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나서길 즐겨하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으로서는 적격이지 못한 체질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의 평가다.

“김 부총재가 너무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지적해야겠다. 아니 그건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화를 냈겠지만, 나라 생각 이전에 중요한 게 개인의 밥그릇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1야당 부총재 직함의 3선급 초선의원으로서 항상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정치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강성발언이 항상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비해 김근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여 매스컴에서 묻히기 마련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민첩하지 못하고 사색형이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햄릿’이라는 평이 나돌았다.

요즘 김근태 부총재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햄릿’이 그것이다. 늘 고뇌하고 망설이는 듯한 태도가 그런 이미지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정치인 생활 동안 그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했고,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민주당이 쪼개졌다. 그는 김 총재의 복귀와 신당 창당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4ㆍ11 총선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야권에 대한 차별적인 검찰 수사와 여소야대 뒤집기 정국이 전개되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이루면서 대여투쟁에 나섰고, 두 당의 연대는 대선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는 과거 민주세력을 탄압하던 보수세력과 연합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전술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신한국당의 법안 날치기를 규탄하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의 투쟁이 가속화되는 정국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회의는 뭐하는 당이냐, 김근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하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이래저래 그는 괴롭다.
(주석 14)

김근태는 그러나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초 권력을 탐하여 정계에 입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천박한 언술이나 대중영합의 포풀리즘에 기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정치권은 비판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야유와 냉소를 고집한다면 정치권은 아예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치권이 점차 발전되고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희망을 갖고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주저의 심경이었다. 좌절감도 깊었다. 반대로 투지도 생겼다. 정치세계는 나에게 ‘깊은 고뇌’와 ‘냉철한 교활함’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실한 결단’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에 응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주석 15)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제도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맑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치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판치는 곳이다. 여간 쉽지가 않았다.

현실 제도정치는 여전히 낯선 동네이다. 대단한 관심과 추적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군사독재에 대항해 함께 어깨를 걸고 수십년 지내왔기 때문에 퍽 많이 안다고 내심 자부해왔는데도 그렇다. 우선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 말고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해서 그렇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어법과 문법도 다르고 역사성도 분명히 다른 바가 있다. 늘 신문이나 방송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도 또 다른 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주석 16)

 



초선의원 김근태가 낯선 국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예측한대로 총선 뒤의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날이 갈수록 실정과 부패가 거듭되면서 검찰과 정보기관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부여당은 4ㆍ11 총선에서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야당 및 무소속 영입작전을 계속했다. 야권은 “정보기관이 나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공간과 협박으로 야당ㆍ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키고 있다.”고 비난할만큼 정부 여당은 노골적으로 야당의 파괴활동에 나섰다. 이로써 자민련은 정당 존립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 자민련, 무소속의원 10여 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회담을 거듭하면서 정부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공동전선을 폈다. 김영삼 정부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 11개 안건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군사정권의 행태를 방불케 하였다.

한때 김근태가 몸담았던 통합민주당은 4ㆍ11총선에서 참패,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정부 여당의 ‘당선자 빼내기 공작’으로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이탈하였다. 김원기ㆍ장을병 등 비주류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발족시키고,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이기택 측은 이를 ‘해당행위’로 규정하여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상태가 되었다. 지리멸렬이었다. 정국은 1997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야권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대체 야당에 들어간 김근태는 뭐 하고 있는 거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재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질책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야당출입 기자들도 왜 본격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과 우정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착종이 순차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아 형광등처럼 껌벅껌벅 하기도 한다.… 지금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보다 많은 책임 있는 사람들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와 다리를 어떻게 놓아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타진하고 결단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주석 17)

김근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재야가 통합하는 ‘민주대통합’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석
13>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계간) 제10호, 70쪽.
14> <월간 말>, 1997년 2월호, 김경환 기자.
15> <일요서울>, 1999년 1월 24일, 엄상현 기자.
16> 김근태, <희망의 근거>, 420~421쪽.
17> 앞의 책,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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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0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초선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 외무통상위에서 전반기 의정활동을 시작하였다.
외통위는 국회의원들이 기피하는 상임위지만 그는 당당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하였다. 남북관계와 주변 4강외교에 대한 전문지식을 높이고자 관계 자료를 읽고 상임위의 정책질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가 따랐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 중의 하나였다. 국회 외통위의 가장 뛰어난 의원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후반기에는 재정경제위로 상임위가 바뀌었다. 재경위에서도 그의 활동은 돋보였다.

