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효릉(明孝陵)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중산[鐘山] 두룽푸[獨龍阜]에 있는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


명나라의 첫 황릉(皇陵)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황후(馬皇后)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있던 카이산사[開善寺]를 이전하고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공사중인 황릉에 먼저 매장하였다.


1383년 대전(大殿)이 완공되었고, 1405년 태조가 병사한 뒤 매장되었다. 3

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을 건설하였다.

효릉의 동쪽에는 주원장의 적장자(嫡長子)인 주표(朱標)가 묻힌 동릉(東陵)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 뒤 난징의 13개 성문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 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朝天宮) 삼청전(三淸殿)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皇城)의 만세전(萬歲殿) 지하 또는 베이징[北京]의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주원장이 사후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생전에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대의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였는데,

이는 당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또 효릉의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十三陵)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전 세계의 역사에서 '입지전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원장을 뺀다면 큰 의미가 없다.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 비천한 농민 출신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그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마을의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해서

홍건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성공을 거두며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천하 패권을 노리는 각축장에 합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왕조로 창건된 원(元)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다.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승계 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쿠빌라이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원 왕조는 승계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형제나 일족 들을 실력으로 제압하여 통치권을 확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쿠데타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며,

황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강력한 군벌 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11대 황제인 순제(順帝)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대단히 무능한 통치자로 매도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그는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심성이 나약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순제는 당시의 실권자인 바얀(Bayan) 엘 티무르(El Temur)의 격렬한 반대로 일곱 달 이상 즉위를 하지 못하다

바얀이 조카에게 살해당하면서 간신히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제가 즉위한 직후, 황실에서는 권력 투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운데 천재지변이 연이어 덮치면서 대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킨 페스트가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대기근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고

메뚜기 떼가 습격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유민이 발생했으며 이는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배후에는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이들은 13세기 중반 남송(南宋)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 불교 종파로부터 파생된 종파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세상을 구한다(天下大亂 彌勒佛下生)'라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했다.


순제는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서 처형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한산동의 처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발적인 농민 반란이 조직화되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한 떠돌이 소작농 집안으로, 그의 위로는 3명의 형과 2명의 누나가 있었다.

1341년 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메뚜기 떼가 습격하고, 연이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주원장 일가도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 큰형을 잃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 형만 본가에 남고 바로 위의 형은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두 누나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열일곱 살이었던 막내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출가해서 중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재앙이 덮친 상황에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절에 머물지 못하고 3년간이나 안휘성과 인근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떠돌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회적인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주원장은 황각사로 돌아와서 공부에 매진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낮에는 절 주변에 있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불경뿐 아니라

유가(儒家)나 법가(法家)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구해서 독서에 몰두했다.

후일 황제가 된 다음의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주원장은 지적인 호기심이 유별난 사람이었다.


1351년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하는 민중 봉기라기보다는 절망에 빠진 민중들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찾던 정도의 백련교를

순제가 성급하게 탄압하고 교주 한산동을 처형하면서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대변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산동의 처 양(楊)씨는 어린 아들 한림아를 데리고 남쪽 지역으로 도망쳐 반원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여기에 전국에서 숱한 인물들이 호응했다.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동지라는 개념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휘성에서는 유복통(劉福通)이 가장 유력한 인물로 10만의 병력을 모았으며

대지주인 곽자흥(郭子興)도 별도로 군대를 일으켜 호주를 점령했다.


이들을 도적떼로 볼 수도 있고 반정부 혁명 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굶주린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상인이나 지주, 사찰과 같이 '가진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주원장이 있던 황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이 습격당해 폐허로 변하자 주원장은 앞날이 막막해졌다.


그는 이때 절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 참에 아예 홍건적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주원장에게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공부하던 와중에 얻은 어설픈 주역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점을 쳤는데 당장 떠나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그 길로 호주를 장악하고 있던 홍건적의 수령 곽자흥을 찾아갔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인물 됨됨이가 맘에 들었다.

그는 파격적으로 주원장을 친위대 소속의 경호대장 격인 구천장(九天長)에 임명했다.


주원장은 험상궂게 생긴 추남이었으나 성격은 호방하고, 담력과 배짱이 있어 전투에서는 용맹했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어 전리품을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곽자흥 또한 그를 중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인 마공(馬公)의 딸로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양녀가 되었다.

후일 황후가 되는 마씨 부인으로, 대단히 현명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홍건적이 봉기했던 초기, 원나라 조정에는 이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몽골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그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부를 살해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바얀 토구타는 상당히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주(徐州)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그러자 결정적인 순간에 황제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도졌다.

토구타를 경계하고 시기해서 그를 진압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해 버린 것이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군 사령관이 교체되었으니 지휘 체계가 제대로 가동될 리 없었다.


서주의 홍건적들은 기사회생해서 곽자흥이 버티고 있는 호주로 몰려들었다.

당시 홍건적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다.


서주에서 패퇴한 무리들에 의해서 곽자흥이 실권을 잃자 크게 실망한 주원장은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대략 700명의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부대를 조직했다.


그중에는 후일 개국공신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화운(花雲), 당승종(唐勝宗), 곽흥(郭興),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서달과 탕화는 황각사 시절에 사귄 친구들이었다.

후일에는 이들이 이름 높은 장군과 신료가 되겠지만 처음 모였던 이 무렵에는 무기라고는 처음 손에 잡아 보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이 초보 홍건적들은 과감하게 인근의 저주성(滁州城)을 공격해 성을 함락했다.

주원장은 곽자흥을 지휘관으로 모셔 왔다.


주원장이 저주성을 확보하자 등유(鄧愈), 이선장(李善長)과 같은 후일의 명장들이 가세했으며,

조카인 주문정(朱文正)과 이문충(李文忠)도 그의 휘하에 합류했다.

이들 역시 후일 불굴의 용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저주성을 확보하고 병력이 늘어나자 주원장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화주(和州)를 공격해서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단 점령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 군이 화주를 포위한 것이다.

처절한 방어전이 벌어졌고, 초보 홍건적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십 배나 되는 몽골 군의 맹공을 견뎌 낸 것이다.

몽골 군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채 철수했다.


이 화주 공방전은 주원장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가 1355년 3월, 그가 홍건적에 가담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는 홍건적의 봉기가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홍건적의 최고 실력자 유복통은 처형된 백련교주 한산동의 어린 아들 한림아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맞아들여

새로운 나라 대송(大宋)의 건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개봉(開封)을 공격해 점령하고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혁명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초반의 순수한 열기가 가라앉으면 천하 제패를 노리는 숱한 야심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야심가들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다.

이러한 야심가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재주를 겨루어 마지막에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남게 되며

그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역사가 바뀌곤 하는데, 원나라 말기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유복통이 동쪽을 장악했다면 서쪽의 실력자는 호북과 호남을 장악한 서수휘(徐壽輝)였다.

그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국호를 천완(天完)이라고 했다.

서수휘의 휘하에는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는 진우량(陳友諒), 명옥진(明玉珍)과 같은 야심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건적과는 상관없이 봉기한 태주(泰州) 출신의 장사성(張士誠)도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는데 순식간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양자강 하구의 소주(蘇州)를 장악했다.


우리의 영웅 주원장은 이때까지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으로 소명왕 한림아 휘하의 장군 곽자흥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1355년에 곽자흥이 병에 걸려 급사하면서 주원장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소명왕은 곽자흥의 큰아들 곽천서(郭天徐)를 아버지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주원장을 부원수에 임명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된 주원장은 과감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양자강을 넘어 강남으로 내려가 물류의 중심지인 태평성(太平城)을 기습 점령했다.


성을 탈환하기 위해 몽골 인들은 급히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원장은 이들을 격파하고

태평성에 별도의 독립군단인 익원수부(翼元帥府)를 설치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1356년은 주원장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해였다.

중국 남동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경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경을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하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원장이 막 무대에 등장한 이 시기는 유복통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홍건적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 판단과 성급한 결정이 화를 불렀다.

홍건적 지휘부는 원나라 황실 타도를 목표로 북벌을 시도했다.


