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釀泉)


'釀泉'이 '讓泉'으로 씌여 있다.


이 지방에서는 '釀'과 '讓'이 같은 발음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나은 '讓'자를 쓴다고 한다.

'파리천(玻璃泉)'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때 구양수(歐陽脩, 1007~1073)가 저주(滁州, 지금의 안훼이성[安徽省]에 속함)에 유배되어 태수(太守)를 지낼 때

그 지역 낭야산(琅琊山) 취옹정(醉翁亭)에서 자주 연회를 열곤 했는데, 바로 그곳에 있는 샘이다.


구양수는 이 샘이 돌산이 빚어낸 것이라고 여겨 '양천(釀泉)'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따르면 "이 샘은 물이 맑고 향긋해서 술을 담그면 맛이 훌륭하다[酿泉为酒,泉香而酒冽]."고 쓴 바 있다.



자매천 


 양천을 '자매천'이라고도 한다.

우측이 물이 솟아나오는 언니천이고, 좌측 동생천으로 물을 흘려 보내주어 똑같이 나누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의재정(意在亭)


취옹정 서쪽에 의재정(意在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양천(釀泉) 샘물을 끌어들여 정자 안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랑을 흘러 밖으로 흐르게 했다. 


이 도랑을 '구곡류상(九曲流觴)'이라고 불렀다.

여러 선비들과 함께 그 도랑 옆에 줄지어 앉아 시 짓기나 투호(投壺), 바둑 등의 놀이를 즐기며

도랑에 술잔을 띄워 흘리며 앉은 순서대로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포석정(鮑石亭)


의재정(意在亭)을 보면서 나는 경주의 포석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원 시설물. 돌로 구불구불한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게 만든 것으로, 신라귀족들은 이 물줄기의 둘레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기록상으로는 880년대에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것이 처음 나타나,

8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927년 11월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를 벌이던 중

뜻하지 않은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잡혀 죽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의재정(意在亭)이 1561년에 세워졌으니 포석정은 이보다 최소 680 여 년 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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