(Karelia)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벨라야 고라(Belaya Gora) 광상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벨로고르스크(Belogorsk)라고 불렸다. 
색상에서 분홍색과 빨간색 톤이 우세한 것은 미네랄 적철광의 존재 때문이다. 
이 대리석은 석영 함량이 높기 때문에 매우 단단하며 가공 정도면에서 가장 복잡한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당 내부에는 러시아산 석재와 함께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수입된 석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선 흰색 이탈리아 세라베초 대리석으로 벽이 마주보고 있다.
짙은 회 녹색 제노바와 노란색 시에나 대리석도 이탈리아에서 구입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붉은색 그리오토(griotto) 대리석은 프랑스 남부에서 가져왔다. 
이 돌은 짙은 체리 레드 또는 짙은 정맥과 작은 방해석 반점이 있는 밝은 빨간색이 매우 눈길을 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실내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돌 바위가 장식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쇼크샤(Shoksha) 반암은 진한 빨강색 또는 체리색을 띠고 규암 그룹에 속한다. 
주된 암석 형성 물질은 석영이며, 그 입자는 석영 물질에 의해 밀도가 높은 덩어리로 접합된다.
색상은 철 안료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므로 규암은 대부분 빨간색, 분홍색 또는 갈색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석재가 채굴된 쇼크신스코예 광상은 러시아에서 200년 넘게 알려져 왔으며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오네가 호수 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구조상 쇼크샤 반암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내후성이 뛰어나다. 
가공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완벽하게 경면 마무리로 연마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카렐리야(Karelia)에서는 각력암(breccia)도 채굴되었으며 복잡한 구성과 
구조의 암석으로 건물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밀한 백운석-사문석 물질로 단단히 접합된 디아베이스 포르피라이트의 작은 조각으로 구성된다. 
이전에는이 ​​품종을 대리석이라고 했지만 더 취약했다. 
각력암의 추출 및 가공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큰 블록이 떨어져 나갔을 때 돌은 상당히 강한 단일체의 인상을 주었지만, 
추가 가공, 특히 연마할 때 다양한 크기의 조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1m 40cm 높이의 벽과 철탑의 지하 부분에는 흰색 세라베조(Seravezzo)와 
분홍색 티브디안(Tivdian) 대리석이 있다. 
티브디안 광물 프레임에는 직사각형의 수평으로 길쭉한 패널과 둥근 격력암 메달이 있다. 
주각은 넓은 슬레이트 주각으로 바닥에서 끝나며 회색 대리석 바닥으로의 일종의 전환 역할을 한다. 

세라베조 대리석의 벽에는 약간 칙칙한 색조가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하게 발음되는 패턴이 있다. 
흰색 카라라 대리석은 주 아이콘과 부 아이콘을 마주 보는 데 사용된다. 
주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의 철탑 벽감과 난간 세부 사항도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주요 제단 측벽의 대리석 조각은 특별한 우아함으로 구별된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성당에는 3개의 청동으로 만든 대형 문이 3개 있는데 하나의 무게가 10톤 이라고 한다.
성경의 내용으로 장식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출입문은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든 출입문과 문에 새긴 정교한 조각들은 
하나의 청동주물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성 이삭 성당은 옥상 전망대를 유료로 개방하고 있다. 
원통형의 125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10개 계단마다 번호가 쓰여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 전망대에 올라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 지는데 
도시를 한눈에 볼수 있어 인기가 있는 곳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의 앞쪽의 첨탑이 구 해군성 본부 건물이고 뒤쪽의 첨탑이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의 피터와 폴 대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남쪽 방향으로 멀리 푸른 돔이 보이는 곳이 카잔 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 뒤쪽에 황금색 돔과 첨탑이 보이는 곳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일명 : 피의 구원성당)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의 지붕에는 중앙 꾸뽈(돔)과 작은 꾸뽈(돔) 4개가 있는데, 
꾸뽈은 모두 붉은색 화강암 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외부

 

 

 

그리스도 부활성당 내부

이 성당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모자이크 화'이다. 
지금 사진으로 보는 모든 그림들이 다 모자이크 화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모자이크화로 되어 있다.
벽화는 예수의 행적과,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모자이크 그림 스케치를 하는 데에만 32명의 화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장식에는 많은 화가, 모자이크 예술가, 요업 기술자, 유약 기술자들이 참여하였다.
외부 장식에는 모자이크가 광범위하게 쓰였고, 
둥근 지붕들은 귀금속 성분의 유약으로 칠해졌으며, 
천막 모양의 지붕들은 채색 기와로 씌워졌다.
그리스도 부활교회가 유명한 것은 308점의 현란한 모자이크 작품 장식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성당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1818~1881)가 암살당한 장소다.
성당 안에서 상징적인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기둥에 쓰인 돌들은 우랄 지역의 귀한 석재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로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선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나키스트에게 1881년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1861년 발표한 

농노 해방령이며 이 외에도 법률 제도를 재조직하고 지역 재판관을 

선출제로 바꾸었으며 가혹한 제도들을 폐지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르 2세는 '알렉산드르 해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지역 자치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군사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편했으며 귀족들의 특권 일부를 삭제하고 대학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썼다.

대외적으로 그는 미국에 알래스카를 판매했으며 나폴레옹 3세나 빅토리아 여왕,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같은 유럽 내 여러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평화를 추구했다. 
1872년 그는 삼제동맹에 가입해 유럽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발칸반도의 여러 슬라브 국가들과 연합해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시베리아, 캅카스 산맥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투르키스탄을 병합했다. 


그는 동방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는데도 앞장섰다. 
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위기는 폴란드 지역에서 발생한 1863년의 1월 봉기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 제국 내의 폴란드 영토에 별도의 
입법 기구를 마련하는 대신 그 입법 기구를 러시아 제국 직속으로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알렉산드르 2세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나약하고 선량한 기질의 인물로서 정책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도 더 반동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크리미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 제도의 폐지였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농노 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은 농노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요가 대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지주들이 솔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길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더욱 자극했고,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 토론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들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전에 
“아래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편이 더 좋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 측면에서 보기

농노 해방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는 이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농노 해방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금액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토지가 개인에게 분양된 것이 아니라 
농민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었으며,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들에게 납세 의무와 토지 상환금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공동체의 기능을 상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농노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 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고, 
지주들이 누렸던 권위도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은 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조직되어 재편되었다. 
젬스트보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 세 계층이 대의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에서는 주민들의 복지에 관한 사항만을 주로 다루었으며 
일반 행정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이 맡았다. 


젬스트보에서는 기구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젬스트보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치러졌지만 

자치의 원칙이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지방의 생활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사회계층이 협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에게 42%, 농민에게 38%,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는 20%가 배정되었으며, 도로 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과 같은 뒤처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지방행정 못지않게 많이 바뀐 곳은 법원이었다. 
계급차별주의 원칙을 근거로 한 개혁 이전의 재판은 권위주의와 
재화주의에 물들어 있는 재판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행해졌으며 피고를 대변할 변호인도 없었다. 
또 재판과정이 매우 느리고 많은 경비를 소모하게 되어 있었다. 


1864년의 개혁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 차별도 없어졌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으며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은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으며 변호사협회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는 전 부문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러시아의 법원 조직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군대의 개편이 실시되어 이전까지는 하층계급만이 징병에 대한 부담을 지었으나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어 귀족과 평민에게도 군복무를 하게끔 만들었다. 
복무 기한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으며 훈련도 인도적 원칙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병들에 대한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새로 조직된 법원과 함께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더불어 검열을 완화하고 태평도 폐지하였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의 반란인 데카브리스트당의 
반란 가담자들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석방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 놓았던 계급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 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고, 그가 가는 곳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암살 위기를 겪으면서 몇 해간 개혁 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섰으나 시간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1881년)

 

1881년, 알렉산드로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나로드니키(공화주의자)의 인민의 의지당 소속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카야 등의 폭탄테러와 조우했다.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호위병과 마부만 다치고 황제는 무사했으나, 
다친 호위병들을 살피러 마차 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두 번째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로 2세는 폭살당했다.

황태자 니콜라이가 22살에 요절하여 다른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뒤를 잇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천장과 벽 등 내부가 온통 타일로 된 모자이크 화로 덮여 있다.

 

인증샷

 

성당의 바닥은 다채로운 종류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카펫'이다. 
다양한 색상의 12개 이상의 돌이 600 평방 미터가 넘는 면적의 
바닥 표면을 덮는 45개의 사실상 반복되지 않는 패턴으로 되어 있다.

 

인증샷

 

지성소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다가 성찬 예배를 할 때는 문이 열린다.
문 안에 제단이 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은 섬세한 파스텔 색조의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교회 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교회 예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책임 있는 전문가가 작업 수행에 참여했다.
성상화 벽 (iconostasis)의 우아한 석재 조각은 흠 잡을 데가 없으며 나무 조각같은 느낌을 준다.

 

지성소

 

지성소는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전통적인 유대교는 지성소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으로 간주한다 

 

지성소

 

성인들을 묘사하는 타일 모자이크 화

 

천장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천장과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 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 왼쪽과 오른쪽에는 클리로스 (kliros 성가대)와 
주요 성당 공간을 분리하는 아이콘 케이스가 있다. 
12년 동안 러시아의 석재 절단기로 최고의 장식용 돌을 사용하여 
각 아이콘 케이스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웅장한 반암 (quartzite) 석재 조각, 다양한 색상의 미네랄 조합이 
아이콘 케이스에 특별한 장식 효과를 준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석재 장식 제작에 관한 모든 작업은 자연석의 아름다움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제시된 뛰어난 공예품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카잔 대성당 방향으로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 난간에서 인증샷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내부

 

 

 

그리도예프 운하를 가로 지르는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i) 다리

넵스키 대로에서 카잔 대성당 그리보예도프(Griboedova) 운하를 가로지르는 
카잔스키 다리(Kazansky Bridge)에서 상류 그리스도 부활성당 쪽으로 올라가
첫 번째 다리가 이탈리안 다리 (Italiansky Bridge)이고
조금 더 가면 노보 코니우쉔니(Novo-Koniushenny)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피의 구세주교회 건설을 돕기 위해 

1880년대에 이곳에 최초로 목조로 건설되었다 . 
공사 기간 동안 다리의 너비는 115m에 달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다리인 Blue Bridge의 너비는 97.5m다. 


1907년에 대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다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Christ Bridge 부활의 교회로 명명되었다. 
이후 10월 혁명으로 1917년 이름이 바뀌었고 1975년에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이 다리는 

그리네프스키 다리(Grinevsky Bridg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 난간의 주철 조각

 

노보 코니우쉔니 다리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구원사원'으로 흔히 불린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중심부인 미하일로프스키 정원과 
코뉴셴나야 지역의 그리보예도프 은행 근처에 위치한다. 
사원의 길이는 81m이며,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으로 
러시아 건축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박물관이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이 사원은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프로젝트로 건립되었다. 
“러시아 스타일”을 초안으로 만든 이 사원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다소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사원의 건설은 24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1907년 8월 6일 변모축일에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모자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이 교회는 알렉산더 2세 암살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워져서 일명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사원에서 '피'는 1881년 이곳에서 암살당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피를 가리킨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 1907년 첫개관 이후로 
90년 후 공개되었으며,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

 

상공에서 본 그리스도 부활성당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황제를 공격하는 동안 17명이 부상당했고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살해당한 황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더 3세는 정치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여 비극의 현장에 회개의 사원인 기념 사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 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 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보예도프(Griboedov) 운하를 가로 지르는 

15m 길이의 극장 다리와 모이카 강(Moika River)을 가로 지르는 18m 길이의 

말로-코유센니 다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의 모이카 부두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한 쌍의 작은 다리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이름으로, 
디자인과 장식이 비슷하고 그리스도 부활성당 앞에 서로 수직으로 위치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삼자 다리

삼자 다리(Tripartite Bridge)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장소다.
이 다리는 실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신혼 부부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혼 부부가 혼인 신고를 마치고 삼자 다리에 도착하면 오래 살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세 개의 다리를 모두 걸어야 하고 반드시 피 흘린 구세주 교회에 절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운하길 끝을 가로막듯 선 그리스도 부활성당의 남쪽 정면 모습으로 
찬란한 반구 돔들과 박공 모자이크화, 다채로운 색깔로 치장한 성상들, 
광택 벽돌과 다색 타일, 이탈리아 대리석 등이 참으로 화려하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켠 성 바실리 성당 닮았는데 실제로 그 교회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전면 너비 52m, 높이 81m에 이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는 유럽풍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물로 넘치는데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이 인공 도시를 건설하면서 유럽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유서 깊은 건물 가운데 17세기 모스크바공국 시대의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것은 19세기 말에 세운 이 성당이 거의 유일하다.

