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되는 동인지 <성서조선>의 창간에 참여한 일이다.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신앙적, 민족적 뜻을 함께 한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ㆍ정상훈ㆍ송두용ㆍ양인성ㆍ유성동은 1927년 7월 도쿄에서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국판 44쪽으로 김교신의 창간사에 이어 6인의 무교회 신앙의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실었다.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주장하고, 기성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창간호는 뒷 부분에 동인들이 1편씩 단상을 실었다. 함석헌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생애의 첫 활자화 된 글이다. 처녀작인 셈이다. 꽤 긴 글이다. 마태복음 6:31-33을 인용한다.

“그런 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외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天父)가 너희 쓸 것인 줄 아시나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은 적도 일본에서 잡지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야수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서를 인용하면서, 알아듣는 사람들은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함석헌의 대 사회 발언의 첫 마디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제목이었음은, 27세 청년 함석헌의 의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난에 찬 생애의 방향성을 예시한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한다.

근역(槿域-무궁화가 많이 피는 땅, 즉 한국)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 해도 이는 우원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파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줄을 놓으라는 것 같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흰 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주석 21)

<성서조선>은 동인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 단독의 이름으로 편집, 발행되어 그의 개인잡지 성격의 신앙월간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고, 함석헌도 계속하여 기고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통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쓸 것이다. 


주석
21> <성서초선>, 1927년 7월(창간호).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에 비해 함석헌은 지극히 온건한 지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즉 일본 사회에 신사조의 물결이 넘실대고,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투쟁의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희생을 감수할 때, 그는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 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성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주려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 선생님(유영모-필자)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우찌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두고 또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3ㆍ1운동의 체험으로 얻게 된 민족주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우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나, 일본 유학 중에 지켜보아 온 아나ㆍ불 계열의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기독교사상을 통한 정신적ㆍ사상적 연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난 것은 오산에서 남강ㆍ도산ㆍ고당을 만난 것과 궤를 같이할만큼 생애에 두고 두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훗카이도 출신인 우치무라는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때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왕의 칙어를 비판하여 역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위선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하면서 지식 수준이 높은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다.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성경연구회에 나갔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사귀고, 함께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의 둥지가 된 <성서조선>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여섯이 의결하고 동인지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金)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석 16) 여섯사람은 함석헌ㆍ김교신 외에 유석동ㆍ송두용ㆍ정상훈ㆍ양인성이다.

함석헌이 유학중에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저물고, 황도파 세력에 의한 치안유지법 제정, 노동자와 일본공산당 탄압, ‘대역사건’이라 하여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무기형으로 감형), 간토 대진재 와중에서 5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과 일본 아나키스트ㆍ사회주의(공산주의) 지도자 암살(처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함석헌은 학교 교육보다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고 교우들과의 토론으로 폭 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교신ㆍ송두용 등과는 평생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배울수록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동서양의 명저를 통해 안목이 확대되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를 내세울만큼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하나의 j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의 j는 재핀 즉 일본이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떴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 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참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게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석 17)

애를 더듬어 보면 지극히 자주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자주성과 창조성은 뒷날 독재권력과 싸우게 되는, 민주주의와 씨알사상으로 영글게 되었다. 뛰어넘어 자기의 주체성과 폭넓은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평생 자주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씨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줄기차게 싸웠다.

동경고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움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의 요절한(31세 때 선박 전복사고) 낭만파 시인 쉘리(1792~1822)다. 그의〈서풍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세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 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세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서도 아니다.
(주석 18)

오, 사나운 서풍아, 너 가을의 산 숨이야,
네가 볼 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
술사에게 쫓기는 유령의 때와 같으니,(…)

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주석 19)

함석헌은 <서풍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를 민족 해방의 메시지로 환치하면서 쉘리를 배우고, 간디를 읽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시인 타고르, 독일의 문호 괴테를 좋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괴테는 많은 사상적 편력을 했다고 한다. 스웨덴붉에서 신비주의, 헤델에서 능동주의, 스피노자에서 단독사상, 자연에서 범신론 등으로….

