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효릉(明孝陵)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중산[鐘山] 두룽푸[獨龍阜]에 있는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


명나라의 첫 황릉(皇陵)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황후(馬皇后)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있던 카이산사[開善寺]를 이전하고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공사중인 황릉에 먼저 매장하였다.


1383년 대전(大殿)이 완공되었고, 1405년 태조가 병사한 뒤 매장되었다. 3

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을 건설하였다.

효릉의 동쪽에는 주원장의 적장자(嫡長子)인 주표(朱標)가 묻힌 동릉(東陵)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 뒤 난징의 13개 성문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 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朝天宮) 삼청전(三淸殿)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皇城)의 만세전(萬歲殿) 지하 또는 베이징[北京]의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주원장이 사후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생전에 가짜 무덤을 여러 개 만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고대의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였는데,

이는 당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또 효릉의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十三陵)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전 세계의 역사에서 '입지전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원장을 뺀다면 큰 의미가 없다.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 비천한 농민 출신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그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마을의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해서

홍건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성공을 거두며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천하 패권을 노리는 각축장에 합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왕조로 창건된 원(元)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다.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승계 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쿠빌라이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원 왕조는 승계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형제나 일족 들을 실력으로 제압하여 통치권을 확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쿠데타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며,

황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강력한 군벌 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11대 황제인 순제(順帝)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대단히 무능한 통치자로 매도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그는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심성이 나약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순제는 당시의 실권자인 바얀(Bayan) 엘 티무르(El Temur)의 격렬한 반대로 일곱 달 이상 즉위를 하지 못하다

바얀이 조카에게 살해당하면서 간신히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제가 즉위한 직후, 황실에서는 권력 투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운데 천재지변이 연이어 덮치면서 대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킨 페스트가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대기근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고

메뚜기 떼가 습격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유민이 발생했으며 이는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배후에는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이들은 13세기 중반 남송(南宋)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 불교 종파로부터 파생된 종파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세상을 구한다(天下大亂 彌勒佛下生)'라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했다.


순제는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서 처형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한산동의 처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발적인 농민 반란이 조직화되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한 떠돌이 소작농 집안으로, 그의 위로는 3명의 형과 2명의 누나가 있었다.

1341년 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메뚜기 떼가 습격하고, 연이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주원장 일가도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 큰형을 잃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 형만 본가에 남고 바로 위의 형은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두 누나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열일곱 살이었던 막내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출가해서 중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재앙이 덮친 상황에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절에 머물지 못하고 3년간이나 안휘성과 인근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떠돌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회적인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주원장은 황각사로 돌아와서 공부에 매진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낮에는 절 주변에 있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불경뿐 아니라

유가(儒家)나 법가(法家)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구해서 독서에 몰두했다.

후일 황제가 된 다음의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주원장은 지적인 호기심이 유별난 사람이었다.


1351년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하는 민중 봉기라기보다는 절망에 빠진 민중들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찾던 정도의 백련교를

순제가 성급하게 탄압하고 교주 한산동을 처형하면서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대변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산동의 처 양(楊)씨는 어린 아들 한림아를 데리고 남쪽 지역으로 도망쳐 반원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여기에 전국에서 숱한 인물들이 호응했다.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동지라는 개념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휘성에서는 유복통(劉福通)이 가장 유력한 인물로 10만의 병력을 모았으며

대지주인 곽자흥(郭子興)도 별도로 군대를 일으켜 호주를 점령했다.


이들을 도적떼로 볼 수도 있고 반정부 혁명 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굶주린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상인이나 지주, 사찰과 같이 '가진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주원장이 있던 황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이 습격당해 폐허로 변하자 주원장은 앞날이 막막해졌다.


그는 이때 절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 참에 아예 홍건적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주원장에게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공부하던 와중에 얻은 어설픈 주역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점을 쳤는데 당장 떠나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그 길로 호주를 장악하고 있던 홍건적의 수령 곽자흥을 찾아갔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인물 됨됨이가 맘에 들었다.

그는 파격적으로 주원장을 친위대 소속의 경호대장 격인 구천장(九天長)에 임명했다.


주원장은 험상궂게 생긴 추남이었으나 성격은 호방하고, 담력과 배짱이 있어 전투에서는 용맹했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어 전리품을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곽자흥 또한 그를 중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인 마공(馬公)의 딸로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양녀가 되었다.