 

인증샷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피 위에 선 구세주교회, 뿌린 피에 선 교회, 그리고 우리에겐 피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2000만 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 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이다.​
​지방자치제 젬스트보를 도입했고 배심원 제도를 채택한 사법제도까지 진보적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유학을 다녀온 청년 장교들의 군사 혁명이 실패한 이래 
러시아에는 꾸준히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 개혁 움직임이 일었고 1870년대엔 
인민해방 운동과 직업적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인증샷

 ​그 운동가 그룹 중에 '인민의 의지'라는 급진 혁명운동 조직이 

1881년 아침 알렉산드르 2세가 마차를 타고 산책 나왔다가 

입헌제도 도입 방안에 서명하러 궁으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짜르를 습격한다.
조직원 두 명은 이곳 그리바예도프 운하 곁을 지나던 알렉산드르 2세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고 마차에서 내려 범인을 꾸짖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폭탄을 터뜨려 자신은 죽고 황제에게 중상을 입힌다.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둔다.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추모해 아버지가 피 흘린 피습 장소에 세운 것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이자 '피 위에 선 교회' 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구근(球根) 또는 양파 모양 돔으로 
피의 사원은 정면 가운데에 제일 높은 돔탑이 서 있고 좌우 앞뒤로 두개씩 
에나멜로 장식한 돔 네 개까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사진에선 중앙 탑 좌우 에나멜 돔과 똑같은 것이 뒤쪽에도 있지만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맨 왼쪽 종탑과 오른쪽 측면에 황금빛 구근 돔 셋이 있어 모두 아홉 개에 이른다.

 

정면 제일 높은 탑 위 에나멜 돔은 똬리를 틀 듯 꼬아​서 인도 터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탑 아래 실내에 반구형 돔 천장이 있는데 
이 돔탑에 나 있는 창을 통해 실내 돔 천장으로 빛과 공기를 공급한다. 
자연 채광과 환기를 하는 장치이고 장식도 겸하는 이것을 ​랜턴(등불)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구근 돔은 ​대지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상징한다.
돔의 직경이 아래쪽 탑의 원기둥 직경보다 크고​ 높이도 
여느 유럽 교회나 성당의 돔보다 훨씬 높아 금방 눈에 뛴다.

학자들은 구근 돔이 몽골 지배 이전 13세기에 러시아 고대 건축 양식의 헬멧 돔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
헬멧 돔이란 러시아 영웅들이 썼던 헬멧 모양을 본뜬 돔으로 구근 돔은 이반 뇌제 때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말고도 바바리아 지방 카톨릭 성당과 중동 이슬람 사원, 인도 사원에서도 구근 돔을 볼 수 있다.
구근 돔이 셋이면 성령을 상징하고 다섯이면 예수 그리스도와 네 천사를 상징한다. 
에나멜 돔 중에 가장 많은 형태가 이렇게 초록과  푸른색, 하얀색을 교차해 쓰는 형태이다.

 

정면 돔 아래 박공에 모자이크화가 있다. 
가운데에 머리가 길고 수염을 기른 장년의 그리스도가 
오른손은 축복의 표시를 하고 왼손에는 복음을 나타내는 책을 들고 있다.
이런 예수상을 만물의 지배자, 만능의 주(主)를 의미하는 판토크라토르(팬토크레이터)라고 한다.
그런 판토크라토 상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세례 요한, 
왼쪽엔 성 게오르기우스(조지)가 무릎 꿇고 뭔가를 탄원하고 간청하고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 대신 성모가 요한과 함께 인류의 죄를 사면 해달라고 청원하는 그림을 
데이시스(디시스-Deisis)라고 하는데​ 성모 자리에 성 게오르그가 있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유럽 전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성인으로 받든다.
러시아에서는 국가 문장(紋章)에 넣을만큼 각별한 성인이어서 데이시스에 등장시킨 게 아닌가 싶다.

 

예수 모자이크 양쪽 탑 아랫부분엔 천사와 성인들을 묘사한 반원형 모자이크화들이​ 있다.

 

정면 왼쪽으로 치우친 현관은 화려하게 장식한 지붕과 
뾰족한 지붕 모양 탑을 이고 있고 탑 위엔 독수리상이 서 있다.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에
독수리 머리가 하나씩 왕관을 쓰고 중간 위쪽에도 왕관이 하나 더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를 상징한다. 

 

러시아 국가 문장(紋章)

두 마리 독수리 머리가 각기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포용하겠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 문장에는 독수리가 양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왼손의 황금 공은 전 세계를 그리스도화 하겠다는 뜻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인 형상을 하고 있고 오른손의 홀(笏)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뜻한다. 

이 문장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폐기되고 낫과 망치가 들어간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했다가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되면서 옛 문장이 다시 등장했다.
민주주의 시대에 맞춰 왕관의 의미가 바뀌었는데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의미한다.
독수리가 쥔 홀과 구(球)도 주권 수호 의지와 국가 통일성을 상징한다.
가운데 말을 타고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정면 박공 그림 데이시스에도 들어간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지붕은 러시아 전통 주택에서처럼 사면을 따라 풀잎 무늬 장식을 했는데 금박 입힌 구리이다.​
지붕 박공에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는 교회 이름에 맞춰 예수 부활을 그려 놓았다.​

 

첨탑 아래쪽에도 반원형 아치를 만들고 천사상과 성인상 모자이크화를 넣었다.

 

정면 이층과 삼층에는 화려한 창문을 냈다. 
섬세하게 부조 장식을 새긴 창틀은 에스토니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창문 사이와 양쪽 끝으로는 기둥 장식을 하고 

안에 화병과 쌍두 독수리 타일화를 번갈아 붙였다.

 

정면 일층 벽에 붙은 모자이크화는 프릴루키의 성 드미트리이다.
14세기 러시아에 여러 수도원을 세워 수도의 삶을 정립한 성자이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 동쪽 측면을 보면 황금빛 구근 돔 셋이 동쪽을 보고 서 있다. 
가운데 돔 아래 그려진 예수상을 에워싼 아치가 끝이 뾰족하다.   
이런 모양의 반원 아치 양식을 가리켜 코코슈니크라고 한다.
코코슈니크 양식은 러시아 전통 건물, 특히 정교회에서 즐겨 쓴다.

 

북쪽 면 모습

알렉산드르 3세는​ 설계 공모를 거쳐 1883년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착공한다.
무른 습지 기반을 다지고 화강암을 쌓아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3년이 걸렸고 
모두 25년 세월을 들여 1907년 완공 한다.
건축비는 왕실 돈과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일반 신자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2세를 추모하고 기리는 왕실 교회로 썼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뒤 피의 사원을 폭파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큰 건물이 드물어 창고로 썼다.

1931년엔 알렉산드르 2세 테러를 기념하는​ '인민의 의지' 박물관을 안에 만들었다가 
자신에 대한 테러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이 3년 만에 폐쇄한다.
피의 사원은 그 뒤로도 여러번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폭파될 위기를 넘긴 끝에 
1969년 이삭성당 종교박물관의 분관이 된다. 
오랜 복구와 단장을 거쳐 1998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건물 뒷면 북쪽 모습이다.
매표소가 있는 관람객 출입구가 뒤쪽으로 나 있다. 입장료는 250루블이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수요일엔 휴관한다.  
북쪽 구조는 남쪽과 똑같이 좌우만 다르게 선형(線型) 대칭으로 만들었다.  
정면 중앙 돔탑과 박공 사이, 그리고 창문들 위쪽도 코코슈니크 아치로 처리했다. 
교회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교회를 본떠 정통 17세기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지만 
당시로는 첨단이었던 전기 시설을 들여 전등 1689개를 밝혔다.

 

북쪽 면 박공에도 예수 부활 성화가 모자이크로 붙어 있다.
교회 안팎엔 당대 러시아 대표 작가들이 10년에 걸쳐 만든 모자이크 성화가 있는데 
그림 면적을 모두 합치면 7천 제곱미터, 2천 평이 넘는다.

 

북쪽 면 오른쪽에도 남쪽 정면과 마찬가지로 쌍두 독수리가 올라선 현관 탑이 솟아 있다. 

 

그리바예도프 운하를 건너 부활성당의 동북쪽 모습을 보니 수상택시들이 운하를 달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난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짜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 궁에서 텃밭을 일구며 소일한다.
해방자 알렉산드르 2세가 피 뿌린 지 37년,  마지막 짜르는 

볼셰비키들에게 가족과 함께 연행돼 시베리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1차대전 때 드러난 
그 체제의 무기력함이 낳은 필연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해방자 짜르가 테러에서 
살아 남았다면 러시아는 물론 세계 현대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종탑 아래 각진 다섯 면 가득 문장(紋章) 144개를 각기 붙여 놓았다.
제정러시아 시대 지역과 도시와 마을의 문장들을 모았다. 
온 나라가 황제의 피살에 애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바예도프 운하 건너편에서 서쪽 측면을 바라본 모습

 

창문 위 아치 모자이크에 두 천사가 천에 그린 
'천 위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얼굴' 만딜리온(Mandylion)을 받쳐들고 있다.
성상화 이콘(Icon)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도 대상이자 숭배 대상이다.
300 가지에 이르는 이콘을 감상 대상인 예술품이 아니라 
신의 세계가 출현한 것으로 여겨 집마다 성소에 걸어두고 기도한다. 

 

십자가에 못박힘

 

아래쪽 감실, 못 박힌 손발에서 피 흘리는 모자이크 이콘 '십자가에 못박힘'을 본다.
교회 이름을 왜 그리스도 부활성당이라고 붙였을까?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 당한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아마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상]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Russia 외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 플렛홈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은 1955년 11월 15일에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레닌그라드 지하철이라는 이름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처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이름이 높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도시내 고속 교통 기관에 관한 최초의 계획은 
적어도 1899년에는 존재했으며, 그것은 고가식 철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고 계획은 10년 이상 나오지 않았다. 
1935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개통을 계기로 1930년대 후반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건설 계획은 다시 부상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하 구조물 굴착은 
지하수와 지하 동굴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플렛홈 붉은 모자이크 벽을 배경으로 인증샷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적인 지하철망의 역사는 주요 철도의 터미널역을 
모두 연결하는 노선 건설이 시작된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계획은 지연되었고, 이 노선은 1955년 11월 15일에 개통되었다. 
당초 구간에는 7개 역이 있으며, 몇 달 후에 8번째 역인 푸시킨스카야 역이 개통되었다. 
이 구간은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일부가 되어, 
시 중심부 모스크바와의 열차가 발착하는 역인 모스크바 역과 
시의 남서부에 있는 키롭스키 공업 지대를 연결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계속해서 북쪽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58년에는 네바강을 통과하는 구간이 개통되었고, 
나아가 197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주택 개발이 진행되던 
북쪽 구간을 연결하기 위하여 비보륵스키 지구까지 건설되었다. 
1978년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레닌그라드주까지 연장되었다.