이 점이 함 선생님과 통하는가?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ㆍ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내촌(內村)에게서 성서, 타골ㆍ칼라일ㆍ카스키ㆍ노자ㆍ장자ㆍ바다받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20)


주석
15> <전집> 4, 215쪽.
16> 앞의 책, 218쪽.
17> 앞의 책, 218~219쪽.
18> 함석헌, <겨울이 만약 온다면>, <전집> 4, 111~112쪽.
19> 함석헌, <역사와 민족>, 233~238쪽, 제일출판사, 1964.
20> 안명우, <선생님께 드리는 글>, <씨알 인간 역사-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5쪽, 한길사, 1982.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5 08:00 김삼웅

 

 

 

오산학교 시절에 기독교 신앙이 더욱 깊었던 그에게 현장에서 지켜 본 간도 대진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이 때의 영적 체험은 섭리사관(攝理史觀)을 싹 틔워 그의 독특한 역사관, 역사철학이 되고, 곧 만나게 되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함석헌에게 간도 대진재의 참화 그 자체도 맨 정신으로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 벌어진 일본인들의 야수성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마을에 사는 기독교인, 불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국가주의의 패악을 뼈저리게 체득했다. 함석헌은 며칠 뒤 함덕일과 하숙집에서 반찬을 사러 가게에 갔다가 일본도와 대창을 든 일단의 무리에게 쫓기게 되었다. 다행히 안면이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뒷날 수차례 감옥과 유치장을 드나들면서 이를 일러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그가 인생대학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간도 대진재 때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이 아닌 사범학교에 입학한 것도 간도 대진재의 영향이 작용하였다.

나는 하룻밤을 경찰서에 잡혀가서 새고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감옥길의 입학식이였습니다. 하룻밤 지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제 일본 민족이란 어떤 민족인지 알았다기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일생 동안 수차례 드나들게 된 감옥(형무소)의 첫 경험이었다. 마치 미국의 저항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다가 하룻동안 콩고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 경험이 <시민의 불복종>을 쓰게 되었듯이, 함석헌도 이 때의 경험이 조국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향하는 거대한 발걸음이 되었다.

함석헌은 1924년 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1부 갑조)에 들어갔다. 전공과 진로를 두고 여러 날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노동자계급의 지위향상과 노동조합 결성이 추진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전파 되고, 아나키즘,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각종 이데올로기가 번창하였다.

노동운동이 고조되면서 오스키 사카에 등의 아나키즘운동과 1920년 결성된 일본 사회주의동맹 등 볼세비즘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아나’ 대 ‘볼’의 논쟁이 치열해지고, 1925년 6월 일본공산당원 전원이 검거되는 ‘제1차 공산당사건’이 발생하였다. 간도 대진재의 와중에 아나키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지도자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피검되었으나, 지식인ㆍ노동자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나ㆍ볼 사상이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럴진대, 지식인ㆍ상류사회란 것이 이럴진대,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ㆍ도덕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 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20대 초반의 함석헌에게 1920년대 초기 일본 사상계와 종교풍토는 많은 사상적ㆍ정신적 갈등을 겪게 하였다. 조선 유학생들과 노동자 대부분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이를 조국해방 투쟁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반면에 친일계열의 부르조아 청년ㆍ학생들은 일본의 선진문물을 배워 식민지 조국의 관리가 되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 거의 대부분이 그 소위 신사조에 휩쓸려서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나 자신의 경우로만 보아도 그러한 영향이 확실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일본의 현실을 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상적인 모든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청년들과 같이 휩쓸려 다녔지만 박열ㆍ신용우ㆍ방한상 등 맹장들과 흑도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해 우리들만이 사상계에 있어서 최첨단을 걷는 선구자인 것처럼 뽐내고 우쭐대던 기억이 난다.

