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산(琅山 lang ya shan)


안후이성() 추저우시(, 저주시) 서쪽에 있는 랑야산(),

청시호(西), 구산호(), 삼고( : , 驿, )의 4대 경구로 이루어진 면적 115㎢의 국가급풍경명승구(2차, 1988).


봉우리들의 형상이 이리의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6개의 봉우리가 5개의 그룹으로 모여 있다.


2천여 년 전 전국시대()의 랑산징슈[]는 바로 당시 연국()의 십경() 중 하나였다.

1941년 항일전쟁 중 팔로군()의 다섯 용사들이 이곳에서 저항하다 절벽으로 투신했다.


경내 주요 산봉우리로는 마퉈령(, 마타령), 펑황산(, 봉황산), 다펑산(, 대펑산),

샤오펑산( 소풍산), 랑야산() 등이 있으며 무성한 숲과 동굴, 호수 및 하천 경관 위주 지역으로

경내에는 동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랑야산()에는 인문경관이 풍부하여 당대의 낭야사()가 있으며, 중국 사대명정()의 하나인 취옹정()은

풍악정()과 더불어 구양수()와 소동파()가 남긴 글로 유명하다.


고관애(), 고역도(驿), 고전장()의 3고경구(), 복가돈고유지()에는

대량의 고적과 문물이 남아있으며 이외에도 저명한 비석으로 당 오도자()가 그린 관음상(),

당의 이유경() 등의 마애석각, 원대 수백여 개소의 마애석각 등이 남아 있다.


山(랑야산) / 歐陽修(구양수)


石屛自倚浮雲外(석병자의부운외) 돌병풍 뜬 구름 밖에 서 있고
石路久無人跡行(석로구무인적행) 돌길에는 오랫동안 인적이 드물다
我來携酒醉其下(아래휴주취기하) 내가 술 가져와 그 아래서 취하여
臥看千峰秋月明(와간천봉추월명) 천 개의 봉우리, 밝은 달 누워서 본다




관광객 주의사항
입구 매표소 옆 안내판에 자국어[漢字] 다음 두 번째로 한글, 세 번째로 영어 등으로 씌여있다. 일본어는 없다.



랑야산 입구에서 취옹정까지 오르막으로 약 2km 남짓 되어 전동차를 타고 올라간다


구양수(歐陽脩, 1007년 ~ 1072년)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길주(吉州) 여릉(廬陵) (현재의 장시 성 지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4살 때 쓰촨성 지방관이었던 부친 구양관(歐陽觀)을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를 따라 백부 구양엽(歐陽曄)이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 후베이)로 가서 생활하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정규 교육에 의하지 않고 독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구양수는 한유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껴 그를 추앙했다.

1023년 17세 때 처음으로 수주(随州)의 지방 고시에 참가하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했다.


그 뒤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서언과 경사로 함께 가서 춘계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한 구양수는 수석의 영광을 얻었고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해 또 수석을 차지한다.


1030년(천성 (북송) 8년) 서른 살 때 진사에 급제하고 서언의 둘째 딸과 혼인하였다.

첫 임지인 낙양(落陽)은 문학적인 정취가 높은 곳으로 구양수는 이곳에서 문인들과 어울리며

술과 여자 그리고 시를 즐기는 호방한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관(高官)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런 환경에서 가꿔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1033년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1034년 양씨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1036년 양씨마저 곧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고 설씨와 다시 혼인하였다.

그 후 관각교감(館閣校勘)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경우 (북송) 3년) 개혁파 범중엄(范仲淹)을 월권하면서까지 변호했기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이능(夷陵)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범중엄이 조정에서 배척을 당한 후 신정을 지지하던 대신 부필(富弼)도 파직당했고,

그들을 변호한 한기도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범중엄을 동정하던 적지 않은 사람들도 더 이상 그를 변호하지 못했다.

그러나 구양수(歐陽修)만은 과감하게 인종에게 상소를 올려서 범중엄을 변호했다.


“자고로 악인이 선인을 모함할 때는 언제나 붕당을 하여 권세를 독점했다고 없는 죄를 덮어씌우는 법이옵니다.

범중엄은 보기 드문 인재인데 어째서 그의 직을 파면시켜야 하옵니까?

악인의 말을 듣고 충신을 파면시킨다면 이는 충신을 가슴 아프게 하고 간신을 기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인 줄로 아옵니다.”


 1043년 인종은 언로(言路)를 확장하려고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京師)로 돌아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해 간관에 임명된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범중엄의 신정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서 조정 권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있지도 않는 죄목을 구양수에게 씌워 저주(滁州, 안휘성 저주시)로 좌천시켰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저주는 경치가 수려한 고장이었다.