당시 정세를 보자면 홍건적과 다른 세력들이 동시에 봉기한 남부는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한 지역이었지만

북부는 엄연히 원나라 황실의 지배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유복통은 1357년에 개봉에 대병력을 집결시킨 후 세 방향으로 나누어 기세 좋게 북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몽골의 바얀들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무능한 지휘관들은 아니었다.


좀처럼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던 홍건적들은 몽골의 정예군을 상대한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질질 끌다

결국 북벌군의 반 정도는 전사하고 나머지는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전황이 극적으로 역전되면서 거꾸로 대송의 수도 개봉이 원나라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유복통은 100일 가까이 몽골 군의 맹공을 견디면서 분전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한림아와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멀찌감치 남쪽 저주의 안풍(安豊)으로 도피했다.


이 사태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홍건적의 지휘부가 몰락하자 야심을 감추고 있던 혁명가들이 천하 패권을 노리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의 세력 분포를 주원장을 중심으로 보면 선두주자는 서쪽에 둥지를 튼 진우량과 동쪽에 이웃한 장사성이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휘하에서 독립한 인물로 1360년에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고 했다.


장사성은 홍건적이 개봉을 잃은 시기에 남송 시대부터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평강(平江) 일대를 점령한 다음

소주를 중심으로 호주, 상주(尙州), 항주(杭州) 등 풍요로운 지역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언제부터 천하의 대권을 의식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남경을 근거지로 삼아 궁지에 몰린 소명왕 한림아를 지원했으나 곽자흥이 남긴 모든 것을 가로챘다.


곽자흥의 장남인 곽천서는 주원장보다 앞서 남경을 공격하다 전사했고,

차남인 곽천작(郭天爵)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남아 있는 상속자들인 딸과 조카는 주원장의 첩이 되었다.


주원장이 남경에 입성한 이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주변에 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유기(劉基), 송렴(宋濂), 도안(陶安)와 같이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주원장은 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홍건적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련교는 불교의 만민평등 사상에다 신비주의를 뒤섞은 서민들의 종교인 반면 유교는 원래부터 통치자들의 논리였다.


주원장 주변에 몰려든 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재야에서 글을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정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주원장의 새로운 참모들과 홍건적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백련교의 교리와는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원장은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경에 입성하면서 공포한 격문은 유교적인 이념에 바탕을 두어 기존의 사회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백련교의 개벽론이라든지 새로운 세상과 같은 개념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왕 한림아의 장수로 남아 있었으며 1362년에는 소명왕에 의해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천하는 사파전의 양상이 되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는 가운데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것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관계였다.

한왕을 자처하던 진우량의 장점은 막강한 선단을 바탕으로 양자강의 수로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은 수전으로 진우량과 승부를 벌여야 했다. 선공은 진우량이 했다.

그는 60만의 병력과 100척이 넘는 전함을 동원했다.


주원장은 이때에 소명왕이 있는 안풍을 공격한 장사성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장사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주원장에게 기회가 생겼다.


주원장은 장사성과 휴전은 했지만, 갑자기 대규모의 함대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는 수백 척의 고깃배를 동원해서 응전했다.


이것이 이 시대 최대의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이다.

파양호는 양자강 남쪽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모이는 곳이었다.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은 이곳에서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 자신이 자칫하면 사로잡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다.

마지막 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파양호 전투를 계기로 팽팽하던 주원장과 장사성의 균형도 무너졌다.

진우량이 지배하던 서부의 광대한 세력권이 모두 주원장에게 편입되었을 즈음에서야

장사성은 두 사람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협공을 가해서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장사성은 개인적인 기질이 주원장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홍건적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그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장사성은 주원장이 홍건적에 합류한 다음 해인 1353년에

불법으로 운영하던 자신의 염전에서 일하던 청년들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소주가 속해 있는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출신이었다.
소주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소주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는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매일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이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장사성은 1357년에 주원장에게 한 번 패배를 당하고 나서

원나라와 손을 잡아 관직을 제수받으면서 매년 양곡 10만 석 이상을 공급하였다.


원나라와 동맹을 맺은 상황이니 주원장은 소주 방면으로는 감히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62년 장사성은 홍건적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유복통을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과에 오만해진 장사성은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했다.

이것은 헛된 명성만 얻을 뿐 아무런 실익이 없는 자충수였다.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1367년에 소주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계기는 지나친 자부심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진우량의 경우는 막강한 전투선단이 그랬고 장사성의 경우는 한없는 풍요로움이 그랬다.


반면에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며 이것은 경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장사성이 자살하면서 남쪽을 모두 장악한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대망의 북진을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368년 1월 4일 산동성을 평정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는 명(明), 수도는 응천부인 남경,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원나라의 수도이자 당시에는 대도(大都)라고 불리던 북경은 바로 그해에 함락되었다.

순제는 수도를 북방의 상도(上都)로 옮기고 계속 명나라와 대립했다.


이때부터 이 왕조는 대제국 원(元)과 구분해서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북원까지 제압하고 완전히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그로부터도 한 세대 이상이 걸리지만,

한족(漢族)의 왕조가 한 세기 만에 부활된 것이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기층민 출신으로

천하의 대권을 잡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민중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성공과 함께 민중을 배신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잔인함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상위에 꼽힐 정도이며

명 왕조 전체를 가혹한 폭정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주원장은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에 대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때부터

홍건적과의 결별을 가시화했다.


이는 민중의 종교인 백련교를 버리고 귀족의 전통적인 윤리인 유교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무렵 백련교와 미륵교(彌勒敎)를 사람들을 현혹하는 요술(妖術)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한 상징적인 사건이 소명왕 한림아의 살해였다.
1366년 장사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주원장은 부하 장수인 요영충(寥永忠)에게

저주에 머물고 있던 소명왕을 응천부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양자강에서 풍랑을 만나 뒤집어지며 소명왕이 익사했다.

요영충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은 것이었다.

주원장은 얼마 후 요영충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했다.


장사성을 격파한 후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주 지역에 대한 복수도 지나치게 치졸했다.

그는 장사성의 참모들을 참수하고 그 시체는 거리에 버렸다.


또한 그곳의 관리, 군인, 재산가 들과 그 가족 30만 이상을 추방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마지막으로 소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세율을 책정해 이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다.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당대의 문인과 지성인 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천재 시인 고계(高啓)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소주를 빛내던 많은 지성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제 주원장은 탄압받던 농민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남경 시절에 보여주던 온화한 통치자의 모습도 옅어져 갔다.


그는 점차 난폭한 정복자가 되어 갔다.
황제에 오른 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을 창출한 이후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하다.

최종 승자가 과거의 동지나 공신들을 정리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러한 정리 작업 자체가 싫어서 자신을 황제로 세웠던 동료 장수들과 말술을 마시고 나서

모든 병권을 인수받아 후대의 칭송을 받았다.


조광윤과는 정반대로 주원장은 사상 유래가 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주원장의 폭정은 '호람의 옥(湖藍之獄)'으로 대표된다.


주원장의 모사 호유용(胡惟庸)은 크게 신임을 얻어 승상직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그러자 당연한 반발로 밀고가 들어왔으며 주원장은 이 사건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철저하게 이용했다.


호유용 자신이야 죽어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관련자들이 문제였다.
호유용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수는 그 당시에만 1만 5,000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관련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무려 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원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호유용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던 전 승상 이선장까지 이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이것이 '호유용의 옥(胡惟庸之獄)'이다.


남옥(藍玉)은 호유용과 달리 억울한 인물이다.

그는 주원장 치세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명장이었다.


명나라는 힘을 회복한 북원에 연패하면서 한 전투에서만 무려 40만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등 고전을 계속했다.

남옥은 명나라 군대의 연패 행진을 끊은 명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명성이 주원장의 시기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남옥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이어 2만 명이 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이것이 '남옥의 옥(藍玉之獄)'으로, 호유용과 남옥의 사건을 묶어서 '호람의 옥'이라고 한다.

이 두 번의 옥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신들이 갖가지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 갔다.

그는 친구건 친족이건 일단 제거 대상으로 결정하면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이문충(李文忠)은 주원장의 작은 누나의 아들로,

주원장이 곽자흥을 떠나 스스로 부대를 조직했을 때 소년의 몸으로 휘하에 가담해 줄곧 충실하게 따르며

험난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서 조국공(曹國公)에 봉해졌다.