함석헌은 일본에서도 명문이라는 동경고사에서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사를 훈련하는 양성소이지 학문을 하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났고, 일본식 국가주의 정신 교육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일본의 수재들이 모이는 이 학교의 역사교육 학과의 사비생(私費生)이 되어 그들과 경쟁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학비와 하숙비는 오산학교의 보조비와 고국에서 아버지가 한의사로 어렵게 마련한 돈을 보내주어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학생들과 역사연구를 목표로 하는 함석헌의 공부의 방향이 같을 리 없었다. 함석헌은 학교 공부보다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과 역사서적을 읽고 현대사상의 관련 서적도 탐독하였다. 타고르의 <기탈잘리>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이를 계기로 간디의 책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었다.

동경고사 시절 성적표에 따르면 수신, 교육학, 역사를 위주로 한 갑조(甲組)의 교과목 가운데 법제와 경제는 1학년 때만, 교육학은 3개년,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는 4개년간 수강했는데, 특히 1,2학년 때는 사범학교 교육의 특성상 수신ㆍ교육학ㆍ국어ㆍ한문 등이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석헌은 졸업하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사범학교 교원면허증, 보통중학교 교원면허증, 고등여학교 면허증 등 3종을 모두 수여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졸업생 중에는 김교신 외에 시인 조병화, 문학평론가 백철, 친일 언론인 서춘, 전 대통령 최규하, 북한의 역사학자 문석준 등이 손꼽힌다.

함석헌은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일왕의 충용스러운 ‘교육병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을 묵묵히 보내면서도 일본인 동기생들을 사귀지 않았고, 국체명징의 일본 교육정신에 반발하여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었다. 또 세계적으로 알려진 저항 인물들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는 뒷날 많은 글을 쏟아냈지만 동경고사 시절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없었을 것이고, 무의미한 기간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주석
11>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노명식, 앞의 책, 147~148쪽.
12> <전집> 4, 215쪽.
13>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2ㆍ3ㆍ5호 연재.
14> 조광, <1930년대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 <한국사상 사학 2>, 2003. 이치석, 앞의 책, 151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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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4 08:00 김삼웅

 

 

1923년 관동재진재 학살된 조선인들의 숫자는 6천 6백여 명이나 된다. 이런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찌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하겠는가? ⓒ 자료사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1923년 3월 하순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당시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다. 일제는 우민화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학을 세우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멀고 극소수의 친일파 자녀가 아니고는 유학비가 만만치 않았고, 중국에서는 아직 근대적인 대학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집에서는 유학비를 댈 여력이 없어서 오산학교의 도움을 받았다.

함석헌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한 남강의 둘째아들 이택호의 도움으로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입학자격이 필요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거치는 기본코스처럼 되었다. 일왕 부자를 처단하려든 박열, 2ㆍ8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상덕 등도 세이소쿠에서 영어를 배웠다.

함석헌은 일본으로 가면서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문학, 영문학, 미술 등 취미가 있는 분야를 하나씩 검토하고 삭제해 나갔다. 3ㆍ1운동 이후 국내에서 열기를 띤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고심 끝에 교육을 전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범학교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대지진을 맞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유지마에 사는 함덕일 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지진을 겪었다. 유지마는 함석은이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닐 때 하숙하던 곳으로, 평고시절의 하숙집 아들 함덕일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간토 지방의 진도 7ㆍ9라는 대지진으로 57만 가구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10만 여 명, 피해 가옥이 45만 채, 건물 피해로 압사한 인명이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큰 피해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인이 폭등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폭등을 선동한다”는 따위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조선인의 폭등을 단속하기 위해” 조선인을 수용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조선인 폭동 소문에 격분한 일본인 자경단과 군ㆍ경찰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그 와중에 박열 등 불령단 소속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일왕부자 폭살 사건’의 혐의로 구속되고, 일본 아나키스트운동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英)가 살해되었다.

함석헌은 용케 살아남았다. 지진이 일어난 반대쪽에 있다가 참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친구의 집에서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지진으로 황급히 층계에서 내려오자, 집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처참한 자연의 재앙과 인간의 아비규환을 현장에서 목견하였다.

