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촌(呈坎村 청칸춘 Chengkan)


안후이성(安徽省) 황산시(黄山市) 후이저우구(徽州区, 휘주구) 북부에 위치한

청칸진(呈坎镇, 정감진)의 촌급 행정구로 2008년 중국역사문화명촌(4차)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휘파문화(徽派文化) 예술이 결합된 전범(典范)인 이 촌락은

산과 물에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주희(朱熹)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고 칭한 이 촌락은

후이저우구(徽州区) 북부, 205국도로부터 불과 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칸향(呈坎乡, 정감향) 정부 소재지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동한(东汉) 삼국시기에 건립되었다.

역경(易经)의 음양팔괘(阴阳八卦) 이론에 따른 배치로 양(阳)은 정(呈)이며 음(阴)은 감(坎)으로

당 말에 청칸(呈坎, 정감)으로 개명되었다.

 

송대에는 나천질(罗天轶)과 나천칭(罗天秤) 형제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이곳으로 와 정착하며 나씨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명대 중엽 나씨 문중은 촌락과 중천하(众川河)에 대해 대규모의 공사를 단행하여

산과 물에 둘러싸인 이상적 공간 환경을 갖춘 촌락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촌락은 현재 2,7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휘파(徽派) 고건축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촌락의 하나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풍격이 각기 다른 정(亭), 대(台), 루(楼), 각(阁), 교(桥), 정(井), 사(祠), 사(社) 및 민거(民居)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촌락은 3가 99항(三街九十九巷, 3개 거리 99개 골목)이라는 칭호를 지니며 현재 청대 민거 200여 동,

명대 민거 30여 동이 있고 골목과 큰 거리는 대체적으로 수직으로 나 있으며 화강암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중 나동서사(罗东舒祠)와 청칸촌(呈坎村) 고건축군(古建筑群)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장춘사(长春社)는 청칸나씨(呈坎罗氏, 정감나씨) 및 부근 촌락의 오(吴), 호(胡) 등 여러 성씨가

토지신, 오곡신(五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봄에는 일 년 동안 적기에 바람이 불고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으며 가을에는 오신(娱神), 주신(酬神)에게 수확의 감사함을 제사지내던 장소였다.

 

이 사당의 규모는 매우 크고 정문(正门), 정당(正堂), 침전(寝殿) 및 좌우 무랑(庑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공예가 장중하고 경건하여 고대 조상과 신령을 숭앙하고 공경하던 옛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청칸(呈坎, 정감)은 역사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송대 용도각(龙图阁) 대학사(大学士), 이부상서(吏部尚书) 나여즙(罗汝楫)과 그 아들인 나원(罗愿) 및 양저우팔성(扬州八怪)의 하나인 나양봉(罗两峰)이 이곳 출신이다.

 

 

 

 

 

 영흥호(永兴湖)


동한(東漢)부터 남송(南宋)시기 정감촌의 수구(水口)이고 풍수지리학에 지호(地戶, 물이 모이는 곳)로 불리우며,

물이 모여 재물이 쌓인다는 의미로 옛날부터 천문이 열려야 재물이 마을로 들어오고

지호에 물이 모여야 재물이 수구로 모인다고 천여 년 동안 정감촌의 흥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과 함께. 


2014년 전국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인천시장 재선에 출마 후 낙선하자마자 곧바로 연구활동을 위해서

중국 칭화대학교(淸華大學)에 머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는 황산 공항에서 합류했다.

학교 후배로 송 시장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여서 각별하게 반가웠다.

 

 

 평안감(平安坎) 정감팔괘마을 ㅡ 천신만고를 이겨내어 생겨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국풍수에 관한 건축교재이기도 하다.

 

 

 팔괘도(八卦圖) 정감 팔괘촌의 자연환경은 천연 팔괘도를 형성한다.


정감촌 주위는 8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선천팔괘로 불리운다.

촌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S"자 모양의 하천이 마을을 질러 흐름으로 팔괘음양의 흑백 분계선을 형성한다.

 

주택 집은 대부분 목조 건물 2층으로 되어 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천정(天井) 이것이 바로 천정의 전형이다.


햇빛은 물론이거니와 비가 오면 빗물이 마당으로 들어와 물을 받아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옛 휘주인들은 집을 지을 때 색채의 조화에 특히 신경을 써서 흰 벽체에 검은 기와가 청산녹수 속에 있으면 안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건물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집안에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건물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낮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마당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옛날 휘주인들은 비는 금을 의미하고 눈은 은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붕에 뚤린 구멍을 통해서 비와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것은 부(富)가 집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실내의 기온조절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습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ㅁ자형의 2층 가옥.


이 집들은 밖에서 보면 아래층에는 창문이 없고 2층과 3층에 조그만 창이 나 있다.

옛 휘주의 여성들은 절개를 소중히 여겨서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2층이나 3층 조그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 후 문을 열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이미 명 청대에 2층 3층의 목조 가옥을 짓고 오늘날까지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한옥과는 달리 온돌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중국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발용 의자?

가이드의 설명으로 100 여 년 전 외국에서 들여온 이발용 의자라는데...

1층에는 방이 없고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여름에는 에어콘 역할도 한다고.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

 고건축학자 나철문(羅哲文, 1924~2012) 서.

 

나동서(羅東舒)는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세심한 고증을 거쳐 족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완하는 등 가문에 기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3대 70년에 걸친 대공정 끝에 1617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사당을 완공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당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개인 이름의 사당이지만 나동서뿐 아니라 나씨 후대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여자들을 위한 사당, 곧 여사(女祠)도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부지면적은 약 3000㎡이고, 건축면적은 약 2000㎡이다.