이문충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원장이 혁명 동지들을 몰살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렸으며

주원장은 조용히 그를 독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원장의 처형 방식도 문제였다.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족주형(族誅形)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가족 모두를 죽였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서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凌遲)나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머리가죽을 벗겨 죽이는 박피형(剝皮形)도 있었다.

죽은 자들의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전시되었다.


주원장의 형벌 중에서 압권은 '정장(廷杖)'이라는 것이다.

형벌 자체는 단순해서 관료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를 궁정 마당에 무릎 꿇게 한 다음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 정장형은 법률에 정해진 바도 없고 집행 규정도 없었다.

순전히 황제의 기분에 의해서 매질의 강도와 횟수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하필이면 주원장이 저기압일 때 걸려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죽어 나갔다.


세상에는 비천한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가 숱하게 많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과거의 부끄러운 시절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든가 과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든가.

주원장은 아쉽게도 후자에 속했다.


그는 천한 출신에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열등감이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황당한 참극을 만들어 냈다.


주원장의 과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글자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중 승(僧), 대머리 독(禿), 빛 광(光)은 그의 황각사 시절과 관련이 있었고,

도둑 도(盜), 도둑 적(賊)은 황건적 시절과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 승(僧)과 음이 같은 날 생(生)을 비롯해 적(賊)과 모양이 닮은 곧 칙(則)이 추가되었다.

이 규정을 어겨 숱한 신하들이 처형되었으며

길 도(道), 다를 수(殊)와 문자와 제비(帝扉)와 같은 단어들이 추가되면서 금지어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표면으로 드러났다.

유학자 유기(劉基)는 명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점차 변모해 가는 주원장을 두려워해 고향으로 은퇴했는데,

그가 병에 걸리자 주원장은 위로한다며 궁중의 의사를 보내 독살했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던 서달(徐達) 역시

병에 걸려 요양하던 중에 황제가 보낸 거위 요리를 먹고 사망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에도 주원장은 단순히 잔인무도한 폭군이나

시기심에 불타는 소인배로만 매도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군주였다.

백성들의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했으며 농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벌이고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켜 농민으로 끌어들인 결과

그의 30년 통치 기간 중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어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주원장은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아직 권력의 맛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선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나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으며 강의가 끝나면 오랫동안 학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학생 중에서 눈에 띄는 인재가 있으면 곧바로 고위직에 채용했다.


주원장은 정서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각료를 맨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몽둥이찜질을 가해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길로 국자감에 나가 젊은 학생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그의 성격을 두려워해 자살하는 관료들까지 있었다.


또한 그는 위험할 정도로 감성이 예민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에 색을 밝혀서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모두 26명의 왕자와 16명의 공주를 생산할 정도였지만

평생 반려자로 생각한 사람은 일찌감치 결혼했던 마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황후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며칠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극과 극을 오갔던 사실에서 주원장은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조울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보이고 있으며,

상당수의 조울증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개인적인 성정이 음울하면서 동시에 호방했다.

이렇게 부조화스러운 다중인격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 냈다.

고위 관료들도 황제 앞에서는 노예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열등감에 가득 찼던 조울증 환자 주원장이 처음 고안한 예법이며,

그대로 중국의 권위주의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원장이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혁명가였으며,

유교적인 이상국가의 건립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아들 영락제(榮樂帝) 성조(成祖)로부터 시작해 점차 혁명 정권이라는 본질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오직 주원장이 창안한 혹독한 통치 방법만이 계승되었다.


그러자 관료들은 황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민중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방법만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200년 동안 중국인들의 개성을 규정해 버렸다.

이것이 명 왕조의 역사를 폭군 아니면 무능력자인 황제, 환관과 측근 들의 전횡,

계속되는 폭정과 권위주의적인 전제정치, 진취성을 잃어버린 민중, 황실을 조롱하는 지성인들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황실 등의 특성을 가지게 한 것이다.


주원장의 문지기가 된 손권


중산릉에서 명효릉으로 가는 길에 손권릉(孫權陵)이 있다.

명효릉 맞은 편의 평평한 공터에 손권 상(像)과 함께 외로이 비석 하나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손권릉인데,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울 정도로 초라하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황제이자 최초로 남경을 수도로 세웠던 손권의 능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바로 주원장이다.

예로부터 명당 자리라 일컬어지는 자금산에 자신의 능을 만들기로 결정한 주원장은

이미 자금산에 만들어진 모든 무덤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는데

“손권도 영웅이므로 묘를 남기되, 그가 나의 무덤을 지키게 하라”며 손권의 무덤 이장(移葬)을 면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명색이 황제였던 손권을 자신의 묘지기로 전락시킨 것이 과연 영웅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일까.

그 이후에도 손권릉은 수 차례 걸친 전쟁으로 인해 과거 황제의 릉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석상로(石象路) 신도와 옹중로(翁仲路) 신도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석상로(石象路)의 한글 표기가 '석코루'로 되어 있다.


아마도 코끼리 '象' 자에서 '코' 자만 따서 합성한 듯하다.

이처럼 각 지역 곳곳에 있는 안내판이나 안내문에는 엉뚱하게 번역해 놓은 글들이 종종 눈에 띈다.

다만 한글로도 번역해 놓았다는 성의로 양해하고 지나가야 할 듯.



신도(神道) 석상로(石象路)


외금수교(外金水橋 : 紅橋)를 지나면 12쌍의 석상이 줄지어 서있는 석상로(石象路)가 나온다.

석상로는 신도의 일부분으로 615m의 길 양편으로 석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으로,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 중에서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서 총명하고, 용맹하여 다른 짐승들을 압도 한다.

또한 불교에서도 호법의 영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신도에서 빠지지 않는다.


사자는 황제의 위엄과 강한 세력을 의미한다.

해치는 사자와 비슷하나 곰의 눈과 뿔을 가진 동물로 법수(法獸)라고도 불려진다.


상상속의 동물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아 구별해 낸다고 알려져 있다.

황제의 공명정대함을 나타내고자 신도에 놓여진다.


기린 역시 고대인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동물이다.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자, 호랑이, 소, 용의 형태를 몸에 가지고 있다.

황제의 인덕을 상징하며 용처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신도가 아주 특이하게도 굽어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북두칠성 모습으로 굽어져 있다고 한다.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처음 신도를 조성할 때 그 일대에 오나라 황제 손권(孫權)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사 책임자가 주원장에게 손권 묘를 옮길 것을 요청하니 주원장이 말하길

"손권 역시 훌륭한 사람이니 그대로 두어서 그가 나를 위해 대문을 지키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손권의 묘를 피해서 조성하느라 곡선으로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하나는 '북두칠성' 설이다.

즉 신도를 곡선으로 내어 대금문에서 보정(寶頂 ; 무덤)에 이르는 전체적인 배치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원주형 돌 위에 구름과 용을 조각해서 세운 기둥이 등장한다.

그 이전 시대에는 주로 연꽃을 조각해서 세웠다고 한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서 있는 말

제일 안 쪽에 말이 배치되어 있다.


꿇어 앉은 말


기린


아프리카의 토인들이 선사한 기린을 배에 싣고 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영락제게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기린이 등장하면 태평성대가 찾아온다고 전해왔기 때문에 황제가 감격했던 건 아닐까?


공자도 기린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깊이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획린(獲麟)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린과 봉황, 거북과 용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기린이라는 짐승 속에 용과 호랑이와 사자와 소의 형상이 한 몸안에 다 들어있다고 여겼다.

조각한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아는 기린과는 달리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코끼리




서 있는 낙타



앉아 있는 낙타



서 있는 해태  혹은 해치라고도 부르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앉아 있는 해태


서 있는 사자


앉아 있는 사자

석상로 신도에서는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류 12쌍이 지키고 있다.

각각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옹중로(翁仲路) 신도

석상로가 동물의 길이라면 옹중로는 사람의 길이다. 신도 양편으로 문무관리의 석상이 지키고 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효릉은 나무로 만든 많은 건축물들을 잃었다.