23세의 함석헌을 대진재의 한복판에 있게 한 섭리는, 그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일본인은 어떤 민족이며 한국인은 또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종교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다 무엇인가를 그 똥구멍까지 철저히 파헤쳐 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3ㆍ1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자기는 사람질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함 선생은 만일 대지진의 한복판에서 그 무서운 광경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돈을 주고 사려 해도 살 수 없고, 지혜로 찾아내려 해도 찾아낼 수 없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면 기회요 계시라면 계시였던” 그 기회와 계시를 놓칠 뻔 했는데, 자기를 그곳에 있게 하여 그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하고 그 속에서도 아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한 것은,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라고 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의 그 광경을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말로 전하라고 해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했는데 “그걸 말로 다 할 수 없다니! 부끄럽고 슬픈 일”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광경은 사람의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고, 그저 “장엄이라고 할까 처참이라 할까 처절이라 할까, 지옥ㆍ연옥이 있다면 그런 곳일까”라고 한다. (주석 10)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함석헌은 이튿날 자기 하숙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운명의 신비를 깨치게 되었다. 자신들이 시노비즈이케를 떠난 날 밤에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거기에 있던 수 만 명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주석
10>  노명식, 앞의 책,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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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뒷날 두고두고 자기는 오산의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람구실을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남강ㆍ도산ㆍ고당은 민족적 지도자인 한편 오산학교에 깊이 관계하여 오산을 민족ㆍ정신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함석헌의 <오산학교> 사랑을 들어보자.

칼과 활로 하는 혁명이 껍데기의 혁명이라면, 속알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하는 정신의 운동이다. 홍경래가 들다가 못 들고 만 민중혁명의 정말 큰 불은 그가 간 지 한 세기 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에 의해 일으켜졌다.

남강 선생은 홍경래가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던 그 정주성에, 양반의 사냥개인 관군이 혁명에 나섰던 민중을 단으로 묶어세우고 무찔러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던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자랐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산 선생은 그 홍경래가 났던 용강에서 났고, 조만식 선생은 그가 성공했더라면 필시 새 나라를 거기에 배반했을 평양에서 자랐다.

그들은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는 않았다. 그처럼 술책을 쓰고 선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붉은 가슴을 가지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대했다. 그렇지만 그 운동은 홍경래의 혁명으로는 비할 수 없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주석 8)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이들의 정신적 세례를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여기서 ‘한글’을 처음 배웠다. 우리 글을 배워야 할 시기에 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어의 상용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 사진은 다석 사상연구회에서.

오산학교에는 3인의 민족지도자 외에도 첫 교사였던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체육교사 서진순(徐進淳), 뒷날 친일파로 변신한 이광수, 그리고 함석헌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가 있었다.

함석헌이 오산에서 유영모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석은 그때 서른두 살, 투옥된 남강의 부탁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노자>, <장자>ㆍ<사서오경> 등 중국 고전은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정통하여 스물한 살의 함석헌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일본 동경물리학교를 갓 졸업한 개명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조선총독부가 교장 취임을 불허하여 1922년 4월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함석헌은 1년 밖에 안 되는 기간의 사제관계였으나 평생 스승으로 모셨고, 그로부터 폭넓은 중국 고전과 속 깊은 기독교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함석헌은 유영모 선생 밑에서 오산학교 교가를 부르면서 2년여 동안 혼과 신체를 단련하였다.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에 범으로 울리나리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유영모 교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를 통해 일본 무교회주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와 기독교의 지도자 야마무로 군페이를 알게 되었다.

또 스코틀랜드 출신 토머스 칼라일을 배웠다. 그의 시 <오늘>은 함석헌이 나이가 많아질때까지 좋아했다.

오 늘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자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

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여러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생애를 두고 많은 영향을 받는 책을 읽었다.
HㆍG, 웰즈의 <세계사>, 토머스 칼라일의 <의상철학>, 죠지 폭스의 <일지>, PㆍB, 쉘리의 <시 모음> 등이다. 특히 웰즈의 <세계사>의 영향이 컸다.