김 의원은 정치적 경력을 쌓기 위해 특유의 끈기와 성실로 의정활동에 전념하는 방식을 채택한 듯하다.
그는 15대 국회 전반기 의원평가에서 통일외무위원회의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한 의원으로 선정됐다.(중앙일보 제4회 의원평가).

후반기 들어 재경위로 상임위를 옮긴 김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 법인(法人)의 기밀비ㆍ접대비의 규모를 밝혀내는 등 눈부신 활동력을 보여줬다. 한건주의나 비약적 성장보다 치밀한 사전준비와 실력 쌓기를 중시하는 장기전ㆍ지구전(持久戰)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지구전적 인물’이다. 혹은 대기만성(大器晩成) 형일 수도 있다.
(주석 10)

김근태는 30년에 걸친 재야투쟁의 길에서 현실 정치인이 되어 지역구를 관리하고 민원을 챙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또한 오랜 재야활동으로 인해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한계도 따랐다. 하지만 몸에 밴 성실성과 부드러운 심성, 공부하는 모습은 곧 여의도 정가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을 몇 번 만나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보통 ‘재야출신 치고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역시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야’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재야’라는 말이 주는 비타협성, 강경함, 완고함 같은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답변이 이어지곤 한다.

사실 ‘진지하고 매너가 부드러우면서 사고가 유연하고 합리적' 이라는 김 의원에 대한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단순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한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품성들을 그가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 성품이 갖춰졌다는 것과 정치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정치리더로 발돋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대중성이다. 타고난 대중성이 부족하면 대중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려는 노력도 리더를 꿈꾸는 정치인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11)

 



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던 재야운동에서 현실정치인의 길은 그에게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정치적 쇼를 할 줄 모르고, 여느 정치인들처럼 언론을 활용하는 방법도 몰랐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신문 사진과 TV화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보도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자리를 선정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 부총재는 확실히 낙제생임에 틀림없다. 지난 3일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대회를 참관할 때도 그는 단상 맨 뒷줄 한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다른 부총재들이 앞줄 중앙에 당당히 자리를 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또 지난달 28일 이기택 총재 일행과 대구 가스폭발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일행의 후미로 밀려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소 소극적인 그의 태도에 대해 주변에서 조언도 많았다 한다. 특히 이해찬 의원으로부터는 “김 부총재가 소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민회의, 재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감히 앞에 나서야 한다”는 코치를 받기도 했다고.

그는 민주당에 입당한 국민회의 출신이 당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가 오는 통합협상에서 합의된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총제직 보장을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개인의 몫을 챙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총재직을 사양하는 대신 국민회의에 약속된 지분을 더욱 확고히 보장받기 위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정치판에는 도저히 통하지 않을 만큼 순진했음을 인정해야 했다.……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성품의 김 부총재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내 현실은 참으로 야박한 것 같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석 12)


주석
10> 전영기, 앞의 책 <월간중앙 WIN>, 84쪽.
11> 앞과 같음.
12> <뉴스메이커>, 1995년 5월 18일자, 김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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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7 08:00 김삼웅

 

 

1995년은 김근태에게 새로운 삶의 시발점이 되었다.
황량한 재야에서 척박한 야당인이 된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재야와 야당 사이에 큰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야당은 제도권에 속한다. 정당은 복수정당제가 헌법상으로 보장되면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한 시대의 해맑은 영혼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들어 선 야당은 재야와는 또 다른 집단이었다.
시대의식이 없는 출세주의자들도 많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한 정상배도 적지 않았다. 유신ㆍ5공시대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권력을 탐하는 기회주의자들, 돈 보따리나 한 때의 지명도로 비례대표 또는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는 지역에서 공천받아 선량노릇을 하는 국회의원도 없지 않았다. 물론 반독재 투쟁에 몸 바쳐온 정통 야당인이 많았다.

김근태는 과거 두 차례에 걸쳐 정치인이 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1985년 2ㆍ12총선 당시 김영삼으로부터 종로구 출마 권유, 두 번째는 1991년 투옥 중일 때 김대중으로부터 신민당 부총재를 제의받았다. 김대중은 평민당에서 재야 인사들을 영입, 신민당으로 개편하면서 이우정ㆍ조세형 두 의원을 특사로 보내 입당을 제의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 다 운동진영 내부 조건이 성숙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근태가 정치참여 바꿔 말해서 야당에 입당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94년까지 ‘마지막 재야’로 남아 있던 그는 1995년 초 평민당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통합해서 새민주당을 결성하자 부총재 직함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민주세력의 집권을 위해서 참여한 것이다.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에 이어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통일운동에 전념해 온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집권 초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혁을 추진했던 김영삼 정부가 급속히 보수화하면서 국정운영의 난맥상을 보였다.