주요 건축물은 조벽(照壁)·영성문(欞星門)·좌우비정(左右碑亭)·의문(儀門)·곁채·배대(拜臺)·향당(享堂)·후침(後寢) 등이다.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건물의 분포가 좌우로 대칭되어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성문은 나무 울타리로 된 패방식(牌坊式) 대문으로, 조벽과 더불어 하나의 전정(前庭)을 이룬다.

의문은 영성문 안 쪽에 있으며, 정면 폭이 7칸 26.5m, 안 길이 10m, 높이 9.5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의문을 지난 정원을 거쳐 향당에 이른다.

정원의 동서 양쪽에 있는 곁채에는 약 1000개의 고대 편액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30여 개만 보존되어 있다.


주 건물인 향당은 정면 폭이 5칸에 25.6m이고, 안 길이는 7칸에 22.5m, 용마루까지 높이는 13.6m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일 뿐 아니라 가문의 일을 의논하고 공신과 명족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보륜각(寶綸閣)


보륜각(宝纶阁)은 정감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명나라 가정(嘉靖) 21년(1542)에 건립되었고

침전(寝殿)의 대들보상의 채색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민간 채색의 진품이며 명대 고건축의 정수이다.

금사난목 기둥 1주의 가격이 3억 위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


후침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1칸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트러스(truss)와 지붕받침, 도리, 기둥머리 등에 보존된 명나라 때의 채색화로 더 유명하다.

향당 남쪽에 있는 여사는 면적이 160㎡으로 남사(男祠)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을 드러낸다.

 

 

보륜각(寶綸閣) 명말 서예가 오사홍(吳士鴻) 서.

 

 

 

 이륜유서(彛倫攸叙)

 동기창(童其昌 1555~1636) 서. 윤리가 일정하게 베풀어진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S자 모양으로 흐르는 큰개울이 있다.

 

 

 

 

 

 

 개울가에는 빨래터가 있어 빨래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기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관광객이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한단다. 주의해야 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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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는 중국역사문화도시 흡현의 핵심이며 휘주부 소재지로서 산수가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구내 고민가 촌락은 구조가 아름답고 고대의 다리, 탑, 거리, 골목길, 제방, 패방들이 잘 어울려서 소박한 풍채을 보여주며 마치 호장한 박물관과 같다.

휘주고성경구 6개 관광지: 동방개선문—허국석방,   휘주고성표지—휘주부,   강남제일거리—두산가.   휘상의근원 – 어량고항,   휘주대관원- 휘원,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 –토싱즈기념관.   http://blog.daum.net/choemh/16140891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관람도     http://www.guhuizhouta.com/


 

 휘주부서(徽州府署) 휘주부 관아

 

 

 


명경고현(明鏡高懸)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 오장육부가 훤히 비춰보이는 거울이라는 뜻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 :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한 법관을 비유함.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3권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鏡 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의 함양(咸陽)궁(宮)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 가운데, 너비가 4(四尺 : 1m 20Cm), 높이가 59

(五尺九寸 : 1m 77Cm)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그 모습이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 옛날의 사진기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피사체가 거꾸로 보였다는~)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腸 :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이 나타나는 거울이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몸의 환부(患部)가 나타나 병을 알아보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신기한 거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흉중(胸中 : 가슴 속)에 있는 심보(心褓)까지 알 수 있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秦始皇)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확인하였는데 특히 면전

(面前)에서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尋聞)하고 처벌했더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末期)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공격하던 혼란 와중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大學士 허국(許國)  1527~1596

휘주부() 흡현() 사람으로 자는 유정()이다. 명()나라 때의 대신()이다.

가정() 44년(1565)에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 국자감제주(), 태상시경(), 첨사(), 예부시랑(), 이부시랑(), 예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이 있다.

허국석방(許國石坊)은 흡현시내에 위치하며 중국내에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명대 석방형식의 건물이다. 1584년도에 처음 지어졌으며 8개의 기둥이 口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八脚牌楼(팔각패루)"라고 명명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이 11.54m, 동서로 넓이 6.77m, 높이 11.4m, 면적은 78.13㎡이다.

 

동기창(童其昌)  1555~1636  패방의 글씨는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이 썼다.

동기창의 자는 현상(). 호는 사백(), 향광() 화정( 상하이시 송강 )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를 시문서화()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을 종()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 미만종() 장서도()와 함께 ‘형장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에서 동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 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 『화선실() 수필』 등이 있다.

 

 

 

 

 

 도행지(知) 1891 ~ 1946

안휘성(省) 출생. 1914년 진링[]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J.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우고 1916년 귀국하여 후스[] 등과 그 교육론 보급에 힘썼다. 난징[]고등사범학교(후에 국립 ) 교수로 근무하였고, 1923년 이후로는 민족자본을 기금으로 한 민간교육운동에 헌신하며 강단에 서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하에서 창조적인 형태의 학교를 개설하고, 노동존중과 사상의 자유에 철저하여 공산당원을 옹호하였으며, 많은 혁명청년을 양성하였다. 난징의 사오좡[]사범학교, 상하이[]의 산하이공학단(), 충칭[]의 육재()학교 ·사회대학 등을 경영하였다.

1935년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참가하여, 교육은 어린이와 대중의 생활해방을 위해 민족해방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에서 내전반대 ·정치민주화를 주장하다가 1946년 7월 뇌일혈로 갑자기 죽었다. 전생애를 통해 반식민지인 중국 사회에 근대교육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추구하여 오늘날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기의 애국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교육이론은 중국의 교육이론에 계승되고 있다.

