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문(欞星門)


용봉문(龍鳳門)이라고도 한다.

신도에 위치한 하나의 상징적 의식성 건축물이다.


6개의 기둥에 3개의 문으로 된 패루이며 주춧돌과 포고석(抱鼓石)은 명나라 시대의 것이다.

포고석은 대문을 이루는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둥을 받쳐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보통 관직이 높거나 부잣집에서 사용하는 건축양식이다.



어하교(御河橋)


입구에서 본 영성문(欞星門)과 어하교(御河橋) 모두 효릉 건설 당시부터 있던 것이지만

후대에 모두 무너져 기둥과 교각만 남아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어하교도 원래는 다섯 개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 개로 되어 있다.

왼쪽에 명효릉(明孝陵)이라 새겨진 안내석이 보인다.







문무방문(文武方門)


효릉 능구(陵區)의 첫 번째 문이다.

거의 무너져 있던 것을 청(淸)나라 때 일차로 보수했고,

1998년 중산릉 관리국에서 명효릉 규격제도에 따라 황실건축양식에 맞춰 복원한 것으로 자색으로 칠해졌다.


중앙에는 세 개의 아치가 있는 문루가 있고, 그 좌우로 각각 한 곳씩 통로가 있다.

문루의 오른쪽 아래에는 청 선통5년(1909년)에 양강총독국과 강녕부지부회에서

명효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특별고시(特別告示)비가 있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일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쓰여 있는데

외국인 참관객들이 난간을 넘어 유물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자 쓰여진 것이다.





특별고시비(特別告示碑)


 청 선통5년(1909년)에 세워졌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일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쓰여 있는데

외국인 참관객들이 난간을 넘어 유물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자 쓰여진 것이다.



비전(碑殿)


비전(碑殿)의 치융당송(治隆唐宋)비


비전은 원래 향전 앞의 중문(中門)으로 효릉문(孝陵門)이라 불렀다.

다섯 개의 아치로 된 문이었으나 후에 파괴되어 버렸다.


지금의 비전은 청나라 강희(康熙 : 1654 ~ 1722) 황제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1699년 세 번째로 남방순시를 하던 강희황제는 효릉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그 보수를 명하였다.


이때 그는 손수 치융당송(治隆唐宋) 네 글자를 써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기도 하였다.

치융당송 비 좌우의 비석 역시 강희황제의 친필이라고 하며, 비전 내에는 총 다섯 개의 비석이 있다.


치융당송비는 높이가 3.85m, 폭이 1.42m, 두께가 0.38m이다.

“치융당송”은 태조 주원장의 치세가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을 능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강희황제는 6차례의 남방순시 중에서 5차례나 효릉을 참배하였다.

이것은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한족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홍루몽의 저자인 조설근의 조부, 조인(曹寅)에게 명하여 치융당송비를 세우게 하였다.


효릉은 청(淸) 함풍(1850 ~ 1861)시기에 발생한 수차례의 전쟁에 휩쓸렸다.

때문에 지상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고, 청 강희황제가 손수 쓴 석비 역시 이때 파괴되었다.


파괴된 효릉은 1864년 9월에서야 복구될 수 있었으나,

당시 청나라의 재정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치융당송비 역시 부서진 비를 재건축하기 보다는 부러진 비석을 다시 세워 허리부분을 때우고,

주변에 시멘트를 채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분은 이번 여행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현지 가이드.


용이 새겨진 비전의 난간들



신백로(神帛爐)


제사에 사용된 비단과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황색과 녹색으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여 만들어 졌다.


황색기와는 황제를 상징하고 녹색기와는 하늘에 대한 겸손함을 상징한다.

중앙에 아치형 문이 있는데 이곳에서 비단과 축문을 태웠다.

향전 앞 동, 서 양쪽에 두 개가 있다.


향전(享殿)


비전(碑殿) 다음에 위치한 효릉의 주요건축물이다.

원래 명칭은 효릉전(孝陵殿)이나 주로 향전이라 불린다.


원래의 향전은 파괴되어 없어졌다.

3층의 미륵좌는 높이가 3.03m이며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한백옥 난간이 미륵좌에 설치되어 있다.


미륵좌 사방으로 설치된 계단의 중앙에는 장식성 건축물인 단폐가 있으며

이 단폐에는 구름과 용, 그리고 산수가 새겨져 있다.


원래 향전의 앞뒤 길이는 57.3m였고, 가로 길이는 26.6m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향전에는 주원장과 황후 마씨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지금의 건축물은 청 동치시기에 건설한 3칸의 작은 건축물로 명효릉사료진열실(明孝陵史料陳列室)로 사용되고 있다.




향전(享殿) 주원장과 마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


초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원장은 원래의 모습이 기괴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에겐 곰보자국이 심했고 , 심지어 아내도 남편의 못생김을 인정했다 하며

잊을 수 없을만큼 괴상하게 생겼다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확실히 못생겼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승과 저승을 구분 짓는 내홍문(內紅門)


황제가 매장된 보성(寶城)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문이라고 하여 민간에서는 음양문(陰陽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기준으로 전조(前朝)와 후침(後寢)이 구분된다.

세 곳의 문이 있는 자색의 문루에 황금색 지붕이 얹혀져 있다.

200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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