문민정부의 총체적 실패를 지켜보던 김대중은 그 대안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고, 6ㆍ27 지방자치 선거를 진두 지휘, 야당의 압승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회의는 8월 11일 신당발기인대회에 이어 9월 5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김근태는 김대중으로부터 신당 참여를 권유받았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실패로 자칫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게 되고, 남북관계는 전임 노태우 정부보다 훨씬 후퇴하고, 서민생계는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여기에 각종 대형참사까지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국정을 바로 잡을 대안세력이 요구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부총재로 영입되었다.
민주당이 이기택파와 반이기택파로 분열되어 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김근태는 김대중의 국민회의에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부총재에는 김근태를 비롯, 김영배ㆍ박상규ㆍ신낙균ㆍ유재건ㆍ이종찬ㆍ정대철ㆍ조세형이 각각 선출되었다. 대부분 현역 의원이다.

지도위원에는 권노갑ㆍ길승흠ㆍ김봉호ㆍ김상현ㆍ김태식ㆍ김희선ㆍ라종일ㆍ유준상ㆍ신순범ㆍ신용석ㆍ안동선ㆍ이용희ㆍ정영모ㆍ정희경ㆍ천용택ㆍ한광옥ㆍ허재영, 원내총무에는 신기하, 사무총장에는 조순형, 정책위의장에는 손세일, 지방자치위원장에는 장석화, 대변인에는 박지원이 각각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제1야당의 최고지도부에 진입하게 되었다. 48세, 정치인으로는 늦깍이었다.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제까지 걸어온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접어들었다.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다른 것 같지만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물론 내 개인적으로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을 동시에 다 갈수는 없지요. 나는 이제 네루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간디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함께할 생각입니다. 국민회의(재야 단체-필자)에서 김상근 목사님과 함세웅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저를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은 것도 간디의 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석 2)

김근태는 자신의 행로를 두고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리고 해방 뒤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홀홀단신으로 평양으로 떠나시던 김구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만일 그때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3)


주석
1> 조유식, <길 떠나는 김근태의 화두>, <월간 말>, 1995년 3월호, 113쪽.
2> 앞의 책, 114쪽.
3> 김근태, <기억에 관한 소고>, <희망은 힘이 세다>, 19쪽, 다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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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3년 7월초 미국 미시건대학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로버트 케네디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어진 수배와 투옥으로 남들이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 미국행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미시건대학은 초청장과 함께 여비 일체와 체류비까지 부담하여서 방미에 달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미시건대학에서 특별 강연을 하기로 하였다.

김근태는 7월 10일 미시건대학 대강단에서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주의의 전망>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청중의 질문도 받았다.

당시 국내정세는 김영삼이 취임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와 노태우 정권의 최대 의혹사건으로 떠오른 차세대전투기 도입 의혹 감사원 감사 등 개혁 드라이브로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김대중이 없는 민주당은 야당의 트레이드마크인 ‘개혁’을 정부 여당에 빼앗긴 채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위협받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연설문을 준비하였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이어서 맹목적인 반대나 비난을 위한 비난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러나 현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가식적인 것과 진실한 것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예리한 지성을 갖췄다. 이 연설문에서도 그런 부분을 찾게 된다.

 



김영삼 정권 수립 이후 특히 개개인의 시민은 상당히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더 이상 공포와 모욕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선거과정에서 찬성과 반대 어떤 쪽이었던 간에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여 이뤄진 결과로 수립된 정부이고, 민간 출신이 최고 권력자가 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여하튼 지난 시기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이제 그 고통스런 대결과 도덕적ㆍ정치적 책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대중적 분위기도 일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다”라는 지배적 언술의 반복과 일부 비판적인 운동그룹의 ‘지금은 진보적 수준을 향한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주장도 결과적으로 더 이상 민주주의 실현을 둘러싼 논쟁과 대결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들었다.
(주석 18)

김근태는 초기에 김영삼 정권의 실체를 벗겼다. 본질적으로 군사정권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아직도 감옥에는 많은 정치범이 있다. 지난 시기 절차적 민주주의를 난폭하게 유린했던 국가보안법은 개폐되지 않았으며, 최고 권력자는 앞으로도 계속 국보법을 유지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독소조항이 웅크리고 있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노동관계법도 그대로이다. 이렇게 볼 때 최소한의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부분적 자유화는 실현되고 있으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석 19)

 



김근태는 두 차례나 국보법과 집시법의 희생자이고, 원래 노동운동 출신이기에 노동관계법의 독소조항이 얼마나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을 옥죄이고 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같은 악법이 개폐되지 않고 있는 ‘문민정부’를 진정한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관해서도 예리한 메스를 가한다.

