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16.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한편 1974년 7월 구속 100일만에 먼저 석방된 혜숙은
함께 행동했던 동료들이 대부분 감옥에 남아 있는 사정이어서
무척이나 외로웠던 모양이다. 

 

73년 가을,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연세대에 복학한 후
기독학생회총연맹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고 지냈던 혜숙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내게 자주 '형, 형'하면서 말을 붙여 왔다.
운동과 인생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녀의 짝사랑 얘기도 들어주는 등
우리는 자주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산에서 서울로 유학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누이의 헌신적 지원으로
용돈이 그리 궁하지 않게 생활했던 나는 후배들의 상담자역을 맡기도 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혜숙은 조금 특이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후배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따라다니는 눈치가 보이니까
나는 점점 혜숙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가지게 되면
저 어마어마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함께 석방되자마자 월정사로 입산한 여익구처럼
스님이 되는 길로 가면 어떨까 생각했고
신부가 되거나 결혼할 수 없는 조건으로 몰고 가야만
나를 버텨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고민했다.

 

나는 교회에서 자랐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 대한 애착과 의무 때문에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정을 꾸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또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운동을 포기해야 되는 게 아닌가 여겨진 것이다.

 

'나는 사유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된다. 
자식을 갖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이나 신부의 길로 들어서면 어떨까?


그래야만 가정과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
평생토록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숙은 집안 사정도 어렵고 사춘기 짝사랑의 실패로
정신적 지주가 없어서 방황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독신을 강조하는 내게 정신적인 기대를 한 것 같다.

 

나는 후배의 인생 상담을 받아주는 마음으로만
그녀를 만나려 했고 그 만남도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하였으나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장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하느님, 이 험난한 세상 속에 휩쓸리거나 타락하지 않고
의로운 뜻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옵소서.
저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살도록 지켜주옵소서.
필요하다면 결혼과 가정을 갖지 않도록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신부나 혹은
나 자신을 지키고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길로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만약 저에게 결혼과 가정을 가지고도 감당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인도해 주셔도 좋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절절한 기도를 하기 힘들지만
그때는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한 제목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다짐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결혼을 안 하기로 했다.

 

스님보다는 신학을 전공하고 종교에 애착을 가진만큼
신부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갔다. 

 

평생을 박 정권 타도를 위해 바치려면 결혼은 타협이라고 생각해서
그녀에게도 자신있게 내가 가기로 다짐한 방향을 이야기 했다.

 

혜숙은 이런 생각을 가진 나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자기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 않자 약이 올라했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게 기대면서 의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늘 선을 긋고
혜숙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때때로 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마음 속에서부터 허물어버리고 싶은 갈등에 빠지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을 하곤 했다.

 

"혜숙이는 후배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가 여자로 보이는 순간부터
내 자신이 증오스러워졌다.

 

손목을 잡아 보고 싶고 껴 앉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참으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져 견딜 수 없었다.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득실거리는 마음이 속속들이 추악한 모습으로
내 얼굴에 나타나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디다 못 해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계속 "혜숙이는 후배다!" 하고 다짐하면서 당당하게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혜숙에게 '난 결혼 안하겠다'고 강조하고 공언했다.

 혜숙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동안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당함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었고
성적 본능을 자제하려는 사춘기적 고민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나의 본능은 너무나도 혜숙에게 끌리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녀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정하게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혜숙은 속상해 하고 약이 올라 하면서도
아랑곳없이 계속 끈질기게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강제 연행 미인계 사건은 서울 지역 대학가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혜숙의 소개로 이화여대 학생회 임원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한 여학생 간부가 실실 웃으면서 내게 야릇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일이 정말 벌어졌었느냐고 묻는다.
그런데도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느냐는 거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면서
요즈음 이화여대 캠퍼스에 무슨 소문이 나도는지 아느냐고 한다.
그 다음 시리즈가 있는데 한번 알아 맞춰 보란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허허 웃으며 무안한 분위기를 때우려 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궁여지책으로 대답하자
한 여학생이 나서서 이대에 소문이 파다한데 무슨 소문이냐 하면...

신문에 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개는 고자다!' 라는 거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함께 떠나갈 듯 소리지르며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나는 무안하고 멋적은 표정으로 따라 웃기는 했지만
느닷없는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홍당무처럼 되어버렸다.

요즈음 같으면 여학생들이 남학생 하나를 놓고서
오히려 집단적으로 성희롱을 가하는 꼴이었다.

나는 이 난처한 위기를 어떻게 넘기나 하고 궁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경 구절 한 대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웃음소리가 조용하게 잦아들면서
나는 표정을 조금 엄숙하게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그 다음 시리즈를 내가 대답으로 내 놓아야겠는데...
그렇다면...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일행은 순식간에 박장대소하고 배꼽을 쥐어가며
한동안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2 부 / 17. 허물없이 편안하게  



1965년 경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매년 120 여 졸업생 중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학생은 이삼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정도다.

학교 수업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고 과외 수업을 지도하는 곳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오산에서 서울로 올라 와
순화동에 있는 이모님 댁에 머물며 종로 사설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순화동에서 학원이 있는 종로까지 걸어가다 보면 길목에 이화여고와 경기여고를 지난다.
학원에서도 경기여고 학생들이 나와 같은 반에서 여러 명 수강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경기여고생들은 아무리 추워도 오버를 입지 않는다고 할만큼
교복과 배지와 가방을 그처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여기는 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골 고등학생이 보무도 당당한 경기여고생을 은근히 부러워하면서
사춘기적 주눅들었던 경험이 오히려 혜숙이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우기 혜숙의 언니와 오빠가 모두 경기여고와 경기고 출신인데다가
그녀가 이대 약대에 진학하게 된 것도 언니가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집안에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니
시골 출신인 내 입장에선 이런 여자가 분에 넘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처럼 분에 넘치는 여자가 쫓아다니니 나로서는 부담이 되어 떨쳐버리고 싶었고
혜숙은 이 대목을 전혀 이해하지도 눈치채지도 못했다.


나는 본래 마음 속으로 부담되는 일을 무리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다.
나는 혜숙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 혜숙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랐다.


나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약간은 손해보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 왔다.
무리한 상황이 닥쳐오기 전에 나 자신을 스스로 조절해 온 이 훈련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과정에서도 드러나 나는 주로 조정하고 화합하고 통일하는 역할을 맡아 해 왔다.

혜숙은 나와 약속한 시간에 늦어본 적이 별로 없다.
늦으면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는게 아까워서 그런지 항상 10 ~ 20분 전에 미리 나온다.


나는 약속 시간에 곧잘 늦곤 했다.
그녀가 30분, 1시간 씩 나를 기다리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연세대 앞에 있는 대야성 다방에서 아침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잊어버렸다.

오후 4시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 다방에 갔더니 혜숙이 그때까지 앉아 있다가
입구에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든다.

"바빳어 형? 왜 인제서 나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무려 6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녀와 결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전술적으로 다른 여자를 사귀어서
그녀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지만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성균관대에 다니는 한 여학생에게 접근했다.
공주 출신인 숙희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던 해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다.

연세대 입학 동기생들 가운데 사회문제연구회 동아리 친구들이
지금까지도 유우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당진 앞바다에 있는 난지도라는 섬 주인집 아들이다.

그 섬에 관광명소로 해수욕장이 있어 우리는 거기에 놀러 가기로 하고
내가 함께 동행할 여대생 팀을 교섭하기로 했다.

나는 숙희에게 친구들을 모아서
내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도 좋다고 쾌히 승낙을 했다.
떠나기 전에 상견례를 겸해서 양측이 함께 만나기로 했다.

