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친필 1 시권장류(詩卷長留)


두보(杜甫)의 시 - 송공소부사병귀유강동겸정리백(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747年)
공소부가 병으로 사임하여 강동으로 돌아가 쉬려 하니 송별을 겸해서 이백에게 드린다


巢父掉頭不肯住,(소부도두불긍주)
東將入海隨煙霧。(동장입해수연무)
소부는 머리를 흔들며 머물지 않으려 하고,
강동에서 장차 바다로 가 안개 따라가려 하네


詩卷長留天地間,(시권장류천지간)
釣竿欲拂珊瑚樹。(조간욕불산호수)
길이 남을 시집을 세상에 남겨두고,
낚싯대로 산호수에 앉은 먼지 터네。


深山大澤龍蛇遠,(심산대택룡사원)
春寒野陰風景暮。(춘한야음풍경모)
깊은 산 큰 못으로 용과 이무기 멀리 떠가고,
추운 봄날 음산한 들녘에 풍경은 저물어 가네。


蓬萊織女回雲車,(봉래직녀회운거)
指點虛無是征路。(지점허무시정로)
봉래산 직녀가 구름수레 되돌려,
허황된 점 지적하니 이것이 가야 할 길이네。


自是君身有仙骨,(자시군신유선골)
世人那得知其故。(세인나득지기고)
본래 그대 몸은 비범한 골격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까닭을 알겠는가。


惜君只欲苦死留,(석군지욕고사류)
富貴何如草頭露。(부귀하여초두로)
다만 그대를 아끼기에 한사코 머물게 하고 싶지만,
부귀란 것이 어떤가 풀잎 끝 이슬이거늘。


蔡侯靜者意有餘,(채후정자의유여)
清夜置酒臨前除。(청야치주림전제)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었네。


罷琴惆悵月照席,(파금추창월조석)
幾歲寄我空中書。(기세기아공중서)
거문고 마치고 서글프게도 달은 자리를 비추는데,
그 어느 해에나 나에게 하늘서신 보내려나


南尋禹穴見李白,(남심우혈견리백)
道甫問訊今何如。(도보문신금하여)
강남에서 우 임금 무덤 찾아 보다가 이백을 만나거든,
두보가 지금은 어떠신지 묻더라고 안부 전하게。


*孔巢父: 徂徠山 竹溪六逸의 한 사람 -> 李白: 魯郡東石門送杜二甫 참조
學問을 좋아했고 永王燐이 반란을 일으키고 幕下로 불렀으나 거절했다
*珊瑚樹: 庭園樹의 한 種類
*蓬萊: 方丈, 瀛洲와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苦死: 한사코, 반드시
*蔡侯靜者意有餘,清夜置酒臨前除: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는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宣王의 명을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해 죄인이 되어 오랏줄에 묶인 것을 비유하여 富貴何如草頭露의 부분의 부귀란 것이 덧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劉向新序 雜事二 50>에  <전략> 蔡侯之事故是也。蔡侯南遊乎高陵,北經乎巫山, 逐麋麇麞鹿,彉谿子隨, 時鳥嬉遊乎高蔡之囿, 溢滿無涯,不以國家為事,不知子發受令宣王, 厄以淮水,填以巫山, 庚子之朝,纓以朱絲,臣而奏之乎宣王也。<후략>
*蔡侯: 蔡나라(BC11c~BC447)는 주대에 중국에 존재한 侯國이다. 諸侯의 성은 姬이며, 爵位는 侯爵이다. 蔡侯는 蔡나라 마지막 諸侯 姬齊(BC450~BC447)의 爵位다.
*禹穴: 禹 임금이 藏書한 동굴로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다. 禹임금이 巡狩 중 會稽山에서 崩御하여 그 자리에 장사했다.

*道: ~로부터


이백(701~762)은 장안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올라 여행을 하다가 두보(杜甫)를 만나고 두 사람은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시인은 함께 하남 지방과 산동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백은 두보와 헤어져 각각 여행을 떠났다. 이백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712~770)는 양양에서 태어나 하남성 공현으로 이사하였다.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문에서 자란 두보는 7살 때 (봉황시)를 지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두

보는 20살 때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썼다.


"과거나 한번 볼까 ?'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보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두보는 낙양에서 이백과 작별하고 다시 장안으로 올라왔다.

두보는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현종이 실시한 시험을 보았으나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간신 이림보는 자기 보다 나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까봐 시험을 본 사람 전체를 낙방시켰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며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는 것까지도 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권력자들의 향락과 사치를 미워하는 시를 지었다.


그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반란평정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백은 영왕 인(璘)의 요청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왕이 숙종에게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는 바람에 이백도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은 강남일대를 방랑하다가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여러 곳을 방랑하던 두보는 낡은 배 안에서 59살 때 병으로 죽었다.
이백과 두보는 각각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많은 명작을 후세에 남겼다.

이백은 시선(詩仙) 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백 친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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