개혁이 지배적인 언술이 된 것은 김영삼 정권의 성립 이후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개혁’이라는 슬로건 속에는 시대정신이 관철되고 있는 측면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양측면은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요구로서의 진정한 ‘개혁’을 보다 힘차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으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상 그리고 힘의 관계로 볼 때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함축이 그 속에 담길텐데 과연 그럴까? ‘개혁’이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개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기보다 그것을 오히려 제한하고 망상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주석 20)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이처럼 예리하게 분석한 학자ㆍ언론인ㆍ야당정치인은 드물었다. 문민 정부의 개혁드라이브는 제도와 구조개혁이 아닌 현상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1년이 못가서 국회날치기, 남북갈등, 노동자탄압 등 ‘유사문민정부’ 로서의 허상을 드러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군부독재는 지역감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80년 이후 광주는 민주화 실현의 대장정에서 희생양이었고, 저항의 근거지였다. 호남에 적대하는 지역감정은 이제 민주주의 실현을 반대하는 악성의 퇴영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렇다면 이것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성과 양심 그리고 민주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까지 되고 있다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선언하는 이른바 ‘문민정부’를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주석 21)


주석
18> 김근태, <희망의 근거>, 23쪽.
19> 앞의 책, 23~24쪽.
20> 앞의
책, 25쪽.
21> 앞의 책,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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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관심은 재야민주세력을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과거 일부 재야인사들의 진보정당운동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제도정치권과 재야세력의 조직적인 연계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여러날 동안 준비 끝에 마침내 이를 위한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4년 4월 23일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의 18층 대강당, 400여 명의 재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최고지도부인 공동대표단에는 종교계 원로와 재야 원로 5명을 선출하였다. 가톨릭대표 김병상 신부, 개신교대표 김상근 목사, 법조계대표 한승헌 변호사, 재야여성대표 김희선 전국연합자주통일위원장, 불교계대표 조계종 개혁의 핵심인 지선 스님, 그리고 이 단체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근태가 각각 선임되었다. 김근태는 실질적인 상임대표였다. 대변인에는 천정배 변호사가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결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93년 김영삼 정권 수립 후 ‘민주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평가가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93년 상반기에는 ‘정치적 국민운동체’를 추진하지 못하다가, 7월 16일에 가서야 1백 30여 명 활동가들이 서울 꼼뺑뜨왈 수녀원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각 지역과 부문 활동가들인 이들이 토론해서 7월 말 ‘새정조’를 만들고 책임자 회의를 성립시켰다. 가능한한 많은 합의를 통해서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분화 발전하기 위해서였다.

8개월간 민주대연합에 동의하는 진영내에서 활발한 토론을 했지만 잘 안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운동의 침체와 자기 조직정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단결된 모습으로 전진하고 힘에 기초해야 할 재야운동은 폭넓은 합의와 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주로 제도정치권만 모색한다는 우려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94년 초반에 새정조는 15차 책임회의를 개최하고 4월 중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3월 12일 숭실대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해 4월 23일 결성대회를 갖기로 하고 운영규정, 사업계획, 추진일정 등을 정했다.
(주석 16)

 



‘국민연합’은 또 다른 재야 연합체인 ‘전국연합’을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자격으로 많은 명망가들이 참여했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문화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시인 고은과 김규동ㆍ신경림ㆍ문병란ㆍ도종환ㆍ신초혜, 소설가로는 천승세ㆍ조정래ㆍ윤정모ㆍ송영ㆍ김하기ㆍ정도상 등이 참여하고, 행사 당일 가수 신형원은 축가를 불렀다.

영화인 장신우 감독, 화가 홍성남, 만화가 이희재,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전대협 2기 의장 오영식, 전대협 4기 대변인 김재웅,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회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밖에 상당수의 의사와 중소상공인,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이 참여하여, 과거의 재야 단체와은 달리 폭넓은 광장이 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출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92년 대선 후 상황정리가 우선 필요했다.
첫째, 92년 국민회의는 대선패배로 무너졌고, 전국연합이나 기층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변화된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합의되지 않았다. 둘째, 평가결과 폭넓게 꾸리는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민중중심의 공감대를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셋째, 김영삼 정권이 민중의 기본권문제,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정리했다.
(주석 17)


주석
16> <월간 말>, <김근태와 국민회의 사람들>, 86쪽, 1994년 6월호
17> 앞의 책,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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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4 08:00 김삼웅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를 경청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김영삼의 당선으로 외형상 32년의 군부독재를 끝내고 문민시대가 열리는 듯 했지만, 김영삼의 노태우 정권 참여와 그를 둘러싼 수구세력의 면면으로 보아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근태의 고민은 깊어갔다.
하여 이를 대체하는 차기 집권세력의 형성을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김대중이 떠난 민주당은 지도력의 부족으로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김근태는 여러날 동안 생각 끝에 ‘정치적 국민운동론’을 제기하였다.