하지만, 신도(神道)와 석각들, 방성(方城), 명루(明樓), 하마방(下馬坊), 대금문(大金門),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

등과 같은 석재 건축물들은 여전히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효릉은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고 하여, 앞쪽에는 정무를 보는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정원을 비롯한 침실 등 생활공간을 배치하는 황실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예규에 따른 것이며 당, 송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능은 산에 기대어 짓는다.”라는 제도에 따라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효릉이 과거의 규범만을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효릉의 전조(前朝)는 방형으로 지었지만, 시신이 매장된 지하궁전은 원형의 토산을 쌓아 완성시킴으로써

전방후원(前方後圓)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효릉 이후에 건설된 명, 청 500년 20여 좌의 황릉은 모두 효릉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를 따라 지어졌다. 

효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황릉 중의 하나이며, 2003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의 무신상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옹중로(翁仲路)는 석상로 다음에 나오는 신도의 두 번째 부분이다.

길이는 250m이며, 한 쌍의 돌기둥인 화표(華表)로부터 시작된다.


화표에는 구름과 용이 새겨져 있으며 화표 북쪽으로는 2쌍의 무신과 2쌍의 문신상이 있다.

갑옷이나 망포를 입은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며 그 위엄이 대단하다.


한 덩이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이들 석상들은 선이 굵고 간결하며,

그 조형미가 아름다워 명나라의 예술걸작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위엄이 느껴지는 문신상

정면으로 영성문(欞星門)이란 이름의 석방이 보인다.








동락원(同樂園)



관폭루(觀瀑樓)


단체사진




일대문종(一代文宗) 구양수 상



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脩)


이 글은 구양수가 52세 때의 가을에 쓸쓸한 바람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감홍을, 직서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동자(童子)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써낸 것이다.


가을 바람의 처량함과 만물이 조락(凋落)하는 경치를 보고, 자연 현상의 변화와 인간의 생활을 연관시켜

인생(人生)의 덧없음을 안타까운 탄식조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그의 문장이 쉬우면서도 유창하고, 서술이 섬세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추성부(秋聲賦)는 아방궁부(阿房宮賦) 로부터 비롯된 '문부(文賦)'를 발전시켜,

송대의 賦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문적인 賦의 양식을 확립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賦가 물상(物象)을 형용하는 서사(敍事).서경(敍景) 의 문학이라 한다면,

이 추성부(秋聲賦)야말로 참으로 그 특색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글이라 하겠다.


소리, 색깔, 경치, 감정 등 몇 가지 면에서 묘사와 비유를 가하여 변화가  다양한 가을 경치가 지면에서 배어 나올 듯하다. 

작가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감개라는 면에 착안하여 이를 가을소리, 가을풍경의 통일과 조화 속에 짜 넣었다.


가을소리를 빌려 우주 만물의 쇠락에서 짧은 인생의 비애를 연상한다.

이 부는 산문 같기도 하고 시와 같기도 하다.


늘어놓는 수법, 서정적 필치, 형상적 비유를 통해 가을소리의 묘사는 다채롭고 그윽하게 전개된다. 

그 사이에 동자와의 대화를 끼워 넣어 독자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흥취와 무한한 감개를 느끼게 한다.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異哉!"
구양자방야독서, 원유성자서남래자, 송연이청지, 왈 : "이재"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이며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澎湃;如波濤夜驚, 風雨驟至.
초석역이소삽, 홀분등이팽배. 여파도야경, 풍우취지.
처음에는 바스락 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其觸於物也, 鏦鏦錚錚, 金鐵皆鳴;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기촉어물야, 총총쟁쟁, 금철개명. 우여부적지병, 함매질주, 불문호령, 단문인마지행성.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予謂童子:"此何聲也?汝出視之." 童子曰:"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여위동자, 차하성야, 여출시지. 동자왈, 성월교결, 명하재천, 사무인성, 성재수간.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予曰:"唏唏悲哉!此秋聲也, 胡爲而來哉?蓋夫秋之爲狀也;其色慘淡, 煙(雨+非)云斂;
여왈: "희희비재! 차추성야, 호위이래재. 개부추지위상야, 기색참담, 연비운염.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은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其容淸明, 天高日晶;其氣慄冽, 砭人肌骨;其意蕭條, 山川寂寥.
기용청명, 천고일정. 기가율렬, 폄인기골. 기의소조, 산천적요.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며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故其爲也, 凄凄切切, 呼號憤發. 豊草綠縟而爭茂, 佳木蔥籠而可悅;
고기위야, 처처절절. 호호분발. 풍초녹욕이쟁무, 가목총농이가열.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草拂之而色變, 木遭之而葉脫;其所以摧敗零落者, 乃其一氣之餘烈.
초불지이색변,목조지이엽탈. 기소이최패영낙자, 내기일기지여열.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夫秋, 刑官也, 於時爲陰;又兵象也, 於行爲金, 是謂天地之義氣, 常以肅殺而爲心.
부추, 형관야, 어시위음. 우병상야, 어행위금, 시위천지지의기, 상이숙살이위심.
가을은 형관이요, 때로 치면 음의 때요, 전재의 상이요, 오행의 금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天之於物, 春生秋實. 故其在樂也. 商聲主西方之音, 夷則爲七月之律.
천지어물, 춘생추실. 고기재낙야. 상성주서방지음, 이칙위칠월지율.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으로, 서방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商, 傷也;物旣老而悲傷. 夷, 戮也;物過盛而當殺.
상, 상야. 물기노이비상. 이, 육야. 물과성이당살.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륙(戮)'의 뜻이니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嗟乎, 草木無情, 有時飄零. 人爲動物, 惟物之靈. 百憂感其心, 萬事勞其形. 有動於中, 必搖其精.
차호, 초목무정, 유시표령. 인위동물, 유물지령. 백우감기심, 만사노기형. 유동어중, 필요기정.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而況思其力之所不及, 憂其智之所不能;宜其渥然丹者爲槁木,黟然黑者爲星星.
이황사기력지소불급, 우기지지소불능. 의기악연단자위고목,이연흑자위성성.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奈何以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念誰爲之戕賊, 亦何恨乎秋聲!"
나하이비금석지질, 욕여초목이쟁영. 염수위지장적, 역하한호추성.
금석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있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童子莫對, 垂頭而睡. 但聞四壁蟲聲喞喞, 如助余之歎息.
동자막대, 수두이수. 단문사벽충성즉즉, 여조여지탄식.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영향정(影香亭)


영향정(影香亭)은 1425년 명나라 때 세워졌다.

정자 이름은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967~1028)의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에 나오는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 (疏影横斜水清浅  暗香浮動月黄昏)"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문인 임화정은 본명은 임포(林逋)로 송대 전당(錢塘) 출신이다.

자는 군복(軍復), 시호가 화정(和靖)이다.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뜰에 매화나무를 심고 학과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매화가 필 때쯤 되면 한 달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종일 매화를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며 혼자 즐겁게 지냈다. 


산원소매(山園小梅) / 林和靖(임화정)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온갖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작은 정원의 정취를 독차지하고 있네.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매화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 위에 드러나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






보송신재(寶宋新齋)


보송재(寶宋斋)에는 구양수의 산문 <취옹정기>를 동파 소식(蘇軾: Su Shih, 1036~1101)이 쓴 친필 석각을 세워 놓았다. 

구양수가 지은 글을 소동파가 썼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구문소서(歐文蘇書)」라 일컸는다.


소식과 그의 동생 소철(蘇轍, Su Zhe, 1039~1112)은 부친 소순(蘇洵: Su Xun, 1009~1066)의 안내로 구양수로부터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소동파 이외에도 수많은 서법가들이 <취옹정기>를 썼다. 그 중 대표적인 탁본 세편을  pdf file로 아래에 소개한다.

               소식(蘇軾)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여기를 클릭하면 탁본을 볼 수 있음)

            문정명(文征明)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동기창(董其昌) 행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출처 :  http://family.swu.ac.kr/~cat/ae_maehwa_chuzhou_langyashan_2008.htm


풍락정기(豐樂亭記)


보송재(寶宋斋) 옆에는 구양수의 또다른 작품 <풍락정기>를 소동파가 쓴 글씨로 조각해 놓았다.