모임을 주선하게 된 나는
혜숙에게 진행되는 계획과 내용들을 이야기했다.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떠나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자리를 준비하느라고 약속 시간 20분 전에
모임 장소인 시청옆 아가페 다방으로 나갔다.
그런데 혜숙이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어? 여기는 어떻게 왔어?..."

혜숙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대꾸했다.

"신경쓰지마!"
"왜 그래?"

"나는 그냥... 혼자서 형... 자기 얼굴 보고 싶어서 왔으니까..."
"어?..."

"난 형 얼굴만 보면 돼... 형은 나한테 신경쓸 필요 없어...
참견할 필요도 없구..."

그리고는 팩하고 삐쳐서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두꺼운 책을 보고 있다.

"어? 그게 무슨 얘기야?..."

"난 자기 얼굴 보러 왔다구! 이제 얼굴 봤으니까 됐어...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모임 있다며? 거기 가봐..."

혜숙이 굳은 표정을 하며 언성이 점점 높아지길래
나는 주위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자리를 찾다가 일행이 많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넓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았다.

시간이 되자 내 친구들은 모두 왔는데
숙희는 친구 한 명과 둘이서 나타났다.

"어, 정말 미안해요... 친구들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이 친구는 연락이 돼서 나오긴 했는데...
집에서 여행 허락은 못 받았다고 하고...
저도 시골에서 아버지가 빨리 내려오라 하셔서
함께 가기가 힘들겠어요..."

학창 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함께 떠나려던 여행 계획은 이렇게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음 한켠에서 그때 나는 이 여자를 선택하면
인생이 이리로 갈 것 같고
한 시간 전에 나와서 삐쳐 있는 저 여자를 선택하면
내 인생이 저리로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자간에 뭔가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숙희는 자기도 못 가고
친구들도 갈 형편이 안 된다고 친구와 함께 바로 일어섰다.

주선한 입장에서 난처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나와 같이 운동하면서 가까이 지내는 이대 후배가 와 있는데
같이 동석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다.

나는 혜숙이에게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의논을 하자고 제안했다.

혜숙은 굳었던 얼굴이 금방 풀어지면서
내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혜숙은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선지
같이 여행 갈만한 친구 몇몇에게 연락을 해 보겠노라고 했다.

약속한 날 모여 보니 내 친구들은 다 왔는데 여자는 혜숙 혼자 뿐이었다.
마침 얼마 전 약혼한 친구가 약혼녀와 동행으로 나와 다행스러웠다.

3박 4일 간의 바캉스에서 혜숙은 내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나 역시 그렇게라도 함께 해 준 혜숙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 후부터 우리는 보다 허물없이
편안하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2 부 / 18. 냉동기술학원



학교로부터 제적을 당한 나와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가을 학기가 시작됐지만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이때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와 독일 정부 등에서
석방 학생들을 위한 지원금을 보내 왔다.

순수한 학생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엄청난 고문과 조작이 있었다는데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을 한국 정부가 보호하지 않는다면
국제 사회가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이 지원금을 집행하게 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와
엠네스티 한국지부에서는 석방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 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는 냉동기술을 배우기로 하고 당시 수원역 앞 매산로에 있던
수원냉동기술학원 2 급 기능사 과정에 등록했다.

기술을 배워 두면 공장에 취직하기도 쉽고
어쨌든지 살아 가면서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함께 공부하는 학원생들은 대개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수원 공군 비행장에서 근무하는 공군부대원 그리고 고3 취업 준비생들이었다.

오산에서 수원으로 통학을 하면서 나는

대학생이 제적당하고 냉동학원에 다닌다면
주변에서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아해할 것 같아서
일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에서 약간 소란이 일었다.
이대 약대 뱃지를 단 여학생이 애인을 만나러 왔다면서
수강 중인 나를 면회하겠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보기 드문 풍경이지만
그 적에는 대학에서도 학교 뱃지를 달고 다닐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때다.

이 일로 내 신분은 그만
어이없이 들통 나버리고 말았다.

"이대 약대생이 애인이라고 면회를 올 정도면
아무개 씨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혹시라도 면회를 안 시켜 주면 어쩌나 염려하던 혜숙이
"그 사람 연세대 다녔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무실 분위기가 이상해 졌고
나는 학생운동 전력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해서 말을 얼른 둘러댔다.

"저...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하는데
거기서는 냉동기술이 인기라고 해서요..."

수업은 4개월 과정이었다.
4개월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해도 필기 시험 합격율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는데
나는 초등학교적부터 자연이나 과학 과목에 취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적도 그리 신통치 못해서 내심 저으기 걱정이 됐다.

게다가 전선은 어떻고 배선은 어떻고 플러스 마이너스가 어떻고

하는 강의 내용은 가끔씩 결강해 가면서 알아듣고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더욱이 연세대에 다닌다고 소문이 나버려
떨어지면 망신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대 약대생이라는 여자는
자기 수업이 끝나는대로 매일같이 찾아와
야간 수업 중간에 떼를 쓰다시피하며 불러 내는 통에
나는 혜숙이를 붙잡고 사정을 했다.

"이러지 말고 앞으로 두 달만 참자...
내가 연세대학에 다녔다는 소문을 다 내 놓고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무슨 창피냐?..."

두 달 여를 혜숙의 극성스런 면회 데이트 때문에 망친 나는
필기시험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막판 한달 간은 열심히 공부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은 무조건 외워 댔다.
필기시험은 평균 60점이 합격점이다.

시험을 치르고 난 후
답안지 메모한 것을 가지고 학원에서 맞춰 보니까
가까스로 76점은 되는 듯했다.

그러자 함께 공부했던 학원생과 강사들이 놀라는 표정이다.
4개월 가운데 근 3개월 가량은 3 시간 수업 중에 2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땡땡이를 치면서 시험은 포기한 듯 매일이다시피 찾아 오는 애인과
데이트만 다니던 사람이 만만치 않은 시험에서 합격 점수에 들었다는 것이다.

'역시 뭔가 틀리긴 틀리구나...'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불안했다.

맞춰 본 건 그렇더라도 혹시 결과가 나와봐야 하니까...
하지만 그 시험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수사 기관에 연행되어 구속되고 말았다.

첫 면회를 온 혜숙에게 나는 무엇보다먼저
시험에 합격했는지 여부부터 알아보라고 했다.

다행히 냉동기술자격시험 2급 기능사 1차 필기 고사에 합격했다.
하지만 1년 이내에 서너 차례 시행하는 실기 시험을
치룰 수 없어서 필기 시험은 효력이 없어졌다.

필기 시험 발표 후 내가 1년 1개월 여 동안 구속되어
감옥에서 출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실기시험을 봤다면
지금쯤 냉동기술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냉동 학원에 다니던 시절 혜숙과 나는
수원역에서 남문까지 이르는 매산로를 수없이 왔다갔다 했다.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인 이 길은
우리에게 참으로 추억을 안겨 준 곳이었다.

주말에는 하루에 몇 번 밖에 안 다니던 버스를 타고
딸기밭이나 저수지 등지에서 낭만을 키우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학 친구나 후배들이 오산으로 놀러 오면
인근에 있느 산척이나 장지리 저수지 세마대 등지로 안내했다.

기나긴 오산천변 뚝방길을 걷기도 하고
청학봉을 오르기도 했다.





2 부 / 19. 통닭구이



서대문 자취방은 동료 선후배들이
편안하게 모이는 아지트가 되어 갔다.


