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禹錫(유우석 772~842)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안사(安史)의 난’이라는 내전이 벌어져 국가의 기운이 급격히 기울어 수많은 백성들이 참담한 상처를 입었다.


안으로는 성정이 음험한 환관들에 의해 졸렬한 정치가 펼쳐지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약해진 중앙 왕실의 허점을 파고드는 호족 세력의 발호가 그치질 않았다.

당 왕실은 국력이 최고조를 발하던 성당(盛唐) 시기를 보낸 뒤 점차 쇠락의 길로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자(字)가 몽득(夢得)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나며 당대 천재소리를 들었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젊은 관료로서 왕숙문(王叔文)·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되었다.

권세를 독차지했던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그들에게 밀려나 지금의 중국 동남부 안후이(安徽)성 조그만 현의 ‘통판(通判)’이란 자리를 받는다.

이 벼슬은 남송(南宋)에 가서야 나름대로 지방관을 규찰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직위지만 

당나라 시절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지방의 한직이었다.


중앙 왕실에서 권력 다툼에 밀렸다 싶은 그를 환대해주는 지방관은 없었다.

그의 상사는 골탕까지 먹이려 든다. 통판이란 벼슬에게 내주는 세 칸짜리 관사(官舍)를 두고서다.


지방관은 갖은 구실을 대서 그의 거처를 두 번 더 옮기도록 한다.

옮기면 옮길수록 그의 관사는 좁아지고 형편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받은 거처는 침대 하나에 책상과 의자 한 벌인 작은 방.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들여놓을 하찮은 거처였다.


그의 유명한 문장 ‘누실명(陋室銘)’은  이 무렵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자계(自戒)의 글이다.

글 제목은 ‘누추한 거처에서의 새김’이라는 뜻이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좋은 산일 터,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리라.

이 집이 누추하더라도 내가 닦은 덕으로 그윽할지니(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보기에도 한심했을 거처, 즉 '누실'에서 내보이는 유우석의 기개가 가상하다.

자신이 놓인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자신감은 스스로의 덕에서 비롯하는 것일 게다.


그 덕이란 반드시 도덕적인 기준을 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우석 본인의 속을 가득 채우는 실력과 사람 됨됨이다.


陋室銘(누실명) / 劉禹錫


水不在深有龍則靈(수부재심유룡칙령)
斯是陋室惟吾德馨(사시누실유오덕형)
苔痕上階綠草色入簾靑(태흔상계록초색입염청)
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담소유홍유왕래무백정)
可以調素琴閱金經(가이조소금열금경)
無絲竹之亂耳(무사죽지란이)
無案牘之勞形(무안독지로형)
南陽諸葛廬西蜀子雲亭(남양제갈려서촉자운정)

孔子云何陋之有(공자운하누지유)


산은 높아서가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하다 이르네.
이곳은 비록 누추하나 오직 나의 덕은 향기롭도다.
계단은 이끼 끼어 푸르고 풀빛은 주렴 발을 푸르게 비추는데
훌륭한 선비와 담소를 나누는데 왕래하는 비천한 사람은 없고
거문고를 타고 좋은 경전을 읽을 수 있구나.
음악 소리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관청의 문서를 읽는 노고도 없으니
남양의 諸葛亮(제갈량)의 초가집이요, 西蜀(서촉) 양자운의 정자와 같도다.
공자도 말하였지, 군자가 살고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라고....


陋 [lòu]                 
1.[형용사] (사는 곳이) 협소하다. 좁다. 누추하다. 초라하다.
2.[형용사] 견문이 좁다〔적다〕. 식견이 천박하다.
3.[형용사] 미개한. 문명화되지 못한〔않은〕. 좋지 않은. 케케묵다.


室 [shì]              
1.[명사] 실. 학교·기관·공장 등의 내부 업무 단위
2.[명사] 집. 실. [기관(器官)·기계 등의 내부 공간]
3.[명사] 방.


铭 [míng] 번체(銘) 새길 명
1.[명사] 명문. [금석(金石)이나 기명(器皿) 따위에 새겨 놓은 글]
2.[명사] 명. [금석(金石)·기물(器物)·비석 따위에 남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나 사물의 ...
3.[동사] (기물 위에 기념하기 위한 문자를) 새기다.


* 陋室: [lòushì] 누추하고 보잘것 없는 집.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铭:古代 器物에 새겨 자기를 警戒하거나 功德을 진술하는 文字를 “铭”이라 하고, 후에 一种의 文体가 되었다.

이러한 文体는 일반적으로 모두 對句를 사용하고,句式은 비교적 整齐되고,

朗朗上口(시문 등을 낭독할 때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유창하다.)하다.


* 在(zài): ~에 있다. 动词。
* 名(míng):出名,著名,名词가 动词로 작용한다.
* 灵(líng): (靈) 신령 령 1.[형용사] 총명하다. 기민하다. 영리하다.

2.[형용사] 재빠르다. 날쌔다. 날래다. 3.[형용사] 영험하다. 신통하다. 효력이〔효과가〕 있다.