 

흡현(셔시엔, 歙县, Shexian) 

휘(徽) 지역의 중심지이자 수도이다. 아마 와 보면 '중국 전체의 상업을 휩쓴 집단이 이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다니' 하고 의아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대도시에서 성공하고, 이곳에는 자기 원래 집터에 큰 집을 짓는 순서였으니까. 그래서 흡현은 고상(삐딱해서 Sorry)하게 서당/사당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상인들이라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그곳이 어량(위량, 渔梁, Yuliang)이다. 그래서 같은 유적이라고 해도, 흡현은 먹물 냄새가 많이 나고 엄숙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어량은 돈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편, 그리고 활발했던 느낌이 많이 난다.

흡현의 옛 이름이 휘주(徽州), 즉, 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송대부터 중국 역사상 유명인사를 기록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 200여명에 달하고 사당, 서당, 서원이 120여개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정도에 비하면 너무 남아 있는게 없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정도부터 야심차게 수도 복원 사업을 했다는데, 한 결과가 운치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성곽의 붉은 벽과 위에서 얘기한 요란스러운 (브랜드 옷 가게로 즐비한)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양화문(양허먼, 阳和门, Yanghemen)을 들어서 허국석방(许国石坊)을 지나면 나타나는 요란무쌍한 흡현 시내는 2008년인가에 새로 칠한 화장일 뿐, 두산가(더우샨지에, 斗山街, Doushanjie) 들어 서면, 높고 큰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걷게 된다.

 

휘상()

명청() 시기 안후이성() 휘주부() 지역에 적을 둔 상인()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는 안휘의 서현(, 섭현), 슈닝현(, 휴녕현), 우위안현(, 무원현), 치먼현(, 기문현) 이현(), 지시현(, 적계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은 동진()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에 전성하였으며 청말()에 쇠퇴하였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 양식(), 차(), 문구필묵()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예작품은 서화가들이 (붓 필), (먹 묵), (종이 지), (벼루 연)이라는 문방사우를 이용하여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붓은 늦어도 상나라 때에 이미 있었다. 어떤 갑골에는 붓으로 써넣은 붉은색 부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중국 호남성 장사()의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붓이 작은 대나무 통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대나무로 된 붓자루는 길이가 18.5㎝, 지름이 0.4㎝이고 붓의 털이 토끼털이며 털의 길이가 2.5㎝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선필()과 호필()이다.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되는 붓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구양수()에 의해 “,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말은, 붓이 너무 부드럽거나 딱딱하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잡기에 매우 적합하고 백 개의 붓 중에 질이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당시 이 붓은 “천금을 주고 사려해도 시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저쟝성() 호주시()에서 생산되는 호필은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

’(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이다. ‘’은 회의자로, ‘’과 ‘’로 구성된다. 빛깔과 광택이 밝고 윤기가 흐르며, 재질이 부드러우며, 고색이 창연한 먹은 서예가들의 필수품이다. 현재 안후이성 흡현() 등의 지역에서 만든 ‘휘묵()’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지술은 고대 중국의 사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씨를 쓰는 재료로 갑골이나 청동기, 죽간, 견직물, 비단 등이 있었다. ‘’(종이 지)자의 편방은 ‘’인데, 이것은 종이가 실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는 본래 실을 빨 때 도구의 밑바닥에 남는 솜 모양의 물질인데, 한나라 때 사람들이 삼, 어망, 나무껍질, 헤진 천조각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륜

동한(25~220년) 때 채륜()이 제지술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가볍고 얇으며 깨끗해서 ‘채후의 종이()’라고 불렸다. 저렴한 종이가 나오면서 글씨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졌다. 종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선지()로, 중국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된다. 선지의 품질은 순백색으로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견고하며, 광채가 나지만 미끄럽지 않고, 빛이 통하면서도 빛깔과 광택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고 여러 번 접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노화에 강하고 벌레나 좀을 방지해준다. 이 때문에 ‘천년의 수명을 가진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자는 ‘’을 편방으로 하며 출현시기가 늦은 편이다. 이것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문방사우’라고 불린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아름다운 한자를 써내고 독특한 풍격의 서예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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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씨지사(鮑氏支祠) 

1561년에 세우고 1791년에 중수한 당월포씨사당(棠樾鮑氏祠堂). 패방군 바로 옆에 있다.

지사(支祠)는 가사(家祠), 종사(宗祠) 등과 함께 사당의 한 종류.

 

 

포씨지사(鮑氏支祠)  포현륜(鮑賢倫, 1955?~ ) 서 


포가남사(鲍家男祠)

 속담에:”황실에는 태표가 있고 백성에게는 사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휘주백성들은 한가문끼리 집거해서 살았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또 같은 가문들을 한데 집결하기 위해서 매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같지 않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종사,기사,가사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종사가 규모가 제일 크다.

 

세효사(世孝祠)  청 가경(淸 嘉慶) 6년(1801)에 세운 남사(男祠)

글씨는 청대 서예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썼다.

 

등석여(鄧石如)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의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매류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런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흡현 당월촌에 있는 돈본당은 당월포씨의 남자사당이다. 포씨가문의 각세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목석으로 구조되었고 조각은 비록 복잡하게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밀하고 대범함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당은 건립 당시에 종인이 가문에서 장유의 순위와 덕망이 높은 조상들을 존경한다는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동시에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 기파와 재능을 현시하는 곳이이기도 했다.