나병식의 소개로 서울대 오둘둘 사건을 주도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신동수(사업) 선배와 훗날 나병식의 동서가 되는 장만철(영화감독)이 한동안 도피처로 삼았고
서울법대 최혁배는 장기간 기거하면서 석방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강습하기도 했다.


1975년 8월말 경 장만철에 대한 수배가 점점 좁혀 오면서 불안해지게 되자
나는 장준하 선생 빈소에서 만난 서울의대 서광태를 만나 장만철의 도피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두 달 여 뒤 10월 말경
나는 느닷없이 남산 중앙정보부 6국으로 불법 연행되었다.


▲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가 바로 중정 6국 학원수사 담당 건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하게 있는데
수사관들은 내게 서광태를 아느냐 묻고 다짜고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서광태와는 장준하 선생 빈소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한 일과
그 후 이대입구 제과점에서 만나 서울대 수배자 장만철을 숨겨 주도록 부탁한 일 뿐이어서
사실대로 진술했다.


장만철과 나병식, 서광태가 있는 곳을 실토하란다.
그러면서 건물 지하실로 끌고 갔다.


▲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그곳은 이이 1년 6개월 여 전 민청학련 사건 때

여러 날 들락이며 수사를 받던 곳이어서 큰 두려움 없이 끌려 갔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 달랐다.
느닷없이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완전히 벗긴 상태에서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쪼그려 앉게 했다.


철봉을 무릅과 수갑을 채운 손목사이로 끼우고
철제 책상 두 개를 벌려 놓은 곳으로 내 몸을 들어 올려 놓았다.



나는 수갑을 채운 손목과 무릅 사이 철봉에
마치 통닭구이 모양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되었다.


고문자들은 내 얼굴을 얇은 천으로 뒤덥고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실 어머니께 '엄마' 하고 매달리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식된 도리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잊지 못할 한을 안겨드리고
먼저 죽어가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죄송스러움이 떠올라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로 하여금 협박과 공포
이 모진 고문 앞에서 육체적 고통으로 떨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저들에게 빌거나 애원하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그럴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제 영혼을 편안히 거두어 주옵소서.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이의 마음을
주님께서 특별히 위로해 주옵소서......"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물고문을 당하기 위해 수건을 얼굴에 씌우는 순간
나는 형장에 끌려가 용수를 머리에 씌우고
밧줄을 목에 감는 사형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빨리 포기하고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리라.

어짜피 마셔야 될 물이라면 내 의지로 마셔버려야지
하는 생각에 나는 물을 마구 들이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목이 막혀 헉헉대면서
나는 죽기로 작정한 듯 마구 삼켜댔던 것이다.


"이 새끼, 아주 독종이네. 사실대로 불 거야 안 불거야?
너 같은 놈 뒈진다고 우리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임마!"


"어, 이 새끼 보게. 뒈지기로 작정했구먼. 뒈져라, 뒈져...
벗어 놓은 네 옷 갖다가 휴전선 철조망에 걸어 놓구
목메어 보고 싶던 아버지 수령 김일성이 만나러
철조망 넘어가다 들켜서 총아 맞아 뒈진 걸로 하면
끝나버리는 거얌마~~~!”


"너, 솔직하게 다 털어놔...
너 언제 평양 갔다 왔어? 너 평양 가서 누구 만났엄마~~~!...
김일성이 언제 만나고 왔어?...
다 털어놔야 살지, 너 안 그러면 여기서 죽엄마~~~!"


"야, 나병식이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냐?
그 놈들 지금 평양 김일성이 한테 갔엄마...
얌마! 너 나병식이 한테 무슨 지령 받았어?
너한테 지령한 사람이 나병식 말고 또 누구야! 너 안 불면 여기서 되져 임마!"


"야! 이 빨갱이 새끼야...
평양에 언제 갔다 왔는지 말 안해?
너 상부선이 누구야? 누구냔 말얌마!"


나는 정신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래, 잘 있어라. 늑대와 사자라도 네 놈들보다는 낫겠다.
야수 앞에서 무릎 꿇고 빈다고 빈속에 아량을 바라겠냐.
나 먼저 그냥 간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멀리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열 살 때 쯤 오산천을 오리 쯤 거슬러 올라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애방웅덩이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여자애들이
노래하는 소리,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오는 그림에서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몰래 얼굴을 내밀고 보니까
우리 반 여자애들 너댓 명이
벌거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와서 얼른 옷을 주워 입고는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 나무꾼과 선녀에서처럼
여자애들이 벗어 놓은 옷을 몰래 집어 들고 달아나
모래 속에 파묻어 숨겨 놓는다.


장면이 바뀌면서 그 중의 한 애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여자애가
나만큼 나이 먹은 성숙한 처녀가 되어
큰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순간 나는 큰 도둑질을 하다 들켜버린 사람처럼
가슴이 덜컹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갑자기 물벼락이 쏟아지더니
모든 장면이 멈추고 아스라하게 정신이 들어오면서
컴컴한 지하 고문실, 축축한 물바닥, 널려 버려진 물수건,
철봉대 등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 온다.


'아, 내가 왜 여기에 있나...
나쁜 장난치다가 들켜서 가슴이 철렁했어도
그때 거기가 좋았는데......'


나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그토록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필이면 여자 동창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떠오르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련가?...


정신이 들고 나기를 그렇게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서
나는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무슨 영문인지 나병식과 서광태에 대해서 계속 캐물던 수사관들은

나를 당장 구속해야 하는데 지금은 나병식을 찾는게 무엇보다도 급하게 되어

일단 석방할테니 나가서 나병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알아가지고

자기들에게 꼭 알려줘야 한다면서 이틀만에 나를 석방했다.


저들은 느닺없이 고문하고 협박하면서 

소위 끄나풀이나 밀대 역할을 내게 맡긴 셈이다.


나는 기독교회관과 목요기도회 모임 등을 다니면서

나병식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중정에서 나병식을 다급하게 찾고 있다고 알렸다.

나도 나병식을 찾아서 중정에 알려줘야 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저들이 내게 비밀스럽게 하라거나 은밀하게 하라는

주의를 주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러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이번에는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나를 연행해 갔다.


거기에서는 내게 신사적으로 대해 주는 척했다.

나병식과 서광태에 대해서 진술하는데 별로 궁금한게 없다는 분위기다.


중앙정보부에서 내게 무엇을 묻고 나는 어떻게 진술했는가를 묻는다.

그러더니 나병식은 중정으로 가면 고생만 하고 신변도 위험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나병식의 신변을 보호해 줄테니까 꼭 보안사로 자수하라고 전해달라는 거다.


그제서야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무언가 큰 사건을 놓고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서로 박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다.


▲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벽을 2018. 8월 16일 오후 공사 관계자들이 해체해 크레인으로 들어 옮기고 있다.

서울시는 이 공간을 ‘중앙정보부 6국’을 의미하는 ‘6’과 고문과 용공조작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6’으로 이름짓고 내년 8월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중정 6국 자리에 선 최민화씨 - 남은주 기자


1975년 11월 29일 박정권은 소위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여기에 관련된 학생은 모두 14명이다.


서울의대 : 강종헌 서광태 전성환 황혜원 황승주 진관보 정필현 이인수 송군식 장우환 전영훈 이근우

서울문리대 : 나병식

고려대 : 박종열


박 정권은 이들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대국민 반공교육용으로 이용하려 했다.


변호사들도 긴급조치 9호 위반죄는 인정하지만, 간첩죄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관계자 14명 중 강종헌 서광태 박종열만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광태는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0 26 이후 석방되었고,
이듬해 3월 복교하여 현재 의사로 재직중이다.