소동파는 1057년 아버지 소순(蘇洵)을 따라 사천에서 나와 카이펑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고 이때 시험채점관이 구양수였다.


구소서간에 보면 요로에 소순의 문장을 추천하는 구양수의 편지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양수의 배경으로 소순은 장안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하는 사연에는 시험관 구양수가 보기에 이만한 답안지의 수준은 필시 나의 제자 증공이 틀림없겠는데

그렇다면 이 답지를 장원으로 하면 스승이 제자를 봐줬다는 소리가 나올거 같으니 2등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답안지는 소식(蘇軾)이란 모르는 청년이었단 이야기가 있다.


훗날 동파 소식(蘇軾)은 구양수에게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구양수를 흠모하는 마음이 소동파의 여러 글에 나타나고 있다.


풍락정기(豐樂亭記) / 구양수(歐陽修) 지음 - 소식(蘇軾) 書


修旣治滁之明年夏(수기치저지명년하)
나 구양수가 저주를 다스린 지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始飮滁水而甘(시음저수이감)
처음으로 저현의 샘물을 마셔보니 그맛이 달았다


問諸滁人(문제저인)
저주 사람들에게 물으니

得於州南百步之近(득어주남백보지근)
저주성의 남쪽 백 보 근처에서 얻었다고 한다


其上豐山聳然而特立(기상풍산용연이특립)
위로는 풍산이 높이 솟아 홀로 우뚝 서 있고

下則幽谷窈然而深藏(하칙유곡요연이심장)
아래로는 그윽한 골짜기가 조용히 깊이 숨어 있으며

中有淸泉滃然而仰出(중유청천옹연이앙출)
그 가운데에는 맑은 샘이 있는데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俯仰左右(부앙좌우)
위아래 좌우의 경색을

顧而樂之(고이락지)
돌아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於是疏泉鑿石(어시소천착석)
이에 물길을 트고 돌을 깨고

闢地以爲亭(벽지이위정)
땅을 정리하여 정자를 지어서

而與滁人往遊其閒(이여저인왕유기한)
저주 사람들과 더불어 여기로 와서 노닌다


滁於五代干戈之際(저어오대간과지제)
저주는 전쟁으로 번번하던 오대 때에는

用武之地也(용무지지야)
전쟁터의 하나였다


昔太祖皇帝(석태조황제)
지난달 태조 황제께서는

嘗以周師破李景兵十五萬於淸流山下(상이주사파이경병십오만어청류산하)
후주의 군대를 이끌고 이경의 군사 15만을 청류산 아래에서 깨뜨리고

生擒其將皇甫暉(생금기장황보휘)
이정의 장군인 황보위와

姚鳳於滁東門之外(요봉어저동문지외)
요봉을 저주성 동문 밖에서 생포하여

遂以平滁(수이평저)
마침내 저주를 평정하였다


修嘗考其山川(수상고기산천)
나는 일찍이 저주의 산천을 살펴보고

按其圖記(안기도기)
그 관련 지도와 기록을 찾아보고서

升高以望淸流之關(승고이망청유지관)
높은 곳에 올라 청류관을 바라보며

欲求暉鳳就擒之所(욕구휘봉취금지소)
황보휘와 요봉이 잡힌 곳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而故老皆無在者(이고노개무재자)
당시의 노인들이 모두 생존해 있지 않았다

蓋天下之平久矣(개천하지평구의)
대개 천하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었던 것이다


自唐失其政(자당실기정)
당나라가 정권을 잃은 이후부터

海內分裂(해내분렬)
천하가 분열되어

豪傑並起而爭(호걸병기이쟁)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천하를 다투니

所在爲敵國者(소재위적국자)
피차 적국이 된 것이

何可勝數(하가승수)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乃宋受天命(내송수천명)
송에 이르러 천명을 받으시어

聖人出而四海一(성인출이사해일)
성인인 태조께서 나오시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嚮之憑恃險阻(향지빙시험조)
지난날 험준함을 믿고 할거하던 인물들이

剗削消磨(잔삭소마)
제거되고 소멸되었다


百年之間(백년지간)
100여 년 사이에

漠然徒見山高而水淸(막연도견산고이수청)
사람들은 무심히 다만 산 높고 물 맑은 것만을 보고

欲問其事(욕문기사)
그 때의 일을 묻고자 하여도

而遺老盡矣(이유노진의)
그 일을 겪었던 노인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 버렸다


今滁介於江淮之間(금저개어강회지간)
지금 저주는 장강과 회하 사이에 있어

舟車商賈四方賓客之所不至(주차상가사방빈객지소불지)
배와 수레를 탄 상인이나 사바의 빈객들이 오지 않는 곳이고

民生不見外事(민생불견외사)
백성들은 일생동안 바깥 사정을 보지도 못하고

而安於畎畝衣食(이안어견무의식)
농사와 의식에 안주하며

以樂生送死(이락생송사)
즐겁게 살다 죽으니

而孰知上之功德(이숙지상지공덕)
누가 임금의 공덕이

休養生息(휴양생식)
백성을 휴양시키고

涵煦百年之深也(함후백년지심야)
인구를 늘여서 1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윤택하게 해 준 것임을 알겠는가


修之來此(수지래차)
나는 이곳에 왔을 때

樂其地僻而事簡(락기지벽이사간)
이 지역이 산간벽지인데다 일이 간략한 것을 즐거워하였고

又愛其俗之安閒(우애기속지안한)
또 그 풍속이 편안하고 한가함을 사랑하였다


旣得斯泉於山谷之間(기득사천어산곡지간)
이미 산골짜기에서 이 샘을 찾아내니

乃日與滁人仰而望山(내일여저인앙이망산)
이에 날마다 저주 사람과 함께 고개를 들어 산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俯而聽泉(부이청천)
머리를 숙여 샘물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掇幽芳而蔭喬木(철유방이음교목)
봄에는 향기 그윽한 꽃을 따고 여름에는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쉬며

風霜水雪(풍상수설)
가을에는 바람일고 서리 내리고 겨울에는 얼음 얼고 눈이 내려

刻露淸秀(각로청수)
산 모습이 우뚝 곧게 드러나 맑고 수려하니

四時之景(사시지경)
사계절의 경치를

無不可愛(무불가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又幸其民樂其歲物之豐成(우행기민락기세물지풍성)
또 다행히도 이곳의 백성들은 작물의 풍작으로 즐거워하면서

而喜與予遊也(이희여여유야)
나와 함께 노니는 것을 좋아한다


因爲本其山川(인위본기산천)
따라서 나는 이곳 산천의 특징을 근거로 해서

道其風俗之美(도기풍속지미)
이곳 풍속의 아름다움을 설명하여

使民知所以安此豐年之樂者(사민지소이안차풍년지락자)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편안하게 이 풍년의 즐거움을 누리는 까닭이

幸生無事之時也(행생무사지시야)
다행히 태평무사한 때에 태어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夫宣上恩德(부선상은덕)
무릇 천자의 은덕을 널리 알려

以與民共樂(이여민공락)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刺史之事也(자사지사야)
자사가 해야 할 일이다


遂書以名其亭焉(수서이명기정언)
그러므로 마침내 이 일을 써서 그 정자에 풍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심재(醒心齋)


성심재(醒心齋)는 1926년 진문권(陳文權: Chen Wen Quan)이 보송재(寶宋斋) 앞에 세웠다.

그 후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포화로 소실되었다가 2005년에 이곳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내부에 걸린 도덕사표(道德師表)라는 현판이 구양수가 후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숭앙받는지를 가늠케 하였다.

왕안석(王安石: Wang Anshi), 소식, 소철, 증공(曾鞏: Zeng Gong)이 구양수에게 바친 제문도 게시되어 있다.

이들은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알려져 있다.





11소동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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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문정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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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약 1000년의 구양수 수식매(歐陽修 手植梅)와 고매정 (古梅亭)


송나라 때 매화를 사랑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구양수다.

구양수가 직접 심었다는 매화나무는 구매(歐梅: Ou Mei)로 불린다.


이 나무는 살구나무와 매화나무 사이의 교잡종이라 행매(杏梅)라고도 부른다.   

<화중소허(花中巢許)>라는 글은 매화 속에 속세를 멀리하고 숨어 살았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매한 정신이 있다는 뜻이다. 