웰즈의 저서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년 함석헌에게 평화주의의 필요성, 세계주의에 입각한 역사관 및 종교관 형성에 근본적 영향을 심어주었다. 또한 웰즈의 <세계사>에 대한 감동 때문에 함석헌은 역사, 진화론, 과학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훗날 함석헌이 역사라는 학문을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그 스스로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에도 웰즈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석 9)

함석헌은 회고한다. 오산시절을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주석
8>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57쪽.
9> 김성수, <함석헌 평전>, 104~105쪽, 삼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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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2 08:00 김삼웅

 

 

학교를 자퇴한 뒤 2년 동안은 함석헌에게 고뇌와 방황의 시기였다.

“공부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할 때 포플러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 속으로 바다로 지향없이 헤매던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삼지 못했습니다.” (주석 5) 란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고향 마을에는 온갖 신문이 나돌았다. 만세 부르다가 학교에서 쫓겨나 맨날 산에 올라 창가만 부른다. 심지어 함석헌이 미쳤다는 등의 박소문이었다. 함석헌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심중을 꿰뚫고 다시 공부를 하도록 일깨웠다.

1921년 늦은 봄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처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학교를 돌며 입학의 길을 찾았으나 이미 신학기 개학날이 지나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다시 귀향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거리에서 집안의 형이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서울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고향마을에 기독교를 맨 먼저 전도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청년단 재정부장과 대외문서작성 관계를 맡는 독립운동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석헌을 무척 아껴왔다.

함석규는 함석헌을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산으로 내려가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때까지도 함석헌은 오산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이 학교의 존재도 몰랐다. 남 같으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오산중학 3학년생이 되었다. 명문이라는 관립 평고생이 무명의 오산에 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의 오산학교 입학은 또 한 차례 인생의 길을 크게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다. 3ㆍ1운동이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 계기였다면, 오산입학은 새로운 얼ㆍ혼ㆍ알의 탄생이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민족정신의 수련을 닦게 되었다.

오산은 뒷날 함석헌이 풀이한대로 ‘다섯 뫼(五山)’의 지형으로, 익주의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연향산과 해성산, 서쪽에 제석산, 서남쪽에 천주산, 남쪽에 남산봉이 둘러쳐진 곳이다. 여기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세웠다.

사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된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 아래 금주ㆍ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오산으로 돌아와 기존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에 이어 오산학교를 세웠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농가집 사랑방이나 건너방에 서로 끼어 욱적거리니 몸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수준 이하의 교실이었다. 엉터리 교사도 더러 있었다.

학생도 합탕이었다. 전부터 있는 학생은 몇이 안 되고, 모두 새로 모여든 사람들인데 평고 퇴학자가 있지, 신성(학교)에서 닦아회(동맹휴교) 하고 온 자가 있지, 서른 된 수염난 이가 있지, 교회 장로 하는 사람이 있지, 훈장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백화파(白樺派) 문학을 읽고 문사연하는 치가 있지. (주석 6)

본래의 학교 건물은 3ㆍ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민족주의의 소굴’이라 하여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한 해 뒤 독지가 김기흥이 거금을 내놔 45평의 세 칸짜리 임시교사를 지었다. 함석헌이 입학했을 때는 이 교사였다. 설립자 남강은 민족대표 33인의 기독교 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누구 하나 겁먹거나 불평하지 않고,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공부하였다. 함석헌에게 이런 모습이 경이로웠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강 이승훈ㆍ도산 안창호ㆍ고당 조만식이다. 이들은 당대의 민족지도자이고 인격자이며 교육자, 신앙인이었다.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남강은 3ㆍ1운동 후 옥중에 있었다. 함 선생이 남강과 직접 접촉한 기간은 오산의 교사로 취임한 1928년 봄부터 남강이 급사한 1930년 5월까지 2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함 선생이 도산을 만나 뵌 것은 잠깐잠깐 두 번 뿐이라고 한다. 고당도 3ㆍ1운동 전후 두 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함 선생이 오산에 편입했을 때는 이미 교장으로 있지 않았다. 함 선생은 고당에게 배운 일이 없다. 이처럼 세 분은 함 선생이 직접 글을 배운 선생님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맘속으로 참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이가 이 세분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주석 7)