 

100 미터가 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친 지질은 종종 지하철 건설공사를 방해했다. 
최악의 사례는 1970년대에 진행된 키롭스코 비보륵스카야 선의 터널 구간 공사 
도중에 일어났는데 이는 네바강 지하에 동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터널을 완성했지만, 1995년에 이 구간의 터널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고 
레스나야 역-플로샤치 무제스토바 역 구간은 한동안 침수된 상태로 있었다. 
9년 이상 동안 이 노선의 이북 구간은 지하철망 이외의 구간에서 물리적으로 분할되었고, 
2004년 6월에 새로운 터널이 개통되면서 원래대로 회귀했다.

 

지하철 도스토옙스카야 역사

2008년에는 프라보베레즈나야 선의 일부가 분할되면서 
새로운 5번째 노선인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 선이 되었다. 
프룬젠스코 프리모르스카야선은 북부에 위치한 프리모르스키 지구와 
남부에 위치한 프룬첸스키 지구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현재는 총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 동상

도스토옙스카야 역 앞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동상이다.
러시아문학의 대표자이며 예언자, 선각자, 심리학자, 잔인한 재능을 지닌 시인 
등으로 불려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의 구제병원 
부속관사에서 군의관을 아버지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조용한 성격이었고 독서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세습사족으로 그런대로 살만은 하였다. 
13세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15살 때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17세때 그의 영지에서 농노에 살해당한다.

1847년초,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깼다. 
그의 방에 웬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페트라 셰프스키서클’ 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정치적 불안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잠재적인 반체제단체를 면밀히 감시했다. 
그리고 운 없게도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이 넉달이나 이어진 끝에, 
페트라 셰프스키 서클 구성원들에게 전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던 12월의 어느날 아침, 간수들이 스물 여덟 살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죄수들을 어딘가로 끌고가 일렬로 세웠다.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열 여섯 명의 사수(射手)들이 있었다. 
곧 이어 죄수들은 명령에 따라 세 명 씩 짝을 이뤄 나뉘었다. 
가장 먼저 처형될 세 명에게 두건이 씌워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속한 무리는 다음 차례였다. 
집행관의 우렁찬 신호가 울려 퍼졌다. 

“장전! 조준!”

뒤이어 정적이 흘렀다. 
“발사!” 신호는 없었다. 
대신 특사가 가져온 황제의 새 명령문이 큰소리로 낭독되었다. 
“죄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되, 사형대신 장기간 복역형을 명하노라!”

이 극적인 상황은 전부 니콜라이 1세가 꾸민 일이었다. 
그들이 죄의 무게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형집행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간 후에 형량을 감해 준 것이다. 
얼마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한 1850년 1월부터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 처럼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운 순간, 
작가의 뇌리를 스친 문학적 영감이 어두운 감방에 한줄기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빛은 훗날 <죄와 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Vladimir) 광장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  동상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이미 
‘범죄의 고백’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알맞은 실존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된 덕이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 (Vremya 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의 사회 참여를 도모하는데 주력하는, 
자그마치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삿거리를 찾아 프랑스의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프랑수아 라스네르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는 주먹다짐을 하던 상대가 죽어버린 일을 계기로 본인이 타고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죽어버린 상대 앞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듯 성취감마저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관심사를 시 쓰기로 돌렸지만, 

시인으로서의 평온한 삶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 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범죄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쇠 창살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방이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의 사연에 매료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네르를 모델로 
<죄와 벌>의 타락한 주인공으로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버는 수단으로 치부하고, 
둘 다 죄질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보다 작가 자신이 훨씬 더 전문가였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블라디미르 광장을 끼고 돌아가면 쿠드네치니 (Kuznetsjny Pereulok) 골목 5번가
모퉁이에응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집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났을지언정 나약한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이 곧 <죄와 벌>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단편들이, 
‘파산의 충격’으로 한데 모여 하나의 이야기 틀로 짜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 
물론 돈이 절실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꺾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덧 꽤많은 분량으로 늘어난 <죄와 벌> 원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줄거리가 내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그때까지 쓴 원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전했다. 
과연 작가의 본능은 옳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펜이 종잇장 위를 
훨훨 날듯이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866년 1월, <죄와 벌> 제1부가 
<러스키베스트니크 (RuskiiVestnik)>에 실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 작품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러스키베스트니크>는 12개월 동안 <죄와 벌>을 연재했고, 
그동안 정기 구독자 수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특수를 누렸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인 1867년에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도스토예스키(Dostoevsky) 기념관 건물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 징역과 
4년의 병역 복무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배지 옴스크로 호송되는 중에
성서를 선물받아 유형지에서 탐독하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뀐다.
그의 인생관은 이 춥고 고독한 유형지에서 완성되고 이 경험은 <죄와 벌>에서 묘사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무신론에서 벗어나 윤리적 이상과 고난을 통한 구원 등을 확신하게 되고
열악한 환경과 다른 죄수들로부터 적대감과 따돌림을 당하는 등 그가 겪은 심리적 고통
또한 성경을 통한 새로운 인생의 변화 등이 그의 작품 속에 잘 나타난다.
온갖 부류의 죄수를 통한 러시아 민중의 실체를 깨닫고 

인간 행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이 시기의 고통으로 간질을 앓게 되어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1854년 옴스크에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몽고 근처 세미 팔라틴스크의 

보병대대에 배치되고 36세에 하급관리 미망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마리아는 알코올 중독자인 하급관리의 아내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서른 나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남편 있는 마리아를 사랑하는 데 이 여자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관심조차 없다가 미망인이 되고 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급장교가 되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등 뻔뻔스런 여인이었다. 
하물며 결혼 전날 밤에도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함께 지냈다고도 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자와 일주일에 두 번 씩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그들의 생활은 힘든 삶으로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185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폐렴을 앓던 마리아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허가를 받게 되고 1864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경제적 후원자인

동생마저 죽자 재정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41~42세 때 당시 동료 남학생에 바람맞은 여대생

폴리나를 만나 함께 여행다니면서 별의 별 애정 행각을 다 벌이면서 여전히 도박에 빠진다.

 

특히 도박 롤렛을 좋아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년 간 채권자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44세까지 여행과 도박에 미쳐 빈털터리가 되고 폴리나는 그에 질려서 청혼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폴리나를 만나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1866년 악덕 출판업자와 불리한 계약을 하게 된다. 
계약 내용은 어리석게도 한 달 안에 새 장편소설을 완성해서

원고를 넘겨주지 않으면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기로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도스토예스키 기념관은 넵스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그의 탄생일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고 또한 작품의 무대를 순례하는 
애독자 관광객들의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작 <죄와 벌>에 나오는 센나야 광장이나 

S골목(Stolyarnyi Lane) 하숙집, K다리 (Kokushikin Bridge)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와 동시대를 교감해 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간질과 빈곤 두 가지 재앙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 대작가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금전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민 끝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라는 속기사를 고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구술하고 안나는 그것을 속기로 받아 적는다. 
작업은 놀랍게도 26일 만에 끝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소설<도박꾼 The Gambler>이다.

1866년 <죄와 벌>,  1869년 <백치> 1872년 <악령> 등을 완성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73년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소설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고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바로 이 기념관에서 60세의 나이로 폐동맥 재출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스키 기념관 입구

작가와 속기사의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사랑을 느끼고 결혼까지 이른다. 
속기사에서 대문호의 부인이 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중에 회고록을 남기게 되는데, 책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중년부터 말년까지 14년 동안의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남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다음의 삽화는 특히 정겹다. 

안나가 임신을 하자 길눈이 어두웠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라도 산파를 부르러

갈 수 있도록 미리 길을 익히기 위해 매일 산파의 집까지 산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신심깊은 사제의 집에 찾아가 통곡하며 그녀없인 살수 없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대작가의 진솔하고 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입장권 매표소

안나와의 결혼 피로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증세가 나타나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악마의 포효소리’를 안나의 가족들이 듣고 도망치지만 
안나 역시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안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더우기 안나의 신혼 집은 절대 빈곤할 뿐만 아니라 전처의 자식, 친구의 아들, 
조카 등이 들끓었고 남편의 지독한 도박광으로 안나의 결혼반지까지 저당 잡혀가며 
도박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늘이 맺여준 인연인가 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 풍토는 남녀 교제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혼도 쉬웠지만 어떤 고난과 시련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스물 다섯이나 많은 도박꾼에 간질병자인 남편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차남은 54세 때 늦게 보았지만 아버지의 간질 유전으로 세살 때 죽고 만다.

 

짐 보관소

세상에 남편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숭고한 여인도 많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그녀도 결혼 반년 만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곁에서 오랫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보좌해 지켜줌으로 
작가의 천재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고 위대한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화를 내다가도 상대의 심정을 미리 이해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의 희생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로 탄생시킨 길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런 안나의 희생을 알고 있었던지
“나의 모든 미래는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이며 축복이오”
“나는 늘 꿈속에서 당신과 키스하고 있소. 당신의 몸에서 내 입술을 떼지 않고...”
이렇게 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인증샷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을 한 날에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꾸짖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맹세하고도 끊지 못했던 도박, 어김없이 다음날에 도박장에서 
망연자실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곤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가혹한 세월에 안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밤이 새도록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순결한 영혼만을 사랑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지는 않았을까?
남편이 사망한 후 38년 정도를 더 살았던 안나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대한 추억으로 그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인증샷

 

도스트예프스키 외모는 어땠을까?
“그는 보잘것없는 외모에다 사소 무뚝뚝하며 수염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여위어 있고 오른쪽 빰에는 사마귀가 나 있었다. 
의심과 불신으로 때때로 불타오르는 눈은 슬픈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두 눈에 깊은 생각과 번민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괴기스런 극도로 부자연스런 흉측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에 더 놀랐을 여인들이지만 그녀는 그 곁에 남아 있었다..

과거의 불행을 한방에 날릴 도스트예프스키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헌신적인 안나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가 없이도 존재했지만 

개인으로서 그는 안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위대성은 고난과 고뇌와 불우한 환경에서 더 현실적인 위대함이 탄생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위대한 원천은 사랑이다. 
한없이 부어주는 사랑과 그 단절 속에 갈증이 샘물같은 예술의 원천이 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첬고 
많은 인물들에게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당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비평가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사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 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태생도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할 수 있으니,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작품을 재빨리 완성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서는 톨스토이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톨스토이도 나이가 들면서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고 
급기야 자기가 썼던 대작들조차 셀프 디스하던 회심(回心) 시기에 접어든다. 
이때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모든 문학서를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모두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악령>을 읽고 감탄했다고도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을 때 
그의 침대 곁에 놓여 있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말년에는 서로에 대해 존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된 것 같다.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 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19세기 센나야광장은 죄와 벌의 무대
이 그림은 <죄와 벌> 거의 백년 후의 작품인데, 분위기가 내용과 잘 어울린다.

차가운 족쇄가 도스트예프스키의 발목에 채워졌다. 
그는 시베리야의 옴스크에 위치한 감옥에서 이 무거운 족쇄를 질질 끌고 4년을 보낸다. 
읽거나 쓰는 행위는 일체 금지였고,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비참한 감옥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인물이 겪고 느끼는 일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서 이 이야기를 글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계단은 죄와 벌 주인공의 하숙집.

