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09 08:00 김삼웅

 

 

짙은 어둠이 깔린 1992년 2월 12일 0시 30분,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옥문이 열리고 2년 3개월 옥살이를 한 김근태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홍성교도소 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재근과 가족이 함께하였다.

김근태가 2년 실형선고를 받고도 3개월을 더 산 것은 이른바 ‘미결통산’을 제외한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의 철저한 보복이 자행된 것이다. 양심수의 경우 수형 일수가 줄어든 경우는 있어도 늘어난 일은 없었다.

환영객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빗속에서 더욱 비장감으로 들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서울ㆍ부산ㆍ광주ㆍ대구ㆍ청주에서 밤길을 달려온 선후배와 동료 150여 명이 그의 출소를 지켜보았다. 환영객 중에는 김병걸ㆍ고광석ㆍ지선ㆍ최민화ㆍ김희택ㆍ유기홍ㆍ장기표 등 재야의 동지와 장영달ㆍ이해찬ㆍ원혜영ㆍ신계륜 등 민주당 관계자, 손학규ㆍ정운찬 등 학계인사가 포함되었다. 특별 환영객 미국인 에드워드 베이커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중에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최민화 소장의 사회로 한밤중의 ‘김근태 석방 환영대회’가 열렸다. 교도소 당국은 그의 석방에 전국에서 민주인사들이 몰려 올 것을 우려하여 출감 시간을 꼭두 밤중을 택했지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빗속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김근태 선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민족의 품으로 돌아와 기쁘다.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말로 확실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기필코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란다. - 지선 스님.

너무 기뻐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우리 생애에 이처럼 감격스럽고, 또 이처럼 기쁜 날이 언제 있었겠는가. 김근태 선생이 지금 이 어둠의 벽을 박차고 나타났다. 함박웃음을 웃으며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뛰어오른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는 언제까지 이 어둠의 역사를 헤쳐가야 하는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해야 하는지 한없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항상 어둠 저편에 밝은 빛이 있으며 구름에 가려도 하늘은 늘 푸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김근태 선생과 더불어 민주화와 통일의 한 길로 나가자. - 소설가 김병걸.

자연인 김근태를 사랑하고 운동가 김근태를 존경하는 재외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우정을 전한다. 김근태를 따르는 모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 양심적 외국인까지 많이 있다. ‘김근태 석방위원회’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에드워드 베이커를 포함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쿠우모 뉴욕주지사, 투투 주교, 오갈 하벨, 그레고리 팩 등 전 세계 16개국 61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분들을 대신해 인사를 전하며, 김근태 씨의 민주화운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재미 언론인 신기섭.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이룰 수 있는 민주정부 수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 운동의 어려움은 김근태 동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김근태 동지의 석방을 기점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예비하자. - 장기표.

 


1990년 2월 11일, 28년 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린 넬슨 만델라를 환영하기 위해서 5만의 군중이 로벤섬 연안에 모였다. 그는 웃고 있었고 “자유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아무리 정적이라도 한밤중에 풀어주는 따위의 꼼수는 부리지 않았다.

김근태는 답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멈출 수가 없다”고, 여전히 자신에 찬 소신을 밝히고, 감옥에서 생각했던 소회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우리 운동에 고통을 가져다 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관념적인 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ㆍ동구의 붕괴 등 세계적 규모의 변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하게는 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전술상의 착오가 우리 운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본다. 나는 ‘남북합의서’ 의 발표를 전후해서 통일의 현실적 가능성이 높아지자 비교적 올바른 관점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통일 다 됐다”, “통일운동 끝났다”는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것은 지배세력이 통일의 실현가능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거나 지배세력이 통일의 가능성을 선동적으로 부추기는데 도취되어 비교적 실현가능성이 있는 통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통일의 궁극적인 이상형만을 제시해 그것에 이르는 아무런 전술적 대안도 없이 민중적 통일운동이라는 것에 경도되는 상황에 대해 경고하고 싶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진 인사말에서 “문익환ㆍ임수경ㆍ문규현 등 통일운동과 민주화ㆍ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분들을 남겨 둔 채 석방되어 이들에게 송구스럽다” 면서, 정부에 이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였다. 목이 메어 간간히 연설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는 옥중에서 더욱 단련되고 다듬어진 언어를 통해 출감소감을 밝혔다.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 김택수, <출소 인터뷰 김근태>, <월간 말>, 199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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