* 斯:指示代词,此,这。是:~이다. 肯定을 표하는 判断动词.
* 馨 [xīn] 향기 형 1.[명사][문어] 꽃다운 향기. 분방(芬芳). 형향(馨香). 2.[명사][문어] 멀리 퍼지는 향기. 여기서는 品德이 高尚함을 말한다. 《尚书·君陈》:“黍稷非馨,明德惟馨。”。
* 苔痕上阶绿,草色入帘青:이끼 흔적이 계단 위에까지 자라고; 草色이 발안으로 비쳐 들어 푸르다.
* 鸿儒 [hóng rú] : 大儒, 여기서는 博学한 사람을 말한다. 鸿:“洪”과 같고,儒는 옛날 读书人을 말한다.
* 白丁 : 平民. 여기서는 어떤 学问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 调[tiáo]素琴:装饰을 하지 않은 琴을 弹奏하는 것을 말한다. 调:고르다. 조절하다. 여기서는 琴을 튕기는 것을 말한다.

素琴:장식을 하지 않은 琴
* 金经:지금도 学术界에는 여전히 争议가 존재하는데, 어떤 学者는 佛经(金刚经)이라 하고,

어떤 학자는 装饰이 精美한 经典(四书五经)으로 보고 있다. 金:珍贵한 것.
* 丝竹:琴瑟([qínsè] 거문고와 비파)、乐器의 总称, “丝”는 弦乐器를, “竹”은 管乐器를 말한다. 여기서는 奏乐의 소리를 말한다.


* 之:语气助词,不译。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사용하고,구절의 독립성을 없앤다.
* 乱耳:귀를 어지럽히다. 乱:形容词의 使动用法,使……乱,扰乱([rǎoluàn] 혼란시키다. 어지럽히다. 뒤죽박죽되게 하다. 어수선하게 하다.)
* 案牍 [àndú] : 官府의 公文, 文书.
* 劳形 [láoxíng] 身体를 피곤하게 하다. 劳:形容词의 使动用法,使……劳累. 形:形体、身体.
* 南阳:地名,지금의 河南省 南阳市. 诸葛亮이 出山하기 前에 일찍이 南阳 卧龙岗에서 隐居하고 농사를 지었다.


* 南阳诸葛庐,西蜀子云亭 : 南阳에는 诸葛亮의 草庐가 있고, 西蜀에는 扬子云의 亭子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诸葛庐과 子云亭 모두 남루하지만 居住하는 사람이 매우 有名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诸葛亮,字는 孔明,三国时 蜀汉의 丞相,著名한 政治家 및 军事家, 出仕前에 南阳卧龙岗에 隐居하였다.

扬雄,字는 子云,西汉时의 文学家,蜀郡 成都人. 庐:남루한 작은 집


* 孔子云:孔子说,云在文言文中一般都指说。选自《论语·子罕》篇:“君子居之,何陋之有?” 作者在此去掉君子居之,体现他谦虚的品格。
* 何陋之有:즉 “有何之陋”,宾语前置에 속한다. 之,助词,强烈한 反问을 표시하고,宾语前置의 标志는 不译한다.

 全句를 번역하면: 무슨 남루함이 있는가? 孔子가 말한 그 구절은 《论语·子罕》篇에 보인다. :

 “君子居之,何陋之有?” 여기서는 孔子의 말로 자기 스스로가 “君子”임을 비유하고,全文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화룡점정하고,全文에서 주제를 반영하는 어구이다.
* 谈笑有鸿儒:谈笑에는 学识渊博한 사람들이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속 누실은 한 개쯤은 있을 수 있다.

그게 학벌이든 신체적인 결함이든 남에게 자랑스레 밝히지 못할 곡절 하나씩은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누실의 반대어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리라. 그

러나 보기에 호화로운 집에 몸을 들이더라도 됨됨이와 교양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다면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라는 뜻이며,

'명(銘)'은 대개 쇠북이나 솥, 비석 따위에 스스로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길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새긴 글을 말한다.


작자는 자신이 놓인 초라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드러내면서,

일세를 풍미한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과 한나라의 양웅(揚雄)이 살던 초라한 집을 언급하여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나아가 마지막 구절에서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군자(君子)로 끌어올리고 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 거하려고 하였을 때 누군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이후 배도(裵度)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태자빈객 겸 검교예부상서가 되어 세간에서는 '유빈객'(劉賓客)으로 불렸다.

유종원(柳宗元)과 교분이 매우 두터워서 '유유'(劉柳)라고 병칭되기도 했으며,

항상 백거이(白居易)와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등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유백'(劉白)이라고도 병칭되었다.


그의 시는 통속적이면서도 청신하며 〈죽지사 竹枝詞〉가 유명하다.

철학저작인 〈천론 天論〉에서는 천·인(天人)의 구별에 대해 논증했다.


즉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음덕설(陰德說)을 반박하고 '하늘과 인간은 상승(相勝)한다'는 설과

'상용(相用)된다'는 설을 주장하여 하늘이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더이상 주재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근원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즉 법제가 잘 행해져서 상벌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은 천명(天命)에 바라는 것이 없겠지만,

만일 법제가 흐뜨러져 있어서 상벌이 분명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오로지 천명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불교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다.

저서로는 유빈객집(劉賓客集) <유몽득집(劉夢得集)이라고도 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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