당시 이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는지는 서광태의 상고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하기까지 이르게 된 서광태에 대한 고문의 실상을 살펴본다.


“75년 10월 29일(토) 오전 9시 10분,
10여분 늦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수사관님들을 따라 나서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우는 등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와,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지만,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그 아래 박달나무 곤봉같은 나무를 집어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워카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는 통에 기절하였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자근동 부러졌습니다.


옆방에서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 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하나 쯤이야…’
라는 그 지하실의 전율할만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중략)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죽음의 살인극에 휘말린 것입니다.


…이윽고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뭐 너도 이북에 갔다 왔어…’ 운운의 미칠 소리를 해대며
며칠을 계속해서 밤이면 고문의 비명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디서 가만 있지, 얼마나 공이 많이 들었는데.
야! 고집부리지 말고 타협하자….’

단식으로 버티던 체력도 한계에 이르고, …기억이 없습니다.
오직 안가겠다고 반항하며 어디론가 개처럼 끌려간 기억뿐입니다.


얼마 후 병원입니다.
정신이 들락말락 하면, 무슨 신문에 북괴라고 쓴 옆에다
별표(인공기 표식 - 기자 주)를 하여
다시 간첩이라는 망상에 빠지게끔 세뇌하였습니다.

백의의 천사님이 오셔서 부릅니다.
조용 조용 말씀하십니다.


‘…(평범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느닷없이) 자수하셔요….’

육감적입니다. 전혀 기억이 희미합니다.
상처도 있고, 아직도 생생한 담뱃불로 지진 자국을
병원에서 얻은 것 같은데,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간첩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자수하자. 내가 이북에 갔다 왔나 …”

…(중략) “강종헌이 알지 ”
“잘 모릅니다”
“야, 이새끼야 , 왜 몰라!”
“….”

무수한 폭행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 가니,
또 다른 나의 벌건 선혈이 뚝뚝 바케스째 기다립니다.
얼핏 거울을 보니, 피에 뜯긴 해골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수직으로 거꾸로 세워서 팔굽혀 펴기를 시킵니다.
못먹고 자도 못잔 해골에 피가 몰려 쓰러지면,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발길질입니다.


…(중략) 그리고 옆방에서 교포학생이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던 서투른 한국말의 고문소리도 점점 낮아집니다.


“이 새끼 이북에 갔다 왔지 ”
“아닙니다”
“….”


항거하던 어린 참새도 이젠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지고,
사지에 넣어 비틀던 지렛대가 부러졌나 봅니다.

바로 이곳이 독재의 금과보도로구나.
바로 이곳이 생사람 잡아 산송장 만드는 조작극의 현장이구나.(후략)”


강종헌 간첩조작사건과 재심


1970~80년대 발생한 ‘재일교포유학생사건’ 피해자들은 대체로 재일교포 2세들로,
모국에 유학을 와서 재외국민교육원(연구소)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고
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고교 또는 대학 재학 시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동료 또는 선배를 통해 조선문화연구회, 한국학생동맹,

재일조선인유학생동맹 등에서 활동한 바가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수사기관에 의해 반국가단체구성원에 의한 지령 및
공작금 수수, 기밀 탐지 등 간첩 혐의로 되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강종헌(1951년생, 당시 24세)은 일본 나라겐 야마도 다카다시 하나조노죠 726번지에서 태어나
오사카 부립 덴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4월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연구소를 수학한 다음
1972년 3월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의대 재학 중 ‘사회의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본과 2학년 재학 중 1975년 11월 28일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연행되어
1976년 2월 23일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6년 7월 7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 기각,
1977년 3월 15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그 후 강종헌은 복역 중이던 1982년 3월 2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 1주년에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984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2월 26일 잔여 형 반감으로 감형되었다가
1988년 12월 20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한통련, 범민련 등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고 와세대 대학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일동포 강종헌 간첩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수사 기록, 관련 기록,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보면,
강종헌이 장기간 보안사에서 불법 구금되어 수사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 행위를 당하였음이 인정된다.”고 결론짓고,

“국가는 진실규명 대상자 강종헌에게 불법 구금과 가혹 행위를 가한 사실에 대하여
동인에게 사과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을 진행하는 등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강종헌은 즉시 법원에 재심 신청을 하여
2011년 10월 12일 재심 개시 결정되었다.


2013년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당시 민간인을 상대로 수사권이 없는 육군 보안사령부 소속 수사관들이
경찰 단계의 수사를 담당한 것은 불법 수사에 해당한다."며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 수집한 증거는 모두 위법 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수사 기관이 수집한 증거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고문·가혹 행위 등 위법적으로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시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15년 8월 21일
강종헌에 대해 재심 무죄를 확정했다.



 

2 부 / 20. 아버지와 아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 ·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3ㆍ1 민주구국선언(三一民主救國宣言)발표했다.


▲ 명동성당


이를 빌미로 하여 박정권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대량 구속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을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三一民主救國宣言事件), 또는 명동사건(明洞事件)이라고 한다.


사건 직후 검찰은 "구정치인들과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분자들을 규합,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수련회·집회 등의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철폐·정권퇴진 등을 요구하는 불법적인 구호를 내세워 정부전복을 선동하였다"
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보선 전대통령·김대중·함석헌 선생을 비롯하여
정일형 박사·윤반웅·문익환 목사·함세웅·신현봉·김승훈 신부·이문영·서남동 교수 등 18명이 기소되었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과 변호인단 총사퇴 등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관련자 전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피고들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미친 파장이 컸다.
재판과정에서 정치적·법률적 체제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거부와 항의를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와 정치인, 신교와 구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연대을 강화하게 되었다.


한편 원하는 대로 길들여지지 않아 관리하는 데 애를 먹일 뿐만 아니라

미인계 사건을 불러일으켜서 수원경찰서장이 시말서를 쓰고

정보기관 직원들이 징계를 받는 등 피해를 입게 된 지방 정보기관들은

우리 집안을 가만히 놓아 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 보건소 공무원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사표를 내게 되었다.

박 정권은 이렇듯 집요하게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 내려 했다.


1976년 4월 25일 정체불명의 장정 4명이 느닷없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본인을 에워싸고 온몸을 잡아 끌고 나가 군용 지프차 뒷 자석으로 밀어 넣고는

차창 밖을 볼 수 없도록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우고 바닥을 향해 짓누른 채

어디론가 강제로 불법 연행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수원경찰서와 가까이 있는

보안사 수원분실, 이름하여 송악사라는 곳이다.


공포와 억압 분위기에서 강제로 진술서를 작성하던 중 수사관은 내게
“왜 조용한 지역 사회에서 어려운 형편 속에 공무 집행하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징계를 받고 시말서를 쓰고 직위 해제를 당해야 하느냐”는 말을 듣고


나는 연행되어 온 까닭이 혹시 강제 연행 미인계 사건으로
수원경찰서 서장과 정보과장, 정보계장, 담당 형사 등이
징계를 받게 된 데 따른 보복이 아닌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저들 중에는 오산 지역 7년 쯤 선배(박명삼)되는 이도 있었다.

저들은 내가 모 다방에서 다방 주인 마담에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외국으로 망명하려 한다고 말하여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는 내용으로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황당한 생각에 시인할 수가 없었다.

그 다방 주인 마담은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말을 섞을 사이도 아니었다.


또한 내가 알기로 그 다방은 오산에서 보안부대 출신 등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심과 정보 등을 탐문하고 파악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들이 다방 주인 마담이라는 분과 말을 맞추고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면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다고 여겨졌다.


저들 중 선임인 듯 한 수사관이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내 등짝을 내리쳤다.