주석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호.
6>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4권, 163쪽.
7> 노명식, 앞의 책, 221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평고 시절에 겪은 가장 큰 사건은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그의 나이 18살 때이다.
3ㆍ1운동은 한민족, 한겨레의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소외되고 푸대접 받아오던 평안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를 낼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ㆍ1운동의 집회횟수는 가장 많은 평안도가 315건으로 297건의 경기도(서울 포함) 보다 훨씬 많았다.
참가 인원은 인구밀집의 경기도가 665,900명인데, 평안도는 514,670명, 사망자수는 경기도 1,472명, 평안도 2,042명, 부상자수 경기도 3,124명, 평안도 3,665명, 피검자수 경기도 4,680명, 평안도 11,610명이었다.
(주석 1)

평안도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ㆍ부상ㆍ피검자를 낸 것은 일찍부터 전래된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이 지역 특유의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의 발로였다.

함석헌은 3ㆍ1운동 당시 친척 형인 함석은이 평고로 자신을 찾아오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함석은은 평안남북도 학생운동의 책임자로서 평고의 책임을 함석헌에게 맡겼다. 함석헌은 몇몇 학우들과 밤을 세워 시위운동 때 나눠 줄 태극기를 목판에 새겨 찍었다.

1919년 만세를 부르는 그 해 처음 석은 형이 평양으로 왔다. 그가 3ㆍ1운동 때 평남북 학생운동을 맡은 관계로 자연 평고에서는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서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여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적은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하였다. (주석 2)

3
ㆍ1운동은 함석헌의 생애를 바꾸게 되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웃의 병을 고치겠다는 뜻이, 나라를 찾는 민족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한 명문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마 양심상 그러하지 못했다.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 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귀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 서기가 되고, 군수ㆍ경부가 되고, 의사ㆍ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한동안 계엄령이 내렸다가 안정된 뒤에 집에서 어른들이 학교에 다시 가라 하기도 하여 봇짐을 싸가지고 평양에 나왔으나 차마 학교문엘 들어설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이밀기가 우선 싫고 한 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계속해 다니기는 싫었다.

크게 용기가 있어서 아니라 맘이 약해 차마 할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 지 모르지만 하여간 의사 되기는 그만 두었다.
(주석 3)

혁명가나 사회운동가 중에는 젊어서 의학(의술)을 공부하다가, 몇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중ㆍ민족의 병(해방)을 고치겠다고 ‘전업’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아버지를 따라 한때 약업에 종사한 적이 있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중국 5ㆍ4운동과 저항문학의 작가 루쉰, 중남미 해방의 게릴라 대장 체 게바라, 필리핀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 리잘의 전공은 의학이고 의사였다.

함석헌은 기미년의 저항과 좌절을 열여덟 피끓는 나이에 겪었다. 이름 없는 민중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지도층이 어떻게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중을 배반하는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민중(씨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하게 되었다. 3ㆍ1운동이야말로 그에게 새 인간의 탄생이었다. 의학 지망생 함석헌이 씨알 사상가로 거듭나게 하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3ㆍ1운동은 겉으론 실패라면 실패다. 만세만 부르면 독립은 세계에서 ‘거저 주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의미에서 실패다. 그러나 실패인 줄을 차차 알면서도 민중은 결코 풀이 죽지 않았다.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자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운동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운동의 뜻은 민중이 하나로서의 의식을 가진 데 있다. 씨알의 싹이 튼 것이다. 싹이 텄기 때문에 첫 번 열(熱)이 지나갔어도 낙심을 아니한 것이다. 낙심 아니한 증거는, 만세 이후 일어나서 한동안 밀물처럼 성행했던 강연회, 교육열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라는 현상이다.
(주석 4)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11,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2>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9년 3월호.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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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14년 덕일학교 4년을 졸업하고 양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면서 식민지 교육의 친일ㆍ우민화를 목적으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교육제도와 내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함석헌은 5학년에 편입이 가능했으나 일본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학년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양시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을 때의 일인데, 실제로 5학년에 들어갈 학력인데도 단지 “묻는 말에 일본말로 대답 못한다”는 이유로 4학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왜 일본말로 말해야 한단 말인가? 소년 함석헌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본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한다는 학교규칙 때문이었다. (주석 9)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장래 의사가 될 꿈을 안고 1916년 4월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평고)에 입학하였다. 당시에도 평양은 큰 도시였다. 평안도 지역의 물산이 집결하고, 오래 전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져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함석헌은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 경창리 5번지에 하숙을 정하였다.