김근태는 1993년 5월 13일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구상과 전망>이란 주제를 발표했다. 그는 먼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민족민주운동의 대중적 영향력을 저하시켜온 주요 원인은 물론 탄압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답변은 충분치 않다. 우리는 주관적 열정주의로 말미암은 전술적 실패와 전략적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음 사항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 정세판단(87년 6월항쟁 이후 운동세력이 전략적 우위에 서 있다는 주장)의 착오
△ 관념적 급진주의(운동의 기본구도를 ‘진보 대 보수’로 과도하게 높이 설정)
△ 정치사업과 대중사업의 긴장된 통일을 구축하지 못함
△ 초기단계에 있는 대중운동의 자연발생성에 활동가들 굴복
△ 활동과 운동에서의 비대중성(의사개량화 국면에 걸맞는 운동의 변화 마비)
△ 분열
△ 조급한 독자정당과 독자후보전술의 좌절과 실패.
(주석 13)

김근태는 김영삼 정부가 내건 개혁과 신보수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 실패한 것을 뒤늦게 수입한 정책모방이라 단정하면서, 그럼에도 대중에 대해 상당한 설득력과 포섭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 재야운동 진영의 새로운 역할론을 폈다. 범민주세력의 연대를 위해서 그 방법론을 제시한다.

△ 민주 대 반민주의 대중적 대립구도는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
△ 통일운동의 핵심적 내용은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지대화 실현 그리고 군축의 진전이 되어야 한다 (변화된 정세 아래에서 통일운동 또한 당연히 변경되어야 한다. 남한 민주화의 전면화와 더불어 북한의 변화를 가능케 하여 상승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로 전진해야 한다)
△ 정세의 변화는 기동적 운동에서 진지적 운동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강제)하고 있다
△ 우리의 운동은 선거를 매개로 하는 활동과 투쟁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주석 14)

김근태는 정치활동을 보다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체계, 기민하고 신속한 방침의 결정과 대응이 가능한 구조, 구호적 수준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대안제시가 가능한 전문역량의 구축이 가능한 조직, 제도정치영역에 대한 개입과 집단적 진출이 가능한 조직, 김영삼 정권의 제도언론매체를 통한 여론형성에 대응이 가능하도록 광범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조직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김근태는 이론가이고 전략가다.
그동안 많은 단체를 이끌면서 익힌 체험에서 우러난 조직이론이다.
다음은 그가 구상하는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성격과 역할과 임무다.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성격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위상은 공개, 비제도권에 위치해야 한다.
한편으로 사적 영역으로 퇴각하고 있는 대중의 관심을 공적(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공개영역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 정치적 국민운동체는 그 자체가 독자정당이나 제도야당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위한 추진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제도권 영역에 존재하는 조직이다.

정치적 국민운동체는 대중조직의 주요 역량과 국민적 대표성을 갖는 인사, 재야 일선에서 운동해온 활동가,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한 전문가 역량, 양심적 종교인과 시민, 그리고 민주당내의 진보블록까지도 포함할수 있도록 그들을 확대해야 한다.

정치적 국민운동의 역할과 임무

첫째, 일반민주주의적 과제를 제기한다. ‘참여민주주의’를 통한 자주 민주 통일을 우리의 깃발로 내걸 필요가 있다.
둘째, 제반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통일적 방침을 신속히 수립해낸다.
셋째, 제도정치영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성공적이고 조직적인 진출을 준비함과 동시에 향후 실시될 각종 선거에서 민주대연합에 기초한 적절한 대응을 통해 지배세력의 집권 연장기도(내각제 개헌 등)를 막아내고 15대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도록 준비한다. 범국민적인 수권정당의 건설을 분명한 자기목표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
넷째,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될 미래의 상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주석 15)


주석
13> <월간 말>, 1993년 6월호.
14> 앞의 책, 56쪽.
15> 앞의 책,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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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chard Clayderman - Ballade pour Adeline

리차이드 클레이드먼 -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에 얽혀진 이야기.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자는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전쟁터에서 그는 불행하게도 그만
한 쪽 팔과 다리 한쪽을 잃는 큰 부상을 당합니다.