사당의 건축 특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예를 들어서 돈본당의 구조는 들보가 천정을 받들고 빛겨서 기둥도 받쳐주는 식으로 되었고, 
량타 ,작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그때 당시 통용된 건축수단을 반영하고 있다.


구조재의 장식은 또 농후한 지방특색을 구비하여 동곽량의 머리 끝부부은
코끼리머리 형태로 되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있고 조각은 또한 다양하다.


침당처마밑에는 단풍나무가 접혀져 있는 것같고
두공은 순전히 장식으고 천정에 무게를 부담하지 않게 설계하였다. 


삼진 다섯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웅장하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당구조는  넓고 훤하며 큰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사당 안에 의전규례비석과 가경황제상유비 등17개 패각이 있다.
위에는 “공의돈본호규례”가 새겨져 있다. 
사당은 한 가문에 있어서 정신적 핵심이고 그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성전이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조문식(曹文埴, 1735-1798) 서

돈본당(敦本堂)  왕문치(王文治, 1730~1802) 서.

 

왕문치(王文治)

청나라 강소() 단도() 사람. 자는 우경()이고, 호는 몽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2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자라서 경사()를 내왕하며 한림원() 시독()이던 전괴()를 따라

유구()에 사절로 가면서 마침내 문장이 해외에 알려졌다.


건륭() 25년(1760) 전시(殿)에서 일갑삼명(, 즉 )으로 진사 급제하고

편수()에 임명되고 시독()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운남() 임안지부()로 임명받았는데,

사건이 있어 직급이 낮아지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 귀향했다.


오월() 지방을 왕래하며 주로 항주()와 진강()의 서원에서 강의했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풍운()이 뛰어났다.


희곡을 즐겨 집안에 악기를 쌓아놓고 노비를 사들여 그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연출할 때는 거리를 따지지 않고 몸소 따라다녔다.


고종()이 남방을 순행하자 명을 받들어 9곡의 희곡을 지었는데,

이들을 아울러서 『영란신곡()』이라 일컬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불학()에 전념했다.

저서에 『몽루시집()』과 『쾌우당제발()』이 있다.

 

 

 


충효염절(忠孝廉節)  주희(朱熹, 1130~1200) 서.

 

주희(朱熹, 1130~1200) 주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 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켰던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다.


주요저서 : 四書集註, 周易本義, 資治通鑑綱目, 朱子語類


포씨오륜술(鮑氏五倫述)  등석여(鄧石如)의 예서.



포가여사(鲍家女祠)


포가여사당은 청이당이라고 부른다.
포씨가문에 역대정부열녀들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자사당하고 반대로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벽 측문으로 들어간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자사당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청이당은 전국에 유일한 여자사당이며 세계부녀대회에서 네 번째로 지정한 참관점이다.
이는 휘주종법제도와 휘주의 상업역사 연구에 생동하는 교재이며
중국에서 "여자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례를 타파한 보기드문 여사당이다.


휘주문화특색에서 건축에는 패방,민가,사당 3절이 있다.
이들은 휘쥐여성들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불효유삼,무후위대>라는 유가신조 하에서 휘주남자들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짐을 싸서 차자식을 버리고 부모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서 멀리로 돈벌이하러 나간다. 


그 이후 일부는 사방을 떠돌며 소식도 없이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는 성공한 다음 외로움을 못참아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소탈한 생활을 누리고 
집에 조강지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일부는 부자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때는 벌써 삼처사첩을 가진 몸이다. 
신첩 웃음이 이뻐보이고 구인의 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이 멀리 나가 사업하는 휘주여자들은 결코 방촌누각에서 자폐하고
천정으로만 들어오는 일편의 빛으로 온갖 힘을 다해서 애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며
어쩔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흘러버리고  생명은 시들어가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 넘을수없는 운명이었다.

정부열녀의 패방은 정신상 그녀들을 억제하고 가문에 사당은 가문의 규정으로
행동상 속박해 버리고 마두벽의 봉쇄는 신체상 그녀들을 묶어버린다.


지붕보다 높은 계단식 마두벽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방풍방화할 수 있다.
높게 싸아진 마두벽 바로 위에만 작은 창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독방 여자들의 외부 출입을 막을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끊어 그녀들의 바람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높은 벽안에는 고독하여 휘주는 침묵한다” 
길고 긴 휘상들이 남긴 발자국에는 수많은 휘주여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고
패방, 사당 마두벽 수묵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휘주식 건축 뒤에는
수많은 부녀들의 암담하고 씁쓸하고 처량한 처지가 숨겨져 있다.

청의당(淸懿堂)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로 포씨비사(鮑氏妣祠).

'청의(淸懿)'라는 이름은 '淸白貞烈 德行美好(청백정렬 덕행미호)'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청의정(淸懿亭)'이 있다. * 懿 : 아름답다, 훌륭하다 (의)

 

 

입구 옆 안내판에 한글이 씌여 있다.

 

 

정효양전(貞孝兩全)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서. 청의당(淸懿堂)  포엽(鮑鉩, ?~?) 서 

 

증국번(曾國藩)


호남() 장사부() 상향현() 사람

본명은 자성()이고, 자는 백함(), 호는 척생()이다.

청()나라 때의 대신()이자 군사가, 문학가이다.


증자(; 증삼)의 70세손으로 도광() 18년(1838)에 진사() 출신이다.

벼슬은 한림원서길사(), 한림원검토(), 문연각교리(), 시강학사(),

내각학사(), 예부시랑(), 예부우시랑(), 병부우시랑(), 양강총독(),

직례총독(),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고, 의용후()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혁명을 막기 위해 호남성을 중심으로 편성한 반혁명 군대인 상군()을 창립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홍장(), 좌종당(), 장지동()과 더불어 만청사대명신()으로 일컬어진다.