열여섯에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물아래 촌바우가 금수강산을 본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소년 시절의 3년을 그 속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 못할 행복이다. 평양은 이른바-

긴 성 한 편에 굼실굼실 흐르는 물
한 벌판 동편 끝에 올망졸망 섰는 뫼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그 장관은 넓은 들과 그 복판을 흐르는 대동강이었다. 거기 중심이 되어 호령하는 자리에서 주산(主山)이 된 것이 모란봉이다. 모란봉이 크기 조막만한 데 지나지 않지만, 한번 거기 올라서면 사방 몇 백리의 산천이 지호간(指呼間)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제1강산이다.
(주석 10)

함석헌의 평양 생활은 평범했다. 식민지 초기여서 일경의 감시가 삼엄하고, 평양도 하루가 다르게 왜색으로 변해갔다.

나는 어느 점으로 보나 학교에서 두드러진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 성적으로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조그만 시골구석에서는 재주 있단 말도 들었는지 모르나 평안 남북, 황해 일대의 수재가 다 모인 곳엘 가면 자연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고 또 웬일인지 소위 공부벌레 소리 듣는 것은 속되어 보여서 머리 싸매는 공부는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른바 호걸 노릇을 했나 하면 물론 아니다. 맘은 타고난 약질이어서 바닷가에 났으면서도 헤엄칠 줄을 모르고 체조시간이 되면 철봉하잘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주석 11)

평고 시절(1917년 8월)에 함석헌은 부모가 정해 준 고향 이웃마을 처녀 황득순과 결혼하였다. 17살, 아내는 한 살 아래였다. 효심이 두터웠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그대로 맞았다.

오래지 않아서 나는 결혼을 너무 이르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식청년 사이에 유행했던 이혼 같은 것은 그때도, 그 후도 생각해 본 일 조차 없습니다. 아내는 전연 교육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그때 두 분이 교회에 나가시며 며느리까지 데리고 나가셨고,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며느리 교육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리해서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 여성계에서는 지도적인 인물이 되신 것입니다.
(주석 12)


주석
9> 이치석, 앞의 책, 83쪽.
10>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1년 4월호.
11> 앞의 책.
12> 함석헌, <나의 어머니>, 노명식, <함석헌 다시읽기>, 46쪽.

 





http://news.kbs.co.kr/tvnews/4321/2011/02/22497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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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과 아들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할 당시 서른 한 살 새댁이었던 큰딸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팔순넘은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여분간.. 가족들은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곤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청석 여기저기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죽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채 사형당한 오욕의 세월을 지워 버리는데는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다신 정적을 없앤 이런일이 일어나선 안되겠죠. 정적을 없애는 이런..."

지난 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후 52년만에 지난 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 받았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간첩의 후손이라는 멍에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산 조봉암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사법 판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은 뒤에도 죽산의 딸 조호정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적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곤 집 근처 사찰로 가서 태워 버립니다,

<녹취> 조호정 : "나도 이제 80이 넘고 그러니까 나 가기전에 됐으면 좋겠다고 그 얘기밖에 다른게 없어요."

독립운동가로 제헌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등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제2대,,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80여만표와 200여만 표를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59년 7월.사형당했습니다. 국가 변란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이 50여년만에 판결을 뒤집으며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인터뷰>이동근(前 대법원 공보관) : "간첩죄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이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52년만에 종전 판결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하얀 수의에 덮여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호정 :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그렇게 험하게 가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얼굴이 편안해. 아..이런 말 한번도 안 해봤는데..조금 미소짓고 가만히 있어..아유 참...그러고 끝이 나거예요."