그런 불구의 모습으로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 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그는

그녀에게서 멀리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것만이 참으로 사랑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진실된 사랑의 표시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간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이 끊기자 그녀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멀리 떠나 있던 남자는 어느날 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망설이던 그는 결혼식이 열리는 교회로 향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아니 지금까지도 가슴 속 깊이 사랑하고 있는 그녀..
아드린느의 행복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꼭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그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두 팔도, 두 다리마저도 없는 남자가 휠체어에 의지해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가를...

그녀는 남자의 건강하고 완전한 육체만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돌아와 그녀를 위해 눈물을 쏟으며 오선지를 그렸습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원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프로듀서 겸 레이블 사장이었던 폴 드 세느비유(Paul de Senneville)가

1976년 새로 태어난 자신의 딸 "아드린느"를 위해 작곡한 작품입니다.

1977년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데뷔 앨범 [Ballade Pour Adeline]에 실려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방송되면서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앨범 또한 전세계적으로 2,200만 장이 넘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이 곡은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필리핀 TV 네트워크인 오래된 쇼(Show) 프로그램 "Lovingly Yours, Helen"에서

오프닝과 나레이션 테마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 후 1980년대 초에 프랑스 프럼펫 연주자 장 끌라우드 보렐리가
최초 원곡에 트럼펫 연주를 더하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99년에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이 기타 연주자 프란시스 고야와 함께 듀엣으로 연주하여

그들의 스튜디오 앨범 에 담아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 음반에서도 최초의 원곡이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최근 버전은 2007년에 발매된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앨범을 통해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오리지널 발매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음반입니다.


"리차드 클레이더만"은 이 새로운 버전에 올리비에 투생이 편곡한 새로운 현악 반주를 곁들였습니다.

 카시오가 만든 대다수 키보드에는 이 곡이 톤뱅크 형태의 데모곡으로 들어 있기도 합니다.

 (이상 위키백과 등 참조)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3 08:00 김삼웅

 

3당 대표회담에 앞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 정주영 국민당 대표와 함께 포즈를 취한 김대중 민주당 대표.

 

12월 19일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예상대로 김영삼이 유효표의 41.4%를 얻어 33.4%를 득표한 김대중을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주영 16.10%, 박찬종 6.3%, 이병호0.2%, 백기완 1%였다. 이번에도 정주영ㆍ박찬종ㆍ백기완 등 군소후보가 야권표를 갈라먹었다.
개표결과를 지켜본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당선 축하를 전하고 정계은퇴를 선언, 파란많았던 정치생애를 접었다. 그는 끝내 완고한 보수와 지역의 벽을 넘지 못했다. 김근태의 실망은 적지 않았다. 이번에도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데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대선이 끝난 뒤 김근태는 선거법위반 혐의로 검찰과 경찰에 두 차례 소환되었다. 그리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김근태는 진보 민주세력이 보수 야합세력에 패배한 데 대한 허탈과 좌절감은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근태 위원장은 선거 평가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선거 이후 심한 허탈감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왔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는 새로운 모색은 “쓰라림 속에서의 모색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하고 겸허하게 이 사태를 받아들이자. 섣부른 합리론으로 이 고통을 외면하려 한다면 더 큰 좌절을 만들 것이다.”

김근태는 대선 패배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심경을 밝히고, 이어서 패배의 이유를 진단한다.

표의 흐름과 결과를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국민대중의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부산기관장 대책회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지배집단의 도덕성과 정치적인 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망인가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국민은 표로 응징하지 않았다.

영남지역에서는 위기감을 조성하여 오히려 몰표를 가져오고 수도권은 이를 응징하지 않았다. 또 지배세력은 색깔론을 통해서 제기된 일정한 바람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의 이중성을 가진 중간층이나, 심지어 생활수준과 소비수준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기층민중의 동요를 일으키면서 안정희구심리를 도출해냈는데 이것도 참 어이가 없다. 아파트에서 지배세력의 몰표가 나왔다. 도대체 아파트 17평, 20평을 가진 사람들, 상대적으로 이야기해서 20~30평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때 자기들의 기득권에 부담과 손해가 올 것이 무엇이 있는가?
(주석 10)

‘남은 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기층민중에 한 없는 애정을 가져왔던 그가 제14대 대선의 결과를 두고는 “국민의 도덕적 판단이 마비되지 않았는가”하는 격한 분노를 터뜨렸다.