산문()에 능통하여 상향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서로 《치학논도지경()》, 《지가교자지술()》, 《빙감()》,

《증국번가서()》 등이 있다.


 






 

참고   http://www.paifangqun.com/   http://blog.daum.net/zeroko2000/784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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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06월 15일 12:4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4:00 중국 항주국제공항에 도착.

(2시간 20분 소요, 시차 -1시간) 


▲ 항주국제공항에서 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송영길 전 인천시장이 우리 인문기행 일행에 합류했다.

공항에서 숙소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 중.

  

▲ 황산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안휘성 지도  ⓒ《중국인문기행》p224.


안휘성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 유역에 있다.

성수기에는 안휘성의 최남단인 황산까지 가는 인천발 직항이 있는데, 이번에는 비수기라 항주(抗州)를 거쳐서 갔다.


인천공항에서 항주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항주공항에서 황산시내까지는 버스로 3시간 30분이 걸렸다.

* 항주공항 : 예전의 소산(蕭山)공항.


▲ 이번 인문기행에 참가한 분들이 함께한 기념 촬영.


부부로 오신 6쌍 12분, 부자 1쌍 2분,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항주공항에서 합류한 2분,

서울대, 서강대 등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분들과 교장 선생님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신 분들,

다산 인문학 강좌 등을 통해서 참여하게 된 분 등 34분과 송재소 교수 등 스텝 4분

그리고 조선족 현지 안내원을 더하여 총 39분이 이번 기행에 함께하고 있다.


 당월패방군(棠樾牌坊群) / 포가화원(鮑家花園)  


올해 국가급 여행 풍경구 AAAAA로 승격된 당월패방군은 총 7개의 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패방은 명·청대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 당월촌의 포(鮑)씨 가문에서 배출한

충신, 효자, 열녀들의 공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황산시(黃山市) 시정부 소재지인 둔계구(屯溪區)에서 27km, 흡현고성(歙縣古城)에서 10km 정도 가면 된다.

여기에는 송,원나라부터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800여 년된 고촌락-당월촌이 있으며

장엄한 7개 패방, 듬직하고 우렁찬 남사당, 청아하고 유일한 여사당,

포씨가문의 효도를 요해할 수 있는 효도사당과 각종 종법, 공익, 문회, 서원, 의창 등 기념 건축물이 있다.


  패방군과 연결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역사를 전제로 하여 휘상저택원림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분재를 주제로 국내외 각종 유명한 분재가 있으며 정자 등 원림 건축물이 있다.


휘주문화의 대표로 손색이 없는 웅대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고 정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호수, 나무 ,가산, 꽃들이 잘 어우려져 황홀한 경관을 만들었다.


풍경구는 2005년도 국가여유국으로부터 4A급 여유경구로 평선되였으며 황산시 <10가> 여유명소로 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에는 고대의 패방, 사당, 민가는 <휘주고건축 3절>로서 걸작들이 모여 있으며

한폭의 아름다운 휘상고리도를 그리고 있다.


* 위치 : 안휘성 황산시 흡현. www.paifangqun.com

* 당월(棠樾) : 팥배나무 그늘.《시경》<감당(甘棠)>편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라 함.

棠은 '팥배나무, 아가위나무', 樾은 '나무 그늘'의 뜻.


고휘주문화여유구전경도(古徽州文化旅游區全景圖)  http://www.guhuizhouta.com


棠樾牌坊群(당월패방군) 강택민(江澤民, 1926~ ) 서


풍경구 개요


 황산 흡현 패방군 포가화원 풍경구는 산수가 아름다운 흡현 당월촌 내에 위치해 있다 .

고패방,고사당,고민가,포가화원으로 조성되었다.


여기는 고성흡현과 10 떨어져 있고 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둔계하고는 27 떨어져 있다.

당월은 포씨 가문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이다.


가문은 남송시 건연 년간에 자리를 옮겨 여기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해서 거의 80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 핵심으로 석패방은 양쪽에서 중간으로 순서대로 차례로 배렬되어 반호형으로 펼쳐져 있다.


서에서 동으로 순서가 포찬효행방,자효리방,포문령처왕씨결효방,락선호시방,

포문연처결효방,포봉창효자방,포상현상서방으로 되어 있다.


일곱개 패방은 엄숙하고 정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조용하고 품이 있게 서 있는 돈본당 남자사당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세 개 문, 다섯 개 방이고 오풍루문정으로 전체 구조는 간결하고 훤하게 지여졌다.

은행나무를 기둥으로 하고 장목은 들보로 쓰고 벽돌, 나무, 돌조각들을 사용하여

곳곳마다 유가인생철리와 문화수양을 드러낸다.


중합지미 뚜렷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사당안에는 종족관리제도를 새긴 비각들과 <가경상유삼도비>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종법제도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실례들이다.

 둘도 없는 청이당 즉 여자사당은 남쪽에 앉아 있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다.


다섯 개 문 삼진 마두벽으로 전체 사당의 구주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고

그 조형은 유창하고 안은 수려하고 밖은 소박하여  단정한 느낌을 준다 .


사당의 벽은 전부 벽돌조각으로 되어 있어 그 모습 또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줄 뿐만아니라 화채롭다.

그리하여 휘주지방에서 사당돌 조각의 으뜸으로 불리운다.


