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정(影香亭)


영향정(影香亭)은 1425년 명나라 때 세워졌다.

정자 이름은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967~1028)의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에 나오는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 (疏影横斜水清浅  暗香浮動月黄昏)"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문인 임화정은 본명은 임포(林逋)로 송대 전당(錢塘) 출신이다.

자는 군복(軍復), 시호가 화정(和靖)이다.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뜰에 매화나무를 심고 학과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매화가 필 때쯤 되면 한 달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종일 매화를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며 혼자 즐겁게 지냈다. 


산원소매(山園小梅) / 林和靖(임화정)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온갖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작은 정원의 정취를 독차지하고 있네.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매화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은 물 위에 드러나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매화 향기는 몽롱한 달빛 속에 감도네.






보송신재(寶宋新齋)


보송재(寶宋斋)에는 구양수의 산문 <취옹정기>를 동파 소식(蘇軾: Su Shih, 1036~1101)이 쓴 친필 석각을 세워 놓았다. 

구양수가 지은 글을 소동파가 썼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구문소서(歐文蘇書)」라 일컸는다.


소식과 그의 동생 소철(蘇轍, Su Zhe, 1039~1112)은 부친 소순(蘇洵: Su Xun, 1009~1066)의 안내로 구양수로부터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소동파 이외에도 수많은 서법가들이 <취옹정기>를 썼다. 그 중 대표적인 탁본 세편을  pdf file로 아래에 소개한다.

               소식(蘇軾)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여기를 클릭하면 탁본을 볼 수 있음)

            문정명(文征明) 해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동기창(董其昌) 행서 <취옹정기 탁본> pdf file

출처 :  http://family.swu.ac.kr/~cat/ae_maehwa_chuzhou_langyashan_2008.htm


풍락정기(豐樂亭記)


보송재(寶宋斋) 옆에는 구양수의 또다른 작품 <풍락정기>를 소동파가 쓴 글씨로 조각해 놓았다.

소동파는 1057년 아버지 소순(蘇洵)을 따라 사천에서 나와 카이펑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고 이때 시험채점관이 구양수였다.


구소서간에 보면 요로에 소순의 문장을 추천하는 구양수의 편지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양수의 배경으로 소순은 장안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하는 사연에는 시험관 구양수가 보기에 이만한 답안지의 수준은 필시 나의 제자 증공이 틀림없겠는데

그렇다면 이 답지를 장원으로 하면 스승이 제자를 봐줬다는 소리가 나올거 같으니 2등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답안지는 소식(蘇軾)이란 모르는 청년이었단 이야기가 있다.


훗날 동파 소식(蘇軾)은 구양수에게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구양수를 흠모하는 마음이 소동파의 여러 글에 나타나고 있다.


풍락정기(豐樂亭記) / 구양수(歐陽修) 지음 - 소식(蘇軾) 書


修旣治滁之明年夏(수기치저지명년하)
나 구양수가 저주를 다스린 지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始飮滁水而甘(시음저수이감)
처음으로 저현의 샘물을 마셔보니 그맛이 달았다


問諸滁人(문제저인)
저주 사람들에게 물으니

得於州南百步之近(득어주남백보지근)
저주성의 남쪽 백 보 근처에서 얻었다고 한다


其上豐山聳然而特立(기상풍산용연이특립)
위로는 풍산이 높이 솟아 홀로 우뚝 서 있고

下則幽谷窈然而深藏(하칙유곡요연이심장)
아래로는 그윽한 골짜기가 조용히 깊이 숨어 있으며

中有淸泉滃然而仰出(중유청천옹연이앙출)
그 가운데에는 맑은 샘이 있는데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俯仰左右(부앙좌우)
위아래 좌우의 경색을

顧而樂之(고이락지)
돌아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於是疏泉鑿石(어시소천착석)
이에 물길을 트고 돌을 깨고

闢地以爲亭(벽지이위정)
땅을 정리하여 정자를 지어서

而與滁人往遊其閒(이여저인왕유기한)
저주 사람들과 더불어 여기로 와서 노닌다


滁於五代干戈之際(저어오대간과지제)
저주는 전쟁으로 번번하던 오대 때에는

用武之地也(용무지지야)
전쟁터의 하나였다


昔太祖皇帝(석태조황제)
지난달 태조 황제께서는

嘗以周師破李景兵十五萬於淸流山下(상이주사파이경병십오만어청류산하)
후주의 군대를 이끌고 이경의 군사 15만을 청류산 아래에서 깨뜨리고

生擒其將皇甫暉(생금기장황보휘)
이정의 장군인 황보위와

姚鳳於滁東門之外(요봉어저동문지외)
요봉을 저주성 동문 밖에서 생포하여

遂以平滁(수이평저)
마침내 저주를 평정하였다


修嘗考其山川(수상고기산천)
나는 일찍이 저주의 산천을 살펴보고

按其圖記(안기도기)
그 관련 지도와 기록을 찾아보고서

升高以望淸流之關(승고이망청유지관)
높은 곳에 올라 청류관을 바라보며

欲求暉鳳就擒之所(욕구휘봉취금지소)
황보휘와 요봉이 잡힌 곳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而故老皆無在者(이고노개무재자)
당시의 노인들이 모두 생존해 있지 않았다