후일 황후가 되는 마씨 부인으로, 대단히 현명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홍건적이 봉기했던 초기, 원나라 조정에는 이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몽골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그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부를 살해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바얀 토구타는 상당히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주(徐州)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그러자 결정적인 순간에 황제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도졌다.

토구타를 경계하고 시기해서 그를 진압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해 버린 것이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군 사령관이 교체되었으니 지휘 체계가 제대로 가동될 리 없었다.


서주의 홍건적들은 기사회생해서 곽자흥이 버티고 있는 호주로 몰려들었다.

당시 홍건적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다.


서주에서 패퇴한 무리들에 의해서 곽자흥이 실권을 잃자 크게 실망한 주원장은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대략 700명의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부대를 조직했다.


그중에는 후일 개국공신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화운(花雲), 당승종(唐勝宗), 곽흥(郭興),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서달과 탕화는 황각사 시절에 사귄 친구들이었다.

후일에는 이들이 이름 높은 장군과 신료가 되겠지만 처음 모였던 이 무렵에는 무기라고는 처음 손에 잡아 보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이 초보 홍건적들은 과감하게 인근의 저주성(滁州城)을 공격해 성을 함락했다.

주원장은 곽자흥을 지휘관으로 모셔 왔다.


주원장이 저주성을 확보하자 등유(鄧愈), 이선장(李善長)과 같은 후일의 명장들이 가세했으며,

조카인 주문정(朱文正)과 이문충(李文忠)도 그의 휘하에 합류했다.

이들 역시 후일 불굴의 용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저주성을 확보하고 병력이 늘어나자 주원장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화주(和州)를 공격해서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단 점령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 군이 화주를 포위한 것이다.

처절한 방어전이 벌어졌고, 초보 홍건적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십 배나 되는 몽골 군의 맹공을 견뎌 낸 것이다.

몽골 군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채 철수했다.


이 화주 공방전은 주원장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가 1355년 3월, 그가 홍건적에 가담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는 홍건적의 봉기가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홍건적의 최고 실력자 유복통은 처형된 백련교주 한산동의 어린 아들 한림아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맞아들여

새로운 나라 대송(大宋)의 건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개봉(開封)을 공격해 점령하고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혁명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초반의 순수한 열기가 가라앉으면 천하 제패를 노리는 숱한 야심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야심가들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다.

이러한 야심가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재주를 겨루어 마지막에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남게 되며

그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역사가 바뀌곤 하는데, 원나라 말기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유복통이 동쪽을 장악했다면 서쪽의 실력자는 호북과 호남을 장악한 서수휘(徐壽輝)였다.

그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국호를 천완(天完)이라고 했다.

서수휘의 휘하에는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는 진우량(陳友諒), 명옥진(明玉珍)과 같은 야심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건적과는 상관없이 봉기한 태주(泰州) 출신의 장사성(張士誠)도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소금 밀매상이었는데 순식간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양자강 하구의 소주(蘇州)를 장악했다.


우리의 영웅 주원장은 이때까지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으로 소명왕 한림아 휘하의 장군 곽자흥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1355년에 곽자흥이 병에 걸려 급사하면서 주원장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소명왕은 곽자흥의 큰아들 곽천서(郭天徐)를 아버지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주원장을 부원수에 임명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된 주원장은 과감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양자강을 넘어 강남으로 내려가 물류의 중심지인 태평성(太平城)을 기습 점령했다.


성을 탈환하기 위해 몽골 인들은 급히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원장은 이들을 격파하고

태평성에 별도의 독립군단인 익원수부(翼元帥府)를 설치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1356년은 주원장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해였다.

중국 남동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경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경을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하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원장이 막 무대에 등장한 이 시기는 유복통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홍건적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 판단과 성급한 결정이 화를 불렀다.

홍건적 지휘부는 원나라 황실 타도를 목표로 북벌을 시도했다.


당시 정세를 보자면 홍건적과 다른 세력들이 동시에 봉기한 남부는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한 지역이었지만

북부는 엄연히 원나라 황실의 지배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유복통은 1357년에 개봉에 대병력을 집결시킨 후 세 방향으로 나누어 기세 좋게 북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몽골의 바얀들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무능한 지휘관들은 아니었다.


좀처럼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던 홍건적들은 몽골의 정예군을 상대한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질질 끌다

결국 북벌군의 반 정도는 전사하고 나머지는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전황이 극적으로 역전되면서 거꾸로 대송의 수도 개봉이 원나라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유복통은 100일 가까이 몽골 군의 맹공을 견디면서 분전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한림아와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멀찌감치 남쪽 저주의 안풍(安豊)으로 도피했다.