 패방군과 인접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휘상개인 정원을 배경으로 하여 휘파분재를 주제로 삼아

휘파분재 예술의 정화들이  모여 있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각지방파 분재들의

대표작품들이 집결되어 있어 이는 하나의 비교적 고품격의 분재 관광기지이다. 


이 정원 면적이 21.73 헥타르이고 그 중에 인공호수와 분재정원이 각각 5.33 헥타르 차지한다.

분재의 만발을 전시하고 정원에 여러가지 분재 품종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형태가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며 서로 아름다움 모습을 다투며 자랑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의 대형산수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풍경구는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이고 세계문화유산신보지,국가4A급 여행풍경구이며

또한 "황산시십가여행 풍경구이다.



역사적 기원


 당월은 흡현시내에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쪽 소나무 우거진 능선의 용산을 가까이 하고 있고  남쪽 분지-평원옥야을 인접하고 있다.


근원 황산의 풍낙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멀리로는 부정산을 평벽으로 풍수설에서

산을 베고 물을 안고 평원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선택할수 있는 이상적 위치다.


지금까지 여전히 마을 입구에 역대에 흥건된 일곱 높고 거대한 석패방군이 우뚝 솟아 있어

휘주에 둘도 없는 장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마을안에 현재 보존하고 있는 사당 민가 화원도 휘주특색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다.

당월촌의 형성은 남송건연년간 ( 1130)까지 추적할 다.


부읍 (지금의 흡현현 시내) 서쪽문은 으로 유명한 포용이 높은 관직은 못했어도

평생 서향마을에서 산업을 넓혀 차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지금의 당월을 이상적인   휴한지소를 만들수 있는 곳임을 욕심내고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후에 당월포씨는 그를 시조공으로 존칭했다.


포용이후 당월은 단지 한 곳의 포씨가문의 또 다른 원림업이었고 따로 건설을 하지 않았다.

사세종손 포거미는 산천이 아름답고 원전이 넓어 자자손손 백세대업을 일을수 있겠노라해서

부읍서문에 집식구들을 데리고 당월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팔백여년간 당월촌은 포씨씨족들만이 사는 곳으로 되었고 

성쇠기부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패방은 황산에 부여한 역사 훈장이다.

역사상에 매세대마다 황산(휘주)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이팅구이, 주희, 호개문, 왕모음, 대진, 호정, 도행지, 황빈홍 등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흡현에서만 해도 명청 두 조대에 524명의 진사 ,1531명의 거인, ”부자상서”, ”동포한림들로 마을의 명성을 높였고

연과삼전선,십리사한림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더우기 이 주리학의 고향에서는 부녀들은 봉건주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깊은 해를 받았고

유림외사에서 나오는 왕삼구와 같은 절부열녀들이 아주 많이 나왔다.


 구시대에 충효결의우수했던이런 사람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황산시 각 지방에는 대량의 패방들이 세워졌다

그 역사 흔적들은 여러번 파손을 당했지만 지금까지도 100여 좌의 패방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이 바로 그 중에 대표작이다.

 당월패방군은 7 패방이 명나라 3 청나라 4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봉건사회 충효결의론리도덕의 개요를 묘사해 냈다


그 중에 명나라 패방의 횡편에는 어제자효리라는 대자가 새겨져 있다

황제가 휘상 포수손부자를 표창하기위해서 세워준 거다


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원나라 때 흡현의 수장이 달이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노략하고 살해했다.

그때 당월포씨 부자는 반란군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한사람만 살려준다구 누가 죽고 누가 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런 부자는 서로 자기가 죽기를 다투고 대방을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 행동이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로 심지어 반란군도 감동되어 차마 죽일수가 없어서 사람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후에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이 패방을 하사하였다.

청나라 건융황제도 포씨종사를 위해 제련하기를 : ”자효천하무쌍리,금수강남제일향.” 

그리고 전해지기를 당월포씨 가문은 그 때 벌써 ””””패방이 있었고 패방만 없었다고 한다.


그 마을 포씨세가 에서 포숙방시기에 양회소금운송관리로 강남염업 명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자 패방을 세울 수 있게끔 청하여 가문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양식 십만단과 은3만 냥을 받쳐 제방을 팔백리나 재보수했고  세 개 성의 군사들의 양식을 부여하였다.  


그 공로로 결국 조정에서는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당월촌 마을 입구에는 또 하나의 호선락사라는 의자패방이 세워졌다

흡현에서 많은 패방들 중에서 이같은 이상입사,이사보상정치적 경제적 상호 일관성의 긴밀한 관계는 종종 볼수 있다.

 

일곱개 패방


패방(牌坊)은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을 가진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다.

본래 집의 출입문이나 마을의 입구에 마을을 드나드는 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궁정, 능, 사당, 관청을 비롯하여 절의 어귀에도 세운다.

 패방은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인 경우가 많다.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로써의 패방은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부모에 효도를 하거나

또는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인물들, 즉 남에게 모범이 되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공덕(功徳)패방 정절(貞節)패방 등이 있다.

따라서 패방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에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패방의 기둥은 2~6개이며 낮게는 수 미터에서 높게는 10여 미터에 달한다.

지붕을 여러 층으로 얹은 것도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을 목패방이라 하고, 돌로 만든 것을 석패방 또는 석루(石樓) 그리고 패루(牌樓)라고도 부른다.

인재를 많이 배출한 후이저우에는 패방이 넘쳐난다.  


 이곳 패방은 모두 7개인데 명대(明代)의 것이 3개, 청대(淸代)의 것이 4개이다.