그러자마자 2~3명이 달려들어 곡괭이로 내리치고 내 얼굴과 복부와 정강이 등을

구둣발로 마구 짖밟아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버렸다.


몸서리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 꼬박 이틀 정도 잠을 한숨도 못 자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협박과 고문을 당하면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다가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쓰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또다시 군용 지프차 안 뒷좌석에 실려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채 어디론가 연행되어 갔다.


도착한 곳은 보안사 수원분실의 차상급 기관으로

인천 자유공원 아래 위치한 보안사 인천분실 소위 인천송악사였다.


그 곳에서는 취조도 안 하고 오른손에 수갑을 채워서

긴 나무 의자에 연결해 놓은 상태로 오른손이 저리고 비틀려서

떨어져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인 1976년 4월 29일,

나는 또다시 군용 지프차에 실려 서빙고 소재 보안사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이곳은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대 의대 간첩단 사건 때 이미 수십 차례 들락거렸던 곳이다.

서빙고 대공분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하실 감방으로 끌려 내려갔고

거기에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어야 했다.







군 사병들은 나를 둘러싸고 

“이 빨갱이 새끼야! 너네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 여기서 살아 나가나 함 두고 보자”
하면서 5파운드 곡괭이 자루와 구둣발로 본인의 전신을 마구 때리고 짓밟았다.


나는 그만 혼절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정신이 깨어나면서 밀려드는 공포와 두려움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군인 3명이 몰려들어 내 무릎에 오파운드 곡괭이자루 몽둥이를 끼우고

꿇어 앉힌 다음 발로 마구 밟아 짓이겨 댔다.

그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기절하거나 죽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처럼 몸서리치는 공포 분위기 속에 꼬박 나흘 정도 잠을 한 숨도 못 이룬 채
비몽사몽한 상태로 협박과 고문을 당해가며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다.


조사의 내용인즉슨 일단 내가 모 다방에서 다방 주인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

망명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러자 내가 다방 주인에게 한 말을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나는 고문에 견디다 못해 평소 유신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박정희가 물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꾸며낸 말이라고 진술하였지만
고문자들은 그건 우리가 바라는 진술이 아니고,
정히 그렇다면 네 부모님한테라도 들었다고 진술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강요했다.


나는 견디다 못해 아버님께 들었다고 진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저들은 1976년 5월 3일 나의 아버님(1909년생, 당시 68세)을 서빙고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 1940년 여가시간에 테니스를 즐기시는 아버지


나는 간첩단 사건으로 아버지와 아들, 삼촌 등 일가족이 함께 고문을 당하고 수사를 받는다는 말은
신문 보도나 월간지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고문과 강제로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조사를 받는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결국은 아버님과 어머님께 엄청난 수모와 불효를 저지르게 되어서
그야말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버님 역시 협박과 공갈, 잠 안재우기 고문 등을 받으면서 아들인 본인에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망명하려 하였고, 망명처를 물색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진술할 것을 강요받았다.


아버님께서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자 수사관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 본인의 진술서를 아버님께 보여주면서
아들이 아버님께 들었다고 이미 진술을 한 것이니 그대로 진술해야 된다고 강요하여
결국 아버님으로부터 허 위진술을 받아 냈다.


그러면 아버님은 누구로부터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캐묻자

아버님은 전직이 공무원이셨던터라 나보다는 요령 있게 대답하셨던 것 같다.

목요기도회에서 윤반웅 목사님이 설교할 때 들었다고 진술하셨다.


당시 윤반웅 목사님은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님, 함세웅 신부님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3.1 민주구국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이셨다.


한편 수사관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와 같은 내용을 전파한 사실을 더 털어 놓으라고

협박하고 고문하면서 내게 강요했다.


내가 더 이상은 진술할 것이 없다고 하자
연세대학교 석방 학생들끼리 간혹 비밀리에 만나고 다니는 것으로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본인이 다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넌지시 암시하면서 진술할 것을 강요하고

또다시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뭇매를 가하면서 잠 안재우기 고문을 가해 왔다.


 나는 견디다 못해 연세대 석방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으로 진술하게 되고

이에 따라 서창석, 김학민, 김영준 등도 영문도 모른채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강제 연행되어

위와 같은 내용을 본인에게 들었다고 강제 진술하게 되었다.


1976년 5월 18일, 나는 아버님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수원경찰서로 이첩되어
다음 날인 5월 19일, 아버님은 석방되고 나만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원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저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구속시킬만한 사안이 못 되었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 집안을 쑥대밭 만들고
나만 구속시킬 각본과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아버님이 석방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이때 아마도 우리 집안 대대로 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사상이 의심스럽다든가 불순한 꼬투리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을 게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일제 때 공무원이셨고
백부와 백모님께서 한국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참살 당한 내력이 있어
이른바 고정 간첩이나 빨갱이로 내몰리지 않고 우리 가족을 방어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1909년 경기도 평택시 가재동 선산 선영이 있는 마을에서
500여 년 동안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 온 장손 집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 학습을 마치고 서정리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16세 때 경성으로 상경하여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밤에는 독학하는 등 주경야독으로
일제 치하에서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다시 수십 대 1의 관문을 거쳐

외무성 소속으로 만주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같은 민족인 이주민과 독립 운동을 하던 분들과도
직간접적인 교류가 없을 수 없었던 아버님은
한창 욱일승천하던 일제가 결국은 패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미 1942년 사표를 제출한 뒤 사업을 하면서 정국을 관망하다가
1943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춘원 이광수나 정춘수 등등 다른 지도층 인사들은 일본의 권세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학도병으로 지원해 나가라 부르짖고

꽃다운 여성들이 정신대로 보내질 때
아버님은 오히려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일제의 권세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여 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
세상은 일제 부역자를 처단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한편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일제에 부역을 했더라도
전문적이고 경험있는 관리들을 적극 참여시켜서 안정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면서

이승만 정부에서는 아버님께 새로 구성되는 정부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어쨌거나 자신은 일제 치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사람이니
새로 태어나는 독립 정부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반성을 하시며 일절 공직을 맡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평생을 조용히 살아 오셨다.


나의 어머니(1918년생)는 함흥에서 초대교회 저명한 목사님의 딸로 태어나 

교회 재단인 함흥 영생여고보와 함남도립 함흥의료원 간호부과를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 간호부과에서 근무하던 중 공무원이신 아버님과 결혼하셨다.


해방 후 경기도에서 시행한 조산원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오산 읍내에서 조산원을 개업하셨다.

보건소가 생기면서 화성군보건소 가족계획지도원과 모자보건원 등으로

18년 여 동안 공직에 근무하시고 당시 화성군 일대 교회와 사회에서 엘리트 여성으로 활동하셨다.


나의 형님(1934년생)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2년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징집되고 유엔군 통역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오산 미공군기지(Osan Air Base, K-55)에서 통역원과 오산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셨다.


그리고 누이(1943년생)는 대한민국 육군 간호장교로 복무하면서

장래 간호감을 목표로 삼고 월남전에 2차례씩 참전하는 등으로 경력을 관리해 오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다섯 식구는 지역에서 유지 집안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집안으로 단란하게 살아 왔다.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집안에 의심스럽거나 불순한 꼬투리가 없는지 빌미를 잡으려고
이것저것 파헤치던 수사관은 그럴만한 단서를 잡지 못하자
아버지의 협조로 아들이 원만하게 관리되고 길들여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유신 헌법이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바뀌는 날까지
나의 양심과 신념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도 아들의 양심과 신념을 믿고
의로운 일로 받아들인다고 하셨다.