훗날 작가는 <죄와 벌>이 이 감옥에서 지은 이야기라고 전하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슬픔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 회고했다. 

 

감옥 생활을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 

그 동기에 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한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기념관 3층
3층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겸 집필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탈진한 작가는 이곳 소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재 겸 집필실 - 그가 죽은 1월 28일 8시 38분에 시계는 멈춰 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트에서 28년을 살면서
주소를 스무 번이나 바꾸었다.
그는 이 도시를 많이 산책하고 여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도시에서 느낀 것을 자신의 작품에 아낌없이 반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첫 대작은 <죄와 벌>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 소설을
페테르부르크의 소설가가 쓴 페테르부르크의 소설이라고 부른다.

 

거실
소박한 거실 테이블 위에는 작가가 생전에 소장했던 담배곽이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용하던 담배곽

 

다이닝룸

 

가족 사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안나가 썼던 책상, 커텐 뒤에서 찰랑이는 빛을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는 작가와 속기사로 처음 만났다. 
안나는 당시 속기 교육을 받아 처음 일을 시작하는 단계였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빚 때문에 빠듯한 마감 안에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탈고를 그들은 멋지게 해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가난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건강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로서 그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며 
14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안나의 회고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했던 행복과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 작품을 읽을 때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이 쓰일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을 함께 놓고 보면 더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안나의 회고록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보게 해준다. 
가족과 빈민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재산을 내주고, 
욱하는 성격에 질투가 강하면서 마음은 무척 여린, 
도박을 좋아하면서 작가로서 성실함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들. 

아내인 안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서술한 그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해서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노름을 위해 기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안나는 오히려 찢어질듯한 가난과 빚 독촉으로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를 존경했다.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할 때 그가 놓인 경제적, 
정신적 고난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회고록에도 담겨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방

 

문단과 사회에서는 자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다른 재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너저분하게 쌓인 잡동사니 더미인 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잘 다듬어져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난하곤 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이 살았던 여건과 작업 환경을 남편의 환경과 비교하거나 
그런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등은 거의 대부분 건강하고 유복한 사람들로서 
자기 작품을 충분히 구상하고 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가지 힘든 질병에 시달렸고, 대가족과 빚을 짊어지고 있었으며, 
내일에 대한, 절박한 빵에 대한 괴로운 생각에 짓눌린 사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작품을 다듬는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2, 3장은 이미 잡지에 실렸고, 4장은 인쇄에 들어갔고, 
5장은 우편으로 <러시아 통보>에 보냈는데, 나머지는 아직 쓰지도 못한 채 구상만 하고 있는

그런 피말리는 경우가 그의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자기 소설을 읽다가 
한순간 잘못 쓴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와 자신의 애초 구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절망에 빠진 적이 너무 많았다.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하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수정할 수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글이 잘 안 풀렸는지, 
내 소설이 왜 성공하지 못할 지 이제야 보이는군. 
어쩌면 이 실수로 내 ‘사상’을 완전히 죽인 셈인지 몰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안나는 결혼 후에도 속기로 그의 집필을 도우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그의 손님을 환대하고 
채무업자들을 상대하는 등 남편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빚에 허덕이는 가계 관리를 도맡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수입을 늘리기 위해 출판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러시아 최초의 도전적인 직업 여성으로 안나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들은 쓰여지기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가정을 지켜내는 아내이면서 작가의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자신의 작가 활동에 미치는 안나의 영향력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안나의 회고록을 읽어본다면 그녀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켜주고 배려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의해 서술된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상에 놓여있는 노트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녀가 관리했던 서적의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 책상에 앉아 왼편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재 입구가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중에 굳게 닫힌 문을 종종 바라보았을게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채우고서. 


신혼초 안나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매달려 울면서 몽땅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그를 껴안고 ‘울지 말아요’하고 달랬지만 그는 
‘나 같은 놈은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하고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조의 여왕,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 <백치>, <도박꾼>,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은 
안나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60세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안나는 아내로서, 
독순술(讀脣術)까지 동원한 속기사 비서로서, 출판 동업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그를 찬미하는데 헌신했다.

 

딸 류보프의 방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내 안나의 둘째 딸 류보프 도스토예프스카야 
(Lyubov Fyodorovna Dostoevskaya 1869~1926).
이들의 첫 번째 딸 소냐는 1868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

류보프는 결혼하지 않았다. 
나중에 류보프는 어머니와 멀어지고 1913년 치료를 위해 해외로 여행한 후  
1926년 이탈리아에서 악성 빈혈로 사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시절

 

이 방은 세면실이라고 되어 있던 듯

 

기념관 2층
기념관 2층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전시된 전시물들은 LED 조명 처리로 아주 보기 편하게 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드 마스크(Death mask)가 인상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육필 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죄와 벌>의 육필 원고
작가 생전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작품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것은 기념 문학관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둠 속에서 인증샷을 해 본다.

 

도박광 도스토예프스키를 상징하는 도박용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1880년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러시아의 저명시인 네크라소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힘은 추위와 굶주림, 무엇보다 무능한 남자들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기구한 숙명에서 온 것이다.”라고.

그녀에게서 과거 한국 여인의 ‘종부상(從夫像)’을 떠올린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숨을 거둘 때 판명난다고 한다. 
작가의 기념관은 고증은 잘 되어 있었지만 세계적 대작가 기념관 치고는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쪼들리며 살았고, 미완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죽어 간 곳이기 때문에 의미는 각별했다. 
그때 그대로 작은 대문에 반지하 형태의 집에 문구류 역시 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안나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영상] Dostoyevsky Museum in Saint Petersburg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대궁전 동쪽 입구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공원으로 향한다.

 

아랫공원(Lower Park) 출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바라보이는 공원 풍경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공원(Lower Park)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박물관
⑪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말리궁전,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

 

페테르고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이곳은 표트르 대제가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승리하여 
핀란드만을 통해 발틱해로 나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린것을 기념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의 구도로 1714년 공사를 시작하여 1723년 8월 15일 대궁전, 
대폭포, 몬플레지르 궁전 등을 완성하고 이미 이때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기초가 다져졌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 서기 1700 - 1721년)에서 
러시아와 스웨덴은 발트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싸웠다. 
1709년에 폴토바(Poltova)에서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군대를 무찔렀고, 
스웨덴의 칼 12세는(Charles XII) 오토만 제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어서 표트르의 해군은 1714년에 항코(Hanko)에서 스웨덴과의 해전에 이겼다. 


이렇게 발틱해에 거점을 잡고 나서, 표트르 대제는 건축가와 기사들을 모아서, 
해안가에 몽프라시르(Monplasir)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여기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오가는 길에 쓰려고 지은 여름 궁전이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717년에 베르사이 궁전을 (Chateau de Versailles) 방문한 뒤에, 
표트르 대제는 이에 못지 않은 궁전을 계획하였고, 1721년에 완공하였다. 
물론 나중에 여러 가지가 더 첨가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짓고서 러시아는 발틱해에 항구를 가지게 되었고, 
표트르 대제는 이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페테르고프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태리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가 궁전을 설계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각 분수들의 물 공급을 위하여 1720~1721년 러시아의 수리학 기술자
바실리 뚜볼코프가 네덜란드와 프랑스로부터 배운 기술로 그의 지휘 아래 
자연 저수지에서 윗정원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16m 경사진 아랫공원을 파이프와 관을 통해 분수의 물을 공급하고, 
1721년 여름 아랫공원의 작은 운하와 갑문을 건설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곳에 물을 공급하고, 분수를 작동하기 위하여 
수압에 의한 설비와 펌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벌써 18세기 초에 발달된 러시아의 수리 기술을 이곳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독일군은 페테르고프 궁을 본부로 삼았고 떠날 때 
보복으로 대궁전 등을 불태우는 등 모두 파괴하였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Perseus)

페르세우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다양한 괴물을 처치하는데 

메두사를 살해하고, 바다 괴물이자 바다의 여신인 케토 또는 수염고래를 죽이고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1947년에 주로 자원자들이 동원되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국민이 아끼는 황제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궁전 본관 건물과 주변의 크고 작은 20여 개의 별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유산이지만 정작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조성된 2개의 공원에 조성된 144개의 분수대들이다. 
분수대 건립 당시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분수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궁전과 핀란드 만 사이에는 대폭포와 해양 운하가 놓여 있다. 
표토르 대제가 처음 만든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제각각 하부 공원에 덧붙인 폭포와 분수는 물을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분수대 전후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삼손 분수대 외에 우산분수나 아담분수, 이브분수, 피라미드 분수 등이 유명하다. 
이 황금분수대에는 여름궁전 내 분수 144개 중 절반이 조금 안 되는 64개의 분수가 집중되어 있다.

 

여름 궁전 뒷편에 위치한 분수공원의 황금 분수대는 7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폭포와 어우러져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러시아 관광지를 소개하는 자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황금분수대가 바로 이곳이다.

 

분수의 백미인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분수공원의 핵심이 되는 연못에는 삼손이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황금색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자의 입에서는 20m 높이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보통의 분수는 펌프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윗공원으로부터 배수관으로 이어지는 물의 
자연적 흐름을 통해 분수가 작동하게 만든 당시의 기술은 놀라운 일이다.

크고 작은 분수에서 나온 물은 반원의 호수에 모여서 수로를 따라 핀란드 만으로 흘러나간다.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전사 삼손이
사자와 싸우는 동상의 분수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메인 분수다.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승전 25주년 때 만들었다.


스웨덴 왕의 문장에 사자가 있어 삼손과 사자는 각각 러시아와 스웨덴을 상징하고 있다. 
삼손상은 러시아의 조각가 미카일 코즐로브스크(Mikhail Kozlovsky)가 

제작했으며 높이 3.3m  무게 5톤, 금박이 입힌 사자입에서 물이 20m나 뿜어져 나온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페테르고프의 가장 큰 기술적 성과는 모든 분수가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은 천연 온천에서 공급되며 윗정원의 저수지에 모인다. 
고도 차이는 그랜드 캐스케이드를 포함하여 아랫공원 대부분의 분수를 움직이는 압력을 생성한다. 
삼손 분수는 길이가 4km (2.5 마일)가 넘는 특수 수로로 공급되며 고지대에서 물과 압력을 끌어온다.

 

  핀란드 만으로 향하는 수로

 

수로 끝에 보이는 바다는 발트해와 연결된 핀란드 만으로 예전에는 여름궁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황금분수대와 인공폭포의 수로는 수로를 통해 핀란드 만과도 연결되어 있다. 
핀란드 만에서 궁전 뒷편 분수대까지 수로를 따라 작은 배가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는 러시아 황제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페테르고프(Peterhof)는 넓고 다양하다. 
20개가 넘는 궁전과 파빌리온이 핀란드 만을 따라 뻗은 드넓은 정원에 흩어져 있다. 
왕궁은 이전에는 귀족들의 궁전과 교외 별장의 언저리와 담을 맞대고 있었지만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고, 그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공식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바로크 풍의 파빌리온은 
르 블롱 등의 작품으로 1714년부터 1726년에 걸쳐 지어졌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은 동쪽에 위치한 스트렐나의 콘스탄틴 궁전
(1797~1807년, 안드레이 보로니킨 작)과 별장 궁전(1826~1829년, 아담 메넬라프 작), 
서쪽에 있는 로모노소프의 중국 궁전(1762~1768년, 안토니오 리날디 작)이다.