천년 고매를 관찰하려니 가슴이 뛰었다.

단첩 백색 매화 몇 송이 피어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고매 한그루 관상하기 위해 고매정을 세우고 그 향기를 음미하려고 영향정(影香亭)을 세운 정성이 놀랍다.

매화 한그루를 위한 정원의 아름다움! 그러나 매화나무 기둥에 시멘트 같은 것을 발라 놓아 몹시 아쉽게 느껴졌다. 




고매정(古梅亭)


고매정(古梅亭)은 명나라 가정(嘉靖) 14년(1535) 저주 판관이었던 장명도(張明道: Zhang Ming Dao)가

고매를 관상하기 위하여 세웠다.


원래 이름은 매서당(梅瑞堂: Mei Rui Hall)이다.

1928년 저주의 서법가인 황예오(黃藝五: Huang Yi Wu)가 고매정 뒤편의 바위에

고매정 (古梅亭)이라는 글씨를 각한 다음부터 고매정이라 부른다.



고매정 (古梅亭) 내부




이현당(二賢堂)

취옹정 바로 뒤에 이현당(二賢堂)이 있다.



구양수와 왕우칭(王禹稱)


이현당은 북송 소성(紹聖) 2년 (1095년) 구양수(사진 좌측)와

왕우칭(王禹稱: Wang Yu Chen 954~1001)을 기념하기 위하여 추저우 사람들이 세웠다.


구양수 필적 사본과 <구양문충공전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는 <취옹정기>와 <붕당론>을 새긴 목판이 게시되어 있다.

취옹정 앞에는 비각들이 여럿 있는데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들에 의해 크게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왕우칭(王禹稱)은 중국문학사 상, 당대(唐代) 고문운동(古文運動)에서

송대(宋代) 시문혁신운동(詩文革新運動)으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인 북송 초기

문단에서 복고파(復古派)의 주도자이자 송대 시문혁신운동의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문이재도(文以載道)’와 ‘문이명도(文以明道)’의 중간적인 ‘전도이명심(傳道而明心)’를 주장하였고,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폐해였던 ‘구지난도(句之難道), 의지난요(義之難曉)’를 반대하여

‘문종자순(文從字順)’의 측면을 강조하는 문학관을 지녔다. 


왕우칭은 강하고 굽히지 않는 성격과 직설적인 태도로 인하여 관직에 있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산문 중 정론문이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정치적 성향이 강하면서 개혁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글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는 당시 사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풍자적인 글을 창작하였고,

자신의 감정과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였다.


그는 예술적으로는 대비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고,

묘사를 통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비유를 사용하여 형상화하였고,

전고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성향은 후대의 범중엄이 시도한 경력신정(慶歷新政)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문학관은 후대의 구양수가 주도하였던 시문혁신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寒食(한식) / 王禹稱(왕우칭)


今年寒食在商山(금년한식재상산) : 금년 한식을 상산에서 지내노라니
山里風光亦可怜(산리풍광역가령) : 산속의 풍광은 더욱 아름답구나
稚子就花拈蛺蝶(치자취화념협접) : 철없는 아이들 나비를 잡느라고 꽃에게 다가가고
人家依樹系秋千(인가의수계추천) : 여염집 큰 나무 아래엔 그네가 매였구나


郊原曉綠初經雨(교원효록초경우) : 이른 아침 내린 비로 교외의 풀은 더 푸르고
巷陌春陰乍禁煙(항맥춘음사금연) : 봄철 흐린날 저자거리에 밥 짓는 연기 잠시 끊어졌네.
副使官閒莫惆悵(부사관한막추창) : 부사 벼슬이 한가롭다고 한탄하지 말자
酒錢猶有撰碑錢(주전유유찬비전) : 비문 지어주고 받은 술값 아직도 남아있나니.


王禹稱(왕우칭)의 '어느 한식날'
왕우칭은 북송 초기의 사람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상주의 부사로 쫓겨났다.

그 시절 한식을 맞아 쓴 시다.


한가롭고 아름다운 시골의 봄풍경을 네 가지 핀셋으로 콕 집어냈다.

나비를 잡으려 살며시 다가가는 아이, 집안 마당에 있는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 첫비를 살짝 맞은 풀빛,

그리고 한식이라 밥을 짓지않아 연기가 끊긴 마을의 산그늘.


쓸쓸한 시절엔 아름다움이 더욱 사무치는 법인가.

그렇게 가만히 풍경을 읊은 뒤 신세한탄이 나오려고 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얼굴 좀 펴게. 어제 동네사람 비석 세우는데 글을 써주고 받은 돈으로 술 한 잔 하면 되지 않는가.

한식인지라 더운밥은 못 먹지만, 대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술을 먹여주니 고마운 일 아닌가. 

村行(촌행) - 시골길 / 王禹稱(왕우칭)


馬穿山徑菊初黃(마천산경국초황) : 말 타고 산길을 가니 국화가 이제 누렇게 피고
信馬悠悠野興長(신마유유야흥장) : 유유히 말 가는대로 길을 맡기니 시골 흥취가 풍긴다
萬壑有聲含晚籟(만학유성함만뢰) : 골짜마다 소리가 들리니 저녁이 오는 소리
數峰無語立斜陽(수봉무어립사양) : 말 없는 산 봉우리 몇 개가 석양 아래 서있구나


棠梨葉落胭脂色(당리엽락연지색) : 팥배나무잎은 연지빛으로 물들어 떨어지고
蕎麥花開白雪香(교맥화개백설향) : 메밀꽃은 흰 눈처럼 피어 향기롭구나
何事吟餘忽惆悵(하사음여홀추창) : 무슨 일로 읊고난 뒤 갑자기 서글퍼 지다니
村橋原樹似吾鄉(촌교원수사오향) : 시골 다리와 들판의 나무들이 내 고향 같구나


春居雜興(춘거잡흥) 其一 / 王禹稱(왕우칭)

兩株桃杏映篱斜(양주도행영리사) : 복숭아 살구나무 두 그루 울타리에 드리워져
妝點商山副使家(장점상산부사가) : 商山 부사집을 장식하네
何事春風容不得(하사춘풍용부득) : 봄바람은 무슨 일로 장식을 허락하지 않는지
和鶯吹折數枝花(화앵취절수지화) : 불어와서 매화가지 부러뜨리고 새는 날려 버리네.


春居雜興(춘거잡흥) 其二 / 王禹稱(왕우칭)

春云如獸复如禽(춘운여수복여금) : 봄 구름은 짐승 같기도 하고 새 모양 같기도 하다
日照風吹淺又深(일조풍취천우심) : 해가 비치고 바람이 불면 옅어졌다가 다시 짙어지고
誰道無心便容与(수도무심편용여) : 누군가 말했지 물욕이 없이 한가롭고 편안한 것 같다고
亦同翻覆小人心(역동번복소인심) : 또 소인의 마음이 이리 저리 뒤집혀 바뀌는것과 같다고






취적청향(翠積淸香)

정자 뒷편에 고매정으로 이어지는 담장에 "취적청향(翠積淸香)"과 "한류소영(寒流疎影)" 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한류소영(寒流疎影)




취옹정(醉翁亭)


중국의 유명한 랑야산 하면 취옹정이고 취옹정하면 구양수(歐陽修 1007~1072) 다.

북송 인종(仁宗) 경력(慶歷) 6년(서기1046)에 화성 지선이 건축하였고

당시 추저우 태수였던 40세의 구양수가 자신의 호인 취옹을 따서 취옹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취옹정은 베이징의 도연정(陶然亭), 장사의 애만정(愛晩亭), 항저우 서호의 호심정(湖心亭)과 더불어

중국 4대 명정(名亭)의 하나이며 천하제일정(天下第一亭)으로 손꼽힌다.

구양수가 '취옹(醉翁)’이란 호를 쓴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잘 나타나 있다.


“……샘 위에 정자가 날개를 펼친 듯 걸려 있는데, 이것이 취옹정(醉翁亭)이다.

정자를 세운 이는 누구인가? 이 산의 스님 지선(智僊)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지은 이는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붙인 것이다.