김근태는 하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민중에 대한 신뢰를 떨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패배의 원인을 냉정하게 성찰한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하나의 편향은 의사개량화 조치를 통해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대중 속에서 갖는 위력이 일정하게 삭감돼온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대응하지 못한 문제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기축적으로는 존재했으나 그것의 일정한 변화가 존재했다. 이것은 질의 변화는 아니고 양의 변화이다. 이 양의 변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본질은 변화가 없다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답변 이상을 제출하지 못하고 거기에 고착되었다. (주석 11)

 



김근태의 특장의 하나는 사안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이다. 여러 차례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정확하고 냉철한 분석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난 대선 이전에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에 정치세력의 교착이 발생한 상황에서 상당한 부분이 공적의사결정과정으로부터 퇴각해버렸다.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은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국제 사회의 일정한 변화, 국민 대중의 요구가 고조되었을 때 민주권력의 창출에 실패한 것의 결과라고 생각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는 것은 민족민주운동이 짊어져야할 자기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 그 중에서도 분열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특히 분열이 제도정치세력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놓고 발생했는데, 대중들은 그런 분열세력을 신뢰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석 12)


주석
10> 김근태, <민족민주운동의 활로는 무엇인가>, <월간 길>, 1993년 3월호, 66쪽.
11> 앞의 책과 같음.
12> 앞의 책, 6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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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2년 10월 재야 인사들과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다. 보수대연합 함대인 민자당은 5~6공의 모든 자원, 심지어 박정희의 유산까지 합동하여 정권재창출에 혈안이 되었다.

반면에 초라해진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을 내세워 혈투를 전개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 언론ㆍ검찰ㆍ관료ㆍ재벌이 총동원되고, 부산복집기관장회의 관권개입, 뒷날 드러났지만 재벌에서 3천억 원을 김영삼에게 지원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금권선거를 치렀다.

김근태는 1992년 9월 17일, <정세연구>지의 초청을 받고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방향>이란 주제의 대담을 가졌다. 대선 정국에서 이번에도 야권은 분열되고, 과거 학생운동 재야의 지도자급 인사중에는 민자당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는 재야 단체의 문제점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급진적 관념론과 세력관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하였다.

우리가 유리할 때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리한 시기로 반전되는 상황속에서 굉장히 많은 희생을 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공격할 때는 사상자가 별로 발생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공격할 때는 사기가 충천하고 대오를 갖추어서 공격하는 데 반해, 후퇴할 때는 오합지졸 상태로부터 시급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오를 제대로 갖춰내지 못한다면 사상자가 굉장히 많이 발생할 것이고, 후퇴하는 대오 속에서 지배세력의 공격 앞에서 동요하는 상황과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위기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주석 7)

어느 나라나 보수세력은 대단히 계략적인데 비해 진보세력은 단순한 편이다.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월 혁명, 10.26사태, 6월 항쟁 그리고 김대중ㆍ노무현 집권기가 그렇다. 유리한 국면에서 대비하지 않았다가 5.16쿠데타와 5.17변란, 6.29와 3당 야합 그리고 이명박의 민간파쇼를 불러왔다. 김근태는 이것을 우려한 것이다.

김근태는 대선 정국에서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단결을 위해 순회 강연 등 여러 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9월 10일 <월간 말>은 김근태와 장기표를 초청하여 긴급좌담을 열었다. 사회는 서강대교수 손학규가 맡았다. 다음은 “92년 대선에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자의 질문에 김근태의 답변이다.

92년 대선에서는 87년도 이루지 못한 단계적인 민주주의, 절차적인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남겨진 과제를 완수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권력의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에 상대적으로 매우 원만한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그런 조건 속에서 우리 민주화운동전선, 민주대연합이라는 구도 하에서 단결을 유지했던 부분이 향후에 일정한 분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의 오랜 동지 장기표는 김근태의 역할을 당부했다.