이 사태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홍건적의 지휘부가 몰락하자 야심을 감추고 있던 혁명가들이 천하 패권을 노리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의 세력 분포를 주원장을 중심으로 보면 선두주자는 서쪽에 둥지를 튼 진우량과 동쪽에 이웃한 장사성이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휘하에서 독립한 인물로 1360년에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고 했다.


장사성은 홍건적이 개봉을 잃은 시기에 남송 시대부터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평강(平江) 일대를 점령한 다음

소주를 중심으로 호주, 상주(尙州), 항주(杭州) 등 풍요로운 지역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언제부터 천하의 대권을 의식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남경을 근거지로 삼아 궁지에 몰린 소명왕 한림아를 지원했으나 곽자흥이 남긴 모든 것을 가로챘다.


곽자흥의 장남인 곽천서는 주원장보다 앞서 남경을 공격하다 전사했고,

차남인 곽천작(郭天爵)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남아 있는 상속자들인 딸과 조카는 주원장의 첩이 되었다.


주원장이 남경에 입성한 이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주변에 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유기(劉基), 송렴(宋濂), 도안(陶安)와 같이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주원장은 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홍건적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련교는 불교의 만민평등 사상에다 신비주의를 뒤섞은 서민들의 종교인 반면 유교는 원래부터 통치자들의 논리였다.


주원장 주변에 몰려든 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재야에서 글을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정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주원장의 새로운 참모들과 홍건적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백련교의 교리와는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원장은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경에 입성하면서 공포한 격문은 유교적인 이념에 바탕을 두어 기존의 사회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백련교의 개벽론이라든지 새로운 세상과 같은 개념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왕 한림아의 장수로 남아 있었으며 1362년에는 소명왕에 의해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천하는 사파전의 양상이 되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는 가운데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것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관계였다.

한왕을 자처하던 진우량의 장점은 막강한 선단을 바탕으로 양자강의 수로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은 수전으로 진우량과 승부를 벌여야 했다. 선공은 진우량이 했다.

그는 60만의 병력과 100척이 넘는 전함을 동원했다.


주원장은 이때에 소명왕이 있는 안풍을 공격한 장사성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장사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주원장에게 기회가 생겼다.


주원장은 장사성과 휴전은 했지만, 갑자기 대규모의 함대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는 수백 척의 고깃배를 동원해서 응전했다.


이것이 이 시대 최대의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이다.

파양호는 양자강 남쪽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모이는 곳이었다.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은 이곳에서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 자신이 자칫하면 사로잡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다.

마지막 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파양호 전투를 계기로 팽팽하던 주원장과 장사성의 균형도 무너졌다.

진우량이 지배하던 서부의 광대한 세력권이 모두 주원장에게 편입되었을 즈음에서야

장사성은 두 사람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협공을 가해서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장사성은 개인적인 기질이 주원장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홍건적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그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장사성은 주원장이 홍건적에 합류한 다음 해인 1353년에

불법으로 운영하던 자신의 염전에서 일하던 청년들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소주가 속해 있는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출신이었다.
소주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소주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는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매일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이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장사성은 1357년에 주원장에게 한 번 패배를 당하고 나서

원나라와 손을 잡아 관직을 제수받으면서 매년 양곡 10만 석 이상을 공급하였다.


원나라와 동맹을 맺은 상황이니 주원장은 소주 방면으로는 감히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62년 장사성은 홍건적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유복통을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과에 오만해진 장사성은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했다.

이것은 헛된 명성만 얻을 뿐 아무런 실익이 없는 자충수였다.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1367년에 소주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계기는 지나친 자부심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진우량의 경우는 막강한 전투선단이 그랬고 장사성의 경우는 한없는 풍요로움이 그랬다.


반면에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며 이것은 경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장사성이 자살하면서 남쪽을 모두 장악한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대망의 북진을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368년 1월 4일 산동성을 평정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는 명(明), 수도는 응천부인 남경,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원나라의 수도이자 당시에는 대도(大都)라고 불리던 북경은 바로 그해에 함락되었다.

순제는 수도를 북방의 상도(上都)로 옮기고 계속 명나라와 대립했다.