 

체스 산 분수(Dragons’ Cascade or Chess Mountain Fountain)


동쪽에 있는 체스 산 분수는 서양 장기판을 뜻하는 체스 바탕에 입구에는 날개가 달린 
세 마리 용이 이를 드러내면서 물을 뿜고 있기 때문에 용 분수라고도 한다. 
물은 흰색 검정색의 체스 판 무늬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폭포 양편에는 이태리에서 만든 대리석상을 세워 놓았다.

 

체스 산 분수 상단에 있는 작은 드래곤들 입에서 물이 나온다.

 

골든 산 분수(Golden Mountain Cascade)

서쪽에 있는 골든 산 분수는 22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양 받침대에는 그리스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중앙 상부에는 손에 삼지창을 든 로마 바다의 신이 있고 왼쪽에는 그리스의 반은 인간 
반은 바다고기인 해신이 자신의 상징물인 소라고둥을 불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주(酒)신 바커스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있고 계단 아래 연못에는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계단 좌측에는 안드로메다 공주상이 있는데 엄마를 잘못 둔 죄로 제물로 바쳐질 뻔 했다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구출되어 결국엔 페르세우스와 결혼하게되는 에티오피아의 공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보기드문 해피엔딩 인물이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2개

체스 산 분수 아래에는 두 개의 로마분수가 있는데 처음에 이 분수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18세기 말에 대리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분수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두 단으로 된 분수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고래 분수(Whale Fountain)

 

다네이드 분수 (Danaid fountain)

 

태양분수(Sun Fountain)

기둥 위에 달려 있는 둥근 형태의 원반에서 물이 분출되면서 
수직형의 원반이 회전하는데 이 모양이 태양을 나타난다고 한다. 
1721-1729에 미케치(Michetti)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독일 나치에 파손된 것을 1957년에 원래대로 복구했다고 한다.

 

태양분수(Sun Fountain)

 

버섯 분수(Mushroom Fountain)

비 오늘날 우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버섯의 깔때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이 물방울을 맞으면서 버섯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피라미드 분수(pyramid Fountain)

분수 밑받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세단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은 오벨리스크처럼 보이고 있다. 
500개의 구멍에서 일곱 개의 계단으로 물이 뿜어 나오고 있다.

 

이브 분수 (Eva fountain)

 

이브 분수 (Eva fountain)

 

아담(Adam) 분수

분수를 장식한 조각품은 베니스 총독의 궁전을 장식했던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zzi)의 유명한 작품을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가 침입 했을 때 나치들이 정원에 묻었는데 분수를 다시 발견하여 
1948년에 원래 형태로 복원 되었다고 한다.

 

아담(Adam) 분수

 

매니저 분수 (Menager fountains)

 

트리톤 벨 분수 (fountains Tritons-bells)

 

트리톤(Triton) 분수

바다 괴물의 턱과 씨름하는 트리톤을 묘사한 Oranzhereiny 분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며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인 
트리톤(Triton)이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모습.
트리톤과 악어, 거북이 등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트리톤(Triton) 분수

 

파르테논 분수

 

파르테논 분수 정면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요술 분수

요술 분수는 사람이 없으면 물이 나오지 않고 벤치에 앉거나 사람이 벤치 앞을 지나가면 
물이 위로 솟아 오올라 분수 벼락을 맞도록 되어 있다.

 

앗 ~ 깜짝이야 ~~ ! ! 요술 분수

 

나무와 꽃 분수

요술 분수 앞에 꽃과 나무 가지에 분수를 설치했는데 장미와 튤립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도록 만들어져 마치 사람들을 요술 분수 앞으로 유인하는 듯하다.

 

크래커 분수 "벤치" (Cracker fountains "Benches")

 

곡물의 단 분수(The Sheaf Fountain)

이 분수는 몽플레지르 궁전 앞에 있는 분수로 두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물을 뿜고 있는 형태여서 곡물 단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723년에 설치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파손된 것을 1952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뒤에 붉은색 지붕 건물은 표트르 대제가 가장 많이 이용했다는 
몽플레지르 궁전(Monplaisir Palace)이며 궁전 앞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과 정원 공중에서 보기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은 핀란드 만을 바라보는 아랫정원 동쪽에 세워져 있다. 
커다랗고 경사진 지붕이 특징인 1층 건물의 가운데는 유리로 커버된 회랑 두 개가 접해 있어서 
회랑을 따라 거닐면서 바다와 공원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다고 한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많이 애용하고 이용했던 여름 별궁으로 여름궁전 내 소궁전이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1714년에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몽플레지르 궁 
(Monplaisir Palace, 프랑스어로 "my delight") 건축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이 궁은 표트르 대제가 
크론스타트(Kronstadt)의 항구를 통해 유럽을 오가는 도중에 사용할 여름 휴양지였다. 
이 해안 궁전의 ​​벽에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에서 가져온 수백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Monplaisir palace) 내부

1714~25년에 장 바티스트 레블론 등이 지은 이 건물에는 
표트르 대제가 수집한 서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다.

 

옻칠의 방 (Lacquer Study)

 

접견실 (Green Reception Room)

 

알랙산더 침실

 

황제전용 목욕실 (Bath Building)

 

알현실 (Audience hall)

 

다이븐 룸 (The Divan Room) - 두꺼운 받침대와 매트리스로 된 침대가 있는 방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공중에서 본 말리 궁전 (Marly Palace) 전경.
말리궁전은 정원에 둘러쌓인 조용한 곳으로 1725년 표토르 대제가 은퇴 후 머무른 곳이다.

 

말리궁전 배치도 (Axonometrc projection of the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에이비에리(Aviaries) 파빌리온
새장이란 뜻의 에이비에리(Aviaries)는 나무로 만든 파빌리온이다. 

 

표트르 대제 별궁을 보고 가로수 길을 따라 나오면 중앙에 표트르 대제 동상이 서 있다.

 

아랫공원에서 본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보울 분수(Bowl fountains) 앞에서 인증샷

마지막으로 보울 분수(Bowl fountains) 앞에서 인증샷

 

출구를 향해 올라가는데 일행 분이 뒤에서 찰칵!

 

[영상] 페테르고프 (Peterhof) 궁전 아랫공원 (Lower Park)

 

 

 

 

상공에서 본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 윗정원과 핀란드 만 조감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정원은 도심에서 30km 떨어진 페테르고프에 위치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 버스 또는 수중익선을 타면 궁전에 도달할 수 있다. 
분수, 소규모 폭포, 정원으로 유명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아랫공원 상공에서 본 조감도

1705년, 표트르 대제의 지시로 여름 휴양을 위한 궁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1710년부터 정원(공원)을 가꿨고, 1714~25년에는 건축가 요한 브라운슈타인 등이 
윗정원과 같은 높이에 바로크 건축 양식을 띤 네덜란드풍의 2층 건물로 황제의 여름 관저를 건립했다. 

이때부터 페테르고프 궁전은 대궁전과 공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여름궁전이 되었다. 
그러나 1745~55년에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대궁전을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 라고 불리는 페테르고프는 
황제의 가족들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궁전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폭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에 

의해 건립된 마를리궁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소규모 폭포 안에는 삼손 조각상과 64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궁전 하단부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원 양식을 본뜬 정원이 들어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의 일부를 형성한다.

페테르고프 궁전과 정원 경내에는 다양한 궁전 및 분수가 있고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러시아의 베르사유'로 알려진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존재하고 있다. 
경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과거 러시아 군주의 생활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바로크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궁전의 웅장한 노란색과 
흰색 파사드는 내부 장식에 의해 실제로 가려진 느낌이 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지만 나중에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대학살 이후 완벽하게 재현된 대궁전 경내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벽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이 붙어 있고 금박이 벗겨진 침실은 찾아볼 수 없다. 
왕족들은 활기가 넘치는 공식 알현실과 거실에 앉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가구와 벽화에 에워싸여 편안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페테르고프의 분수대는 그 자체가 관광명소다. 
5월에 오픈 행사가 시작되고 음악 공연과 불꽃놀이 등 하루 종일 축제가 열린다.
녹음이 우거진 윗정원의 격자 울타리를 따라 거닐어 보거나 
아랫정원에 흩어져 있는 완벽한 하얀색 조각상들을 둘러볼만 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여름궁전이라고도 불리는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대궁전을 사이에 두고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정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Peterhof, State Museum-Reserve
⑪ Fountain-cracker Dubok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윗정원은 넵툰분수, 멍청이분수,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마를리박물관,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이 있다.

 

페테르고프 궁전 앞문(Paradnyye Vorota, Front Gate)

지금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쓰이는 겨울궁전에 대비해 

러시아 제국 황제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으로, 
궁전에서 바로 핀란드 만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분수의 궁전',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분수가 가득한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윗정원(Upper Garden)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국립 에르미타지 박물관 말고 
또 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궁전들이 근교도시에 자리들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름궁전이다. 
이 대궁전은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 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 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에르미타지 박물관 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 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었다.

 

메제움니 (Mezheumny) 분수


물고기 형태의 황금 신화 생물이 있는 메제움니 분수(Mezheumny Fountain) 
윗공원의 연못에서 가운데 금잉어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금잉어가 물을 뿜어대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매일 11시 정각부터 물을 뿜는 분수들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른 수압을 이용하여 
무동력으로 물이 뿜어지게 만들었으며 분수와 어울어지는 조각상의 균형감 있는 배치들로 해서 
이 정원은 18세기 초 유럽 정원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로마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윗정원의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 동상이 오른손에 삼지창을 들고 서 있다.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으로 유피테르와 플루톤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투르누스와 옵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과 거의 비슷한 신이지만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넵투누스(Neptunus)의 개념은 많은 부분 에트루리아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조각상

넵튠 동상 아래에는 좀 더 작은 크기로 말을 탄 기사, 창을 든 전사, 
물고기를 탄 아기들 모습의 동상이 넵튠을 호위하고 있다.
이들 말과 물고기의 입에서는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넵툰 (Neptune) 조각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넵투누스(Neptunus)는 바다의 신으로 바다와 강, 호수, 
조그만 샘에 이르기까지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친 머리칼과 턱수염을 한 건장한 모습에 언제나 세 개의 
뾰족한 끝이 달린 창을 세워 든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단체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숲 터널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오크(Oak-tree) 분수

오크 (Oak-tree 떡갈나무) 분수는 1734년 조각가 P. Sual이 만들었으며 
1746년에 납 참나무가 제거되었고, 1802년에는 아랫공원으로 옮겨졌지만 
"Oak"이라는 이름이 이전 분수에 남아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분수대의 역사는 끝없는 재건과 개조로 오늘날 구체화되었으며 
1929에 마침내 구성적으로 완성되었다.

 

오크(Oak-tree) 분수

오크 분수는 우아함과 조화로 관광객들에게 계속 주목받고 있다. 
분수의 건축 파노라마는 화강암 바닥이 어둡고 밝은 색조의 석판으로 늘어선 둥근 수영장이며, 
중앙에는 불가사리 모양의 응회암 슬라이드가 있다. 