 

그동안 공무원이셨던 어머니는
마음 졸이시며 혼자서 가정을 지키셨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사단이 벌어지는 건지
전혀 알 길이 없으셨다. 

 

가뜩이나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알아볼 엄두조차 못 내시고 혼자서 구곡간장을 태우셨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절망 가운데 계셨던 어머니께는
혜숙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신 사자요

오로지 위로 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혜숙은 아예 오산 우리 집에서 서울까지
매일 통학을 해 가며 어머니 곁에 붙어 있었다. 

 

인권 단체와 종교 단체, 시민 사회 운동 단체에
사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알만한 분들을 찾아다니며
나와 아버지의 안위를 수소문했다. 

 

내가 재판을 받고 감옥을 사는 동안에도
혜숙은 내내 매일같이 나를 면회하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감옥에서도 요시찰로 분리되어 직계 가족만이 면회가 되던 시절에
혜숙은 담당 검사와 재판부를 찾아다니며
약혼녀라는 등록 절차를 만들어서 면회를 다녔다.

 

이즈음 혜숙의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옥바라지가
나와 우리 가족에 더할 나위 없는 격려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장안의 대학과 재야 단체 사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나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공무원에서 사표를 내게 되고

누나 역시 군 간호장교에서 전역하게 되었다.




 

2 부 / 21. 김지하의 양심선언

 


시인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75년 2월 15일
우리와 함께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 1974'라는 글을 연재했다.

김지하는 ‘고행-1974’에서 이렇게 썼다.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는 어느날,
누군가 가래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1사상 15방에 있던 나와 1사하 17방에 있던 하재완씨 사이에 통방이 시작되었죠.
…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다.
…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다’


… 출정하다가 인혁당 이수병씨를 만났습니다.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나라 위해 아무 일도 해보지도 못한 채 끌려들어와서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에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법정에서 경북대생 이강철이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안다고 시인하지 않는다면서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란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이렇듯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김지하는 석방된 지 27일만에 다시 투옥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김지하를 재구속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재판에 회부시켜
극형에 처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중앙정보부 내의 험악한 분위기가
외부에까지 알려지면서
김지하가 결국은 살아 남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으로
재야 민주진영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무언가 사생결단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당장에 긴급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벌어보는 정도였다.

 

75년 5월 1차 공판에서 재판부에 대한 기피 신청을 낸 직후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라고
시작되는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은밀히 나돌기 시작했다.


양심선언은 김지하의 문학적 상상력과
조영래의 탁월한 시대인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유신시대의 기념비적 문건이다.


 ‘장일담’이라는 장엄한 민중신학적 작품구상처럼
김지하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상상력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조영래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논리적 설득력이 읽는 이를 압도한다.


“총을 든 신부의 모습은 성스럽다.
… 떨리는 걸음으로 골고다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악까지도 각오하는, 그리하여 지옥 끝까지도 가려 하는
그 처절한 사랑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성스럽게 느껴진다.

비겁한 비폭력이 잔인한 폭력과 통하듯, ‘
사랑의 폭력’은 ‘용기있는 비폭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내가 지지하는 혁명은 이와 같은 철저한 비타협, 불복종의 비폭력주의와
고뇌스런 사랑의 폭력을 결합, 통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75년 8월4일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일본의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한글로 온 세계에 공표되었다.


선언문은 윤형중 신부를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의 시노트 신부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경북 왜관의 분도수도원 원장이었던
오도 하스 아빠스에 의해 일찍이 일본의 정의평화협의회에 안전하게 전해져 있었다.


그 운반에는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의 콜레트 누아르 수녀가 중요한 몫을 했고,
일본에서 양심선언의 번역과 발표를 주도한 것은 송영순(바오로·1930~2004) 선생이었다.


양심선언이 일본에서 발표된 바로 그날 저녁,
중정은 김지하는 물론 사방을 담당했던 교도관 등 상당수를 연행했다.


그들은 양심선언의 작성과 반출 경위를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이미 맞추어 놓은 진술 이상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 소년수도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다만 심부름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정에서 돌아온 김지하는 얼마 전까지 문세광이 있던 독방에 갇혔다.


방의 좌우 몇 개는 비워졌고, 24시간 티브이 카메라로 감시받는 등
더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보복이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김지하를 구출하기 위한 구명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기 위한 성명서에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요한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해서
북미 유럽과 제3세계의 15개 나라 200여명의 신학자가 서명했으며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르트르 등

세계적인 정치인·지식인들이 지지와 지원을 표명했다.


이처럼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국제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가자
중앙정보부는 김지하의 처형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서는 기왕에 처형을 못시킬 바에야
국제 사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재판 절차를 거치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웠던지
민청학련 사건으로 선고받아 형집행정지 처분된 무기징역형을
재판도 없이 취소해 버렸다.

 

이로써 김지하는 기한도 없는 세월을
감옥에서 갇혀 있게 되었다.

 

그 당시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정치 보복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당국에 대항해서
자기자신에 대한 항변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민주화 운동에 덧씌워질
'관제공산주의'의 굴레에 대한 예언과 함께
'반공'이라는 우상을 타파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재구속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 났다.

 

그 첫 번째 경우가 시인 김지하 시인이고
두 번째 경우가 장영달과 나병식과 나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에서 여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실형이 확정된 서강대 출신 김 윤 등이다.

 

내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인 김지하는 일반 수감자는 물론 교도관들까지도
일체 접근할 수 없도록 특별 감시를 받고 있었다.



 

2 부 / 22. 의리의 사나이 장영달



장영달(국회의원)은 오로지 나 때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석방되고 나서 그가 긴급조치 9호로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도
그 비슷한 경우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나보다 더 오랜 세월
무려 7년 여 동안을 감옥살이 한 친구다. 

 

내가 기독학생회총연맹 서울연합회장일 적에
그는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구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 고백했듯이
여학생과 스승의 관계를 진술하지 않는 대신으로
연배도 같고 기독교 배경으로 보호될 수 있는 그를 지목하여
구속당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이듬해 함께 출소했다.

 

그 후 김지하 양심선언 사건이 발생하자
나는 장영달에게 양심선언문을 전달하고
대학가에 배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전해 준 유인물을 후배들에게 전달하여
대학교에 뿌리다가 꼬리가 잡힌 장영달은
내 이름을 진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견디고 버텼다.

 

나는 딱히 고의는 아니더라도
숨길 수 있었던 그의 이름을 말해서
그를 징역까지 살게 했는데
그는 나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것이다.
 
서대문 구치소에서 먼저 구속된 장영달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만기출소할 때가 다가 와 있었다.

 

그 때 중앙정보부에서는 장영달에게
앞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각서 쓰면
석방시켜 주겠고 만약 각서를 쓰지 않으면
김지하처럼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집행정지 중인 7년 형을
취소시킬 수밖에 없다면서 각서쓰기를 강요했다.

 

장영달은 "난 절대로 각서를 못 쓰겠다"며 거절했다.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가 서대문 구치소로 직접 찾아 와
장영달을 만나는 등 여러 차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각서쓰기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서 장영달은 만기가 지났는데도 석방되지 못하고
다시 형집행정지 취소 처분으로
7년 형을 거의 다 살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장영달의 만기 출소가 취소되던 날
혜숙은 장영달의 가족과 함께 새벽 4시부터
그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장영달이 석방되지 않고 7년 형을 더 살게 되자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혜숙은 너무 상심하고 허탈해 했다.

 

장영달이 석방되지 못한다면
같은 조건에 처한 나 역시 석방되지 못하고
장기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혜숙은 그 날 아침 일찍 나와 면회를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달이 형이 못 나왔어...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었대...
영달이 형이 7년이면 당신은 12년인데..."