태수는 손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는데, 술을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했고,

또 나이도 가장 많았기에, 자신의 호를 취옹이라 한 것이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간에 있었다.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으로 얻는 것인데 술에 기탁하기 때문이다.

……창백해진 얼굴에 백발을 하고서 왁자지껄한 가운데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은 태수가 취한 모습이다.……”


술에 약한 구양수가 취옹이란 호를 붙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술에 금방 취했고(醉), 나이가 많았기(翁) 때문인데,

취옹이라고 한 의도는 술에 기탁하여 산수를 즐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이유와 의도를 비약시키면

술에 취하든 산수에 취하든, 그 무엇에 취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취옹정기(醉翁亭記) - 구양수(歐陽修)

취옹정기(醉翁亭記)는 구양수(歐陽修)가 저주(滁州) 태수로 좌천되어 생활하고 있던 시기(1046)에 지은 것이다.

당시 구양수가 스스로 취옹(醉翁)이라고 부르며

틈이 날 때마다 랑야산(琅琊山)에 있는 취옹정(醉翁亭)에 가서 노닌 감회를 묘사한 글이다.


이 글이 나오자 견해의 독창성과 문체의 참신성으로 인해서 문인들이 서로 다투어 베꼈으며,

상인들도 이 글을 구하여 세관에 바치면 세금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양수는 저주의 태수로 있으면서 랑야산의 계곡에 성심과 취옹의 두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취옹정의 유래와 그 곳의 경치, 그리고 자신의 생활과 정취를 기술한 것이다.


구양수의 문장은 간결하며 객관적인 묘사에 뛰어나다.

이 글 역시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인 구양수 특유의 멋이 엿보인다.


 마지막 부분의 “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 "새들은 산림에서 사는 즐거움은 알지만 사람들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태수를 따라다니며 노는 즐거움은 알지만

태수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줄은 모른다” -

는 그의 애민사상이 반영된 구절로 인구에 회자하는 천고의 명구이다.


環滁皆山也. 其西南諸峯, 林壑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 琅琊也. 山行六七里, 漸聞水聲潺潺. 而瀉出於兩峯之間者, 釀泉也. 峯回路轉, 有亭翼然, 臨於泉上者, 醉翁亭也. 作亭者誰, 山之僧智僊也. 名之者誰, 太守自謂也. 太守與客來飮於此, 飮少輒醉, 而年又最高, 故自號曰, “醉翁也.”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幽香, 佳木秀而繁陰, 風霜高潔, 水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朝而往, 暮而歸, 四時之景不同, 而樂亦無窮也.

至於負者歌於塗, 行者休於樹, 前者呼, 後者應, 傴僂提攜, 往來而不絶者, 滁人遊也. 臨谿而漁, 谿深而魚肥. 釀泉爲酒, 泉香而酒洌. 山肴野蔌, 雜然而前陳者, 太守宴也. 宴酣之樂, 非絲非竹. 射者中, 弈者勝, 觥籌交錯, 起坐而諠譁者, 衆賓懽也. 蒼顔白髮, 頹然乎其間者, 太守醉也.

已而夕陽在山, 人影散亂, 太守歸而賓客從也. 樹林陰翳, 鳴聲上下, 遊人去而禽鳥樂也. 然而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醉能同其樂, 醒能述以文者, 太守也. 太守謂誰. 廬陵歐陽修也.


環滁皆山也(환저개산야)라 : 저주(滁州) 지방은 모두 산으로 에워싸져 있다.
其西南諸峰(기서남제봉)에 : 그 중에서도 서남쪽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은
林壑尤美(임학우미)하여 : 숲과 계곡이 특히 아름다워,
望之蔚然而深秀者(망지울연이심수자)는 : 멀리서 바라보아 울울창창 그윽하고 빼어난 것이
瑯王耶也(낭왕야야)라 : 바로 곧 낭야산(琅琊山)이니라
山行六七里(산행육칠리)에 : 산길을 육 칠리쯤 걸어 올라가면
漸聞水聲潺潺(점문수성잔잔)하여 : 물소리가 졸졸 차츰 크게 들려오니,
而瀉出于兩峰之間者(이사출우량봉지간자)는 : 두 봉우리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釀泉也(양천야)라 : 바로 곧 양천(釀泉)이니라
峰回路轉(봉회로전)에 : 봉우리를 도니 산길 구불구불,
有亭翼然(유정익연)하여 : 날개를 활짝 펼친 새처럼 정자가 있어
臨于泉上者(임우천상자)는 : 샘 위에 임해있는 것이
醉翁亭也(취옹정야)라 : 바로 곧 취옹정(醉翁亭)이다.


作亭者誰(작정자수)으로 : 이 정자를 지은 자는 누구인가
山之僧智仙也(산지승지선야)할새 : 산에 사는 승려 지선(智僊)이었다.
名之者誰(명지자수)오 : 정자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太守自謂也(태수자위야)라 : 태수가 스스로 정자이름을 지어불렀다
太守與客(태수여객)으로 : 태수는 손님들과 함께
來飮于此(래음우차)할새 : 여기에 와서
飮少輒醉(음소첩취)하고 : 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조금만 마셔도 취하고
而年又最高(이년우최고)라 : 나이도 제일 많은지라
故自號曰醉翁也(고자호왈취옹야)라 : 스스로 취옹(醉翁)이라 불렀다.
醉翁之意(취옹지의)는 : 취옹의 뜻은
不在酒(부재주)하고 : 술에 있지 아니하고 .
在乎山水之間也(재호산수지간야)라 : 산수지간에 있었으니,
山水之樂(산수지락)을 : 산수간에 노니는 즐거움은
得之心而寓之酒也(득지심이우지주야)라 : 마음으로 이것을 얻어 술에 기탁한 것이었다


若夫日出而林霏開(약부일출이림비개)하고 : 해 떠오르면 숲속의 안개비가 걷히고 
雲歸而巖穴暝(운귀이암혈명)하여 : 저녁 구름이 돌아오면 바위구멍이 어두워진다
晦明變化者(회명변화자)는 : 어둡고 밝아지는 변화를 보여주는 이것은,
山間之朝暮也(산간지조모야)라 : 바로 산속의 아침 저녁이다.
野芳發而幽香(야방발이유향)하고 : 들에 꽃이 피니 그윽한 향기나고
佳木秀而繁陰(가목수이번음)하며 : 어여쁜 초목은 빼어나 무성한 녹음지고,
風霜高潔(풍상고결)하고 : 바람과 서리는 높고 깨끗하고
水落而石出者(수락이석출자)는 : 수량이 줄어들어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 바위들
山間之四時也(산간지사시야)라 : 바로 산간의 사시의 풍광이다
朝而往(조이왕)하고 : 매일같이 아침이면 이 산속을 찾아가고
暮而歸(모이귀)에 : 저녁이면 돌아오곤 하였으나,
四時之景(사시지경)이 : 사시 사철의 풍광이
不同而樂亦無窮也(부동이락역무궁야)라 : 저마다 다른지라 즐거움은 끝이 없었다.
 
