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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