혜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계속 훌쩍거렸다.

 

"이제 나한테는 내 인생이 없어졌어... 
나 이제부터 자기가 석방되어 나올 때까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어야겠어...
당신이 집안 걱정 안 할만큼 12년 동안 돈만 벌겠어... 
그래서 당신이 석방된 뒤에는
남은 인생 마음껏 여행 다녀도 될 만큼 벌겠어...
지금부터 난 주변에 모든 관계를 끊고
오로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어야겠어... 흑흑흑..."

 

혜숙은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추가 징역 12년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에
당신이란 말 또한 처음으로 들어 보는 호칭이었지만
어색하기보다는 내 가슴 속에
진하디 진한 피흐름으로 흘러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서도 혜숙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마!...
이제 만나기 거북하니까 내일부터 면회 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오더라도 접견을 거부할 꺼야...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바꿀 필요도 없고..."

 

나는 이 말만 던져버리고는
짧은 면회 시간도 남겨둔 채 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사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발걸음은 무거웠고
목젖이 움직이면서 내면 깊숙이 울먹이고 있었다.



 

2 부 / 23. 마지 못한 각서

 


독방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비스듬히 누어 앉아
거미줄 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혜숙의 울음과 표정과 말들을 곰곰 되새겼다.

 

혜숙이 토해낸 표현들이 뜨거운 피가 되어
가슴 속 깊숙히 배어들면서 나의 전신을 감돌았다.

 

'아 ~ 난 혜숙이와 결혼하겠다!...
꼭 결혼한다!...
그래서 평생을 같이 한다!...
이제까지는 혜숙이 나를 놓지 않았겠지만
앞으로는 내가 혜숙을 놓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코 놓지 않겠다...'

 

혜숙은 그래도 계속 면회를 왔다.
몇 번을 거부할까 하다가
쓸쓸하게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혜숙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긴급조치 9호로 1년을 언도 받은
나의 징역형 만기일이 점점 다가 왔다.

 

하지만 나는 각서를 쓸 생각이 없었다.
만기 보름 전, 각서를 거부하면
12년을 더 살아야 되는 순간이 왔다.

 

교도관이 중앙정보부에서 특별 면회를 왔다고 안내하여
교무과로 나갔다.

 

나는 장영달의 생각이 머리 끝에서 맴돌아
결국 못 쓰겠다고 거부를 했다.

 

"여보시오. 난 장영달을 감옥에 놔 두고
나 혼자 나갈 생각이 없으니
여기서 괜히 시간 보내면서 설득하려 애쓰지 말고
그냥 돌아 가시오..."

 

냉정하게 거절하고 사방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아 ~ 이제부터 장기 징역을 살아야 하는구나...


혜숙의 절망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혜숙은 포기하지 않았다.


민청학련 사건의 공범이기도한 윤보선 전 대통령과
박형규 목사를 찾아가서 혜숙은
어떻게 석방될 도리가 없겠느냐고 사정하고 부탁했다.

 

"아무개가 저와 결혼할 사람인데
각서 한 장을 안 쓴다고 형 집행정지를 취소시켜서
12년을 더 살리겠대요... 
제가 12년을 기다려야 해요?
어떻게든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혜숙은 특별 면회를 하면서
나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박 형규 목사님 댁이랑 안국동(윤보선 전 대통령)이랑 찾아갔는데
자기한테 이렇게 전해 달라고 당부하셨어... 
재판도 없이 1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바에야
그까짓 각서 한 장 대충 써주고
일단 나와서 일을 하다가 다시 들어가서
재판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라고... 
12년을 징역 살 각오라면
밖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는데
왜 하찮은 각서 때문에 그런 역할을 포기하느냐고...
재판도 안 받고 12년을 사는 건
전술적으로 너무 무모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며칠 후 중앙정보부 요원이 다시 면회를 왔다.
안국동 어른과 박 목사님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
다시 한 번 가 달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각서를 써주기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이번에는 각서를 써 주고 나간다...
하지만 나가서 더 열심히 싸우다가 꼭 다시 들어 오겠다...
장영달이가 감옥에 있는 한 나는 반드시 또 들어 오겠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고
법을 준수하며 어쩌고하는 내용으로 쓰라고 견본을 주었는데
나는 "각서라는 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쓰는거지
양식을 보고 베끼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까탈을 부리면서
내 나름대로 쓰겠다고 했다.

 

"본인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며
이에 각서를 제출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식 절차라고 마음 속으로 위안을 삼으며...


훗날 나는 이 사건의 재심을 통해서

2013년 10월 30일, 37년 여 세월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부 / 24. 마지막 축제



그때만 하더라도 여학생이 학생운동에
직접 행동으로 참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혜숙은 이화여대 학생운동을 대표해서
수배와 체포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그때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도 피해가 컸다.
혜숙이 연행되었을 때
한번은 아버지까지 연행하여 바로 옆방에 가두고
아버지 귀에 들리도록 혜숙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강압적으로 취조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공포감을 갖게 하고
고함과 비명 소리가 아버지 귀에 들리도록 했다.

 

이는 당시 수사 기관에서 특별히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주 사용했던 수법이기도 했다.

 

심한 경우 혜숙이 직접 당한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 앞에서 남자 수사 기관들이 여학생의 옷을 발가벗기고
고문을 가하는 일도 있었단다.

 

혜숙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취조받을 때
중앙정보부 직원이 이화여대 부속병원 인턴으로 근무하던
언니에게 찾아가 동생을 잘 봐주고 면회도 시켜주겠다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농락하려다가
언니가 눈치를 채고 도망친 일도 있다.

 

이런 일을 당한 언니는
이처럼 야만적인 권력이 판을 치는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고 머물러 살고 있다.

 

또 한번은 수사 기관에서 혜숙을 잡으러 오자
혜숙은 급한 나머지 장롱 속에 몸을 숨기며

 "나 또다시 거기 들어가기 싫어!"라고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오빠와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억하며 가슴 아파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에게는
제자인 박혜숙과 친동생인 김동길 교수가
함께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통이 크고 정치력이 뛰어난 당대의 여걸 김옥길 총장은
서슬퍼렇고 살기등등하던 그 시절
혜숙이 수사받고 있던 남산 중앙정보부 정문 앞에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30 분 동안을 버티고 서서
"내 제자 내 놔라" 하듯 시위를 벌였다.

 

김옥길 총장과 김동길 교수는 모두 독신으로
평생을 한집에서 함께 살아온 남매여서
남달리 정이 돈독하고 의 좋은 사이였다.

 

따라서 오누이 김옥길 총장은
동생 김동길 교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누구보다 남달랐겠지만
혈육붙이 동생보다도 오로지 제자를 먼저 챙겼다.

 

서슬퍼런 중앙정보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못말리던 시위 덕분에 혜숙은 100 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김옥길 총장이 보였던
제자에 대한 애정과 책임, 용기있고 배짱좋은 행동은
대학 사회에 감동적인 일화로 회자되면서
다른 대학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는 김동길 교수를 누이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맞이하고 있다.


1년 후에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학생들 모두가
제적되어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혜숙은 김옥길 총장의 막무가내한 배짱과
각별한 배려로 복학하여 이제 졸업반이 되었다.

 

1977년 5월 30일 나는 두 번째 감옥에서
만기 징역을 살고 석방되었다.

 

석방되던 날,
혜숙은 내게 부탁할 말이 있다면서 주저주저하더니
6년 만에 졸업하게 되는 대학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게 되는 이화여대 5 월 축제에
함께 가 줄 수 없겠느냐는 거다.