흡현 주변에서는 어디로 가든지 패방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드넓은 논 속에 7기의 패방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음악적인 조화마저 느끼게 한다.

이것들은 소금장수를 하면서 부를 이룬 포씨(鮑氏)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포찬효행방

 

자효리방

포문령처왕씨 결효방


락선호시방


포문연처오씨결효방


포상헌상서방

 




Baojia 포가화원


포가화원은 청나라 건융, 가경년간에 저명한 휘상 염법도원춘추시기
이름있는 승상 “관포지교”에 나오는 포숙아의 후대 포기원의 개인화원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 정원과 분재 관람지이다.
이는 세계에서도 둘도 없는 당월 패방군에 위치해 있다.



주로 휘파분경이 주제이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유명한 분재들을 모은 정화라고 볼수 있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분재애호자들의 “매가”이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주요 관광 프로젝트의 분재 정원 : 포가화원에는 정품원, 유파원, 산석원이 있다.

분재정원은 산석분재를 주요로 하고 화초나무분재를 보조로 하고 있다.


휘주사람, 황산스타일, 천상인간 등을 주제로 했다.

제일 큰것은 정원에 제일 안쪽에 있는 강산유지다교이다.


정원내에 분재들은 대다수가 가지가 휘여든 목본식물로 주로 재배상대로 하고 있다,

모습들은 다양하여 줄기고 굵고 커서 신기한 것도 있고 형태가 구블구블하여 고풍스러운 것도 있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것도 있어 미감을 장식할수 있는것들로 있다.

그 중에는 분재예술인이 수년간 열심히 재배해낸 휘파특색이 농후한 남국풍정 있다.


 주로 넓은 풀밭, 입구광장, 광장합, 사계절화원(식물풍경구,춘하추과각색식물관광구),

향토화원(황산포가화원지구특색식물), 휘주문화 전시관(유명한 서예나 화가가 모은 진적들,문방사보 등), 다원파, 송림파,

유락호, 수조호, 관어지, 경제수생식물원(), 산수폭포, 유람선 부두, 분재재배기지, 도바, 다루, 주작방 산수폭포가 있다.

 

공원의 보물

 


"남국풍정"는 가지높이가 1.28 m,넓이는 2.8 미터이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으뜸으로 가는 대형고용분재 중의 하나로 이백여 년의 역사가 된다.


제일먼저 포씨화원의 수집품이었다. 후에 광동으로 유전되었다. 
포가화원에서 제일 비싼 가격으로 회수한 정품이다.


찐하게 그린 눈섭마냥 빽빽하게 자란 나무잎은 땅과 하늘을 덮었고 
엉켜서 자란 가지와 끝없이 자라는 뿌리는  평화롭고 국태민안을 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이 분재는 곤명엑스포, 곤명 국제 원예 박람회에 나타난 적이 있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

 

1.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직접 유적지 안내와 해설을 위해 동행합니다.
2. 일반 여행사를 통해서는 갈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중국 유적지(아름다운 한시의 배경이 된)를 방문하게 됩니다.
3. 여행내내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과 음식은 물론, 여행지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전통 차와 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 마련됩니다.
4. 더불어 역사, 문화에 관심있고 품격있는 참가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좋은 만남을 약속합니다.

* 일정 : 2015년 6월 15일(월)~ 20일(토) 5박 6일

 

일 정 표

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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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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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천

 

항 주

 

황 산

 

 

 

 

 

 

 

OZ359

 

 

 

 

 

 

 

 

 

09:30

12:40

14:00

 

 

 

 

 

 

 

 

 

인천국제공항 3M카운터 집결

인천국제공항 출발

항주국제공항 도착 (2시간 20분 소요)

황산으로 이동 (3시간 30분 소요)

청대옛거리 : 송나라때 형성되어 명과 청에

가장 발전한 건물과 거리 모습을 재현한 곳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크라운플라자

(TEL: 0559-259-1888)

:XXX :현지식

6/16 2

()

황 산

정감촌

 

 

흡 현

 

 

이 현

기 문

 

 

황 산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정감촌으로 이동(50분 소요)

정감촌 : 명나라때의 건축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

흡현으로 이동(35분 소요)

흡현고성 : 중국의 4대고성 중 하나

허국석방 : 전형적인 명나라 석방건축물

당월패방군 : 포씨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현으로 이동(30분 소요)

서체촌, 굉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민

가 건축군

황산으로 이동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헌원국제대주점

(TEL: 0559-850-8828)

:호텔식 중:현지식 석:한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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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경 현

 

 

 

신 성

 

 

마안산

 

화 현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경현으로 이동(2시간 소요)

도화담 : 이백이 이곳에서 필묵을 적시며 시편

을 많이 남김

신성으로 이동(1시간 소요)

사조루 : 강남의 4대명루중 하나이며,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와서 시를 짓던 곳

경정산 : 이백의 시로 인해 강남시산이 되었다

마안산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누실공원 - 17:00 입장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마안산 해외해 황관홀리데이

(TEL: 0555-238-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6/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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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

 

 

 

저 주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청산 이백묘 : 당대의 시인 이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

채석기(태백루) : 이백이 여러번 올라 시를 남긴 곳

저주로 이동(2시간 소요)

취옹정 : 취옹정기로 유명한 구양수가 있던 곳

남경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명효릉 : 명 태조 주원장의 능원

중산릉 : 중국 근대화의 혁명정치가 손중산 선생의 묘가 안치됨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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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석두성 : 손권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세울때 전초기지