蓋天下之平久矣(개천하지평구의)
대개 천하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었던 것이다


自唐失其政(자당실기정)
당나라가 정권을 잃은 이후부터

海內分裂(해내분렬)
천하가 분열되어

豪傑並起而爭(호걸병기이쟁)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천하를 다투니

所在爲敵國者(소재위적국자)
피차 적국이 된 것이

何可勝數(하가승수)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乃宋受天命(내송수천명)
송에 이르러 천명을 받으시어

聖人出而四海一(성인출이사해일)
성인인 태조께서 나오시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嚮之憑恃險阻(향지빙시험조)
지난날 험준함을 믿고 할거하던 인물들이

剗削消磨(잔삭소마)
제거되고 소멸되었다


百年之間(백년지간)
100여 년 사이에

漠然徒見山高而水淸(막연도견산고이수청)
사람들은 무심히 다만 산 높고 물 맑은 것만을 보고

欲問其事(욕문기사)
그 때의 일을 묻고자 하여도

而遺老盡矣(이유노진의)
그 일을 겪었던 노인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 버렸다


今滁介於江淮之間(금저개어강회지간)
지금 저주는 장강과 회하 사이에 있어

舟車商賈四方賓客之所不至(주차상가사방빈객지소불지)
배와 수레를 탄 상인이나 사바의 빈객들이 오지 않는 곳이고

民生不見外事(민생불견외사)
백성들은 일생동안 바깥 사정을 보지도 못하고

而安於畎畝衣食(이안어견무의식)
농사와 의식에 안주하며

以樂生送死(이락생송사)
즐겁게 살다 죽으니

而孰知上之功德(이숙지상지공덕)
누가 임금의 공덕이

休養生息(휴양생식)
백성을 휴양시키고

涵煦百年之深也(함후백년지심야)
인구를 늘여서 1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윤택하게 해 준 것임을 알겠는가


修之來此(수지래차)
나는 이곳에 왔을 때

樂其地僻而事簡(락기지벽이사간)
이 지역이 산간벽지인데다 일이 간략한 것을 즐거워하였고

又愛其俗之安閒(우애기속지안한)
또 그 풍속이 편안하고 한가함을 사랑하였다


旣得斯泉於山谷之間(기득사천어산곡지간)
이미 산골짜기에서 이 샘을 찾아내니

乃日與滁人仰而望山(내일여저인앙이망산)
이에 날마다 저주 사람과 함께 고개를 들어 산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俯而聽泉(부이청천)
머리를 숙여 샘물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掇幽芳而蔭喬木(철유방이음교목)
봄에는 향기 그윽한 꽃을 따고 여름에는 큰 나무 그늘 밑에서 쉬며

風霜水雪(풍상수설)
가을에는 바람일고 서리 내리고 겨울에는 얼음 얼고 눈이 내려

刻露淸秀(각로청수)
산 모습이 우뚝 곧게 드러나 맑고 수려하니

四時之景(사시지경)
사계절의 경치를

無不可愛(무불가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又幸其民樂其歲物之豐成(우행기민락기세물지풍성)
또 다행히도 이곳의 백성들은 작물의 풍작으로 즐거워하면서

而喜與予遊也(이희여여유야)
나와 함께 노니는 것을 좋아한다


因爲本其山川(인위본기산천)
따라서 나는 이곳 산천의 특징을 근거로 해서

道其風俗之美(도기풍속지미)
이곳 풍속의 아름다움을 설명하여

使民知所以安此豐年之樂者(사민지소이안차풍년지락자)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편안하게 이 풍년의 즐거움을 누리는 까닭이

幸生無事之時也(행생무사지시야)
다행히 태평무사한 때에 태어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夫宣上恩德(부선상은덕)
무릇 천자의 은덕을 널리 알려

以與民共樂(이여민공락)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刺史之事也(자사지사야)
자사가 해야 할 일이다


遂書以名其亭焉(수서이명기정언)
그러므로 마침내 이 일을 써서 그 정자에 풍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심재(醒心齋)


성심재(醒心齋)는 1926년 진문권(陳文權: Chen Wen Quan)이 보송재(寶宋斋) 앞에 세웠다.

그 후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포화로 소실되었다가 2005년에 이곳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내부에 걸린 도덕사표(道德師表)라는 현판이 구양수가 후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숭앙받는지를 가늠케 하였다.

왕안석(王安石: Wang Anshi), 소식, 소철, 증공(曾鞏: Zeng Gong)이 구양수에게 바친 제문도 게시되어 있다.

이들은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알려져 있다.





11소동파.pdf
5.81MB
12문정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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