이때부터 이 왕조는 대제국 원(元)과 구분해서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북원까지 제압하고 완전히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그로부터도 한 세대 이상이 걸리지만,

한족(漢族)의 왕조가 한 세기 만에 부활된 것이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기층민 출신으로

천하의 대권을 잡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민중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성공과 함께 민중을 배신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잔인함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상위에 꼽힐 정도이며

명 왕조 전체를 가혹한 폭정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주원장은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에 대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때부터

홍건적과의 결별을 가시화했다.


이는 민중의 종교인 백련교를 버리고 귀족의 전통적인 윤리인 유교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무렵 백련교와 미륵교(彌勒敎)를 사람들을 현혹하는 요술(妖術)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한 상징적인 사건이 소명왕 한림아의 살해였다.
1366년 장사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주원장은 부하 장수인 요영충(寥永忠)에게

저주에 머물고 있던 소명왕을 응천부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양자강에서 풍랑을 만나 뒤집어지며 소명왕이 익사했다.

요영충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은 것이었다.

주원장은 얼마 후 요영충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했다.


장사성을 격파한 후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주 지역에 대한 복수도 지나치게 치졸했다.

그는 장사성의 참모들을 참수하고 그 시체는 거리에 버렸다.


또한 그곳의 관리, 군인, 재산가 들과 그 가족 30만 이상을 추방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마지막으로 소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세율을 책정해 이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다.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당대의 문인과 지성인 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천재 시인 고계(高啓)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소주를 빛내던 많은 지성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제 주원장은 탄압받던 농민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남경 시절에 보여주던 온화한 통치자의 모습도 옅어져 갔다.


그는 점차 난폭한 정복자가 되어 갔다.
황제에 오른 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을 창출한 이후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하다.

최종 승자가 과거의 동지나 공신들을 정리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러한 정리 작업 자체가 싫어서 자신을 황제로 세웠던 동료 장수들과 말술을 마시고 나서

모든 병권을 인수받아 후대의 칭송을 받았다.


조광윤과는 정반대로 주원장은 사상 유래가 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주원장의 폭정은 '호람의 옥(湖藍之獄)'으로 대표된다.


주원장의 모사 호유용(胡惟庸)은 크게 신임을 얻어 승상직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그러자 당연한 반발로 밀고가 들어왔으며 주원장은 이 사건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철저하게 이용했다.


호유용 자신이야 죽어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관련자들이 문제였다.
호유용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수는 그 당시에만 1만 5,000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관련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무려 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원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호유용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던 전 승상 이선장까지 이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이것이 '호유용의 옥(胡惟庸之獄)'이다.


남옥(藍玉)은 호유용과 달리 억울한 인물이다.

그는 주원장 치세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명장이었다.


명나라는 힘을 회복한 북원에 연패하면서 한 전투에서만 무려 40만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등 고전을 계속했다.

남옥은 명나라 군대의 연패 행진을 끊은 명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명성이 주원장의 시기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남옥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이어 2만 명이 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이것이 '남옥의 옥(藍玉之獄)'으로, 호유용과 남옥의 사건을 묶어서 '호람의 옥'이라고 한다.

이 두 번의 옥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신들이 갖가지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 갔다.

그는 친구건 친족이건 일단 제거 대상으로 결정하면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이문충(李文忠)은 주원장의 작은 누나의 아들로,

주원장이 곽자흥을 떠나 스스로 부대를 조직했을 때 소년의 몸으로 휘하에 가담해 줄곧 충실하게 따르며

험난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서 조국공(曹國公)에 봉해졌다.


이문충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원장이 혁명 동지들을 몰살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렸으며

주원장은 조용히 그를 독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원장의 처형 방식도 문제였다.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족주형(族誅形)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가족 모두를 죽였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서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凌遲)나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머리가죽을 벗겨 죽이는 박피형(剝皮形)도 있었다.

죽은 자들의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전시되었다.


주원장의 형벌 중에서 압권은 '정장(廷杖)'이라는 것이다.

형벌 자체는 단순해서 관료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를 궁정 마당에 무릎 꿇게 한 다음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 정장형은 법률에 정해진 바도 없고 집행 규정도 없었다.

순전히 황제의 기분에 의해서 매질의 강도와 횟수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하필이면 주원장이 저기압일 때 걸려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죽어 나갔다.


세상에는 비천한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가 숱하게 많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과거의 부끄러운 시절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든가 과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든가.

주원장은 아쉽게도 후자에 속했다.