나는 김근태 위원장이 오랫동안 징역 살다가 나온 이 기회야말로 우리 민민운동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 강화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은 민중당을 했던 사람으로 분열에 중요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를 계속 고집하면 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양보하는 것이야말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김 위원장의 출소를 전후해 어떻게 함께 해 나가는 것이 좋겠는가 의견을 나눠본 바 있는데 대체로 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손잡고 같이 나가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1992년 11월 중순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 재단으로부터 여러 차례 방문을 요청받았지만, 짬을 내기 어려워서 미뤄왔던 터였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구속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발 갔다오라는 권유에 못 이겨 워싱턴으로 향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며칠인가 워싱턴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었는데, 돌아오면 또 공항에서 체포한다는 소식이 서울에 유포되고 있고 신문에도 그런 기미가 보도된다는 말을 국민회의 간부들이 전화로 알려왔다. 미국 국무부의 지원으로 근 보름 만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덕에 구속은 면했지만 시간은 거의 열흘 정도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31쪽.
8> <월간 말>, 1992년 10월호.
9> 김근태, <아직도 벗지못한 공안의 굴레>, <산민항승헌선생화갑기념논총>, 6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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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출소 직후 <월간 말>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해온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대연합론’을 개진하였다. 옥중에서 긴 날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야당의 일각까지 가세한, 수구세력을 깨는 데는 민주대연합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민주연합의 내용은 사회과학적으로는 기층민중과 중간 제계층, 그리고 민족적 입장의 자본가가 상호 동맹세력으로 재배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상적으로는 재야와 제도야권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운동의 현단계 전략적 목표인 자주ㆍ민주ㆍ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운동의 상호 대치선은 외세와 국내 지배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재야와 제도야권의 연합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대립으로 돼야 하며 이럴 때 어느 정도 승산 있는 싸움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야세력은 비제도권에서 자신의 본대를 꾸리고 이 본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일부가 제도권에 들어가 제도야당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이러한 민족민주세력의 의원단이 의회에서 민중적 대의를 널리 알리고, 대중운동을 엄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까지 주장해온 이른바 ‘제도야당의 민주연합당으로의 개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으로 민주연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민주연합당의 주도권은 역사적으로 형성돼온 제도야당의 지도부에 남아 있다. 따라서 재야는 비제도권에 공개정치 조직을 결성해 재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향후 민주연합당으로 개편되는 제도야당과 다시 연대하고 연합해 민주대연합의 완성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민주연합이란 선거과정뿐만 아니라 만일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질 경우 대중운동을 통해 국민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정치세력화’ 주장은 재야는 이미 역사적으로 정치세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도 불국하고 재야의 일부가 제도권내에 어떻게 자기의 교두보를 구축하는가의 문제를 정치세력화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실천적인 패배를 겪었다. 따라서 과거 “독자정당결성이 올바르냐 틀리냐, 지금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로 논쟁한 것은 전제부터가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주석 5)

김근태의 ‘민주대연합론’은 많은 재야인사와 진보적 정당세력에서 크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재야 중에서는 제도정치권의 참여를 사갈시하는 부류가 있었고, 제도권에서도 이들의 참여를 못마땅해 하는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더 멀리는 일제강점기에 친일 협력자들을 모체로 하여 인적ㆍ물적 기반을 구축해온 보수기득권 세력에 맞서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재야와 양심적 제도야당의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김근태는 혁명주의자이기보다는 개혁론자이다. 의회를 통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대연합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인터뷰 기자가 물었다.

“87년 김대중 씨를 지지했는데 지금은 통합민주당과 김대중 대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주당의 성격은 중간 제계층, 민족자본가 일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는 분단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출발했지만 지난 시기 지배세력의 일방적인 탄압 때문에 압박을 받아 반독재투쟁에 나섰고, 따라서 지배세력을 이탈한 국민들의 기대가 한때 제도야당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야권분열로 민주정부 수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중은 야당에 대한 실망이 재야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기대로 모아졌는데, 재야는 불행히도 전민련 시절 관념적 조급성으로 인해 선배운동가들을 분리시켜내고 운동을 내부의 분화를 분열로 처리해버리는 정치력의 빈곤을 증명해보이고 말았다.

결국 87년 대선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재야에 대해 국민들도 지지를 철회해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중이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을 철회하고 사적 이해관계의 축으로 옮겨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파시즘의 물적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광역선거 전후 나타난 무서운 침묵과 정치적 무관심은 유신 중후기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해 평민ㆍ민주당의 통합으로 일부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대선 승리의 묘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또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마지못해서 후보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 민주당의 김대중 대표는 이러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배세력이 조장한 지역패권주의에 의해 분열된 대중의 힘을 이끌어내려면 이런 교착국면에서 지도자의 도덕적인 결단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대중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승리하는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져 수권의 준비가 다 이루어졌다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선 대선승리를 위한 김대중 대표의 자기희생이 결국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주석 6)

김근태는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 김대중의 존재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도덕적 결단과 자기희생론”을 완곡한 표현으로 제기하였다. 향후 진로와 관련해서는 “민주대연합을 위해 동지들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다시 활동에 나섰다. 그의 위상은 이미 재야의 중진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론과 전략 그리고 투쟁 면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석
5> 김택수, 앞의 책, 48쪽.
6> 앞의 책,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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