"Oak" 분수의 수영장 한가운데 응회암 언덕에 조각가 D. Rossi가 1809년에 만든 
연극 마스크를 쓰고 있는 큐피드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오크(Oak-tree) 분수에서 인증샷

 

단체 인증샷

 

인증샷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의 측면 날개 맞은 편에는 

대칭으로 위치한 두 개의 광장 연못이 있다. 
이 연못들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으며 

아랫정원의 분수 시스템을 위한 저수지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연못은 기술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 연못에 별도의 분수가 세워졌다.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서쪽 연못은 "다이아나의 나무 아래 목욕"이라는 구성으로 장식되었다. 
사냥의 여신은 다섯 마리의 어린 님프, 개, 돌고래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동부 연못의 중앙에는 젊은 신 아폴로(Apollo)의 형상이 있다. 
분수대는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두 조각은 6 개의 동일한 청동 돌고래로 둘러싸여 있다. 
금박을 입힌 바다 동물의 입에서 강력한 아크 제트물이 분출한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전면

정원에 들어서면 잘 조경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빠져나가면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훤히 드러난다. 
북쪽으로는 연한 갈색의 벽에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흰색지붕, 
그 위로 황금색의 탑이 찬란한 로코코 양식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 전면에서 인증샷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 여름궁전

 

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작은 오두막에서 이주해 와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고 한다. 
1층은 표트르 대제의 방이고 2층에는 예카테리나 1세의 방이 있었는데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은 표토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름 궁전(Peterhof Summer Palace)''이라고 불린다. 
표트르 대제가 베르사유 궁전을 염두해 두고 조성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궁전은 길이 300m의 2층 건물로 1714년에 건조되고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0년이나 지난 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여름궁전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만에서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이 조성되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 중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다.  
총면적 1000ha의 부지에는 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 공원,  
가로수 길, 대궁전을 포함하여 20개의 궁전건물이 서 있다.

 

러시아 황제 문장인 쌍두 독수리상이 있는 표트르 궁전 꼭대기의 장식

쌍두 독수리 문장은 27m 높이에 설치했는데 특수 장치로 인해 풍향계처럼 돌아간다. 
이 독수리는 머리가 세 개로 되어지만 보는 각도에서는 머리 두 개만 보이도록 되어 있다.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탑을 가진 여름궁전 동쪽 입구의 성당 (Church Of Grand Peterhof)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정원으로 향한다.

 

[영상]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윗정원(Upper garden)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출입구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은 중요한 행사와 축하 행사, 리셉션, 
무도회 및 가장 무도회를 주최하는 러시아 차르의 주요 의식 거주지였다. 
이 기념비적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약 30 개의 방이 있다.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 사진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인 
첫 번째 방을 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 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연회실을 지나면서 건물 2층은 아랫공원 부분과 윗정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아랫공원 쪽은 거울방, 모델방, 황금의방, 침실, 황제와 황족들의 전용 하얀식당, 중국의 방 등 
주로 여황제들이 사용하였다는 방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우측으로 돌면서 윗정원 부분은 표트르 대제의 침실, 표트르 대제의 집무실 등으로 나뉘어진다. 
윗정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한 영국식으로, 
아랫공원은 대분수(삼손분수), 장난분수, 요술분수 등 많은 분수와 
바다까지의 작은 수로 등 프랑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대조국전쟁(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들의 보복으로 대궁전 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 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실내 관람을 위해서 신발 겉에 신어야 하는 덧버선 바구니

 

실내 관람을 위해서는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황금으로 치장한 대궁전의 화려한 그랜드 계단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대부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Winter Palace, Hermitage Museum) 건축가인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디자인되어서 스타일은 비슷하다.

대궁전 입구는 건물의 서쪽 부분에 배치되었고

1751년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황금으로

치장하여 만든 화려한 그랜드 계단이 나온다. 

현재 페테르고프 대궁전은 러시아 통치자의 그림과 도자기, 

직물, 독특한 가구 및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약 350 점의 

전시물을 포함하는 독특한 역사 및 예술 박물관이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18 세기에 댄스홀은 머천트 홀로 알려졌고 270평방 미터로 넓은 면적은 
대궁전 서쪽 절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창문이 2단으로 배열되어 있고 수많은 거울과 그림이 장식으로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제는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금을 방 디자인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인증샷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체스마(Chesma) 홀은 관리들이 리셉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왕좌의 방 앞에 위치한 대기실이다. 
독일 출신 화가 제이콥 필립 해커트(Jacob Philipp Hackert 1737~1807)가 그린 

12점의 작품이 홀의 주요 장식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들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체스마(Chesma) 전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였다.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재미있는 사실은 체스마(Chesma) 전투의 그림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카테리나 여제 (Catherine II)는 이탈리아 리보르노 항구에서 호위함을 폭파하여 
해전을 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북쪽과 서쪽 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세 개의 빈 벽을 따라 두 줄로 배열된 12 개의 유화를 비춘다. 
해커트(Hackaert)가 그린 이 대형 캔버스는 1769년에서 1773년 사이에 
지중해, 에게해 및 아드리아 해에서 러시아 함대가 수행한 전투에 대한 일종의 그림 기록이다. 
자세한 내용이 담긴 전투 차트, 사건을 목격한 옛 선원의 회상, 
해커트(Hackaert)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괴테(Goethe)는 이러한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왕좌의 방은 군주가 공식 행사를 '위엄 있게' 주재하고, 의회를 개최하고, 
청중에게 경의를 표하고, 높은 영예와 직책을 수여하고, 기타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러시아의 차르가 사용하는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단과 왕좌는 
백말을 탄 캐서린 2 세의 큰 그림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에는 또한 수많은 유화와 11개의 샹들리에가 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는 1730 ~ 1740년 

러시아 제국의 여제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옐리자베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 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옐리자베타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즉위식 다음 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 공을 
러시아로 불려서 황위 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울리히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옐리자베타 여제가  표트르 3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고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던 중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가 약혼자로 결정되었다.

훗날 캐서린 여제가 되는 소피아는 1744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소피아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 폐기하여 
연대기 작가들의 애를 태웠던 차리나 옐리자베타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한 <회상록>까지 남겨 
후대의 작가들을 위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프로이센식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그의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 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 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브릴리언트 말을 타고 황후 캐서린 II, 1762. by Virgilius Eriksen. Grand Peterhof Palace.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비길리우스 에릭센(Vigilius Eriksen, 1722~ 1782)은 
1757년부터 1772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 황제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을 소재로 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덴마크로 귀환한 이후에는 왕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을 포함한 덴마크의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의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고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카잔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남편을 폐위하고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표트르 3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당했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살해를 명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일반 대중들은 
예카테리나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1762년 9월 차르의 고도(古都)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여제의 34년 통치시대가 개막되었다.

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 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 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 · 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 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 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 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 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 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도 

술에 관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였다. 
리가는 소련에서 독립한 발틱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현재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건강이 나빠진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가에서 나는 약주를 마셨는 데 
마신 지 얼마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로 여제를 살린 술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프랑스의 드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인데 
'블랙 리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세기 중반에 리가의 한 약사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보드카에 25 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45도의 독한 술인데 자세한 성분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이 술은 여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감기 치료 효과와 
건위(健胃, 위를 튼튼하게 함) 작용이 있는데 이름처럼 짙은 검은빛이다.

명실공히 라트비아의 국민주인 리가 블랙 발삼은 국제적인 주류 
품평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기 때문에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예카테리나 여제의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모순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이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 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 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궁전 초상화 홀

이 방의 벽은 유명한 러시아인과 표트르 대제의 친구 및 친척의 그림으로 덮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 곳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조심스럽게 잘 복구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궁전의 내부는 왕좌실, 서재, 중국식 로비, 흰색 식당, 초상화 홀의

다섯 부분으로구성되었으며, 내부 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

 

대궁전 초상화 홀
대궁전 전체 초상화의 갯수가 370개가 넘는다고 한다.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대형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흰색 식당은 축제식 사용으로 원래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했다. 
그 후 1774 ~ 1775년에 독일계 건축가 유리 펠텐(Yuri Felten 1730~1801)은 
예카테리나 여제(캐서린 대제)의 주문으로 홀을 크게 바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정원의 주철 난간 건축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유리 펠텐의
새로운 스타일은 이전 라스트렐리 스타일과 완전히 반대였다. 
금빛의 광택 대신 내부는 엄격한 고전적인 대포로 장식되었다. 
방 중앙에는 유명한 영국의 거장이자 도자기 산업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만든 흰색 식탁보와 
30인용 도자기 세트로 덮인 거대한 테이블이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중국식 왕족 거실

 

대궁전 탈의실

 

대궁전 '하프가 있는 방'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 (왕족들의 휴게실)

 

대궁전 표트르 대제의 오크 연구

 

대궁전의 푸른색 드로잉 룸

 

대궁전 브레이크 프론트(Breakfront) 찬장 및 세라믹 스토브

이 세라믹 스토브는 제국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페테르고프(Peterhof) 대궁전뿐만 아니라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 
심지어 우글리치(Uglich) 궁전과 같은 많은 웅장한 궁전에서 볼 수 있다.

 

[영상]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구글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푸슈킨이라는 고을이 있다. 
러시아 국민시인 푸슈킨이 이 고을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생이라 하여 
볼셰비키 혁명 후 고을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 
이곳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의 명칭은 표트르 대제의 황후이며 제2대 러시아 황제이기도 한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Alekseevna 1684~1727)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와 관련 건조물군 중 하나로 
18세기 러시아 건축 예술의 산물이며,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17년 예카테리나 1세는 독일의 건축가 요한 프리드리히 브라운슈타인
(Johann-Friedrich Braunstein)에게 자신을 위한 여름 궁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그후 1743년 4번째 군주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 치세에 완성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1756년 5월 6번째 군주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 여제의 

명령에 따라건축가 B. F. 라스트렐리의 감독 아래 옛 구조물을 철거하고

대규모적인 규모로 훨씬 웅장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 (Catherine Palace)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 Amber)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공원 안내판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남쪽 구역

훗날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북쪽 구역

1999년부터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호박방은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입구 계단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은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서유럽식 왕궁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예카테리나 궁전 무도실

옛날 왕가에선 반드시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야 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에겐 첫번째 본부인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복사업을 펼치는 남편에게 적합한 부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의 적과 내통하며 표트르 대제를 배신하기도 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선 이혼을 금지했기에 표트르 대제는 
이혼한 첫 번째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트비아 출신의 둘째 부인 예카테리나 1세는 호방한 여장부였고 
표트르 대제와 궁합이 잘 맞았다. 
표트르 대제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했다. 

 

표트르 대제의 초상.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요로결석으로 서거했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5월 17일 4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의 초상.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는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 ·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또한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독일 출신에 남편 표트르 3세의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에게도 찬미의 대상이며 민족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영토를 서쪽과 남쪽으로 20만 평방 마일(258,000㎢) 이상 확장시켰고,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 주를 재조직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옛 도시들은 새롭게 단장시켰다.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문학을 적극 후원해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고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예카테리나 궁은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영국식으로 캐서린)에게 
결혼 선물로 준 땅에 지은 성과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정원의 끝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가 있다. 
‘에르마타주’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의 건축물이다. 

 

황제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농노가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테이블을 올려주었고, 
그러면 황제는 그곳에서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냈고 
그러면 농노가 물건을 밧줄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 시설이 보존돼 있다. 
작동은 되긴 하지만 이젠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복원된 호박방

호박(琥珀 Amber)이란 고대의 송진이 굳은 것으로
진주, 산호와 함께 정의상 광물은 아니지만 보석으로 취급된다.
보통 송진(수액이라고도 함)이 굳어서 100만년정도 지나면 호박이 되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생기기 전에 생성된 것으로 자체가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안에 모기나 벌레 등이 들어 있는 것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호박방

방 전체가 황금 같은 빛을 발하는 호박으로 장식되어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호박방'이 예카테리나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금의 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호박을 싹 긁어가서 나중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단순히 자연 호박만을 가지고 치장해 방을 만든 게 아니라, 
호박에 열처리 등의 다양한 기법을 써서 의도적으로 색이나 모양을 변형시킨 호박들과 
자연 호박들 및 금과 거울을 같이 써서, 매우 화려한 방을 만들었다.