그는 천한 출신에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열등감이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황당한 참극을 만들어 냈다.


주원장의 과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글자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중 승(僧), 대머리 독(禿), 빛 광(光)은 그의 황각사 시절과 관련이 있었고,

도둑 도(盜), 도둑 적(賊)은 황건적 시절과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 승(僧)과 음이 같은 날 생(生)을 비롯해 적(賊)과 모양이 닮은 곧 칙(則)이 추가되었다.

이 규정을 어겨 숱한 신하들이 처형되었으며

길 도(道), 다를 수(殊)와 문자와 제비(帝扉)와 같은 단어들이 추가되면서 금지어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표면으로 드러났다.

유학자 유기(劉基)는 명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점차 변모해 가는 주원장을 두려워해 고향으로 은퇴했는데,

그가 병에 걸리자 주원장은 위로한다며 궁중의 의사를 보내 독살했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던 서달(徐達) 역시

병에 걸려 요양하던 중에 황제가 보낸 거위 요리를 먹고 사망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에도 주원장은 단순히 잔인무도한 폭군이나

시기심에 불타는 소인배로만 매도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군주였다.

백성들의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했으며 농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벌이고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켜 농민으로 끌어들인 결과

그의 30년 통치 기간 중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어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주원장은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아직 권력의 맛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선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나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으며 강의가 끝나면 오랫동안 학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학생 중에서 눈에 띄는 인재가 있으면 곧바로 고위직에 채용했다.


주원장은 정서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각료를 맨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몽둥이찜질을 가해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길로 국자감에 나가 젊은 학생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그의 성격을 두려워해 자살하는 관료들까지 있었다.


또한 그는 위험할 정도로 감성이 예민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에 색을 밝혀서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모두 26명의 왕자와 16명의 공주를 생산할 정도였지만

평생 반려자로 생각한 사람은 일찌감치 결혼했던 마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황후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며칠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극과 극을 오갔던 사실에서 주원장은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조울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보이고 있으며,

상당수의 조울증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개인적인 성정이 음울하면서 동시에 호방했다.

이렇게 부조화스러운 다중인격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 냈다.

고위 관료들도 황제 앞에서는 노예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열등감에 가득 찼던 조울증 환자 주원장이 처음 고안한 예법이며,

그대로 중국의 권위주의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원장이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혁명가였으며,

유교적인 이상국가의 건립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아들 영락제(榮樂帝) 성조(成祖)로부터 시작해 점차 혁명 정권이라는 본질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오직 주원장이 창안한 혹독한 통치 방법만이 계승되었다.


그러자 관료들은 황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민중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방법만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200년 동안 중국인들의 개성을 규정해 버렸다.

이것이 명 왕조의 역사를 폭군 아니면 무능력자인 황제, 환관과 측근 들의 전횡,

계속되는 폭정과 권위주의적인 전제정치, 진취성을 잃어버린 민중, 황실을 조롱하는 지성인들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황실 등의 특성을 가지게 한 것이다.


주원장의 문지기가 된 손권


중산릉에서 명효릉으로 가는 길에 손권릉(孫權陵)이 있다.

명효릉 맞은 편의 평평한 공터에 손권 상(像)과 함께 외로이 비석 하나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손권릉인데,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울 정도로 초라하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황제이자 최초로 남경을 수도로 세웠던 손권의 능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바로 주원장이다.

예로부터 명당 자리라 일컬어지는 자금산에 자신의 능을 만들기로 결정한 주원장은

이미 자금산에 만들어진 모든 무덤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는데

“손권도 영웅이므로 묘를 남기되, 그가 나의 무덤을 지키게 하라”며 손권의 무덤 이장(移葬)을 면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명색이 황제였던 손권을 자신의 묘지기로 전락시킨 것이 과연 영웅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일까.

그 이후에도 손권릉은 수 차례 걸친 전쟁으로 인해 과거 황제의 릉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석상로(石象路) 신도와 옹중로(翁仲路) 신도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석상로(石象路)의 한글 표기가 '석코루'로 되어 있다.


아마도 코끼리 '象' 자에서 '코' 자만 따서 합성한 듯하다.

이처럼 각 지역 곳곳에 있는 안내판이나 안내문에는 엉뚱하게 번역해 놓은 글들이 종종 눈에 띈다.

다만 한글로도 번역해 놓았다는 성의로 양해하고 지나가야 할 듯.