至於負者歌于途(가우도지어부자)하며 : 짐 지고 가는 자는 길에서 노래부르고
行者休于樹(행자휴우수)하고 : 지나는 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쉬는데 이르러서도
前者呼(전자호)하면 : 앞서가는 자가 소리쳐 부르면
後者應(후자응)하여 : 뒤에 가는 자는 응한다
傴僂提携(구루제휴)하여 : 구부정 노인네는 손을 잡고
往來而不絶者(왕래이부절자)는 : 오고 가며 끊없이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滁人遊也(저인유야)라 : 바로 저주(滁州) 사는 백성들이 유람나온 것이었다
臨溪而漁(임계이어)하니 : 계곡에 내려가서 물고기를 잡으니
溪深而魚肥(계심이어비)하고 : 물이 깊어서 물고기는 살찌고
釀泉爲酒(양천위주)하니 : 양천(釀泉)으로 술을 빚으니
泉香而酒洌(천향이주렬)이라 : 샘물이 향기로와 술이 맑고 차가웠다.
山肴野蔌(산효야속)이 : 산나물 안주와 들나물을
雜然而前陳者(잡연이전진자)는 : 잡다하게 앞에 벌여 놓은 것은 
太守宴也(태수연야)라 : 바로 태수가 베푼 연회이다
宴酣之樂(연감지락)은 : 연회에서 술마시는 즐거움은
非絲非竹(비사비죽)이라 : 현악기와 관악기가 필요 없었다
射者中(사자중)하며 : 활쏘는 자들은 과녁을 맞추고 
奕者勝(혁자승)하고 : 바둑을 두는 자는 이기려 하고
觥籌交錯(굉주교착)하여 : 벌주 잔이 큰 쇠뿔 잔을 세는 셈가지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起坐而諠譁者(기좌이훤화자)는 : 일어났다 앉았다가 시끌벅쩍한 것은
衆賓歡也(중빈환야)라 : 모인 손님들이 즐거워 하기 때문이다.
蒼顔白髮(창안백발)이 : 푸른 얼굴에 백발한 늙은이가
頹乎其間者(퇴호기간자)는 :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것은
太守醉也(태수취야)라 : 태수가 취해서 쓰러져 있는 것이다


已而夕陽在山(이이석양재산)하고 : 어느 사이에 석양이 서산에 있고
人影散亂(인영산란)은 : 사람들의 그림자는 어지럽게 흩어지니,
太守歸而賓客從也(태수귀이빈객종야)요 : 태수가 돌아가니 손님들이 행차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었다
樹林陰翳(수림음예)하여 : 숲속이 어둑어둑 해지고,
鳴聲上下(명성상하)는  : 아래 위로 지저귀는 소리는
遊人去而禽鳥樂也(유인거이금조락야)라 : 바로 곧 유람나온 사람들이 사라져 새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然而禽鳥知山林之樂(지산림지락연이금조)이오 : 하지만 뭇새들은 숲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은 알지언정
而不知人之樂(이부지인지락)하고 : 사람들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고,
人知從太守遊而樂(인지종태수유이락)이오 : 사람들은 태수를 따라 유람나온 즐거움은 알지언정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이부지태수지락기락야)라 : 태수가 그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醉能同其樂(취능동기락)하고 : 술이 취해서는 그들의 즐거움을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할 줄 알고,
醒能述以文者(성능술이문자)는 : 술에서 깨어나서는 글로써 그 마음을 표현해낼 수 있는 이는
太守也(태수야)라 : 곧 태수이라
太守謂誰(태수위수)오 : 태수는 누구라 하나
廬陵歐陽修也(여릉구양수야)라 : 여릉 땅의 구양수이다.



이백 친필 1 시권장류(詩卷長留)


두보(杜甫)의 시 - 송공소부사병귀유강동겸정리백(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747年)
공소부가 병으로 사임하여 강동으로 돌아가 쉬려 하니 송별을 겸해서 이백에게 드린다


巢父掉頭不肯住,(소부도두불긍주)
東將入海隨煙霧。(동장입해수연무)
소부는 머리를 흔들며 머물지 않으려 하고,
강동에서 장차 바다로 가 안개 따라가려 하네


詩卷長留天地間,(시권장류천지간)
釣竿欲拂珊瑚樹。(조간욕불산호수)
길이 남을 시집을 세상에 남겨두고,
낚싯대로 산호수에 앉은 먼지 터네。


深山大澤龍蛇遠,(심산대택룡사원)
春寒野陰風景暮。(춘한야음풍경모)
깊은 산 큰 못으로 용과 이무기 멀리 떠가고,
추운 봄날 음산한 들녘에 풍경은 저물어 가네。


蓬萊織女回雲車,(봉래직녀회운거)
指點虛無是征路。(지점허무시정로)
봉래산 직녀가 구름수레 되돌려,
허황된 점 지적하니 이것이 가야 할 길이네。


自是君身有仙骨,(자시군신유선골)
世人那得知其故。(세인나득지기고)
본래 그대 몸은 비범한 골격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까닭을 알겠는가。


惜君只欲苦死留,(석군지욕고사류)
富貴何如草頭露。(부귀하여초두로)
다만 그대를 아끼기에 한사코 머물게 하고 싶지만,
부귀란 것이 어떤가 풀잎 끝 이슬이거늘。


蔡侯靜者意有餘,(채후정자의유여)
清夜置酒臨前除。(청야치주림전제)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었네。


罷琴惆悵月照席,(파금추창월조석)
幾歲寄我空中書。(기세기아공중서)
거문고 마치고 서글프게도 달은 자리를 비추는데,
그 어느 해에나 나에게 하늘서신 보내려나


南尋禹穴見李白,(남심우혈견리백)
道甫問訊今何如。(도보문신금하여)
강남에서 우 임금 무덤 찾아 보다가 이백을 만나거든,
두보가 지금은 어떠신지 묻더라고 안부 전하게。


*孔巢父: 徂徠山 竹溪六逸의 한 사람 -> 李白: 魯郡東石門送杜二甫 참조
學問을 좋아했고 永王燐이 반란을 일으키고 幕下로 불렀으나 거절했다
*珊瑚樹: 庭園樹의 한 種類
*蓬萊: 方丈, 瀛洲와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苦死: 한사코, 반드시
*蔡侯靜者意有餘,清夜置酒臨前除: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는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宣王의 명을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해 죄인이 되어 오랏줄에 묶인 것을 비유하여 富貴何如草頭露의 부분의 부귀란 것이 덧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劉向新序 雜事二 50>에  <전략> 蔡侯之事故是也。蔡侯南遊乎高陵,北經乎巫山, 逐麋麇麞鹿,彉谿子隨, 時鳥嬉遊乎高蔡之囿, 溢滿無涯,不以國家為事,不知子發受令宣王, 厄以淮水,填以巫山, 庚子之朝,纓以朱絲,臣而奏之乎宣王也。<후략>
*蔡侯: 蔡나라(BC11c~BC447)는 주대에 중국에 존재한 侯國이다. 諸侯의 성은 姬이며, 爵位는 侯爵이다. 蔡侯는 蔡나라 마지막 諸侯 姬齊(BC450~BC447)의 爵位다.
*禹穴: 禹 임금이 藏書한 동굴로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다. 禹임금이 巡狩 중 會稽山에서 崩御하여 그 자리에 장사했다.

*道: ~로부터


이백(701~762)은 장안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올라 여행을 하다가 두보(杜甫)를 만나고 두 사람은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시인은 함께 하남 지방과 산동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백은 두보와 헤어져 각각 여행을 떠났다. 이백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712~770)는 양양에서 태어나 하남성 공현으로 이사하였다.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문에서 자란 두보는 7살 때 (봉황시)를 지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두

보는 20살 때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썼다.


"과거나 한번 볼까 ?'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보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두보는 낙양에서 이백과 작별하고 다시 장안으로 올라왔다.

두보는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현종이 실시한 시험을 보았으나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간신 이림보는 자기 보다 나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까봐 시험을 본 사람 전체를 낙방시켰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며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는 것까지도 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권력자들의 향락과 사치를 미워하는 시를 지었다.


그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반란평정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백은 영왕 인(璘)의 요청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왕이 숙종에게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는 바람에 이백도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은 강남일대를 방랑하다가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여러 곳을 방랑하던 두보는 낡은 배 안에서 59살 때 병으로 죽었다.
이백과 두보는 각각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많은 명작을 후세에 남겼다.

이백은 시선(詩仙) 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백 친필 2












아미정(蛾眉亭)


이번 중국 인문기행 중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안내문이나 표지판을 보면 우선 한자(漢字)와 그 아래 영문,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의 한글 4가지 문자로 해설이 되어 있다.


< 아미정은 북송 희년 3년에 설립되었고, 역대의 왕조에서 수선을 진행하였으며,

민국 23년(1934년)에 또 재차 수선을 진행하였고, 1987년에도 재수선하였습니다.

이곳은 "앞에 동서 양산을 바라볼 수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구불구불한 아미산". 이로인해 아미정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미정은 현재 시급문물보호단위입니다.>




당시인이백의관총(唐詩人李白衣冠塚)


이백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 알려진 채석강 나루터 근처에 당시 이백이 벗어놓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묻었다는 묘.

글씨는 당대의 서예대가 임산지(林酸之)가 쓴 글이다.














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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