 

학생운동의 입장에서는 그 엄혹한 시절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대학생들이
한가롭게 들떠서 화려한 축제를 벌이는 일이라든지
여학생을 상품으로 내세우는 5월의 여왕(메이퀸) 선발대회 따위의 행사를 벌이는 일 등을
일정하게 비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의 몸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순탄치 않은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된 혜숙이
학창 생활에서 마지막 추억으로 남게 될 축제에
나와 함께 동참하면서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심경을 나무라거나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 출소 다음 날이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행사가 있는 날이어서
나는 감옥 여독도 풀 새 없어 퉁퉁 부은 몸통에 째질듯 들어맞지 않는 양복을 억지로 걸치고
혜숙을 위해서 보답이라도 하듯 엉거주춤 따라 나섰다.

 

혜숙의 안내로 김옥길 총장께 인사드리러 갔다.
김옥길 총장은 나에게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면서
건강 상태를 묻는 등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더니 혜숙을 향해서


 ▲ 김옥길 총장


"혜숙아!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이렇게 '극소수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사람하고 계속 어울려 다니는 거니?"

 

하시며 한눈팔지 말고 졸업이나 잘 하라면서
배짱좋은 웃음으로 뼈 있는 농을 주신다.

 

그날, 이화여대 교수님들을 만나서 방금 석방되었다며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후배들과 어울리면서 티없이 즐거워했던 혜숙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 부 / 25. 월간 <씨알의 소리>



1977년 6월 석방되자마자 나는 함석헌 선생의 부름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4.19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무지막지한 군사 정권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씨알의 소리>를 펴내려면 원고를 청탁하고 받아 모아서 조판소에 넘기고
초교 재교 교정을 본 뒤 문화공보부 출판과에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보면 논문이건 수필이건 시건 가리지 않고
문맥이 맞건 맞지 않건 아랑곳없이
검열자 마음대로 중간중간 자르고 토막나 버리곤 했다.

 

때로는 작품 한 편을 몽땅 잘라버리기도 해서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이 불허되는 일도 허다했다.

 

함 선생님은 당국의 이런 조치를
참으로 못 견디게 괴로워 하셨다.

 

인간의 정신으로 빗어 낸 창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꽃피울 수 있도록
당국에서 권장하고 지원해야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자르고 꺽고 말라죽여버릴 수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나는 당국의 이런 야만적 관행과
매달마다 살벌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저들은 내가 스스로 길들여지기를 바랐겠지만
나는 저들의 검열을 피하고 돌파해 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갔다.

 

1977년 늦여름에 나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의 옥중시

'꿈을 비는 마음' 원고를 사모이신 박용길 장로님께로부터 받았다.

 

예사롭지 않은 이 시를 <씨알의 소리>에 실을 수 없을까 이리저리 골몰하던 차에
나는 작가 이름을 '늦봄'이라 쓰고 당국의 검열로 잘려서 모자라는 분량을

추가로 촉박하게 채워 넣는 글에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그 당시 '늦봄'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을 당국의 헛점을 파고 든 것이다.

 검열을 무사히 피하고 인쇄 과정에서 나는 작자를 '늦봄 문익환'이라고 큼직하게 써 넣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늦봄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은
원본 그대로 <씨알의 소리> 1977년 10월호에 온전히 실리게 되었다.

 

연세대에서 강제 해직 중에 있던 성내운 교수님은
이 책을 받아들자마자 그 날로 단숨에 외우셨단다.

 

그리고는 모임이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한동안 단골로 이 시를 낭송하시곤 했다.



 늦봄 문익환 / 꿈을 비는 마음

 

꿈을 비는 마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요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아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대접 떠 놓고
진주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님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녁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녁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철 들고 셈 들었다는 것들은 다 죽고
동남동녀들만 남았다가
쌍쌍이 그 앞에 가서
화촉을 올리고


... 그렇지 거기는 박달나무가 서 있어야죠 ...

 

그 박달나무 아래서 뜨겁게들 사랑하는 꿈
그리고는 동해바다에서 치솟는 용이
품에 와서 안기는 태몽을 얻어 딸을 낳고


아침햇살을 타고 날아오르는
황금빛 수리에 덮치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의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 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산과 들을 뛰노는 짐승이 되고
신나게 하늘을 나는 새들이 되고


펄떡펄떡 뛰며 날쎄게 헤엄치며
강물과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멋지고 아름다운 꿈 한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

 

(늦봄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전문)

 


이 글을 쓰면서 문익환 목사님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열정적으로 낭송하고 다니시던 성내운 교수님 생전의 모습이
함께 겹쳐져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아른거린다.

 

나는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원고를 청탁하고 재촉하면서 편집과 교정 보는 일로 밤을 지새웠다.

 

좌담회를 기획, 구성하고 녹음된 원고를 푸는 일로
혜숙이와 후배들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기독교 단체와 사회 단체에서 집회가 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광주든
반품되어 창고에 쌓인 지난호를 메고 나가 팔면서 정기 구독을 권면했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 이야말로
어찌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 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 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쉴새없이 매일매일을 긴장 가운데 생활하던 나는
이 일로 해서 우리나라 문단과
학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이고 양식 있는 지성인들과
두루 교류하고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 일상의 생활과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가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탁상일기는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선생님은 경험도 없고 미숙하기 짝이없어 온통 잘못투성이 뿐인 나의 일하는 꼬락서니에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 된다거나 하던 적이 없었다.

 두고두고 보면서 오죽 답답해 견디다 못 했던지 

    

"내가 일본에서 돌아와 아는 이들과 <성서조선>을 만들 때였어...
송 아무개란 사람이 어떻게나 꼼꼼하던지......
종이 비우는 게 아까우니까.....
원고지에 글자를 하나하나 다 세어가지고...
제목에서부터 끝나는 "...다." 자까지를 다 헤아려가지고는
빈 데가 없도록 꼭 채워서 편집을 했드랬지...
그 사람 참 꼼꼼한 사람이었어...
종이가 귀할 때였으니까 그랬을 테고......"

 

하시며 넉넉하게 접어 주던 것이 고작이었다.


반품되어 창고 속에 쌓여 있던 월간 <씨알의 소리> 지난 호(號)를 집회나 모임이 있을 때
정기 구독자를 모집하면서 팔거나 나누어 준 것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하여
나와 여직원이 1 주일 여 동안 수사 기관에 불법 연행되어 조사받았던 적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방침'이라 하여 정해지기로
독자에게 주거나 파는 것뿐만 아니라 창고에 쌓아 두는 것도
긴급조치 9호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지난호를 모두 가져다가
수사 기관에서 잘 보관해 주겠다는 거다.

 

"왜들 이러는 게야!......
손 팔 다 잘라 놓고 깍을대로 다 깍아 병신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어떻하겠다는 게야!...
안 돼! 안 돼! 날 죽이고 가져가라!...
이 늙은 거를 죽이고 가져가!...
내 눈에 흙이 들기 전에는 못 가져 간다!...
차라리 내가 다 불태워 없애 버리지...
내 손으로 차라리 내가......"

 

함 선생님은 성냥을 꺼내 들고
<씨알의 소리>가 처박힌 채 소리없이 쌓여 있는 창고로 달려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붉게 젖어 물든 눈시울은
어렸을 적 보았던 새끼 잃은 어미소의 것이었고
서린 핏발은 어렸을 적 듣던
호랑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모습이었다.

 

온 몸을 치떨던 분노의 눈길은
듣던 적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진하디 진한 광경을
나는 영원히 새겨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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