장남 규호씨의 고통은 더 컸습니다. 당시 10살이었던 조규호씨는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직장 생활 조차 힘들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조규호(62/죽산 조봉암의 장남) : "얘기하면 뭐해...편안하게 할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아니면 모르지."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생가터를 발굴하고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강화도의 한 마을.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생가터는 알수 없습니다. 간첩 혐의로 사형됐기 때문에 행적을 알만한 사람 대부분이 언급 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김기헌(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장) : "죽산 선생이 이곳에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물론 공부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생의 제적등본입니다. 등본에는 사형 당했다는 것만 표기돼 있을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현재 생가터로 추측되고 있는 곳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터뷰>이응식(강화읍장) : "세 군데 이사를 다니면서 다 조봉암 선생님이 사셨거던요. 첫번째 어느 자리든 택해서 생가로(지정해야하지 않나)"

대구에 있는 한 공원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묘를 위해 찾았습니다. 지난 1975년.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입니다.

<인터뷰>신동숙(82/故 도예종씨 부인) : "사형했다는 걸 알고 와서 그 소리 듣고 통곡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갔었어요."

성묘를 마친 85살의 강창덕옹은 개인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모셔둔 영정앞에서 또 한번 묵념을 올립니다.

<녹취>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애국 선열에게 간곡히 기원합니다. 첫째 영면하시고 명복을 빌고."

지난 74년 소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강창덕옹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른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인터뷰>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왜 나도 안죽고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나고."

같은 무기수로 살다 풀려난 나경일씨는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들 문석씨는 아버지가 투병중에 수술을 받을때도 고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아버님이 고문실로 착각하셨어요. 수술실을. 당시에 고문실이 조명이라든지 비슷했던가봐요. 그 악몽을 재연하고 계신거예요. 나쁜 놈들..나를 왜 여기 잡아 넣느냐. 참. 그때 아들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렇게 강인한 분이 셨는데."

김진생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간뒤 1년만에 유골로 돌아온 남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3살 노인의 응어리가 녹아있는 알 듯 모를듯한 내용의 메모만이 당시 김 할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진생(83/故 송상진씨 부인) : "(왜 이걸 쓰신거죠? 어머니) 뭐 한때 내가 이래저래 내 생각대로 이래 한게 있었지."

지난 1975년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해전 반독재를 주도하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관련자들은 당시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불과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록에는 간첩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절절합니다.

<녹취> "수사관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고 단단한 몽둥이로 발바닥,허벅지, 팔을 때렸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두 번인가 세 번정도 실신을 했습니다."

<인터뷰>김형태(사건 담당 변호사) :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들 그런 것도 받아줘야 되거든요. 근데 다 기각하고 그냥 항소심 같은데선 아무것도 안하고 결심을 해버려요."

당시 사형 선고를 내렸던 대법관들은 재판장이었던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이었던 이병호 판사를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이일규 판사만 사실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절차가 위법하다며 사형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냈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지난 2007년. 이일규 판사는 타계를 앞둔 1년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녹취>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인혁당이 배후로 지목됐던 민청학련 사건도 대학생과 일반인등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왔습니다. 지난 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후 1000여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한다는 혐의로 180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인터뷰>이철(민청학련 관련 1심서 사형선고) : "아버지는 몸져 누우시고, 어머니는 고생하시다가 몸이 불편해지시고, 딸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은 병들어 눕고, 이런 집안이 한 두곳이 아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돼 12년 형을 선고 받았던 최민화씨도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민화(민청학련 관련 1심서 12년 선고) : "“이 사회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그런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세상은 이제 오지 않겠지라고 하는 그런 회한도 좀 있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이들 사건은 지난 2005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두 사건은 모두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과 배상 결정이 내려지면서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터뷰>오승용(전남대 정치학 박사) : "국가는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권의 최후보루인 사법부...그 성스러운 곳에서 내려진 잘못된 판결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굳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지 않더라도 시대의 아픔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은 뒤늦게 국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이 문제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그걸 보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많다고 얘기한다면 저는 당연히 안받아야 되는거죠. 그 대신 35년전에 우리 가족들의 삶으로 돌려달라는 거죠. 그거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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