저주로 좌천된 구양수는 틈틈이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그 당시 어느 화상이 저주의 낭야산(琅琊山)에 유람객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정자를 세웠는데

구양수는 산에 올라 산천 구경을 한 다음에 늘 그 정자에서 술을 마시며 글을 지었다.


그는 자신을 ‘취옹(醉翁, 술 취한 늙은이)’이라고 부르고 그 정자를 ‘취옹정(醉翁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중국 문학사의 명작이다.


몇 년 후 다시 한 번 중앙에 복귀해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1054년 몇 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면서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했다.


1057년 (가후 2년)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에 오르고 1058년에는 포증에 이어 개봉 부윤(府尹)의 임무에 종사했다.

한번은 과거시험을 책임지는 주시관(主試官)에 임명되자, 인재를 선발하고 문풍을 개혁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실속 없이 화려한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글들을 모두 낙방시켰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과거시험의 문풍은 즉각 달라졌으며 모두들 내용이 충실하고 문풍이 수수한 글들을 쓰려고 열심이었다.

이처럼 구양수는 문풍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데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등용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름이 없던 인재들이 그의 발견과 추천으로 등용되어 나중에는 이름을 날렸는데,

그중에 유명한 사람들로는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등이 있다.

이들 5명과 구양수, 그리고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 이렇게 8명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한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口舌)을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경사(京師)에 지속으로 머무르면서 《당서》 편찬에 참여하고 한림학사겸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한다.


그 후 추밀부사(樞密副使)ㆍ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副宰相)〕에 오르고 소순ㆍ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을 대상으로 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 해인 1072년(희녕 5년), 은둔 생활하면서 영주(안후이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시호 '문충(文忠)'을 내렸다.

문충은 그가 일생 달성한 문학과 관련된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


산문에서는 한유의 예(例)를 모방하고 소위 고문 부흥 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醉翁亭記(취옹정기)〉는 아주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뽐내지 않고 재미있는 작풍이다.

시는 만당(晩唐)의 현란(絢爛)한 문체를 피하고 성당(盛唐)의 실질에 부합하고 강건(剛健)한 위풍(威風)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사(詞)인

〈西湖好(서호호)〉 일련(一連)은 그 양식이 표준화해 사(詞) 대중화에 대공헌했다.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儒學)과 밀접하다고 생각해서 그와 관련한 대부분을 ‘개인에 관계된 것보다는 사회에 관계된 것’에,

‘해이(解弛)한 것보다는 경직되고 긴장(緊張)된 것’에, ‘유흥성을 띤 것보다는 건설성을 띤 것’에 무게를 둔다.


틀린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시문으로써 그를 이해한다면 맞는 말이다.

별다른 배경 없이 상식만을 가지고 구양수를 본다면, 구양수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한 사람을 제삼(第三)의 눈으로 보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제한될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쉬울 것이 없어도 앞으로는 아쉬울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특히 심리의 저변은 본인만이 알기에 옆에서 단정해 무어라 말할 계제(階梯)도 아닌데

구양수는 사(詞)로써 아쉬운 소리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많은 심정을 쏟아내듯이

사(詞)로써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의 감정을 상당부 노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배경 때문이었다.


사(詞)는 작가의 마음 표현에 가장 유리한 수단이었고 흥행에 점차 성공해 구양수가 살던 시기에는 지체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 애용하는 문학의 형식이 돼서 아무리 구양수가 공자와 맹자를 계승하고 한유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녀와의 사랑에서 느끼는 세심한 희열과 비애를 사(詞) 형식을 빌려 거침없이 쓰는 것이 결격이나 비난의 사유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민망(憫惘)한 내용이나 표현도 적잖게 보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호소력이 있다.

결국 구양수 문학 세계의 전체에 걸친 면모를 파악하려면 그의 작품을 망라해야만 하고 사(詞)는

구양수의 문학을 대상으로 한 오해를 일소(一掃)하고 환기(喚起)할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관건(關鍵)이 된다.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 근무 중에 신오대사를 편찬하고 중앙에 복귀해 송기 등과 신당서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명한 경학자였던 류창(劉敞)과 같이 작업해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상 색채가 강한 근엄(謹嚴)한 스타일을 견지(堅持)한 책으로서 평가됐으며,

금석문 수집을 좋아해 《集古録(집고록)》을 정리, 사료를 편찬하는 방법으로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하는 송 대의 역사 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양수는 다방면에 관심과 흥미를 가졌는데 바둑에도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어

'구양수체'라느 서체가 있을 만큼 뛰어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그의 문장과 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으며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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