 

호박방

원래 이 호박방은 독일에 있던 것으로 1701년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인 조피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지은 것이다.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설치될 예정이던 이 호박방은 계획과 달리 완공 이전에 
프리드리히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사치 행각을 싫어하던 지독한 구두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공사가 중단된 호박방은 베를린 궁전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1716년 러시아로 옮겨갔다. 

 

호박방

표트르 대제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호박방을 보고 반해 

러시아에도 호박방을 짓고 싶어했다. 
이를 알게 된 독일 프리드리히 1세가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호박방을 떼어다가 보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던 와중으로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전쟁 와중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방문한 표트르 대제는 

이 방을 보며 감탄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패널들을 표트르에게 외교협정의 대가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로 옮겨진 호박 패널에 예카테리나 2세 때 
더 많은 양의 호박들이 추가되어 방 전체를 장식하게 변모했다.

 

호박방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호박을 싹 긁어가며 훼손했고, 
현재 여름궁전에 있는 호박방은 
원래 호박방이 있던 자리를 공들여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나치가 훔쳐간 호박방 원본은 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설, 
나치의 비밀 벙커에 숨겨 두었다는 설 등이 분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영상] Catherine Palace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앞에서 인증샷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캐서린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178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에게 마노방(Agate Rooms)을 만들도록 했다.
카메론은 이탈리아로 가서 고대 온천의 건축을 연구했다. 
마노방 건물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여러 개의 욕조가 있다. 

건축 공사는 1779 년에 시작되어 1788 년에 완공되었다. 
이 마노가 박힌 인테리어를 포함하는 건물은 콜드 배스 (Cold Bath)라고 불린다. 

 

예카테리나 2세의 마노방(Agate Rooms)

1 층에는 러시아식 목욕탕, 로마식 목욕탕, 수영장, 냉탕, 
마사지 실, 오락실 등 다양한 종류의 황후 목욕탕이 있다. 
산수유, 진품 및 인조 대리석, 청동 장식품과 같은 다른 귀중한 광물이 사용되었다. 
마노방은 인테리어 작업에 벽옥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은 1779년 캐서린 대제(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러시아에 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찰스 카메론(Charles Cameron 1745~1812)의 건축물이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북쪽 끝에서 웅장한 계단으로 접근 할 수있는 갤러리는 현재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캐머런 회랑(Cameron Gallery)

주변 공원, 특히 큰 연못 (Bol'shoy Prud)과 정원을 향하여 최상의 전망을 갖도록 

설계된 건물의 윗층은 44 개의 가느다란 이온 기둥으로 구성되고 
고대의 위대한 인물의 청동 흉상으로 장식된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큰 연못 (Bol'shoy Prud)
카메론 갤러리 계단 아래에 있는 헤라클레스 동상과 큰 연못 (Bol'shoy Prud)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정원

예카테리나궁 앞에는 대규모 정원이 있다. 
정원은 영국식 정원, 프랑스 베르사유식 정원, 폴란드식 정원 등으로 구분된다. 
영국식 정원은 예카테리나 1세의 취향, 
폴란드식 정원은 표트르 대제의 취향을 반영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베르사유식 정원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로망이었다고. 

 

작은 연못과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목욕탕 (Upper Bath Pavilion)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 조감도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을 관람하는 우리 일행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인증샷

 

궁전 공원

 

궁전 공원에서 신혼 사진을 찍는 장면

 

궁전 공원

 

목욕탕 (Lower bath)

 

목욕탕 (Lower bath)

 

궁전 공원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그로토 파빌리온(Grotto Pavilion)
큰 연못 연안에 위치한 그로토 파빌리온은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공연을 하는데 사용된다.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궁전 공원의 그로토 파빌리온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4인조 아카펠라 공연이 있었다.
나는 관람료 대신으로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 내부와
4계절의 공원 풍경이 담긴 USB를 구입했다. 한 6천원 쯤이었던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그로토 파빌리온 내부

 

인증샷

 

인증샷

 

물고기 다리 (Fish Channel)

 

인증샷

 

물고기 채널 (Fish Channel) 

 

인증샷

 

인증샷

 

키메라 그릇(Bowl with Chimeras)

 

에르미타주 파빌리온 (Hermitage Pavilion)

 

캐서린 공원(Catherine Park)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걷다보면 
공원의 끝에 멋지게 장식된 2 층짜리 건물 에르미타주(Hermitage)가 나온다. 

 

하늘에서 본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란 ‘혼자 있기 좋은 방’이라는 뜻으로 
"고독의 장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다. 
에르미타주(Hermitage)의 아이디어는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에르미타주(Hermitage)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사냥 오두막을 닮았지만 내부는 아주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구조는 십자가 모양이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에르미타주(Hermitage)의 건설은 미하일 젬초프(Mikhail Zemtsov 1688~1743)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건축가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된 청년 그룹 최고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젬초프는 실제로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건설 초기에 사망했다.

에르미타주는 1756년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 1700~1771)에 의해 완성되었다. 
라스트렐리는 실제로 러시아에서 바로크 양식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인증샷

건물은 2 층으로 되어 있다. 
벽은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의 주요 궁전처럼 하늘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파사드는 벽을 어깨에 메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사자 가면도 있다. 
화려한 주철 그릴과 일부 장식품이 도금된 발코니가 여러개 있다. 
전체 건물은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의 작은 버전처럼 보인다.

 

인증샷

 

에르미타주는 체스판의 패턴으로 흑백 대리석 사각형으로 포장된 
패드 위에 세워졌고 해자로 둘러쌓여 있다.
구조는 대리석 조각상과 꽃병으로 가득찬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금박을 입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에르미타주는 돌로 지어졌으며 치장 벽토로 마감되었다. 
해자는 더 이상 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입장을 하기 위해서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에르미타주(Hermitage) 2층 큰 홀

2층에 큰 홀이 1개 있고 그 주변에 4 개의 작은 방이 있다. 
벽은 금박 조각, 그림 및 많은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인증샷

 

인증샷

 

에르미타주(Hermitage) 천장 장식

천장 장식은 이탈리아 예술가 발레리아니 (G. Valeriani)와 
페레시노티(A. Peresinotti)의 참여로 그려졌다. 
이들은 Peterhof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름궁전(Grand Palace) 천장 장식에도 참여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궁전 공원 풍경이 훤히 보인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작은 방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황제가 2층 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하인들이 1층에서 식탁을 깔고 
음식을 준비해서 밧줄을 잡아당겨 2층으로 식탁과 음식을 올려주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제가 종이에 써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러면 하인이 필요한 물건을 밧줄로 올려준다. 
현재에도 에르미타주엔 밧줄과 도르레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을 위해서 시연을 해 준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후계자인 캐서린 대제는 종종 에르미타주에서 외국 대사를 접대했다. 
캐서린은 여기서 손자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자동 홀 테이블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길게 선이 그어진 부분과 접시가 놓인 부분이 
음식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리락 오르락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궁전만큼 황폐화되지 않았다. 
복원이 필요했지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신중하게 개조된 건물은 캐서린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주변에는 잘 손질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변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에르미타주를 관람하면서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가고 내려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음식을 실어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관람을 마치고 덧버선을 반납한다.

 

[영상] Hermitage Pavilion

 

아드멀티(Admiralty)

 

아드멀티(Admiralty)

 

점심 식사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1851년~1852년에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이 지어졌다.

 

큰 연못과 터키식 목욕탕 (Turkish bath pavilion)

 

큰 연못과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은 1768~1774년 러시아 대 터키 전쟁인 
키오스 전투와 체스마 전투에서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해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

기둥은 회색 대리석 받침대에 있고, 세면은 청동 옅은 부조이다. 
러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네 번째 측면에는 전투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와 같은 화강암 플랫폼에 놓여 있으며, 
받침대에 접근 할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그릴이 있는 아치형 개구부가 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예카테리나 2세. Portrait of Catherine II  Walking in the Park

Empress of Russia, 1794. oil on canvas.  94.5 x 66cm. 

Tretyakov Gallery, Russia Moscow

체스미 기둥(Chesme column)을 배경으로 예카테리나 궁전 공원에서 

산책 중인 캐서린 대제(Catherine II)를 그린 러시아 화가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의 1794년 작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영상] Catherine Palace Park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과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구글 지도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동쪽에 있는 러시아 두 번째 호수 라도가 호에서 
서쪽으로 740km를 흘러와 핀란드만으로 들어간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상공에서 보기

 

네바 강은 오랜 세월동안 ​오랜 세월 만 연안에 섬 100여 개와 늪지로 이뤄진 
삼각주를 만들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기반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곳에 처음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지대였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옛 노브고르드공국을 거쳐 15세기 모스코바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정작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표트르대제가 스웨덴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 이곳에 새로운 도시건설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1703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건설을 시작으로 상트페트르부르크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과 습지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돌로 세금을 부과하는 법령을 만들어 도시의 초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된 노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습지였던 이곳에 가적같이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됐으며 
급기야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된다.

 

바실리예프스키(Vasilyevsky) 섬과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상공에서 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섬과 운하들이 300여 개의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북쪽의 베네치아’로 불리기도 하며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다운 도시로 
러시아와 유럽의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할 당시 이 바실리 섬을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 중심지로 건설할 계획을 가졌으나 
강의 범람과 늪지대라는 지리적 취약점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잘 구획된 도로망이 인상적이며 

아직도 18세기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비롯해 
과학 아카데미산하 박물관, 상품거래소 등이 자리하면서 

학술 및 예술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현재는 2개의 메트로역이 있으며 핀란드만을 통해 

헬싱키를 비롯 발틱 3국 등으로 출발하는 항구가 있다.

 

네바 강변 예르미타주 박물관과 궁전다리

제정 러시아 당시의 오랜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이자 짜르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 문학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의 상징적 도시이기도 하다.

 

네바 강 궁전다리(Dvortsovyy Most)와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궁전다리를 지나면 바실리 섬으로 오른쪽에 로스트랄 등대가 보이고

왼쪽의 건물은 동물학 박물관이 보인다.
등대 있는 곳이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으로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강 건너편으로 에르미타주박물관과 페트로피블롭스크 요새가 보이는 삼각점에 있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관광객들이 한번 거쳐가는 곳이다.

 

겨울궁전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열려 있는 궁전다리

네바강변 겨울궁전 옆에 위치한 궁전다리(Dvortsovyy Most)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 큰 섬인 바실리섬과 연결된다. 
이 섬은 동서 6.6km, 남북 4.2km에 달하며 4개의 크고 작은 다리를 통해 
넵스키대로가 있는 중심지역과 뻬뜨로그라드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겨울궁전 가든 옆 도로에서 본 열려 있는 궁전다리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현재 해군성 제방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 "Tsar Carpenter"에 대한 인상적인 기념비는 
특히 매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매우 세밀하게 제작된 기념비는 한 손에 말아 올린 소매와 도끼로 
배를 만드는 힘든 작업을 겪고 있는 젊고 단호한 표트르 대왕을 묘사한다. 
300년 전 젊은 표트르 대왕이 러시아 해군 건설을 돕기 위해 
네덜란드 잔담시에서 러시아로 가져갈 선박 건조 기술을 배웠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1909년,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폴타바에서

러시아 해군의 대승리 20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레오폴드 번시탐이 완성한 기념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에 선물했다. 
이 기념비의 제목은 "잔담시에서 선박 건조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대제"였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는 청동 기념비 사본이 잔담시에도 선물되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차르 카펜터"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의 기념비는 
표트르 대제도 장인으로 일했던 해군성 제방의 네바 강 유역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집권 직후 기념물을 비극적으로 파괴했다.

