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릉 최고의 건물인 명루(明樓)


명 효릉에서 처음 등장한 황릉건축양식이다.

보성(寶城) 앞에 방성(方城)을 쌓고 그 위에 건설하였다.


방성은 동서로 75.26m이며, 남북으로 30.9m, 높이가 16.25m이다.

내부의 터널에는 54개의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보성의 남쪽 성벽과 마주하게 된다.


웅장한 루의 모습이 성벽과도 같다.

남경의 효릉을 제외하고 북경에 건설된 명나라의 황릉에는 일반적으로 명루 내부에

사망한 황제의 성덕비를 세웠으나, 이곳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남쪽에는 아치형 문이 세 곳 있고, 좌우와 북쪽에 각각 한 곳 씩 문이 있다.

바닥에는 커다란 벽돌이 깔려있으며 명루의 지붕은 황금색 기와로 덮여있다.

청나라 때 훼손되었던 것을 2008년부터 1년간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승선교(升仙橋)


명루 앞에 다리가 있는데 승선교(升仙橋)라 한다.

이 다리를 건너면 곧 신선의 세계라는 뜻. 당시 주원장의 관(棺)이 이 다리를 건너 안장되었기 때문에 승선교라 한다.



효릉(孝陵)


효릉은 명나라의 첫 번째 황릉으로서 당시의 건축과 석각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500년 동안 이어진 명, 청 두 왕조의 왕과 황제들은 효릉의 규격에 따라 능을 축조하였다.


효릉은 명 홍무14년(138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공사가 시작된 다음 해에 마황후가 세상을 떠서 이곳에 먼저 안치 되었으며,

마황후의 시호가 효자(孝慈)였기 때문에 이를 따라 효릉(孝陵)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는 설과,

 “효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효릉이라고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공사는 크게 신도(神道)부분과 능원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1398년 주원장마저 세상을 뜨자 자신이 조성한 무덤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는데,

이때 비빈과 궁녀 40여 명이 함께 순장(殉葬)되었다는 말이 전한다.


노동자와 군인 10만 명이 투입되었고, 25년이 걸려서야 끝마쳐진 대공사였다.

공사가 끝난 후 능원 내에는 1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사슴 1 천 마리를 방생했으며

5천 여 군사가 밤낮으로 순찰하며 호위했다고 한다.


주원장이 죽은 후에도 부속건물 등이 계속 조성되어 1413년 영락제(永樂帝)가

주원장의 공적을 비문 2746자에 기록한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를 세움으로써 공사가 끝났으니

착공한 지 32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효릉은 명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명나라 내내 존중을 받았다.

효릉은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청나라 역시 효릉을 중시했다.

만주족 출신의 황제가 절대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고압적 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한족의 왕조를 세웠던 주원장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끌어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효릉은 역대로 ‘참배 정치’의 장이었다.

이민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기에,

그가 묻힌 이곳은 한족 지도자에게 더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만주족 왕조를 악마로 규정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太祖陵寢文’)에서

자신을 ‘불초한 자손’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제문에 의하면, 중국은 ‘한족’의 것인데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함으로써 종족이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홍수전은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이민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신주(神州, 중국)를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태평천국은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멸망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되기도 전에 청나라 역시 멸망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를 선포한다.


사흘 뒤인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이날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陵文’)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의 완전한 통일”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1월 1일에 발표한 ‘임시대총통선언서’에서 한족 · 만주족 · 몽골족 · 회족 · 티베트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을 발표한 바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족’만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분할을 초래할 터,

쑨원은 발 빠르게 기존의 배만(排滿)에서 오족공화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기존의 배만 의식과 한족주의는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에서 쑨원은 청나라가 지배한 268년을 원통한 시간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주원장이 몽골족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것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광복에 빗대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선구였던 셈이다.


쑨원이 효릉을 참배한 날은 그가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날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맞서야 했고, 이어서 여러 군벌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명루(明樓) 안내문


"명루(明樓)는 명효릉이 처음 개척한 건축형식으로 방성위에 건축되었으며 명효릉 건축의 최고점이다.

지붕은 중연구척에 황색 오기기와로 덮혀졌고 남쪽에 아치형 문이 3개 있고,

동 서 북쪽에 각각 아치혐 문 1개씩 있고 벽돌로 바닥을 깔았다.

청나라 함풍년 시기 지붕이 전란에 회손되어 지금은 4면에 담벽만 남아 있다."


방성(方城) 서영벽(西影壁) 안내문


승선교 뒤편에 효릉원의 마지막 건물인 방성(方城)이 있다.

두께가 31미터나 되는 방성의 중앙에 위치한 터널에는 54개의 돌계단이 있어

여기를 통과해야만 주원장의 묘인 보정(寶頂)에 이른다.


방성 위에 명루가 있다.

방성과 명루는 역대 어느 제왕의 능에서도 볼 수 없는 효릉만의 독창적인 건물이다.


방성(方城) 속의 계단


보성(寶城)  명태조의 무덤임을 알리는 글귀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


주원장과 황후 마씨가 매장된 곳이다.

직경은 400m 둘레 1,000m 놏이 7m의  흙을 쌓아 만든 원형의 토산 주위에 석재를 쌓아 만들었다.


석재를 쌓은 두께는 1m에 달하는데,

이것은 도굴을 막고자 쌓은 토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보성(寶城)이라고 한다.

옛날엔 엄격히 통제된 성역이었지만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후에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 보정(寶頂 ; 무덤)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방성(方城)의 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보성(寶城) 성벽인데

거기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 : 이 산은 명태조의 묘이다)”라고

조잡하고 초라하게 새긴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능(陵)이 아니고 묘(墓)라... 이 일곱 자가 새겨진 연유인즉슨 이렇다.

'주원장이 정말 이 곳 효릉에 묻혔을까'에 대한 의문이 이전부터 있어 왔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주원장의 장례식 날 남경성의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관이 운구되었다고 한다.

백성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의 시신은 조천궁(朝天宮)에 안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명나라가 북경에 천도한 후 북경 근교의 만세산(萬歲山)에 이장했다는 설도 있고,

평소 의심이 많았던 주원장이 도굴을 염려하여 효릉에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거국적으로 조성한 묘역이 가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이

보성에 글자를 새겨 이곳이 진짜 주원장의 묘임을 알렸다는 것이다.


명의 황제는 16대, 총 15명(1명은 복위)이다.

그 중 이곳 남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황제가 초대 태조 주원장 홍무제와 2대 혜종(惠宗) 건문제(建文帝)인데,

이 중 주원장은 이곳에 묻혔고, 건문제는 영락제(永樂帝)의 쿠데타 속에서 행방불명되어

시신조차 찾지 못한 까닭에 능묘가 없다.


남은 황제 13명이 묻힌 곳은 바로 북경(北京)에 있는 유명한 '명십삼릉(明十三陵)이다.
보성은 600년이 넘는 세월을 잘 버텨왔으나 지반이 가라앉기 시작함에 따라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는 등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다.




명 태조 홍무제 주원보정(寶頂)


명루에 올라 뒷쪽으로 돌아가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산이 나타나는데,

이 산이 바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실제로 묻혀 있는 무덤인 보정(寶頂)이다.

우리나라 왕릉과 같은 봉분은 따로 없고 그저 숲으로 덮힌 거대한 산 전체가 무덤이다.



보정(寶頂) 안내판



보정 정상에 서 있는 나무에 동전들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무슨 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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