신도(神道) 석상로(石象路)


외금수교(外金水橋 : 紅橋)를 지나면 12쌍의 석상이 줄지어 서있는 석상로(石象路)가 나온다.

석상로는 신도의 일부분으로 615m의 길 양편으로 석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으로,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 중에서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서 총명하고, 용맹하여 다른 짐승들을 압도 한다.

또한 불교에서도 호법의 영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신도에서 빠지지 않는다.


사자는 황제의 위엄과 강한 세력을 의미한다.

해치는 사자와 비슷하나 곰의 눈과 뿔을 가진 동물로 법수(法獸)라고도 불려진다.


상상속의 동물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아 구별해 낸다고 알려져 있다.

황제의 공명정대함을 나타내고자 신도에 놓여진다.


기린 역시 고대인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동물이다.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자, 호랑이, 소, 용의 형태를 몸에 가지고 있다.

황제의 인덕을 상징하며 용처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신도가 아주 특이하게도 굽어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북두칠성 모습으로 굽어져 있다고 한다.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처음 신도를 조성할 때 그 일대에 오나라 황제 손권(孫權)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사 책임자가 주원장에게 손권 묘를 옮길 것을 요청하니 주원장이 말하길

"손권 역시 훌륭한 사람이니 그대로 두어서 그가 나를 위해 대문을 지키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손권의 묘를 피해서 조성하느라 곡선으로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또 하나는 '북두칠성' 설이다.

즉 신도를 곡선으로 내어 대금문에서 보정(寶頂 ; 무덤)에 이르는 전체적인 배치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원주형 돌 위에 구름과 용을 조각해서 세운 기둥이 등장한다.

그 이전 시대에는 주로 연꽃을 조각해서 세웠다고 한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서 있는 말

제일 안 쪽에 말이 배치되어 있다.


꿇어 앉은 말


기린


아프리카의 토인들이 선사한 기린을 배에 싣고 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영락제게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기린이 등장하면 태평성대가 찾아온다고 전해왔기 때문에 황제가 감격했던 건 아닐까?


공자도 기린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깊이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획린(獲麟)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린과 봉황, 거북과 용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기린이라는 짐승 속에 용과 호랑이와 사자와 소의 형상이 한 몸안에 다 들어있다고 여겼다.

조각한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아는 기린과는 달리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코끼리




서 있는 낙타



앉아 있는 낙타



서 있는 해태  혹은 해치라고도 부르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앉아 있는 해태


서 있는 사자


앉아 있는 사자

석상로 신도에서는 사자, 해치(해태), 낙타, 기린(麒麟), 말, 코끼리의 6종류 12쌍이 지키고 있다.

각각 한 쌍은 서 있고,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옹중로(翁仲路) 신도

석상로가 동물의 길이라면 옹중로는 사람의 길이다. 신도 양편으로 문무관리의 석상이 지키고 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효릉은 나무로 만든 많은 건축물들을 잃었다.

하지만, 신도(神道)와 석각들, 방성(方城), 명루(明樓), 하마방(下馬坊), 대금문(大金門),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

등과 같은 석재 건축물들은 여전히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효릉은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고 하여, 앞쪽에는 정무를 보는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정원을 비롯한 침실 등 생활공간을 배치하는 황실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예규에 따른 것이며 당, 송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능은 산에 기대어 짓는다.”라는 제도에 따라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효릉이 과거의 규범만을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효릉의 전조(前朝)는 방형으로 지었지만, 시신이 매장된 지하궁전은 원형의 토산을 쌓아 완성시킴으로써

전방후원(前方後圓)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효릉 이후에 건설된 명, 청 500년 20여 좌의 황릉은 모두 효릉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를 따라 지어졌다. 

효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황릉 중의 하나이며, 2003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명효릉 신도 옹중로(翁仲路)의 무신상


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옹중로(翁仲路)는 석상로 다음에 나오는 신도의 두 번째 부분이다.

길이는 250m이며, 한 쌍의 돌기둥인 화표(華表)로부터 시작된다.


화표에는 구름과 용이 새겨져 있으며 화표 북쪽으로는 2쌍의 무신과 2쌍의 문신상이 있다.

갑옷이나 망포를 입은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며 그 위엄이 대단하다.


한 덩이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이들 석상들은 선이 굵고 간결하며,

그 조형미가 아름다워 명나라의 예술걸작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위엄이 느껴지는 문신상

정면으로 영성문(欞星門)이란 이름의 석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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