 

차르 목수 (Tsar Carpenter) 동상

하지만 원래 "차르 카펜터" 기념비의 청동 사본은 네덜란드 잔담시에 남아 있었다. 
1996년 9월 7일, 네덜란드 정부는 러시아 해군 창설 300 주년과 네덜란드에 있는 
표트르 대제 체류 기념 3세기를 기념하여 이 청동 사본을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전달했다. 
이 기념비는 왕실 프리깃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왔고 
헬리콥터를 통해 프리깃에서 해군성 제방의 받침대에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네바 강과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라이온스(Lions of the Palace Pier)

 

로스트랄(Rostral Colums) 등대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구 해군성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열리고 닫히는 궁전다리(Dvortsovyy Most)

 

겨울궁전 방향으로 궁전다리(Dvortsovyy Most)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조감도

겨울궁전에서 궁전다리를 건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바실리예프스키 섬(Vasilevsky Island)이 나온다. 
섬 입구 네바 강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핀란드 만으로 흐르는 곳에 
붉은 기둥의 등대 2개가 나란히 서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동물학 박물관과 해군중앙박물관이 마주보고 서 있다. 
수많은 다리와 운하로 연결된 페테르부르크여서 

이곳이 섬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는 암스테르담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늪지대인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운하망과 

도로망을 만들 때 현재와 같은 직각 구조로 계획하였다. 
즉 동서로 세 개의 대로를 만들고 남북으로 길을 만들어 

서로가 교체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네바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표트르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에는 공공 건물들과 많은 주택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18세기 당시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곳도 많이 있다.

이 등대는 19세기초 건축가 프랑스 건축가 토만(Thomas de Thomon)이 세웠으며, 
당시는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였고, 해군 박물관은 당시 

상공회의소로 쓰여진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한 겨울엔 이곳이 말썰매 경주장이기도 하였다.

 

바실리예프스키 섬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로스트랄 등대 (Rostral Colums)는 양쪽으로 2개인데 
1810년에 세워졌으며, 빨간색으로 칠해진 기둥에는 여러 개의 뱃머리 장식이 붙어 있다. 
이러한 모양의 건축물은 해전의 승리와 자국 해군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로스트랄 기둥은 독립형 구조로 실제로 기둥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옅은 부조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배의 뱃머리를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기둥의 높이는 32m이고 가스 버너의 화염 높이는 7m다.
남쪽 및 북쪽 열, 총 두 개의 열이 있는데 남쪽 방향은 큰 네바(Bolshaya Neva) 방향이고 
북쪽 방향은 작은 네바(Malaya Neva) 방향이다.

 

8 개의 선로 장식된 등대 기둥

각 기둥의 몸통에는 8개의 뱃부리(rostras)로 장식되어 있다. 
뱃부리는 4줄 대칭으로 배열되고 가장 큰 뱃부리(rostras)는 기둥의 하단에 있다. 
배의 활은 위치에 따라 네바 강이나 증권거래소 건물을 향한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여성 조각

각 기둥의 하단은 남자와 여자의 두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각각 상업과 바다의 신을 의인화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역사를 상징하는 남편과 아내라고 믿는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남성 조각

또다른 사람들은 볼가(Volga) 강, 네바(Neva) 강, 드네프르(Dnieper) 강 및 
볼 호프(Volkhv) 강과 같은 러시아 강을 상징한다고 이 인물을 의인화한다.
조각품의 재료로는 야외에서 빠르게 굳어지는 석회암을 사용했다. 

 

로스트랄(Lighthouse) 등대 날개 달린 인어상

뱃머리를 장식한 조각상이 특이하다.
상반신은 벗은 상태고 하반신은 용의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기둥은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해전에서 승리하면 원주를 세우고 포획한 배의 뱃머리를 잘라 기둥을 장식하였는데 
러시아도 이를 본따서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럽을 오가는 선박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사이렌의 꾐을 피하려고 
비슷한 인어 모양 사이렌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등대 꼭대기에는 기름 접시가 있어 축제나 기념일에 불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이것은 등대라기보다는 기념비라고 보아야 될 듯하다.

 

로스트랄 등대

등대에 달려 있는 장식물은 뱃머리로 로스트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 역시 뱃머리이다. 
기둥의 대에는 러시아의 4대 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르, 볼가 강을 상징하는 조각품들이 있다. 
이 아름다운 등대는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소와 데도몬에 의해 설계되었다.

 

광장 반대편에도 같은 모양의 등대가 하나 더 있다.

 

등대는 지금도 국경일이나 도시의 경축일 전야와 축제 때 불을 밝힌다. 

일부 학자들은 로스트랄 기둥이 바다가 아닌 강둑에 서 있기 때문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로스트랄 기둥은 
1995년 50,000 루블, 1997년 50 루블 지폐에 묘사되어 있다.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 항공 사진

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와 로스트랄 등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해 있는 그리스 부흥 건축의 중요한 예시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돔 두 토몬(Thomas de Thomon)에 의해 설계된 증권거래소는 
1805년부터 1810년 사이 건조되었다. 
로스트랄 등대는 바실리에프스키 섬의 구 증권거래소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2m의 원기둥이다. 
로스트랄은 뱃머리를 의미하며, 기둥의 대에는 소련의 4대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로, 볼가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 
1810년에 돔 두 토몬의 설계로 당시의 상품거래소와 함께 만들어졌다.

두 등대 사이 중앙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전에 상품거래소 건물로 
도리스식 건축양식으로 그리스 신전을 많이 닮았다. 
이 건물도 이 건물 또하 프랑스의 건축가 장 프랑수아 또마드 또몽의 작품으로 
현재의 50루불 지폐에도 나와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현재는 인류학박물관이다.

구 상품거래소 (해군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 섬은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항구가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이므로 
19세기 초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구 상품거래소는 도리스식 주랑(柱廊)을 가진 건물로 ‘러시아의 파르테논‘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내부에는 해군 관련 전시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 쯤에 동판으로 부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인다.
이곳의 등대와 건물들 그리고 강가의 선착장까지 자세히 표시해 놓았다.

 

동판 부조

 

로스트랄 등대가 네바 강을 끼고 있는 탓에 네바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잔디와 모래가 없어서인지 해수욕과 태양욕을 즐기는 분들은 없다. ㅎ

 

결혼식을 올린 신랑신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곳은 겨울궁전, 성 이삭성당,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등을 네바 강과 함께 
사진 배경으로 하기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관광객들 뿐 아니라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행복한 앞날을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미 100년이 넘은 예수의 다리 등 네바 강의 12개 다리들은 
조각품들이 각기 다르고, 얼음이 녹는 초여름부터 새벽에 양쪽으로 들리며 
배들이 발달된 운하를 통해 모스크바까지 다다른다. 
새벽에 부지런하면 교량 관리자와 이야기를 하고, 직접 가운데까지 내려가서 
이 광경을 만끽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오른쪽으로 네바 강 건너 일렬로 늘어선 에르미타주 박물관 풍경이 환상적이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이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해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네바 강변의 하중도에 처음 건설했다. 
강국 러시아가 왜 스웨덴 해군을 경계했는지 의문일 수도 있는데 

당시 스웨덴은 유럽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내흥을 겪는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원래 중심지였던 키에프 지방이 몽골에 의해 쑥대밭이 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국가를 개편한지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인접국 스웨덴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가 오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늪지대였는데, 
이 도시가 거의 처음 기반을 닦은 곳이 이 요새 근처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지 중 하나. 
가운데의 뾰족한 건물은 성당으로, 러시아 제국이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 이후의 차르와 황후들의 관이 있다.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는 사후 안장되었고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된 후 
암매장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시신을 수습해 1998년 여기에 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제정 시대 여러 위인들이 한때 수감되었던 옛 감옥 등 
여러 구역이 다른 테마로 관리되고 있다. 
성벽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착공된 곳으로, 
1712년부터 1733년까지 약 21년에 걸쳐 세워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교좌가 있었으나 1859년 성 이사악 대성당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카잔 대성당에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St. Petersburg State University)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724년 1월 28일에 표트르대제가 세운 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페트로그라드 대학교, 

레닌그라드 대학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국립 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상공에서 본 풍경

러시아에서 국립모스크바 대학교와 함께 일류학교로 쌍벽을 이룬다.

 

네바 강에서 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캠퍼스 전경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교정에 세워진 박경리 선생 조각상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2018년 6월 20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동상이 세워졌다. 
대학 본관 뒤 동양학부 건물 옆 현대 조각공원에 세워진 
전신 높이 135cm의 작은 동상 앞면에는 선생의 시 ‘삶’의 마지막 구절인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가 새겨졌다. 


2013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푸슈킨 플라자’에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1799~837)의 동상이 세워진 것에 대한 

답례이자 한러 우호를 높이는 문화 교류의 하나로 추진됐다.

국내 작가의 동상이 해외에 세워지기는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상반기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이 들어간 강좌가 개설되었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은 2015년 고향 통영과 
‘토지’의 최참판댁이 복원된 경남 하동에 세워진데 이어 
원주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대를 합쳐 모두 4개다. 
모두 서울대 조소과 권대훈 교수가 제작했다.

 

푸시킨의 집 박물관


바실리예프스키(Vasilevsky) 섬에 있는 푸시킨의 집 박물관 
(Literary Museum of the Institute of Russian Literature) 외관 보기

 

[영상] 바실리예프스키 섬 비르제바야 광장(Birzhevaya Platz)

 

표트르 1세의 오두막집 구글 지도

트리니티 브리지(Troitskiy Bridge)를 건너서 오른 쪽 네바 강변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과 표트르 대제 오두막 집

여름 정원(Summer Garden) 내 표트르 대제 여름궁전에서 볼 때
네바 강 바로 건너 편 마주보는 곳에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집이 위치해 있다.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앞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기념비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표트르 대제 오두막집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그 최초의 건축물인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건축을 감독하기 위해 1703년 5월 말경 
며칠 동안에 만들게 했다는 송판로 지은 오두막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표트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보트도 전시되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표트르 대제의 통나무 오두막 집이다.
벽돌 건물은 이 오두막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용 건물이다.

표트르 대제가 요새 건설과 궁전 건설이 끝날 때까지 무려 8년 동안 살았던 오두막집이다.


1918년부터 국가 관리에 들어갔다. 
박물관에는 북방 전쟁(1700-1721) 승리에 관련된 자료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8세기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으며 당시에 황제가 쓰던 생활용품과 침실 등을 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집 내부

 

표토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배
아마도 요새가 섬에 있다보니 섬에 드나들기 위해서 사용했던 배였던거 같다.

 

표트르 대제의 조각상과 배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Aurora)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 부근에 러시아 순양함 한 척이 영구 정박해 있다. 
순양함 오로라는 극동에서 러시아 해상 전력의 확장 프로그램 하에 
1897년에 시작하여 190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 해군본부에서 건조되었다.

1903년 11월 8일, 오로라 함은 파견함대와 함께 크론슈타트, 포클랜드, 알제리, 
스페시아, 비제르타, 페라에우스, 수에즈, 지부티 등을 거쳐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파견함대는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시작된 덕에 발트 함대에 배치되었다.

오로라 함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참전하였다. 
1905년 5월 27일에서 28일까지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완패하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06년 2월 오로라는 리바우 항으로 돌아갔다.

 

볼세비키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순양함 오로라(Aurora)

7000톤급 일반 순양함에 불과했었던 이 함정은 1917년 10월 1일 오전 9시 40분에 
함포 한방을 쏘아 올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바로 그 신호탄 한발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레닌을 선두로 한 볼세비키 혁명이 시작된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상 전투를 위해 양함의 대포만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현재 이곳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경에 삼성 광고판이 보인다.

 

[영상] Cabin of Peter the Great in St. Petersburg,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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