연자기 : 청대 초기 시단의 영수 왕사진

시에서 언급되며, 남경의 북쪽 관음산에 위치하

여 장강을 바라보기 좋은 공원

중화문 : 명대에 있었던 13개의 성벽중에서

가장규모가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

문묘 :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곳

왕사고거 : 육조 명문귀족 왕씨와 사씨의 병칭 고거

미향루, 진회하선유

오의항 : 동진의 지배귀족이던 왕씨와 사씨가 거주하던 지역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무궁화식당

6/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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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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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Z350

 

 

 

 

 

14:55

18:20

 

호텔 조식 후

포구로 이동(1시간 20분 소요)

봉황각

남경 대학살기념관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일

본인들의 잔인한 만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공항으로 이동

남경국제공항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2시간 25분 소요)

:호텔식 중:현지식



** 중국인문기행이 기대되는 이유!!**


송재소 교수님의 말씀.
“이들 유적을 기행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체감하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중화문명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여행은  중국의 ‘인문학적 유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의 불가결의 요소인 중국술과 중국차에 대해서도 가능한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술과 차를 빼놓고 중국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우면서도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한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의 남경까지 이어지는 기행이 될 것이다“
“안휘성에는 도처에 이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백이 달을 잡으려 강으로 투신 했다는 채석강과 이백의 무덤 등을 둘러보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여기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과 풍락정이 있고, 풍자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휘성의 남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체촌과 굉촌이 명청시대 민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휘성은 또한 흡연, 휘묵, 선지 등 문방사우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덤으로 황산의 빼어난 경관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휘성이다.”
"강소성의 남경은 육조고도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두목의 시로 유명한 진외하, 유우석의 시로 유명한 오의항과 석두성, 이백이 시를 읊었던 봉황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태평천국의 유적도 눈길을 끈다. 그뿐만 아니라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의 위용도 볼만하다. 중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남경 대학살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

 

< 중국인문기행(송재소 교수 저) 관련 기사>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8/2015030801338.html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1503062111205&code=960205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 type=1&no=2015032515010864992&outlink=1

 

<이 글을 연재하는데 참고한 사진과 글 등 자료의 출처>

1. 중국인문기행에 함께 동반한 사진전문가 고형남 님이 사진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 연재하는데 전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자료 중 거의 90% 이상을 고형남 님 작품 사진에 의존한만큼 일일이 사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 함께 동반한 고영표 시인 님의 블로그 ㅡ 고산지(高山芝) 블로그 http://blog.daum.net/zeroko2000 에서 기행 장소와 시간 공간, 사진 자료 등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였습니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연세동문회보 / 이달의 여동문

박정희 (신학 72입)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교육 한 길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양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박정희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1984년 12월 시골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산 끝에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후 아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젖을 삼키지 못해 애를 태우더니 목을 가누는 것도,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유난히 더뎠다.
세 살 무렵 의사로부터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커갈수록 점점 더 뒤처지는 아들에게 조바심을 내며 “똑바로 걷지 너는 왜 자꾸 넘어지니”, “침 좀 흘리지 마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한동안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했으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사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편은 아들이 일곱 살 무렵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위자료나 양육비 대신 친권을 챙겼다.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설치는 경우가 많아서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서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주고 출근했죠. 친정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그 무렵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를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쉼, 여유, 위안, 안식, 평안 이런 단어들이었어요.”
한동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도자기를 접하고 활력을 되찾았다. 주말마다 흙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다 보면 현실 세계의 절망감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컸다. 대전교원미술전 공예부문 1등급 상과 전국백제토기물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고, ‘정신지체 학생의 작업기능 신장을 위한 생활도자기 만들기 지도자료’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침례신학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도예 활동을 통한 집단상담이 장애아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 및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아들에게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평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서 흙을 만지더군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만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 작품이 완성될 때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죠. 작년부터 자폐아와 가족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자폐아들이 도자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응력을 키우고, 부모들도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양육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요.”
박정희 동문은 2013년 7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 11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 해에는 교장으로 승진해 교육자로서 도예가로서 모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눈물과 한숨이 서렸던 그의 도자기에 지금은 사랑과 기쁨이 넘친다.
“여전히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해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줘야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아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미소가 나를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김현미(신방 86입)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팀장


원본 http://www.yonsein.net/ebook/dong/1505/201505.pdf    13 of 24

인용 http://blog.daum.net/choemh/1614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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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다 .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

 

그 것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다 .

 

결국은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 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ㅇ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런데 K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학년의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철수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잘 웃고 밝은 아이임 .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 ”


2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 ”

 

3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러 하였다 .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 ”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

“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
친구가 많지 않고 ,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 ”


여기까지 읽은 K 선생은 비로소 철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뒤 늦게 깨달아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K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다 .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와아!! 정말 예쁘구나~ 감탄하고 ,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


철수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

“ 선생님 , 오늘은 선생님에게서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 ”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
바로 그날부터 그녀는 읽기 , 쓰기 , 국어 ,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K 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다 .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철수는 더 빨리 반응하였다 .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


1 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


그로부터 6 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

고교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

 

4 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

이번에도 그녀가 철수에겐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나타내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
편지에는 ‘ Dr. 박철수 박사 ’ 라고 사인 Sign 되어 있었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

K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다 .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 선생님 ,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
“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

내가 널 만나기전 까지는 제대로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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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 아니 이 이야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배우자를 , 자녀들을 ,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

K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 "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

 

우리 모두 이 시간이후부터는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다 .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격려하고 북돋우고 칭찬해 주십시요

아울러.. K. 선생님께선 저히 초등학교 선생님이 셧 습니다.

올해 70순을 바라보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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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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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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